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쪽입니다."
타다닥!
찬바람 부는 갈대 숲 한가운데다.
사결제자 두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서둘러!"
사사삭!
후개 장현걸은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죽림을 눌러쓴 턱 밑으로 하얀 입김이 흩어진다. 왼손에는 칙칙한 철궤 하나, 단심궤가 들려 있었다.
갈대를 헤치고 나아간 그들 앞에 탁 트인 호수가 나타났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 동정호다. 풀숲에 가려진 안쪽으로 날렵하게 만들어진 소선(小船)이 감추어져 있었다.
"사공은?"
"제가 몰기로 하였습니다. 강서성, 포양호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잘되었군."
기다리고 있던 사결제자 중 하나다.
물길에 밝은 자, 뱃사공을 자처하고 나선다.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민초들보다 열 배는 듬직한 사공이었다.
타닥!
장현걸은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배에 오르며 남아있는 사결제자에게 말했다.
"악양에 들어서면 절대로 분타로 찾아가지 말아라! 소집에도 응하지 말고 몸을 숨겨. 천품신개, 풍 장로가 직접 올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촤아아악!
함께 탄 사결제자가 재빨리 노를 들어 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일에 사활이 걸렸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봉산, 무사해라. 부디.'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모른다.
연속되는 험로.
고봉산과도 호남지역에 접어들며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추격하는 자들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내린 고육지책이었다.
'군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험이다. 악양에 남아있어야 했는지도 몰라.'
동정호 전체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
군산에서 무림맹의 개맹식이 열린다고 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될지조차 미지수다.
계속되는 추격과 싸움만 아니었더라면 확실하게 정황을 분석해 보았을테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번 무림맹에서 터뜨려야 한다는 것만 아니었더라면 악양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는 편이 훨씬 더 안전했을 터였다.
'어쩔 수 없다. 이제는 끝장을 봐야 해."
순식간에 멀어지는 갈대밭이다.
군산은 가깝다. 조그만 더 가면 수면 저편으로 나타날 것이다.
기호지세.
그런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돌아가는 실제 상황.
머리 속에 느껴지는 예감.
모든 것이 결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을 따름이었다.
"후개, 저것 좀 보십시오!"
넓디넓은 호면을 향하여 한참을 갔을 때다.
귓전을 파고든 외침.
눌러쓴 죽림을 걷어 올리며 사결제자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맞추었다.
배였다.
그것도 한두 척이 아니다.
무림맹에 참가하기 위한 군웅들의 선박인가.
그렇지 않다. 무림맹의 군웅들이 대명제국 깃발을 올린 군선들을 타고 이동할 리가 없다. 장현걸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군함(軍艦)? 군함이 왜?"
장현걸이 안력을 돋우며 그 쪽을 살폈다.
시야 한편.
군함 사이로 움직이는 조그만 쾌속선이 비쳐들었다.
저것이다.
저런 배가 딱 강호의 무인들이 타고 있을 배다. 움직이고 있는 쾌속선들, 군산으로 행하는 무림인들의 배가 널려 있어야 옳다. 그것이야말로 동정호가 보여주어야 하는 마땅한 풍경이었다.
'한데 왜 군함들이.....!'
그때였다.
선회하는 군함 측면에서 불꽃이 터져 나온 것은.
콰아앙!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폭음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군함이 탑재하고 있는 화포의 발사음이었다. 검은색 포탄이 하늘을 나는 것은 순간. 군산으로 향하던 쾌속선 하나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엄청난 파편을 뿌렸다.
"공격을 해? 어째서!!"
장현걸을 크게 놀랐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군함의 실책이다. 대명제국의 군선이 무림맹의 선박을 공격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은 순식간에 드러났다.
움직이는 또 한 척의 쾌속선.
군함이 방향을 틀고 있다. 쾌속선을 노리는 선회다. 포격의 거리를 재고 있는 것이다.
콰쾅!
능숙하게 거리를 잡은 군함이다.
또 한 번의 불꽃이 터졌다.
용케도 빗나간 포탄에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으며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뱃머리를 틀어라. 벗어나야 돼!"
추풍낙엽처럼 흔들리는 쾌속선에서 차디찬 물속으로 뛰어드는 무림인들이 보였다.
겨울의 호수, 얼어 죽기 십상이다.
그래도 그 편이 낫다. 제아무리 내공을 익힌 무림인들이라 한들, 화탄의 폭발을 견뎌낼 수야 없다. 화포에 직격당하여 갈가리 찢겨 죽느니, 물속에 뛰어들어 살길을 도모하는 편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후개, 그것이... 어렵겠는데요."
노를 젓는 사결제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저 멀리 보이는 군함. 이쪽에 하나 더 있다.
두 군함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 마당이다. 군산 전경이 보이고 있었지만, 화포를 겨눈 두 척의 군함은 마치 이빨을 드러낸 범의 아가리와도 같았다.
'돌아가야.....!'
장현걸이 뒤쪽을 바라보았다.
갈대밭은 없다. 이미 너무 멀리 나왔다.
게다가 이쪽에서 군함들을 본 이상, 군함들 쪽에서도 이쪽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만일 추격해 오기라도 한다면, 사공 한 명이 노를 젓는 배로서는 군함의 속도를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결제자의 질문이었다.
장현걸의 눈에 순간적으로 복잡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돌파할 수 있겠나?"
"시도라면 얼마든지 해볼 수 있겠지요."
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한다.
어차피 맨손으로 와서 살아온 세상, 죽는다 해도 잃을 것은 없다. 그것이 거지들, 개방의 정신이다.
장현걸이 외쳤다.
"가보자!"
"알겠습니다."
사결제자의 팔이 힘차게 움직였다.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선체 앞으로 겨울 호수의 차가운 물이 방울져 튀어올랐다.
촤아아악!
"온다! 발견했어!"
"포신의 방향은 어떻습니까?"
"아직 안 맞는다! 오른쪽으로 틀어!"
사결제자가 배를 다루는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빠르게 방향을 바꾸어 앞으로 나아간다. 가까워지는 군함의 선체, 검게 빛나는 포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단한 위용이었다.
"옆으로 붙겠습니다. 화살을 막아주십시오!"
"알겠다!"
화포를 쏘려면 그만큼의 거리가 필요한 법이다.
그렇기에 군함의 지척으로 배를 몬다.
태양 빛을 가리는 군함의 그림자다. 무겁고도 위험한 어둠이 그들의 위로 내려앉았다.
쐐애액! 쐐애애액!
기다렸다는 듯 쏘아지는 화살이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척으로 붙은 배라면 그러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장현걸의 몸이 급박하게 움직였다. 빛살처럼 내도는 타구봉이 팔방으로 쏟아지는 화살비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서둘러라! 버티기 힘들어!"
장현걸의 외침이 좁은 선상을 울렸다.
아래로 내려 꽂히는 화살들은 무지막지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수상전을 위한 강궁이다. 타구봉은 목봉, 한 대라도 제대로 받았다가는 그대로 부러지고 말리라.
따당! 따다다당! 피피핑!
빠르게 노를 저어 군함의 선체를 스쳐간다.
장현걸의 움직임이 조금씩 흔들린다 싶었던 때다. 비로소 벗어난다. 그들이 타고 있는 소선이 마침내 군함의 선수 쪽으로 앞질러 나왔다. 산발적으로 쏘아오는 화살이 있었지만, 그것을 막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순간적인 기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좋아! 이제는 앞으로......!"
군산의 북면, 백사장이 지척이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엔 너무나 일렀다.
정면으로부터 하늘을 가르면 날아오는 검은 색 구체.
장현걸의 목소리가 멈춘다. 그의 눈이 크게 뜨여다.
'어디서......!'
포격을 받을 위치가 아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중요치 않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사결제자의 옷소매를 잡아채 던져 내고는 그 자신도 물속으로 몸을 날렸다.
우지끈, 콰아아앙!
두 사람의 몸이 물속으로 잠겨든 것과 화탄이 터진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터져 나간 수면이 빗물처럼 쏟아진다. 직경이 아님에도 산산 조각나는 소선이었다.
쏴아아아!
출렁이는 물에 파문이 잦아들 때다.
폭발한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 머리 하나가 불쑥 올라오며 물방울을 흩뿌렸다.
"푸하!!"
한겨울의 물속은 그야말로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옷으로 스며드는 한기(寒氣)는 그야말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장현걸의 눈 급박하게 주위를 훑어냈다.
'휩쓸렸나?'
사결제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매캐한 연기에 부서진 파편들만 가득할 뿐이다. 장현걸이 손을 휘저으며 물살을 갈랐다.
촤아악!
"후우웁!"
다행이다. 얼마 가지 않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포양호 출신이라더니, 역시 물에 대해 잘 아는 놈이었던 것 같다.
다만 문제인 것은 이 겨울 물의 차가움.
장현걸이야 고강한 내력으로 버텨볼 수 있다지만, 사결제자 놈의 안위는 장담하지 못한다. 장현걸이 외쳤다.
"섬까지 헤엄칠 수 있겠나?"
"무, 물론입니다."
물 위에서 보는 거리는 실제 거리와 다르다.
저 앞에 보인다고 하여 실제로 가깝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이 차가운 겨울 물속에서 헤엄쳐 건너기에는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물이 차다. 어렵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이래뵈도 물속에선 자신 있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후개!"
차가운 물뿐이라면 그만큼의 걱정도 안 할 것이다.
장현걸의 시선이 저 멀리 선회하고 있는 작은 전선(戰船)에 닿았다. 전선 측면에서는 엷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 배다.
그들에게 포격을 가한 전선이 틀림없었다. 군함이 아닌데도 함포를 탑재했다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그처럼 커다란 군함뿐 아니라 적선으로 보이는 배들이 꽤나 많다. 헤엄치는 와중에 화살이라도 쏟아진다면 여의치 않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뚫기 어려운 험로였다.
"반드시 살아와라. 목숨을 구걸해서라도 죽지 말아라!"
장현걸을 항상 하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목숨을 잃게 만들어서야 안 되는 일이다. 더 이상의 희생은 이제 사양이었다.
촤아아악!
장현걸이 앞쪽으로 물살을 헤쳐나갔다. 헤엄을 치기엔 오른손의 단심궤가 아무래도 불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손에서 놓을 수도 없는 일이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뼛속까지 침투하는 냉기(冷氣)를 견뎌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적선이 가까워짐에 따라 잠수를 시도하는 장현걸, 생사를 건 험로가 그의 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