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56)

 "그 정도까지 무형기를 뽑아낼 수 있는 구결은 무척이나 드문데 어디서 배웠나?"

 "검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니, 마음속에 알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말했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스스로 익힌 것이 아니라, 검에게서 배운 것이 맞다.

 그것은 또한 한 가지를 의미한다.

 을지백, 천태세, 남강홍, 북진무 네 사람이 청풍의 내면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천태세는 그 의문까지도 마저 풀어주었다.

 "넌 지금 기억에 대하여 말했다. 기억, 그러하니라. 세상 만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들은 그들이 스쳐 간 존재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그들이 있었던 순간들을 스스로의 기억속에 새겨 나가는 것이다. 너는 네 마음의 모습에 비추어 우리를 보았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신검이 가진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이들이다. 우리가 너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그래서이니라."

 "결국, 이 세상의 분들이 아니라는 말이시군요."

 "그렇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이자. 이미 진토(塵土)된 육신의 영(靈)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온전한 것이 아니니라. 네 영성(靈性)을 빌리지 않고서는 세상에 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너의 일부로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는 말.

 그것이 그 뜻이었다.

 그들은 청풍이 원했던 현재였으며, 또한 오랜 영혼이 흘러보냈던 과거라 할 수 있었다.

 맞추어지는 조각들.

 청풍의 머리 속에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큰 그림을 그려냈다.

 '구자산..... 산속 고대 승려의 동굴..... 동방의 고묘......'

 오랜된 사물들.

 그들에게서 긴 세월의 부침을 느꼈던 것도 그래서다.

 측량할 수 없는 선기(仙氣), 놀랍도록 뛰어났던 무공의 수준도 모두 다 이해가 갔다.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을지 공. 그때, 육극신을 막아주신 것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입니까?"

 모든 것이 설명된다 하여도 하나만큼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유극신.

 청풍의 거울로서, 영(靈)만 남아 있는 이로서 어찌 육극신 같은 자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일까.

 청풍의 시선이 을지백에게 머물렀다.

 "영감이 그렇게나 설명을 했는데도 못 알아먹다니....... 쯧쯔......"

 을지백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핵심은 여기다. 여기."

 머리를 가리킴은 다른 뜻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청풍이다. 그가 침음성과 같은 한마디를 흘렸다.

 "상...... 단전.....!"

 "그렇다. 신검은 근본적으로 그것을 쥐는 자의 상단전과 감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네가 눈앞에 우리를 보는 것도, 네가 우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상단전의 힘 때문이다. 두뇌(頭腦)의 조화라는 이야기지. 아무것도 없는데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뇌력(腦力)의 움직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상단전은 곧 혼(魂)의 그릇이다.

 상단전은 모든 것을 통괄하는 뇌(腦)와 맞닿아 있다. 신검(神劍)의 사신기(四神氣)가 상단전에 흘러들면, 그것은 곧바로 두뇌(頭腦)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검을 잡고 광기를 드러냈던 여러 인물들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었다.

 청풍은 상단전이 올바르게 반응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도리어 신검은 상단전의 힘을 어지럽혔고, 그것은 신검을 잡은 자로 하여금 그릇된 욕망을 드러내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석가장, 석대붕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렇다면 육극신과는 직접 싸우지 않으셨던 것이군요."

 "그것은 또 다른 문제지. 나는 싸웠다. 직접."

 청풍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환영(幻影), 환시(幻視), 환청(幻聽).

 결국 그러한 존재라는 이야기인데, 직접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청풍은 금세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을지백이 회상이라도 하듯, 그때의 일을 천천히 늘어놓은 까닭이다.

 "대단한 놈이었다. 엄청나게 강한 상대였지. 육체가 없는 원영신(元靈身)이라는 것이 그렇게 한스러울 수 없었다. 게다가 끌어 쓸 수 있는 힘도 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더구나. 살아 있던 때였다면 한판 시원하게 겨뤄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끌어 썼다 함은........ 설마 상단전의?"

 "그렇다. 이제야 알겠나? 처음부터, 아주 처음부터 백호검을 움직였던 것은 네 상단전의 힘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검이 지녔던 신기(神氣)가 있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승부의 향방을 묻는 말이었다. 을지백이 되물었다.

 "승부 말인가?"

 "....예."

 "졌다."

 을지백이 씁슬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연히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아니, 싸움이라 볼 수도 없었지. 승패? 우스운 말이다. 그 당시 네 상단전의 힘은 그야말로 미약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놈의 변덕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변덕이라니요."

 "변덕이라기 보다는 흥미가 옳겠다. 생각해 보아라. 놈은 날 볼 수 없어."

 "........!!"

 청풍의 두 눈이 기광을 발했다.

 을지백을 볼 수 있는 것은 청풍뿐이다. 그 자신의 거울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달리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청풍 스스로가 무의식 중에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그만이 느낄 수 있고, 그만이 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검이 제 스스로 움직인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았겠나? 그는 그것을 네가 발동한 어검(御劍)의 비술로 보았다. 어검,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만, 그것을 진정한 어검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미숙한 수준이었지. 놈은 그러한 사실에 지대한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결국 알아챘다. 내 존재까지도."

 을지백이 한순간 말을 끊었다.

 숨 막히는 정적,

 청풍의 머릿속에 육극신의 신위가 그려졌다. 그 무위, 그 힘, 이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겨야 했다.

 청풍의 두 눈에 산중대왕 큰 범의 장중한 투지가 새겨졌다. 을지백의 두 눈에도 동시에 같은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놈은 날 보지 못했지만, 내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놈이 물었지. 누구냐고."

 "그곳에 있는 자. 누구인가."

 청풍은 마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육극신의 목소리를 환청처럼 들을 수 있었다.

 대답없는 백호검, 백광을 수놓을 뿐이다. 을지백의 기억이 청풍의 기억이 되어 눈앞에 그때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를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지닌 바 영성(靈性)을 갈고 닦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놈의 힘은 육신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영육(靈肉)의 완성체, 그것이 그다. 이미 스러져 버린 육신이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었다. 내 육체가 살아 있고, 내 생령이 완전한 상태였다면 한판 좋은 승부를 펼쳐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을지백의 마지막 한마디는 한탄과도 같았다.

 잠시의 침묵이 지난 후다. 청풍이 백호검의 검자루를 쥐며 물었다.

 "광혼검마가 이 검을 쥐고 있었던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간단하다.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흥미를 잃었다니......."

 "놈은 그런 자다. 내 공격이, 네 어검 아닌 어검이 막혀 버리고, 놈이 백호검을 잡았을 때, 나는 너와의 교감을 잃어버렸다. 대신 일순간이나마 놈의 혼백(魂魄)을 접할 수 있었지. 놈의 상단전은 광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또한 높은 철벽으로 철저하게 방어되고 있었다. 백호기의 접근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는 검이 주는 광기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겠군요."

 "그렇다. 놈은 백호기의 부름을 듣지 않았다. 원천적으로 신검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었지."

 "염원하는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정확하다. 이미 완성된 자였기 때문이다. 설령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검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자였다. 그러니 백호검과 나에게 느낀 흥미도 잠시뿐이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놈은 백호검을 부러뜨리려고까지 했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파검존.

 제아무리 보검을 부순다는 이름이라 해도, 백호검과 같은 신물은 감히 파괴할 만한 물건이 아니다. 누구라도 품고 싶고, 휘두르고 싶을 만한 검이다. 없애 버리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릇의 다름을 나타내 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검은 이렇게 무사합니다."

 "그래서 변덕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백호검을 부숴 버리려던 놈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놈의 부장(副將)이었던 한 명의 검사에게 신검을 넘겨 버리고 말았다. 부러뜨리려고 했던 것도 모자라 자격도 없는 놈에게 신검을 줘버리다니! 백호검을 그렇게 가벼이 다루었던 놈은 지금까지 한 놈도 없었다."

 을지백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청풍의 마음 깊은 곳.

 청풍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을지백의 분노뿐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풍 자신의 분노, 바로 자신이 발하는 마음이었다.

 "우습게 보였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우습게 보인거다."

 그렇게 된 것은 청풍 자신의 탓이다.

 청풍이 고개를 움직여 내 방위, 각기 다른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청풍이 입을 열었다.

 강한 의지를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청풍의 다짐은 을지백 한 사람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을지백이 아니라 모두가.

 모두가 아니라 청풍 본인에게였다.

 치링. 스르릉.

 청풍이 네 개의 검을 검집에 회수했다.

 좌우 허리에 청룡검과 백호검을, 등 뒤에는 주작검과 현무검을 십자로 비껴 매었다.

 "만검지련자(萬劍之戀者), 검이 부끄럽지 않은 무인이 되어드리지요. 이젠 지지 않습니다."

 듣는 이가 없는 산중, 듣는 이가 여럿인 계곡.

 청풍이 몸을 돌렸다.

 남겨진 네 사람의 그림자.

 성장하는 남자의 거울로써 그 역할을 다한 그들의 모습이 변화한다.

 청풍이 보던 얼굴과 조금씩 달라지는 그 얼굴들.

 더 거칠어진 얼굴, 백포 대신에 고대의 백색 갑옷을 입은 을지백이.

 군사(軍師)의 전포(戰袍), 청색투구의 노장 천태세가.

 날카로운 주작 문양, 홍색 전갑의 젊은 장수 남강홍이.

 육중한 흑갑(黑甲)에 대제의 팔만 사천 병사들을 통솔하던 북진무가.

 그들이, 고대의 대륙을 내달리던 그때의 모습으로 청풍의 뒤를 바라보며 서 있다.

 신검의 힘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발걸음이다.

 함께해 온 길. 앞으로도 함께할 길이다.

 청풍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사명의 길을 지켜줄 그들이었다.

 <6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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