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무림서] 화산질풍검 제 24장 화산(華山)
많은 문파들을 보고, 많은 무인들을 만났다.
문파에 적을 둔 사람, 문파에 얽매인 사람, 문파를 이끌어가는 사람.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문파에서 파문 당한 사람도 있고, 무리 짓는 것이 싫어 문파를 멀리하는 자도 있었다.
문파에 충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파를 배신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문파를 변화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문파를 유지시키려는 그 반대편에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 모두가 결국은 강호인이다.
그런 강호인들 중에서도.
문파와 관계없이, 강호인들의 빛이 되는 자가 있다.
생각을 바꾸고, 사람들을 바꾸고, 문파를 바꾸는 자였다.
그런 힘을 지닌 자들을 달리 영웅이라 일컫는다.
영웅에 의해 새롭게 도약하는 문파, 그런 문파가 세상엔 많다.
이미 뛰어난 세력을 가졌든,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축적했든 마찬가지다.
영웅이 없는 문파는 쇠퇴한다. 영웅이 없는 강호는 피폐해진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다 미쳐 돌아가는 난세도 그렇게 살지 못할 강호는 못되나 보다.
빛이 되는 영웅들이 설 기회가 되니까 말이다.....
한백무림서
한백의 일기 中에서.
"숭무련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
"아, 무련이요? 하지만 그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마, 이대로 덮어둘 문제가 아니야."
청풍이 서영령을 직시했다.
그 눈 안에 솔직하면서도 불안한, 그러면서도 변하지 않았던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다.
"덮어둘 문제가 아니라면 어떻게 하려구요?"
"며칠 동안 생각해 봤어.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화산에 몸을 바치겠다던 하운 사형의 말이 떠오르는 가 하면, 한편으로는 숭무련으로 오라던 갈대협의 말이 머리 속을 맴돌아. 내 무공은 이미 화산을 벗어난 것이 되어버렸지만, 사실 그 근원은 사부님이 남겨주신 자하진기에서 나오고 있지. 이제 난 결정해야 해. 내가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을."
청풍의 마음은 진실했다.
자신의 천명을 결정한다면서 서영령에게 신뢰의 빛을 구하고 있다. 그녀를 인생의 일부로 느끼고 있음이다. 그녀의 의견을 묻고 있음이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그렇기에 서영령은 아무런 바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청풍을 숭무련으로 오게 만들고 싶었음이 물론이다.
히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오직 그가 결정해야 할 일, 그녀는 그의 자유로운 선택에 아무런 누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하고 싶냐....... 나도 잘 모르겠어서 그래. 하지만 어느 쪽이든, 령매와 함께할 수 있는 방향이면 바랄 것이 없겠어."
눈 내린 산길이다.
곱게 아로새겨진 하얀 길 따라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남는다. 서영령이 청풍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그래요."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화산파.
화산파를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문인의 마음이 어떻고, 사문의 문풍이 어떻든지 간에 화산은 청풍을 키워준 부모이자 형제였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 뗄 수 없는 천리(天理)인 것처럼, 그에게 화산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화산으로 돌아간다 해도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다를 바가 없었다.
장문인과 맞설 수도 없는바, 사부님에 대한 원한을 그대로 묻어둬야 한다. 화산 장문인의 순수하지 못한 계책들을 감내해야 할 뿐 아니라, 부당함에 가까운 문파의 처사들을 두고 봐야만 했다.
그것들도 문제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화산에 돌아가면 서영령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숭무련의 검끝이 화산으로 겨눠지게 된다면 그것은 더욱더 명백해질 문제였다.
"섬서성을 넘보게 되는 것은 언제쯤일까?"
"섬서.... 요? 그것은...."
서영령이 말끝을 흐렸다. 청풍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른 척하지마. 숭무련이 하북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면, 다음 차례는 섬서가 아니고 어디겠어."
"........"
섬서에는 화산파가 있다.
서영령의 눈에 슬픈 빛이 깃든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하북..... 하북의 핵은 팽가와 언가겠죠. 팽가와 언가는 강해요. 고수층도 두텁고, 뛰어난 진산비기가 많죠. 그런 만큼 비무도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거예요. 적어도 가장 강하다는 고수 다섯 명은 꺾어 놓아야 패배를 인정할 거라는 말이죠."
"시일이 걸리겠군."
"맞아요. 아무래도 간단히 끝날 상대가 아니니까요."
화산파와 숭무련이 부딪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전에 해결해야 했다.
화산파와 숭무련이 완전히 어긋나기 전에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청풍의 머리 속에 한가지 계획이 자리잡았다.
'좋아. 그러면 일단 한 가지를 마무리 짓자."
"무엇을요?"
"화산을."
"화산파요?"
"그래, 화산파. 장문인을 만나겠어."
망설이던 마음이 마침내 제 길을 찾는다.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
서악, 화산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화산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에 불안해하는 서영령. 잘게 떨리는 고운 그녀의 손끝에 청풍의 강인한 손가락이 닿는다. 보듬어 잡아주는 청풍의 손, 걱정 말라는 굳은 결의가 청풍의 두 눈 안에 있었다.
청풍과 서영령이 화산에 도착한 것은 겨울의 한가운데였다.
웅장함과 험준함이 충천하는 서악이다. 그 장엄한 산세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휘이이이잉-
두사람은 아무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황석곡 측면 능선을 향하여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기억 속의 아련함이 함께하는 곳이다.
적색 기와는 겨울 날씨에 눈 덮여 하얗게 변해 있지만, 쉬어가는 구름은 여전하다. 하늘 높이 솟은 연화봉과 운대봉을 한눈에 담아둘 수 있는 곳, 그들이 어린 시절 처음으로 서로를 보았던 매화정이 그들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풍랑을 처음 봤었죠. 기억나요?"
"기억하고 말고. 어린데도 무척이나 눈에 띄었지. 좀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았어."
"피이, 거짓말."
서영령이 혀를 내밀고 몸을 돌려 매화정을 향해 뛰어갔다.
그때의 꼬마 아이.
오래 전 기억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어린 시절, 황석곡을 오가며 경석을 모으던 시간들이, 자하진기의 신비로운 공능을 발견하며 흥분했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정자 안에 있던 의자를 나란히 붙여놓고 앉았다.
살포시 기대오는 서영령의 머리에 외로웠던 어린 시절이 무상할 따름이다. 서영령이 옆에 있고 화산 절경이 앞에 있으니, 세상사 어찌 변할지 모르는 법이라. 그때는 상상도 못했을 지금 이 순간이 그저, 그저 소중하기만 할 뿐이었다.
"령매, 령매는 여기서 기다리도록 해. 장문인은 혼자 만나야 할 거야."
한참 동안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은 그들이다.
청풍이 기어코 몸을 일으키고 만다. 그가 서영령의 앞으로 발을 옮겨 그녀의 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하지마. 금방 돌아올게."
그녀의 섬섬옥수가 어깨에 올려진 청풍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다. 화산 장문인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는 까닭일 게다.
"가 봐여. 여기서 기다릴께요."
서영령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냐, 아니냐.
어느 쪽이 되어서 청풍을 향한 그녀의 감정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녀가 어렵사리 미소를 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서요."
미소 속에 깃든 순수한 연정.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수밖에.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힘들게 발길을 재촉했다.
타악! 터엉!
돌아보면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매화정을 벗어나 한달음에 화산파 본산으로 향했다. 정운대로 가는 소로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장운대 담벼락 위로 올랐다.
찬 겨울에도 수련에 여념이 없는 보무제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형권과 비형권을 연마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열심이었다. 예전 생각이 절로 났다.
'이들도 매화검수를 목표로 하고 있겠지."
청풍도 그런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를 것이다. 그때의 청풍이 몰랐듯.
매화검수가 되어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
화산파의 혹독하고 잔인한 문풍은 지금의 그들이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청풍은 기척을 지우고 장운대를 벗어났다.
어릴 적엔 넘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험로를 지나 은선대에 이르렀다.
이제부터는 외길이다.
은선대 정면으로 들어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수련을 하고 있는 평검수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상궁의 지붕이 배경처럼 비쳐들고 있었다.
백호검의 검자루를 처음 잡은 곳,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 그곳이다.
또한 그곳은 장문인이 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장문인, 천화 진인을 떠올리자 품고 있는 분노가 더욱더 거세졌다.
후우욱!
불편한 심기가 강렬한 기파가 되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 심상치 않은 파장이 은선대 전체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드리웠다. 수련을 하던 평검수들이 하나하나 청풍을 돌아본다. 멈추는 검격, 기합성이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들었다.
뚜벅, 뚜벅.
청풍의 대지를 걷는 발자국 소리만이 은선대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평검수 수십 명을 단숨에 침묵시키는 힘.
그를 알아본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 위에 울려 퍼졌다.
"청홍무적검......!"
화산의 신성(新星)으로 일컬어지는 이다.
누구도 청풍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은선대를 지나 상층으로 올라간다. 상궁을 향하는 청풍의 등이 사냥감을 노리는 대호(大虎)와 같은 위험함을 품고 있었다. 그의 뒤쪽으로 평검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지?"
"숨이 막힌다. 정말 대단한걸....!"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던데! 매화검수와는 완전 다르잖아."
"청홍무적, 최근에는 질풍무적이라고도 불린다더니....."
침묵이 깨지고 갖가지 목소리가 얽혀든다.
소란스러워지는 은선대였다.
어지러워진 그 광경에 한쪽으로 두 명의 검사가 달려오며 호통을 쳤다.
"무슨 일이냐?"
"수련을 멋대로 중지하다니!"
평검수들의 무공교두를 맡고 있던 매화검수들이었다.
평검수들이 일제히 움직여 대열을 새로 갖추었다. 단숨에 정렬하는 평검수들, 개중의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강호에서 청홍무적이라 불린다는 청풍 사형이 이곳으로 와서......"
"지금 청홍무적검이라고 했나?"
"에.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이 위쪽, 상궁 쪽으로 갔습니다."
그의 말에 매화검수 두 명의 얼굴이 크게 굳어졌다.
"상궁 쪽으로 간 것이 확실한가?"
"예. 그렇습니다."
그 말이 떨어진 직후다.
매화검수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긴급 상황이다! 서 사제, 검향관으로 가서 매화검수들을 모아라!"
"예?"
"말 그대로다. 매화검수들을 모아서 상궁으로 와! 은선대 평검수 전원은 나를 따른다. 서둘러!"
지시를 내린 매화검수가 은선대 상층으로 몸을 날렸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평검수들이 얼굴에 의아한 표정들이 떠올랐지만, 이내 전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매화검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적들의 내습과도 같은 긴급함이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중이었다.
한편.
은선대를 나온 것이 바로 직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청풍의 신형은 이미 상궁의 입구까지 이르러 있는 상태였다. 등 뒤의 소란을 감지한 청풍이다. 그의 눈이 번쩍이는 기광을 발했다.
'대비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역시나 천화 진인은 만만케 볼 인물이 아니었다.
염두에 두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청풍이 천환 진인에게 검을 겨눌 상황까지도.
그런 것까지 예측하고 있지 않고서야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이유가 없다.
뚜벅.
상궁의 입구까지 왔다. 낮게 깔린 돌 계단 위에는 지객원의 고수 두 명이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매화검수 출신으로 준 장로 급의 지위를 지닌 인물들이다. 그들이 청풍을 발견하고는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장문인을 뵈러 왔습니다."
"이름은?"
"청풍입니다."
지객원의 고수 두 명은 청풍의 이름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이 말했다.
"들어가 보아라. 장문인께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다."
의외였다.
이렇게 순순히 들여보내 주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상궁 문이 열렸다. 청풍이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세 걸음도 채 떼지 않았을 때다.
아니나 다를까, 의외였던 의아함은 이내 역시나 하는 확인으로 바뀌고 말았다.
지객원 고수 두 명이 곧바로 청풍의 등 뒤에 따라붙고 있었다. 언제라도 검을 내칠 수 있도록 예리한 기운을 품고 있는 중이었다.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이로군.'
두 사람은 검을 뽑지 않았다. 하지만 청풍의 등 뒤에 검을 겨눈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정도 고수들에게 발검이란 순간이다. 함부로 움직이면 언제든 검을 전개하리라.
'게다가......'
압력을 가해오는 것은 지객원 고수 두 명뿐이 아니었다. 상궁 바깥쪽으로 몰려드는 삼엄한 검기(劍氣)들이 하나 가득 있었다. 청풍을 쫓아 상궁으로 달려온 매화검수들과 평검수들의 검기(劍氣)들이었다.
'먼저 가둬놓겠다는 것이로군."
이제는 더 분노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곤란함을 느낄 것도 없다. 내력을 끌어올리는 청풍의 눈이 강한 정광을 품었다. 그의 눈에 기광이 감돌았다.
'그 정도로 막을 수 있을 것 같나.'
심리적인 압박을 주고자 한 것이라면, 천화 진인의 의도는 실패다.
지객원 고수 두 명, 또는 매화검수 몇 명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천화 진인 본인이라면 모를까. 지금 이곳에 청풍을 막을 수 있을 만한 실력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장문인, 기다리시던 제자가 왔습니다."
장문인의 의지.
태사의에는 아무도 앉아 있는 이가 없었다.
청풍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태사의 오른편, 회랑 옆으로 나 있는 통로로 행했다.
집무실과 이어진 통로다. 뭉클뭉클 솟아나오는 검기, 하늘에 이른 천검(天劍)의 무력이 좁은 통로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래, 이정도 무력이라면.'
천천히, 마치 어둡던 통로가 밝아지기라도 하듯, 천검의 공력이 눈 앞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자네가 청풍인가."
이것이 바로 화산파 장문인이다. 그 이름이 지니고 있는 위용을 직접 보여주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일부러 내력을 모두 다 개방하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는 무력이 실로 막강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청풍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화산을 움직이는 무정한 손이 거기 있다. 청풍이 만난 자들 중에서도 손꼽는 무공, 청풍보다 훨씬 먼저 천하의 길을 밟아온 이였다.
"드디어 이렇게 보게 되는군. 그 기도, 발군이다. 들리던 것 이상이야."
평온한 어투였다.
하지만 청풍은 천화 진인의 목소리 안에 깃들어 있는 망설임과 놀라움을 놓치지 않았다.
천화 진인의 무지막지한 기파를 미동도 없이 받아내는 청풍이다.
힘으로 눌리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 버린 그였다.
태사의에 오르는 천화 진인.
청풍이 천화 진인을 올려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천화 진인의 눈썹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청풍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힘 때문이다.
대화산파 장문인의 기파를 안전하게 막아내는 것은 물론이요, 도리어 천화 진인에게 압력을 가할 정도의 기도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본문의 제자에게 그런 것을 느끼게 되다니, 천화 진인으로서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놀랍다. 놀라운 일이야. 자네가.... 선현의 제자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선현의 제자가 이렇게 크다니 실로 대단한 일이다. 이럴 줄은 진실로 알지 못했다."
천화 진인의 말에는 한 가지 뜻이 담겨 있었다.
선현 진인이 이만한 제자를 키워내서 놀랍다는 것.
그것은 곧, 선현 진인의 역량을 한참이나 낮게 보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선현 진인, 청풍에게는 다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사부님일진저.
청풍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도가 일었다.
"사부님께서는 훌륭하신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사부는 훌륭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아라. 네가 문파에 이룬 공(功)은 예전에 네 사부의 그것을 넘어서 버렸다. 청홍무적, 질풍무적의 칭호를 얻고 이와 같이 사신검을 모두 회수해 오지 않았더냐."
천화 진인에겐 칭찬이었으나, 청풍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커다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조용한 파도가 격랑으로 변하여 몰아쳤다. 청풍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지(死地)로 내몰린 사람은 공적(功積)을 쌓을 기회조차 없는 법입니다."
천화 진인의 얼굴이 크게 굳어졌다.
대화의 방향이 곧바로 그렇게 틀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까닭이다.
"무슨 말인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너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냐?"
천화 진인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래서야 고봉산의, 아니, 장현걸의 전언을 진실이라고 확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천화 진인의 얼굴, 그리고 천화 진인의 되물음이 그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사부님은 가지 않아도 될 길을 가셨습니다. 육극신과의 싸움 후, 화산파는 원수인 비검맹과 다른 거래를 했었다지요.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을 따름입니다."
공손함을 취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청풍은 들끓는 감정을 자제허기 위해, 가진 바 모든 인내력을 쏟아 부었다.
그래도 화산이기 때문이다.
화산파의 장문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사부님의 화산만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틀림없이, 검부터 뽑았으리라.
"그것을 어디서 들었는가."
"그것이 중요합니까?"
하극상에 가까운 언사였다.
하지만 천화 진인은 청풍의 태도를 걸고 넘어가지 못했다.
천화 진인 자신이 행했던 일. 그것을 피해갈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다 알고 온 게로군.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감출 수 없겠지."
당황했던 천화 진인이었지만, 그는 순식간에 평상심을 복구해냈다.
화산파 장문인, 천검 진인.
무림의 일대 거인(巨人)이다. 화산파를 명문거파로 이끌어온 능력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청풍의 말 몇 마디로 궁지에 몰리기에는 그 저력이 너무나도 컸다.
"그렇다. 네 사부는 나 때문에 죽었다. 네 사부는 육극신에게 죽었고, 나는 복수 대신 협상을 택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화산파는 장강의 유통로를 열었고, 장강 이남과 강동 지역까지 수월하게 진출할 수가 있었으니까. 그것이 네 사부의 공(功)이라면 공이다. 죽음으로써 화산파의 발전에 기여했으니."
죽음으로써 문파의 부흥에 밑거름이 된다. 사문의 제자로서 지녀야 할 당연한 도리였다.
두고 보면 분명 틀리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청풍에게 있어, 그것이 옳고 그르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부가 죽었다.
사문의 장로가 죽었다.
복수를 함이 당연한 도리다.
복수보다는 문파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가 세운 공적에 만족하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불처럼 솟구치는 마음이 청풍의 전신에 무시무시한 무력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사문의 실리를 위해 죽음을 강요했던 것, 그뿐 아닙니까?"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람은 자신이 죽어야 할 때와 장소가 있기 마련이다. 네 사부의 죽음은 화산파에 막대한 이득을 남겼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 이득은 패사(敗死)의 수치도 충분히 덮을만한 수준이었다."
"문파의 발전이 제자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모르는 소리! 화산은 본래부터 그렇게 커왔다! 수많은 사람들, 도력높은 선사(禪師)들과 영명있는 검사(劍士)들이 화산의 부흥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너는 그런 그들이 모두가 틀렸다고 말할 셈이냐? 매화검의 고고함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그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천화 진인의 호통은 강렬했다.
사문에 은을 둔 자, 사문에 목숨을 바쳐라.
그가 지닌 사상과 의지가 엿보이는 일갈이었다.
그러나.
청풍은 그가 지닌 대의(大義)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무엇이 먼저인지 알기 때문이다. 사문에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한다면, 사문 역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해주어야 한다. 청풍의 낭랑한 목소리가 천화 진인의 호통이 남긴 여운을 날카롭게 갈라놓았다.
"제자들이 사문에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것은 강요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다면, 그 어떤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가서 구해주는 것이 사문의 도리가 아니었습니까! 하물며 제자를 일부러 죽음에 몰아넣다니요! 그래서는 어떤 제자라도 사문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기 힘듭니다!"
"그것이 화산이다! 화산은 최고의 검문(劍門)일지니! 목숨을 바칠 만한 자부심은 그것으로도 충분해!"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최고의 검문, 죽은 사람의 넋은 그런 것으로 위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넋이 위로될 것인가 아닌가는 네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야!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천명이다! 나는 그들이 바쳐 온 목숨만큼 화산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뿐이야. 제자들의 죽음을 감내하는 사람은 이 화산의 장문인인 나다!"
천화 진인의 눈빛과 청풍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쳐 격한 불꽃을 만들었다.
청풍은 죽은 사람의 한(恨)을 이야기했고, 천화 진인은 화산 장문인의 천명을 말했다.
그러니 애초부터 좁혀질 수 없다.
천화 진인은 선현 진인의 죽음을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천화 진인 때문에 선현 진인이 죽었다?
천화 진인이 죽음으로 내몰았던 제자는 선현 진인 하나가 아닌 것이다.
천화 진인에게 있어 선현 진인은 사문에 한 목숨을 희생한 숱한 문인들 중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제자들의 피치 못할 죽음을 접하는 것은 어느 문파의 장문인이라도 반드시 겪어야만 할 숙명, 그 제자들의 죽음을 모두가 다 장문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 죄책감을 가져서는 일파의 장문인으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장문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의 화산파는 아닙니다. 많은 제자가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화산파는 결코 최고의 검문이라 말할 수 없으며, 응당 목숨을 바쳐야 할 명가(名家)라 볼 수도 없습니다. 문파의 발전이란 세력의 확장과 무공의 고하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닐 터! 실리를 쫓아가는 대의(大義)는 진정한 대의라 말할 수 없는 법이니, 화산파의 처사에서는 정대한 천리(天理)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습니다!"
막힘없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진심이다.
청풍은 문파의 경영과 복잡한 이해관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청풍은 그에 앞서 그보다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다.
협!
협의 도리가 그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진리다. 사부님이 심어주고, 강호를 걸으며 스스로 배운 정도(正道)였다.
"네 이야기는 화산의 제자로서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화산을 폄하하여, 사문에 목숨을 바칠 수 없다고 말한다. 강호에서 조그만 명성을 얻었다고 하여 교만이 극에 이르렀구나. 너는 결국 사문에 검을 들이대겠다고 말하는 것이냐!"
"협의지도(俠義之道)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화산의 길이 천도(天道)에 닿아 있다면 화산 제자로서 그 누가 마음속에 화산을 품지 않겠습니까."
"네 이야기는 이상(理想)이다.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상이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이룰수 없는 이상이라고 한들, 그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사부님께. 다른 어는 곳도 아닌 이 화산에서!"
천화 진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보무제자에서 매화검수로 이어지는 관문의 폐단.
매화검수가 가진 약점.
철기맹, 성혈교와의 싸움에서 얻게 된 패배 의식.
그런 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되지 못한다.
가장 큰 문제는 청풍이 말한 그것이다.
실리를 쫓아온 문파와 그로 인해 서서히 무너지는 대의명분.
청풍의 사부, 선현 진인이 죽었을 때부터, 아니면 그전부터 쌓여온 균열이 지금 현재에 이르러 그와 같은 결과로 나타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는... 화산 도문의 원로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그래서 원로원의 도인들처럼 세상을 등질 셈인가? 아니면 화산을 떠나가라도 할 참이냐?"
천화 진인의 목소리는 종전보다 그 힘을 잃고 있었다.
업보였다.
실리를 취하여 화산을 중흥기로 이끌었지만, 그것은 한때였을 뿐이다. 도리를 저버린 영광은 결코 영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사부님께서는 화산에 아무것도 바라시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검 진인이라 불리며 비웃음을 받으셨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억울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화산을 좋아하고 화산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겐 사부님의 화산이 보이질 않습니다."
"네가 원하는 화산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묻겠다. 그것은 파문을 원한다는 말인가?"
"......."
청풍은 대답하지 않았다.
파문.
그래도 될 것인가.
사부님의 화산이 아니기에 화산을 떠난다.
청풍이 화산을 박차고 나간다면.
하늘에 계신 사부님께서 과연 그것을 좋아하실까.
무공을 익히는 것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하셨던 사부님.
사부님의 어렴풋한 목소리가 청풍의 귓전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