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156)

 청풍과 서영령은 문철공의 대장간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다. 이 산촌은 다 쓰러져 갈 듯 피폐해져 있었지만, 남아 있는 장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산촌에 세워진 공방들, 문철공을 받들며 뜻을 세운 젊은 장인들이 여러 명 있었던 것이다. 

 젊은 장공(匠工), 홍무병(洪武兵)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문철공의 풀무질과 망치질을 거드는 이다. 배사지례가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보기에도 문철공의 수석제자라 할 만한 청년이었다. 

 “사실 이 광산에서 나는 철(鐵)은 중원 천지에서 찾기 힘든 양질의 철이랍니다. 게다가 광산의 심부(心府)에서는 만년한철에 준하는 백철(白鐵)이 날 정도지요.” 

 잠시 작업을 멈춘 홍무병이다. 다시는 떨어지기 싫다는 듯 청풍의 옆에 딱 붙어 있던 서영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 백철이 나는데 왜 폐광이 되었나요?” 

 “바로 그 백철 때문이지요. 광산 심층에서 나왔던 백철은 홍복이었다기보다는 도리어 재앙이었답니다. 탐내는 이들끼리 싸움이 생기고 피가 흘렀어요. 한번 흘리기 시작한 피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지요. 결국은 관가에서도 폐쇄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광은 관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곳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사악한 무림방파가 얽혀 있었답니다. 단심맹이라고 하더군요.” 

 단심맹. 

 안 들리는 곳이 없는 이름이다. 청풍과 서영령의 안색이 미미하게 굳었다.  

 “무서운 일이네요. 한데… 그렇게 폐쇄되었다면서 어떻게 공방을 꾸려갈 수 있는 건가요?” 

 “폐쇄라 해도 조금씩의 채굴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철광이 본디 관가의 소관이라 해도 민력(民力)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요. 관가가 묵인하는... 하하, 말하자면 암상(暗商)이라고 할 수 있겠죠.” 

 암거래를 말함이었다.  

 아무리 관가가 물자의 흐름을 통제하려 해도 그것은 결국 사람이 행하는 일이다. 

 반드시 곁가지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런 곁가지를 모두 끊어놓기는 힘든 법, 그럴 바엔 잘 보듬어 함께 커가는 편이 훨씬 더 좋다. 암상이 성립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럼 문 신공(神工)께서 쓰시는 철도 다 그렇게 얻는 건가요?” 

 “아, 그건 아니랍니다. 신공께서는 이 광산의 철을 얼마든지 쓸 수 있도록 윤허받은 분이시니까요.” 

 “윤허요?” 

 “예. 백철로 인한 변고가 발생했을 때, 금의위의 위도독이라는 분이 오셨었어요. 그분이 신공께서 만드신 검을 보고 황상께 아뢰겠다고 하셨었죠. 지나면서 하신 말씀으로만 알았었는데, 한달후 정말로 소칙이 내려왔지 뭡니까. 채광과 연철을 뜻대로 하라. 이렇게요.” 

 “그랬군요. 금의위 위도독이라면 남북쌍위 중 북위 위금화, 허언을 할 사람이 결코 아니죠. 풍랑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죠?” 

 “들어봤지. 북위보다는 남위가 더 익숙하지만.” 

 “그도 그렇겠네요. 풍랑은 검을 쓰니까요. 남위 위원홍, 해남파 장문인의 검기(劍技)는 남해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하죠.”  

 “그래. 언젠가 반드시 견식해 봐야 할 무공이지.” 

 “남해까지 가려고요?” 

 “그럼 가봐야지 않겠어? 대해남파 장문인께 오시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 

 “호호호. 그야 그렇지요. 남해…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같이 가지. 언제가 되었든 말이야.” 

 “정말요?” 

 “그래. 꼭 같이 가보자고.” 

 서로를 향한 순수한 마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모습이다. 

 용봉(龍鳳),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과도 같은 한 쌍. 

 둘을 돌아보는 홍무병의 얼굴에도 맑은 웃음이 깃들었다. 

 까아앙........ 까앙.......!

 작아졌던 망치질 소리가 다시금 거세지기 시작했다.

 손을 거들어야 할 때가 된 모양이다. 홍무병이 벌떡 일어나 화덕 쪽으로 달려갔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한적함을 느끼는군."

 "그러게요. 이런 곳도 나쁘지는 않아요. 그렇죠?"

 찬바람 부는 날, 그녀가 옆에 있어 따뜻한 날이다.

 정겨운 한때였다. 풍광이 전혀 다른 곳임에도 화안리의 정취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삼 일이 지났다.

 그렇게 좋은 날이 가고,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괴산 대장간의 문을 연 남자가 있었다.

 모처럼의 한산함을 산산조각 낸 자.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자다.

 찢어진 누더기와 산발한 머리로 나타난 자.

 고봉산, 개방의 고봉산이었다.

 "괴산 문철공이라니. 생각했던 것보다 넓은 인맥을 지녔더군. 이곳까지 오느라 발품을 꽤 팔았어."

 고봉산은 예(禮)를 갖추지 않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예를 갖추며 인사할 상대가 애초부터 아니었지만, 설사 그렇지 않았더라도 격식을 차릴 만한 여유는 없어 보였다.

 "찾아온 이유는?"

 고운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청풍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예의를 차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청풍에게 있어 개방과의 인연이란 결코 좋은 기억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은 이들이었다.

 "성질도 급하시군. 항상 그런 식인가? 그렇게나 제멋대로 일을 치고 다니니까 사방천지에서 골머리를 썩을 수밖에. 자네 때문에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이가 한둘이 아닐 거다."

 청풍의 눈썹이 꿈틀 치켜 올랐다.

 당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모르는 것 같다.

 개방에게 쫓기며 고난을 겪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후개 장현걸.

 그 간특한 계책에 휘말려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까지도 분노가 치밀 정도였다.

 "몰랐던 모양이지? 자네가 나서서 벌인 엉뚱한 짓 때문에 수로맹의 계획도 진창 틀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사문의 골칫거리인 것은 어떻고? 먹을 수도, 버릴 수도 마땅치 않은 계륵이 아니었던가?"

 무엇을 믿고 이와 같은 도발을 해대는지 알 수가 없다.

 천하제일방 개발이라고들 하지만, 정말 상종할 수가 없는 무리다.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던 청풍의 기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본론을 말하라. 검을 먼저 뽑기 전에."

 뻗어 나오는 기파가 굉장했다. 청풍의 몸에서 휘몰아치는 분노가 새어 나왔다.

 숨 막히는 기운이 사방을 채운다.

 흘러나온 강대한 영웅기(英雄氣)가 고봉산의 몸을 삽시간에 굳혀 버렸다. 고봉산의 등줄기에 서늘한 식은땀이 배어들었다.

 '괴물이 다 되었군. 이런 놈을 더 건드려도 될까.'

 고봉산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 도발을 해보았지만, 괜한 짓을 했다.

 섣부른 도발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강해져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상상을 초월하는 무력이었다.

 '후개....... 이거,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고봉산의 눈에 암울한 빛이 깃들었다.

 장현걸은 도대체 이런 자를 왜 적으로 돌리려는 것인지.

 행여나 정면으로 대치하게 될 경우, 장현걸로서는 절대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고봉산이 가져온 전언은 청풍의 심기를 크게 흔들 만한 내용을 품고 있는 바, 이 정도 무인에게 그런 것을 전한다는 것은 단심맹과 싸우는 것 이상의 모험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알겠다. 말하지. 내가 가져온 정보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자네와 자네 사문에 관한 것이다."

 "나에 관한 것?"

 고봉산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기호지세였다.

 어차피 목숨은 내놓았다. 후개의 판단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자네 사부에 관한 것이다. 자네 사부의 죽음에 관한 진실 말이다."

 ".......!!"

 청풍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빛을 뿜었다.

 "자네 사부는 육극신에게 죽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겠지?"

 "알고 있다."

 "그때까지만해도 파검존 육극신은 그렇게 유명한 무인이 아니었다. 비검맹도 그때는 아직 이만큼 성장하기 전이었지. 화산파 장로가 장강에서 태동하는 군소문파의 일개 무인에게 죽었다. 그렇게 죽어서는 안되었다는 말이다. 그때 화산파 천검 진인이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이 뭐였을 것 같나?"

 고봉산은 마치 그 질문의 여파를 기대하기라도 하는 듯, 뜸을 들이며 청풍의 눈을 살폈다. 하지만 청풍은 그런 얄팍한 행동을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 청풍이 강렬한 기파를 흩뿌리며 되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지?"

 폭출하는 기운이었다.

 청풍의 눈빛을 감당하기 위해 고봉산은 사력을 다해야만 했다.

 "은폐, 은폐였다. 복수가 아니었단 말이다."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청풍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하늘로 올렸다.

 '은폐.......'

 사부님, 사부님에 대한 안타까움이 진한 슬픔으로 어두워진 눈앞에 가라앉았다.

 "계속하라."

 청풍의 목소리가 명령처럼 발해졌다. 압도적인 존재감. 고봉산의 입이 절로 열렸다.

 "화산파는 일단 자네 사부의 죽음에 대한 소문을 최대한 축소했다. 비검맹주가 천검 진인과 만나게 된 것은 그 즈음이었지."

 "........!"

 점입가경이다. 화산 장문인과 비검맹주의 회동이란 것은 세상 어디에도 알려진 바가 없다. 놀라운 비사(秘事)였다.

 "비검맹주는 화산파가 선현 진인의 죽음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장강을 통한 화산파의 물자 운송로를 내걸었다. 비검맹에 책임을 묻지 않고 싸움을 벌이지 않아준다면, 향후 이십 년간 비검맹 영역 하에서의 자유로운 물류 수송을 보장해 주겠다고 한 것이지. 그것은 복수라는 대의명분과 무시할 수 없는 실리(實利)의 기로였다. 그리고 천검 진인은 복수를 택하지 않았다. 화산 장문인은 결국 실리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증거는 있나?"

 "물론이다. 여기 이 문건에 당시 상황에 대한 모든 것이 나와 있다."

 고봉산이 품에서 하나로 엮어진 몇 장의 문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청풍이 눈을 빛내며 손을 뻗었다.

 파라락.

 문서 뭉치가 고봉산의 손을 빠져나온것은 순간이었다. 공중을 날아 청풍의 손에 잡힌다. 고봉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압도적인 힘, 신비한 능력까지 보여준다. 경악 어린 표정, 고봉산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게, 게다가.... 당시의 정황을 보면 화산 장문인은 육극신의 실력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있었다. 일부러 질 만한 장로를 보낸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단 말이다."

 "일부러?"

 "그렇다. 당시 사건의 발단은 화산파의 수송선이 비검맹의 행사에 말려들어 피해를 입었다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매화검수만을 파견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천검 진인은 신중을 기했다. 서천각을 가동하여 비검맹을 조사한 후, 그 당시 발군의 기량을 자랑하던 목영 진인을 내보내려 했었지. 그것도 목영 진인 하나뿐이 아니라 오행 진인까지 함께 움직이도록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천검 진인은 그들의 투입을 취소해 버렸다. 대신 자네 사부가 갔어. 거기에 아무런 지원도, 제대로 된 정보도 제공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죽음을 예상하고 보냈다는 말이다.

 죽은 후, 그것을 빌미 삼아 협상까지 갔다는 이야기였다. 고봉산의 말이 이어졌다.

 "놀라웠던 것은 자네 사부의 무력이었다. 자네 사부는 검조차 들지 않은 채, 육극신과 팔십 합을 겨뤘다. 천검 진인도 그것은 몰랐을 것이다. 그 싸움을 본 것은 두 사람밖에 없었고, 그 중 하나는 육극신에게 발각되어 그 자리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한 명이 증언한 그때의 격전은 그 문서 두 번째 장에 상세히 쓰여 있을 것이다."

 감겨 있던 청풍의 눈이 번쩍 뜨였다.

 육극신과 팔십 합을 겨루었다는 말.

 무검, 자하진기. 청풍은 당장이라도 그 문서를 들춰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청풍은 그 마음을 누르고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자는 어디에 있는가?"

 사부의 마지막을 보았던 이다. 청풍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고봉산의 대답은 그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었다.

 "죽었다. 당시 수로맹에서 상당히 이름 나 있던 무인이었지만, 후구당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절망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다. 육극신의 고전이 비검맹으로서는 감추고 싶었던 일이었는지, 목격자를 살려두려 하지 않았다."

 허탈함이 먼저 다가왔다. 개방이 하는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고봉산의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마치 사신검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을 확인 받은 기분이었다. 침묵하던 청풍이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며 물었다.

 "그래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무엇이지?"

 고봉산은 긴장했다. 승부수는 여기부터다.

 장현걸의 당부가 떠올랐다.

 "무조건 솔직해라. 다른 것은 통하지 않아. 완전히 갈라놓지 않아도 상관없다. 몇 달만, 아니, 한 달만이라도 천검 진인의 손을 막을 수 있으면 된다."

 얼굴을 굳힌 고봉산, 그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자네가 천검 진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래서다. 천검 진인은 자네를 얻기 위해 후개를 노리고 있지. 개방이 자네를 쫓았던 것을 빌미로 말이다."

 고봉산은 잠시 말을 끊고 청풍의 반응을 살폈다.

 청풍은 잠자코 기다린다. 눈조차 뜨지 않았다. 고봉산은 등에 맺힌 땀방울 하나가 등허리로 흘러내리고 마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자네를 추격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었는지 짐작하고 있을것이다. 개방이 화산 제자를 쫓는다? 전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화산파의 방관 덕분이다.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대로 두었단 말이다. 뿐만 아니라 서천각을 통해 자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까지 했었다. 그 진의야 정확히 모르겠지만 천검 진인이 자네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지금이야 상황이 달라졌지만."

 고봉산의 말이 끝났다.

 청풍의 행보와 화산파 장문인의 의도.

 명쾌한 설명이다. 또한 명쾌한 만큼 그 이면의 탁하고 어두운 그림자는 짙기만 했다,

 청풍의 눈이 뜨였다.

 폐부를 훑어내는 시선. 청풍의 눈이 고봉산을 그 저편에 있을 장현걸을 향했다.

 "그것이 다인가? 그때의 일은 결국 후개가 자초한 일이 아니었던가?"

 "변명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 후개의 입장이다. 강호사라는 것은 원래부터 어제와 오늘이 다른 법이지. 화산이 자네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때와는 처한 국면이 다르다. 자네가 화산으로 돌아가 또다시 장문인의 희생양이 될 것인가 아닌가는 결국 자네의 선택이겠지. 하지만 우리에게도 우리의 안위가 걸린 이상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는 것 아니겠나? 시도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려는 것뿐이다."

 솔직함을 넘어선 뻔뻔함이었다.

 청풍이 화산으로 가면 곤란하다. 화산 장문인이 청풍을 손에 넣으면, 무엇보다 먼저 과거의 앙금을 해결하려 들 것이다. 장현걸이 걸려듦은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었다.

 한편.

 청풍이 화산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여 곤란함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도리어 천검 진인으로서는 청풍이 아쉬운 이상, 그의 마음을 회유할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될 것이다. 후개는 거기서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되든 후개로서는 화산의 움직임에 제약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결과는 어차피 비슷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시기'였다.

 청풍이 화산으로 복귀하면 그 시기는 한껏 앞당겨질 수 있다.

 반면, 청풍이 화산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 시기는 얼마든지 뒤로 미뤄질 수 있었다. 오히려 더 앞당겨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런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청풍의 심중이 어떤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개방 후개를 걸고 넘어지는 것은 화산파 장문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 까닭이었다.

 변수는 많았다.

 화산파 장문인에게 청풍이 얼마나 중요한가.

 어떤 부담이라도 지고서 청풍을 회유할 가치가 있는가.

 청풍의 마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강호사의 흐름도, 세간의 평판도 문제였다.

 장현걸로서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가 없는 상태. 그럼에도 화산과 청풍이 갈라지기를 원했던 것은 그것이 조금 더 개방의 안위에 유리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은 모험,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이 그보다 어울릴 곳도 없었다.

 "내가 화산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후개에게 득이 된다, 이 말이로군."

 "그거야 모르는 일이다. 그러리라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다만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자네가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그것은 사부와 제자를 차례로 죽음에 몰아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문파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해."

 청풍은 긍정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뼈저리는 현실을 느낄 뿐이다.

 사신검, 그것에 관한 진실이 꿈에 이르는 환상과도 같은 것이었다면, 사부에 관한 진실은 피부에 와 닿는 실재였다. 돌이킬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과거, 그리고 그의 주변을 둘러싼 현재였다.

 "할 말이 끝났으면 후개에게 가서 전하라. 뒤에서 수작을 꾸미는 것은 그만하고 내 눈앞에 오라고. 내게 했던 일에 대한 대가는 내가 직접 치르게 해주겠다."

 청풍이 몸을 돌렸다.

 걱정 어린 눈, 서영령이 옆에 다가와 청풍의 손을 잡아온다.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는 고봉산, 괴산 대장간의 문이 그의 등 뒤로 굳게 닫혔다.

 고봉산이 떠난 후.

 청풍은 고봉산이 주고 간 문서부터 펼쳐 들었다. 사부에 관한 이야기, 있다. 그 한 장에 담긴 글자들이 그의 눈에 아프도록 비쳐들었다.

 ........이름도 생소한 비검맹이다.

 수로맹은 긴장해야 한다.

 비검맹은 수로맹을 노리고 있다.

 육극신은 괴물이었다. 수로의 용왕도 그 괴물을 어쩔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자의 무공은 인세의 그것이 아니었다.

 난 선현 진인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 화산파 장로라고 했는데, 유명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면 이길 수 없다.

 구파일방의 이름이 아무리 드높다 한들, 내가 본 육극신의 무공은 구파일방의 누가 와도 맞서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공이었다.

 비무 자리에 나타난 선현 진인은 볼품이 없었다. 그 늙은 화산파 장로는 강함과는 거리가 먼 온화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맥없이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선현 진인은 강했다.

 육극신의 파검이 아무리 몰아친대도 꿋꿋이 버텨냈고, 간간히 뻗어내는 맨손에서는 신검(神劍)의 경기가 뿜어졌다. 두 눈을 의심했다.

 파멸적인 힘을 자랑하던 육극신.

 투지라고는 찾아볼 데 없는 노인네가 육극신에 대적하고 있는 광경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시종일관 육극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기는 했지만 노인네는 무슨 집착이 있었는지 용케 쓰러지지 않았다. 단숨에 끝날 줄 알았던 싸움이 길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선현 진인이란 노인네는 지치지를 않는 것 같았다.

 주름진 손에서는 엷은 노을 빛 광영이 이글거렸고, 누구나 알 만한 암향표를 펼치는데도 그 몸놀림이 육극신의 대력투형보에 못지 않았다.

 오십 합이 육십 합으로 넘어갔다. 싸움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선현 진인의 손에 깃든 노을빛이 뚜렷해졌다. 그 손, 육극신의 파검을 정면으로 부딪쳐 맨손으로 막아낸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결국 육극신은 절기를 꺼내놓았다. 파검마탄포라는 괴력의 무공을 펼치기 시작하자 선현 진인은 더 이사 버텨내기 힘들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선현 진인의 팔이 날아갔다. 왼쪽 다리도 잘려 나갔다. 팔십 합, 선현 진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다. 한쪽 다리로 육극신에게 달려드는데, 다리가 없는 왼쪽에도 내공의 다리가 돋아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어이 육극신의 가슴에 기다란 상처를 새겨놓았다. 하지만 다음 순가 노인네는 배를 관통하는 검상을 입었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나는 봤다. 마지막 순간 노인네는 분명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눈물은 아니었다.

 머리를 서쪽 하늘로 돌린 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제자나 또는 누군가의 이름인 것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로 고고하다던 화산파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 그러나 그 맑은 눈물이 이상하게도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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