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쐐애애액!
청풍은 최근 들어 새로운 영역에 눈을 뜨고 있었다. 전에 없던 것을 얻었다기보다는 가지고 있던 힘에 대한 활용이라 말하는 것이 옳다.
손을 든 청풍이 마음속으로 주문과도 같은 한마디를 발했다.
'동조(同調)'
상단전의 힘이 검과 이어지고 있다.
그의 의식이 검과 하나가 되고, 검의 움직임이 곧 그의 의지가 되었다.
청풍의 손에서 주작검이 떠올라 천천히 하늘로 움직였다.
마술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참오를 거듭한 공명결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무형기(無形氣)로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안리, 말하자면 이장(里長) 또는 촌장(村長)쯤 되는 노인이다. 슬그머니 취운암으로 들어오며 말하는 오 영감, 그동안 친해져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그 정도까지 무형기를 뽑아낼 수 있는 구결은 무척이나 드문데 어디서 배웠나?"
"검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청풍은 무심코 대답했다.
왜 그런 대답이 나왔을까.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말이다. 하지만 오 영감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검객은 검으로부터 자신의 무공을 다듬는 법이지. 좋은 마음가짐이다."
청풍이 손을 움직였다.
하늘로 떠올라 있던 주작검이 허공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 모습을 보니 소연신이 생각나는군. 그놈도 꽤나 늙었을 텐데 말이야."
오 영감은 고수였다.
고수도 보통 고수가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무공을 지닌 고수였다.
강호에서 잊혀진 곳, 그저 화목하고 안락하기만한 이 화안리는 오 영감의 힘으로 유지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척이나 강한 사람, 다른 시대, 일세를 풍미했던 자였다.
"오 대야(大爺)! 풍랑이 하는 수련은 그만 좀 방해하고 이리 와서 이거나 좀 드셔요!"
"그놈의 대야(大爺)란 소리는 그만 좀 하라니까. 그게 언제 듣던 소린데 그러느냐!"
"소연신 같은 이름을 들먹이는 오 대야는 어떻고요! 어서 이리 와요!"
"그 녀석, 참!"
취운암에 놀러오는 오 영감, 그리고 청풍의 곁을 지키는 서영령의 대화였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일.
청풍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선 채 손을 휘둘러 주작검을 끌어왔다.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한 번 상단전을 일깨운다. 비어 있는 두 손. 그의 허리춤에서 청룡검이 스르르 뽑혀 나왔다.
"동생, 소연신이 누구야?"
손님은 오 영감 하나가 아니었다.
서영령의 곁에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아리따운 여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그녀도 그 일상의 일부였다. 화안리에 살고 있는 여인이자, 오 영감의 며느리인 그녀다. 무림하고는 도통 관련이 없어 보이는 얼굴. 유복하게 자란 인상에 선량한 마음씨가 절로 드러났다.
"소연신은 전설의 살수예요. 사패(四覇) 시절, 그 한 축을 담당하던 당대 최강의 암살자였죠."
"암살자? 그럼 나쁜 사람 아니야?"
"글쎄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대요. 풍류서화, 모든 것에 능했을 뿐 아니라 송옥, 반안에 비견되는 굉장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동생, 그래도 살인은 나쁜거야."
"그도 그렇지만..... 그래도 모두가 인정할 만한 악인이 아니면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살수라고는 해도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들을 해결해 주던 의인(義人)이었다죠."
잠자코 듣고 있던 오 영감이 피식 웃으며 서영령을 바라보았다. 그의 늙은 얼굴에는 기막히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이구? 숭무련 출신 주제에 잘도 칭찬하는구나. 팔황, 당대 신마맹 맹주가 누구한테 죽었는지 알기는 하는 거냐?"
"그것은 그것과 다른 문제죠. 게다가 숭무련은 그때의 혈겁과는 관련이 없어요. 오히려 천룡회와 구원이 깊지 않았나요? 오 대야의 백룡권도......"
"그만! 이 녀석이 아픈 데를 찌르는구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 오랜 세월을 봐왔지만, 여하튼 팔황이란 것들은 도무지가 이해할 수가 없어."
치리링! 쐐애애액!
청풍 쪽으로부터 들려온 파공음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멈추었다.
청풍은 손도 대지 않은 발검을 하고 있었다. 의식만으로 발출하는 검날이 제법 날카로운 기세를 품고 있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어검(御劍).
이야기 속에서나 듣던 술수가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느린 검으로 뭘 벨 수나 있겠냐? 그만 하고 너도 이리 와서 이거나 먹어라!"
오 영감이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청풍이 그쪽을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느리다면 빠르게 만들어야겠지요.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그놈 참!"
무엇이든 열심인 모습은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주는 법이다.
아직도 성치 않은 몸이기에 더욱 그렇다.
검을 휘두르고 초식을 펼치기엔 내력이 받쳐 주질 못한다.
그렇다고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청풍은 그럴 사람이 못 되었다.
내력을 끌어올리며 예전의 기해(氣海)를 다져 가는 한편, 공명결에 마음을 쏟았다.
상단전.
이것도 달리 보면 천운이다.
하단전과 중단전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혈이 정상이었다면 공명결의 효용을 여기까지 끌어올리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야기 들었지? 성혈교가 아작났다는 것."
"예. 상 아저씨게 들었어요."
"근데 말이야. 그게 진짤까?"
"예? 진짜라뇨?"
"내가 아는 성혈교는 말이다. 그렇게 끝날 곳이 아니거든."
"......."
"네가 대답할 일이 아니긴 하지. 나는 한때 천룡회에 몸담았던 사람이고, 너는 어쨌거나 팔황의 권속이니까."
"그래서가 아니라........."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다. 다만 재미있다고 느낄 뿐이야."
"재미라뇨?"
"옛날처럼 반복되고 있다는 것."
"반복... 이라고요?"
"그래, 반복. 이번에 성혈교를 무너뜨린 것이 누군지는 들었지?"
"북풍단주 말이에요?"
"그래, 그놈. 북풍단주."
오 영감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과일 하나를 베어 먹었다. 숨을 돌리고는 말을 잇는다.
"얼마 전에 내 제자 놈을 만났다. 그 녀석이 그러더군. 예전에 북풍단주를 본 적이 있다고."
"동창에 계시는 그분이요?"
"그래. 머리 속에 든 거라고는 무공밖에 없는 흉물스런 놈이지. 그놈이 말하길, 북풍단주에게서 삼안마군(三眼魔君)의 느낌을 받았다고 했었다."
"삼안... 마군!"
"누군지 알지? 무적진가의 마군(魔君), 그 악마 같은 놈 말이다. 너야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만."
"모를 리가 있겠어요. 팔황으로서는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일 텐데요."
"어떤 면에서는 진가의 가주보다 무서웠던 놈이었지. 근데 말야. 그 북풍단주란 놈 있지? 그놈은 그냥 삼안마군과 비슷한 것이 아니었어."
"그러면요?"
"삼안마군의 힘은 정도(正道)라기보다는 마도(魔道)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놈이 무적진가에 있었던 것은 당대 진가 가주의 무공에 무릎을 꿇었던 이유 하나밖에 없었단 말이지. 그것이 성혈교주로 하여금 엉뚱한 생각을 품도록 만들었지. 전란이 끝나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성혈교는 삼안마군이 말년에 얻었던 처(妻)를 납치하고 말았다. 그것도 아이까지 임신하고 있었던 처자를."
"어머나!"
오 영감의 말에 그의 아리따운 며느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갓난아이를 품속에 꽉 안았다. 그녀로서는 그와 같이 험악하게 돌아가는 강호의 이야기가 두렵기도 할 것이다. 오 영감이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손사래를 쳤다.
"며늘아기는 걱정 말아라. 제아무리 팔황이라도 이곳은 절대로 못 건든다. 내가 있을 뿐 아니라, 회주가 건재하니까."
"그래도 무서운 일인데요. 아버님, 그래서....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나요?"
"현 진가 가주가 직접 찾아 나섰지. 단신으로 성혈교를 초토화 시키면서까지 그녀를 찾으러 들어갔지만, 불행히도 그녀를 구하진 못했어. 대신, 그녀의 아이를 살려낼 수 있었다."
"그럼 그 아이가....."
"그래, 그가 바로 북풍단주야."
"........!!"
"지난 일들이지. 세월을 흘려 보낸 나로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말이다. 세상만사 억겁의 순환이라더니, 더욱 더 재미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
치링! 치리링!
공명결에 완전히 몰입하여 이쪽의 대화를 전혀 듣지 못하는 청풍이다.
청룡검과 주작검을 한꺼번에 떠올리는 청풍. 붉고 또는 푸른 검날이 하늘을 날았다.
오 영감, 오극헌
오래전 사패 시절, 천룡회의 우호법을 담당했던 노고수의 늙은 손가락이 청풍을 가리켰다.
"저놈, 닮았어..... 소연신과."
* * *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낮밤의 흐름을 잊어버린 채, 몸을 만드는 나날이었다.
공명결의 사용이 능숙해지고 있었지만, 내력은 아직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새, 눈 내리는 겨울을 맞이하고 있음에도 하단전 진기의 바다는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족해.'
청풍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대로는 내력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돌이키지 못할 상세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백호기와 청룡기, 두 기운이 예전 같은 융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조화는 깨졌고, 한번 깨진 조화는 혼돈의 어둠으로만 덮여 있었다.
문제를 알았음에도 해결책이 없었다.
상처가 아물어도 이미 생겨버린 흉터는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되돌릴 수가 없다. 특별한 계기가 없고서는 예전의 내공을 찾을 길이 없었다.
'정체된 무공. 아니, 장강에 갔을 때보다 퇴보한 무공이다.'
청풍은 고민했다.
끊임없이 앞을 나아가기만 한대도 아직 머나먼 무공지로(武功之路)다.
헌데, 지났던 길을 되돌아왔을 뿐 아니라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어렵다. 빛이 보이지 않아.'
이럴 때 절실한 것이 그 길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스승의 존재다.
하지만 그런 스승은 그의 곁에 없었다.
막힌 길에 돌파구를 열어주곤 하던 천태세나 남강홍도 이 화안리까지 찾아오지 못하는 모양이다. 방법이 없었다.
'백호기와 청룡기. 그것보다 근원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하진기밖에 없어.'
공명결은 상단전이다.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었지만, 거기까지다. 공명결이 하단전과 중단전을 되살려 줄 수는 없었다.
자하진기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청풍은 거기서도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자하신기는 음양의 이치를 담은 신공이었지만, 더 이상 뻗어나가질 못한다.
'중단전, 중단전이다.'
하단전이 허한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원인은 중단전이다.
중단전에서부터 막히고 있었다.
백호와 청룡의 조화가 깨지고, 중단의 기(氣)가 뒤엉켜 있게 됨에 따라 자하진기의 흐름도 흐트러져 버렸다. 몸 전체가 잘못되어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오 대야를 뵙는 것이 어때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청해야죠. 혼자서만 고민하지 말아요."
"하지만......."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구요. 제자로 받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여쭙고 싶은 것을 여쭙는 건데요."
힘이 되는 것은 역시나 서영령이었다.
서영령의 말마따나 오 영감, 오극헌을 찾았다.
"왜 그러느냐고? 몰라서 묻나?"
"........"
"그건 말이다. 네가 너무 여러가지 힘을 한꺼번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돼. 다 버리거나 하나로 합치거나 방법이 어떻든, 귀일(歸一)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사상이니 오행이니 육합이니, 어렵게 나누는 놈들치고 내공을 제대로 쓰는 놈들을 본 적이 없단 말이다."
정곡을 찌른 이야기다. 정곡을 찌른 말이되, 또한 기대만큼은 도움이 되지는 않는 이야기였다.
다 버린다.
말은 쉽다.
하나로 합친다?
여러가지로 나누는 것이 좋지 않다?
하나로 귀일(歸一)시키는 방법 또한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방법을 몰라서 오극헌의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그가 주는 답은 너무나도 분명한 세상의 이치밖에 없었다.
"그걸 못 찾으면 할 수 없는 게지. 거기서 만족할 수밖에. 무공일로를 걷는 자, 누구나 그런 벽을 만날 수밖에 없고, 많은 사람이 벽을 못 넘어서 멈추기 마련이다. 그런 벽이 없다면 누구나 끝없이 강해지는 것 아니겠나?"
큰 소득 없이 돌아온 청풍이다.
같이 실망해 주고, 다시 힘을 주는 서영령.
그녀가 말했다.
"조급해하지 말아요, 풍랑. 오 대야는 말이에요. 오래전 천룡회 우호법으로서 무공의 궁극을 보아왔던 분이니까요. 천룡회주 철위강이라고 모르죠? 무적을 일컫던 당대의 진가 가주가 일 대일 비무로 단 한번 패배했던 것이 천룡회주와 싸움이라고 해요. 그런 고수를 옆에서 봐왔으니 어떻겠어요? 산 위에 올라있는 사람은 중턱에서 헤매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죠. 그래도 말이에요. 풍랑은 산중턱에 있다지만, 풍랑이 오르는 산은 굉장히 높은 산이잖아요. 금세 그 위에 올라서 그 이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이 틀림없어요."
어쩔 때는 천방지축, 자유분방하게 보일 뿐이지만 이럴 때는 또한 무척이나 생각이 깊은 여인 같다. 자신감을 돌려주는 목소리다. 자신감을 되돌려 줄 뿐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보여준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요, 풍랑. 풍랑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백호기와 청룡기가 문제인 거잖아요? 본래부터 상극이라던......"
"그랬지."
"상극인 것은 상극으로 두면 되지 않아요? 게다가 지금 풍랑이 얻은 것은 백호기, 청룡기, 그리고 주작기인데... 그렇다면 사실은 하나가 더 남은거죠. 그 하나를 더 찾으면 뭔가 길이 보이지 않을까요?"
청풍의 머리 속에 섬광이 일었다.
스승이 필요하다.
도움이 필요하다.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
상극인 진기는 상극이 진기로 둬도 된다. 어차피, 두 진기가 근거지로 삼고 있는 곳은 폐장과 간장, 각 장기에는 그에 맞는 역할이 있고, 각 진기에는 그들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있다.
간장에서 폐장의 일을 대신해 줄 수 없고, 폐장에서 간장의 일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처럼, 두 진기를 하나로 모아두었던 것 자체가 잘못된 판단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현무검, 현무검을 찾아야 해.'
남아 있는 조각을 맞추는 것이 해답이다.
네 개의 검, 사신검을 찾으면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다.
서영령의 이야기를 들으며 직감적으로 얻은 결론이었다.
그날부터 청풍은 마음을 바꿨다.
백호기와 청룡기를 섞어낼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흐르고 머무는 대로 둔다.
백호기가 청룡기를 간섭하든, 청룡기가 백호기를 핍박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억지로 이끌지 않은 채, 상극은 상극인 채로 내버려 둔 것이다.
오극헌이 말한 귀일(歸一)은 어찌할 것인가.
귀일이라 함은 무조건 모든 것을 섞어서 합치라는 말은 아닐 터다. 내공이란 것은 깨달음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청풍은 상상의 범위를 더욱더 넓혔다.
현무검을 찾아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현무기라 하여 완벽한 해결책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현무기가 없었어도.
현무기가 없이 청룡검과 주작검 두 자루만 있었을 때도.
그때도 청풍은 강했다.
단신으로 장강 줄기를 가르며 수로맹주를 구해냈을 만큼.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그만큼도 안 된다,
현무기가 없어도 최소한 예전만큼의 수준까지는 올려놓아야만 했다.
그게 맞다.
그렇게 되어야만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간다.'
백호기가 완전히 폐장으로 들어갈 때까지.
청룡기가 온전하게 간장을 보호할 때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중단에 모았던 진기는 풀어내고 흩어냈다.
빈자리. 그 자리에 자하진기를 대신 채웠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서로 부딪치던 진기, 억지로 화합시켰던 진기가 얼룩처럼 중단전에 남아서 깨끗이 지워지질 않았다.
'잘못된 것이었다면.....'
올바른 선택인지는 지금으로서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울 뿐이지만 그래도 해볼 수밖에 없다. 백호기와 청룡기를 융합시켰던 것이 청풍의 무공을 크게 도약시켰던 계기이자, 청홍무적검의 명성을 얻게 해준 원동력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을 송두리째 바꾸겠다는 것이다. 중단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은 그의 뿌리를 통째로 흔드는 일에 다름이 아니었다.
'상단전... 공명결... 아니야. 화기(火氣)의 위치는 머리가 아니라 심장이다. 그것도 틀렸어.'
중단에 자하진기를 채우다가 또 한가지 깨달음에 도달했다.
상단에 화기(火氣)를 채운 것은 실수다.
정신이 맑아지고, 잠이 줄었다?
인체는 필요할 때 쉬어야 하는 법이다. 육신뿐 아니라 혼백(魂魄)이라고 하여 다를 바는 없다.
잠을 자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화기를 사용하여 억지로 뇌력을 키워놨다.
그러면 안 된다.
능력을 얻은 것까지는 좋았으되, 지금이라도 실책을 알았으니 다행이다.
공명결의 구결만은 남겨둔 채, 주작기로 운용하던 상단전까지 비워버렸다.
주작검을 뽑아 들고, 그때 얻었던 화기(火氣)의 힘을 되살렸다.
심장(心腸).
멈추지 않는 맥동의 근원지.
진기가 올바른 곳으로 찾아 들어가자, 확실히 달라지는 느낌이 든다. 예감과 직감으로 번뜩이던 신기(神氣)는 어두워졌으되, 육신의 상태는 전보다 좋아지는 것 같다. 며칠 사이, 짧은 시간에 얻은 놀라운 변화였다.
'변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예전의 나 자신은 아니야. 뭔가를 넘어서지 않으면 안돼.'
확신이 없었다.
몸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은 아니었다. 내력이 돌아오고 있어도 불안하다. 같은 기량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휘이이잉!
성큼 다가온 겨울,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월의 바람이다.
불확실한 힘.
차갑고도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을 때.
그는 그때 나타났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이곳에 이른 자.
환신, 월현이었다.
"오랜만이로군. 싸울 준비는 되었나?"
"물론이오."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싸울 수는 있다.
월현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놀란 눈의 서영령과 차분함으로 서 있는 청풍을 앞에 둔 채, 품속에서 두 장의 지도를 꺼내 들었다.
"나쁘지 않군. 사천성, 이 장소로 오라. 정확히 십 일 후. 정오부터 공격에 들어간다."
첫 번째 지도다.
청풍이 펴든 지도를 본 서영령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변경 땅이네요. 십 일이라면 촉박하겠어요."
사천성 변경, 고대 촉국(蜀國)의 오지(奧地)다. 사람이 살지 어쩔지조차 알 수 없는 변경의 험지였다.
"맞는 말이다. 시간이 없어."
청풍이 고개를 들어 월현을 보았다. 월현의 목소리에는 서두르는 기색이 완연했다.
"공격이라니,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 싸움을 의미한다. 두 번째 지도를 보아라."
월현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팔에 감긴 빛나는 뱀 형체에서 신비한 빛무리가 명멸을 반복했다. 그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이 흑야성이다. 우리가 공격할 목표를 나타낸 지도지. 표시가 된 곳이 중앙궁(中央宮)이다. 거기에 현무검이 있다."
'현무검.....!!'
"이 경로를 통해 곧장 들어간다. 자네의 목표는 오직 현무검이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동방궁과 서방궁, 다른 싸움은 우리가 할 것이다."
"우리라니........?"
"말하지 않았던가. 경계에 선 자들의 싸움이라고.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들이 이 안에 가득하다. 우리란 그 싸움을 끝내려는 이들을 말한다. 무엇을 보아도 놀라지 말아라. 자네는 북방대제만 막으면 돼."
"북방대제를 막는다니 무슨 말이오."
"가보면 알 것이다. 대제를 제압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에 이 싸움의 승패가 달렸어. 대제를 제압하는 것이 곧, 현무검을 얻는 것이다. 자네의 역할은 거기까지야. 현무검을 가지고 나가든, 그것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자네 마음일 뿐이다. 중앙궁의 귀핵(鬼核)만 흩어놓을 수 있으면 싸움을 세 배는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북방대제를 제압하는 것은 무엇이고, 중앙궁의 귀핵은 무엇인가.
앞으로 있을 싸움의 한가운데에 현무검이 존재한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것을 얻는 것이 승패와 직결된다는 이야기 같은데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촉의 대지에 이르면, 북방 초원에서 온 무격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를 따라가면 돼. 그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행여 찾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자네를 찾을 수 있을 테니."
그러고 보면 신기한 일이다.
월현은 이곳을 어떻게 알고 온 것일까.
은밀하게 숨어든 곳,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찾아왔다.
청풍이 고개를 내저으며 물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소. 당신은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며, 다른 이들이 나를 찾을 수 있으리란 것은 또 무슨 뜻이오?"
"이해 가지 않음이 당연하다. 자네는 무격(巫覡)과 술사(術士)에 대해 몰라. 그것이 경계에 선 자와 아닌 자들의 차이다. 자네의 검들은 지고의 무구(巫具)들이니, 무릇 술사들이라면 결코 그 기운을 잊어버릴 수 없다. 더욱이 한 번 보고 각인을 시켜 놓은 이상, 중원 천지 어디에 있든 그것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을 쫓아왔을 따름이야."
".......'
전혀 다른 자다.
이자는 무인이 아니다. 청풍과 다른 영역에 살고 있는 자.
현무검이 아니었다면 애초부터 교차할 운명이 아닐 남자였다.
"나는 이 싸움에 필요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귀마병들의 강신(降神)이 생각보다 빨랐기 때문에 시간이 굉장히 촉박하다. 그럼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아니, 거기서도 다시 만나지는 못하겠군. 훗날, 경계가 무너지고 세상이 변할 때, 그때 다시 보도록 하지."
청풍은 그때 보았다. 환신 월현의 등 뒤와 발 끝에서 날개와 같은 무형기(無形氣)가 피어오르는 것을.
상단전을 지고한 수준까지 연마한 술사(術士)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의 능력일진가.
날아간다.
월현의 몸이 떠오르고 있었다.
새처럼, 협곡을 넘어서.
"령매는 여기에 남도록 해."
서영령이 고개를 저으며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만류하는 청풍의 목소리는 단호하기만 했다.
위험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청풍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은 그 싸움에 참가하도록 허락된 자들만의 싸움이라는 것을.
또 다른 세상이 거기에 있을 것이고 상상조차 못해본 것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같이 가서는 안 된다.
서영령이 갈 곳이 아니었다.
그가 아끼는 사람, 그녀를 보호하면서도 전력을 다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청풍이 돌아섰다.
뒤따라오는 서영령, 그녀가 옷소매를 잡았다.
"또 그때처럼 다치면, 다신 얼굴 안 볼거예요."
옷소매 아래로 서영령의 손목이 그의 손목과 닿았다.
부드러운 피부가 그의 손을 쓸어 내린다. 서영령가 청풍의 손가락이 얽혔다.
"무사히 돌아올께. 약속하지."
청풍은 처음으로 지킬 자신이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손을 잡은 서영령이 청풍의 팔에 몸을 기댔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하얗다. 곁을 지켜주는 아름다운 얼굴, 언제까지고 이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를 아끼는 그의 마음이 그 맑은 눈빛에 담겼다.
서영령이 그 마음을 별빛 같은 봉목으로 넘겨받았다.
발꿈치를 드는 그녀의 숨결은 그녀의 얼굴처럼 하얗기만 했다.
"약속... 지켜야 해요."
조그만 입술이 청풍의 입술에 맞닿았다. 지는 노을이 붉고도 붉다.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 끝에 청풍의 팔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일부러 피해왔던 애정 표현.
한참 동안 서로를 안은 채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은 그들이다. 청풍이 못내 아쉬운 듯 그녀를 떼어내며 발길을 돌렸다.
"그럼...."
청풍이 땅을 박찼다.
화천작보.
다시금 나서는 강호는 그녀가 곁에 없는 만큼 차갑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