치리리링!
하늘에서 떨어지며 뽑은 주작검이 백사장을 막고 잇던 암연검마에로 쏟아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염화인의 위력이다. 암연검마, 비검맹 칠검마의 신분으로서도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었던 기세다. 경황 중에 검을 휘둘러 보았지만, 그렇게 휘두른 검으로는 마음먹고 내친 염화인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암연검마의 검이 튕겨 나간 것은 순간이었다.
황급히 검을 수습하여 반격을 해보려 했지만 청풍은 벌써 그를 지나쳐 버린 상태였다.
질주하는 화천작보다.
흘러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찢어발기고 나아가니, 순식간에 비검맹의 포위 벽이 가까워왔다. 달려가는 기세 그대로 몸을 비틀며 왼손으로 청룡검 검자루를 쥐었다.
터어어엉! 치리리링!
백 명이 넘는 무인들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금강호보 진각 소리가 천하를 위진하고 하늘을 향해 도약한 청풍의 양손에서 청과 홍 두 개의 광채가 휘황한 빛을 뿌렸다.
퀴유유웅! 퍼어어억!
무시무시한 기운을 품고 나아가는 금강탄 일격에 늘어서 있던 비검맹 무인 세 명의 가슴이 터져 나갔다.
뭉치며 달려드는 무인들이 몸통째로 튕겨 나간다.
전에 없이 과감한 손속, 살계(殺戒)를 연 청풍은 이미 두 신검의 화신 그 자체로 변해있었다. 뚫고 나아가는 검격에는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내치는 검결의 위력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 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퍼어억! 촤촤촤악!
금강탄과 백야참, 염화인이 연쇄적으로 뻗어나가며 엄청난 혈풍을 일으켰다. 굳은 얼굴에 두 눈빛만이 침중할 뿐이다. 스스로 뿜어내는 살기가 못마땅해도 어쩔 수가 없다. 벽이 뚫리고 길이 열렸다. 벽사장 모래가 그의 발길을 따라서 비산했다.
터텅! 파파파파파!
장쾌한 광경이었다.
일어나는 모래 바람과 갈라지는 비검맹 무인들을 보고 있자면 십만 대군을 홀로 돌파했다던 삼국시대 상산 조자룡이 떠오를 정도였다.
"막아! 막아라!"
"크억! 피해라!"
청풍 한 명의 질주로 인하여 백 명이 넘는 무인들 전 대형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를 막으려는 자들, 그를 피하려는 자들, 포위 대형을 수습하려는 자들, 모두가 얽히면서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퍼버벅! 채채채챙!
수십 명을 베고, 수십 명을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포위망을 돌파하여 백무한의 지척에 이른다. 목숨이 경각에 이른 백무한과 황천어옹, 그리고 그들을 공격하는 비검맹의 초절정고수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청풍은 거기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힘들이 부딪치는 한가운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위이이이잉! 파아아아!
가장 먼저 부딪친 상대는 싸움의 외측에 있던 풍도마존이었다. 풍도마존의 장대한 파풍도가 청풍의 중단을 휩쓸어 오고 있었다.
청풍은 달려가는 속도를 조금도 죽이지 않은 채 풍도마존의 일격을 맞이했다. 청룡검으로 용뢰섬을 뻗어내고 주작검으로는 금강탄을 내쏘았다. 격한 파공성이 주변을 가득 채우며 퍼져 나갔다.
치리리리링! 쩌어어엉!
노도와 같은 진기를 담고서 다가오던 파풍도가 청룡검의 용뢰섬에 막히며 미세한 흔들림을 보였다. 그 첨예한 힘의 흐름에 주작검의 금강탄이 작렬하니 풍도마존의 파풍도가 갈 곳을 잃은 채 그의 어깨너머로 튕겨 나갔다.
그것이 금강탄의 폭발력이었다. 지속적인 파괴력에 있어서는 염화인인 가장 강하겠지만 첫발 일격의 발출력에 있어서는 역시나 금강탄을 따라올 무공이 없었다.
"악!"
풍도마존의 파풍도를 단숨에 쳐내는 무력이다. 그의 누니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몸을 휘돌리며 파풍도를 수습하고 다음 일격을 대비했지만 이미 청풍은 거기에 없었다. 암연검마를 지나쳤을 때와 같다. 청풍의 목적은 오지 백무한의 구출일 뿐, 다른 고수와의 싸움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풍도마존까지 제쳐놓고 백무한과 황천어옹의 곁에 이르렀다. 주작검으로 한 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저 사람을 구해오시오! 아직 살아 있소!"
흰 고래 장백경을 말함이었다.
청풍의 쇄도, 그 압도적인 출현에 압도당한 황천어옹이 마력에 이끌리듯 청풍의 말을 따라 몸을 날렸다.
장백경을 향하여 몸을 박찬 황천어옹의 등으로 혈검존의 천인혈이 뒤따랐다.
'안되지, 그렇게는!'
천인혈을 막은 것은 청풍이었다.
횡으로 휘둘러진 청룡검이다. 백야참이 천인혈을 튕겨내고, 주작검 염화인이 혈검존의 전면을 휩쓸었다.
쩌저저저정!
한 번의 충돌이 있을 때마다 귀왕혈존의 몸이 한 발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을 죽이면서 혈기로 불타는 염화인이다. 그 누구도 감당키 힘든 위력을 내뿜고 있는 중, 귀왕혈존의 천인혈이 속수무책으로 튕겨 나가며 어지러운 광망을 흩뿌렸다.
귀왕혈존을 몰아 붙이며 나아가는 청풍, 그의 발이 결국 백무한이 서 있는 땅 위에 이르렀다.
"자네는........!"
암천을 가르는 한 줄기 유성처럼 나타났다.
기적을 일구어내는 그 이름.
위이잉. 치리리링.
청룡검이 용음을 토하고 주작검이 공명했다.
귀왕혈존과 회의사신을 눈 앞에 둔 청풍이 단호한 목소리를 발했다.
"은(恩)을 갚을 때요, 내가 길을 열겠소."
집법원에게 쫓기던 시절, 장강 지류에서 만났던 백무한이다.
재회의 순간, 그러나 이야기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말을 시작하며 청룡검을 내뻗고, 길을 열겠다며 주작검을 휘둘렀다. 말을 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펼치는 무공이다. 무신이 강림했다고 한다면 바로 지금의 청풍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의 기파는 말대로 무적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쐐액! 쐐애애액!
귀왕혈존의 천인혈과 회의사신의 사령검이 동시에 쏟아졌다.
무서운 검력을 피부로 느끼는 청풍,
그의 눈이 번쩍이는 빛을 내뿜었다. 십자로 교차되는 청룡검과 주작검이다. 빛살처럼 뻗어가는 힘, 한꺼번에 두 줄기의 금강탄을 뻗어내고 있었다.
퀴융! 퀴유우웅!
경이로운 검격이었다.
금강탄 두 발을 한번에 내쏜다. 놀라운 발상이었다.
금강탄은 본디 발검술의 연장, 발검술이라 함은 일격에 온 정신을 쏟아 앞으로 내치는 무도(武道)일진대, 두 개의 검을 한꺼번에 발출한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시도다. 자칫하면 힘의 충돌로 인해 파탄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 줄기의 금강탄은 서로를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래 그렇게 두 개의 검을 내치기로 만들어진 것처럼 하나하나의 기세가 광장할 따름이었다.
쩌엉! 쩌저엉!
천인혈과 사령검이 대번에 튕겨 나갔다.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청풍이 재빠르게 몸을 돌리며 백무한을 이끌었다.
"이쪽으로!"
숨 돌릴 틈이 없었다.
귀왕혈존과 회의사신이 순식간에 자세를 가다듬고 청풍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돌파했던 풍도마존도 청풍의 측면을 따라붙는 중이었으며 그 전에 지나쳤던 암연검마도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장백경을 쓰러뜨린 후 백무한을 노리던 철장마존 역시도 철장을 비껴든 채 땅을 박차고 있었다.
쩡! 쩌정! 쩌저정!
신기(神技)였다.
신들린 무공으로 앞서가는 백무한의 등을 보호한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힘을 이용하여 뒤쪽으로 몸을 날리는데 목신운형과 풍운룡보의 신비한 진결이 엿보이고 있었다. 몸을 날리는 두 사람의 옆으로 장백경을 들쳐 업은 황천어옹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분노한 비검맹 고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들을 노려왔지만 청풍의 두 자루 신검은 난공불락의 방어막을 전개하고 있었다. 기적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이쪽으로는 갈 수 없어!"
황천어옹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의 말대로 달려가는 앞쪽에는 배를 댈 만한 곳이 없었다. 높지 않은 절벽만 있을 뿐이다. 그 바깥은 오직 출렁이는 강물로 가득했다.
"그대로 가시오! 길이 생길 것이오!"
쩌어엉! 쩌정!
설명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귀왕혈검의 천인혈과 회의사신의 사령검은 무섭도록 강했다. 풍도마존의 파풍도는 형언할 수 없는 거력을 품고 있었으며 철장마존의 철장도 천 근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가장 약한 암연검마의 검격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매번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충격을 입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철벽의 무공을 뽐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안쪽으로는 기혈이 들끓고 있는 상황이었다.
파파파팍!
황천어옹의 신형이 만혼도 서쪽의 절벽 끝에 이르렀다.
길이 생길 것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길을 없었다. 날개를 단 새들이 아니고서야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그때였다.
촤아아악!
서쪽 바위를 돌아 시야에 들어오는 검은 선체(船體)가 있었다.
강물을 질주하는 무풍이다. 물살을 가르는 흑색의 철선(鐵船), 무풍의 뒤로는 몇 줄기씩 날아오르는 화살과 작살들이 있었다. 비검맹의 쾌속선단의 추격이었다. 무풍이 나타난 것처럼 서쪽 바위를 돌아나와 하나 둘씩 쫓아오는데, 화살뿐 아니라 작살과 석궁까지 수상병기들을 있는 대로 퍼붓는 중이었다.
그러나.
무풍의 위에는 배를 몰고 있는 류백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매한옥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십사수 매화검법을 완벽하게 펼쳐 보이며, 날아드는 사병기들을 모조리 쳐내고 있었다.
"맹주! 내가 왔소!"
가슴을 한번 두드리며 외치는 목소리가 절벽의 바위들을 타고 높이높이 울려 퍼졌다.
수로맹의 상징, 심장에 깃든 영혼이다.
절벽 끝에서 류백언을 내려다보는 백무한. 얼굴에 새겨진 검상들이 꿈틀대며 한가지 표정을 그려냈다.
'백언, 네놈이 배신 따위를 할 놈이 아니었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류백언이 아니고서야 이런 기적을 이루어 낼 사람이 없다. 아니, 이런 기적같은 일을 벌이지 못했을지라도 어떻게든 왔을 놈이다. 신뢰로 엮어진 사람들. 백무한의 강철같은 주먹이 자신의 가슴을 쳤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같은 심장, 같은 꿈이면 그것으로 족했다.
"뛰어내리시오! 금방 쫓아가겠소!"
청풍의 외침이 백무한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황천어옹이 먼저 장백경을 들쳐 메고 절벽 끝을 박찬다. 뛰어내리며 뒤를 돌아보는 백무한, 그의 눈에 청색과 홍색의 두 날개를 휘날리며 비검맹의 절대강자들을 막고 있는 잘풍같은 젊은이가 비쳐 들었다.
쩌정! 꽈쾅!
귀왕혈존의 천인혈이 튕겨나가고, 철장마존의 철장이 땅을 친다.
신룡을 생각나게 하는 몸놀림이었다. 빠르기 그지없는 회의사신의 사령검을 단숨에 피해내고 있다. 이어서 나아가는 일보에는 호왕(虎王)의 기세가 깃든다.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다.
검존 두 명과 직접 맞서보아서 알지만 이 싸움은 버틸 수가 없는 싸움이다. 그만한 괴물들을 한꺼번에 막는다는 것은 인간의 무공으로 불가능했다. 겉으로는 강력한 무공을 발휘하고 있어도 안으로는 큰 내상들을 입고 있을 터. 그럼에도 청풍은 길을 막고 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은(恩)을 갚기 위해서다. 백무한은 그 순간 하늘이 이어 놓은 놀라운 인연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파바바바박! 터엉!
떨어지던 황천어옹이 절벽 중턱을 박차고 속도를 줄였다. 백무한도 내려오던 기세 그대로 벽을 차며 무풍을 향해 몸을 날렸다.
촤아아악!
황천어옹의 신법도 대단했지만 백무한의 신법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정도였다. 내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 지친 육신으로도 날렵하게 배 위까지 오른다. 그것이 중원 무공의 총본산이라는 소림무공의 진수였다.
"잘 왔다. 덕분에 살았어."
백무한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강한 무게를 담고 있었다.
백천간두, 위급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도 진한 웃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류백언이 웃음 띤 얼굴로 노를 저어 절벽 쪽을 향해 배를 더 붙여갔다.
쩡! 쩌어엉!
위쪽, 절벽 끝에 몰린 청풍이 보였다.
굉장했다.
그곳에 그대로 서서.
끝까지 비검맹 고수들의 쇄도를 차단하는 중이다.
류백언이 감동을 일으킨 시발점이었다면, 이 청풍은 그 감동을 격동으로 치달아 올린 장본인이라 할 수 있을까.
검존이나 마존이나 일 대 일로 싸워도 생사를 걸어야 할 사대일 텐데 그런 자들을 넷이나 상대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용기백배, 사나이라면 피가 끓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쩌정! 쩌어어어엉!
한순간.
절벽 전체를 뒤흔드는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회의사신의 절기를 막아내는 소리였다. 회의사신의 장포 자락이 언뜻 보이고 있는데, 그 기세가 심사치 않았다. 백무한의 두 눈에 긴장감이 차 올랐다.
'강하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다. 위험해!'
백무한은 직감할 수 있었다.
청홍의 신검을 휘두르는 청풍은 무적에 가까운 무위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 무위는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전력을 다 쏟아 부은 정도가 아니다. 지닌 바 무공의 벽을 한참 뛰어넘은 상태로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그 누구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채애앵! 콰아아앙!
절벽 끝 바위가 부서지며 돌 가루가 튀었다. 철장마존 아니면 풍도마존의 무공일 것이다. 그 위를 바라보는 류백언의 두 눈에 다급함이 감돌았다.
당장 내려와야만 했다.
뒤로 따라붙는 비검맹의 쾌속정들이 까마득했다. 아직까지는 중소형 전선들 뿐이지만 대형 함선이라도 덮쳐 온다면 무풍으로서도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청풍을 버리고 갈 것인가.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 청풍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 포위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였다.
"먼저 가야 하오! 저 녀석은 따라올 수 있을 것이오, 이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소."
매한옥의 목소리였다.
단호한 말투, 그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옳다. 그들이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지금 속도를 줄여서는 안 된다. 절벽으로 너무 가까이 다가서서도 안 되었다. 벽에 붙으면 그만큼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둘러싸이기라도 하면 그때부턴 지옥 같은 혈로를 뚫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을 믿으시오!"
매한옥은 흔들림이 없었다. 신뢰와 믿음으로 맺어진 것은 수로맹 사내들만이 아니었다.
매한옥도 청풍을 믿었다. 거기서 빠져나올 것이라고.
청풍, 무적이다. 그 정도는 해줄 것이었다.
"어서! 속도를 내시오!'
매한옥이 한 번 더 외쳤다.
뱃머리를 돌리는 류백언이 이를 악물었다. 절벽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향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잡혀 죽는다면 그것만한 개죽음도 없었다.
"어쩔 수 없군! 가는 수밖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황천어옹의 것이었다.
장백경을 안전하게 내려놓은 황천어옹이다. 그가 무풍의 한 켠에 장비된 다른 쪽 철노를 비껴 들었다.
배를 저어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순식간에 절벽과 떨어지며 상당한 거리가 생겨났다. 백무한인 절벽 위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가 절벽을 따라 움직인다! 만혼도에서 벗어나지 마!"
류백언이 다시 한 번 방향을 틀었다.
절벽과 거리를 유지한 채로 물을 가른다.
청풍은 언제라도 뛰어내릴 수 있도록 그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날리는 중이다.
가장 적절할 때, 가장 제대로 거리를 벌렸을 때 날아오를 생각인 것 같았다.
쩡! 쩌정! 쇄애애액! 파라라라락!
부딪치는 탄력을 받아 뒤로 물러나는 청풍이다. 후퇴는 역시나 풍운룡보다. 후퇴 뒤의 반격은 금강호보와 화천작보다. 뒤를 향한다 싶으면 어느새 두 검을 교차시키며 염화인을 불사르고 있었다. 공격으로 방어를 대신한다. 먼저 치고 나아간 다음 공격을 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싸움 방식에 있어서는 이미 백전을 치른 노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쏴아아아아!
얼마나 더 갔을까. 갑자기 측면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비검맹의 대형 함선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백무한과 류백언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제길!"
이제는 정말 안 된다. 만혼도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류백언이 매한옥을 돌아보았다. 굳은 표정의 매한옥도 이번에는 말이 없다. 일시에 결단을 내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아슬아슬한 시점, 매한옥이 외쳤다.
"계속 가시오! 일단 함선의 추격을 벗어나고 봅시다!"
다시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멈추는 것은 안 된다. 무풍의 크기 때문이다.
무풍은 작았다.
중형 전선들과는 백병전을 유도하여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지만, 대형 함선의 중병 공격에는 버틸 수가 없었다. 따돌리고 앞서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함선의 공격 사정거리에서 완전히 비껴 나와야만 했다.
류백언이 방향을 바꾸고 얼마 안 있을 때다.
절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백무한이 두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멈춰라! 그가 뛰어내린다!"
청풍이었다.
귀왕혈존의 천인혈을 맞받으며 뒤로 물러나고, 곧바로 절벽 끝을 박차며 강물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멀고도 먼 거리, 헤엄쳐 오기엔 시간과 거리가 안 맞는다. 순간적인 판단, 백무한이 무풍의 선미로 몸을 날려 선미에 박혀 있는 화살들을 빼 들었다. 그야말로 찰나에 찰나를 쪼갠 시간이다. 내력을 모으는 백무한의 소맷자락이 부풀어 오르며 흔들렸다.
우우우우웅! 쐐애애애액!
던져내는 화살에 무상대능력의 진기가 깃든다. 날아가는 화살의 속도가 빛살과 도 같았다.
"하압!"
화살이 청풍의 지척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화살 하나를 더 던져 낸 백무한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손을 쫙 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화살이 청풍의 발 밑에서 멈추고 있었다. 상단전의 힘. 여기에도 또 있다. 멈추는 화살에 청풍의 발이 닿고, 화천작보의 구결이 펼쳐졌다.
터엉!
화살을 발로 차는데 땅을 밟는 것과 같은 진각음이 울려 퍼졌다.
청풍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한 쌍의 신검은 영웅이 가진 두 날개다. 허공을 나는 주작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쐐애애액!
백무한이 던진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바닥까지 끌어올린 무상대능력, 무리해서 움직이는 상단전의 힘에 백무한의 코에서 선혈이 쏟아졌다. 느려졌던 두 번째 화살을 밟은 청풍이다. 또 한 번의 도약 끝에 마침내 무풍의 위로 착지했다.
"쿨럭!"
하늘을 날아왔지만, 청풍의 상태는 가히 좋지 못했다.
백무한이 쏟아낸 선혈 위에 새로운 핏물이 겹쳐졌다.
피를 토하는 청풍이다. 비검맹의 괴물들과 싸우며 얻은 심각한 내상이었다.
촤아아아악!
청풍이 배에 올랐으니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류백언과 황천어옹이 저어내는 철노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장강 물살이 갈라지고 쭉쭉 뻗어나가는 무풍이다. 털썩 주저앉는 백무한, 그가 절벽 쪽을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쫓아오는군. 조금이라도 회복해 놔야 하겠어."
당연한 일이었다.
절벽 밑으로 몇 척의 쾌속선이 대어지고 있었다.
회색 장포, 회의사신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 하나뿐이 아니라 위에 있던 고수들이 모두 다 내려오고 있었다. 빠른 속도, 벌써부터 작게 보일 정도였지만 그 거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살기와 분노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괜찮나?"
뱃전에 몸을 기대며 넓은 소매로 코피를 닦아내는 백무한이다.
청풍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한 내산,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 정도 괴물들을 상대했는데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속도를 내 만혼도 근역을 거의 다 벗어났을 때였다 지치지 않는 힘으로 철노를 저어가던 류백언이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큰일입니다! 저것을 보십시오!"
"마령선(魔靈船)! 영검존까지!"
물길 저편으로 검푸른 전함 하나가 다가들고 있었다. 염검존 추혼마객(追魂魔客)이 이끄는 추혼선단의 기함, 마령선이다. 기동력과 화력에 있어 오검존의 기함들 중 첫 손가락에 꼽는다는 막강한 전함이었다.
"방향을 바꿉니다! 오른쪽으로 틀겠습니다!"
"알겠다!"
파아앙! 촤아아아악!
류백언이 배를 움직이는 것은 철노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천어옹과 함께 물살 위로 장력을 내치며 급선회를 시도했다. 혼신의 내력을 다하여 움직이는 쾌속선이다. 그러나 마령선의 시야는 넓고도 넓었으며 그들이 지닌 화포는 수군의 그것에 버금가는 사정거리를 자랑하고 있었다.
콰앙! 콰아아앙!
포격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발사하는 화포다. 뒤따르는 비검맹 쾌속선들이 뒤집히고 터져 나가는 데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관군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화포를 이렇게나 멋대로 쏘아댄다는 것,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 마선(魔船), 마령선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옵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출렁! 꽈앙! 푸화하하학!
발사된 포탄이 가까운 곳에 떨어져 폭발했다. 물기둥이 솟구쳐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강렬한 충격이 배 전체를 뒤흔들었다.
꽈앙! 꽈아아앙!
포격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위험했다. 당장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다.
제어가 되지 않음은 물론이요, 직격 당하지 않고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판이었다. 배의 속도는 이쪽이 빠를지 몰라도, 압도적인 화력 차가 그 속도의 이점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당하겠어!"
"아닙니다! 좌측에 장력을! 중심을 맞추어 주십시오!"
속수무책의 상황이다.
그럼에도 류백언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절묘한 항행이었다. 지척에서 폭발이 일어나도 뒤집히질 않았다.
'제기랄! 또 하나 보인다! 비검맹의 전함이야!"
황천어옹이 이를 갈며 외쳤다.
냉정하게 배를 몰던 류백언도 싸늘하게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다.
마령선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위협적인 규모였다. 깃발에 올려진 것은 회(灰)라는 한 글자다. 사검존 회의사신 산하의 점함이었다.
콰아아앙!
문제는 새로 나타난 전함뿐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이었다. 화탄의 폭발을 고스란히 받은 무풍 한 켠에서 감겨있던 쇠사슬이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받은 충격에 선체 전체가 삐걱거린다. 위험천만의 순간이었다.
"안 되겠다! 한계야!"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가면 이번에는 저쪽 전함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선다. 아니나 다를까, 전함의 측면으로 검게 빛나는 포구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발포할 기세였다.
"측면으로 댑니다. 부딪칠 수밖에 없어요! 백병전을 준비해 주십시오!"
마지막 선택이었다.
포신이 향하는 측면을 비껴가다 보면 직접적인 충돌을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이 선상 전투다. 배들의 움직임에 절대적인 제약을 받는 것이다.
촤악! 촤아악!
시선으로 움직이는 무풍이다. 사검존의 전함에서 포신을 틀고 있었지만, 포각(砲角)이 나오질 않았다.
화포는 피했지만, 들어온 거리가 너무 깊다.
적함의 갑판 위에서 도약하면 닿을 만한 거리까지 와버렸다. 비검맹 무인들의 얼굴 생김이 분간될 정도였다. 그 뒤로는 궁사들이 화살을 재고 있었다.
'제기랄! 이젠 끝이다. 백병전은 사실 의미가 없어!'
류백언은 떠오른 생각을 말할 수가 없었다.
전함, 화포, 화살. 다 좋다.
그것들은 어떻게든 막을 수 있다.
문제는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비검맹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에게 따라 잡히면 그야말로 끝이다.
여기서 전함과 부딪쳐 싸우다 보면 필연적으로 고수들과도 한바탕을 해야 했다.
무적의 무위를 보여준 청풍이 있다지만, 이번에는 아까와 같을 수가 없다. 피하면서 싸울 수가 없는 상황이다. 강 위에는 도망칠 곳이 없는 것이다.
류백언과 황천어옹의 얼굴에 비장한 빛이 감돌았다.
전함으로 질주하여 철노를 젓는 것이 마치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촤아아아아아악!
격하게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 규모의 선박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사검존의 전함이 시야를 가린 뒤쪽이었다.
'한 척 더라니........! 완전하게 막히는구나!'
또 하나의 전함, 활로가 더 틀어 막히고 있었다.
끝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빠르게 접근해 오는 전함에서,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충돌음이었다.
공격을 준비하던 전함이 무지막지하게 흔들리며 한쪽으로 기울었다.
전함과 전함의 충돌이었다.
항해의 실수는 당연히 아니다. 눈을 가늘게 좁힌 류백언이 적함 반대편에 솟아 있는 돛대를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저 깃발은 아라한! 아라한입니다!"
다가오고 있는 것은 적선이 아니었다. 수로맹 제일전함. 아라한이다.
무풍의 위험을 발견하고 선수째 전격적인 충돌을 감행한 것이다.
류백언이 철노를 휘어잡으며 왼쪽으로 물살을 제쳤다. 곧바로 방향을 바꾼다.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열세였을 텐데....... 강청천, 용케도 빠져 나왔구나!!"
황천어옹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열세라고 했지만 아라한이 맞닥뜨렸던 상황은 그저 세가 불리한 정도가 아니었다.
절망적인 상태였다. 얼마 남지 않은 백경무투대. 강청천을 아라한에 남기고 내려오면서 황천어옹은 그의 죽음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나와서 활로까지 열어주고 있다. 만혼군도, 절대사지에서 만난 두 번째 기적이었다.
촤아아악!
무풍이 적 전함의 앞을 스치고 앞서 나갔다.
아라한의 선체가 시야들 가득 채웠다.
적함의 측면에 선수를 박아놓은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곳곳이 파손된 선체는 마귀들과의 싸움에서 상처를 입은 산화 속 아라한의 육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두목님! 두목님이다!!"
"형님이!! 형님이 저기 계시다!"
"맹주님이 살아 계시다! 와아아아아!"
아라한에 타고 있던 백경무투대 대원들이 백무한을 발견하고 함성을 내질렀다. 두목, 형님, 맹주. 온갖 호칭이 난무했다.
가슴이 들끓는 광경이었다. 앞쪽에서 백경무투대를 지휘하던 강청천, 그가 아라한의 난간으로 달려왔다.
"맹주! 우리가 왔소이다! 여기는 우리가 맡을 테니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강청천이다.
독사검마에게 입은 상처로 온 얼굴에 붕대를 감아놓았다. 얼굴은 그래도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 무풍 위의 남자들을 훑어 류백언까지 이르렀다.
장강주유, 수로육손.
두 모략가의 눈이 부딪쳤다.
뜨거운 마음의 교차가 그 속에 있었다. 강청천이 웃음을 지었다.
"맹주를 잘 모셔라! 여기는 걱정 말고!"
여기서 적들을 막는다는 것.
얼마 남지도 않은 백경무투대 대원들로는 이 적함의 무인들을 상대하기 만도 벅찰 것이다. 목숨을 걸고 맹주를 사수한다. 누구나 같은 마음, 그런 만큼 가슴이 저려온다.
지금 이 적함까지는 막아도, 뒤따라오는 검존들 중 하나라도 그 위에 오르게 되면 강청천 일행은 전멸이다. 류백언이 소리쳤다.
"소선들을 먼저 준비하십시오. 언제라도 탈출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검존들이 오고 있어요!"
"소선? 탈출? 그런 것은 안 해!"
자신 있는 목소리였다.
류백언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서둘러! 이쪽은 어떻게든 될 것이다!"
평소의 강청천이 아니었다.
뭔가 확실한 것이 없고 서는 그런 식으로 말할 리가 없었다.
'죽을 생각인가........!'
아니었다.
그렇게 보기엔 강청천의 얼굴이 너무도 밝았다. 백경무투대 대원들도 마찬가지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은 맞지만 죽음을 각오했다기엔 생기가 넘치고 있었다.
'제기랄! 어찌 되었든 벗어날 수밖에!'
이곳은 강청천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다시 저어가는 철노다. 무풍이 줄였던 속도를 되돌렸다. 아라한을 스치고 적함의 선미를 돌아 나올 때.
꽈아아앙!
그 순간 들려오는 굉음이 있었다. 적함의 선미에서 들린 소리였다. 집중되는 시선, 적함의 한가운데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엄청난 속고, 무서운 기파가 전해져 왔다. 선미의 난간 한쪽이 박날나 터져 나오며 나뭇조각들을 비산시켰다.
강청천이 믿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빛나는 검이 거기 있었다.
그 검의 정체, 그것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청풍이었다.
청풍이 몸을 날려 무풍의 뒤쪽 끝에 섰다. 당장이라도 몸을 날릴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두 눈에 놀라움이 차 오르고 있었다.
'설마........!!'
터져 나오는 난간 사이로.
청풍 쪽을 바라보는 한 명의 장대한 남자가 있었다.
실제 체구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남자다.
번쩍이는 검, 더 강해진 기세. 시원한 웃음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흠검단주. 갈염이었다.
"누가 있어 거기를 뚫고 나왔나 했더니 너였구나! 역시나 대단하다! 곧 쫓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언젠가처럼.
엄청나게 커다란 목소리를 터뜨려 왔다.
장강 바람을 몰아쳐 전해오는 반가움이었다.
갈염으로서도 청풍의 출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일 것이다.
반가움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은 천운의 경이로움이었다. 청풍을 향해 외친 그가 잠시 동안 그를 내려보았다. 이내 몸을 돌리며 비검맹 무인들을 향하여 뛰어드니, 그것은 세차게 타오르는 웅심(雄心)이라. 갈염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한 무인의 그것이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