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56)

 청풍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기운 없는 눈, 초췌해진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서영령.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령매......"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녀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청풍의 목소리는 쉬어버린 가운데에도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괜찮으니...... 울지 마."

 닦으려고 닦으려고 해도, 계속하여 흘러나오는 눈물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청풍이 잘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들어 서영령의 손을 잡았다. 청풍의 손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 서영령, 멈추지 않는 눈물에 그간의 걱정과 근심들이 한꺼번에 풀려 나오고 있었다.

 한참이나 울고 있는 그녀와 그녀를 바라보는 그.

 청풍이 문득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청룡검과 주작검이 보였다. 두 개의 신검, 그리나 청풍이 찾는 것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다른 한 켠에 있는 행낭이 그것이다. 책 한 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조그만 행낭, 행낭이라고 부르기엔 그냥 조그만 주머니에 가깝다. 항상 품속에 넣고 다니던 행낭이었다.

 "령매.... 저것을 좀... 가져다 주겠어?"

 서영령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고 재빠르게 움직여 청풍이 가리키는 행낭을 가져왔다. 청풍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모습이었다.

 "흐읍....."

 행낭을 가져오자 청풍이 몸을 일으키려 힘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도 않는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서영령이 그것을 두고 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청풍의 어깨를 잡으며 아직도 울음이 남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면 안 돼요. 제가 할게요. 행낭에서 찾는 게 있어요?"

 "그래, 내가 직접 해야 하는데......."

 "내가 열게요. 열어봐도 되죠?"

 "그러도록 해."

 서영령이 행낭을 열어 놓자, 그 안으로부터 책자 하나가 나왔다. 자하진기의 운공구결, 서영령이 그것을 꺼내며 물었다.

 "찾는 것이 이것이죠?"

 "아니야, 그것이."

 청풍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서영령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더 안쪽으로 손을 넣어봐."

 그 책자가 아니라니, 의아한 표정을 짓는 서영령이다. 그녀가 그의 말대로 행낭 깊은 곳으로 손을 넣었다. 백매화 은패, 그리고 동전들이 손끝을 스쳤다. 그러다가 한 개의 물건, 거기에 손이 닿은 그녀다. 그녀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것은......!"

 빼내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행낭에서 빠져 나온 손.

 거기에 걸려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언제가 그녀가 청풍에게 주었던 목걸이다. 게다가 거기에 걸려 있는 부옥, 우유빛 옥돌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다. 그녀가 지니고 있던 것까지 두 개의 부옥이 한 줄에 엮어 있었다.

 "두 개.....! 잃어버린 줄 알았었는데....!'

 그녀의 두 눈에는 커다란 놀라움이 떠올라 있었다. 청풍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항상 지니고 있었어. 그것을 버릴 리가 없잖아."

 청풍과 눈을 맞추는 서영령이다.

 그녀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 올랐다.

 "원래는 잘 안 우는데...... 나 바보 같죠?"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입가에는 웃음까지 지어가면서, 청풍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전혀 바보 같지 않아."

 죽음의 문턱을 되돌아 나오며, 새로운 생의 기운을 얻기라도 한 것일까.

 아직까지도 망가져 있는 육신이다.

 하지만 청풍의 얼굴엔 전에 없던 여유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가 서영령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울지 마, 령매. 이렇게 살아왔잖아."

 서영령은 다시 한 번 울었다.

 울면서 또한 웃는다. 다시 살아온 자, 청풍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끝없는 애정이 또한 그 자리에 함께한다. 서로를 향한 마음, 흘러 흘러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늦고도 늦은 밤.

 "찾았다."

 작은 목소리가 암천의 산 위에 내려앉았다.

 목소리의 주인,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꿈틀대듯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피부는 유리처럼 투명하기만 했다.

 바람이 없는데도 일렁이는 옷깃이 신기하다. 암자로 다가가는 그의 팔목에서 기이한 빛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속삭이는 듯한 한마디에 팔목에서 움직이던 빛무리가 옅어졌다. 뱀과 같은 비늘, 빛무리의 정체는 하나의 기이한 생명체였다. 똬리를 틀 듯 신비인의 팔목을 감고 있었는데 뱀과 같은 비늘 위로 한 쌍의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인세에 보기 힘든 기물이었다.

 신비인이 암자의 문 앞까지 당도했을 때였다.

 문에 손을 대기도 전에 안쪽으로부터 늙은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어느 놈이냐."

 밤의 어둠을 확 물리칠 정도로 무서운 기세가 전해져 왔다.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여는 신비인, 그의 입에서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님에 대한 대접이 박하군."

 은은하게 밝혀진 빛이었다.

 밤이 깊었지만 자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거동이 불가능한 청풍도 잠이 들지 않았다. 서영령, 그리고 참도회주와 함께 다 같이 소소한 잡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늦었다. 대접을 받을 만한 때가 아니란 말이지. 선자불래 내자불선이라 그 범상치 않은 기도가 놀랍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밝혀라."

 참도회주가 흑철도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급한 성격이었지만, 같은 편에 서고 보니 느끼는 바가 달랐다. 적으로 맞서 싸울 때에는 그렇게나 어려운 상대였었는데, 막상 같은 쪽에 있다 보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노선배, 그는 적이 아닙니다. 흑철도를 거두셔도 될 겁니다."

 청풍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아직까지도 병색이 완연해 보였지만, 불청객을 바라보는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과연 청홍무적검이라더니 다르군. 청룡검과 주작검은 잘 있나?"

 두 신검부터 말한다. 경계하기에 충분한 상대였다.

 그러나 청풍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청풍이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남자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빛이 떠올랐다.

 청풍의 눈은 맑다. 흔들림 없는 두 눈, 그것을 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심안(天心眼), 그것도 협안(俠眼)이다. 신검들이 제 주인을 만났으니, 역시나 생각을 바꾸어야겠어."

 밑도 끝도 없는 말,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청풍은 딱히 궁금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어차피 밝혀질 것은 밝혀지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삶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은 청풍이었다. 

 "이곳에.... 서쪽으로부터 악운이 흘러오고 있다. 이곳을 떠나 새로운 은신처를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갑작스레 서편을 가리키며 말한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그의 팔목에서 신비한 빛무리가 다시 한 번 일렁였다.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분위기의 남자였다. 운수를 이야기하지만 만통자와는 또 달랐다.

 "난데없이 찾아와 경고라..... 여기까지 온 이유가 그것 하나는 아니지 않소?"

 무엇인가 천기와 관련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을 입 밖으로 내면서도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다. 만통자가 이 현실 세계에 발을 두고 있다면 이 남자는 그 경계를 넘어가 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다른 세상, 적어도 무림을 살고 있는 자는 아니었다.

 "오늘은 인사차 들렀지. 내 이름은 월현(月現)이다. 환신(幻神)이라 부르는 자들도 있더군."

 환신.

 들어본 이름이었다.

 청풍은 거기서 또 하나의 운명을 직감했다.

 환신이란 이름은 청풍이 찾고 있는 또 하나의 검과 연결되어 있었던 까닭이었다.

 "몸부터 회복해 놓아야 한다. 자네가 꼭 필요한 일이 있으니까."

 청풍의 눈과 환신 월현의 눈이 공중에서 얽혀 들었다. 필요한 일, 청풍이 물었다. 

 "어디에 필요하다는 말이오?"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그렇다.

 환신의 말처럼 청풍은 알고 있었다. 질문은 그저 알고 있던 바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내력조차 제대로 끌어올릴 수 없는 몸이지만 정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저절로 드는 느낌이다. 청풍은 환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듣지 않아도 읽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현무검. 현무검이로군."

 청풍의 대답에 월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리지 않는다. 틀릴 수가 없다. 청풍은 이제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천명의 실마리를 잡았고, 많은 것을 새롭게 알아가고 있었다. 깨달음으로 배워가는 천하다. 청풍은 그처럼 그만의 방식으로 천하를 논하는 경지까지 올라와 있었을 따름이었다.

 "사황(邪皇)이 재림하고 북제(北帝)가 눈을 떴다. 진무의 팔만 사천 귀병(鬼兵)들이 세상에 나오면 혼돈과 환란을 막을 수가 없게 되지. 장강의 교룡 승천 이후, 경계에 선 자들의 싸움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북방대제(北方大帝) 현무를 달랠 수 있는 자는 자네, 자네밖에 없어."

 월현의 눈동자.

 청풍은 견고한 운명의 끈을 실감했다.

 월현은 말했다.

 다시 찾아올 때까지 완벽한 힘을 갖추어 놓으라고.

 드높이는 열 개의 날개.

 환신.

 언젠가 명경에게 느꼈던 것을 느끼는 청풍이다.

 백무한에게 느꼈던 것을.

 그리고 귀도에게 느꼈던 것을 여기서 다시금 느낀다.

 갖추어지는 천명, 마침내 네 번째 검, 현무검을 찾을 때가 가까워 온 것이다

[5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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