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가 나타났다고 하는데요?"
"그렇지. 지금쯤 나올 때가 되었어."
고봉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어깨에 감은 붕대에서는 아직도 배어 나오는 핏자국이 비치고 있었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 장현걸도 마찬가지다.
그라고 하여 과히 나을 바는 없었다.
"어디쯤에 있나?"
"그거야 모르지요. 그 정도까지 파악할 만큼 돌릴 인원이 없어요."
"가릉에서 둘만 빼가지고 서천각에 붙여.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야."
"가릉에서요?"
"그래. 일단은 위치를 알아야 접촉을 할 것 아니겠나. 아무리 준비가 되었어도 실행하지 못하면 말짱 헛것이라고."
"아이고...... 알겠습니다. 그럼 철살개는 포기하셔야 할 겁니다."
"그 친구만큼은 놓치면 안 돼. 그 친구는 내가 만나겠어."
"고지식한 놈입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요."
"협으로는 그만한 친구도 없다. 증거가 없이도 말만으로 도와줄 녀석이야."
"그렇기는 하지요."
"광풍개 어르신은?"
"그 쪽은 잘되었습니다. 다만....... 왕구악 어르신이........"
"왕 장로는 건들지 마. 단심궤에 이름은 없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이니까."
"그럼 그것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양화개에 대한 사항은 꽤 진척이 되었습니다. 잘만 되면 상 장로 건과 한꺼번에 엮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아. 서둘러, 그리고 조심해. 저번에 다친 남진중이는 일단 피신해 있기로 했어. 그가 못 움직이게 되니 삼 할 정도의 전력 감소를 예상해야 할 거야."
"전력 감소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요...... 남 부당주님은 괜찮기는 하답니까?"
"별로 안 좋아. 일단은 봉산이 네가 부당주 역할을 해야 해."
"그 정도입니까?"
"그래, 그 정도야."
"부당주님이야 그렇다 해도 당주님께선 아직도 어렵다십니까?"
"그런 모양이다. 사부님 곁을 지키고 계시는 것 같은데 그쪽도 현상유지가 고작일 거다."
"연계는 안 될까요?"
"불가(不可)! 보름도 못 버텨. 게다가 사부님께서 용두방주 자격으로 구파 장문인들께 무림맹 소집에 대한 제안서를 돌리셨지 않나. 단심맹쪽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울 거다. 백척간두야. 조금만 흔들리면 떨어져 죽어."
"어렵군요."
"어렵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심해. 화산파 동향 잘 주시하고."
* * *
연사진은 처음 와 보는 곳이 아니다.
수로육손 류백언과 처음 만났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청풍은 연사진을 보면서 처음 와 보는 것과 같은 생소함을 느꼈다. 많은 것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이곳도 이제는 비검맹의 영역인가.'
갑자기 떨어진 기온, 강가에는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부서져 떠다니는 얼음 조각 사이로 세 척의 소형 전선(戰船)들이 보였다. 비검맹의 전선들이었다.
선착장으로 뻗어 있는 길 또한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람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폐허나 다름없게 변한 곳, 분주하게 들끓던 수로맹 사내들은 이제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어.'
광혼검마의 위치를 가장 잘 알고 있을 자들.
그것은 수로맹도 아니요, 화산파도 아니다.
바로 비검맹이다.
어디 있는지 모르겠으면 직접 물어보면 된다. 과격한 방법이 되겠지만.
청풍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연사진으로 들어가 무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찾았다. 이곳에 있는 무인이라면 자연히 비검맹 맹도들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있군.'
찾는 자들을 발견한 것은 금방이었다.
선착장에 이르자 이곳 저곳 방만하게 흩어져 있는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무인들, 비검맹 맹도들이었다.
"거기, 무슨일이냐!"
개중의 한 명이 청풍을 발견하고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주섬주섬 일어나는 무인들이다.
통일되지 않은 난잡한 복장들, 그러나 왼쪽 가슴에는 하나같이 비검(比劍)이라는 두 글자를 달고 있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다."
청풍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낭랑했다.
거침없이 걸어가 비검맹 맹도들 앞에 섰다. 곧바로 이어지는 질문은 그 걸음걸이처럼 거침이 없었다.
"광혼검마는 어디에 있나?"
비검맹 맹도들의 얼굴이 싹 굳었다.
광혼검마.
광혼검마라면 비검맹 주축 중에서도 가장 상층에 있는 이다. 그 이름을 그런 식으로 부른다면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비검맹 내에서 맹도들이 짐작하지도 못할 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자거나, 아니면 적이다. 한 놈이 창백한 얼굴로 물어왔다.
"검맹(劍盟)에서 나오셨습니까?"
청풍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착각을 하려면 해라.
청풍으로서는 알고 싶은 것만 알면 그만이었다. 그가 다시 물었다.
"광혼검마의 행방을 말하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퍼져 나갔다.
하나 둘씩 다가오는 맹도들이다. 가까이 온 한 맹도가 한순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잠깐! 이놈! 이놈, 청홍무적검이다!"
청홍무적검.
그렇다.
이곳은 장강이다.
청홍무적의 이름이 가장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곳이었다. 청풍을 단숨에 알아보는 놈이 있고,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이들이 있다. 비검맹 맹도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그만두는 것이 좋을 텐데."
청풍의 경고는 단순하면서도 충분한 뜻을 담고 있었다.
잠시 멈칫하는 비검맹 맹도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명성에 대한 두려움보다 제 문파에 대한 자신감이 훨씬 더 컸다. 청홍무적검은 비검맹에 있어 생사를 갈라야 할 대적(大敵)의 이름이다. 서로 눈치를 보던 그들이 제각각 병장기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
청풍의 발이 물이 흐르듯 옆으로 움직였다.
두 개의 검날을 비껴내고 한 개의 낭아곤을 피해냈다. 어치피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 청풍의 왼손이 청룡검 검자루에 닿았다.
퍼어억!
한 놈의 몸이 튕겨 나간 것은 그야말로 시작에 불과했다.
움직이기 시작한 청풍이다.
그의 몸은 이미 한줄기 바람으로 화(化)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진각음은 고작 다섯 번. 호보 다섯 걸음에 일곱 명의 몸이 땅바닥을 굴렀다.
"커억!"
쓰러진 자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인것은 아니다. 단숨에 의지를 꺾을 뿐이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용갑에서 뽑지도 않는 청룡검이었지만 단 일격도 버텨내는 자가 없었다.
파아앙! 털썩!
질주하는 바람이 잦아들었다.
앙상한 가지 밑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나뒹구는 무인들의 신음소리만이 장내에 하나 가득 남았다.
열 명에 가까운 무인들을 쓰러뜨리고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청풍은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마지막으로 쓰러진 맹도에게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광혼검마는 어디에 있나."
아래를 내려보는 청풍의 목소리에 스쳐가는 바람의 차가움이 깃들었다. 이를 악문 비검맹 맹도가 얼굴을 찌푸리며 씹는 듯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비검맹에....... 검을 들이대다니, 제...... 제 명에 살지 못할 것이다!"
퍼어억!
험악한 소리가 사위를 울렸다.
잠시의 정적.
흙먼지가 솟구쳐 비검맹 맹도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눈을 질끈 감았던 비검맹 맹도가 아직 목숨이 날아가지 않았음을 깨닫고 슬며시 눈꺼풀을 떠올렸다. 청록빛 광채가 흐르는 용갑이 바로 옆 땅에 박혀 있었다.
"말하지 않을 텐가?"
청풍의 음성에는 아무런 감정이 배어 있지 않았다.
실수가 아니다. 위협이다.
비검맹 맹도가 곁눈질로 박혀 있는 용갑을 보았다.
추운 날씨 단단한 땅바닥이 부서지기라도 한 듯 움푹 꺼져 있었다. 그것이 제대로 겨누어졌다면........ 그의 머리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으리라. 죽음의 공포를 실감한 그가 입술을 떨며 말했다.
"광혼검마님께서는...... 연공사(緣空寺)에 공납을 받으러......"
"연공사? 위치는?"
"서쪽, 서쪽 입......니다. 이십 리 정도 가면.... 연사암(緣絲巖), 연사암이라는 바위산이 나오는데, 그 위쪽에 있는 절입니다."
청풍이 고개를 들어 서쪽을 바라보았다.
서쪽이면 오히려 그가 지나쳐 온 방향이다. 기억을 더듬어본 청풍은 강가를 따라오느라 멀리 스쳐 보냈던 바위산 하나를 떠올릴 수가 있었다. 그곳이 연사암이 맞다면 그리 멀지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찾은 것이다.
퍼석.
청룡검 용갑을 땅에서 뽑아 들었다.
청풍을 올려보는 비검맹 맹도의 두 눈에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살려달라고 애걸하지 않는 것이 가상하달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조무래기다. 죽일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청풍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
맹도가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을 때, 청풍의 신형은 이미 화천작보의 힘을 빌려 한참 멀리에 가 있었다. 주변 풍광이 순식간에 다가와 그의 옆을 스쳐 갔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관도가 청풍의 눈앞에 펄쳐졌다.
'이것은......!'
비검맹 맹도의 말대로 서쪽을 향하던 청풍이다.
쉬지 않고 달리던 그가 일순간 신법을 멈추었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숨을 한 번 들이키고는 공명결을 발동시켰다.
'하얗다.... 날카롭다......'
청풍은 느껴지는 기운의 정체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청풍 자신의 몸 안에도 간직되어 있는 기운이다. 백호기였다.
정신을 집중하여 그가 다시 서쪽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그러자 백호기가 더욱 확연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광혼검마가 그쪽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거짓말은 아니었군.'
비검맹 맹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강을 따르던 관도가 옆으로 굽어 북쭉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청풍은 북쪽으로 방향을 꺾지 않고 길이 나 있지 않은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최고조에 이른 속도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노송과 바위가 어우러진 산지에 이르렀다. 산길 초입에 서 있는 길쭉한 바위에는 누군가 연사암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놓았다.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청풍은 곧바로 산을 탔다.
제법 험준했지만 그에게는 평지와도 같았다.
느껴지는 기운을 기준 삼아 골짜기 하나를 넘었다. 그러자 등성이 너머로 제법 큰 규모의산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연공사였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백호기가 거기에 광혼검마가 있음을, 또한 그곳이 연공사임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연공사 산문이 저 멀리 보일 때다.
청풍의 시야에 십여 명의 인영이 비쳐들었다.
산문 근처였다.
일단 기척을 지우고 속도를 줄인 다음 동향을 살폈다. 사람들의 모습을 살핀 청풍.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저들은......!'
비검맹의 무인이 아니라면 참배를 드리기 위해 올라온 향화객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향화객이 아니었다. 향화객들이 도포를 입고, 쭉 뻗은 장검을 들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비검맹 무인도 아니었다. 비검맹 무인일 수가 없다. 그들이 입고 있는 도포는 청풍이 잘 알고 있는 옷이었다. 그것도 예전에 항상 보았던 도포였다.
'매화검수.....!'
그렇다.
그들은 화산파였다.
도복을 입은 이들은 아홉 명. 매화검수는 그 중 세 명이었고, 세 명 중 한 명의 기도가 특히 출중했다.
'옥녀화검(玉女花劍)....! 추영 사저!'
출중한 정도가 아니라 만개하여 피어나는 무공이다.
그것도 여인이었다.
본산에 있었던 어린 시절, 흡로암 먼발치에서 본 적 있는 그녀다.
얼핏 연선하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녀보다 더 젊고 아름답다. 그 시절 남자 제자들 사이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여인이었다.
'광혼검마를 치려고 온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인원으로는 안될 텐데.'
매화검수 셋이면 상당한 전력이다. 나머지 여섯 명도 일반적인 평검수 수준은 넘어서 보인다.
그래도 검마에겐 어려웠다.
백호검이라는 신병이기까지 갖춘 광혼검마라면 더 더욱 그랬다.
승기를 잘 잡는다면 모르되 한두 명이 무너지면 모두 다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 아홉 명이 전부 다 덤벼든다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화산 무인들은 합공에 능하지가 못했다.
청풍은 수류구보를 밟으며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같은 화산파이니 정체를 감출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서기가 싫었다.
광혼검마를 잡으러 온 이들.
집법원 대신이라 생각되어서인지도 모른다.
다른 이유도 있다.
이들과 행동을 함께하다가는 백호검을 얻고 그냥 떠나기가 껄끄러워질 것 같았다.
조금 더 접근하자 산문의 정경을 보다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화산 제자들의 발치에 두 명의 승려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산문을 지키는 승려들이다. 무승(武僧) 같았다. 싸움을 벌인 흔적인 산문 근처 이곳 저곳에 남겨져 있었다,
'무승이라...... 그러고 보면.........'
광혼검마는 이 연공사에 공납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관부도 아닌데 절에서 공납을 받는 것. 무도한 횡포다. 그 지역에 자리잡은 무파(武派)가 어지간히 고약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광혼검마가 그런 일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쯤 되는 이가 이런 지저분한 일에 나섰다면 분명 뭔가가 있는 거다. 청풍은 산문에 있는 싸움의 흔적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무파였던가.......'
무파가 맞다.
이 연공사는 일반적인 승려들의 사원이 아니라 무공을 익힌 무승들의 사원인 것이다.
어디 지파인지는 몰라도 상당한 무력을 보유한 곳인 것 같다. 비검맹에서도 광혼검마를 내보내야 할 만한 고수가 이 연공사에 있는 모양이었다.
뎅뎅뎅뎅뎅......
연공사 쪽에서 들려온 다급한 종소리가 청풍의 상념을 멈추게 했다.
변고를 알리는 소리였다.
화산파 제자들이 먼저 그 종소리에 반응하여 행동을 시작했다.
"평검수들은 먼저 승려들을 구하고 비검맹 무인들을 상대한다. 정 사제는 주지스님을 피신시키고 진운(眞雲) 사제는 연공법사를 돕는다. 광혼검마는 내게 맡겨라."
옥녀화검 추영의 목소리다.
광혼검마를 맡겨라. 일 대 일로 싸우겠다는 생각이다.
무모했다. 무모할 뿐이다.
'하지만.......'
무모해도 익숙하다.
청풍은 추영의 모습에서 오래 전 하운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철기맹으로 진격하던 때, 백검천마의 무위를 눈으로 보고도 물러나지 않았던 그 강직함이다. 미련할 정도의 절개다. 곧고도 강직하여 휘어지지 않던 매화검수가 여기에 또 하나 있었다.
추영을 선두로 하여 화산 제자 아홉 명이 암향표 신법을 펼쳐 냈다.
산문 안쪽으로 빨려들 듯 들어가는데 날카로운 기세가 절로 우러나왔다.
상대가 나쁠 뿐. 어지간한 무리들이라면 그들만으로도 능히 압도할 수 있을 만한 무력이었다.
'다른 길을 없는가.'
어차피 마주쳐야 될 것을 알아도 행동을 함께하는 것만큼은 사양이었다.
그들은 매한옥과 다르다.
통성명을 하는 것도 번거로운 일일뿐더러, 일단 함께하게 되면 매화검수인 추영의 지시를 따라야 할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합류해야 할 이유보다 합류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청풍의 시선이 연공사 사원을 향했다.
산문 옆으로는 험준한 바위가 만들어준 자연적인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청풍의 눈이 몸을 날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나는 새가 아니고서야 오르기 힘든 지형이었다. 하지만 청풍에게는 나는 새와 같은 화천작보의 날개가 있었다. 청풍의 몸이 가볍게 솟구쳤다.
파아아아!
매끄러운 바위를 밟으며 도약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한 마리 우아한 신조(神鳥)와도 같았다.
오르고 오르다 보니, 사원 안쪽의 소리가 산바람을 타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싸움이 한창인 듯 사나운 고함 소리와 병장기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몸을 날리고 바위를 박찬 것이 몇 차례.
신기(神技)의 신법을 펼치며 까마득한 바위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발 아래로 연공사 장내가 펼쳐졌다.
'크군.......'
밑에서 보았을 때는 몰랐다. 몇 개의 바위산을 끼고 돌아 만들어진 사원은 그 규모가 무척 컸다. 청풍의 눈에 비치는 것은 연공사의 가장 외곽이었다. 중심부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청풍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가볍게 타고 내려와 연공사 장내로 들어섰다. 하지만 방향이 안 좋았음인가. 한쪽으로 달려가던 어린 사미승들이 청풍을 발견하고 경호성을 내질렀다.
"이쪽에도 도적이!"
"사백님, 살려주세요!!"
발을 멈춘 것이 실수였다.
사미승들을 인도하던 무승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무승들의 얼굴은 분노와 비탄으로 가득 차 있다. 험악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왔다.
"비검맹의 흉적! 아이들까지 노리다니 흉악한 심보로다!'
청풍은 그들의 모습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공납을 받으러 왔다더니 그 정도 소란이 아니었다.
이것은 명백한 습격인 것이다. 적어도 수십 명, 사방에서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가 비검맹 무인들의 숫자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비검맹이 아니오."
"그런 거짓말을 믿을 줄 아느냐!"
다급하여 판단력이 흐트러진 무승들이다.
창봉을 들이대는 모양새가 제법 사납다. 이런 곳에서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굳이 바위산을 타고 올라온 것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버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청풍의 발이 땅을 박찼다.
터어엉! 쐐애액.
놀라서 병장기를 휘두르는 무승들이었지만 그런 것에 당할 리 만무했다.
한줄기 바람으로 스쳐 지나가니, 이미 청풍은 무승들의 등 뒤에 있다. 청풍의 몸이 다시금 앞을 향해 뻗어 나갔다.
"막아!! 막아라!"
"아이들아! 피하거라!!'
사미승들을 해치려는 줄 알았던가.
청풍의 몸이 그대로 아이들을 뛰어넘으며 한쪽 편의 담장 위로 올라섰다. 미친 듯 쫓아오던 무승들이 얼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청풍은 그런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백호검의 기운이 그쪽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거긴가......!'
청풍의 눈이 호안(虎眼)의 강렬함을 내비쳤다. 이제 금방이다. 오랜 사명의 끝이 저 앞에 있었다.
청풍의 발이 담장을 박찼다.
일직선으로 달리는 청풍의 눈으로 우왕좌왕하는 승려들의 모습들이 비쳐들었다. 저 멀리로는 막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길까지 보였다.
성혈교 무리가 화산파를 습격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그랬다. 그때 백호검을 얻었고, 그때 사신검을 찾아오라는 임무를 받았다.
백호검.
첫 번째 신검이자 마지막 신검이다. 장소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어딘지 비슷했다. 시간을 거슬러 온 느낌이었다.
"으악!"
"도망쳐라!"
드디어 싸움터다.
비검(比劍)의 표식을 달고 있는 무인들이 승려들을 무차별로 공격하고 있었다.
공납을 받기 위해서. 습격을 하기 위해서.
아니다. 비검맹 무인들이 펼치는 검은 오로지 살검(殺劍)뿐이다.
불까지 지르면서 살육을 자행한다는 것은 단순한 습격 정도가 아니라 이 절을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가 없었다.
쐐애애액!
백호검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죽음을 맞고 있는 승려들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청풍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늙은 승려에게 검을 겨눈 비검맹 무인이 그 앞에 있었다. 청풍의 오른손이 주작검을 뽑아냈다.
써걱! 피슈슉!
무엇인가 지나갔다 싶은 순간이다.
비검맹 무인의 팔이 팔꿈치부터 잘려 나갔다. 검을 든 팔뚝이 땅에 떨어진 다음에야 비명을 지르는 무인이다. 피를 머금은 주작검이 다음 희생자를 찾았다.
퍼억! 스가각!
청풍은 빨랐다. 그리고 강했다.
주작검의 살기(殺氣)가 한껏 개방되고 있었다.
붉은 광영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면 그에 따라 선연한 핏물이 하늘을 수놓았다.
순식간에 비검맹 무인 다섯 명을 베어버린 청풍이다. 무시무시한 기파가 장내를 휩쓸었다. 날뛰던 비검맹 무인들이 주춤거리며 휘두르던 병장기를 멈추고 청풍 쪽을 바라보았다.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오."
주변을 정적으로 몰아가는 목소리다.
구세주를 만난 승려들.
겁에 질린 그들이 불호를 외우며 뒤쪽으로 달려갔다. 하늘을 올려보고 땅을 내려보는 시선이 이제는 비검맹 무인 전체를 돌아본다.
청풍의 목소리에 협객의 분노가 묻어 나왔다.
"비검맹의 악행이 장강에만 머무른 줄 알았더니, 이제는 조용한 산사에까지 이르렀군."
붉게 빛나는 주작검이 오른손에 있고 왼편 허리에는 푸르른 용갑이 있다.
홍검과 청검, 두 개의 검이 모여 하나의 이름을 낳는다.
비검맹 무인의 한 명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청홍..........무적검......!"
청풍의 발걸음이 비검맹 무인들 한가운데로 향했다.
불어와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 같은 기운이 장내를 가득 채운다.
"돌아가지 않으면 모조리 베겠다."
청풍의 한마디가 그 기운에 막대한 힘을 실었다.
압도적인 기세였다.
살인의 광기에 빠져있던 이십여 명의 비검맹 무인들이 얼어붙고 말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은 압력이다.
그것을 버티다 못한 한 무인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허명(虛名)이다! 놈은 하나야! 모두 다 덤벼들면 죽일 수 있다!"
목소리에 깃든 것은 살기라기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그래도 소리친 효과가 있었는지, 하나 둘 정신을 차리며 검을 고쳐든다.
어차피 말로는 통하지 않을 자들이었다. 청풍의 눈이 주작의 살기를 품는다.
모조리 베겠다는 말, 스스로의 말을 현실로 만드는 무서운 능력이 그 살기 안에 있었다.
쐐애액!
첫 번째로 날아온 것은 한 자루 장검이었다.
주작검을 움직인 것은 순간이다. 베어내는 검격이 장검의 목을 치고 무인의 가슴을 갈라냈다.
두번째 철검(鐵劍)은 검병째로 부숴 버렸다. 세 번째 도격은 어깨부터 끊어 버렸다.
퀴융! 퍼어억!
단숨에 내친 금강탄이다. 비검맹 무인의 몸통에 사람 머리통만한 구멍이 뚫렸다. 사신기(四神氣)를 모두 얻고 훨씬 더 강해진 공력이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이다. 그의 검이 측량할 수 없는 위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십 명의 목숨이 날아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태풍에 휩쓸린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사방에 쳐박힌다. 손속의 잔인함을 이야기하기엔 검의 위력이 지나치게 강하다.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무력, 상승의 경지로 훌쩍 넘어서 버린 무공이었다.
퍼어억! 후두두둑!
바람따라 움직이는 빗줄기처럼, 청풍의 뒤쪽으로 붉은 핏물이 뒤따라왔다.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 바람이 불었고 불어온 바람은 질풍으로 몰아쳐 적도들의 생명을 앗아가 버렸다. 청풍의 두 눈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이십오 명 비검맹 일개 조가 단숨에 전멸 당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