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무림서] 화산질풍검(華山疾風劍) 제 18 장 현무(玄武)
현무검(玄武劍)
현무신검(玄武神劍)은 북천(北天)을 나타내는 북방검(北方劍)으로 달리 진무신검(振武神劍)이라 불린다.
진무대제의 힘을 품은 강력한 군력의 상징으로서 고대 동방 제국 전쟁의 핵심이자, 왕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라 알려져 있다.
검신의 길이는 네 검 중 가장 짧은 일 척 칠 촌이지만 검폭이 십 촌에 이르도록 넓어 특이한 형태를 취한다. 검병은 진한 묵색이며 검날까지도 회흑색의 기이한 광채를 띈다. 귀갑(龜甲)처럼 주조된 검 받침이 검날을 타고 올라 있으며 검병 끝으로 늘어뜨리는 수실 대신 두 개의 금속 송곳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전체적인 재질은 다른 사방신검들과 마찬가지로 불명이며, 제작자 또한 알려진 바가 없다.
검을 얻는 자, 그 무엇도 범접하지 못할 전신(戰神)의 힘을 지니게 될 것이라 전해지며, 술가(術家)에서는 팔만 사천 귀병(鬼兵)들을 거느리는 진무의 마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이야기되고 있다……. 중략…….
한백무림서 병기편(兵器篇).
제 일장 검(劍) 中에서.
비검맹의 추적은 집요했다.
만혼군도를 완전히 벗어나 강심을 지나치고 반대편 강가까지 질주하는데, 엄청난 숫자의 선박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만한 속도로 도망치고 있으면 떨어져 나가는 배들도 있을 만한데 전혀 그 수가 줄지 않고 있다.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중, 그 규모는 가히 대선단이라 할 만했다.
"굉장하군! 목숨을 걸고 쫓아오는데!"
대단한 광경이었다.
단 한 척 흑선이 장강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뒤로 엄청난 숫자의 배들이 따라온다. 도저히 뿌리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배가 흔들린다. 이 이상의 속도는 안 돼!"
"알고 있습니다. 손상 정도가 너무 심합니다."
"근처에 군도(群島)가 없었던가?"
"업지요! 이대로 상륙해야 합니다!"
군도.
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접어들면 그곳을 누비면서 추격의 상당 부분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엔 만혼군도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섬들이 전혀 없었다. 다시 만혼군도로 돌아가든지, 류백언의 말처럼 상륙을 시도해야만 했다.
"상륙하여 도주하기 좋은 곳은?"
"생각해 둔 곳이 있습니다!"
그럴 것이다.
류백언은 대책 없이 어떤 방도를 말하는 자가 아니었다. 상륙을 이야기했다면 반드시 거기에 맞는 계획이 있을 남자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나마 한줄기 위안이 될 만한 일이었다.
"여기서 우측으로 갑니다! 저기 저 지류로 들어가겠습니다!"
한참을 더 왔을 때다.
류백언이 철노를 크게 튕기며 외쳤다.
들어가기 힘든 각도였다. 황천어옹이 눈을 빛내며 수면에 장력을 가했다. 철노는 류백언처럼 크게 휘둘러 물살을 쳐냈다.
"급선회합니다! 잡으십시오!"
크게 기울어져 꺾인다.
청풍이나 백무한이나 매한옥이나 그 정도로 중심을 잃을 사람들이 아니다. 경호성을 발한 것은 정신을 잃은 장백경 때문이었다. 백무한과 청풍이 장백경을 잡고 휘어지는 각도를 버텨냈다.
쏴아아아악!
순식간에 좁은 지류로 흘러 드는 무풍이다.
배 몇 척이 겨우 들락거릴 물길이었다. 강심을 건너 육지가 보이는 곳까지 온 것은 바로 이런 지류에 들어오기 위해서다. 류백언이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것으로 화포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습니다. 전함들은 더 이상 추격해 오지 못할 겁니다."
그랬다.
이 정도 폭이면 중형선으로도 들어오기가 버거웠다. 거대한 함선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추격의 반을 차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제는 고수들의 경공이겠지. 육지로 접어들었지 않나."
황천어옹의 지적은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하지만 류백언의 견해는 조금 달랐다. 무풍의 속도를 알고, 자신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었다.
"물론 문제는 문제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따돌릴 수 있습니다. 물길만 잘 타면 제아무리 경공이 빨라도 쫓아올 수 없어요."
물길의 속도.
청풍과 매한옥을 따라잡았던 것이 좋은 예다.
그들과 같은 거리, 같은 길로 달렸다면 결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으리라. 무풍은 다만 최단거리를 일직선으로 질주했을 뿐이다. 꺾이고 휘어지거나 오르고 내려가는 일 없이.
청풍과 매한옥이 길을 찾으며 복잡한 지형을 통과해 오는 동안, 무풍은 가장 빠른 수로를 한 길로 관통했다. 땅과 물, 육로와 수로에는 그렇게 확실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방심하지 마라, 백언. 검존들은 물길에도 밝다. 게다가 지금 무풍은 정상이 아니야."
류백언도 염두에 두고 있던 사실들이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비관적인 일은 되도록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이 모사요 군사였다. 사기를 위해서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군사의 역할이었다.
버릇이 나왔을 뿐이었다. 류백언은 결코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무한에게 달리 말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검존들은 항상 예측할 수 있는 범위, 그 바깥에 있어왔기 때문이었다. 방심하지 말라는 것, 그것은 몇 번을 들어도 부족하지 않은 충고였다.
촤아아악! 촤아악!
휘어지는 물길을 따라 몇 번 방향을 바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움직이는 데에도 적들의 추격은 끊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정예화가 되는 듯, 더욷더 바짝 쫓아오고 있다. 무풍이 제 속도를 못 내고 잇는 것도 한몫하고 있을 터, 계속되는 위험이다. 뒤를 돌아보며 적들을 확인했던 백무한이다. 그가 얼굴을 굳히며 침음성을 흘렸다.
"이놈들..... 백익선이 아직도 있었군."
쫓아오는 쾌속선들 가운데 백색 강목(剛木)으로 만들어진 날렵한 배가 눈에 띄었다.
오래 전 장강수로 백경채의 주력 쾌속선이었던 백익선(白翼船)이었다. 백경채가 무너지고 비검맹에게 넘어간 조선(造船)의 비법들, 그들이 타고 있는 무풍과 같은 기술로 만들어진 배였다. 백무한은 본래부터 이곳, 장강 출신인 바, 백익선, 그에게 있어서는 어린 추억과 슬픈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왼쪽, 왼쪽으로 붙으시오."
백무한의 상념을 깬 것은 청풍이 발한 경고였다. 청풍을 돌아보는 류백언과 황천어옹이다. 청풍이 두 신검의 검자루에 손을 올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존들이라 했소? 저쪽으로 그들 중 하나가 오고 있소."
청풍이 가리키는 곳은 후방이 아니라 측방이었다.
백무한의 눈에 결연함이 감돌았다.
겨우겨우 바닥부터 끌어올리기 시작하는 무상대능력, 고갈된 내력, 검존의 기척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다. 백무한에게는 싸울 힘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청풍, 그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적의 접근에 불타오르는 기도, 두 손에 잡힌 신검이 무서운 기세를 흘려대고 있다.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촤아아악!
꺾여지는 물살. 오른쪽에 합류하는 지류로 새롭게 따라붙는 쾌속선이 있었다.
백익선이 아닌데도 굉장히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회색으로 칠해진 선체가 한 자루 살검(殺劍)을 떠올리게 했다.
"회의사신!!"
펄럭이는 회의 장포가 두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사신의 이름, 무정한 회색이다. 백무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첫 상대가 이놈이라니!'
직접 상대해 본 만큼, 검존들의 무위를 잘 알고 잇다. 회의사신은 그들 중에서도 발군이다. 귀왕혈존도 엄청나게 강했지만, 회의사신은 또 달랐다. 종전의 싸움에서도 백무한이 상처를 입었던 것은 대부분 귀왕혈존이 아니라 이 회의사신 때문이었다. 비검맹주 휘하, 육극신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자라 일컬어지는 고수가 바로 그였다.
"끈질기군. 이만 죽어줘야겠어."
회의사신의 음성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물소리와 바람소리 거센 가운데에서도 확연하게 들려온다. 유부(幽府)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불길한 기운이 넘치고 있었다.
"그렇게는 안 돼. 죽는 것은 네놈이다."
무풍의 선미에 버텨 선 청풍의 대답은 그러했다.
청풍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말.
창대한 기세를 일으키며 무서운 살기를 일으킨다. 회의사신의 살기가 칙칙한 어둠이라면, 청풍의 살기는 타오르는 불일진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청풍의 발이 난간을 박찼다.
터어어어엉!
무풍의 위에서 싸울 수는 없다. 회의사신이 넘어오기 전에 청풍이 먼저 공격한다.
백호의 기상과 청룡의 심지, 주작의 열기가 그 한 몸에 있었다.
뱃전을 박차는 밑으로 장강 급류의 물살이 붉게 부서졌다.
화천작보. 하늘을 가르는 주작이다. 그것을 맞받는 회의사신의 사령검이 음험한 이빨을 드러냈다.
쩌엉! 파라라라락!
강렬한 충돌음.
바람에 펄럭이는 장포가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밤이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이미 그의 주위에는 한밤중의 어둠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둠을 향해 뻗어나가는 주작검이다. 회의사신이 그 검격을 가볍게 피해내며 반격을 해왔다. 목을 갈라오는 일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쩌어어엉!
청룡검을 뽑을 새도 없었다. 용갑째로 치켜 올려 쳐들어오는 사령검을 차단해 냈다.
은밀하고 빠르기에 가벼운 검격으로 보이지만 그 충격은 말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겉보기와는 전혀 다르다. 기쾌한 검공 속에 천 근의 경력이 실려 있었다.
선제공격을 가했지만, 도리어 이쪽이 불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서운 자, 청풍이 느끼는 것은 백무한이 느낀 것과 똑같았다.
청풍이 맞닥뜨렸던 검존들과 마존들, 그리고 한 명의 검마.
이 회의사신은 그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공을 지닌 것이다. 한 명이라고 쉽게 생각했다가는 반드시 죽는다.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였다가는 곧바로 목숨까지 내주어야 할 자였다.
치리리링!
경각심과 투지를 한꺼번에 불태우는 청풍이다.
검을 부딪친 여력을 빌려 회색의 쾌속선 위에 내려섰다. 내려서기 무섭게 금강호보의 진각을 펼쳐 냈다.
터어엉! 치리링!
빛살처럼 내쳐 가는 금강탄이다.
당장이라도 회의사신의 가슴을 꿰뚫어 버릴 기세였다. 막강한 경력이 주변 공기를 찢어발기며 뻗어나갔다.
퀴유우우웅! 촤아악!
발검의 폭발력이 무적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지만, 주작검이 뚫어놓은 것은 불행히도 회의사신의 장포 자락뿐이었다.
회의사신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검을 전개하면서 방위를 바꾸는데, 마치 하늘을 떠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다섯 번의 검격을 쳐내는 동안 배 위에 발이 닿은 것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려섰던 것도 워낙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라 마치 공중을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일 대 일로 싸울 때 비로소 진가를 드러내는 신법, 여럿이 뒤얽혀 덤빌 때보다 더 강한 상대였다.
'신법보다 무서운 것은 검이다. 검격을 허용해선 안 돼."
우웅! 위이이이잉! 쩌정!
신법도 대단했지만, 사령검은 그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사령검, 그 검 주변에는 죽은 자의 망혼들이 맴돌고 있기라도 하는지, 불길한 기운이 물씬 전해오고 있었다. 일검이라도 맞는다면 그 불길한 기운이 온 몸에 통째로 흘러 들어 올 것만 같다. 벽사와 파마의 공능이 깃든 두 신검이 아니었다면 받아내는 것 자체가 꺼려질 정도였다. 과연 사검존(死劍尊), 죽음의 검존이라는 칭호가 무색했다.
쩌엉! 쩌저저저정!
무풍을 쫓고 있는 그 속도 그대로.
좁은 배 위에서 두 고수의 검격이 미친 듯 얽혀 들었다.
근접 거리의 싸움이었지만, 이미 상승으로 접어든 그들의 무공에 있어 그 정도는 문제도리 것이 없었다. 누구의 무공이 더 깊은가, 누구의 무공이 더 강한가 만이 있을 뿐이었다.
빠르게 교차되는 공방이 이십 합을 넘어가고 있었다.
주작검 염화인 터져 나오고, 회의사신의 사령검이 요동을 쳤다.
종이 한 장 차이의 검격들이다. 내력의 부딪침이 일궈내는 충격파가 나아가는 물길 앞에 커다란 파문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진기가 흔들린다. 내상이 심해지고 있어. 막기가 힘들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하진기다.
하지만 그런 자하진기에도 한계는 있다, 이미 입은 내상에 끊이지 않고 침투해 오는 음험한 내력이 문제였다. 기혈이 들끓고 투로가 무너져 간다. 황급히 목신운형, 청룡목기를 끌어올리며 회복을 도모해 보았지만, 이미 그의 내상은 그 정도로 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방어가 모자란다. 그럴 바엔 공격을 더하는 수밖에 없다. 속전속결이다. 빨리 끝내야 해!"
방어력이 절실했다. 절실한데 보충할 수 없다면 다른 길을 찾는 것이 해답이다.
여태까지 방어에 쓰고 있었던 청룡검을 앞으로 비껴 들었다.
청룡, 주작 모두 다 공격에 쓴다.
용뢰섬 대신 백야참을 휘두르고, 이어 주작검 금강탄을 내쳤다.
파아아아! 쩌엉! 쩌어어엉!
청풍의 무공이 공격 일변도로 급변했다.
마주하는 회의사신.
두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빨리 끝내려는 청풍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사령검을 되돌리며 전면을 차단하고 방어를 굳혀낸다. 흐름을 빼앗으면서 손속을 어지럽히는 한 수였다.
'이쪽의 상태를 알아챘군. 그렇다면........'
회의사신의 빠른 대응에도 청풍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당연했다. 회의사신은 백전의 상승고수였으니까.
'그 방어, 그대로 뚫어주마.'
청풍의 선택은 명쾌했다.
금강탄과 염화인을 쳐낸 후, 진기를 열어 백호무를 발동했다.
붉은 날개와 푸른 뿔을 지닌 백호다.
백호출세, 백호탐천의 웅혼한 기세가 회의사신의 정면으로 쏟아졌다.
콰콰콰콰! 콰아아앙!
이 정도의 거센 무공은 천하 어디에서도 만나보기 힘들다. 이어지는 백호금광, 무시무시한 경력이 쾌속정 전체를 몰아쳤다.
"으악!"
선미에서 쾌속정을 움직이던 비검맹 무인이 그 여파에 휩쓸려 물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선체 한쪽이 터져나가고 단단한 나뭇조각이 산산 조각나며 바람에 날아갔다.
요동치는 쾌속선이다.
뒷걸음치는 회의사신의 어깨와 허리 부근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장포가 흉맹한 기운을 더했다.
방어를 굳힌다고 쉽게 이기기는 글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상이 심해진다고 한들, 방어만으로 버티기엔 청풍이 지나치게 강했다.
회의사신이 사령검을 치켜 올리며 기이한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무공의 전개를 위한 구결이다. 마치 주술을 위한 주문과도 같았다. 그만큼 사기를 불러일으키는 목적, 공명하는 사령검이 기묘한 진동음을 울렸다.
위이잉! 우우우웅!
청풍이 진신진력을 다한 것처럼 회의사신도 전력을 다한다.
제멋대로 흔들리는 쾌속정, 부서지는 붉은색 물방울 속에서, 두 사람의 공력이 마지막 극점을 향하여 치솟고 있었다.
퍼서석! 꽈아앙!
쾌속선 선미가 통째로 부서져 날아갔다. 물기둥이 솟구치고 바람이 찢겨졌다.
상승의 영역, 느려지는 시야다.
회의사신의 사령만천세.
막을 수 없는 경력을 품은 채, 청풍의 가슴으로 쏟아져 왔다.
'피할 수 없다!'
죽음의 무공, 사령만천세에는 회의사신 그 자신의 죽음까지 걸려 있는 듯했다. 반격 따위는 생각조차 안 한다. 느려지는 시야 속에서 사령검 하나만이 홀로 빠른 것 같았다.
"하압!"
기합성을 내지르며 청룡검을 아래에서 위로 뻗어 올렸다.
청룡결 청룡승천이었다.
짓쳐 들어오는 사령검이 청룡승천에 얽혀 들었다. 멈추지 않는다. 흔들려 궤도가 어긋나지만 결국 청룡검의 방어를 깨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내줘야 해!'
우지직, 푸우욱!
오른쪽 가슴이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늑골이 부서지고 폐가 꿰 뚫렸다. 사령검이 가슴을 관통하여 등까지 뚫고 나왔다. 고통이 밀려왔다.
'버틴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텨내는 청풍이다. 턱까지 막히는 숨, 한쪽 폐에서만 올라오는 공기로 장렬한 기합성을 터뜨렸다.
푸하하학!
주작검, 염화인이었다.
사선으로 베어 올려 내려치는 검격이다. 회의사신의 가슴에서 엄청난 양의 핏줄기가 솟구쳤다. 비틀거리는 몸, 회의사신의 손이 사령검에서 떨어져 나왔다. 가슴을 부여잡는데 손가락 사이로 쏟아지는 핏물이 살벌할 정도였다.
"네놈! 어디의 누구인가."
선체가 망가지고 선미가 터져 나간 배 위다. 발목까지 차 오른 물, 거기로 떨어지는 핏방울이 붉은색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청풍. 화산의 청풍이다."
청풍의 회의사신을 직시하며 말했다. 언제나 낭랑했던 목소리에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가 섞여 있다. 사령검을 오른 가슴에 꽂아놓은 채였다.
"화산에 이런 놈이 있었다니.....!"
배가 가라앉는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물, 회의사신이 피로 얼룩진 손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렸다.
"죽지 말고 살아나가라. 네놈의 목숨은 내가 거두어가겠다."
화아악! 퍼어엉!
아래로 내쳐진 손바닥이다.
회의사신의 장력이 수면을 때리고 쾌속선의 바닥을 박살냈다. 부서지는 파편들 사이로 찢어진 장포를 휘날리며 날아간다.
물러나는 회의사신이었다. 쫓아가 죽일 수도 있겠지만 백무한을 따라잡으려면 그렇게 추격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완전히 망가져 버린 쾌속선의 선수를 박차고 강변을 향해 몸을 날렸다.
터벅.
가슴을 관통하여 꽂혀있는 사령검의 감촉이 끔찍했다. 땅에 내려서는 충격만으로도 무지막지한 고통이 솟아올랐다.
청룡검을 용갑에 밀어 넣고, 오른손을 올려 사령검의 검자를 쥐었다. 자하진기를 도인하여 백호금기를 유도했다. 폐장(肺腸)에 모이는 금기, 폐를 보호하려는 의도다. 이를 악물고 사령검을 쭉 뽑아냈다.
"커허.......!"
가슴 안쪽에서 바람 빠진 폐가 오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고약한 기분이었다. 모아두었던 금기를 밀어 넣고 가슴 가득 공기를 들이켰다.
'안 돼. 완전히 펴지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무공은 무공이고 신체는 신체다.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치료를 바라는 것은 무리인 바, 손상 받아 제대로 쓰지 못할 바엔 차라리 한쪽만을 쓰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금기를 운용하여 상처 받은 폐장을 막았다. 한쪽 폐장만으로 호흡하는 것이다. 뽑아 든 사령검을 한 번 내려다보고 강물을 향해 내던졌다. 불길한 물건, 가지고 다닐 만한 검이 아니었다.
'시간을 너무 끌었어. 서둘러야 한다.'
물길 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을 날리는 청풍, 그의 눈에 의아함이 떠오른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싸움으로 한참 지체된 길, 까마득히 멀리 있어야 할 무풍이다.
한데, 아직도 가깝게 보인다.
청풍을 기다리기 위해 속도를 늦춘 것이 틀림없었다.
쐐애애액!
청풍의 신형이 더 빨라졌다.
가까워지는 무풍이다. 언덕을 넘어 강둑을 질주하니 시야가 활짝 트인다.
속도를 줄인 무풍, 그 뒤로는 완전히 따라붙은 적선만도 열 척이 넘었다.
'매 사형!'
무풍의 선미.
배를 가깝게 접근시켜 날아드는 비검맹 무인들이 있었다.
그들을 막는 것은 한 자루 장검이었다.
매한옥이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이 선미의 첨봉에서 절묘한 검공을 펼쳐 개고 있었다.
"그가 온다! 속도를 올려!"
달려오는 청풍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황천어옹이었다.
워낙에 날아드는 적들이 많은 상황, 매한옥이 놓친 자들을 황천어옹이 직접 철노를 휘둘러 막아내고 있었다,.
온전히 배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류백언 혼자뿐이다. 황천어옹의 외침에 류백언이 팔을 휘두르며 저어가는 철노의 속도를 올려갔다.
쐐애애애액!
무풍이 나아가는 것에 맞춰 청풍도 화천작보의 전개를 한층 더 빨리했다.
무풍과 일직선으로 달리게 된 상황.
청풍의 눈이 강변과 무풍의 거리를 가늠했다.
'멀다. 한 번에는 안 되겠어."
화천작보의 도약력이 아무리 좋아도 무풍과 거리는 한 번에 뛰어 넘을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나 있었다. 한 번에 안 된다면, 여러 번에 나눠서 하면 된다. 징검다리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터어엉!
질주하는 속도 그대로 지면을 박찼다. 날아올라 떨어지는 곳, 비검맹의 쾌속선 위였다. 비검맹의 쾌속선들을 징검다리로 삼는다. 쾌속선에 내려서기 무섭게 주작검을 뽑아내며 염화인을 전개했다.
"크악!"
"뭐, 뭐냐!"
비검맹 무인 세 명이 한꺼번에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엄청난 기세였다. 쾌속선 난간을 박차고 측면의 적선으로 건너뛰는데, 온 세상을 덮을 듯한 기상이 우러나왔다. 그것에 압도당하는 비검맹 무인들, 추격해 오는 무리들 전체에서 커다란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저, 저놈!! 아까 그 놈이다!"
"검존께서 나서셨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콰아아앙! 터엉! 콰지직!
경악은 경악일 뿐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경호성을 터뜨리는 것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선체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있었다.
무인들이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는 사이 벌써 세 번째 쾌속선을 뛰어 넘고 있었다.
내려선 배 위의 무인들을 물리칠 뿐 아니라 넘나드는 쾌속선의 선체까지 박살내고 있었다. 밀집하여 추격해 오던 대형이 순식간에 엉망으로 망가졌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한 사람의 무인이 아니라 거대한 전함이 들이닥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터어어엉!
다섯 척의 적선을 부숴 버리고 삼십 명에 달하는 무인들을 물속에 빠뜨렸다. 마지막 적선을 박차고 올라 무풍에 착지한다. 무너져 버린 추격 대형이다. 지척에서 무풍을 공격하던 적선들은 이미 한 척도 남아 있질 않았다.
"화려하게 해치우는군. 대단해."
매한옥의 음성엔 진심 어린 감탄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청풍은 거기에 제대로 화답해 줄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회색 장포 놈, 죽이지 못했어요."
가슴속에 가득 찬 탁기, 숨을 뱉어내는 청풍의 입에서 일순간 피 거품이 쏟아져 나왔다.
내상의 중첩, 감당하기 힘든 상처까지 입었다.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그의 내부는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쿨럭, 쿨럭, 카악!"
도대체 몇 번이나 피를 토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숨을 돌리고 가슴을 펴는데 미칠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백호기와 청룡기가 요동친다. 새로 얻은 주작기는 아예 통제하기 힘들 정도다. 어떻게든 이어지고 있는 자하진기가 아니었다면 청풍의 생명은 예전에 끝나 버렸으리라.
"그 토혈(吐血), 어디를 어떻게 다친 것이냐."
굳은 얼굴.
매한옥의 눈이 선상에 쏟아져 있는 핏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거품이 섞여 있다.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가슴을 관통 당했습니다. 그 놈. 무지막지하게 강하더군요."
주작검과 청룡검을 검집으로 되돌리고는 윗옷을 벗어냈다. 오른쪽 가슴 한가운데에 세 치 가량의 기다란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등도 마찬가지였다. 격한 움직임으로 벌려진 상처에서 검붉은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금창약이든 뭐든 처리를 좀 해주십시오. 급합니다. 또 오고 있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눈을 감았다. 운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벌써부터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모습니다.
"이 녀석.....!"
완전히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다.
신들렸다는 표현밖에 형언할 길이 없다.
황천어옹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둘렀고 류백언은 숫제 질린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무상대능력을 끌어올리며 운공을 준비하던 백무한마저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금창약을 뿌리고 붕대를 감은 지 얼마 지니지도 않았을 때였다.
청풍은 다시금 검자루에 손을 올리며 두 눈을 떴다. 선미에 버텨 선 청풍, 그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빠르군요. 경공으로 쫓아오는 모양입니다."
'그것도.... 두 명이나.'
기운을 느끼는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고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육신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지고 있었다.
'정신..... 상단전, 공명결!'
모르는 새 움직이고 있었던 공명결이다. 신지가 열리고 혼의 힘이 발산되고 있다. 솟구치는 영감,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경지였다.
"온다. 철장마존이로군!"
황천어옹이 뒤를 보며 외쳤다.
갈대밭을 뚫고 달려오는 봉두난발의 괴인이 보인다. 한 손에는 굵디굵은 쇠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만혼도에서 몇 번이나 부딪쳐 본 자였다. 이자 역시 엄청난 고수다. 회의사신보다는 못하지만 그 차이라고 해 보았자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저자 하나가 아니오! 한 명이 더 있소!"
청풍의 외침에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직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철장마존의 뒤쪽으로 다른 고수의 접근이 느껴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기세, 뭐든지 휩쓸어 버릴 듯한 패기가 전해져 왔다.
'이 기운.......! 파풍도... 그자다!'
파풍도를 내쳐 오던 중년 남자가 떠올랐다. 이름은 모르는 자다. 풍도마존이라고 얼핏 들은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하지가 않았다.
'두 명...... 힘들겠군.'
청풍의 눈에 불굴의 기세가 일어나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 상태,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있어 승산이란 거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두렵지 않고, 꺾이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선미의 난간에 발을 올리고 나아갈 준비를 끝마쳤다. 막 뛰쳐나갈 찰나다. 배를 몰던 류백언의 외침에 청풍의 고개가 앞쪽으로 돌아갔다.
"잠깐! 잠시만 기다리시오!"
타오르는 눈이 류백언을 직시했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뻗어나가는 엄청난 기파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 류백언이 숨을 들이키며 침을 삼키고는 다급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조금만 더 가면 집결지요! 거기서 싸우는 것이 더 수월할 것이오!"
꺾어지는 물길 따라 또 한쪽의 지류로 나아간다.
흘러 흘러 세 줄기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 넓디넓은 장강 본류가 다시금 가까이 오고 있었다.
"집결지?!"
류백언의 말에 질문을 더한 것은 청풍이 아니라 황천어옹이었다. 황천어옹으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기색, 세차게 노를 젓고 있는 류백언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냈다.
"그들이 모여 있습니다. 누군지는.... 보시면 아실 겁니다."
"뜸 들이지 말고 그냥 말해!"
"뜸 들이고 말 것도 없습니다. 다 왔으니까요."
류백언이 손을 들어 앞쪽 먼 곳을 가리켰다.
강가에 솟아 있는 언덕을 돌아 나오니, 언덕 너머 커다란 선착장이 드러난다.
장강 본류 낙도진(落道津)이었다.
황천어옹의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저것은!!"
수많은 배들이 낙도진 선착장에 모여들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이십 척이 넘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하나같이 수로맹의 배라는 사실이었다.
"철갑교(鐵甲鮫)!! 살아 있었구나!! 대패하여 흩어졌다고 들었는데!"
황천어옹의 시선은 그 선단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전함에 고정되어 있었다.
돛대에 펄럭이는 깃발,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청색의 철갑상어였다.
양강 물길의 철갑상어, 곽철교(郭鐵鮫)가 이끄는 철갑선단이었다.
"그 곽철교입니다. 죽었을 리가 없죠. 손실이 좀 컸을 뿐..... 그래도 방벽으로는 충분할 겁니다."
철갑상어의 철갑선단은 본래 세 척의 전함과 오십 척의 전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반도 남지 않았다면 대패라는 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러한 패전선도 천군만마에 다름없었다.
더욱이 철갑선단 이십 척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결코 적은 병력이 아닌 까닭이다. 잘만 된다면 쫓아오는 적들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적의 추격을 상당 부분 묶어놓을 수가 있었다.
촤아악! 쏴아아아!
청풍 일행을 발견한 철갑선단이다. 그들의 전선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풍의 뒤를 쫓아오는 쾌속선들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장강 본류 큰 물길을 따라 추격해 오고 있을 다른 적선들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늦었소. 이쪽은 먼저 싸워야겠소."
청풍의 음성이었다. 지원 병력을 만났다지만 세상 일이란 게 어디 뜻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던가.
두 명의 마존들이 무풍의 속도를 따라잡아 지척까지 이르고 있었다.
철장마존은 강변의 갈대밭을 무풍과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었고, 파풍도 풍도마존 역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와 있다. 당장이라도 강물을 건너 넘어올 판이었다. 류백언이 물살을 헤치며 무풍을 최대한 강가와 멀리 떨어뜨렸다.
"풍도마존까지 왔다면 혼자는 힘들어, 내가 나서지."
황천어옹이 철노를 놓고 청풍의 옆으로 다가왔다.
철장마존과 풍도마존의 살기가 피부로 전해지고 있었다.
황천어옹이 나섬으로 일 대 일 싸움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까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다른 고수들의 접근이 느껴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가 반대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것은 어렵겠소. 노선배가 상대해야 할 자들은 따로 있어."
황천어옹의 두 눈이 청풍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철갑선단이 있는 장강 본류 쪽이다. 그 쪽을 본 황천어옹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런......! 벌써 따라 잡혔나!!"
낙도진 방면, 빠르게 접근하는 비검맹의 전선들이 수십 척에 달했다.
돌아서 쳐들어오는데, 수십 척 중에서 눈에 띄는 두 척의 쾌속선이 있었다,
하얀색 백익선과 푸른색 판옥선이 그것들이었다. 그 위에서 전해오는 강력한 기운들, 고수들, 뛰어난 고수들이 거기에 있었다.
"역시 비검맹이군요. 경로를 읽혔어요. 어렵게 되었습니다!"
신산귀모.
류백언조차고 이 정도는 예상치 못했다는 기색이었다.
비검맹의 장강제패가 무력에 의한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강가 쪽으로 접근한 쾌속선들. 두 명의 인영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황천어옹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성가신 놈들이다. 도문검마(道門劍魔), 그리고 흑안검마(黑顔劍魔)야."
검존이 아니라서 다행일까.
아니다.
그렇지도 않다. 새롭게 나타난 두 명의 검마, 검마 두 명이면 검존 하나에 필적한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살상가상, 위기였다.
"강폭이 좁아집니다. 이제는 진짜로 싸워야 해요!"
류백언의 경고가 울려 퍼졌다.
말 그대로 나아가는 강의 너비가 줄어들고 있었다.
최대한 바깥쪽으로 배를 몰고 있었지만 결국은 철장마존과 풍도마존이 따라오는 강변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어떻게든 직접 부딪쳐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앞쪽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나아가는 쪽에서는 두 명의 검마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피할 곳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 텐가."
중요한 것은 황천어옹의 말처럼 어떻게 싸우느냐였다.
누가 누구를 상대하는가. 청풍을 제외한 이쪽의 전력이라면 황천어옹과 매한옥, 그리고 류백언일진대, 그들 중 검마 수준의 고수와 맞상대하여 이길 수 있는 자는 황천어옹 하나밖에 없었다. 난감한 선택이다. 전술의 대가인 류백언으로서도 당장 내놓을 방도가 없었다.
망설인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그사이 적들은 지척에 이르고 있었다.
해답을 내놓은 것은 청풍, 청풍이었다.
"마존 둘을 내가 상대하겠소. 나머지를 맡아주시오!"
결국은 그렇다.
처음부터 그렇게 싸우려 했고, 달리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바엔 아까 류백언의 만류를 듣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무풍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이길 수 있다면 이기는 것.
이기지 못해도 버티기만 하면 된다. 황천어옹과 매한옥이 검마들을 물리치고 청풍을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승산이 있었다.
쐐애애액!
공기를 가르고 상승 영역에 진입했다.
주작검을 뽑아내며 무공을 전개하니,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생각 저편으로 씻은 듯 날아가 버렸다.
무아지경, 몰입의 극점에서 염화인을 펼쳐 냈다. 이어지는 것은 청룡결 청룡도강이다. 얽혀 드는 청홍의 빛살, 무적의 무위가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었다.
두 극강 고수를 맞이하여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이 광경을 보고 피가 끓지 않는다면 그것은 남자가 아니다. 황천어옹이 황룡조간을 휘두르며 뱃전을 박찼다.
"이쪽도 간다!"
두 명의 검마가 눈 앞으로 짓쳐왔다.
먼저 일 합을 교환한 것은 흑안검마였다.
흑안검마.
흑안검마의 얼굴은 그 이름처럼 검었다. 햇빛에 그을린 정도가 아니라 칠흙과도 같다. 낮은 코, 넓은 하관이다.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꼬여 둥글게 딱 붙어있다. 중원인이 아니다. 서역 저편 머나먼 곳에서 왔다는 곤륜노(崑崙奴)란 족속이었다.
쩌어엉!
얼굴 생김새는 이상하나 체격만큼은 그 어느 누구에도 못지않을 정도로 장대했다. 장대한 체구만큼 맞서오는 힘도 엄청났다. 계속된 싸움과 급격한 항행으로 지쳐가던 황천어옹이다. 검존 정도의 강자는 아니더라도 상대하기 부담스럽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자는 내가 상대하겠소!"
표홀한 신법, 매한옥이 맞서게 된 자는 도문검마였다.
도사의 의관을 갖추고 도문의 척마검(斥魔劍)을 들었다. 정대한 기도, 일곱 검마 중 검마의 칭호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자였다. 하지만 이름이 안 어울린다고 무공도 강하지 않으리란 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도리어 그 무위는 칠검마 중에서도 돋보이는 수준이었다. 칠검마 중 가장 강한 것이 광혼검마라면 이 도문검마는 그 광혼검마의 바로 아래라고 알려져 있었다. 비검맹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라는 뜻, 매한옥이 사대하기에는 버거운 자였다.
"암향표! 화산 문하인가!"
대번에 매한옥의 경신술을 알아본다. 맑은 빛을 뿜는 두 눈, 교차하는 검끝에서는 정종심법의 심오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런 자가 어찌하여 비검맹에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위이이잉! 챙! 채챙!
매한옥과 도문검마의 검날이 부딪치며 진중한 울림을 울렸다. 정명한 문파의 제자들끼리 비무를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 그 속에 있는 것은 강성한 내력의 대결이었다. 살벌하게 살초를 교환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싸움이었다.
쏴아아악! 촤악!
각자가 제 상대를 맞이하여 격한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를 가로지른 류백언이 마침내 무풍을 호위해 오는 철갑선단의 사나이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준비는 끝났나?"
"에, 물론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지?"
"석계에 이야기하셨던 것을 확보해 놓았습니다."
"좋아. 잘했다."
그제야 한시름 놓는 표정이다. 류백언이 장백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무풍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겠지. 일단 고래 형님부터 옮겨가라. 조심해."
"걱정 마십시오."
그토록 튼튼하던 무풍도 이제는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부서지기 일보 직전까지 왔다.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철갑선단, 철갑장창대의 대원들이 무풍으로 건너와 장백경을 운반해 갔다.
이제 모두가 움직여야 할 때였다.
운기를 하던 와중에도 모든 의식을 열어두었던 백무한이 운공을 풀고 일어났다,
"무풍은 버리는 것인가?"
"예.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요."
무풍. 백무한에게는 벗이 되고 전우가 되었던 배다.
선체 한편이 제대로 박살 나 있다.
선체 전체에 굵게 묶여 있던 쇠사슬도 삼 분지 일 이상이 날아간 상태였다.
두 눈을 감고 생각했다.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백무한이 무풍을 박차고 철갑선단의 쾌속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제는 무풍과도 작별이다. 뒤따르는 류백언의 가슴에도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부터 맹주와 나는 육로로 움직입니다. 석계에서 다시 물길로 가겠습니다. 거기까지만 가면 확실히 따돌릴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거기까지만 갈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백무한이나, 맺는 말은 결코 밝지가 못했다.
밝지 못한 이유. 무상대능력의 감각이 돌아오며 느껴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백무한이다. 그가 말했다.
"손님이 오고 있다. 최악의 손님이야."
백무한의 시선이 이른 곳, 그곳을 본 류백언이다.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비검맹 제일전선.......! 검형!!"
비검맹 제일전선이란 이름.
거기에 누가 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이 장강 내에는 존재치 않는다.
파검존 육극신.
검형의 주인이 바로 육극신이다.
무력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되는 비검맹, 그 무력의 정점에 있는 이다. 어쩌면 비검맹주보다도 강할지 모른다. 장강 전체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거리!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장 움직여야 해요!"
류백언이 백무한을 잡아 끌었다.
최악이라 했던가.
상상할 수 있는 악운 중의 악운이 여기 있다. 검형을 돌아보며 달려가는 류백언이다. 그의 눈에 검형에서 내려오는 한 명의 검사가 비쳐 들었다. 백색으로 빛나는 검을 든 자, 광혼검마다. 육극신이 있는 곳에 광혼검마도 있다. 작년부터 육극신의 곁을 지키던 자, 제일전선 검형의 선봉, 칠검마 중 최강자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광혼검마까지.........!'
속도를 내는 류백언이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싸우고 있는 이들, 청풍과 매한옥, 황천어옹이 보였다.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육극신까지 왔으면 전멸을 면키 힘들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다. 하늘이 돕는 자 무슨 일을 못하겠냐 만은 지금 같아선 하늘이 백 번을 돕고 천 번을 보살펴도 빠져나가기가 힘들 것이다. 고마운 자들, 류백언 자신도 남고 싶었다. 그러나 백무한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가 가야 했다. 사람을 이용하여 지략을 부리는 자, 목숨에 대한 짐을 영원히 지고 살아야 한다. 어차피 감당해야 할 것, 류백언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생명 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걸고서 운명의 사슬을 향해 얽혀 드는 이들이다. 끝 갈 줄 모르고 치닫던 전장의 공기가 마침내 결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절정에 이른 무대다. 이제 마지막만이 남았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