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바깥에 좀 나갔다 올게요.”
“바깥에는 왜?”
“이제 겨울이잖아요. 옷도 좀 구해오고 해야죠.”
“혼자서 어딜 가려고? 같이 가는 것이 낫지 않아?”
“아니요. 풍랑은 여기서 몸이나 추스르도록 해요. 금방 다녀 올 게요.”
“그래도.”
“고집 부리지 말아요. 혼자 다녀오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해요.”
서영령은 단호했다.
누가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힌 청풍.
화안리 입구까지 배웅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아직도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내력, 짐이 된 느낌이 들었다.
“더 따라 나오지 말아요. 공기가 차요.”
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는 해도, 이 정도 찬 공기를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청풍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알기 때문이다. 신법을 펼쳐 사라지는 그녀의 뒷 모습이 안타깝다. 그 동안 고생이 심했던지, 야윈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터벅.
취운암이라 이름 붙여진 거처.
홀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자니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았다. 내공을 회복하고 몸을 만드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녀와의 관계도 좀처럼 풀기 힘든 난제라 할 수 있었다. 어찌 어찌, 여기까지 왔지만 그 다음은 모른다. 몸을 회복한 다음, 모든 것을 해결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닥쳐 온 고민으로 머리 속이 복잡할 때다.
그녀가 떠나고 이틀이 지난 아침.
문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벌써 돌아왔는가. 아니다. 그녀가 아니다. 마을에서 가장 처음 만났던 사람들 중 하나, 건장한 체구의 상학이 그 앞에 서 있었다.
“혼자 있으려니 적적하겠군. 마침, 자넬 보자는 분이 계신데 말이야.”
“저를 말입니까?”
“그래. 강호에 일이 있어서 나가셨다가 어제 돌아오신 분이지.”
“어쩐 일로.......”
“일단 만나봐. 좋은 이야기를 해 주실 테니까.”
상학은 막무가네로 그를 이끌었다.
화안리 외곽, 취운암과는 반대편이다. 나무가 우거진 한 편으로 정갈하게 다듬어진 한 채의 초막이 보였다.
“탁 노사, 상학입니다. 그 친구랑 함께 왔지요.”
“그런가. 들어오게.”
상학을 따라 초막 안 쪽으로 들어간 청풍이다. 강인한 인상의 노인 한 명이 성큼 성큼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탁종명일세. 자네가 그 청홍무적검인가?”
“과한 칭호입니다. 청풍이라 불러 주십시오.”
“생각보다 겸손한 품성이군. 그 검이야 그렇지 않겠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뒤쪽으로 흩트려 놓았다. 선이 굵은 윤곽에 수염을 조금도 기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다. 한 쪽 팔에는 검은 색 비구를 찼고, 허리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곤(棍) 한 자루를 매달아 놓았다. 기억 어딘가에 있는 모습, 그러나 어디서 본 것인지는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쩐 일로......부르셨는지요.”
“어쩐 일이라니, 당연히 령아 때문이지.”
‘령매.......때문이라면.......’
청풍은 서영령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를 그렇게 부를 정도의 인물이라면,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 청풍이 물었다.
“무련.......분이십니까?”
“한 때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네. 령아에게 들은 바가 있는 모양이구만.”
“자세한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기사 외인에게 할 말은 아니겠지.”
“.......”
“자네를 달리 부른 것은 아니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는 령아와 어쩔 셈인가?”
탁종명이 청풍의 두 눈을 직시했다.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청풍이 고민해 왔던 것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모르겠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달리 꾸며 말하기엔 청풍의 심성이 너무도 올곧다. 탁종명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모르겠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함께 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함께 하고자 하나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인가?”
“두 번째 입니다.”
청풍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당연한 이야기.
탁종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매를 굳힌다. 그가 이해한다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화산파 제자로서 숭무련의 여식과 함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 화산을 뛰쳐나와 숭무련으로 오면 될 일이지만 구파의 제자로서 가능할 법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
탁종명이 청풍과 상학을 한 번 돌아보고는 마당 한 켠에 놓여진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허리에 매달린 금곤이 의자의 이음새에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가 앉은 자세 그대로 청풍을 올려 보았다.
“그렇다면 방법을 하나 밖에 없지 않겠나?”
“어떤.......?”
“령아를 빼 가는 것이지. 무련에서.”
“.......!”
탁종명.
숭무련에서 뛰쳐나온 자라고 하였다. 그런 그가 하는 말이다.
탁종명이 허리에서 금곤을 빼 올려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금빛 표면에 비치는 스스로의 얼굴을 내려다 본다.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련. 무련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
무련이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서영령이다.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것은 흠검단주, 그 다음은 서영령의 아버지인 서자강이다.
참도회주, 강의검을 넘겨 준 조신량도 있다.
무서운 고수들이다. 강한 기상들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런 인물들이 있는 곳, 하지만 그 이상은 모른다.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어떤 이유로 만들어진 문파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령매가 나고 자란 곳이라는 것 밖에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답했다.
고수들이 많은 곳, 그러고 보면 참으로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런 청풍을 보는 탁종명, 그가 쓴 웃음을 지었다.
“무련의 무공은 정공(正攻)이다. 마공과 사공은 애초부터 익히지 않는다. 무련의 무공은 강하다. 무련의 힘은 구대문파 이상이야. 그 힘을 천하 창생을 위하여 써 왔다면 무림을 비추는 태양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문파를 뛰쳐나왔다고 했으나 그 말에 담긴 것은 어느 누구 못지않은 자부심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투다. 무릎 위의 금곤을 쓸어내는 손가락에 지난 세월의 파문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무련은 그러지 않았지. 그만한 힘을 지니고서도 강호의 음지로 들어가 암중의 싸움에만 피를 흘렸다. 신곤문(神棍門)이 무련에 들어갔던 것은 그런 것을 위함이 아니었어. 잊혀진지 오래인 사패의 잔당들과 무공을 겨루어 본들,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 팔황에 동조하는 사마(邪魔)의 무리들과 뜻을 같이해야 한다는 사실도 정공을 익히는 무인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나오셨던 것이군요.”
잠자코 듣고 있던 상학의 목소리였다. 탁종명이 상학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학이 자네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겠어.”
“사연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들어도 내일이면 잊어버릴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그렇지. 사연 없는 이가 없다라.......맞는 말이야.”
“강호에 나가셨던 일은 잘 해결 되셨는지요?”
“뜻했던 바대로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잘 되었지. 목숨은 살려 놓았으니. 그러고 보니 그 녀석에 대한 것도 무관하지 않겠군. 무련.......무련에서 얻는 것이 기대와는 다를지라도 대부분은 사문에 대한 애착으로 뛰쳐나갈 생각 따위는 안 해. 하지만 그 녀석도 제 아비를 닮아 반골기질이 다분했던지, 대사형의 백결연화장 십 합을 받아내고는 무련을 나가 버렸어. 그러더니, 철기맹이라는 이름 없는 문파에 들어가 큰일을 벌이고 말았지. 결국 어리석은 선택으로 판명 났지만.”
맞다.
청풍은 순간적으로 떠올린 한 사람의 모습에 탁종명의 얼굴을 겹쳐 볼 수가 있었다.
‘탁무양......!’
제 아비라 하였다. 탁무양의 아버지란 뜻이다.
철기맹 부맹주 탁무양.
나중에는 스스로 철기맹 맹주로서 화산파와 대 격전을 벌였던 자.
왜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을까.
악양에서 보았던 탁무양과 지금 눈앞에 있는 탁종명은 누가 봐도 혈연관계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흡사한 외모를 지녔다.
“그래도, 홀로 벌인 일 치고는 대단했지요. 무당과 화산, 상대가 나빴을 뿐입니다. 전 중원을 상대로 싸운 것과 진배없는 데, 그만한 배포도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슨 소용이 있나. 막판에는 성혈교에 붙어서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었을 뿐인데.”
“하지만 그 그릇을 높이 샀으니 무련에서도 두고 본 것이 아니었을 지요.”
“그렇지 않아. 그런 것이 있었을지언정, 무련에서 그 녀석을 마음껏 날뛰도록 놔 둔 이유는 다른 것이겠지. 무련에서도 강호로 나설 준비가 되었다는 뜻일 거다. 무련 전체가 전란에 휘말리고 말 거야.”
“그, 그렇습니까.”
청풍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묘한 상황이었다.
탁무양을 칭찬하고 있는 상학, 그러나 탁무양은 청풍에게 있어 사문의 원수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탁무양, 철기맹의 공격에 죽어간 화산 제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처럼, 탁무양이란 인물은 분명 대단한 남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전 중원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일, 그런 것은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리지. 다시 말하지만 무련은 전란에 뛰어들 준비를 완전히 끝마쳤다. 어디가 첫 표적이 될지는 몰라. 확실한 것은 무련에 속한 자 그 누구라도 전 중원과 싸울 생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팔황과 함께한다는 것은 그런 것을 뜻해. 난 싸움을 멈춘 지금에 와서도 세상에 두려운 자가 없다만 곁에 있는 자들이 다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령아 그 아이도 마찬가지다. 한 때 내 아들 녀석과 짝을 지어주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럴 수도, 그래서도 안 되게 되어 버렸지. 차라리 무련에서 나와 자네 곁으로 가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풍을 바라보는 탁종명의 눈에는 진심만이 가득했다.
천성이 선하디 선한 자. 이런 자도 있다. 숭무련에. 팔황에.
“노선배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찌 해야 좋겠습니까.”
“이미 말했지 않은가. 나도, 내 아들 놈도 무련에서 나왔다고. 무련은 팔황이며 그렇기에 사도(邪道)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근본은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는다. 무련에는 음모(陰謀)와 귀계(鬼計)가 필요치 않아. 숭무련의 문(門)은 무공(武功)뿐이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열릴 것이야.”
‘정면으로 부딪치면.......!’
탁종명의 말은 닫혀진 문을 여는 또 하나의 열쇠였다.
가슴에 새겨두는 이야기.
탁종명이란 이의 사연도, 스쳐보았던 탁무양의 신분도 청풍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일이 되지 못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서영령 하나였던 까닭이다.
그녀를 얻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해내야 할 운명.
가슴에 새기는 열쇠로 훗날을 기약한다.
먼저 무공을.
내공을.
강인한 힘을.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그 열쇠를 쓰는 방법을 알게 되리라.
더 강해져서, 더 강해지고 강해져서 그 운명을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만 하는 것이었다.
“전 숙부님께서 무련으로 복귀하셨대요.”
며칠 만에 돌아 온 서영령은 겨울을 준비하는 옷가지 외에도 기다리고 있던 중대한 소식들까지 들고 있었다.
“참도회주께서.......그렇다면......매사형은? 매사형은 무사하시나?”
첫 마디에 묻는다. 그 때, 추격전에서 헤어졌던 매한옥의 안부였다.
“그분도 무사하시대요. 하지만 전 숙부님은 꽤나 큰 부상을 당하신 것 같아요.”
“그렇군. 괜찮으신가......”
“그럼요. 괜찮겠죠. 전 숙부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그럼, 그 자는? 성혈교의 사도는 어떻게 되었지?”
“잘 모르겠어요. 승부를 완전히 가르지 못하셨던 모양이에요.”
참도회주와 성혈교 사도의 싸움.
성혈교 사도를 물리치려면 손해를 아니 입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본파로 복귀할 수 있었다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늦은 소식인 만큼 내쉬는 안도의 한숨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렇고, 여기 이것 한번 입어 봐요. 따뜻해 보여서 샀어요.”
도포에 가까운 무복 안 쪽으로 솜털이 덧대어져 있다.
상기된 얼굴로 웃음 짓는 그녀가 아름답기만 했다.
숭무련과 서영령.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해 내고 만다. 결연한 마음을 일으키니 새로운 힘이 솟아났다. 거기에 참도회주와 매한옥도 무사하다고 한다. 마음을 짓누르던 부담들이 덜어지고, 흔들리지 않는 정심이 찾아왔다. 진척되는 수련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하늘이 돕고 있는 모양이었다.
* * *
뚜벅, 뚜벅, 뚜벅!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다급했다.
눈살을 찌푸린 채 걷고 있는 장현걸이 방문 앞에 이르렀다.
그가 숨을 한 번 들이키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덜컹!
거칠게 열려진 문이다.
안에 있던 연선하가 다소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장현걸이 탁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개방과 화산의 연수.
방대한 양의 죽간과 문서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목궤안에 담겨지고 있다.
그녀가 말했다.
"보이는 것 그대로예요."
탁자를 정리하는 손이 바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떠난다는 것, 개방과 화산의 연수가 끝났다는 말이었다.
"철수하는 것이오?"
"예. 성혈교가 무너진 것도 세 달이나 흘렀어요. 전후(戰後)의 자료처리도 거의 다 끝났으니, 이제는 문파로 돌아가야죠."
"장문인의 명인가, 그것은?"
"예. 일단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일시적인 일이 아닐까 해요."
'장문인이.......!'
머리 속에 울리는 경종이 요란했다.
연선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장현걸에게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연선하를 빼내고 그녀와 함께 자료들을 회수한다. 이것은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일시적인 일이다?
아니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개방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장현걸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결국은......!'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막상 그 예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보니 입맛이 무척이나 썼다.
천화 진인은 장현걸을 버렸다.
그리고 다른 패를 들었다.
청풍, 청홍무적검.
그것이 바로 천화 진인이 새롭게 취한 패인 것이다.
"다쳤다고 들었는데, 부상은 괜찮은가요?"
연선하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물건들을 정리하며 지나가듯 묻는 그녀다. 장현걸이 쓴웃음을 지었다.
"괜찮소. 대수롭지 않은 상처요."
입맛만 쓴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내상(內傷)의 여파가 상당했다.
앞길이 창창했던 오결제자 셋을 잃었고, 장현걸 자신은 내상을 회복하는 데에만 한 달이 걸렸다.
그때뿐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사결 제자 둘이, 또 그 다음에는 사결 두 명, 오결 한 명이 죽었다. 제자들의 죽음을 보고 받을 때마다, 몇 번이나 분루(忿淚)를 삼켜야 했는지 모른다. 단심궤를 넘겨받고 활동을 시작한 후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얇디 얇은 살얼음판이었다.
"꽤나 큰 상처라고 했던 것 같던데요? 요즘 상황도 어렵다고 하고요."
장현걸을 대답하지 않았다.
큰 상처는 맞다. 상황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 앞에 있었다. 아무리 연선하의 말이라지만, 예의상 해주는 몇 마디에 기꺼움을 느끼기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청홍무적을 택했다라.... 피치 못할 결과였지.'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다.
화산파, 청풍이다.
북풍단주가 금마륜에 승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이미 그때부터 정해져 있던 결과였다.
자존심에 막대한 상처를 입은 화산파에 있어 청홍무적검은 그 자존심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일 수밖에 없다.
이 기세로 계속 성장하기만 한다면 청홍무적검의 명성은 모르긴 몰라도 몇 년 안에 북풍단주에 버금갈 만큼 대단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화산파가 아니라 그 어느 문파라도 잡고 싶은 고수다.
천화 진인의 마음을 눈 앞에 있듯 헤아릴 수가 있었다.
'천화 진인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쓸 것이다. 그 수단에는 나에 관한 것도 들어간다. 절대로 피해갈 수 없어.'
천화 진인이라면 반드시 장현걸을 걸고 넘어진다.
청풍을 핍박한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 뻔했다.
그것은 천화 진인에게 좋은 명분이 될 것이고, 청풍을 끌어들이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이점을 줄 것이다. 그 배후에 천화 진인 본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냥 당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이쪽은 이미 목숨을 내놓았어.'
세 달 동안 어렵게 버텼다.
죽은 제자도 한둘이 아니다. 육신과 마음에 입은 상처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렇게 버티면서 많은 증거들을 얻었다. 죽음에 이만큼이나 발을 들여놓았는데, 한때의 실수로 덜미를 잡힐 수는 없었다.
'역시나 그 방법밖에 없다. 둘을 갈라 놓아야만 해.'
예전부터 생각해 놓았던 바다.
이 정도는 예상했고,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화산 장문인이 청풍을 손에 넣어서는 안 된다.
정 막을 수 없다면 한시라도 더 늦게.
만일 가능하다면 아예 틀어지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야 장현걸도 시간을 벌 수가 있는 것이다. 단심맹 하나로도 목숨이 간당 간당한 이 마당에 화산파가 덤벼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렇게 간다니.... 이제 얼굴 보긴 힘들겠군."
"글쎄요. 개방과의 연수는 계속될 것으로 아는데요?"
"그럴까?"
장현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눈빛이 복잡한 빛으로 얼룩졌다.
'당신처럼 총명한 여인이 거기까지밖에 못 보다니... 아니, 볼 필요가 없는 거겠지. 그가 돌아가면 당신은 그것으로 된 것이니까.....'
직접 보진 못했지만 청홍무적검의 명성을 제 일처럼 기뻐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일까.
청풍이 화산파와 틀어지길 바라는 것에는 그런 사적인 이유도 섞여 있는지 모른다.
사소한 질투, 정명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겠죠. 다친 것은 정말로 괜찮아요?"
"그것은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소. 건강히 지내도록 하시오.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다면.'
마지막 한마디는 마음속으로만 덧붙인다. 연선하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나오니 조금은 섭섭하네요."
장현걸이 몸을 돌렸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지.'
섭섭하다. 우습다. 그녀는 잔인한 여자다.
"오늘은 부쩍 말이 없군요, 어차피 다시 볼 텐데. 개방 내부의 일은 좀 나아졌나요?"
"걱정하지 마시오."
장현걸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휘저으며 방문을 열었다.
다시 본다?
살아 있다면?
살아나더라도 보지 않으련다.
이제는 안녕이다. 걸어나가는 발걸음에 결연한 각오를 담고 그녀에 대한 마음을 묻었다.
할 수 없는 일.
여인에 흔들렸던 자신이 부끄럽다. 부끄러워도 후회는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오직 개방, 개방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다만 알지 못했을 뿐.
그의 등을 바라보는 연선하의 눈에도 복잡한 마음이 드러나고 있었음을.
세상 인연이라는 것은 항상 누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닌 법, 교차하는 인연 속에 또 다른 훗날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