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과 서영령은 서두르지 않았다.
전처럼 산중을 헤매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던 길을 갈 뿐이다.
마음의 여유를 배우며, 자하진기의 깨달음을 되짚어 나갔다.
그런 만큼 강해졌다. 청풍 자신도 놀랄만한 성취속도였다. 특별히 초식을 연마하지 않아도, 무공의 깊이가 절로 깊어지고 있었다.
청풍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조화와 균형을 찾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항상 팽팽하게 긴장하여 살아갈 수는 없는 법.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음이 있으면 양이 있듯, 급할 때는 급하더라도 적당할 때 쉬지 않으면 스스로를 망칠 뿐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면 본연의 그릇을 다 보여줄 수 있다.
그의 무공이 보여주는 비약적인 성장은 감춰져 있던 그릇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얼마나 급하게 이 세상을 달려왔는지 알려주는 증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며칠.
청풍과 서영령은 전에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여정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항상 그렇다.
아직까지 그들에겐 조화와 여유보다는 숙명의 그늘이 더 컸던 모양이다.
풀어내지 못한 인연의 사슬이 그들을 집요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한 마을, 객잔에서 만난 사람이 있었으니.
그들을 쫓아온 그녀다.
반가워야 마땅한 사람임에도 반갑게 맞이할 수가 없는 여인이었다.
"오랜만이야."
천류여협, 화산 매화검수.
여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연선하가 두 사람이 머무르던 객잔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두 사람 다 얼굴이 밝네."
그녀의 얼굴은 어두웠다.
급히 달려온 듯, 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사저."
지친 모습이나, 그녀의 매력은 여전했다. 서영령이 연선하를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네요, 언니."
"그래, 백호검과 철선녀. 철선녀는 역시나 너였구나."
그렇다. 서영령과 연선하는 일찍이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나 연선하의 얼굴은 그다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묘한 일이었다. 서영령이 청풍의 옆에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커다란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무사하셨군요. 석가장의 일로 걱정했었습니다."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정말 한참 만이야. 그사이에 또 변했구나."
"말씀하신 것처럼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연선하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청풍의 전신에서 범접하기 힘든 기도가 우러났기 때문이다.
절제된 반가움도 생소했다.
서영령이 옆에 있기 때문인가, 다가갈 수 없는 벽에 세워져 있는 느낌이었다.
"화산에 올라 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벌인 일에 대하여 말들이 많더구나. 다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곤란해하는 눈치야."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청풍의 대답은 짧았다.
누가 뭐라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투였다. 어린 시절의 껍질을 깨부수고 그것을 벗어나 커다란 날개를 달아버렸다. 과거는 과거일 뿐, 연선하가 어찌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너는.... 정말로 손에 닿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내가 알던 그 아이가 아니야."
"........"
청풍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보니 반갑다. 하지만 반가움은 순간이었을 뿐이었다.
청풍은 그녀를 순수하게 받아줄 수가 없었다.
청풍이 옛날의 그가 아닌 것처럼, 그녀도 옛날의 그녀가 아니었다.
긴장하고 있는 기색.
떨리는 목소리.
굳어진 눈매.
그 모든 것들이 그녀의 의도가 단순히 청풍을 만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너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너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도 많아. 지금 그들은 궁금해하고 있어. 네가 어디로 갔는지, 또 어디로 갈 것인지, 또 무엇을 하려는지."
매한옥, 하운 사형.
송현, 이지정 사숙.
청풍은 연선하의 말을 들으며 그 이름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당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청풍은 알 수 있었다.
연선하가 찾아온 이유는 그런 따뜻한 이름들에 있지 않았다.
"사저, 사저답지 않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 텐데요."
청풍의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연선하가 그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모로 돌렸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눈이었다. 연선하가 숨을 들이키며 말했다.
"정말로.... 넌 많은 것을 보고 있구나. 정말 대단해. 내가 잘못 생각했어."
일단공, 이단공.
자하신공이 깊어지면서 몇 단공의 의미를 잊어버린 청풍이다. 내력이란 본디 그러 식으로 경지의 수위를 나누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광대해지는, 심오해지는 것이 내력의 힘이다. 그 정도 경지에 이른 청풍에게 있어, 사람이 품고 있는 뜻을 짐작한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저가 평소와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별반 대단할 것이 못됩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녀의 목소리엔 불안함이 가득했다.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청풍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예전 생각을 하게 되는 그녀다.
강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 그 소년은 이제 없다.
그녀가 찾아온 의도를 단순히 반갑게만 받아들이기엔 청풍이 지나왔던 길이 너무도 험했을 따름이었다.
"이제 곧 중원 무림맹이 열린다. 소문을 들었을 거야."
"물론입니다."
"그 개맹식이 동정호 군산에 열리기로 되어 있어. 당연히 우리 화산파도 가기로 되어 있지. 네가 거기에 참가해 주었으면 좋겠어."
장문인의 뜻인가.
그래서 말하기를 망설였다면 이해가 될 법한 일이다.
그러나 청풍은 이번에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청풍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 것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무엇이 사저를 그토록 급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청풍의 통찰력은 이미 살아온 세월을 훨씬 넘어서 있었다. 연선하가 청풍을 바라보는 얼굴에 체념의 기색이 묻어났다.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후우. 이젠 네 앞에서 무엇도 감출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 한... 가지 일이 있어 도와달라고 왔는데, 참으로 말하기가 어렵구나."
"무슨 일이기에....?"
"내가 아는 한 사람이 곤경에 처했다. 한데 그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위험하기에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하지. 게다가 거기에는 무림의 안위가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중대한 안건이 걸려 있어. 하나 그런 만큼 목숨을 장담하지 못할 일이기에... 너에게도 도와달라고 하기가 어려울 따름이야."
"......"
청풍은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연선하다. 그녀가 청하는 도움이라면 응당 승낙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렇지만 청풍에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서영령 때문이다.
그가 서영령을 돌아보며 곤란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서영령이 청풍의 손을 잡으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걱정 마세요, 언니. 풍랑이 가서 도와줄 거예요."
청풍도 예상 못한 말이었다.
크게 뜨여지는 눈, 청풍이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로 서영령의 이름을 불렀다.
"령매.......!"
"풍랑, 누군가 곤경에 처했다면 당연히 가서 구해줘야죠. 나 때문에 망설이다니, 풍랑이야말로 평소답지 않아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연선하를 따라가라고 말한다.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을 뜻을 말해 오던 서영령.
그러면서도 그녀가 살아가는 세상의 중심은 그녀 자신이 아니라 그녀 곁에 있는 청풍일 뿐이었다. 그녀의 진심이 청풍의 마음에 다시 한번 따뜻한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령매는... 어떻게 하려고?"
"나는 걱정말고 다녀와요. 몇 달씩 걸리는 일도 아닐거고, 그렇죠, 언니?"
서영령이 연선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굳어진 연선하의 얼굴과 서영령이 보여주는 환한 얼굴이 무척이나 대조적이었다. 서영령이 그렇게 물어올 줄 몰랐다는 듯 연선하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렇긴 한데....."
"그렇다잖아요. 나는 그러면... 본가(本家)로 돌아가 있을게요. 산서성 태원부에 있는 무가보(武家堡)를 찾아요. 대신 빨리 와야 할 거예요. 전처럼 늦지 말고."
"태원부 무가보....."
"련에서도 움직임을 시작했으니 가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풍랑이 찾아올 것이라면 아버지께도 이야기해 놓는 편이 좋겠죠."
서영령은 웃었다.
험지에 갈 수밖에 없는 남자를 이토록 편하게 대해주는 여인이 또 있을까. 숭무련의 핏줄이라 그런 것인지 무인(武人)의 짝으로서는 그녀만한 여인이 없을 것 같았다,
"알겠어. 늦지 않도록 할게."
"그래요. 이번엔 약속 지켜야 해요."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는 두 연인이다.
그것을 보는 연선하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데다가, 어느새 자신의 반려까지 찾아버린 청풍이다.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안타깝다.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운 마음이 드는 연선하다.
객잔을 나서는 연선하와 그녀를 따르는 청풍.
뜻밖의 동행, 뒤엉킨 사슬이다.
서영령을 연신 돌아보는 청풍의 앞으로 시리디 시린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중원의 대지가 그들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 * *
남경.
황제가 거하는 궁궐이 지척인 장원이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정원에 찬바람이 머물다 흩어졌다. 살얼음 얼어있는 연못 위에 두 남자의 그림자가 비쳐들었다,
"무림맹은 어떻게 되었나?"
"군산(君山)에서 개맹식을 연다고 하였습니다."
"군산....."
"구파는 물론이고 육대세가를 비롯한 무파(武派) 수십 곳이 군산으로 무인들을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근래 최대 규모의 회합입니다."
"혈겁(血劫)이 일어나겠군."
"...그렇겠지요."
암행중랑장 조홍이 한 남자의 등 뒤에서 강호의 일을 보고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강호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단심맹과 신마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엄청난 숫자가 동정호로 모이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호광성 도지휘첨사 산하 세 명의 위지휘사가 단심맹의 손에 넘어갔고, 신마맹 산하 아홉 개 방파가 무인들을 투입했습니다."
군산은 산의 이름을 지녔지만, 실제로는 동정호 가운데에 자리한 하나의 섬을 뜻한다.
군산(君山).
고래로 수많은 전설들이 남겨져 온 아름다운 섬이다. 또한 이제 곧 전장이 되어버릴 섬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그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상당하군. 어떻게 나오리라 생각하나?"
보고를 듣는 남자가 돌아섰다.
한쪽 귀에 암적색 귀걸이.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이질감이 맴돌고 있었다.
"군산 장악과 호상봉쇄(湖上封鎖), 군산으로 향하는 군웅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무림맹 자체의 해산보다는 그 상징적인 방해가 주목적이 되겠지요."
"일리가 있어. 숫자는 얼마나 되지?"
"위지휘사가 통괄하는 군사는 오천육백. 그들이 정말로 관군을 동원하기라도 한다면, 적들의 숫자는 일만을 상회하게 될 것입니다."
"무인으로 계산하면."
"삼천에서 사천, 막대한 희생이 불가피합니다."
"사천....."
숫자를 되뇌인다.
그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밖에 안되나...."
들리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 조홍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것밖에 라니.....!'
삼, 사천 정도.
그것도 무인으로 환산했을 때의 숫자였다. 실제로는 만 명이 넘는 목숨이란 말이다.
그대로 싸움이 벌어지면 적어도 수천의 생명들이 부질없는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했나.
그것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 것을 가볍게 생각한다.
반선(反仙)의 경지. 어쩌면 이 남자는 명부에서 인세에 올라온 악선(惡仙)인지도 몰랐다.
"단심궤들은?"
"마찬가지로 이동들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 개나 살아남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확실하다 생각되는 것은?"
"두 개 또는 세 개 정도. 일단 팽가 하나는 확실히 돌파할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개방 쪽은 어떤가? 그쪽이 가장 중요한데."
"개방은... 불투명합니다. 고립무원인 상태로 몇 달을 버틴데다가, 지닌 바 무공도 대단한 편이 못되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후개라고 했는데... 용두방주의 무)武)를 다 잇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진짜 타구봉과 항룡장은 방주 위에 오를 때가 되어서야 전해지지. 후개의 타구봉법을 용두방주의 무공으로 보면 기본공에 불과해."
"그랬습니까."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에서 커 나가는 것이 개방 후개의 전통이다. 그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천품신개와 단심맹의 압력을 동시에 이겨내 왔다면 인정해 줄 만한 일이겠지. 용두방주가 아주 사람을 잘못 보진 않은 모양이야."
무공 이상의 힘.
장현걸의 재질을 말한다.
대 개방의 차기 방주라 하기엔 부족함을 보여주던 무공. 그러면서 장현걸은 조홍의 앞에서 스스럼없이 목숨을 구걸했었다.
돌아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지니지 못한 바를 알고, 그런 와중에서도 살길을 찾아낸다.
아무것도 없이 단심맹의 압력을 견뎌내고 있었다는 것. 분명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역량임에 틀림이 없었다.
"군산에 다른 조치는 취하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조홍이 문득 묻는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 남자. 그가 되물었다.
"...자네는 군산에 가본 적이 있나?"
"아쉽게도 미처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군산. 악양루에서도 볼 수 있는 군산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동정호, 은쟁반 위의 푸룬 조개라고도 하지. 거기에는 땅과 강을 만들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나누는 하늘의 섭리가 있다. 천 년이 지나도 그 절경(絶境)은 변하지 않아. 기껏 몇 천 명의 피가 흐른다 하여 다르게 바뀔만한 곳이 아니다."
"동정호 수군(水軍)이라도......"
"움직이지 않겠다. 더 이상 개입하고 싶지 않아. 차고 이지러짐이 반복되는 것에 천하의 이치가 있는 법이다. 혼돈의 해결은 이미 강호의 몫으로 넘어갔어. 섭리가 흐르는 대로, 유구한 무림의 힘이 자연스럽게 그 결과를 드러내 줄 것이다.
하늘의 이치를 보는 자.
그의 이름은 바로 진천이다.
전능자(全能者)에 도달해 가는 그의 두 눈에 세상의 환란은 대체 어디까지 보이는 것일까.
조홍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하늘이 조홍에게 매린 몫을 다할 뿐.
강호와 황실의 경계에서.
결코 끝나지 않을 많은 이야기들을 엮어내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