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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성의 성도(城都). 합비.
합비는 역사가 오랜 고도(古都)였다. 하지만 힘을 잃은 장현걸은 그러한 세월의 정취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시급을 다투는 중요한 만남이 있기 때문이었다.
‘암행 중랑장이라......’
그렇다.
사부. 용두방주가 건네주었던 쪽지에 있었던 바로 그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장현걸은 그 누구도 대동하지 않았다. 고봉산 조차도.
항상 입고 있던 누더기까지 벗었다. 단정한 무복을 차려 입었고, 언제나 맨발이던 발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짚신을 신었다.
죽립을 눌러 써서 얼굴을 가렸을 뿐 아니라 타구봉마저도 놓고 왔다. 그 누구도 개방의 후개임을 알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말이지.’
장현걸은 자조에 가까운 웃음을 베어 물었다. 개방 제자가, 그것도 후개 쯤이나 되는 자가 누더기를 벗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 까닭이었다.
말하자면 방규(幇規)를 어긴 것이다. 개방의 법도로 보자면 중죄(重罪)에 가까운 행태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움직임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뜻, 다 찢어진 한 벌 누더기라도 온 천하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던 개방 후개에게 이것이 어인 일인지 새삼 스스로의 처지가 혹독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저곳이로군.’
번화한 건물들 사이로 고풍스러운 객잔 하나가 보였다. 어렵게 만든 자리, 어떤 이야기가 오갈 것인지는 장현걸로서도 짐작키가 어려웠다. 심지어는 그것이 그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다. 어떤 것이든 지금보다 나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든, 아니면 살 길이 보이든 부딪쳐 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촤르르륵.
주렴을 걷어내고 들어선 객잔은 무척이나 한산했다. 아니, 한산한 정도가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적어도 민초들은.
‘고수들.......!’
그 이유를 알아채는 데는 촌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객잔 한 쪽, 흑색 제복을 차려 입은 무인들 네 명이 보였다. 삼엄한 예기(銳氣),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발길을 돌릴만한 기파가 전해지고 있었다. 어지간히 용기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는 들어서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모습들이었다.
‘검은색 제복.......동창(東倉)!!’
장현걸은 대번에 무인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흑의를 입고 다니는 무인들이야 중원천지에 헤아릴 수 없도록 많다고는 해도, 뻣뻣한 제복에 흑사(黑絲) 비호(飛虎) 문양이라면 황실 직속 감찰 기관인 동창 흑호대(黑虎隊)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땅을 박찰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 피부로 느껴지는 고강한 무공들이 거기에 있었다.
‘흑호대가 이렇게 강했었던가.......게다가 이만한 자들이 아래 층을 지킨다니.......’
장현걸은 다시 한번 경각심을 더했다. 동창의 전력도 상상 이상이지만 그런 자들이 지키고 있는 이라면 역시나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었다. 가볍게 생각했다가는 부지하고 있던 목숨까지 날아갈지 몰랐다.
“어쩐 일이신지.......”
한발 더 안 쪽으로 들어서자, 창백한 낯빛의 점소이가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점소이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오늘은 저희 객잔이 손님을 받기가 곤란한지라.......”
그 때였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은.
“위층으로 모셔라.”
동창 무인의 한 마디였다. 장현걸이 동창 무인들을 알아 본 것처럼 장현걸이 후개임을 단숨에 알아보았다는 뜻이었다. 장현걸의 두 눈에서 기광이 번쩍였다.
‘대단해. 목숨을 걸어야겠군.’
“이 쪽으로 오십시오.”
안절부절 못하던 점소이의 얼굴이 다시없을 정도로 밝아져 있었다. 드디어 곤란한 일을 면했다는 표정이었다.
이 층으로 올라온 장현걸은 그 층 전체에서 단 하나의 인기척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만나기로 한 암행 중랑장 조홍이 있을 것이고, 다른 무인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위치를 잡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암행 중랑장은 고수다. 방문 하나 사이로도 기척을 감출 수 있는 절정 고수라는 뜻이었다.
“기다리시던 손님이 오셨습니다. 대인.”
가장 내측의 문을 두드리는 점소이다.
공손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정적이 휩싸인 복도를 가득 메웠다.
눈앞의 문. 그저 닫혀 있을 뿐인 객잔의 나무문일진데, 마치 천 겹의 빗장을 두른 철문처럼 보였다. 잠시의 침묵, 이내 그 안으로부터 차분한 대답이 돌아 왔다.
“문은 열려 있소. 들어오시오.”
절제되고 절제된 가운데 무서운 힘이 깃든 목소리였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느낌이 오싹함에 가까웠다.
‘만일 이것이 함정이라면?’
장현걸은 불현듯 치밀어 오르는 의문을 억눌렀다.
언제부터 그렇게 소심한 소인배가 되었을까. 문을 열어젖히는 손이 자신의 손 같지가 않았다. 개방 후개, 혈혈단신으로도 세상 두려울 것 없이 자유분방하던 때가 있었던 그 일진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성큼 들어선 장현걸이다. 그의 눈에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와 한 쪽 창가에 등을 지고 있는 남자 두 사람이 비쳐 들었다. 그들의 외모나 인상보다 먼저 다가온 것은 충만하게 응축되어 있는 막강한 기파들이었다. 아래 층에 있던 자들도 고수들이었지만, 이들은 그들과 또 격이 다른 자들이었다.
“개방 후개라더니, 이리도 단정한 차림일 줄은 몰랐소. 후후후.”
먼저 말을 걸어 온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그 남자를 한 눈에 살핀 장현걸.
날카로운 눈매에 번뜩이는 지모(智謀), 무공의 수준은 추측키가 힘들었다.
수염을 길렀지만 불혹(不惑)의 문턱을 넘은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왼쪽 가슴에 흑화(黑花) 문양, 전체적으로 걍팍한 인상이다. 장현걸은 그를 보며 한 사람의 이름을 절로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흑화대 대주! 심화량.......!’
사람의 기파라는 것은 무공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동창 삼(三)개 대대 중 첩보 활동과 정보 분석을 주 임무로 하는 곳이 바로 흑화대인 바.
흑화대 대주 심화량이라면 황실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지략가라 알려져 있다. 황실 대무림정책의 핵심인물이며, 흑호대와 흑살대를 암중 지원하고 있는 자, 이른 바 동창의 두뇌라 할 수 있었다.
“황실의 실세를 만나 뵙는 자리일진데 대명 제국의 백성으로서 어찌 예(禮)를 차리지 않을 수가 있겠소. 심 대주.”
“역시나 단번에 알아보는군. 대 방파 개방의 후개라더니, 과연 그에 걸 맞는 안목을 지니셨소. 그렇소, 내가 동창 흑화대 대주 심화량이오.”
심화량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입은 웃고 있을 지라도 그 눈에는 일말의 웃음기조차 깃들어 있지 않다. 냉혹하게 번뜩이는 눈빛, 이 자는 위험한 자다. 백번 조심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동창의 행사는 은밀하고도 과격하며, 잔인하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개방의 장현걸이오. 일단은 후개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지위지만.”
장현걸은 스스로의 처지를 감추지 않았다. 심화량 같은 자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은 바보짓이다. 장현걸은 활로를 구하기 위해 온 자, 모든 열쇠는 저쪽이 쥐고 있다. 엉뚱한 수작을 부릴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의외로 솔직하군. 이야기가 빠르겠어.”
심화량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시 말을 멈춘 심화량, 그가 장현걸을 직시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개방 후개.......사면초가에 몰린 상황, 지금 그곳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보시오?”
생사를 가르는 질문이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위협들, 장현걸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오 할.”
“오 할이라.......너무 높게 잡았다 생각하지 않소?”
“아니, 오 할도 적소. 그저 죽지 않으려고만 한다면.”
심화량과 장현걸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미간을 좁히는 심화량, 그가 일순간 눈빛을 거두며 창가에 선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할....... 조 공자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조 공자.
창가에 선 남자는 심화량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심화량에 집중되어 있던 장현걸의 시선이 창가에 선 남자 쪽으로 움직였다. 장현걸이 이 방에 들어온 처음부터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먼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를 보며 심화량이 고개를 내저었다.
“조 공자!”
“.......”
“창 밖을 아무리 본다 한들, 북풍에 이르지 못함을 잘 알고 있지 않소. 스스로의 위치를 알고 다음을 기하시오.”
심화량의 어투는 질책에 가까웠다.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나직한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지.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지.”
햇살을 받으며 몸을 돌린다.
놀랍도록 젊은 얼굴이다. 초원을 달리는 거친 기상이 깃들어 있었다.
이런 자는 없다.
중원 천하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기도였다. 장현걸이 겪어보지 못한 무언가가 그 남자에게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복수에 나서지도 못했다.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조용한 목소리에 무섭도록 강한 기운이 숨겨져 있었다.
영락제의 북벌 전후를 기하여 혜성처럼 나타난 자, 수라장을 헤쳐 온 장수의 안광(眼光)이 장현걸의 전신으로 쏟아졌다.
“개방의 후개라 했나? 죽는 것은 순간이다. 누구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어. 오 할을 말했다. 풍대해 밑으로 들어가면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지금 이야기일 뿐이야.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는 법이니까.”
그의 입에서 발해지는 하대는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기상이 저절로 우러나오니 거부감조차 가질 수 없다.
그뿐인가.
그는 장현걸이 말한 오 할의 의미도 단번에 알아챘다.
죽지 않기로만 한다면 단심맹에 잠식당한 개방 안에서 풍대해의 수족처럼 살아가면 된다. 그래서 오할이다. 그 밖의 방법을 고집한다면 살 수 있는 확률이 일 할도 되지 않았다.
“내 이름은 조홍이다. 북로 원정에서 폐하를 모셨고, 지금은 단심맹을 쫓고 있지.”
조홍.
그렇다. 사부님, 용두방주가 건네 준 이름이다.
북로군에 종군하기 직전까지는 종 사품 국자감 제주로서 주목받던 문인(文人)이었을 뿐인 자가 어느 새 이런 모습으로 변하여 무림의 일에 관여하고 있다니, 조사해 온 자료만 가지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모습이다.
“단심맹의 음모는 넓고도 깊다. 꾸미는 짓도 대담하기 그지없지. 대응하기가 쉽지 않아.”
조홍이 심화량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심화량. 분명한 상하관계가 드러난다. 그것을 본 장현걸은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자......!’
동창 흑화대 대주라 하여 온 신경을 집중했었지만, 그가 상대할 자는 심화량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심화량보다 더 무섭고 더 강한 자다.
황실 대(對) 무림 정책의 진정한 핵(核)이 바로 이 남자인 것이다. 황궁이야말로 또 다른 강호의 복마전(伏魔殿)이란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을.”
조홍의 말에 심화량이 납작한 철제 상자 하나를 꺼내어 올렸다. 조홍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안에는 그 단심맹에 가담한 무림 인사들과 그 증거들이 담겨있다. 개방 풍대해에 관한 것도 물론 이 안에 있지. 단심맹을 단죄하기 위한 철함. 우리는 이것을 단심궤(丹心櫃)라 부른다.”
단심궤.
칙칙하게 빛나는 철제 상자 위, 핏빛과도 같은 붉은 주사로 단심(丹心)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뇌리를 스쳐가는 느낌.
장현걸은 그 철궤를 보며 생사의 갈림길을 느꼈다.
“어떤가. 열어 볼 용의가 있나?”
열어 본다는 것.
그것은 열어 보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그것을 여는 것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열고 나면 그 안에 발을 들여 놔야 하고, 발을 들여 놓게 되면 단심맹의 집요한 공격을 받게 되리라.
죽음으로 돌진하는 길. 그래서 장현걸은 되물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방에 들어올 때 위축되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미망에 빠져 허우적대던 장현걸. 그가 예전의 영명했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거지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거지는 오직 구걸을 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법이오.”
“무슨 뜻인가.”
“나는 구걸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말이오.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서.”
장현걸의 말을 듣는 조홍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구걸을 이야기하면서도 당당했다.
개방 후개라더니, 강호의 흔한 무인들과는 확실히 다른 데가 있었다.
“그래서, 구걸할 상대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소. 기껏 구걸해 얻은 것이 이 철궤라면, 생명을 구걸하려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겠소. 오 할.......그 철궤에 연관되면 그 오 할은 십 분지 일인, 오 푼도 채 안 되게 될 것이오.”
“오 푼이라.......오 푼이나 될까?”
오 푼도 높게 잡았다. 조홍의 반문에 장현걸이 난감한 웃음을 떠올렸다.
“좋소. 오 푼이 아니라 삼 푼이라 해 두겠소. 조 공자라 했소? 허면, 조 공자는 오 할과 삼 푼 중 어느 쪽에 걸겠소?”
“내 판단은 중요하지 않아. 자네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문제일 뿐.”
“그렇다면 말이오.......만일 내가 오 할을 택해서 이대로 돌아가기로 한다면.....그렇다고 곱게 돌려 보내주긴 할 생각이었소?”
“아니. 그럴 수야 없었겠지.”
조홍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살기(殺氣)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사나운 살의(殺意)보다 무섭다.
단심궤를 본 이상,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버린 이상 이미 장현걸을 거기에 얽혀 든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그대로 둘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본심을 숨기지 않는 조홍의 대답에 장현걸의 웃음이 더욱 더 짙어졌다.
“좋소. 내가 그 철궤를 가지고 할 일이 무엇이오?”
“열어 볼 용의가 생겼다는 말인가?”
“선택의 여지란 처음부터 없었지 않소?”
“.......”
“열어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오. 그저 목숨을 부지하는 것과 생명을 얻는 것은 다르니까.”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목숨을 부지하는 것과 생명을 얻는 것이 다르다?”
“그렇소. 오 할로 죽지 않는 것과 삼 푼으로 삶을 얻는 것, 제 아무리 구질구질한 거지일지라도 일단 후개의 이름을 달았으면 삼 푼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소.”
“말은 좋군.”
조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심궤에 손을 올리는 조홍.
장현걸이 그의 손을, 단심궤를 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을 가지고 대체 내가 무엇을 하길 바라오?”
“생각해 봐.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소. 내게는 힘이 없소.”
“의외로 솔직해. 듣던 것과 확실히 달라.”
조홍이 이번에는 심화량을 돌아보았다. 심화량이 건네 주는 몇 장의 종이들. 조홍이 그 종이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늦어도 여섯 달, 이르면 그 전에 전 중원을 아우르는 무림맹이 열리지. 팔황의 존재는 이미 덮어두기엔 너무나도 커져 버렸어. 그 때 무림맹에서는 팔황의 재림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있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 때.......터뜨리라는 것이오?”
“그렇다. 물론 그 전까지 터뜨릴만한 충분한 준비를 갖춰야 할 것이다. 지금 단심궤에 있는 자료만으로는 부족해.”
장현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물었다.
“.........그것이 전부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잘 아는 군.”
빠르게 읽어 낸다. 장현걸, 그 지모만큼은 확실히 알아 줄 만 했다.
장현걸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냈다.
“언제까지요? 내 목숨의 기한은?”
“세 달.”
역시나 그렇다.
세달, 세달이면 죽는다. 장현걸이 고개를 저었다.
“세 달이라. 너무 짧은데.”
“그 이상은 곤란하다. 그 이후에는 자네가 단심궤를 지녔다는 정보를 팔황에 흘릴 것이다. 그 이후로도 살아남으려면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거야.”
“미끼가 되라는 말이오?”
“미끼라기 보다는 낚시바늘이겠지.”
“차라리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 낫겠군.”
“대 개방의 후개가 단심맹에 죽어 준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큰 구실이 되지 않겠나?”
농담이 아니다.
장현걸은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장현걸이 정말로 죽는다 해도 조홍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죽음을 구실삼아서라도 단심맹을 칠 생각이 틀림없었다.
“.......지원을 없소?”
“무엇에 대한 지원?”
“이대로라면 한 달도 채 못 버틸 것 같은데.”
“바랄 것을 바래야지. 그 지경에 이른 것도 따지고 보면 자네 잘못 아니었던가?”
“........!”
놀랄 것도 없다.
역시나 조홍은 알고 있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 장현걸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쩔 텐가. 지금은 자존심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장현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내가 그토록 빨리 죽는다면 조 공자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지 않겠소?”
“뭘 모르는군.”
“?”
“단심궤를 넘긴 것은 자네 하나 뿐이 아니야.”
“!!”
장현걸의 눈이 커졌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이들은 장현걸에게 그리 큰 희망을 걸고 있지 않았다.
죽어도 그만이라는 말은 그래서 할 수 있는 게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는 일. 이런 중대한 일을 그처럼 궁지에 몰린 한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장현걸은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왜 나요?”
“우문(愚問)이다. 팽가의 망나니는 그런 이유 따위 상관하지도 않았어.”
“내 말은 왜 당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느냐는 것이오.”
“왜 직접 나서지 않냐라.......”
조홍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였다. 아래층으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직접 나서지 않는 것은 바로 이래서지.”
챙! 채애앵!
조홍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장기 소리가 들려 왔다.
“장군! 심 대주님! 적습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우렁찬 경호성이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갑작스럽기 그지없는 변화였다.
우당탕! 채애앵!
조홍이 눈을 뜨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은 발걸음이다. 그가 한 쪽 벽에 세워져 있는 창 한 자루를 비껴들었다. 그가 문 앞에 섰을 때였다.
우지끈! 콰광!
문짝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백색 문사복에 하얀 가면을 쓴 괴인들이 뛰쳐 들었다.
“어딜!!”
조홍의 손에서 군용(軍用) 철창(鐵槍)이 불을 뿜은 것은 순간이었다.
콰직! 퍼어억!
엄청난 창술이다. 순식간에 휘몰아치는데, 실로 보기 드문 위력을 지녔다.
세 명의 괴인들이 문지방을 제대로 넘어보지도 못한 채 피를 뿌리며 튕겨 나갔다.
“이 놈들! 신마맹(神魔盟)입니다. 숫자가 많아요!”
“여기서 다 막지 못하겠습니다. 두 놈 더 올라갑니다!”
아래층으로부터 연신 경호성이 들려왔다. 밑을 지키고 있던 동창 흑호대 창위들의 목소리였다.
그렇다.
이제야 알겠다.
그만한 고수들이 아래를 지키던 것은 장현걸과의 회합 때문만이 아니었다. 바로 이런 사태를 대비한 조치다. 계속하여 들리는 병장기 소리, 두 명의 백의 괴인들이 올라오기가 무섭게 조홍의 창에 막혀 쓰러지고 만다.
그제까지도 의자에 앉아 있던 심화량.
그가 몸을 일으키며 단심궤를 들어 올렸다.
태연한 목소리, 그가 장현걸을 직시하며 말했다.
“이렇듯 우리들의 상대는 단심맹 하나가 아니오. 강호의 일은 강호의 협사들이 해결해야지, 우리가 나설 여지가 없소. 용두방주의 기대를 져 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겠소.”
“후우.......어쩔 수가 없군.”
“받으시겠소?”
“물론이요. 어떻게든 해 보겠소.”
“해 보겠소로는 안 되오, 반드시 해 내야 하오.”
“내게는 큰 기대를 걸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말장난 할 여유가 없소. 서두르시오!”
재촉하는 심화량이다.
단심궤를 건네받는 손에 목숨의 무게가 실렸다. 그것을 만들기 위하여 죽어간 동창 창위들의 목숨과 금의위 위사들의 목숨, 그리고 장현걸 자신의 목숨이 크지 않은 철궤 속에 있었다.
“그럼, 무운들을 빌겠소.”
장현걸이 창틀을 박차고 뛰어내리기 직전이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기운이 그의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강적이다.
황미(黃眉)가 그려진 검은 가면을 쓰고, 고풍스런 전포를 입은 남자가 부서진 방문 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에 맞서는 조홍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미대왕의 가면. 이젠 마군들까지 나오는가.”
깊이 감추어진 힘.
함께 싸워야 할 것인가.
장현걸은 일순 망설였다.
나타난 황미흑면의 무력은 굉장하다. 손속을 나눠보지 않아도 절로 알 수 있다. 조홍과 심화량이 제아무리 고수라도 벅차 보일 정도였다.
“어서 가시오! 이곳은 걱정말고!”
심화량의 외침은 고함에 가까웠다.
흑면의 남자에게 창을 겨눈 조홍의 뒷모습, 강한 기파가 절로 느껴지는 데에도 흔들림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강력한 대적(大敵)을 여러 번 상대해본 듯 한 모습이다.
장현걸이 이를 악물고 창틀을 박찼다.
텅!
땅에 착지한 직후다.
장현걸은 뒤쪽으로부터 짓쳐드는 예리한 기운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몸이 하늘로 솟구치며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다.
‘이 놈들은......!’
아수라장이 된 길거리와 객잔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새 몰려들어 있는 괴인들.
눈에 띄는 모습들이다.
하얀 가면을 쓴 백의 괴인들의 숫자가 이십 명을 헤아렸다. 마치 하얀 색 꼭두각시들이 제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광경, 장현걸은 그들을 보며 수십 년 전 잊혀진 이름들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백면뢰(白面儡), 백뢰단(白儡團)! 신마맹의 주력 부대!’
쒜엑! 파바박!
도주로가 마땅치 않았다.
본신 무공을 쓴다면 빠져나가기가 어렵지 않을 테지만 개방 신법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그의 눈이 활로를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이 쪽인가!’
채앵! 채챙!
연신 터져 나오는 병장기 소리가 어지러운 골목길을 더욱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백주 대낮에 이 정도 규모의 싸움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은 드물었던 바, 이제는 전 중원에서 이런 일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이다. 관가와 황실의 힘이 강해지고 있음에도 정작 강호의 싸움이 통제가 되지 않는 기현상이다. 장현걸은 세 자루 협도(狹刀)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스스로가 난세의 한복판에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 실감할 수가 있었다.
장현걸이 백면뢰들을 뿌리치며 대로 한 복판으로 나왔을 때였다.
그의 시야 한 쪽으로 강력한 기도를 뿜어내는 한 남자가 비쳐 들었다.
흉악한 인상,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친 봉두난발의 괴인이었다.
파파파파!
‘제기랄!’
괴인이 장현걸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위기였다.
대단한 기세, 본신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상대할 수 없는 자다.
장현걸이 미간을 좁히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타구봉이 없으니 강룡십팔장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취리리릭!
괴인의 팔에서부터 녹색의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일장에 이르는 거리, 채찍이다. 보기 드문 기병으로부터 무서운 내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엇!”
옆으로 몸을 돌리며 장력을 쳐 내려 했던 장현걸이다. 그러나 채찍의 끝은 장현걸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살아있는 듯 움직이며 빠르게 장현걸을 비껴간다. 도리어 놀란 장현걸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퍼억! 퍼버벅!
녹색의 빛줄기가 절묘하게 움직이며 백면뢰 두 놈의 몸을 쳐 냈다. 채찍에 맞았을 뿐인데 마치 커다란 곤봉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뒤쪽으로 날아간다. 대단한 위력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장현걸의 발이 일순간 멈추었다.
봉두난발의 괴인은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옆을 지나쳐 백면뢰들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난폭하고도 사나운 무공으로 단숨에 놈들을 헤집어 놓으니 그 기세가 실로 놀랍다. 백면의 꼭두각시들로서는 감히 그의 기세를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대체.......!’
그렇다.
봉두난발의 괴인은 얼굴은 흉악해도, 조홍이나 심화량과 같은 편이었던 모양이었다.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싸움.
이것은 기회다.
장현걸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쏘아졌다.
“저것은......!”
얼마 가지도 않았을 때다.
장현걸은 다시 한번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봉두난발의 녹편(綠鞭) 고수가 나타난 방향, 그쪽으로부터 달려오고 있는 또 한 명의 고수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황산대협 채정광!’
장현걸은 그 고수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황산대협, 그는 그야말로 대단한 명성을 지녔다.
속가십대권법 중 하나라는 대력호왕권을 연마한 권사(拳士), 무엇보다 장현걸은 삼 년 전 직접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뛰어난 무공까지도.
텅! 터어엉!
언제나처럼 힘이 넘치는 신법이다.
녹편의 고수가 흩어 놓은 백면괴들 사이로 거침없이 돌진하더니, 객잔의 벽을 박차고 이층의 난간을 향해 몸을 날린다. 조홍과 심화량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간단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황산대협, 그렇다면 저 남자는.......!’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 백면괴들을 쓰러뜨린 녹편의 괴인을 바라보았다.
바로 알아 보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다.
저토록 특징 있는 기병을 사용하는데.
‘녹사신편!! 왜 당장 알아보지 못했을까.’
장현걸은 그제서야 몸을 돌렸다.
황산대협까지 뛰어든 객잔 이층으로부터 굉장한 충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정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북경의 동인회까지 나서다니.......!’
이 싸움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난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황산대협과 녹사신편.
두 사람 모두 동인회라는 특수한 문파의 일원이었다.
북경을 근거지로 하며 쟁쟁한 속가 무인들이 그곳에 속해 있다.
뛰어난 사람이 많다지만 그 백미는 역시나 동인회의 회주다.
귀제갈(鬼諸葛) 유준(劉俊), 그가 바로 그곳의 회주였다.
강호 최고의 지략가. 북경에 틀어박혀 은자(隱者)를 자처하고 있기에 그럴 뿐, 강호에 나선다면 언제든 풍운을 일으킬 수 있는 인재였다.
‘황실도 총력을 기울이는 이 상황. 이제는 사선(死線)에 섰다. 한 달 안에 목숨이 날아가지 않으려면........서둘러야겠어!’
걸음을 빨리하는 장현걸이다.
죽음이 담겨있는 상자.
단심궤.
철궤를 들고 있는 그의 손으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시리도록 전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