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들어오다니, 죽고 싶은 게로군.”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에 무지막지한 내공이 담겨 있었다.
한 가지에 생각이 미친 장현걸이다. 그의 눈이 책장 쪽을 훑었다.
치워진 책자들과 궤짝을 꺼낸 빈 공간이 눈에 띈다.
경종, 궤짝을 꺼내면 발동되는 기관장치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동안의 소란에도 아무런 일이 없다가, 이렇게 나타난 것을 보면 그런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무명장부(無名帳簿)라........늙은이. 입이 가볍다. 쓸모없는 자여, 이런 놈들에게 맹회의 극비를 넘겨서야 되겠는가.”
우마흑면의 남자가 말했다.
황진동을 향한 목소리.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 시선이 어떻게 흐르는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발을 옮기는데,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다.
마혈이 제압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황진동의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서렸다.
파아아!
우마흑면의 남자가 손을 휘둘러 황진동의 몸을 쳤다.
풀려나는 마혈이다.
황진동이 손사래를 치면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우마신군(牛魔神君)! 그런 것이 아니오! 나, 나는.......!”
“나약하다. 변명조차 제대로 못하는 자. 처음부터 믿지 못할 자라고 생각했지. 단심과의 교통(交通)은 이제 다른 자에게 맡기겠다.”
“아, 아니......!”
콰아아앙!
그것으로 끝이었다.
황진동의 머리가 터져나간 것은 순간이었다.
장현걸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소리쳤다.
“봉산! 먼저 가라! 명령이다!”
고봉산이 무엇인가 말하려 했으나, 움찔 물러나며 바닥을 박찼다.
장현걸의 각오를 느낀 까닭이다.
우마신군이라 불린 거구의 남자가 몸을 날리며 외쳤다.
“어딜!!”
쐐애애액!
우마신군의 속도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만한 거구에서 어떻게 그런 몸놀림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고봉산의 진로를 막아서니, 빠져나갈 길이 없다. 고봉산의 발이 팔선보를 밟으며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고봉산이다.
장현걸과 신형이 교차된다.
사사삭!
장현걸의 몸을 스쳐가는 고봉산의 손이다. 그의 손이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움직임을 발했다.
“가라!!”
두 사람의 눈빛이 얽혀든다.
장현걸이 고봉산을 뒤로 보내며 타구봉을 휘둘렀다.
우마신군에게 뛰어드는 그의 손에서 타구봉법의 정교한 초식들이 뻗어 나왔다.
화아악! 퍼어어엉!
정교함을 무색케 하는 무지막지한 장력이다.
우마신군의 공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
장현걸의 몸이 추풍낙엽처럼 힘없이 튕겨져 나왔다.
휘청 흔들리는 몸이다. 그러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타구봉을 회수하고 두 손을 활짝 펴니, 항룡십팔장의 비기(秘技)가 펼쳐진다. 그의 몸이 재차 우마신군을 향하여 짓쳐 들었다.
꽈앙! 파아앙!
내력도, 힘도, 속도도 터무니없이 부족했지만, 그 용맹만큼은 인정해줄 만 했다.
일격의 부딪침으로 우열이 갈린다.
울컥.
단숨에 내상을 입고, 치받아 올라온 선혈이다.
한가득 핏물을 입술 한 쪽에 베어 물었다.
두 번의 충돌, 그 짧은 시간.
장현걸이 우마신군을 막고 있는 그 사이, 고봉산의 몸이 서재 한 쪽에 만들어진 창문으로 향했다. 부서지는 나무틀, 고봉산의 신형이 창틀을 타 넘어 바깥으로 향했다.
“이 놈!!”
우마신군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팔을 휘둘렀다.
막대한 장력이 장현걸의 몸을 밀어냈다.
날아가 벽에 부딪치는 장현걸이 우왁, 하고 핏물을 토해낸다. 우마신군의 신형이 창문이 뚫려 있는 벽 쪽을 향했다.
콰아아아앙!
벽 전체가 터져나갔다. 부서지는 나무파편이 사납게 비산했다.
그 엄청난 소란에도 꺼지지 않았던 유등(油燈)이 놀라울 뿐이다.
고봉산을 쫓아 사라져 버린 우마신군.
장현걸이 몸을 일으키며 가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새로운 공기, 부풀어 오르는 가슴 한 켠으로 옷깃 아래 품속이 묵직했다. 고봉산이 스쳐 지나갔던 부근이었다.
‘절대로 죽지 마라!’
장현걸은 부서진 창문 쪽으로 몸을 날리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들어온 문 쪽으로 향했다.
“크윽!”
신법을 펼치려고 보니, 내상으로 진탕 된 기혈에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낀다. 어느 정도 강한 고수가 지키고 있을 것은 예측했던 일이었지만, 이 정도 괴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황진동과의 대화로 짐작컨데, 단심맹의 괴수도 아닌 것 같았다.
‘신마맹......신마맹이 맞을 것이다.’
얼굴을 감추는 가면.
신마맹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그 가면이다.
강호 명숙들 중에서도 그 존재조차 아는 이들이 드물 만큼 비밀스러운 집단이고, 장현걸로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을 따름이지만, 아무래도 그곳 외에 다른 문파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래 전 사패 시절에 대해 적혀 있는 문서들을 떠올려도 그렇다.
원후(猿?)의 가면을 쓴 채, 여의신봉을 휘두르며 숱한 고수들을 쓰러뜨렸던 괴마(怪魔) 제천대성의 기록은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이다. 이랑신군의 가면을 쓴 자도 있었다고 했으니, 이 대력우마왕의 우마신군도 같은 범주라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휘이익!
상념을 털어낸 장현걸이 창틀을 넘어 내원의 나무 그늘로 숨어들었다.
일렁이는 횃불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바깥쪽을 향해 움직이는 장현걸이, 외원으로 이어지는 담벼락에 몸을 붙였다. 저 멀리 들려오는 굉음들이 있었으니, 우마신군의 위치를 절로 알 수 있다. 목숨이 경각에 이른 고봉산의 처지를 그림 그리듯 떠올릴 수 있었다.
‘죽으면 안 된다, 봉산!’
장현걸이 외원으로 이어지는 담벼락을 넘어갔다.
그늘로 몸을 숨기며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재빠르게 이동했다.
“적습이다! 서둘러!”
“이 쪽이다! 개방 거지 놈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어!”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이 지금의 상황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서편을 향해 달려가는 무인들이 한 둘이 아니다. 소란을 틈타, 나아가는 장현걸, 달리고 뛰던 그의 신형이 정원 한편에 솟은 나무 한 그루 위에 내려앉았다.
높은 곳이다.
안력을 돋우는 장현걸의 눈에 외원 저편의 상황이 비쳐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직 살아 있는 고봉산이었다.
역시나 악운에 강한 놈.
이런 곳에서 죽을 녀석이 아니다.
우마신군보다 느린 신법, 우마신군보다 약한 무공을 지녔지만 용케도 도망을 치고 있었다.
쐐애액!
고봉산이 둘러쳐진 담장 쪽으로 뛰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가 도망치는 것을 돕기 위해 오결 제자들이 우마신군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장현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아, 안 돼!!’
퍼어어억!
일격.
단 일격이었다. 오결 제자 한명의 팔이 어깨 죽지부터 터져나간 것은.
흩어지는 피분수가 어둠에 녹아들면서 검디 검은 광택을 냈다.
땅 위에 나뒹구는 오결 제자.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모르긴 몰라도 즉사일 것이다. 덤비지 말아야 할 적에게 덤빈 결과다. 개죽음, 그렇게까지는 표현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죽지 말아야 할 때 죽은 것이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억눌러 참았다.
오결 제자 하나가 짓쳐들다가 장력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지경이다. 그래도 장현걸은 눈을 감지 않았다.
감지 않고 부릅떠 그 최후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을 사지에 몰아 넣은 것이 그였던 만큼, 절대로 외면할 수 없었다. 마음에 깊이 새겨서 책임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한 명 더 죽는다.
오결 제자 세 명.
고봉산이 담벼락에 매달리기까지 희생된 생명들의 숫자였다.
벽을 박차고 뛰어오른 고봉산이 담벼락 꼭대기의 처마를 타 넘는다. 담벼락까지 달려온 우마신군이 벼락같은 기세로 주먹을 뻗어냈다.
꽈광!
두꺼운 담벼락에 맨주먹이 박혀들었다. 몸통째로 밀어내는 충격에 담벼락 전체가 흔들린다. 주먹을 중심으로 무너지는 담벼락, 거구가 통과할만한 구멍이 뚫리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우르르. 쿠쿵.
우마신군의 몸이 담벼락 바깥으로 나왔다.
저 멀리 달리는 고봉산을 발견하고, 그대로 몸을 날린다. 야심한 밤거리에 난데없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탁! 타탁!
담벼락을 차고 올라 뛰어가는 고봉산은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고 있었다.
우마신군은 무서운 자였다.
저돌적이고 파괴적이다.
제천대성과 싸우며 천계를 어지럽혔다는 전설 속 대력우마왕이 현세로 현신한 것만 같았다. 그런 자가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으니 고봉산으로서도 죽을 맛이다. 힘을 다하는 고봉산의 앞 쪽으로 마침내 성도의 관아가 가까워졌다.
‘저기까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우마신군도 지척이다.
고봉산은 뒤 쪽으로 짓쳐드는 살기에, 땅바닥으로 몸을 던지며 신형을 굴렸다.
꽈아아앙!
흙먼지가 일고, 땅거죽이 움푹 파였다.
무시무시한 권력이었다. 그걸 그대로 맞았었다가는 등뼈가 통째로 아작 나 버렸을 일격이었다.
휘릭, 터억!
땅에서 일어나는 고봉산의 눈에 우마신군의 그림자가 훅 끼쳐 들었다.
고봉산이 다급하게 옆쪽으로 몸을 날렸다. 신형을 못 가누면서도 손바닥을 쫙 펴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소리치는 데에도 있는 힘을 다했다.
그것이 먹혀들었는지, 아니면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우마신군의 신형이 일순간 멈추었다.
거리를 재는 고봉산, 이제 뛰어들면 관아다.
그들이 벌인 소란에 관아의 정문 안으로부터 횃불을 든 관병들이 하나 둘씩 몸을 내밀고 있었다. 고봉산이 우마신군을 돌아보며 손에 든 것을 힘껏 던졌다.
“받아라!”
흰색의 궤짝이었다.
황진동의 서재에서 얻었던 바로 그 목궤다.
그것을 던지기 무섭게 고봉산이 관가 쪽으로 몸을 날렸다.
날아오는 궤짝을 받아드는 우마신군.
우마신군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폭출했다.
“이 놈!!”
콰직!
우마신군의 손아귀에서 목궤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렸다.
없다.
무명장부, 단심맹의 극비문서는 이미 그 궤짝 안에 없었다.
우마신군의 고개가 고봉산 쪽으로 돌아간다.
관군들 사이를 파고들며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는 고봉산이 우마신군을 향해 소리쳤다.
“그 장부는 나에게도 없다! 다른 곳에서 찾아 보라구!!”
그렇다.
고봉산에게는 장부가 없다.
장현걸을 스쳐 지나가던 바로 그 순간.
공수입백인의 수법, 용음십이수를 응용한 손놀림으로 그 장부를 장현걸의 품속에 넣어버렸던 것이다.
우마신군의 몸이 그들이 달려온 방향으로 틀어졌다.
그도 알아챈 것이다.
진짜는 장현걸이었음을.
서재에서부터 엉뚱한 사람을 쫓아 왔다는 것을.
가면 밑에서부터 솟구치는 살의 어린 눈빛이 관아 쪽을 훑었다. 행여나 잡히게 되면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콰앙! 파라락!
우마신군의 신형이 온 길을 되돌아 빠른 속도로 뻗어나갔다.
장현걸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장현걸은 이미 장원을 떠나 버린 후다. 그가 올랐던 나무 위에는 차갑게 부는 바람만이 가득했고, 그가 넘어간 담벼락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는 우마신군.
장현걸을 노리는 또 하나의 괴물이 된다.
상상초월의 대적(大敵)들이 그 숫자를 늘려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