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의 상세는 치명적이었다.
깊게 입은 내상은 물론이거니와 외상도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열흘을 넘게 이어지던 고된 도주 끝에서야 비로소 안전한 곳에 이르렀지만, 의식을 잃은 청풍은 깨어날 줄을 몰랐다.
쌕..... 쌕........!
숨 쉬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고 있었다. 폐 한쪽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기 때문이다. 가슴속에 찬 피와 온 혈맥에 가득 찬 탁기가 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땀에 젖은 몸, 수시로 경련을 일으키는 근육들이다. 근근이 이어지는 자하진기가 아니었다면 죽어도 열 번은 죽었을 상세였다. 그것도 이대로 두었다가는 가망이 없었다.
"의원이 필요해요."
"그러겠소."
추격전.
어지럽게 얽혀 돌아가던 낙도진에서 매한옥이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도문검마를 맞이하여 죽은 뻔했던 매한옥이다. 실제로도 패배를 당했던 매한옥일진저. 하지만 상대가 좋았다. 도문검마가 그의 상대였다는 것이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이겼으면 그만이다. 목숨까지 빼앗고 싶지는 않다. 정 수치스럽다면 자결하라. 그러지 않고 살아서 다시 겨루고 싶다면 그 도전은 언제든 받아주겠다."
도문검마의 마지막 말이었다.
매화검수 시절이었다면 도문검마의 말대로 자결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매한옥은 예전과 달랐다,
명예와 목숨을 똑같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전 같으면 사문의 명예를 당연히 위에 놓았겠지만, 좌절을 겪으며 성숙한 매한옥은 이제 확고한 깨달음을 지니고 있었다.
죽어서 명예를 지키겠다는 것은 회피요, 도피다.
패배를 인정할 때는 인정해야 한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도망을 치더라도 다음을 위해 절치부심하여 패배를 극복한다면, 그것이 또한 사문을 빛내는 무인의 길인 것이었다.
"서천각의 힘을 빌려보겠소. 듣자 하니 성혈교와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렀는지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고 하오. 그래도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지. 사제를 잘 부탁하오."
매한옥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그 자신도 상당한 부상을 입어 요양이 필요한 처지였지만, 제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청풍을 위하여 발벗고 나서고 있었다.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서영령도 마찬가지였다.
길고 긴 추격전 내내, 서영령은 단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청풍을 넘기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늘어져 버린 후에도 마찬가지다. 세심하게 상처를 돌보았을 뿐 아니라, 이동 중에도 그녀 혼자 힘으로 청풍을 운반했다. 밤에는 뜬눈으로 청풍의 곁을 지켰다.
그러다가 체력이 고갈되고, 적의 표적이 되어도 그녀는 힘을 잃지 않았다.
길을 차단하기 위해, 또는 적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흠검단 무인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을 때에도 그녀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몇 명 남지 않은 일행, 힘이 모자랄 때에는 스스로 선봉에 나서서 적들을 물리치고 길을 텄으며, 스스로 적들을 유인하는 미끼가 되기도 했다.
매한옥이 합류한 것은 그녀의 곁에 있던 흠검단 무인들이 두 명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죽었을지, 살아서 무사히 도망쳤을지 알 수 없는 흠검단 무인들이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두 사람마저도 결국 몇 번의 싸움을 거치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낙도진에서 살아 나온 것도 천운이었지만, 매한옥이 그때에 합류하게 된 것도 천운이랄 수밖에 없었다. 매한옥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적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서영령의 반짝이는 기지와 매한옥이 지닌 매화검수로서의 경험, 그 두 가지가 그들에게 활로를 열어주었다.
완전히 따돌리고 나아가 그들이 이른 곳은 태호 부근에 있었던 서영령의 은신처였다.
숭무련을 뛰쳐나왔을 때, 그녀가 몸을 숨기던 은신처들 중 하나였다.
그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 산속 풍광에 먼 중턱 넘어 태호 호반이 보이는 조용한 암자였다.
매한옥이 산을 내려가고, 청풍과 단둘이 남은 서영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오해든 무엇이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숨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졸이며 그의 곁을 지켰다.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때는 근처 산을 뒤져 식량을 구해왔다. 옆에 없는 시간이 절대로 길어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했다. 돌보는 정성이 하늘에 닿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청풍의 상세는 딱히 좋아지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갈수록 악화되는 것 같다. 열과 성만으로 망가진 몸이 회복되지는 않는 법, 어느 정도의 상세라면 모르되, 청풍의 몸은 이미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 있었던 까닭이었다.
의원이 절실했다.
그것도 의술의 대가가.
그녀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지금의 청풍을 좋아지게 만들 방법이 없었다. 숭무련이 알리든, 다른 어떤 수를 쓰든 직접 움직여야 할 판인데, 그러려면 필연코 청풍의 곁을 장시간 떠나 있어야만 했다. 그녀가 옆에 없는 청풍, 어떻게 될 지 모른다. 겁부터 먼저 났다.
그렇다고 청풍을 운반하여 이동하는 것도 안 될 일이었다.
정신 없던 와중에는 그냥 막 들쳐 업고 움직였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것도 정신 나간 짓이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움직였기에 청풍의 상세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속수무책, 지금으로서는 매한옥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
속절없이 시간만 흘렀다.
청풍의 상세는 나아질 줄을 몰랐고, 그를 돌보는 서영령도 점차 야위어갔다. 청풍의 호흡이 가빠지면 가빠질수록 서영령의 얼굴엔 근심이 더해져 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지 몰랐던 때다.
서영령은 밖에서 들린 인기척에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
매한옥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은 매한옥이 아니었다.
전혀 뜻밖의 사람, 서영령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전 숙부......!"
거친 모습,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노인이었다.
선에 들고 있는 것은 흑철의 기형도, 참도회주 전운록이 문밖에 서 있었던 것이다.
"안에 있나?"
청풍이 이곳에 있는 것을 알고 온 것이 틀림없다.
서영령이 문부터 가로막고 섰다.
해쓱한 얼굴, 그러나 누구도 청풍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두 눈에서 피어 올랐다.
"네 녀석도 대단하다. 그 놈을 구하겠다고 그런 놈들에게 뛰어들다니. 낙도진에서는 덕분에 줄을 뻔했다."
참도회주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여기까지 온 진의가 무엇인가.
서영령의 눈에는 탐색과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셨죠?"
참도회주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쩔그렁, 하고 흑철갑 도갑을 풀어낸다. 서영령이 움찔 물러나며 내력을 피워 올렸다. 하지만 참도회주는 그 흑철도를 뽑아내지 않았다. 그저 그것을 풀어내어 땅 위에 내려놓을 뿐이었다.
"팔을 조금 다쳤다. 잘려 나가는 줄 알았지. 흑철도가 무거울 정도야."
흑철도 도갑을 끌어내고 이어서 한 아름은 될 듯한 묵직한 행낭을 풀어놓았다. 참도회주가 서영령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얼굴이 말이 아니다. 이런 산속에서 생활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그래서 필요한 물건들을 좀 구해왔다."
무슨 일인가.
서영령의 두 눈에 있던 날카로운 빛이 조금씩 누그러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싸우러 온 것 같지가 않다. 아니,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죽이러 온 것,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 참도회주는 부상당하여 누워 있는 이에게 칼을 내려칠 사람이 아니다. 처음부터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그녀의 판단력을 흐려놓고 있었다. 사랑에 눈이 먼 여인, 청풍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놈 꼴이나 좀 보자."
참도회주가 성큼 걸어 들어왔다.
흑철도도 내려놓은 채, 손을 활짝 펴며 해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 이렇게 세심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늘만큼은 무척이나 배려를 해준다. 의아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지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우수에 차 있는지, 자신의 어깨가 얼마나 처져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관이로군."
참도회주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기식이 엄엄함은 물론이요, 상처들도 말이 아니었다. 열이 펄펄 끓고 있음은 굳이 만져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목상 위에 눕혀진 청풍, 그 옆에 참도회주가 주저앉았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참도회주.
그가 서영령을 돌아보며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낙도진에서 누굴 만났는지 아느냐?"
서영령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거기서 도주해 온 이후로 참도회주를 처음 만났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로선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낙도진에 그가 왔었다. 흠검 갈염이."
서영령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갈염, 갈 숙부.
이야기로만 듣는데도 너무나 놀랍고 반가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강해졌더군. 엄청나게."
강해졌다.
무사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죽은 것처럼 나타나지 않았다니.
그 때문에 얼마나 큰 오해가 있었던가.
참도회주는 그 의문도 풀어주었다.
"그 동안 일부러 숭무련에 알리지 않고 검만을 휘둘렀다 하였다. 그래서 살아 나올 수 있었지. 낙도진에는.... 육극신이 있었거든."
"그랬지요. 한데......."
"그래. 그대로 있었으면 전멸이었다. 육극신은 검존이되 검존과 달라. 그의 무력은 비검맹주에 필적한다. 파검마탄포, 그 위력을 직접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었는지 너로서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참도회주의 목소리는 진솔했다.
손녀딸에게 이야기해 주듯 느낀 바를 그대로 이야기한다. 솔직한 마음, 분노하여 도를 전개할 때와는 전혀 따른 모습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말했잖나. 흠검이 있었다고."
"갈 숙부가.......?!"
"흠검이 아무리 강해졌어도 파검을 이길 수는 없었지. 하지만, 그를 알지 않느냐. 그는 곧바로 가야 할 때와 돌아서 가야 할 때를 알아. 강해진 무력으로도 육극신에겐 안 된다는 것을 대번에 파악하고는 곧바로 내기를 걸었다."
"내기를?"
"그래. 파검마탄포 삼 초식을 모두 받아내겠다고 했지. 받아내면 물러나는 조건으로."
서영령으로서는 육극신의 무공을 받아내는 흠검단주를 쉽게 상상할 수가 없었다.
흠검단주.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갈염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리라 생각되었던 까닭이다.
서영령은 육극신을 직접 보았고, 그의 무공에 휩쓸려 커다란 부상을 입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갈염에 대한 기억은 그저 무공과 지혜가 뛰어난 숙부라는 인상밖에 없었다. 언제나 지닌 바 이상을 이루어내던 초인의 모습은 청풍의 머리 속에만 있었던 것이다.
"흠검은 파검마탄포 삼 초식을 모두 받아냈다. 혀를 내두를 무공이었어. 전혀 새로운 검법이었다. 흠검단주의 무공이 아니었다."
참도회주는 그때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는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흠검도 무사하지는 못했지. 수습하기 힘든 내상을 입고, 가슴에는 한 자나 되는 검상을 입었다. 그대로 대단한 거야. 사지 멀쩡하게 걸어 나왔으니까. 게다가 지니고 있던 검도 부러뜨리지 않았어. 파검과 싸우면서도. 장강에 육극신이 나타난 후, 두 번째 있는 일이라 하더군.'
참도회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어가는 청풍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
깊게 가라앉아 있던 노안에 흥미롭다는 빛이 떠올랐다.
"두 번째. 그렇다면 검을 부러뜨리지 않은 첫 번째가 누구였는지 아느냐?"
".........."
참도회주가 서영령을 돌아보았다.
서영령을 보고, 또 서영령의 뒤쪽을 본다. 열려 있는 문, 암자 바깥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인기척이 있었다.
참도회주가 늙은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며 청풍을 가리켰다.
"첫 번째가 바로 이놈이다. 네 녀석이 그리도 살리려 했던 이놈 말이다. 죽기엔 아까운 놈이라는 말이지. 내 그 때문에 사람을 좀 찾아왔다. 의원이여. 솜씨 좋은 의원."
암자의 문에 비쳐 드는 햇빛이다.
사람의 그림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입을 연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좀 늦었지요. 임 소저께서 걸음이 늦으시더군요."
매한옥이었다.
매한옥이 들어오며 참도회주를 보고 눈인사를 건넸다.
그것을 본 서영령은 비로소 깨달았다. 참도회주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참도회주는 매한옥을 만났던 것이다.
서천각의 지원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결국 참도회주를 찾게 된다. 참도회주를 만나고 숭무련의 인맥을 동원했다. 흠검단주와 파검존이 겨루는 장면을 쉽게 상상하기가 어려워도, 매한옥이 참도회주를, 그리고 의원을 데려오는 과정은 어쩐지 간단하게 떠올려 볼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매한옥이 데려온 의원은 놀랍게도 여인이었다.
어딘지 억지로 데려온 느낌이었다. 암자 안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것 같았지만, 일단 들어와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니 눈빛을 바꾸며 청풍의 상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폐의 일부를 잘라내야겠어요. 공기가 들어가서 기포가 생기고 부분적으로 죽어버린 부위죠. 가슴속, 그러니까 흉강 내에 가득 차 있던 피도 문제예요.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혈종이 되어버렸죠. 이대로 놔두면 탁기가 쌓이고 다른 큰 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거예요. 그것도 함께 없애줘야 되지요."
단아한 얼굴, 규방 깊은 곳에서 온종일 수문(繡紋:자수)이나 시화(詩畵)로 보낼 듯한 모습이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다. 험악한 상처를 들여다보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들어가기가 좋지 않겠는데....."
"들어간다는 말은... 가슴을 연다는 말인가요?"
서영령의 안색이 변했다.
솜씨 좋은 의원이라 했는데, 그런 이가 쉽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마음이 동요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요. 원래 개흉술(開胸術)과 같이 가슴을 여는 것은 의가의 여러 술기(術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비전(秘傳)이지요. 이 정도 상세라면 아무래도 천진의 심 노사께 보여 드리는 것이 좋을 텐데요."
"임 소저, 심 노사께서는 북경에 계십니다. 거기까지 갈 수는 없지요.:
매한옥의 목소리다. 그의 목소리엔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북경이면 그렇긴 하네요. 모용가의 청백신의께서도 그러한 비전에 있어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계시죠. 그분이라면....."
"청백신의께서는 현재 귀주성에 가 계십니다. 성혈교와 화산파의 전장을 누비며 적아(敵我)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돌보는 중이십니다. 귀주는 북경과 마찬가지로 너무 멀어요."
"여의의선(如意醫仙) 해명선사(解明仙師)께서는......."
"해명 선사께선 남경의 황궁에서 밖으로 나오질 않습니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임 소저 당신밖에 없습니다."
뛰어난 의원들의 근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매한옥이었다.
중원천하신의라 불리는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거론되는 가운데, 그 자신도 신의 소리를 듣는 백의신녀 임소영이 그들 앞에 있었다. 백의신녀 임소영의 차분한 얼굴에 곤란하다는 빛이 깃들었다.
"이봐요. 납치되다시피 끌려온 사람에게 억지를 부리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관군들을 때려눕히며 막무가내로 데려오다니, 사람의 생명이 걸려 있는 일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예요."
그렇다.
백의신녀는 그 뛰어난 의술로 말미암아 이곳 저곳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면 전혀 예측 못할 일을 당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남경의 귀족 관련 일로 관군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고 있던 도중, 참도회주와 매한옥의 습격을 받고 이곳까지 납치되어 온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태연하게 청풍을 봐주고 있는 것, 그들로서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개흉술과 같은 것은 제 영역이 아니에요. 앞서 말씀 드린 분들이 그 쪽으로는 더 뛰어나시지요. 관군들을 건드려 놓았으니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런 큰 수술을 시도하기엔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하지요. 게다가 당당 개흉에 들어갈 수도 없어요. 그러려면 미리 몸 상태를 끌어올려 놓아야 되기 때문이지요."
"관군은 문제없습니다. 금의위가 나선다 해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임 소저. 임 소저께서는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완벽하게 해주실 수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매한옥의 목소리엔 백의신녀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별다른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요, 그녀와 이전에 안면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처럼 믿는다.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는 병자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매한옥의 그것은 분명 이제까지 보지 못한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청풍과 연인 사이로 생각되는 서영령이 그렇게 나온다면 또 모를 일, 하지만 매한옥의 모습은 확실히 의외였다. 냉정해 보이는 검사, 생명이라도 바치겠다는 듯한 저돌성을 보이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눈을 감는 백의신녀가 결국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알겠어요. 어쩔 수 없군요. 일단 손을 댄 이상 반드시 살려놓아야 되는데...... 후우..... 고된 싸움이 되겠어요."
백의신녀가 말한, 소위 개흉술을 시작하기까지는 그로부터 열흘이 더 지난 후였다. 암자 내의 탁기를 없앤다는 작업부터 당장 개흉에 필요한 준비만도 삼 일이란 시간이 소요되었고, 청풍의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것에는 그보다 긴 칠 일이란 시간이 더 쓰여졌다.
"마취산(痲醉散)을 쓸 거예요. 호흡이 줄어들면 이 관을 통해서 공기를 불어 넣어주세요. 탁기다 조금도 들어가면 안 되니 운기를 통해 흡기(吸氣)를 정화시켜야 하지요. 몇 시진이 걸릴지 모르니 공력이 심후한 사람이 하셔야 할 것이에요."
청풍의 호흡은 참도회주가 맡았다.
개흉을 보조해 주는 사람에겐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하니 매한옥이 나서게 되었고 서영령은 직접적인 술기에서 제외되었다. 감정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이지만 이미 오랫동안 심력을 소모했던 데다가 체력적인 부분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슬아슬해요. 몸 상태를 더 올렸어야 되었는데."
옆으로 눕힌 후 다섯 번째 늑골과 여섯 번째 늑골 사이를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불안한 출발이었다. 생각보다 좋지 않다. 여러 곳에 괴사(塊死)된 부분들이 보였고, 그곳들을 중심으로 손상 부위가 파급되고 있는 중이었다.
손상 부위 적출과 혈관 봉합, 생전 보고 못한 놀라운 기술이 백의신녀의 손끝에 있었다. 정밀한 손끝, 신비한 솜씨였다. 그러면서도 세 시진을 거뜬히 넘어간 작업, 그녀의 말대로 고된 싸움이 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세 시진을 훌쩍 넘어 다섯 시진에 이르렀을 때였다. 가슴 쪽 피부를 꿰매고 손을 뗀 백의신녀다. 그녀가 매한옥과 참도회주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옆에서 워낙에 잘 도와줘서 살았어요. 의원으로의 재능들이 보이는 데 앞으로도 함께 해 볼래요?"
사뭇 진지한 질문이었다.
그러겠다고 흔쾌히 답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 백의신녀의 표정이 밝은 만큼 모두의 얼굴에도 밝은 표정이 어린다. 청풍의 목숨을 담보로 한 또 한 번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