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무림서] 화산질풍검 제 21 장 흑림(黑林)
팔황은 불가사의한 무리들이다.
많은 싸움을 보고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그들처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들은 없었다.
그들은 강하며, 공포스럽고, 또한 놀랍도록 매력적이었다.
...중략....
팔황은 중심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세상의 근본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진 자들이었다. 천하의 질서에 대하여 의문을 품은 이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뿐이었다. 팔황이라고 한꺼번에 이야기되었지만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 추구하는 바를 표현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완벽하게 하나로 어울리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가 악인이 아니었으며, 또한 모두가 선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하가 가지는 또 하나의 얼굴이었으며, 양(陽)이 있으면 마땅히 있어야 하는 음(陰)과 같았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했다.
그들이 오로지 없애야만 하는 악(惡)이었다면, 또는 있어야만 하는 선(善)이었다면 그렇게 두려운 자들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또 하나의 세상이었을 뿐이다. 천도를 뒤틀어 새로운 천하를 여는 열쇠였을 뿐이다.
천하가 태평하면 언젠가 난세가 오고, 난세가 오면 언제가 평화가 오는 법이다. 그 흐름은 천하를 관장하는 상제도, 땅을 만들었다는 반고도 끊을 수가 없다.
하늘의 뜻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뜻을 막기 위해 제천(制天)이 섰다.
...중략.....
성혈교의 발호를 통하여 암시되고 있었던 팔황의 재래는 단심맹과 신마맹이 일으킨 군산대혈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다. 십익(十翼)이 하나하나 모습을 알려 나갔으며, 천하는 쟁패와 사투의 전장(戰場)으로 화했다.
...중략....
한백무림서.
강호난세사 中에서.
촉국의 대지는 황량했다. 사천 땅,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른 그곳이다.
청풍은 어렵지 않게 월현이 말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신이 청풍이오?"
"그렇소."
청풍을 맞이한 남자는 한 자루 장대한 묵창(墨槍)을 등에 지고 있었다.
화려한 복식, 특이한 옷.
말로 표현하기 힘든 특별한 기도가 느껴졌다.
"기다리고 있었소."
특이한 것은 차림새뿐이 아니었다.
말투도 보통과 달랐다.
어색한 한어(漢語), 지독한 북방 방언이었다. 중원인이 아닌 것이 틀림없었다.
"이쪽이오."
남자는 청풍을 이끌고서 높이 솟은 언덕을 올라갔다.
당장이라도 눈발을 흩뿌릴 것처럼 구름이 짙었다.
어둡게 덮여있는 구름에 태양마저 제 빛을 잃어버렸다. 대낮임에도 한밤중인 것처럼 온 세상에 어둠이 가득했다.
"고고마이, 손님이 왔다."
언덕 위에는 한 명의 남자가 더 있었다.
젊은 얼굴에 맑은 눈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비슷한 복장, 팔에는 소리도 안나는 방울들이 열 개나 달려 있었다.
"이 사람이 골짜기의 주인을 막을 사람입니까?"
"그런 모양이다."
눈이 맑은 남자는 처음 들어보는 언어(言語)를 썼다.
청풍을 이끈 남자가 돌아서며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내 이름은 쿠루혼이오. 이쪽에서는 금성(金星)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오."
한어는 한어다.
하지만 뚝뚝 끊어지는 북방어(北方語)는 도무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쿠루혼이란 이름은 듣는 것만으로도 어색하다.
중원의 이름자가 아니라는 말.
북방 초원의 무격이라더니, 그것이 이국 땅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일 줄이야.
상상 이상을 볼 것이라고는 예상했었지만 이국인(異國人)까지 얽혀있었을 줄은 몰랐다.
잠자코 청풍의 반응을 지켜보던 쿠루혼이 한숨을 내쉬고는 언덕 저편을 가리켰다.
"저곳이오. 흑야성(黑夜城), 저곳이 바로 흑림의 소굴이오."
"흑림.....?"
역시나 생소한 이름이었다.
몽고인 두 명, 그리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 흑림.
언적 저편, 숲으로 둘러싸인 기괴한 고성(古城)이 서 있었다.
다 무너진 성곽 사이로 황폐해 보이는 전각군(殿閣郡)이 보인다. 사람 사는 느낌이 전혀 없는 곳, 마치 거대한 무덤과도 같은 곳이었다.
"전혀 모르는 기색이군..... 흑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소?"
청풍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월현이 말한 것은 흑야성까지다.
쿠루혼이 되려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고고마이란 자를 돌아보았다.
"큰일이다. 이래서 가능할까?"
"가능해야지요. 어차피 지금으로서는 대안이 없습니다."
대답하는 고고마이의 한어는 오히려 쿠루혼보다고 유창했다.
신뢰하기 힘들다는 눈으로 청풍을 바라보던 쿠루혼이 북쪽 하늘을 올려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후우... 그러게 여기까지 오는 것이 아니었다. 바토르의 흔적만 없었어도 이런 일에는 끼어들지 않았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마 이 싸움에서 다행인 것은 청안(靑眼)의 악마(惡魔)가 온다는 것이겠죠."
"그래, 그가 온다니. 오랜만에 보겠어."
우우웅.
청안의 악마. 쿠루혼이 지고 있는 흑창으로부터 기묘한 울림이 퍼져 나왔다. 마치 창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다. 쿠루혼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룬님도 알고 계시는 모양이로군. 오늘은 더욱 더 거칠게 날뛰시겠지."
창을 바라본 청풍.
청풍은 순간 공명결의 힘이 발동됨을 느끼고 정신을 집중했다.
기이한 느낌, 묘한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투구,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흉맹한 장수의 상이었다.
"그 창은....?"
의문은 안 가질 수가 없었다.
이상한 느낌. 뇌리를 자극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원래 알고는 있지만 기억할 수 없는 사실을 떠올릴 때와 같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 느꼈나? 술사라면 당연한 일이겠지."
술사라니.
이들은 청풍을 술사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명백한 오해였으나 청풍은 해명하지 못했다.
흑창과 거기에 깃들어 있는 환상에 정신이 팔린 까닭이다.
진실에 이르는 길.
그러나 청풍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싸움이 시작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오가 되었군요. 첫 번째 입니다."
고고마이의 목소리였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래쪽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병들이다. 병사들, 대명 제국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족히 삼백여 기는 될 법한 기병들이 칙칙한 땅 위를 달리고 있었다.
'관군.....?'
전쟁을 방불케 하는 위용이었다.
관군까지 동원되어 있다는 사실.
청풍은 다시 한 번 당혹감을 느꼈다.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릴 정도까지 커졌다. 한 순간 고고마이의 손이 흑야성의 정면을 가리켰다.
"놈들도 나옵니다. 귀마병(鬼魔兵)들이겠지요."
칠흑 같은 어둠을 둘러친 병대가 흑야성의 정면으로부터 달려나오고 있었다. 생기(生氣)가 느껴지지 않던 곳이었다. 어디서 그만한 숫자가 튀어나올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두두두두두두!
척박한 대지가 인마(人馬)로 뒤덮이는 것은 순간이었다.
격전의 서막을 알리는 순간.
챙! 콰직! 채채채챙!
순식간에 부딪친 관군과 적병들이다.
더운 피가 대지에 뿌려지고 부서지는 병장기들이 하늘을 날았다.
처음에는 비등한 싸움으로 보였지만, 우위가 드러난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관군들이 밀리기 시작한다. 선봉에서부터 무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저 병사들은.....!'
청풍의 눈이 흑야성의 병사들을 훑어냈다.
무언가 이상하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다. 말 그대로다.
그들에게는 실제로 사람이 응당 지녀야 할 생기(生氣)가 없었다.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온몸이 말발굽에 짓밟히는 데도 벌떡 일어나 병장기를 휘두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디 산 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광경일까.
마치 죽은 자들이 일어나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괴물들이로군."
쿠루혼의 탄성은 청풍의 생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죽여도 죽는 것이 아니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느낌.
청풍은 성혈교의 신장귀들을 떠올렸다.
꾸역꾸역 일어나며 덤벼오는 요물(妖物)들일진대, 일반 관병들이 그것들을 버텨낼 리가 만무하다. 하얀 종이 위에 먹물이 스며들 듯, 공포와 절망이 관병들 사이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니다. 파천(破天)의 대검(大劍)!"
고고마이의 외침이었다.
청풍도 느꼈다.
쓰러지는 관병들 사이에서 충천하는 기세가 일어나는 것을.
관병들의 앞쪽으로 한줄기 길이 생겼다. 한 자루 거대한 태검(太劍)을 지닌 자다. 사람 키에 이를 만한 거검(巨劍)을 휘두르는데, 그 위력이 실로 엄청났다.
'굉장하다!'
청풍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천하는 넓고, 대지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막강한 고수 청풍처럼 환신 월현이 불러 모은 자, 그들 중 한 명이 틀림없었다.
"이번엔 동쪽! 점창파입니다.!"
단 한 명, 태검을 지닌 자가 앞길을 열고 있었지만 관병들은 전체적을 밀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월현이 준비한 것은 아직도 많이 있었다. 언덕 오른쪽 밑으로부터 날렵한 인영(人影) 수십 개가 짓쳐 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기도....!'
점창파의 검수들이었다.
중원에서 가장 빠르다는 분광검과 사일검이 그들 손에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관병들과 달리 순식간에 적들을 격파하고 있다. 청풍의 시선이 그들의 선두를 향했다.
'고수!'
왼손에는 창, 오른손에는 검을 지녔다.
죄창우검(左槍右劍)
왼손에서는 관일창이, 오른손에서는 사일검이 뻗어나간다.
뛰어난 것은 무공뿐만이 아니었다.
선봉에서 길을 열며 뒤따르는 점창 검수들을 절묘하게 통솔하고 있었다. 집단 전투에 능한 모습이다. 저 정도 고수라면 명성이 대단할 텐데, 식견이 짧아서인지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숲이 움직인다. 우리도 가야겠어."
쿠루혼이 등 뒤의 흑창을 풀어냈다.
숲이 요동친다.
요사스런 기운이 숲 전체에 충만하고 있었다.
"고고마이!"
고고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쿠루혼과 고고마이가 기묘한 진언을 외웠다.
은은한 녹청의 빛무리가 그 두 사람의 몸에 깃들었다. 신비한 모습이다. 쿠루혼이 먼저 몸을 날리며 외쳤다.
"이쪽이오! 절대로 뒤처지지 마시오!"
언덕 밑으로 질주하는 그들이다.
특이한 경공술, 아니, 경공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격식이 없다. 굉장한 속도였다. 마치 무언가에 씌인 듯한 모습이었다.
청풍은 화천작보를 전개하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벌판에 당도하자 곧바로 방향을 바꾼다. 바람처럼 달리며 전장을 우회해 나갔다,
점창파 검수들의 뒷모습이 보이고, 이어 적들의 측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빨리! 놈들은 미완성이야! 반응 속도가 떨어진다. 따돌릴 수 있어!"
쿠루혼과 고고마이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화천작보로 가볍게 따라붙고 보니, 쿠루혼의 말대로 적들의 반응이 느리다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뻣뻣한 움직임이다.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강시가 사실은 강호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더니만, 이놈들이 바로 그런 놈들인 것 같았다.
"측문(側門)이 저기에 있소! 저곳으로!"
여기서부터는 청풍도 안다.
월현이 준 지도, 거기에 그려진 그대로였다. 굳게 닫혀진 대문(大門)이 무척이나 견고해 보인다. 청풍이 달려 나가며 검을 뽑으려 할 때였다. 쿠루혼이 그의 옆을 따라 붙으며 외쳤다.
"이쪽에 맡기시오! 당신은 골짜기의 주인만 상대하면 돼!"
그가 흑창을 뒤로하며 왼손의 방울을 흔들었다.
기이한 울림, 난데없는 기성(奇聲)이 울려 퍼졌다.
삐이익!
하늘로부터 한 마리 독수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진짜 독수리가 아니라 독수리 형상이었다. 녹청색 날개를 휘날리며 대문을 직격한다. 단단해 보이던 문짝이 단숨에 부서져 버렸다.
'허.....!'
주술이다.
무공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이 싸움에 가득했다.
세 사람이 부서진 문짝 안으로 뛰어들었다.
펼쳐지는 광경.
청풍은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놀라움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너져 가는 담장들 사이, 생전 본 적도 없는 형체들이 서있었다.
"귀물들이다. 고고마이."
귀물, 그 말이 옳다.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것, 짐승과 사람이 혼합된 괴물도 있다.
어쨌거나 인간들은 아니었다. 현세의 광경으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경계에 선 자들.......!'
청풍의 머리에 월현의 한마디가 스쳐 지나갔다.
경계에 선 자들의 싸움이란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 청풍이 살아온 영역과 전혀 다른 영역의 싸움이었다.
텅!
쿠루혼이 땅을 박차고, 고고마이가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귀물들이라 표현된 존재들 한가운데로 뛰어들며 그들만의 진언을 외워 나갔다.
쿠르르르!
독수리 형상에 이어 녹청색 늑대 형상들이 나타났다. 고고마이가 손짓한다. 그곳에 서 있지 말고 달리라고.
청풍의 발이 땅을 박찼다.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애써 이해하려 할 필요는 없었다. 바깥의 싸움, 그리고 이들의 싸움. 모두가 거대한 싸움의 톱니바퀴일 뿐이다. 그 톱니바퀴 중 하나의 역할을 맡았다면, 그것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싸워주면 그만이었다.
탁,탁,탁! 쐐애애액!
담벼락을 타올라 무너져 가는 전각의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쿠루혼과 고고마이가 귀물들을 물리치며 그의 옆을 따라붙었다.
중앙궁.
높은 곳에 올라가자 흑야성 내부로 높게 솟은 세 개의 탑이 보였다.
청풍은 비슷하게 생긴 세 개의 탑 중에서 중앙궁이 어느 것인지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월현이 알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현무검이 있기 때문이었다. 공명결을 파고드는 느낌, 현무검의 기운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콰쾅!
흑야성 서쪽, 한줄기 섬광이 비쳐들고 이어 맹렬한 불꽃이 치솟았다. 그곳을 본 쿠루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화군(火君)도 공격을 시작했다. 이제는 반격만 버티면 돼."
사방에서 좁혀 들어온다. 그것도 막강한 아군들이.
총공격(總攻擊)이란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갑시다."
청풍도 서둘렀다.
현무검의 위치를 확인한 이상 다른 것은 필요치 않았다. 그들의 말, 월현의 말대로 그는 북제라는 정체불명의 적과 싸우면 그만이었다.
텅! 터텅!
세 사람의 신형이 속도를 더했다.
귀물들, 또는 기이한 복장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세 사람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폭음과 병장기음이 거세지고, 전장의 공기가 고조된다. 그 모두가 청풍 일행의 침입을 유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극소수로 이루어진 최정예 침투조, 청풍이 맡은 역할이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나 달리고, 얼마나 뛰어넘었을까.
중앙궁의 탑이 눈앞으로 보일 때까지 왔다. 황폐해진 정원에 내려선 그들이다, 말라비틀어진 나무들 사이로 한 무리의 귀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즉(悧卽)의 겁화(劫火)다. 좋아, 환신(幻神)이 왔어."
귀물들은 청풍 일행이 가까이 왔는데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나같이 검게 변한 귀물들, 다시 보니 모두 다 죽은 놈들이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몰살당한 그들이다. 환신 월현이 지나간 길이었다.
우우우우웅!
정원을 가로질러 중앙궁의 앞까지 이르렀다.
동쪽의 탑에서 기이한 울림이 전해졌다.
동방궁이다.
동방궁이 진동하고 있다. 그 여파가 지진처럼 넓은 대지 위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벌써 시작했군! 서둘러야 하겠다!"
"쿠루혼님! 조심!"
여기까지 꽤나 순조롭게 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었다. 여기는 적들의 중심지, 환신이 미쳐 처리하지 못한 귀물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쐐애애액!
늑대와 비슷한 형상을 한 괴물이 달려들고 있었다.
보통 늑대와는 확연히 다른 생김새.
털로 덮인 것인지 아니면 반들반들한 가죽인지, 묘한 질감의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었더. 쿠루혼이 귀물의 쇄도를 피해내며 경호성을 울렸다.
"갈저(蝎猪)다! 갈저가 있으면 알유도 있을 거다! 고고마이 강신술을 준비해!"
갈저, 그리고 알유.
이 귀물들은 이제 보니 각각의 이름도 있는 모양이었다. 쿠루혼이 흑창을 휘둘러 갈저라 불린 괴물을 튕겨내고는 뒤쪽으로 물러섰다.
다가오는 귀물들,
어디서 그렇게 기어 나온 것인지, 순식간에 그 숫자가 불어났다. 중앙궁이 바로 저 앞에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파아아! 콰쾅!
"캬아아악!"
귀물들의 한 가운데로부터 커다란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원숭이와 비슷한 생김새이나 굉장한 덩치를 가지고 있다. 멧돼지의 갈기와 같은 털이 머리 위에서 등 뒤로 뻗쳐 있고, 눈에서는 광기의 붉은 색이 비쳐 나오고 있었다.
고고마이가 대경(大驚)하며 녹색의 방울들을 꺼내 들었다.
"옹화(雍和)까지!!"
갑작스레 짓쳐든 괴물이 쿠루혼의 전면을 덮쳤다.
갈저들의 공격을 막아내던 쿠루혼이 미처 그 괴물의 쇄도를 보지 못하고 그 육중한 몸체에 휩쓸렸다. 황폐한 땅의 흙먼지가 구름처럼 솟아올랐다.
'이런!'
황급히 주작검을 뽑아 들었지만 늦었다.
걷히는 흙먼지, 귀물들의 한가운데에 망신창이가 된 쿠루혼이 보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땅 위에 쓰러져 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텅!
청풍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생각한 것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는 몸이다. 그를 구해야 했다. 화천작보의 속력, 그의 손이 순식간에 쿠루혼의 옷소매를 잡아챘다.
"키아악!"
귀물의 공격이 이어졌다.
청풍의 손에서도 염화인이 펼쳐졌다. 그의 주위로 화려한 검인(劍刃)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촤아악! 촤아아악!
달려들던 갈저들이 공중에서 토막 나 떨어졌다.
땅을 박차고 돌아오는 청풍의 모습에 고고마이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짧은 순간 보여준 무위, 고고마이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검기(劍技)! 당신은 술사가 아니었군!"
"물론 아니었소. 그보다 이자를......!"
피투성이의 쿠루혼을 앞에 놓고서도 고고마이는 청풍이 술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쿠루혼의 몸에 손을 얹으면서도 청풍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술사가 아닌데도 어찌하여 그런 법구(法具)들을 쓰는 것이오?"
고고마이 눈이 주작검과 청룡검을 스쳐 지나갔다.
술자들의 눈에는 법구로 보이는가.
청풍은 거기서도 뇌리를 자극하는 무언가를 느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냥 넘겨 버릴 수밖에 없었다. 피에 굶주린 귀물들이 그들을 향하여 짓쳐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법구가 아니라 검(劍)일 뿐이오!"
청풍의 손이 주작검의 적백색 검날을 뻗어 올렸다.
금강탄과 염화인 쏘아져 나간다. 이름모를 귀물들이 그의 검격에 박살나며 흉측한 살점들을 비산시켰다.
텅! 파라라락!
처음부터 그가 직접 나섰어야만 했다.
주작검의 위력은 여전하다.
청풍은 십 할의 수준이 아니라 느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끝 차이다. 적들을 베어 넘기는 살상력은 그 적이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전혀 상관하질 않았다.
"뒤쪽을!"
고고마이의 경호성이 들려왔다.
뒤.
청풍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대신 앞쪽으로 더 나아갔다.
이미 뒤쪽에는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쐐애액!
한쪽에서 날아와 뒤쪽을 훑어내는 빛줄기가 있었다.
청룡검, 용갑에 매달려 있어야 할 청룡검이 그곳에 없다. 그렇다고 언제나처럼 그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빛줄기의 정체가 바로 그 청룡검이었다.
쇄도하는 갈저의 몸이 푸른 빛살에 꿰뚫려 한쪽으로 튕겨 나갔다. 공명결로 펼치는 어검술, 고고마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텅! 쇄애액!
'숫자가 너무 많다. 서둘러야 할 텐데!'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그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이런 적들과 사워본 적이 없기에 그렇다.
비슷한 놈들을 찾으라고 한다면 성혈교의 신장귀들. 하지만 그들과도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들을 상대할 때처럼 싸울 수는 없었다. 전혀 다른 방향, 전혀 다른 방식의 공격이 쏟아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퍼어억!
귀물들 세 마리를 더 베어버렸을 때다.
뒤쪽으로부터 들려온 육중한 충격음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고고마이가 있는 쪽, 놓친 귀물이 있었던가. 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순각적으로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 그곳에 있었다.
"미안하오! 잠시 방심했소!"
흑창을 휘둘러 귀물을 물리치는 자.
쿠루혼이었다. 그것도 멀쩡한 모습이다.
뒤에 있는 고고마이의 손에서 연녹색의 빛무리가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인세에 볼 수 없는, 인세에 드문 일. 이곳에서는 그런 것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신비한 술수, 고고마이에게는 상처입은 자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나서는 쿠루혼의 무위는 대단했다.
방금 전의 부상이 무색할 정도의 무위였다.
변모하는 무위.
뭔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겉모습은 쿠루혼이되 근본은 쿠루혼이 아니게 된 느낌이다. 검은색 투구의 흉장(凶將)이 쿠루혼의 모습 위로 겹쳐 보이고 있었다.
"앞으로!"
목소리도 탁하게 변해있다.
흑창의 기세도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중원의 무공이 아니라 전장의 창부림이다. 그러면서도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고고마이가 불러내는 짐승 형상들도 만만치 않은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은 이런 싸움을 잘 아는 자들이며, 이런 싸움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중앙궁의 정문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쿠루혼님! 뭔가가 옵니다!"
거의 다 왔다.
하지만 고고마이의 경호성은 심상치 않았다.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쿠루혼도, 심지어는 청풍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가 있다.
이런 귀물들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다. 한순간 중앙궁의 이층 석벽이 터져 나오고, 그 안으로부터 무서운 기세를 뿌리는 '그것'이 뛰쳐나왔다.
청풍은 그것을 보며 순간적으로 청룡검에 잠식당했던 광인(狂人)을 떠올렸다.
다 찢어진 장포를 날개처럼 휘날린다. 등 뒤로 늘어뜨린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자와는 다르다.'
비슷한 형상이다?
아니다.
그것뿐이다. 더 크고, 더 강하다.
거인(巨人)이란 것이 있으면 저런 모습일까. 팔 척 거인이란 말로는 형용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검대신 거대한 전부(戰斧)를 들고 있었다.
"전마인(戰魔人)이라니! 이놈들은 역시 미쳤어!"
쿠루혼이 이를 갈았다.
거인의 장대한 그림자가 중앙궁 정문 앞에 드리워졌다.
사람의 몸체보다 큰 도끼를 비껴든 채 흉악한 안광을 뿜어낸다. 엄청난 위용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것이 북제(北帝)?"
청풍의 물음에 고고마이의 다급한 외침이 돌아왔다.
"북제는 아니오! 하지만 위험하긴 매한가지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월현은 북제를 보면 저절로 알아볼 것이라 했다.
저런 괴물이 아니다. 북제는 중앙궁 안에 있다. 여기서 멈출 것이 아니었다.
청풍과 쿠루혼이 달려 나갔다.
쿠루혼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용맹한 기세로 전마(戰魔)의 기인에게 짓쳐들었다.
꽈아앙!
느릿느릿 움직인다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처음뿐이었다.
전마인의 도끼는 불시에 내리치는 벼락과도 같았다.
사나운 기세를 담은 흑창이 가로막힌 것은 순간이었다. 쿠루혼의 몸이 달려들던 속도만큼 빠르게 튕겨 나왔다.
'그야말로 괴물이로군!'
쿠루혼의 몸을 스쳐 보내며 앞으로 나섰다.
거대한 형체가 귀물들의 그것과 같지만, 그가 휘두르는 도끼는 사람이 쓰는 병장기(兵仗器)였다. 보통의 무인보다 큰 체격, 더 크고 무거운 중장기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진격의 발검, 청풍의 손에서 금강탄이 쏘아졌다.
퀴유웅! 쩌어어엉!
전마인의 도끼가 크게 흔들렸다.
도끼만 흔들린 것이 아니라 전마인의 몸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이놈은 그 모습처럼 괴물이다. 충돌에서 느껴지는 내력은 귀기(鬼氣)로 가득했고, 청풍의 내공을 정면으로 받아낼 만큼 강했다.
갈라진 피부, 인간같지 않은 얼굴에 흉포한 광기가 서렸다. 청풍의 머리 위로 거대한 도끼가 쏟아져 내렸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공중을 날던 청룡검이 청풍의 왼손으로 돌아오고, 겹쳐진 두 신검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초식이나 기술의 겨룸이 아니라 순수한 힘의 격돌이었다.
꽈아아앙!
청풍의 발밑에서 흙먼지가 솟아났다.
무지막지한 괴력이었다. 이런 것을 계속 받아내다가는 살아남지 못한다. 온전하지 못한 내력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력의 열세, 어쩔 수 없는 열세였다.
쿵! 꽈아아아!
또 온다.
휘둘러 오는 도끼의 기세가 더할 나위 없이 거셌다.
이번에도 정면으로 받을 수는 없다. 전력을 다해 용뢰섬을 펼쳤다. 비껴내는 것만으로도 몸 안의 내력이 요동친다. 강적이었다.
텅! 파라라라락!
공격의 여파를 훑어내고 곧바로 금강호보를 전개했다.
폭발적인 쇄도로 거인의 품 안에 파고든다. 사선으로 휘돌리는 주작검, 염화인의 검격이 전마인의 정면을 휩쓸었다.
챙! 채채채챙!
거체(巨體)라 하여 반응 속도가 느릴 것이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전마인은 그렇게 얄팍한 전력이 아니었다.
몸을 젖히며 휘두르는 팔, 쇠사슬이 따라 올라오며 염화인의 검격을 막아낸다. 광기에 차 있는 두 눈, 그 어디에서 그런 움직임이 나올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쩌엉! 터텅!
순식간에 십여 합의 공방이 지나갔다.
답답했다.
북제라는 자가 어떤 상대인지도 모르는데, 이런 곳에서 뜻밖의 괴물과 맞서고 있으려니 갑갑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뿐인가.
종이 한 장 차이. 베어낼 수 있는 곳인데도 베어내지 못하고, 꿰뚫을 수 있는 곳인데도 꿰뚫지 못한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공명결에 감지되는 데에도 정작 내력과 검격이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고 있었다.
"전마인을......!"
청풍 본인은 한끝 차이를 아쉬워하고 있었지만, 쿠루혼과 고고마이에게는 그런 모습이 충격일 따름이었다. 전마인을 상대하는 모습, 청풍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엄청나구나!"
청풍은 사실, 계속되던 싸움과 조금도 관계가 없던 자였다.
청풍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흑림이 뭔지도 모른다고.
술사도 아니라 했을 뿐더러 귀물들과의 싸움도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런 자를 어떻게 전투에 써먹을 수 있을까. 주 전력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골짜기의 주인, 북제를 다스리는 특별한 힘을 지닌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청풍은 전마인을 거뜬히 상대하는 자였다. 청색과 홍색의 빛살을 자유롭게 뿌려대며 경이로운 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아니, 알려고도 안 했다. 청풍이 술자들의 세계에 대해 몰랐던 것처럼 그들은 무림의 무인들을 몰랐고, 그런 만큼 청홍무적검의 명성 또한 알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꽈아앙!
또 한 번 커다란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흔들리는 청풍, 전마인의 가슴에 길다란 검상이 새겨졌다.
그것을 보고는 고고마이의 눈에 밝은 빛이 감돌았다.
'가능해.....!'
눈 앞의 청풍이란 자는 놀랍도록 강한 자다.
전마인이란 것은 인간을 두고 할 수 있는 온갖 요사스런 술법의 정화(精華)다. 그런 것을 쓰러뜨릴 정도라면 그 다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고고마이는 그 낙관이 이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 속을 파고드는 느낌. 그의 시선이 뚫려있는 중앙궁의 이층 벽에 이르렀다.
또 하나.
그 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도끼가 아니라 거대한 철추(鐵椎)를 든 괴물이다. 전마인은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