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우웅!
새로운 전마인의 출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청풍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전력을 다해도 장담하지 못할 싸움이다. 내력이 온전하다면 해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난감함이 먼저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던가......!'
한 손에 청룡검, 한 손에 주작검을 비껴들고 앞으로 나섰다.
두 괴물을 한 몸으로 막으려는 모습이다.
내력이 온전하지 않다는 사실.
잊어버렸다.
싸움을 하는 데 있어 뭐 하나 손해보고 시작하는 것이 그리 큰 것이었나.
모든 것을 갖추고 싸우려면 문파 내에서 가벼운 비무나 하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의 의지로 행해지는 싸움이지만 그의 앞에 그를 막는 이가 있고, 그에게 무기를 겨누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싸움이 될 수가 없었다.
'내 싸움이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다. 북제와 싸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무검을 얻기 위해서다. 그러면 그것을 향하여 곧장 가면 된다. 상황을 재고 힘을 아끼려 한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던 것이다.
터어어엉!
금강호보, 범의 기세로 달려 나간 청풍이다.
신형을 휘돌리며 청룡검을 내친다.
풍운룡보였다. 신묘한 용의 움직임이 거기에 있었다.
쩌엉! 치리리링!
부딪치는 도끼날에서 불꽃이 튀었다.
쏟아지는 불꽃이 주작검의 화인(火印)을 불러온다.
화천작보. 질주하는 주작검이 두 번째 전마인, 철추에 충돌하며 굉음을 울렸다.
꽈아아앙!
경천동지의 격전이었다.
자신보다 두 배는 큰 괴물들을 상대로 호쾌한 검격을 펼치는데,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콰직! 쐐애액!
끼어들 틈이 없을 뿐 아니라, 쿠루혼과 고고마이로서도 몸을 뺄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죽여도 죽여도 줄지 않는 귀물들이다. 아니, 오히려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중앙궁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한 흑림의 수괴(首魁), 사황(死皇)이 이쪽으로 전력을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목표의 직전까지 와서 지구전(持久戰)이라면, 그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급박하고도 초조한 전황.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돌파구는 다른 곳에서부터 생겨났다.
콰아아앙!
귀물들이 한 켠이 폭발하듯 터져 나간다.
박살나고 부서지는 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려왔다. 무지막지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퍼어억! 카가가각!
거대한 원숭이 형체의 귀물, 옹화의 몸체가 산산조각으로 터져 나갔다.
그 무지막지한 살점들 사이로 거대한 대검의 검날이 빠져나온다.
사람 키만한 거검(巨劍)이다. 드러나는 남자, 바깥의 평원에서 귀마병들을 돌파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콰직! 퍼어어억!
남자의 의복은 이미 흩뿌려진 적들의 피로 인하여 본래 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가오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박살낸다.
흑야성 바깥에서 여기까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적들을 돌파해 온 이였다. 휘날리는 긴 머리 사이로 드러나는 무정한 두 눈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한 암흑을 품고 있었다.
쿠우웅!
"파천의 대검....!"
고고마이의 입에서 신음성에 가까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멀리서 보았을 때와 또 다른 위력이다.
휘두르는 일검에 만 근의 힘이 담긴다. 대검의 사내는 순식간에 길을 열어놓고 말없이 고고마이를 지나쳤다.
청풍과 전마인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곳.
그 역전의 전장으로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콰아아앙! 쩌어엉!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은 그의 놀라웠던 등장보다 더욱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싸움의 한가운데로 망설임없이 태검의 일격을 꽂아 넣는다.
폭탄이라도 터진 듯, 응축된 경기들이 휘몰아치며 엄청난 흙먼지를 일으켰다.
"저.... 무슨 짓을........!'
전마인 둘과 청풍의 힘을 한꺼번에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흩어지는 세 개의 그림자.
발길을 옮긴 남자가 청풍의 앞을 가로막으며 전마인들에게 대검을 겨누었다. 아직 남아있는 충격의 여파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듯 울려 퍼졌다.
"여기는 내가 맡는다."
길을 열고, 열어주는 것.
파천의 휘광이 맡은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청풍과 그의 눈빛이 교차했다.
청풍이 가야 할 길을 대신 열어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중앙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마인의 도끼가 따라붙었지만, 단숨에 내쳐 오는 태검이 그 도끼를 튕겨내 버렸다.
굉음으로 장식되는 거병(巨兵)들의 싸움이 사위를 휩쓸며 펼쳐진다. 청풍은 그 강력한 격전의 소용돌이를 등으로 느끼며 중앙궁의 문을 열었다.
원치 않는 끝없는 암흑으로 잠에서 깨어나 버린 자, 북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구의 회랑은 길었다.
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회랑은 손에 잡힐 듯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기운은.......!'
청풍은 그 기운의 정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흐르는 듯한 기운, 손을 뻗으면 차갑게 휘감아돌며 지나갈 것 같았다.
물기운, 수기(水氣)였다.
하지만 물의 기운이면서도 다른 기운들처럼 맑지가 못했다.
탁하게 흐려지고, 사납게 뒤틀렸다.
이것이 수기, 현무기(玄武氣)라 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백호기도, 청룡기도, 주작기도 이렇지는 않았다. 다 다른 기운들이었지만 어느 하나도 정(瀞)하지 않은 기운이 없었다. 순수하고 순정하여 사기(邪氣)가 침습할 수 없는 성스러운 기운들이었다.
그러나 이 현무기는 달랐다. 뭔가에 의하여 악해지고 거칠어졌다. 사방으로 넘실넘실 떠다니는 기류(氣流) 속에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양, 뭉치고 흩어지는 기묘한 기운들이 있었다. 귀기(鬼氣)였다.
'설마.......!'
청풍은 비로소 해답에 다가설 수 있었다. 현무검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바로 이 귀기를 얻기 위해서다. 이런 기운을 받고 있다가는 어떤 사람이라도 정상을 유지할 수 없다. 멀쩡한 사람이었더라도 하루 이틀만 이 안에 있다 보면 광인(狂人)이 되어버릴 터다.
그런 귀기를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깃들게 한다면.
'팔만 사천 귀병......!'
환신 월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현무검의 귀기로 만들어진 귀병(鬼兵), 그것이 귀마병이고 전마인이다.
백호검을 쥐고서 광인이 되었던 도적, 그리고 청룡검을 잡고서 광인이 되었던 사람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들과 변화된 양상은 달라도, 영육(靈肉)의 균형이 깨졌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광인(狂人) 또는 마인(魔人)이다. 그런 마인들을 만드는 데 현무검이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회랑을 따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사방을 채운 귀기는 점점 더 짙어지고 사나워져 갔다.
희미한 귀곡성이 귀를 울리고 히끗히끗한 환영까지 어지럽힌다.
청풍의 두 손이 청룡검과 주작검을 잡았다. 희대의 기보가 그 두 손안에 있으니 그 무엇도 그의 정신을 어지럽히지 못한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음습한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회랑의 높이가 이층에 이르렀다. 한쪽 벽에 뚫려 있는 커다란 구멍이 그의 시선이 사로잡았다. 전마인이 뛰쳐나온 구멍이다. 구멍 아래쪽으로부터 격렬한 충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청풍은 구멍을 지나쳤다.
바깥의 싸움은 바깥의 사람들이 해결해 줄 것이다. 회랑 위쪽으로 완만하게 휘어지는 통로로 발을 옮겼다. 그를 부르고 있는 것이 그 위에 있었다.
뚜벅, 뚜벅.
바깥으로 뛰쳐나가 버린 전마인들이 마지막 보루였던 듯, 그 앞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상당한 높이, 중앙궁의 상층에 이른 청풍이다. 그는 그 앞에서 불길한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나고 있는 검은색의 제단을 볼 수가 있었다.
'이곳은........!'
대체 무슨 짓이 벌어졌던 것일까.
제단 위에 가득한 검은색 자국은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보였다. 그뿐이 아니다. 그 주변에는 아직도 마르지 않은 선혈(鮮血)이 낭자했다.
온갖 귀신(鬼神)들이 조각되어 있는 청동 거울들이 사방의 벽에 둘러쳐져 있었다. 사악한 제사(祭祀)와 음험한 의식들이 행해지던 곳이었다. 천도(天道)를 벗어난 기억들이 이곳에 가득했다.
'현무검이........!'
한 자루의 검이 그 가운데에 있었다.
진한 묵색의 검병을 따라 회흑색 검날이 기이한 광채를 뿜고 있다. 귀갑(龜甲)처럼 주조된 검 받침이 검날을 타고 올라오고 있으며, 검병 끝으로는 늘어뜨리는 수실 대신 두 개의 금속 송곳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희대의 기병, 큰 분노가 끓어 오른다. 이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현무검은 이런 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늦었군."
앞쪽으로부터 천천히 울려오는 굵은 목소리가 있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현무검의 뒤쪽에서 느릿느릿 일어난다. 무거워 보이는 동체, 청풍의 눈이 기광을 발했다.
"왜 이제야 온 것인가."
그의 목소리는 그의 움직임 만큼이나 느리기만 했다.
중장갑, 전쟁터에서나 볼 법한 중장갑을 걸치고 있다. 검게 칠해진 갑옷은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기라도 한 것처럼 고풍스럽기만 하다. 낡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이 엿보이는 갑옷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창백했다.
검은색 투구가 무색하도록 하얀 얼굴이었다. 마치 분칠이라도 한 것처럼 기이한 느낌을 불러온다. 두 눈에서 뻗어나오는 안광도 어딘지 정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당신이 북제(北帝)요?"
청풍이 물었다.
남자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청풍은 그 순간 그 미소에서 남강홍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 백호검, 을지백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온몸에서 뻗어 나오는 살기는 남강홍의 그것과 비슷했다.
"북제라.........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다."
남자가 목을 뒤틀었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폭발 직전의 화약이 눈앞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공포스러운 얼굴, 그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꺾으며 느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이나? 인신공양(人身供養)이다, 피를 너무 많이 먹었더니 정신이 혼미해."
인신공양이라 함은 사람의 목숨을 제단에 바쳤다는 이야기다. 피를 많이 먹었다는 말은, 정확한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발이 핏물 가득한 제단 위를 가로질렀다.
육중한 갑옷 사이로 나온 손이 현무검의 검자루를 잡았다.
"내 이름은 북진무(北振武)다. 나는 넷 중의 가장 마지막이었고, 항상 그 끝에 있었다. 나의 근원은 다른 셋과 달리 중원(中原)의 대지였으며, 나의 이름은 군신(軍神)의 북성(北星)을 일컫는다. 이제 와 신검(神劍)의 주인이 찾아왔으나 북제의 영명은 그 본원을 벗어나 버렸다. 지금의 북방검은 더 많은 피를 원하고 있을 뿐이야."
활시위에 화살을 올리듯 청풍의 몸에 팽팽한 긴장이 깃들었다,
이자는 그들 중 하나다.
을지백, 천태세, 남강홍과 같은 이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스승이 아니다. 네 번째는 적(敵)이다. 모든 것이 뒤틀려 버린 이곳, 그가 만나야 했던 북제는 그 스스로 광기(狂氣)에 휩싸여 버린 북진무를 뜻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리링!
청풍의 허리춤에서 청룡검이 뽑혀 나왔다.
망설임은 버렸다.
이럴 줄은 몰랐다?
아니다. 언젠가부터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남강홍에게 무공을 배울 때부터,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비무가 아니라 목숨을 건 싸움.
그들 중 누군가와 겨뤄야만 할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싸워야만 한다면 싸워야겠지. 난 피하지 않겠소."
청룡검을 곧게 겨눈 청풍의 전신에 막강한 투지가 흘러나왔다.
신검의 스승, 반드시 넘어야 할 벽 중 하나가 그 앞에 있었다.
텅!
청풍의 발이 땅을 박찼다.
쩌어어엉!
현무검과 청룡검이 부딪친 것은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현무는 수신(水神), 흐르는 수기(水氣)라 했다.
넓은 검신을 올쳐치며 받아내는 동작이 그야말로 도도한 강물의 흐름과도 같았다.
파아아아!
청풍의 몸이 북진무의 앞을 휘돌았다. 용보(龍步)였다.
꺾으며 굽어드는 발걸음이 구름속의 신룡과 같았다. 측면을 타고 든 청룡검 검신이 현무검의 후면을 파고들었다. 금강탄 일격이었다.
키이잉! 채애애앵!
중장갑을 입은 몸, 움직임이 느려 보였다. 느려 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느렸다.
하지만 그렇게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전혀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현무검이 금강탄의 맥점을 절묘하게 끊어 놓았다.
"합!"
빈틈이 보인다 해도 한 순간일 뿐이다. 공격을 시도해도 소용이 없다. 단숨에 급류가 흘러들 듯 빈틈이 메워지고 완전한 방어가 자리잡았다. 정중동(靜中動), 선심후수의 전형이었다. 무당파의 태극검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밤이 되면 귀기는 더욱 강성해지지. 어서 나를 막지 않으면 바깥의 싸움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스승과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흑야성에 내려앉은 귀기를 물리치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사술에 의해 귀기를 흘려내고 있는 현무검, 그것을 막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북제를 다스리고 팔만 사천 귀병을 막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치리잉! 쒜에에엑!
하나 더.
주작검이 뽑혀 나왔다. 발검과 동시에 청룡검의 검격과 어우러지며 무서운 연환검을 풀어놓았다. 여전히 느리지만 그 절묘함은 그야말로 신기(神技)였다. 발과 발, 동선과 동선의 이어짐이 놀라웠다. 막힘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청풍의 생각이 싸움으로 좁혀졌다.
모든 정신을 이곳에. 검과 검의 부딪침에 집중했다.
'보법! 방어의 핵심은 역시 보법이다.'
청풍의 눈이 빛을 발했다.
이것이 현무검의 보법이다. 후(後)의 후(後). 느림의 무학(武學)이다. 최소한의 내력, 최소한의 움직임이 그 안에 있다. 속도와 기세로 적을 제압하는 화천작보와는 정반대의 보법이었다.
'그렇다면.....!'
청풍은 속도를 더 올렸다.
기다림이 북진무의 보법의 핵심이라면 기다릴 여유조차 주지 않으면 된다. 화천작보가 청풍의 발에 날개를 달았다. 청룡과 주작이 뿜어내는 청홍의 불꽃이 염화인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타올랐다.
파라라라라......... 위이이잉!
엄청난 기세로 몰아치는 연환검이었다.
점점 더 빨라지는 검격의 흐름에 공기가 멈추고 시간이 멈추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겹치고 겹쳐, 결국 한줄기의 강렬한 공진음을 만들어냈다.
맞서는 북진무의 몸이 흩어지듯 흐려졌다. 난무하는 검격사이로 스며든다.
그 움직임을 따라 뻗어지는 현무검, 현무신검의 넓은 검신(劍神)에서 심해(深海)를 유영하는 북방신의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우우우우웅!
놀라운 무예, 강력한 무공을 수없이 경험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 중에서도 이런 무공은 없었다.
환상처럼 퍼져 나와 바다와 같이 드넓게 펼쳐진다. 무적의 방패, 현무검의 진신무공이다. 염화인의 강렬함을 흡수하듯 막아내고 있었다.
위이이이....... 파라라락!
천 근의 힘이다. 숨도 못 쉴 것 같은 압력이다.
극점을 향하여 뻗어나가던 염화인의 속도가 한순간에 느려졌다. 주작검이 날카로움을 잃고, 청룡검이 신묘함을 잃어버렸다.
굳어지는 청풍의 얼굴.
방패는 방패로만 끝이 아니다. 모조리 삼켜내고 노도와 같이 뿜어낸다. 완전한 방어에 이어지는 반격이었다. 현무검이 확대되듯 뻗어 나왔다.
꽈아앙!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충격이다.
주작검과 청룡검을 휘두르고 온 내력을 집중하여 물러났지만, 현무검이 내뿜는 기운은 너무도 강하고 너무도 무거워 도무지 흩어낼 도리가 없었다. 청풍의 몸이 무서운 기세로 튕겨 나왔다.
쩌엉! 꾸우웅!
벽에 처박히는 청풍이다. 사방에 가득한 청동 거울들이 부서지며 그 조각들을 흩뿌렸다. 이어 땅에 떨어지는 청풍의 몸이 둔중한 소리를 울렸다.
"고작 그 정도인가?"
북진무가 다가온다, 소리도 없이.
쓰러졌던 청풍이 이내 땅을 짚고 일어났다.
엄청나다.
일순간 의식마저 끊겨 버렸을 정도다. 공중을 날아 벽에 부딪치면서도 전혀 몸을 가누지 못했다. 어깨와 등에서 찌르는듯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아직이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청풍.
이마에서부터 뜨듯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피다. 거울 조각에 부딪치며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어깨와 옆구리에서는 무복이 가루가 되어 부스러지고 있었다. 일격, 단 일격에 몸 전체에 가득하던 융통무애(融通無碍)한 기(氣)까지도 흩어져 버렸다는 증거였다.
텅!
청풍은 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상이 제법 컸지만, 그것도 눌러 버렸다.
멈출 수 없다.
미지(未知)의 무공이라면 부딪쳐서 알아봐야 한다. 고작 그 정도, 그들이 항상 하던 말이다. 더 이상 그런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쒜에엑! 파라락!
달려 나간 청풍의 눈이 신기(神氣)를 발했다. 북진무의 보법을 몸으로 느끼며 그 흐름을 감지한다. 신검의 무공이란, 결국 청풍이 지닌 무공과 일맥(一脈)이란 이야기다. 파고들 여지는 충분했다.
쒜엑! 터텅!
작보를 멈추고 호보를 전개했다.
속도로 승부할 수는 없다.
불로 물을 이긴다?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상극(相剋)의 무공을 이기려면 그 쪽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만 한다.
아니면 압도적인 화력(火力)으로 모조리 날려 버리거나.
치리잉! 퀴유우웅!
청풍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염화인 대신에 금강탄을 끊어 쳤다. 내치는 검격으로 상대의 반응을 보는 것이다.
활짝 풀어놓은 감각이다.
상단전이 열리고 공명결이 발동되었다. 하얀 눈밭에 발자국이 새겨지듯, 청풍의 머리 속에 북진무의 보법이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금강탄을 막고 반격해 오는 현무검.
청풍의 몸이 한순간에 새로운 움직임을 보인다. 그의 발이 느리게 이동하며 물이 흐르는 듯한 일보를 밟았다.
".......!!'
북진무의 눈이 번뜩이는 기광을 발했다. 현무검을 겨누면서 돌아서는 그가 창백한 얼굴을 찌푸리며 의문의 한마디를 발했다.
"수류구보(水流龜步)?"
현무검, 그 보법의 이름인 모양이다.
삼일연공.
오래 전, 을지백은 금강호보의 연마에 삼 일을 이야기했었다.
청풍은 긴 시간이 지난 이제야 깨닫는다.
삼 일의 시간은 허황된 말이 아니다. 상단전을 연 자, 공명결을 익힌 그라면 가능하다. 어떤 무공이든 결코 어려울 것이 없었다.
터억.
청풍의 발이 또 한 번의 움직임을 더했다.
북진무의 보법과 똑같다. 그것을 본 그가 분노의 표정을 떠올렸다.
"잔재주를 부리다니!"
두 눈에 떠오르는 것은 짙은 광기다. 그가 현무검을 겨누며 외쳤다.
"현공포(玄功砲)도 흉내 낼 수 있을까?"
포(砲).
청풍은 바로 조금 전 그를 튕겨낸 막강한 일격을 떠올렸다.
그렇다. 그것의 이름이 현공포다.
막을 도리가 없었던 그 힘.
내력을 모조리 끌어올리며 두 발을 땅에 박았다.
버텨 선 발끝에 목신운형의 부드러움을 담았고, 두 신검을 겨눈 팔에 청룡결의 방어초를 준비했다. 주작검으로는 용뢰섬, 청룡검으로는 청룡운해다.
힘으로 부딪치지 않고 흘려낼 생각이다.
해일이 닥쳐오는 느낌, 북진무의 현공포가 제단 위를 갈라오며 돌가루를 비산시켰다.
우우우우웅!
맞서는 청풍의 움직임도 거침이 없었다.
왼발을 축으로 몸 전체를 회전시키며 용뢰섬을 전개했다. 주작검의 날카로운 검날이 긴 반원을 그리며 쏟아지는 현공포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비껴서.... 흩어낸다!'
하지만 그 시도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홍백의 주작검이 미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비껴내기는 커녕 도리어 상대의 힘에 휘말리고 있다. 힘의 차이가 극심했다.
청풍의 눈에 결단의 빛이 떠올랐다.
주작검을 손에서 놓아버리고 양손으로 청룡검 검자루를 거머쥐었다. 오른발을 축으로, 청풍의 입에서 강렬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이야아압!"
청룡결, 청룡운해였다.
공방일체, 그가 지닌 신검의 무공들 중 가장 조화로운 검결이 바로 청룡운해였다. 희미한 녹청의 빛무리가 그의 검끝에서 머물러 구름과 바람의 기운을 부른다. 퍼뜨리는 검격, 상단과 하단을 아우르는 청룡운해의 검기(劍氣)가 청풍의 전면을 차단했다.
콰아아아! 터엉! 터어엉!
또다시 밀린다.
그래도 전처럼 단숨에 튕겨 나가지는 않았다.
청룡운해의 검격을 전개하며 물러나고 또 물러났다.
뒷걸음치는 두 발이 천 근처럼 무거웠다. 무릎 전체에 부서질 듯한 충격이 가해지고 팔 전체가 날아가 버릴 것처럼 불안정했다.
"크윽!"
청룡운해만으로는 안 된다.
백호검이 있었더라면.
심검일체(心劍一體)다. 생각이 닿는 순간 검세가 변화했다. 둥글게 휘두르는 청룡검 끝에 청백의 빛무리가 열렸다.
'백호금광!'
백호무, 백호금광의 검무(劍舞)가 현신했다.
백색의 검격이다.
뒤로 물러나던 발끝이 앞을 향하니 가해지던 압력이 더욱더 거세졌다. 휩쓸려 버릴 듯 휩쓸려 버릴 듯 하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선다.
백호금광의 힘이 현공포의 경력을 하나하나 풀어갔다.
'위험.....!'
백호금광으로 어느 정도 버티는 듯 했지만 한계가 찾아온 것은 금방이었다.
느린 듯 다가오는 현무검이다.
현공포의 검력이 검세의 빈틈들을 비집고 들어와 충격을 주고 있었다.
팔과 가슴의 옷깃이 부서져 흩어졌고, 노출된 피부가 갈라지며 핏물이 솟구쳤다.
현무검이 지척으로 이르렀을 때였다.
계속하여 몸속으로 침투하던 현무기(玄武氣)가 기이한 조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수기(水氣)였다. 청풍 자신의 몸에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수기가 외기(外氣)인 새로운 수기에 동조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하나의 흐름을 만들면서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금강호보가 수류구보로 변화한 것은 순간이었다.
호보의 호쾌함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했지만 어느새 구보의 부드러움을 띠어간다. 그야말로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변화였다.
청풍의 몸이 측면으로 돌아갔다.
수류구보의 조화로 현무검의 검격을 타 넘으며 청룡검을 뻗어냈다.
자신도 모르게 휘두른 검이다. 새롭게 자리잡은 수기(水氣)가 그의 검에서 퍼져 나왔다.
차가운 힘의 철벽이 그의 앞을 둘러치고 있었다.
공명결이 불러낸 기적이다. 그가 여기에서 북진무를 만나고, 그리하여 얻기로 약속되어 있던 힘이 그것이다. 주작검 염화인을 단숨에 삼켜 버린 현무검의 무공이 이번에 청풍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해일이 일고 물살이 흩어지는 소리가 환상처럼 들려왔다.
현공포의 위력을 흩어내며 뒤로 밀려나는 청풍이다. 그의 등이 다시금 벽에 부딪쳤다. 하지만 청풍은 쓰러지지 않았다. 완벽하지는 못해도 막아낸 것이다. 처음 본 무공, 어떻게 펼칠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쉽사리 믿어지지가 않았다.
"철해벽(鐵海壁)을.....!"
청풍 스스로도 믿지 못하듯 북진무 역시 이것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귀신처럼 창백한 얼굴, 섬뜩하도록 까만 눈동자가 더욱더 큰 광기를 품었다.
다시 온다.
청풍은 기다리지 않았다. 현무검의 무공을 적시에 펼쳐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천운(天運)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청풍은 또한 알고 있었다. 그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천운이라면, 그것을 얻고 사용하게 되는 것은 또 하나의 필연임을.
왼손으로 청룡검을 겨누면서 호보를 밟았다.
공명결을 최대한 운용하면서 달려간 그다. 북진무의 원숙한 수류구보가 그의 공격을 맞이했다.
맥점을 안다. 맥점을 알고, 구보를 안다.
그래도 허점을 유도하기는 힘들었다. 북진무의 수류구보는 완전한 경지에 올라 있다. 청풍이 경황 중에 펼친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보법에서 승부를 낼 것이 아니야.'
청풍은 보법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북진무의 구보가 뛰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방어력도 생각해 보면 그다지 놀라운 것이 못 된다.
더더욱 공격적으로 검을 전개했다.
금강탄에서 이어지는 백야참, 염화인 못지 않은 연환검이 청풍의 검끝에서 터져 나왔다.
북진무의 몸이 흐려지듯 뿌옇게 변했다. 일순간에 방출해 내는 수기(水氣)의 조화다. 움직이는 현무검을 따라 만들어지는 최강의 방패, 철해벽이 발동되었다.
'여기다!'
청풍은 바로 그것을 기다렸다.
철해벽.
그것은 모든 공격을 막아낸다. 곧바로 이어지는 현공포는 그 어떤 무공이라도 휩쓸어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청풍의 발이 용보를 밟았다.
방어에 적합한 위치를 찾고 모든 정신을 공명결에 집중했다.
세상이 열렸다. 북진무의 움직임을 느끼고, 현무검의 검력을 감지한다.
'동조(同調)'
그의 마음이 검과 하나가 되었다. 자신의 검, 그리고 상대의 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마음이다. 청풍의검이 현무기(玄武氣)의 광대함을 한껏 머금었다.
촤아아아아아.
청풍의 검이 벽을 만들었다.
철해벽, 벽 두 개가 동시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
방패를 이기는데, 창을 써야만 하는 법은 없다.
방패가 선 곳에 또 하나의 방패를 올리면 두 방패 모두 소용이 없어지는 법이다. 진기(眞氣)로 이루어진 방패도 다를 것은 없었다.
두 개의 방패가 만나며 한꺼번에 사라졌다.
말하자면 중화였다.
막바로 현공포를 준비하던 북진무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이럴 줄은 몰랐을 것이다.
사라져 버린 철해벽 사이로 청룡검이 금강탄의 파공음을 흩뿌렸다.
퀴유우웅!
청풍의 시도가 대담함 그 자체였다면, 북진무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청룡검 금강탄을 몸으로 받으며 그대로 현공포를 짓쳐 왔다.
청풍은 북진무의 현공포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예측했던 대로다.
북진무의 입장에서는 현공포를 내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기 때문이다.
청풍은 청룡검을 놓아버렸다.
놓는 것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하여 뒤로 물러났다.
손에서 놓고 뒤로 물러났음에도 금강탄은 멈추지 않았다. 공명결의 힘이다. 청룡검의 검격이 북진무의 가슴을 향하여 멈추지 않고 쏘아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청풍의 공명결은 청룡검 하나에만 닿아 있지 않았다.
오른손을 따라 땅에 떨어져 있던 주작검이 날아온다.
북진무의 등 뒤를 향해.
북진무의 앞과 뒤를 노린 공격이다.
신기(神氣)였다.
무공으로 설명할 수 없다. 천재적인 발상이다.
북진무의 몸으로 두 개의 신검이 틀어박히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 전투능력의 정화(精華)가 거기에 있었다.
'이겼다......!'
청풍은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현공포의 내력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청풍을 휩쓸어 벽으로 내던져 버렸다. 등 뒤로 다시 한 번 강렬한 충격이 전해졌다.
꾸웅.
청풍의 몸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어찌하여......'
신검 두 자루에 꿰뚫려 버렸다면 그 진기가 흩어져야 정상이지 않던가. 현공포는 멈추지 않았다. 그 위력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쓰러진 청풍, 낮은 시야속으로 다가오는 북진무의 발이 비쳐들었다.
'빗나갔는가........ 그럴리가.......'
멀쩡하게 걸어온다.
북진무의 발 저편.
두 자루의 검이 보였다.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검날이 시리도록 밝게 다가왔다.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박혀들지 않았던가. 피할 수 없는 위치로 날아갔고, 날아왔다. 꿰뚫는 것도 보았다.
저 두 검이 어찌하여 저기에 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단하군."
북진무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볼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무거웠다.
두 눈이 흐려지고 밝아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일까. 이상하다. 깨져서 부스러진 청동 거울 조각들.
청풍의 손이 비치고 있는데, 거기에 응당 비쳐야 할 것이 보이지 않고 있다.
북진무의 발치에 있는 청동 거울 조각.
그 안에 있어야 할 북진무의 모습이 없어져 있었던 것이다.
"네가 이겼다, 사신검(四神劍)의 주인이여."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목소리까지도 일그러져 들린다.
머리 위라 생각했는데 머리 속인 것 같다.
북진무의 목소리인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청풍 자신의 목소리 같았다.
쩔그렁!
무거운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청동 거울 조각들 사이로 북진무의 모습은 없었지만, 현무검은 있었다. 현무검이 청풍의 머리맡에 떨어지며 육중한 강철음을 울렸다.
어찌 된 일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삼켜 버릴 어둠이 그의 눈 앞에 내려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