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56)

[한백무림서] 화산질풍검 제 19 장 공명(共鳴) 

 장강에서 청홍무적검의 이름이 전설처럼 이야기 되고 있을 때. 

 강호의 저편에서는 또 하나의 전설 같은 싸움이 그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토록 끈질기게 버티던 철기맹이 결국 폐문을 선언하였고, 무림맹의 상대는 결국 성혈교 한 곳으로 압축되었던 것이다. 철기맹의 폐문과 탁무양의 비사에 관한 것은 강호난세사 이(二) 장 무당마검 편(篇)과 미완의 강호난세사 육(六) 장에 기술되어 있다.   

 철기맹이 떨어져 나가고 기세를 탄 화산파와 무당파는 무림맹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으며 귀양 진격을 서두른다. 

 무당파보다 늦게 당도했던 화산파였지만 화산의 공격력은 무당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정예를 전부 투입한 화산이다. 

 그들의 진격은 철저하고 광범위했으며 거세기 짝이 없었다. 

 귀주성 북동부 전역, 성혈교의 분타들과 성혈교를 지원하던 모든 세력들이 화산의 검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이십 개가 넘는 군소문파들이 폐문을 당했으며, 적지 않은 상권이 화산파가 운영하는 세력 내로 편입되어 갔다. 

 결국 귀양까지 진격한 화산과 무당이다.  

 귀양 남서, 청운곡이 성혈교의 최대 거점이라는 정보가 알려졌고, 화산과 무당을 비롯한 무림맹의 무인들은 전열을 가다듬으며 최후의 싸움을 준비했다. 성혈교와의 드러난 싸움이 마침내 종국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한백무림서 무림편  

 강호난세사 중에서 

 청풍은 정신을 차린 후에도 며칠 동안이나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외상도 외상이지만, 내상이 워낙에나 심했던 까닭이었다. 

 들끓던 진기들은 날뛸 힘조차 없을 만큼 죽은 듯 가라앉아 있었으며 진기가 모이는 기해(氣海)는 더 이상 기(氣)의 바다라 불리지도 못할 만큼 허해져 있었다.  

 내력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모든 기(氣)를 관장하고 있던 자하진기가 바닥나 버렸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역시나 그것이다.  

 자하진기. 

 운기의 핵인 자하진기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됨에 따라 애초부터 상극이었던 백호기와 청룡기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 부딪치며 치닫는 진기가 온 몸의 기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외상을 치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미 그의 내부는 그처럼 망가져 버린 상태였다. 백호기와 청룡기는 발동 자체가 어려웠고, 실낱같이 남아 있던 자하진기도 언제 끊어져 버릴지 모를 만큼 미약한 수준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청풍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백호기와 청룡기는 우선 포기한다. 자하진기도 억지로 도인하지 않겠어.’ 

 지금의 기(氣)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대신 청풍은 다른 곳에 승부를 걸었다. 

 ‘주작기, 상단전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 

 그렇다.  

 중단전(中丹田)과 하단전(下丹田)은 초토화 된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상단전만큼은 멀쩡하다.  

 주작기, 공명결.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이 상단전밖에 없어서 그런지, 멀쩡한 정도가 아니라 전보다 더욱 더 활성화 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잠을 안 자도 괜찮은 거에요?” 서영령이 백의신녀에게 물었다. 대답은 뻔했다. 

 “물론 안 되죠. 안정을 좀 더 취해야 되요. 무척 잠이 줄었어요. 억지로라도 눈을 붙여요.”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장 먼저 생긴 현상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정신이 명료해진다. 상단전의 개방이 급속도로 일어나고 있었다. 

 “흐르는 진기가 특이해요. 상단전, 뇌력(腦力)을 끌어내고 있는 것 같은데, 좋은 생각 같지 않아요. 의가(醫家)에서는 금기시하는 것이니.......되도록이면 자제하는 것이 나을 법 해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곳에 눌러 앉은 백의신녀였다. 

 상단전을 일깨우는 청풍의 시도에 위험을 경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한 것에 크나 큰 흥미를 느낀 듯한 모습이었다. 딱히 상세가 좋아지고 있지는 않지만, 뭔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의술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 그것이 그녀를 놀랍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필요한 약재(藥材)는 없소?” 

 “지금으로서는 괜찮아요.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듯 해요.” 

 “그거 다행이로군. 한 시름 놓았어.” 

 백의신녀가 서영령과 함께 청풍의 상세를 돌보고 있는 동안, 생활과 치료에 필요한 물품을 구해 오는 것은 다름 아닌 매한옥이었다. 오늘도 산 아래를 내려갔다 온 매한옥이 한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별 일은 없었습니까.” 

 “없었지.”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렇다. 

 또 한 명이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곳을 지키는 이다. 

 참도회주였다. 

 도갑에 담긴 그의 흑철도가 이곳을 지키는 한 자루의 칼이었다. 

 생각해보면 쟁쟁한 인물들, 불편함이 없는 나날이다. 

 상단전의 축기에 골몰하던 청풍. 

 그가 문득 참도회주에게 물었다. 

 “이렇게 까지 계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청풍을 돌아보는 참도회주다. 그의 노안에 도리어 의아하다는 표정이 깃들었다. 그가 당연하다는 어투로 대답했다. 

 “오해에 대한 보상이다. 죽이자고 칼까지 휘둘렀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게다가 내가 지키는 것은 자네뿐이 아니야.” 

 단순하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명쾌한 말이었다. 

 청풍, 그리고 누구보다 서영령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생각이 깊어지고 복잡해지기 마련인데, 이 참도회주는 별반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젊은이의 혈기왕성함을 그대로 지니고 그 외모만을 세월의 흐름에 맡겨버린 듯 하다. 그러면서도 믿음직스럽기는 그 누구 못지않았다. 

 상단전이 살아나면서 서서히 몸 내부의 기감(氣感)까지도 깨어나던 시점이다. 

 사단이 일어난 것은 그 때쯤이었다. 

 “산 아래 쪽을 수색하고 있는 무리들이 있더군요. 관가(官家)입니다.” 

 산 아래에 내려갔다 온 매한옥의 말이었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산기슭을 배회하고 있는 중, 무림인이 아니라 관군들이었다. 그냥 배회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모양새라 하였다.

 “관가라........생각보다 빠르군. 가장 먼저라니 예상 밖이야.” 

 “글쎄요. 관가가 가장 빠르다는 것.......어찌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모릅니다. 이 근처에는 특별히 세를 이루고 있는 무파(武派)들이 없으니까요.” 

 “그런가.” 

 “개방의 거지들도 이 인근에는 거의 보이지를 않습니다. 혹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면 산을 오가는 민초들의 눈 밖에 없는데, 그 민초들이 낯선 사람을 보았다 이야기할 곳은 관아(官衙)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임 소저가 있지요. 안 그래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이니, 다른 어디보다 관아가 빨랐다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맞는 말이군.” 

 매한옥의 분석은 정확했다. 

 이곳에서 생활을 한지도 벌써 보름을 훌쩍 넘긴 상황이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고 한들 완전히 흔적을 없애기는 쉬운 일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  

 생사가 오락가락하던 환자가 있는 판국에, 약재(藥材)들을 구해오는 것만으로도 종적이 드러날 요건은 충분했다. 그나마 매한옥이 이런 저런 수를 쓰면서 흔적을 감추었기에 망정이지, 어지간했으면 이미 예전에 그들의 거처가 알려져 버렸을 것이었다. 

 “여하튼 상황을 봐서 이동할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환신이란 기인(奇人)이 말했던 ‘악운(惡運)’도 마음에 걸렸다. 

 악운이란 애매한 말에 휘둘리기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으로선 누가 들이닥쳐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관군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비검맹이나 성혈교 등의 적들이라면 베어 버리고 도망치면 그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군들을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관에서 정식으로 수배자가 되면 큰일이다.  

 게다가 무공도 익히지 못한 이들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악독한 무뢰배나 할 짓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자들, 관아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어떤 면에선 한 문파를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 골치 아픈 일일 수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겠나?”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습니다.” 

 “거처를 옮겨야겠는데, 가능하겠냐는 말이다.” 

 “예. 갈 수 있을 겁니다.” 

 청풍의 대답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못 미더운 눈으로 청풍을 바라보던 매한옥이 이내 고개를 돌리며 백의신녀에게 확인하듯이 되물었다. 

 “임 소저, 가능하겠습니까?” 

 “본인이 그렇다는데요.” 

 “이 녀석은 항상 그런 식입니다.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되지요.” 

 “호호. 괜찮을 거예요. 격하게 움직이는 것만 아니라면.” 

 백의신녀는 그의 걱정이 과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매한옥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받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한 마디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게 문제란 말이지. 격하게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 

 격한 움직임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곧, 싸움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용케 관군들을 피한다 해도, 그들을 노리는 다른 이들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상태에서 장소를 옮기는 것,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은 어쩔 수가 없다.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좋아.’  

 이동을 결정했다지만 문제는 어디로 가냐는 것이다. 

 그 해답은 뜻밖에도 서영령이 가지고 있었다. 

 “이곳처럼 만들어 둔 은신처가 하나 더 있어요. 단지 조금 멀다는 것이 흠인데.......” 

 은신처. 

 그러고 보면 이곳도 서영령이 마련해 두었던 곳이다. 

 매한옥은 다소의 의아함을 느꼈으나 굳이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호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각자의 사연을 갖지 않은 자, 그 누가 있을까.   

 “그럼 목적지는 그곳으로 하지요. 당장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매한옥은 지체하지 않았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이동할 채비를 마치고 밤을 기다렸다.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이려면 역시 야음을 틈타는 것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밤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결정에서 행동에 옮기기까지 거의 시간낭비가 없었음에도, 관군의 움직임이 그보다 조금 더 빨랐던 것이다.   

 “무인(武人)이다, 그것도 상당한 놈이야.”   

 가장 먼저 기척을 알아챈 것은 다름 아닌 참도회주였다. 

 도를 비껴 들고 밖으로 나가는 모양새가 마치 이런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기색이다. 매한옥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따라 바깥으로 나섰다. 

 “다섯 명........관군들이 함께 오고 있는데요. 골치 아프게 되었습니다.” 

 “글쎄, 골치 아플 것이 있을까.”  

 참도회주의 대답.      

 매한옥은 관군들 때문보다 참도회주의 말에 더욱 긴장했다. 관군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인들은 사실 별반 두려울 것이 없다. 그 보다는 참도회주가 그들을 모조리 베어버리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했다.  

 사사삭. 터벅. 

 이윽고 풀숲이 열리며 여섯 명의 관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명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관병들이었지만 그들의 선두에 한 명은 조금 달랐다. 관인은 관인이되, 신분이 다르다. 

 가슴에 수놓아진 금(錦)이라는 한 글자. 황실 직속 금의위의 상징이었다. 

 ‘금의위? 그렇다면 목적은 임 소저겠군!’ 

 “이봐! 이 근처에서 수상한 사람들 보지 못했나?”  

 관병들 중 한 명이 대뜸 참도회주와 매한옥을 가리키며 기세 좋게 물어왔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이런 관군으로 어떻게 대명제국의 치안이 유지되고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어이! 대답이 없어? 물어 보았으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숫제 화를 내는 관군이다. 참도회주의 흑철도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 흑철도가 뛰쳐나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금의위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관군들을 제지한 덕분이었다. 

 “조용히 하라.” 

 금의위 위사(衛士)는 선이 굵은 얼굴을 지녔다. 참도회주를 보며 그 무위를 감지한 듯, 잘 다듬어진 신체를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가 손을 들며 관병들을 향해 말했다. 

 “뒤로 물러서!”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관병들이 얼굴들을 굳히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금의위 위사가 참도회주를 직시하며 침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람을 찾고 있소. 백의신녀, 의원이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녀를 본 적이 있소?”  

 말을 하고 있는 자도, 말을 듣는 자도 이것이 형식뿐인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금의위 위사는 단숨에 알아챘을 것이다. 참도회주와 매한옥이 바로 그가 찾고 있는 사람들임을. 

 내력을 끌어 올리는 금의위 위사, 참도회주의 즉각적인 반문이 이어졌다. 

 “본 적이 있다면?”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가 정중하지만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시오.” 

 “알려 달라.......직접 찾아보든지.” 

 강렬한 기파는 덤이었다. 

 그럼에도 금의위 위사는 흔들림이 없었다. 참도회주가 발하는 압력을 온몸으로 받고 있을 텐데도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노인장, 나는 예의를 다하려 했소. 하지만 너무 하는군.”  

 도리어 강한 기세를 일으키며 한 발 다가오니, 놀라울 따름이다. 참도회주가 감탄 어린 웃음을 흘리며 매한옥을 돌아보았다. 

 “금의위에 이런 놈이 있었나? 북위 위금화 이후로 인재가 없는 줄 알았더니만.” 

 참도회주가 흑철도를 들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한바탕 붙을 분위기였다. 

 금의위 위사가 손을 들어올리며 조그만 원을 그렸다. 두 주먹에 어리는 기운, 그것을 본 참도회주의 표정이 일순간 묘하게 변했다. 

 “잠깐, 그 권법.......! 설마, 원공권인가?” 

 금의위 위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급변하는 공기다. 

 참도회주가 들어 올리던 도를 딱 멈추었다. 

 “원공권.......일맥전수라더니, 제자를 찾기는 찾았구나. 어떻게 할까. 이 놈을 죽여도 될까?” 

 마치 그 사부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금의위 위사가 미간을 좁히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부님을 아시오?”  

 “자기 제자가 길바닥에서 죽어도 코웃음을 칠 놈이라면, 잘 알고 있지.” 

 친우에게나 쓸 법한 말투였다. 

 자기 제자가 죽어도 웃음으로 넘긴다? 

 실제로 그렇기는 한가보다. 

 사부와 친분이 있는 이에게 함부로 손을 쓸 수는 없는 일, 금의위 위사가 몸을 굳히며 두 주먹의 기운을 거두어 들였다. 

 “사부님을 아시는 분께 무례를 범할 수는 없소. 꼭 손을 쓰셔야 하시겠소?” 

 참도회주도 마찬가지다.  

 흑철도를 비껴 내리는 그의 얼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만 두자. 모처럼의 흥이 깨졌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로구나.” 

 참도회주의 목소리에서는 그 동안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긴 세월의 흐름이 묻어나고 있었다. 

 인연의 얽힘은 그렇듯 언제나 오묘하고도 기이한 법. 

 오묘한 인연이 불러오는 것은 또 다른 인연의 얽힘이라. 

 그 얽히고 설킨 인연의 실타래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인연의 끈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끼이익. 

 청풍이었다. 

 문을 열고 나온 청풍을 발견한 금의위 위사다. 그의 두 눈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자네는......!”  

 놀랍기로는 청풍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들어본 목소리라 생각했더니 역시나 본 적이 있는 자였다. 

 스쳐 지나가듯 부딪쳤을 뿐이지만 손속까지도 나누어 보았다. 형양 땅에서 귀도를 탈출시킬 때 마주쳤던 금의위 위사, 원태가 바로 그 위사의 이름이었다. 

 “그래, 그랬어. 백의신녀가 필요했던 것이 자네였다니 상상도 못했지 뭔가.” 

 원태의 시선이 청풍의 전신을 훑었다. 정(瀞)하지 못한 기운, 균형이 깨진 청풍의 내공을 알아보았다. 가슴에서 목에 이르도록 두터운 붕대까지 감겨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심각한 부상을 엿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오.” 

 “오랜만이지. 비검맹의 검존과 마존들을 단신으로 돌파하며 수로맹주를 구해낸 무적의 검사. 장강 만리를 위진 시킨 청홍무적검의 얼굴을 이렇게 보게 되는군.” 

 청풍의 명성이 그렇게 까지나 알려지고 있었던가. 원태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것은 반가움이었다.   

 형양 땅에서도 그랬다. 서로 대적해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호감을 느꼈던 자다. 

 관군들에게 둘러싸이고 슬그머니 길을 터 주던 때.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원태가 뒤 쪽에 서 있는 관병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산 밑으로 내려가라. 병력을 모으고 대기하도록 한다. 내 별도의 명령을 내리겠다.” 

 “예? 이들은 어찌하고 그냥 내려갑니까?” 

 “이들은 악적들이 아닙니까?”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원태가 얼굴을 찌푸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령대로 행하라.” 

 짐짓 화를 내는듯한 기색이었다. 아니, 어쩌면 진실로 화를 낸 것인지도 몰랐다. 성가시기만 한 관병들이다. 그들이 도망치듯 몸을 돌려 산 아래 쪽을 향했다. 

 “덕분에........많은 일들을 겪었지. 단심맹이라는 놈들 때문에 말이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단심맹의 이름에 참도회주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가는 원태.  

 원태가 하고픈 말은 단심맹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청풍에 대한 오해와 그 오해의 끝. 

 낭인들의 몰살에 청풍을 추격하던 지난 일이 원태의 말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단심맹을 캐기 시작하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지. 이제 와서 그 때의 일에 대한 사과를 하는 것도 우스울 것이고, 다만 피차 고생한 김에 과거의 일들은 없었던 것으로 해 줄 수 없을까.” 

 단심맹. 

 청풍은 가장 먼저 그 때 싸웠던 냉심마유를 떠올렸다. 마환필의 사나움이야 차치하고라도, 그 지독한 음험함은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자들이 소속된 단심맹인 바, 굳이 큰 그림을 그려보지 않더라도 만만치 않은 곳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일이라면 어차피 마음에 두고 있지도 않았소.”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고.” 

 원태의 말에는 전에 없던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청풍이 강해진 것처럼 원태도 강해져 있었던 것이다. 

 한층 더 뛰어나진 기도, 한층 더 강인해진 인상이 그가 겪었던 험난함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싸움을 통하여 성장하는 무인의 기질, 음모를 물리치며 성숙하는 협사의 풍모가 달라진 모습 안에 있었다. 

 “그나저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네. 그 상처, 백의신녀께 치료를 받은 것인가?” 

 “그렇소.” 

 “치료가 끝났다면, 모셔가도 될까?” 

 “글쎄.......그것은 직접 여쭈어 보시는 것이 좋겠소.” 

 청풍이 암자 쪽을 가리켰다. 

 다가드는 원태. 암자의 문이 열리며 두 여인들이 걸어 나왔다. 

 “임.......소저?” 

 백의신녀를 본 원태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여 있는 얼굴, 방금 전 청풍을 보았을 때 지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당신은......?!” 

 “임 소저? 임소저가 백의신녀였소? 나 원태요. 알아보겠소?” 

 “원 공자? 강원 백부님께 배우던?”  

 “맞소, 맞아! 이럴 수가! 내 전혀 모르고 있었소!” 

 남아 있던 기이한 인연, 그 마지막이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 서영령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백의신녀에게 속삭였다. 

 “원래 알던 사이인가요?” 

 “알던 사이고 말고! 같은 곳에서 꽤나 오랫동안 함께 컸소. 그나저나 실로 놀라울 뿐이오. 백의신녀라니, 그 임소저가!” 

 대답은 원태에게서 먼저 나왔다. 마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백의신녀. 그녀가 고운 눈썹을 슬쩍 치켜 올리며 말을 더했다. 

 “동향 사람일 뿐이야. 함께 컸을 정도는 아니고.......”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임 소저! 다 잊어버린 게요?” 

 “잊어버린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요. 여하튼 그 성격은 여전하군요.” 

 백의신녀의 미소는 여전히 마뜩찮아 보였다. 웃어넘기는 원태, 청풍을 보았을 때보다 배는 더 반가워하는 것 같다. 본연의 임무마저도 망각한 듯 얼굴 전체에 환한 표정만이 가득했다.  

 “그럼.......언니는 어쩔 건가요?” 

 “글쎄다. 일단은 가야겠지. 황실에서 그토록 찾는 것을 보면 보통 일은 아닐 거거든. 그리고 사실 이제는 내가 해줄 일도 별로 없는 마당이야. 지금부터는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니까.”  

 백의신녀의 시선을 받은 청풍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이제는 청풍 홀로 넘어서야 할 벽이었다. 뒤엉킨 내력, 부상으로 무뎌진 몸, 전부 다 완벽하게 되찾으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자네의 이름은 지금 전 중원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중이라네. 청홍무적검, 그것이 자네가 얻은 이름이야. 그 이름을 지키려면 어서 회복하는 것이 좋을 것일세. 관병의 추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다른 놈들이 쫓는 것은 책임지지 못하니까.” 

 원태는 또 한 번의 호의를 보여 주었다.  

 백의신녀를 데려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는 투다.  

 원칙만을 고집하는 보통 관인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어지고 또는 마무리되는 만남, 청풍 일 행은 그렇게 백의신녀와 작별을 고하고 산을 내려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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