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챙! 채채챙!
청풍은 늦었다.
화산 제자들보다 먼저 광혼검마를 치려고 했지만 이미 싸움은 시작된 후였다. 비검맹 무승들과 연공사 무승들이 얽혀드는 사이에 암향표 신법을 펼치며 움직이는 화산 검수들이 보였다.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비검맹 무인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던 까닭이다.
비검(比劍)의 표식을 지닌 자들의 수가 오십 명에 이를 정도였다. 청풍이 물리친 졸개들과는 다르게 제법 병장기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이 개중 반수가 넘었다.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매화검수 수준이거나 그 이상으로 보이는 고수들까지 있었다.
반면 이쪽은 그에 비하여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나마 화산 제자들이 나타남으로써 싸움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부터 끝났을 싸움이다. 남아있는 연공사 무승들이 고작 열 명밖에 안 될 정도였다. 버티고 있는 이들 역시 위태위태한 상태였다.
눈이 띄는 것은 한 자루 장봉을 휘두르고 있는 장대한 체구의 무승 한 명뿐이었다.
그의 곁에서는 추영에게 진운 사제라고 불리웠던 매화검수 하나가 검을 전개하고 있었다. 연공법사를 도우라고 이야기 들었던 그 매화검수다. 이 무승이 바로 연공법사인 모양이었다.
연공사 무승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그는, 분명히 고수라고 할 만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이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숫자에서 먼저 차이가 났고, 경험에서는 더 큰 차이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비검맹 무인들은 장강 줄기를 따르며 수 많은 전투를 겪어왔던 살귀(殺鬼)들이었다. 고적한 산지에서 비무(比武)로 연마한 무공으로서는 물리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더 정심한 공력과 훨씬 더 정교한 초식이 있어도 싸움을 쉽게 끌어가지 못했다. 또한 그것은 매화검수 한두 명이 거든다고 해서 메워질 수 있는 간극이 결코 아니었다.
어려운 싸움이 이어지고 있는 곳.
연공사의 중심인 대웅전의 내원이다.
청풍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움직여 한 지점에 이르렀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청풍의 눈에 하얀 검신이 비쳐든다.
기쾌하게 움직이는 매화검과 그것에 맞서는 신검.
백호검이었다.
채앵! 쩌어엉!
오랜만에 보는 백호검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강하고 여전히 날카로웠다.
옥녀화검 추영, 매화검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다. 화산절기 옥녀검법이 삽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청풍은 그런 광경을 보며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사문의 무공이 파훼되어 파탄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런 결과가 당연하게만 생각되었다.
백호검 때문일 것이다.
청풍은 백호검을 얻고 천하에 눈떴다.
그 휘두르는 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백호검은 지지 않는다. 적어도 다른 검에 진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가 청풍은 그러한 생각을 모조리 멈출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놀라움이었다. 놀라움과 동시에 끓어오르는 것은 그만큼의 배신감이었다.
치리링! 큐우웅!
백호검이 내는 소리가 익숙했다.
곧게 찔러간다.
그야말로 일대 충격이다.
발검에서 나아가는 동작!
금강호보에 이은 금강탄, 바로 그것이었다.
"크윽!"
옥녀화검 추영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금강탄이 스쳐간 어깨에서 붉은 선혈이 비친다.
금강탄을 펼친 광혼검마다.
그의 입에서 거친 기합성이 뿜어졌다.
"카핫!"
백호검이 넓은 반원을 그렸다.
베는 초식. 본디 중원 무학에 있어 검으로는 베는 초식을 그리 흔하지 않다.
마찬가지다. 청풍이 지닌 참격, 백야참과 똑같았다.
치치칭! 쩌어엉!
쇠가 갈리며 불꽃을 튀다가 마침내 끊어지고 만다.
화산 매화검이 부러지고 만 것이다. 추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크크크크. 매화검수도 별것 아니로군."
광혼검마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커다란 눈.
기이한 광기가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왜 광혼검마라 불리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얼굴이다. 청풍의 눈이 불신으로 얼룩졌다.
"거치적거리는 계집, 그만 죽어라!"
텅!
사납게 쇄도하는 광혼검마다. 전개하는 모습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초식도 내공도 분명 정상이 아닌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그 위력만큼은 백호검의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했다.
추영이 포기하지 않고 암향표를 펼쳐 보지만 그녀의 목숨은 풍전등화 그 자체였다.
위험했다.
집법원 정검대까지도 죽였다니 오죽하랴.
상대가 매화검수라면 그 뒤에 버텨선 화산파를 생각해서라도 죽이기가 쉽지 않을 텐데 광혼검마의 백호검에서는 그런 망설임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채애앵!
반토막 남은 검으로 백호검을 막아낸다.
충천하는 살기가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그냥 죽이고 보는 것이다. 미쳐버린 광혼(狂魂)에 후일을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검이 주어 넘치는 힘. 광기를 받아들여 그 자체로 함께하고 있었다.
'그 힘, 내가 거두어주마.'
오른손에 잡혀 있는 주작검에 더하여 왼손으로 청룡검을 뽑았다.
그의 몸이 질주를 시작한다.
눈앞으로 비검맹 무인들의 모습이 확대되었다.
쩡! 촤아아악!
피바람이다.
몰아치는 핏물에 길이 생겼다. 한순간에 불어닥치는 바람에 조각난 육신이 하늘을 날았다.
콰드득!
"크아악!"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땅을 밟고 몸을 돌리며 휘두르는 검이다.
청룡검과 주작검이 교차되었다. 나아가다 멈추며 동시에 염화인을 뿜어냈다.
파라라락! 퍼어어억!
쌍검, 염화인 연환격. 네 사람의 목숨이 피안개로 흩어졌다.
다시 움직이는 청풍이다.
순식간에 비검맹 무인들을 돌파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무위였다.
시선이 절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화산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변했다.
"저것은......!!"
무인들 사이로 가볍게 짓쳐 나온다. 바람의 신(神)이 그에게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옥녀화검, 그리고 그녀를 몰아치는 광혼검마가 그 앞에 있었다.
그녀의 목숨이 날아갈 찰나다.
한순간 날아든 붉은 섬광이 날카로운 백광에 정면으로 마주쳐갔다. 부딪치는 두 개의 검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쩌어어엉!
추영의 눈앞에는 어느새 청풍의 굳건한 등이 나타나 있었다.
백호검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터라 다른 이의 접근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그녀다. 기적처럼 나타난 조력자는 그저 놀라움일 따름이었다.
"이제부터는 제가 상대하지요."
청풍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예(禮)를 갖춘 한마디. 외인(外人)의 말투가 아니었다. 추영의 두 눈이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누구........?'
그녀는 청풍을 알아보지 못했다.
매화검수로서 청풍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그녀였다. 혹 본산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고 했더라도 일개 보무제자였던 청풍을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못 알아본 이유는 또 있었다.
청풍이 구사하는 무공.
화산파의 무공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신법도 그렇고 검법도 그렇다. 자하진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익힌 이는 화산 문하에 청풍 혼자뿐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것은 뿜어져 나오는 기도였다.
청풍이 내뿜는 기파는 대지를 휩쓰는 웅혼한 바람이다. 날카롭고 고고한 화산 무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힘을 발하고 있었다.
"웬 놈이냐."
광혼검마의 목소리가 그녀의 의문을 대신했다.
청풍은 광혼검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알고 싶은 것을 되물었다. 백호검, 백호검의 무공에 대한 질문이었다.
"어디서 배웠지?"
광혼검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엇을 말이냐?"
"몰라서 묻나."
하지만 청풍의 말투는 전에 없이 공격적이었다. 광혼검마의 두 눈에 진득한 살기가 떠올랐다.
"함부로 지껄이다니. 죽고 싶은 게로군."
광혼검마는 백호검부터 치켜들었다.
"심장을 뚫어주마. 입을 잘못 놀린 죄는 무덤에서나 후회하라."
광오한 말이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격이 발출된다. 백호검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오며 살벌한 파공성을 냈다.
퀴유웅!
청풍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 이 검격은 금강탄이다.
강력한 발검술, 누구라도 무덤에 보낼 수 있을 만한 일격이었다.
다만 그 상대가 청풍이었을 뿐.
청풍의 발이 호보를 밟았다. 튕겨서 짓쳐 쏘는 검격이다. 청풍의 손에서 주작검이 빛살처럼 뻗어나갔다.
쩌어어엉!
충돌은 거셌다. 금강탄과 금강탄의 만남이다.
같은 무공의 충돌.
결과는 자명했다.
광혼검마의 백호검이 제 길을 잃고 튕겨 나간다. 황급히 물러나는 광혼검마다. 그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
광혼검마의 자세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상태였다.
더 늦게 발검하고도 상대를 압도하는 검격이다. 완성에 이른 금강탄이 청풍의 손 안에 있었다.
그가 확인이라도 하듯, 광혼검마가 이번에는 백야참을 내쳐 왔다. 제대로 된 궤도, 확실한 구결의 백야참이다.
'왜 이런 자에게.....!'
어디선가 배워서 연마한 백야참이었다. 혼자서 이런 무공을 연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청풍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야참을 얻었다면 을지백에게서 밖에 없었다. 을지백이 어찌하여 살육에 빠진 광인(狂人)에게 그와 같은 무공을 가르쳐 주었을지 알 수가 없다.
자신만의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이 든다. 누구라도 가질 만한 감정이었다.
왜.
청풍은 그것을 알아야 했다. 사신(四神)의 진실을 알기 위해 백호검을 되찾아야 했다.
청풍의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금강호보를 밟고 주작검을 횡으로 휘둘러 홍백의 반원을 만들었다.
백야참 대 백야참이다.
정면으로 부딪친 두 개의 백야참이 무서운 경력을 흩뿌렸다.
"크윽!!"
광혼검마의 몸이 휘청, 옆으로 튕겨 나갔다.
청풍을 돌아보는 광혼검마의 두 눈에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육신에 입은 충격보다 정신에 입은 충격이 더 큰 모양이었다. 넘치던 광기가 줄어들고 있었다.
진정한 주인과 그렇지 못한 자.
광혼검마의 앞에 이른 청풍이 마침내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을 입 밖으로 풀어놓았다.
"을지백, 그분은 어디에 있나."
광혼검마가 몸을 곧추 세웠다. 일그러진 얼굴로 백호검을 비껴든다. 그가 씹는 듯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게 누구냐?"
'모른다.......?'
청풍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광혼검마의 목소리에 거짓은 담겨 있지 않았다. 광기에 차 있기에, 더 더욱 다른 수작을 부리지 않을 자였다.
"그 무공을 가르쳐 준 이를 말함이다."
청풍은 설명을 덧붙였다.
더불어 대화를 나눌 만한 자가 아니긴 해도,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풀 수 없었던 수 많은 의문들이 지금 이 순간 그 앞에, 그들 앞에 있었다.
"네 놈도 들었다는 말이냐? 그 목소리를?"
'목소리?'
교차하던 의문들이 마침내 파국을 향하여 치닫고 있었다. 광혼검마의 입가에 광기 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기괴할 정도로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놀라운 말을 뱉어놓았다.
"크크크. 그럴 리 없지. 그것은 내 목소리였으니까."
청풍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뭔가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 목소리다.
내 목소리였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무공을 배워왔던 순간들, 수 많은 광경들이 청풍의 눈앞을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럴 리가.....!"
청풍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답에 가까워지면 까까워질수록 혼란이 더욱 커져 간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흐트러진 눈빛, 그것을 본 광혼검마가 악독한 표정을 떠올리며 땅을 박찼다.
퀴유우웅!
필살의 의지를 담은 백호검은 엄청나게 빨랐다.
검을 늘어뜨린 채 무방비 상태에 빠져 버린 청풍이다.
꿰뚫려 피를 뿜기 직전이었다. 청풍의 발이 부드럽게 뒤쪽으로 움직였다.
슈각!
청풍의 반응은 무의식 중에 이루어진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잘려 나간 것은 가슴의 옷깃뿐이었다.
물이 흐르듯 옆으로 비껴내고, 주작검을 치켜들었다. 광혼검마의 두 눈에 필사의 결의가 담겼다.
"카하아앗!"
광혼검마의 몸이 빨라졌다.
금강탄과 백야참에 이어, 백호무까지 펼친다. 백호출세였다. 뻗어나오는 기세가 엄청났다.
"위험!!"
누군가의 경호성이 사위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어느새 멈춰진 싸움으로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그곳에서.
청풍의 무공이 상상 이상의 광경의 보여주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움직인 것은 현무검이었다.
등 뒤에 묶어두었던 현무검이 저절로 날아올라 청풍의 앞을 가로막았다. 넓은 검신이 지고(至高)의 방패가 되어 막강한 일격을 차단하고 반격의 길을 열어놓는다.
파라락! 스각!
그 다음은 주작검이었다.
위로 올라가는 염화인.
사선으로 움직여 광혼검마의 가슴을 베어버렸다. 피를 쏟는 광혼검마다. 그가 이를 악물며 백호탐천의 이격을 올려쳐 왔다.
치리리링! 쩌어엉!
현무검이 움직였던 것처럼.
손도 대지 않은 청룡검이 뽑혀 나와 그의 왼손에 잡혔다. 용보를 밟으며 내려치는 용뢰섬이 올라오는 백호검을 튕겨내며 막대한 충격파를 흩뿌렸다.
광혼검마는 마지막 백호금광을 펼쳐 보지조차 못했다.
내력이 진탕된 까닭이다.
청풍의 주작검이 올라갔다 휘어져 내려왔다.
쐐애액! 쩌어엉!
불꽃을 그리며 백호검의 검신으로 짓쳐들었다. 광혼검마의 손아귀가 찢어지고 백호검이 공중을 날았다. 떠오른 백호검을 본 청풍이 주작검을 손에서 놓았다.
뻗어내는 팔.
꽈악.
백호검이 날아와 청풍의 오른손에 잡혀들었다.
손에 감겨드는 감촉이 새롭다.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질주하는 백호검 금강탄.
짓쳐 나간 일격이 광혼검마의 중단을 꿰뚫어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공중에 떠 있던 주작검과 현무검이 가볍게 선회하며 청풍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전설 속에서나 듣고 볼 만한 광경이다.
경탄과 경악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시선 한가운데.
쓰러지는 광혼검마의 육신만이 이 놀라운 싸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