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56)

   *                                *                                 * 

 “그 쪽은 안 돼. 적들이 와.” 

 “귀신이 따로 없네요. 그것도 공명결의 효용인가요?” 

 청풍은 적들의 접근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서영령이다. 

 완전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쪽 길은 어때요. 흔적을 지우기가 편할 거예요.”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령매가 고생스러울 텐데.” 

 이렇게 도주하던 경험이 많았던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두 사람의 호흡이 너무도 잘 맞고 있었다. 

 진즉부터 둘만 따로 움직였더라면 그것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고 생각될 정도다. 

 청풍의 부상이 문제였지만, 그마저도 서로를 배려하며 어렵지 않게 극복하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요?” 

 “나쁘지 않아. 도리어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해.”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도 조심해요.” 

 “조심은 령매가 해야지.” 

 두 사람의 이동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못했다. 

 적들의 접근을 미리 감지하고 움직이고 있으니 어느 정도까지는 안전하다고 해도, 완전히 적들의 추격을 뿌리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안심하기엔 이르다는 말이다.  

 조심스레 나아가는 발걸음. 

 문득 서영령이 청풍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자는 대체 뭐죠? 사도쯤이나 되는 자가........” 

 “사도? 뭐랄까. 개인적인 원한이겠지.” 

 “개인적인 원한이요?” 

 “그래.” 

 “풍랑에게 말인가요?” 

 “응,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그 자의 팔은 봤나?” 

 “한 쪽 팔이 없었던 거요?” 

 “경황 중에도 잘 봤네.”    

 “혈영마참까지 쓰는 성혈교의 사도가 어인 일로 외팔이일까 했을 뿐이에요.” 

 “그것, 사실은 내가 한 거라서.......” 

 “예?” 

 서영령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관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오솔길이다. 키가 큰 풀들이 바람에 쓸리며 시원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청풍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석가장의 참사 때야. 그 자가 방심했던지, 아니면 운이 좋았든지.”  

 “아니 이봐요. 풍랑, 성혈교 사도의 팔은 운이 좋다고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렇지 않아. 그 당시 그자는 분명 나보다 강했으니까. 사소한 실수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뿐이지. 이 쪽에는 신병(神兵)이 있었거든.” 

 청풍이 허리춤에 매달린 청룡검을 가리켰다. 

 청풍은 그 순간, 용뢰섬을 발동하며 그의 팔을 잘랐던 순간을 기억해 냈다. 

 죽음의 위기. 

 그 당시의 싸움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할 정도다. 실력 이상의 상대로 그만큼의 힘을 보였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석가장이라고 했죠? 그럼, 그 때부터 쫓아 온 걸까요?”  

 “그것이야 알 수가 없지. 석가장 전체가 대 폭발에 휩쓸려 무너졌기 때문에,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가 여기까지 쫓아 올만큼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는 사실일거야.” 

 “에이.......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죠. 설마하니 풍랑 하나만을 노리고 왔을까요.” 

 “.........” 

 ‘령매, 나를 노리고 온 것이 맞아.’ 

 청풍은 마지막 대답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마음 속에만 담아 두었다. 

 굳이 서영령을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 

 흙먼지 사이로 보았던 성혈교 오 사도의 눈빛, 세상을 집어 삼킬 듯한 집념과 살기가 그 안에 있지 않았던가. 오직 청풍 하나만을 향한 집념과 살기가. 

 “여하튼 다시 부딪쳐서는 안 돼. 지금 나에겐 그를 막을 힘이 없어.” 

 “다시 부딪치다니요. 그럴 일은 없어요. 전 숙부님이 계셨잖아요.” 

 “.......그것도 그렇군.” 

 하지만 청풍은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참도회주가 강하기는 해도, 승부란 것은 장담할 수가 없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청풍이 그 때 사도를 물리쳤던 것처럼 그 반대의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서 힘을 되찾아야 해.’  

 청풍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온전한 몸이었다면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힘만 되찾으면 아무리 그때보다 강해진 사도일지라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만일, 내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강호의 일에 ‘만일’이란 가정은 안 하니만 못한 법이었다. 만일을 찾기에 앞서, 은신처를 구하고 힘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청풍과 서영령은 그 이후로 용케 적들과 만나지 않았다. 

 아니, 추격자들이 전혀 그들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옳다. 

 청풍과 서영령은 예전의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얻었다.  

 더욱이 청풍에게는 공명결이 있었다. 

 적들의 살기를 감지하고 피해내는 능력이다. 

 그 전에도 훌륭했지만, 지금은 더 뛰어나다는 말이었다. 

 열흘이 넘는 시간을 이동하며 마침내 서영령이 청풍을 이끈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이었다.  

 길 하나 없는 깊은 산속.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인상적인 곳이다. 벌써부터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이 무척이나 고왔다.  

 계곡 안쪽으로 얼마나 들어 왔을까. 

 갑작스레 느껴지는 인기척들이 있었다. 

 난데 없는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 맑고 귀여운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어! 선녀 누나다!” 

 “아부지! 선녀 언니가 돌아 왔어요!!” 

 ‘마을......?!’ 

 계곡을 끼고 도는 작은 분지였다. 

 크게 놀란 청풍이다.   

 은신처라기에 당연히 인적이 없는 곳일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조그만 마을, 자연이 주는 혜택에 먹고 사는 것이 걱정 없는 산촌(山村)이 자리 잡고 있다. 

 청풍이 눈을 크게 뜨며 서영령을 돌아보았다. 

 맑은 웃음이 배시시 떠오른다. 

 그렇다. 

 그녀는 일부러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럴 줄은 몰랐죠?’란 표정이 하얀 얼굴에 가득했다. 

 “아부지, 아부지! 선녀 언니가 남자도 데리고 왔지 뭐예요! 이리로 나와서 좀 보세요!” 

 호들갑을 떨며 달려가는 꼬맹이 두 명은 굉장히 귀여웠다. 

 마을 입구 쪽, 정갈하게 다듬어진 초막에서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쿠, 선녀가 남자를 데리고 왔다고? 그렇다면 그것은 신선(神仙)이거나 요괴(妖怪)가 둔갑을 한 것이겠구나! 어디 보자!”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울린다. 그를 본 청풍의 두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무인? 그것도 고수......!’ 

 느껴지는 내력이 대단했다. 이 정도면 매화검수 이상이다. 화산 장로에 필적하는 무공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상 아저씨.” 

 “그렇구나. 이번에도 도망 나온 것이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마을에는 별 일 없어요?” 

 “별 일이 있겠느냐? 오가 영감이 손주를 본 것 밖에 없지.” 

 “주 언니가 아이를 낳았어요? 와! 그거 축하해야 할 일이네요. 주 언니는 괜찮죠?” 

 “순산이었어. 윤 의원이 왔다 갔거든.”  

 “아, 그래요? 윤 의원께선 잘 지낸대요?”  

 “글쎄, 지금은 어디라더라, 무슨 섬에 가 있다던데.......속세를 떠나 있는 기분이라고 그러더군.” 

 친근함이 가득한 대화였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이야기들.  

 어떻게 이런 곳을 알았을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들끓고 있는 바깥과는 전혀 다른 곳,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그래, 옆에 데리고 온 남자는 누구지? 소개 시켜 주지 않을 텐가?” 

 “아, 풍랑. 인사하세요. 예전에 큰 도움을 주셨던 분이에요.” 

 서영령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라니, 그것으로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청풍이 포권을 취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청풍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청풍? 잠깐, 그 청풍?”     

 중년 남자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가 서영령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청풍을 돌아보았다. 청풍의 허리춤에 매달린 청룡검과 주작검, 그 두 개의 신검을 발견한 그가 손뼉을 딱 마주치며 놀라움의 탄성을 발했다. 

 “청홍무적! 청홍무적검이로구나! 질녀는 대단하군! 확실히 남자 보는 눈이 있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청홍무적검이라 하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체 어떤 식으로 소문이 났기에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청홍무적검이라니, 여기까지도 그런 풍문이 돌았나요?” 

 중년 남자의 반응에는 서영령도 의아함을 느낀 것 같다.  

 세상과 동떨어져 있던 마을일진데, 강호의 일이 이렇게 알려지고 있다니 의외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중년 남자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풍문이 돈 것은 아니고....... 워낙에 강호가 심상치 않다 보니까 오가 영감이 좀 알아보라고 하셨지. 여하튼 당금 강호에서 벌어진 가장 놀라운 사건들 중 하나가 청홍무적검이 벌인 일이니까.” 

 ‘그것이 그리도 대단한 일이었나........’ 

 청풍은 일이 그렇게 까지 될 줄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과거의 은(恩)을 갚았을 뿐이다. 

 찾고자 하는 사람과, 찾고자 하는 물건이 있었을 뿐이다. 

 강호의 명성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강호는 어느새 청홍무적검의 이름으로 들끓고 있단다. 낭중지추, 송곳이란 언제든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법, 청풍은 그와 같은 강호에 생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하. 전혀 모르는 표정이로군. 이거 걸작인데! 그런 경우들이 있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경우 말이야. 질녀,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그것은 좋은 거니까. 그것도 매우!” 

 중년 남자는 무엇이 좋은지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묘한 느낌이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청룡검과 주작검을 보았으면서 탐내는 느낌이 없었다. 두 검이 어떤 검인지 알아보았을 것이 틀림없음에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다. 강호의 일에 휩쓸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얼굴이 아니라 그 사연들을 모두 흘려보내고 평온함을 찾은 얼굴이었다. 

 “후우.......듣기 나쁜 말은 아니네요. 취운암은 그대로죠?” 

 ‘취운암?’  

 “당연하지. 우리 질녀의 거처를 누가 건드렸겠나? 긴 여행을 해 온 얼굴인데 가서 좀 쉬도록 해. 영감께 인사는 천천히 드려도 될 거야. 손주 얼굴 보느라 정신이 없거든.” 

 “알겠어요. 아저씨. 또 신세를 지네요.” 

 “신세라니 당치 않아. 아, 그리고 청풍 도우(道友), 막상 인사가 늦었군. 내 이름은 상학이라네. 화안리(和安里)에 잘 왔어. 이곳은 강호의 닿지 않는 곳, 구파든 팔황이든 이곳에서는 상관이 없지. 푹 쉬다 가게나.”  

 십여 가구 남짓 되는 마을을 지나 산 위로 올라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계곡 상류, 자그마한 연못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암자 하나가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 손을 안 탔다고 했지만, 분명 가끔 들러 치워주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정갈하게 정리된 암자였다. 

 “취운암?” 

 청풍이 서영령을 돌아보며 물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에 서영령이 살짝 얼굴을 붉힌다. 그녀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풍랑이 어린 시절을 지내던 곳이 취운암이라 들었어요. 풍암당으로 쫓겨났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별 이야기를 다 들었군.” 

 무척이나 오래 된 이야기였다. 

 사부님과의 추억이 담겨 있던 취운암과 같은 이름이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영령이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혹시, 기분 나쁜 것 아니죠? 떠올리기 싫은 일이라던가.......” 

 머뭇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행여나 싫어할까. 

 언제나 그를 위해주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그의 마음에 전해졌다. 청풍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 취운암....... 그저 그리운 이름일 따름이야.” 

 이상한 일이었다. 

 전혀 다른 곳. 

 보이는 풍경도 다르고 암자의 생김새도 다르다. 그런데도 취운암이라는 이름이 붙으니 묘하게도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사부님이 살아계시던 때, 그 때의 따뜻함이 다시금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몸은 좀 어때요?” 

 “피곤하긴 해도 괜찮아. 공기도 맑고, 회복하기엔 좋은 곳이 되겠어.”  

 “그럴 거예요. 게다가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 같이 강호의 무인이었던 사람들이라 서로간의 거처에 대한 예의가 확실해요. 연공실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죠. 다들 각자의 집에서 무공들을 단련하곤 하니까요.” 

 확실히 신기한 마을이었다. 

 은원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하면서도 아직 무공을 연련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상학이라는 중년 남자도 그렇다. 

 강호를 떠나온 모습이면서도 아직도 뛰어난 기도를 풍긴다. 무공을 손에서 놓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직까지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이런 곳은 어떻게 찾았어?” 

 “이 곳이요? 음.......실은 이 마을엔 무련 출신이 한 명 있어요. 어릴 때 저를 굉장히 아껴 주시던 분이었는데, 무련을 탈퇴하고 여기까지 왔죠.”  

 “탈퇴?” 

 “말하자면 도주고.......또 달리 말하며 배반이죠. 그런 경우엔 그에 따른 대가가 필요해요. 그 분은 그 대가를 치루었고, 결국은 무련에서도 탈퇴를 인정받게 되었죠.” 

 “대가라니.......?” 

 “대가는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어요. 무련에 대한 공로(功勞)가 될 수도 있고, 또는 다른 것이 될 수도 있겠죠. 보통은 무공(武功)이에요. 숭무련에서 받은 무공을 돌려주거나, 아니면 무공을 증명하거나, 둘 중의 하나죠.” 

 “돌려준다는 것은 무공을 폐(閉) 한다는 말인가?” 

 “예. 그렇죠.” 

 “가혹하군.”  

 “가혹하긴 해도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죠. 무파(武派)로서 당연한 처사잖아요.” 

 “그럼 이곳에 살고 있다는 그 사람도?” 

 “아니요. 그 분은 달라요. 그 분은 무련에 세웠던 공로가 대단했고, 거기에 더해 스스로의 무공을 증명하셨었죠.” 

 “증명이란 또 무슨 말이지?” 

 “비무(比武)죠. 무련은 무(武)를 숭상하고, 그것이 첫 번째가 되는 곳이에요. 달리 뭐가 있겠어요?” 

 서영령은 웃었다.  

 마치 어린 아이라도 된 것처럼 이것저것 질문하는 청풍이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무련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가 봐요?” 

 “많지. 령매가 나고 자란 곳이니까.” 

 “에이......농담하지 말아요. 풍랑. 그리고 무련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요. 서로 다른 곳에서 자란 이야기를 자꾸 해 봤자, 결국은 기분만 상하잖아요.” 

 “.......”  

 “알았어요.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그보다, 청홍무적검이라니......정말 거창한 칭호 아니에요?” 

 “응. 과하지.” 

 “그런데요.......생각을 좀 해보니까 그럴 만도 하겠어요.” 

 “그것은 또 무슨 소리야?” 

 “그거 알아요? 풍랑이 펼치는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풍랑은 항상 아직 멀었다고 하죠. 그런데 풍랑이 한 걸 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서영령이 청풍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 켠에 놓여있는 통나무 의자에 청풍을 앉혀 놓고는 나무 막대기를 들어 땅바닥에 커다란 땅덩어리를 그려 냈다. 

 “비검맹은 말이죠, 비검맹 혈사 이후 장강 줄기의 대부분을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었어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황실 수군(水軍)의 영역권이라고해도 이 정도는 확실히 그들의 영역이었죠. 그 정도면 중원 천하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에요. 그리고 실제로도 암암리에 굉장한 힘을 행사하고 있었죠.” 

 서영령의 막대기가 움직였다. 

 중원 땅덩어리 한 가운데 꾸불꾸불한 물줄기를 만들어낸다. 

 원도 그렸다. 

 비검맹을 상징하는 커다란 원(圓) 한 개. 장강 상류와 중류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원이었다. 

 “그것에 균열을 가져 온 것이 부활한 장강수로맹이에요. 예전에는 열 여덟 개 수로채들의 연합, 장강 십팔채라고도 불렸었죠. 비검맹에 무너졌거나 흡수당한 그들 수로채를 다시 규합하고 독립시키면서 새롭게 수로맹으로 끌어 올린 것이 바로 그 백무한이에요.” 

 물줄기 한 가운데, 백무한을 상징하는 작은 원(圓) 하나가 더해졌다. 비검맹의 그것에 비하자면 잡아먹힐 듯 작게 그려진 원이었다. 

 “백무한은 대단했죠. 비검맹을 뒤흔들고, 점점 더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어요. 결국 정면으로 총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을 때는 장강 전체가 요동칠 정도였죠, 하지만 수로맹은 비검맹에 이길 수가 없었어요. 비검맹은.......팔황의 일익이니까요.” 

 팔황의 이름. 서영령은 그 이름을 빨리 넘겨 버리고 싶은 듯 말을 빨리했다. 

 “비검맹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수로맹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죠. 맹을 이루던 주축들이 차례로 격파당하고 수로맹주 백무한은 죽음의 위기에 처했어요. 비검맹의 총 공세로 인해 빠져 나올 수 없는 사지로 몰리게 된 것이죠.”  

 대부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풍랑, 생각해 봐요. 이 때 그대로 수로맹주가 죽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비검맹의 지배가 더 단단해졌겠지.” 

 “그렇죠. 그랬을 거에요. 이미 수로맹은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을 입었던 상황, 그 우두머리까지 죽었다면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겠죠. 하지만 수로맹주는 살아났어요. 풍랑이 그렇게 만들었죠.” 

마지막 서영령의 목소리에는 청풍에 대한 애틋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막강한 고수들의 협공을 뚫고 장강을 가로 지르며, 꺼져가던 수로맹의 불씨를 되살려 놓은 것이다. 

 “풍랑은 결국 장강 전체의 판도를 바꿨다는 말이에요. 장강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것은 곧, 천하의 형세를 바꾸었다는 말과 같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강호인들이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하죠.” 

 청홍무적검이란 칭호는 바로 그래서 나온 이름이다. 

 무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 무력이 진실로 무적에 이르렀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력이 낳은 여파가 얼마나인가. 그의 무력이, 그가 행하는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힘을 지녔다면 그것이 곧 천하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그럼에도 청풍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안 돼. 전의 힘을 되찾는 것만으로는 육극신을 이기지 못하니까 말이야. 내가 강해지고 있는 동안 육극신이라고 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리라는 법도 없어. 강호에서 내가 뭐라고 불리고 있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거든.” 

 청풍의 말은 그가 지니고 있는 결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나 위를 보고 있는 마음. 

 그런 사람에게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것이 청풍의 천성이고,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인 것을.   

 세상의 평판은 평판일 뿐이다. 

 그의 천명은 청홍무적검이란 이름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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