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운.
천화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매화검수도 하지 못했던 일을 간단하게 해낸 제자였다.
본래 매화검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지 않다.
하운은 매화검수의 능력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의 공적은 여타 매화검수가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미 완성된 화산 장로에 필적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큰 전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너와 같은 제자가 화산에 있어서 다행이로다.”
“제자로서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겸손이 과하다. 어떤 매화검수보다도 훌륭한 공적을 세웠어.”
“매화검수보다 훌륭하다니, 그렇지 않습니다.”
천화진인은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하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차분히 제 할 말을 할 뿐이다.
천화진인이 미간을 좁혔다. 예상했던 반응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그러하다. 어떤 매화검수도 하지 못한 일을 했으니,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이 아니더냐. 헌데 그렇지 않다니 네 말을 이해할 수 없도다.”
“매화검수. 매화검수에게는 매화검수로서의 본분이 있는 까닭입니다.”
천화진인은 상당히 놀랐다.
한번 매화검수 자격을 박탈당했던 하운이다.
이제 와, 이만한 공을 세우고 매화검수보다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았다면 응당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이 지당한 일이다.
그런데, 하운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다. 기뻐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런 칭찬이 부당하다는 기색이었다.
“매화검수의 본분이라.......그렇기에 자네의 공이 더 빛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왜 대답이 없는 것이냐.”
천화진인의 물음에 하운의 얼굴이 결연한 빛을 띈다.
젊은이의 망설임은 잠시뿐, 이내 입을 여는 그다. 그의 목소리에 할 말은 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실렸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야기해 보아라.”
“매화검수에게는 그들이 지닌 역량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른 검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누가 누구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천화진인은 다시 한번 놀랐다.
하운은 진심으로 자신의 공이 대수롭지 않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세운 공쯤이야 스스로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느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오만함으로 보기 힘들다.
하운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다. 그가 하는 말에 담긴 의미는 그처럼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묻겠다. 그 말은, 매화검수의 역량이 떨어진다는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배우는 만큼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역량은 그 이상이겠지요.”
천화진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심상치 않은 말. 언중유골이 따로 없었다.
배우는 것보다 역량이 뛰어나다.
그러나 부족하다.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설마하니 이처럼 민감한 문제를 마음에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생각해 왔던 것.
매화검수를 키워내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결국 매화검수에게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네가 참으로 위험한 말을 하는구나. 내 귀에 네 말은 화산의 가르침이 잘못 되었다는 것으로 들릴 뿐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매화검수만큼 뛰어난 검객들은 어느 문파를 보아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천화진인도 안다.
그것이 진정 그 뜻이 아님을.
다른 누구도 아닌 하운이 바로 그 증거였기 때문이다.
천화진인은 과거의 하운을 잘 알고 있다.
욱일승천, 매화검수로서 영광의 길을 걸어 온 산 증인이 바로 하운이었지 않았던가.
하운은 그 당시 최고의 매화검수 중 하나였고, 그것이 그의 최선인 줄 알았다.
그는 매화검수로서 그에 어울리는 공로를 쌓았고,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하고 있었다. 여러 장로들뿐 아니라 천화진인까지도.
하지만 그의 재능이 꽃을 피운 것은 그 때가 아닌 지금이다. 매화검수의 자격을 박탈당한 이후에 이르러서 란 말이다.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다.’
천화진인은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운의 경우는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매화검수 자격을 박탈당한 제자들은, 대부분이 거기서 성장을 멈춘다.
다시 재기하는 경우는 극소수이며, 운 좋게 재기한다 해도 이미 앞서가 있는 다른 매화검수들을 따라가기 힘들다.
하운은 달랐다. 그는 강해졌다.
그 때와는 수준이 다를 정도로.
성혈교와 싸움에서 보여준 공적뿐이 아니라, 실제 눈앞에 서서 보여주는 기량도 상상 이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것은 곧, 매화검수라는 직분이 그에게 도리어 그의 성장을 가로막는 벽이 되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매화검수는 최고였지 않았나. 원로원의 경고가 있었지만.......그 때는 매화검수가 필요한 때였다.’
천화진인은 혼란에 부딪쳤다.
천검(天劍)의 명성, 하늘로부터 심판의 검이라도 받은 양 그 누구보다 강력한 결단력을 보여 줬던 그에게 처음으로 닥쳐온 혼란이었다.
원로원은 경고했었다.
매화검수라는 직분이 가진 특수성에 대하여.
‘매화검수에게 문제가 있어도, 이제 와서 매화검수를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랬다가는 화산 무공 전체가 무너진다. 매화 문양은 끝까지 모든 제자들의 목표이어야만 할지니!’
천화진인이 하운을 직시했다.
“네가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과히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만, 그 점에 대해서는 나 역시도 생각하고 있던 바다.”
“심려를 끼쳐 드린 것이라면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한 두 번의 직언으로 네가 세운 공로가 가려지지 않을 터. 대신 네게 임무를 한 가지 맡기겠다. 이 임무를 완수하면 매화검수로의 권한과 지위를 원래대로 복구시켜 주마.”
“.......하명.......하십시오.”
천화진인은 하운의 눈을 보며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운은 매화검수의 지위에 대한 미련이 없다. 장문인의 명이기에 따르겠다는 것이지, 매화검을 다시 얻기 위하여 임무를 맡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당혹스럽다 할 수 있다.
매화검의 의미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닌 까닭이다.
매화문양을 얻기 위하여 평검수들은 목숨을 건다. 하지만 하운으로서는 한번 매화검을 얻어 보았기 때문일까. 그에게는 매화검을 얻고자 하는 의지가 특별히 없어 보인다. 복권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조금도 달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번 임무는 한 사람을 찾는 것이다.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한 화산 제자다.”
“화산 제자, 실종 된 매화검수입니까?”
“매화검수........아니다. 그는 매화검수가 아니야.”
매화검수.
그러고 보면 그도 매화검수가 아니다.
천화진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매화검수가 아닌 자. 마치 매화검수의 자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강호를 활보하며 놀라운 사건들을 벌인 제자였다.
“제자의 이름은 청풍이다. 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고 들었다. 그를 찾아서 화산으로 되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이번 임무다.”
그 때는 몰랐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게 되는 것이 청풍이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성혈교와의 종전이 가까워 왔을 때.
장강 줄기를 따라 뻗어나가기 시작한 이름.
청홍무적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최후의 전력이다.
한 때는 버릴 것을 생각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품에 끌어들여야 할 제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화산의 그늘 아래 잡아 두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풍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몇 가지 남아 있었다.
원로원이 청풍을 싸고도는 것도 자칫하면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
집법원을 보냈던 것.
개방 후개를 통해 그를 핍박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다른 무엇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청풍의 사부에 관한 과거사였다. 선현진인의 죽음에 관한 일이 밝혀지면 곤란했다. 은폐 작업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하명은.......끝나셨습니까.”
“그렇다.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여라.”
포권을 취하고 돌아서는 하운의 두 눈에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화산 장문인, 천화진인으로서도 하운의 눈빛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아 챌 수가 없었다.
장문인의 노림수.
하운이 품고 있는 생각.
두 가지가 엇갈리는 순간을, 화산 장문인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이런 곳까지 올 필요가 있었습니까?”
고봉산의 말에 장현걸이 손가락을 들어 입에 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 그렇다. 싸울 준비를 해 둬.”
“또 싸움.......! 후우.......후구당이 아니라 투구당(鬪狗堂)이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던지.”
강서성 성도의 번화가다.
깊어가는 밤에도 밝은 빛을 흩뿌리고 있는 중이다.
장현걸의 시선이 고루거각 가득한 거리를 훑어내다가 한 곳의 장원에 이르렀다.
강서성 전직 위지휘사의 가택이었다.
단심궤에 들어있던 수많은 정보들.
그것을 토대로 얻어낸 실마리 중, 풍대해와 관련 된 비밀이 그 가택과 연결되고 있었다.
“오결 제자는 몇 명 와 있지?”
“다섯 명이요.”
“불러 모아. 자시(子時)에 실행한다.”
“직접 들어가게요? 저기를?”
“그래.”
장현걸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것을 보는 고봉산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무모한 짓이다.
단심맹의 단서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면, 위험천만의 복마전일 가능성이 높다. 기껏 오결 제자 다섯 명과 들어가기엔 너무도 위험한 곳이다. 불길함만이 가득했다.
“한 가지만 묻죠. 살아 나오는 게 가능하긴 한 겁니까?”
“모른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미치겠군요.”
“언제는 안 그랬나. 받아들여.”
툴툴대면서도 재빨리 몸을 돌려 제자들을 불러 모으러 가는 고봉산이었다.
생사를 같이 하게 된 이상, 누가 뭐래도 어쩔 수 없다.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더 나은 개방, 지금과 다른 개방.
개방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좋다. 그 마음이 아니었다면 장현걸을 따르는 것이야 한참 전에 포기했으리라.
한 시진이 지나고.
인적 없는 어둑한 골목길에 일곱 사람이 모였다.
장현걸과 고봉산.
그리고 오결 제자 다섯 명이었다.
“잘 알고들 있겠지만, 이 담장을 넘으면 그 때부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우리가 내원에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 일각만 버텨라. 그 다음에는 무조건 철수다. 손발만 잘 맞으면 모두 살아나올 수 있을 것이다.”
장현걸의 말이다. 다섯 제자의 눈에 결의의 빛이 반짝였다.
하나같이 젊은 제자들, 앞길이 창창한 이들이다. 그 때문에 장현걸은 해야만 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을 확률은 무척이나 적다. 미안하다.’
담장을 넘기 직전이다.
장현걸은 차마 그들을 이대로 사지에 몰아넣을 수가 없었다. 그가 덧붙였다.
“행여나 잡히게 되면, 자결 따위는 절대로 하지 말아라. 알고 있는 것을 다 불고, 목숨을 구걸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우리는 거지다. 그런 것을 창피해 해서는 안 돼.”
다섯 제자들이 서로를 돌아본다. 그들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잘 알고 있습니다.”
“별의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언제부터 그런 것을 챙기셨다고 그러십니까. 오히려 그러니까 잡히더라도 절대 불지 말고, 기꺼이 목숨을 버리라는 말로 들립니다요.”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을 하는 다섯 명이다.
장현걸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모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단심궤를 받은 이상, 이전처럼 정보만 빼오는 일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지(死地)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어야만, 훗날의 살 길을 도모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각오로는 죽기 십상이었다.
타탁!
마음의 부담을 다시 한번 느끼며, 땅을 박찼다.
벽공장을 쓰면서 담벼락을 타고 올라 높디 높은 처마에 매달렸다.
고봉산과 함께 같은 동작으로 올라오는 다섯 제자들.
장현걸이 가장 먼저 처마를 뛰어 넘었다.
휘리릭!
경미한 파공성만 남았다.
담벼락 저편을 타 넘은 장현걸의 눈에 어둑한 외원의 전경이 비쳐 들었다.
‘여기까지는 경비가 삼엄하지 않다. 하지만, 금세 달라지겠지.’
외원의 정원은 넓고도 화려했다.
제아무리 전직 위지휘사라지만, 그런 관직으로 이만한 가택을 꾸미기엔 그 화려함이 지나쳤다. 달리 축재를 해 놓지 않았고서야 절대로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사삭! 사사삭!
장현걸을 비롯한 칠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원의 나무 그늘을 이용하면서 조심스럽게 안 쪽으로 향했다.
스슥.
외원의 한 가운데가 가깝다. 내원으로 향할수록 돌아다니고 있는 무인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장현걸의 손짓.
세 사람의 오결 제자가 밝혀진 횃불 앞쪽으로 불쑥 걸어 나갔다.
화들짝 놀란 무인들이다. 그들이 창검을 꺼내들며 소리쳤다.
“웬놈들이냐!!”
“배가 주린 거지들이오!”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세 명의 오결 제자들이다.
순식간에 주의를 끌어 모은 그들 뒤로, 장현걸과 고봉산이 신법을 펼쳤다. 세 명의 제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무인들을 향해 성큼 성큼 발을 옮겼다.
“무슨 잔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소이다. 고대광실 좋고도 좋은 집이요, 산해진미가 지천에 널렸으니, 배가 주린 거지들에게도 한 몫 나눠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삐쭉 솟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정신을 산란하게 만든다.
장원을 지키던 무인들이 몰려든다. 가운데 있던 무인 하나가 노성을 내질렀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허튼 수작을 부리는가! 이곳은 거지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썩 꺼지 거라!”
틈이 보이는 순간이다.
장현걸과 고봉산이 내원의 담장을 타 넘었다. 사라지는 두 사람의 신형이다. 눈짓을 주고받은 오결 제자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인심도 야박한 집안이요! 불쌍한 거지들에게 던져줄 쌀 한 톨 없단 말이오!!”
참다 못한 무인들이 제자들의 목 밑으로 창검을 겨누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빛.
가운데 있던 무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난동을 피운다면 이곳에서 즉참하겠다.”
세 제자가 뚝 말을 멈추었다.
희극적인 표정이다.
무인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외원 한쪽에서 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이구동성이 터져 나왔다.
“어이쿠, 고대광실 으리으리한 대궐이로세. 세상 천국이 따로 없다.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산들, 세월이 무상하겠구나!”
그제서야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무인들이다.
개 중의 한 무인이 경호성을 내질렀다.
“이 놈들, 개방이다!”
“개방?”
개방이 왜 여기 왔을까.
안색이 굳어지는 무인들이다.
그들이 일제히 창검을 뽑아들며 두 눈에 살기(殺氣)를 품었다. 그냥 흘러든 거지들이라면 모르되, 이들은 강호를 사는 무림인들이다. 조금 전과 같이 위협으로만 창검을 꺼내든 것이 아니었다.
타탁!
한편, 장현걸과 고봉산은 외원의 소란을 틈타, 내원 깊숙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경계가 무척이나 삼엄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묘하게도 조용했다. 그림자와 그림자를 뛰어 넘으며 안 쪽으로 들어간다. 그들 앞에 화려하게 치장된 전각들이 나타났다.
장현걸이 손짓으로 그 중의 내측의 한 전각을 가리켰다.
달리는 두 사람이다.
외원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게 꾸며진 정원들이 그들 옆을 스쳐갔다. 고고한 달빛 아래, 아름다운 정원들이 외원의 소란까지도 조용하게 삼켜버리는 것 같았다.
휘익! 저벅!
두 사람이 한 전각의 창문에 매달리기까지는 촌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창문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가 어둑어둑한 전각 안을 소리 없이 움직였다. 어떠한 첩보집단 이상의 침투능력이었다.
팔락, 팔락.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촛불이 은은하게 밝혀 있는 일종의 서재였다. 누군가 책을 읽고 있는 듯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장현걸과 고봉산이 불 켜진 서재 앞에 섰다.
고개를 끄덕이고 들어서는 장현걸이다. 탁자 앞에 밝혀진 유등(油燈), 큰 체격의 노인 하나가 있다.
늘어진 살, 산처럼 나온 배가 먼저 눈에 띈다. 기름진 생활이 그 얼굴에서부터 보이는 노인이었다.
“황진동(黃珍棟)?”
“내가 황진동이네만. 누군가? 이 야심한 밤에?”
황진동이라는 노인은 조금도 당황한 것 같지 않았다.
관군 오천 육백을 통괄하는 위지휘사 출신이라더니,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정도로 간담이 충실한 모양이다.
“황진동, 황진동. 전직 위지휘사라.”
“알고도 예까지 들어왔다니, 그냥 도적들은 아니로군.”
이 정도로 태연한 모습이라면 장현걸로서도 놀랄 만 한 일이었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데, 처음부터 핵심적인 본론을 품고 있었다.
“위지휘사. 철광과 철기, 염상(鹽商)에 손을 뻗치고, 그것으로 축적한 자금을 단심맹에 대고 있었던 그 황진동 맞나?”
황진동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그가 느릿느릿한 어조로 되물었다.
“허허. 대단해. 그것을 어찌 알고 오셨을까?”
“길게 말하지 않겠다. 자금의 내역이 담긴 장부를 넘겨라.”
장현걸은 말은 단도직입 그 자체였다.
황진동이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이야 이 노인네의 목숨과도 같은 것인데, 이렇게 쉽게 달라고 해서야 안 되지. 그래, 차림새를 보아하니 개방이 틀림 없는데, 개방 정도로 이래서는 곤란해. 실수하는 거야.”
“실수? 뭘 잘못 알고 있군. 나는 이미 사선(死線)을 넘었어. 아무렇게나 날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쪽의 오산이겠지.”
장현걸이 탁자의 바로 앞에 섰다.
몸을 숙여 얼굴을 들이대는 장현걸이다. 노인의 비대한 체구, 연초 냄새가 확 끼쳐 왔다.
“그 태도, 이제 보니, 자네가 바로 그 후개로군. 되도 않는 일을 꾸민다는.”
“과연 되도 않는 일일까.”
황진동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가 두터운 손을 탁자 아래로 내리면서 말했다.
“장부를 달라......그런데 어쩌나? 제 분수를 모르는 애송이한테 줄 것은 이것밖에 없는데?”
쉬링! 우지끈!
탁자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리다. 탁자가 부서지고 종이조각들이 비산했다.
흔들리는 유등에 비치는 파편들.
그림자가 갈가리 찢어진다.
휘리릭! 파라라락!
불시의 기습이었다.
아래로부터 탁자를 뚫고 올라 온 소검(小劍)이 살벌한 빛을 품었다.
한 자루의 살검.
그것도 빨랐지만, 더욱 위협적이었던 것은 기관장치에 의해 발사 된 두 자루의 단도(短刀)였다.
지붕에서부터 내리꽂혀진 단도들이다.
전혀 예측하지 못할 공격. 누구라도 피하기 힘든 기습이었다.
“어.......어떻게.......?”
황진동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불안한 떨림을 발했다.
그렇다.
알지 못했다면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면 결코 어려운 공격이 아니다.
장현걸은 이미 소검 한 자루와 단검 두 자루를 완벽하게 비껴낸 후였다. 비껴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완벽하게 반격까지 가했다.
일수에 제압이다.
길쭉한 타구봉 첨극을 황진동의 견정혈에 겨누고 있는 상태였다.
장현걸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진동을 만나면, 하소검(下小劍)과 상단도(上短刀)을 조심해야 한다. 위쪽에서 내려오는 단도들은 반보 좌궁보로 피할 수 있고, 아래 쪽 소검은 어깨 위 반 치면 족하다 했지. 게다가 황진동의 금표검 하상격은 견정혈이 조문(操門)이라 쉽사리 파훼할 수 있다고 했다.”
“대체.......그것은.......!!”
견정혈을 찍어 누른 타구봉에서는 응축된 진기가 느껴진다.
치명적인 한 수다.
치명적이었던 것은 그의 타구봉 뿐이 아니다. 장현걸의 말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으되, 또한 밝힘으로서 상대에게 크나 큰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또한.......”
장현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떤 수법을 쓸 것인가부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까지, 속속들이 알고 왔다는 뜻이다. 황진동의 얼굴에 절망감이라고 할 만한 빛이 깃들었다.
“황진동은 스스로의 목숨을 무척이나 아끼는 자라, 자신의 몸이 다치는 것도 수명이 줄어드는 것도,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자라 하였다. 팔 하나 정도 부숴버리고 나면 과거사 장부쯤은 얼마든지 내 놓을 것이다. 그것이 조사결과였지. 어떤가, 그것이 맞나 확인해 볼까.”
장현걸의 어조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그대로 황진동의 견정혈을 압박한다. 위쪽으로 번져 나가는 통증에, 황진동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황진동이 땀을 온 얼굴에 비 오듯이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지 마라. 이, 이 놈......!”
“이 놈? 아직 제 처지를 모르는군.”
타구봉이 한 치 더 파고들었다.
황진동의 얼굴이 씨뻘겋게 변한다. 그가 비명을 토하며 소리쳤다.
“크악! 알겠다. 알겠어! 내가 졌다!”
“장부는 어디에 있지?”
“일단 이것부터.......!”
“어디에 있나? 그것부터 말하라.”
“이, 이것을 치워야 가지고 올 것 아닌가!”
“허튼 수작을 부리는군. 봉산, 들어 와라.”
장현걸이 고봉산을 부르자, 문 밖을 지키던 그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황진동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하.......한 명이 더 있었다니......!”
“장부는?”
“크윽! 아, 안 된다. 마.......말 하지 않겠어. 이것을 치우지 않으면.......!”
“마음대로 해라. 먼저 팔 하나를 못 쓰게 해 주지.”
마음이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
장현걸이 견정혈에 꽂은 타구봉을 더 깊이 밀어 넣었다. 무릎을 꿇으며 비명을 발하는 황진동이다. 그의 얼굴이 추악하게 변했다.
“크윽......! 책장의 두 번째.......칸이다. 오른 쪽에서 다섯 번째 검은 색 책을 꺼내면........!”
빠악! 우직!
한 순간이다.
황진동의 어깨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타구봉을 찔러 넣은 채, 발을 들어 그의 어깨를 찍어 찬 것이다. 장현걸이 냉랭한 눈빛으로 말했다.
“검은 색 책은 독(毒)이다. 붉은 색 표지는 밖으로 이어지는 경종(警鐘)이라 했지. 진짜는 백색이지만, 책장이 제법 커서 본인에게 확인하는 것 말고는 급하게 찾을 방도가 없다고 했다. 자, 장부는 어디에 있나?”
“이 놈들.......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퍼억!
장현걸의 손속에서는 개방도로서 어울리지 않는 잔인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황진동은 노인이다. 늙고 늙어서, 제 목숨 하나 간수하는 데에만 모든 정신이 팔린 자다.
그런 자에게 이 정도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있다. 이유는 충분했다.
악인(惡人)이라서 그렇다.
황진동은 누구보다 악한 자다.
철광, 철기, 염상 정도의 굵직한 이권(利權)은 그가 저질렀던 악독한 짓에 비하면 차라리 그릇이 크다 하겠다. 위지휘사 시절부터 군권을 남용하여, 유괴, 살인, 인신매매까지 온갖 지저분한 일에 얽히지 않은 곳이 없다.
황진동 때문에 신세를 망치고, 개죽음을 당한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이 정도 고통은 그가 저지른 일에 비하면 받아 마땅한 축에도 못 끼었다.
“다음은 목이다. 여의치 않으면 천하창생을 위해 죽이는 편이 나아. 그것이 황진동이라 했다.”
타구봉을 뽑아 두꺼운 목에 들이댔다.
조금만 움직여도 꿰뚫어버릴 기세였다. 황진동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왼쪽 책장.......첫 번째 칸이다. 책들을 들어내면 벽 쪽으로.......목궤가 하나 보일.......것이다.”
“아닐 경우, 그 목 안 쪽에 타구봉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겠지.”
황진동이 입술을 꿈틀거렸으나, 달리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장현걸의 눈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일도 감내하기로 한 눈, 무서운 각오가 서려 있었다.
“있습니다.”
책들을 들어낸 곳으로부터 한 개의 목궤를 꺼내온다.
목궤 뚜껑을 들추자, 아무런 제목도 달려있지 않은 문서 뭉치가 보인다. 한 장을 넘기니 깨알처럼 들어오는 필치, 얇은 장부첩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정보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한 가지 더 묻겠다. 풍대해에게는 얼마나 건넸나?”
“장부를 가져갔으니, 다 알게 될 것 아닌가! 이제 그만 이것을 치워라! 이렇게 나오다니,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거야 당신 이야기겠지.”
장현걸이 황진동의 마혈을 다시 한번 제압했다.
몸을 일으키는 장현걸이다.
그 때였다.
장현걸과 고봉산의 고개가 방문 쪽으로 돌아갔다. 고봉산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옵니다.”
“그래. 고수다.”
그것도 막강한 고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시선을 교환한 것은 순간이었다.
장현걸과 고봉산이 바닥을 박찼다.
도주(逃走)다.
하지만 그들보다 방문 쪽으로 짓쳐드는 적의 속도가 더 빨랐다. 거구의 그림자가 확 끼쳐든다. 무서운 힘, 경황 중 펼쳐낸 두 사람의 공격을 단숨에 물리쳐 버렸다.
파앙! 까아아앙!
장현걸과 고봉산의 신형이 동시에 뒤쪽으로 튕겨 나왔다.
천천히 들어오는 자는 그야말로 거대한 신체를 지니고 있다.
장현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신마맹.......?!’
나타난 자는 커다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소의 머리를 형상화 한 가면.
검게 칠한 이마와 붉은 입이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우마(牛魔), 전설 속의 대력우마왕(大力牛魔王)을 나타낸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