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무림서] 화산질풍검 제 25장 군산(君山)
....중략....
그때 열렸던 무림맹은 강호인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한겨울.
중원무림의 거두들이 주최한 회합이 그렇게 변하게 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직접 그러한 혈사를 획책한 무리들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설마하니 무림맹에 그런 식으로 도전할 놈들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지."
명숙들의 반응은 그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 보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철기맹 탁무양의 일도 있었는데 그 정도 불상사는 예상했어야 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무림맹이 지나치게 안이했을 뿐이야."
군산대혈전.
결과적으로 강호 전체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림이 흔들리고 관가가 흔들리고 민초들의 삶이 흔들렸다.
무림맹으로 유지되던 평화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으니, 온 천하 무림 방파들이 들끓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철기맹과 성혈교의 발호가 강호 난세를 열었다면, 군산대혈전은 중원 대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강호 겁난을 피부로 각인시킨 사건이라 보면 된다. 팔황이란 이름이 전면으로 나서게 되는 때, 격변기다. 그 격변기의 한가운데, 그들이 있었으니.....중략....
한백무림서.
한백의 일기 中에서.
군산.
악양의 동정호 변에 서면 군산이 보인다.
넓은 호면 위에 푸르른 군산은 한 폭의 그림이라, 수많은 시인호객들의 이야기가 그곳에 있고 풍류가인들의 꿈이 그곳에 있다.
그런 군산이다.
하지만 오늘의 군산을 달랐다.
악양에서도 훤히 볼 수 있는 불길, 군산 전체가 불길과 검은 연기로 덮여 있었다.
전장의 겁화였다.
동정호에 떠 있는 수많은 배들이 화를 피하기 위해 선착장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군산으로 향하는 무림맹의 선박들이 관군들에게 무차별 포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군산 내부의 상황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섬 안에서도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관군이라니! 관군이 어찌하여 무림맹을 공격한단 말인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변괴는 군산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이나 군산으로 오고 있는 문파들이 각 성의 길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에게 파상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보고 입니다!"
"무엇이!"
"무당과 화산이 늦어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악양 전체가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사태 파악과 대책 마련을 위하여 뛰어다니는 무림인 들의 수만도 엄청났다.
각파들은 서로 간에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비상 전시체제로 들어가고 있었고, 실제로 신속하게 고수들을 소집하여 싸움 준비를 하는 문파들도 있었다.
"지금 군산에 들어간 문파가 어디 어디인가?"
"가장 먼저 군산에 도착한 것은 아마도 종남파였을 겁니다. 우리가 그 다음이었고, 점창이 세번째였을 겁니다."
"육대세가는 안 왔나?"
"하북팽가가 오늘 아침 북진을 거쳐 군산으로 출발하였다 했었는데,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마도 군산에 도착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네 곳인가. 그러면?"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개개인으로 움직인 것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거야 당연한 일이겠지. 그렇다면 이곳은 어떤가?"
"악양 말씀이십니까?"
"그래. 악양에 도착한 문파들은?"
"지금은 모용세가가 도착해 있습니다. 그것도 세가주께서 직접 오셨답니다."
"천수사 모용도가 직접?"
"예."
"그거 다행이다. 희소식이다. 희소식이야."
"남창의 남궁세가도 어젯밤 강서를 넘었다 했으니, 달리 발목이 잡히지 않는다면 조만간 당도할 것으로 보입니다."
"남궁세가, 남궁세가에서는 구가 온다 하였지?"
"남궁가의 소가주가 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남궁가의 소가주라면... 못 미더운 자가 아니었던가?"
"최근 들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동안 알려졌던 세간의 평과는 조금 다른 모양입니다. 그밖에 곤륜과 해남파에서도 와 있기는 하지만, 두 곳 다 워낙 거리가 먼 곳인 만큼, 몇 명만 보내왔다 하더군요. 곤륜에서는 고작 세 명, 해남에서는 다섯 명밖에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얼마나 전력이 될 지는 미지수라 할 수 있습니다."
"황보세가는 아직 안 왔고?"
"황보세가는 지척에 있는 만큼 기대할 만했는데, 오히려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서인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개맹식에 맞춰서 도착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허! 도대체가 어찌 된 일인고! 당장 힘을 빌릴 곳이 그렇게도 없단 말인가!"
"전력이 될 만한 문파가 한곳 더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 그곳이 어디인가?"
"개방, 개방입니다. 오일 전부터 수백에 달하는 개방 정예들이 악양 북문에 머무르고 있다 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이끄는 이는 개방의 인의대협이신 천품신개 풍대해 장로시랍니다."
"천품신개!"
"예. 다른 곳도 아닌 개방이니까 눈과 귀는 확보되었다 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천하제일세가인 구양세가에서도 무인들이 출발했다고 하니 아주 비관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도다. 등운, 너는 서둘러 풍대해 장로와 연락을 취하여 정황을 정확히 알아보아라. 등양이는 모용세가에 가서 협조를 요청하고, 알았느냐? 나머지는 선박을 구하고, 무인들을 모아라. 군산으로 향할 방법을 모색해야지. 삼청이 군산에 갔다지만 예감이 무척이나 안 좋아. 제자들이 걱정이다."
청성파의 노도(老道), 태안 진인이었다.
태안 진인의 노안에는 그 주름살만큼이나 근심이 가득했다. 다급히 발하는 명령에 도열해 있던 도사들이 신속하게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 * *
촤아아악!
눈 내린 숲, 미끄러운 발밑이다. 앙상한 가지가 뺨을 스치고 지나가니, 불에 덴 듯 따끔한 느낌이 남았다. 관목 숲을 헤쳐 나가는 급한 발길에 숨까지 가빠오고 있었다.
"후욱.... 후욱.....!"
연신 뒤를 돌아보는 장현걸이다. 그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장현걸은 내가고수(內家高手)였다.
그만한 고수가 호흡까지 흐트러지는 것은 대단히 드문 경우였다. 또한 그것은 그만큼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
쐐액! 쐐애애액!
가로막던 나무들이 적어지고 시야가 조금 더 트인다고 생각했을 때다. 뒤쪽으로부터 날카로운 파공성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날아오는 화살이었다.
'또냐?'
불평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급하게 박찬 땅바닥에서 하얀 눈과 검은 흙이 한꺼번에 튀어 올랐다. 장현걸의 신형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빨려들 듯 숨어들었다. 날아온 화살들이 나무 줄기에 박히며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퍼버버벅! 우직! 우지직!
'강궁(强弓)!. 이것도 마찬가지다. 무림인의 화살이 아니야!'
아까부터 느껴왔던 바다.
중원 전체를 봐도 궁술(弓術)을 연마하는 무인들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쏘아오는 화살들도 무림인들이 쓰는 화살과는 분명히 다른 데가 있었다.
일제히 내쏘는 간격이 문파의 기술이라기보다는 군율(軍律)의 제사(齊射)에 가깝다. 궁병(弓兵)의 화살이란 소리였다. 대명 군사의 강궁(强弓)이다. 틀림없었다.
퍼벅! 파악! 쏴아아아!
여러발의 화살이 한꺼번에 날아와 커다란 나무를 흔들었다.
가지 위에 쌓여있던 눈이 흩날리며 커다란 운무(雲霧)를 만들었다. 장현걸의 신형이 그 운무를 헤집으며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추격하는 대형이 너무도 촘촘해. 이 정도라면 단순히 쫓아오는 수준이 아니다. 곳곳에 미리 배치된 매복의 숫자가 엄청나다. 게다가 무림방파와는 다른 방식이다. 수상의 군함들과 같아. 군(軍). 관군이 틀림없다.'
사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수상의 군함들은 역시 착오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계획했고, 제대로 병력을 투입했다.
장현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황진동, 그 늙은이.... 장부에서 본 이름 중에는 호광성의 도지휘첨사도 있었다. 단심맹의 수작에서 놀아나는 것 같더니, 그냥 놀아나는 정도가 아니었어.'
강서성 성도에서 얻었던 정보들이 이곳까지 이어지고 있다.
군함을 보았을 때 눈치챘어야 되었다. 장현걸의 눈이 순간적으로 단심궤를 스쳤다.
'호광성 도지휘첨사, 단심맹이 조종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단심맹의 일원이었을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아귀가 맞아.'
장현걸의 추측력은 분명 뛰어난 데가 있었다.
함부로 군력(軍力)을 발동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반(謨叛)이다.
모든 것을 뒤집어엎자는 의도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그리고 그렇게 모반을 꽤할 정도로 미친 짓이라면 역시나 단심맹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도지휘첨사라면 한번에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위지휘사 둘이나 셋이다. 위지휘사에 직책에 소속된 병력이 오천육백이니... 제기랄, 일만(一萬) 단위가 나오는군!'
일만,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의 숫자였다.
크지도 않은 섬에 일만 군대.
군산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숫자일 뿐 아니라, 동정호에서 군산으로 들어오는 선박들까지 모조리 통제할 수 있는 규모다. 섬 전체를 철통같이 틀어막을 수 있는 병력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곧 무림맹으로 소집된 무림인들 전체가 위협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악양에서 기다렸어야 되는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쐐애액! 쐐액!
다시 한번 파공성이 들려왔다. 장현걸이 나무를 박차고 절묘하게 몸을 틀었다,
땅! 따아앙!
미처 피해내지 못한 화살이 두발 있었다. 그것들을 가로막은 것은 오른손에 들린 칙칙한 철궤였다. 붉은 주사. 단심(丹心)의 두 글자가 그 철궤에 새겨있었다. 단심궤였다. 단심궤에 부딪친 철시(鐵矢)들이 강렬한 금속성을 터뜨리며 튕겨 나갔다.
'생각 좀 하자. 제발!'
턱! 촤아아악!
장현걸의 발이 눈 덮인 땅 위를 긁었다.
돌아서며 사방을 훑었다. 그물처럼 좁혀오는 포위망, 이제는 싸움 없이 돌파할 수 없었다. 장현걸이 품속에서 반 쪽짜리 타구봉을 꺼내 들었다.
'개맹식은 이틀 후야. 무림인들은 알고 있을까. 이곳이 관군들, 아니 단심맹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관군들이다?
이들은 이미 관군들이 아니다. 어떤 군사들도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림인들을 상대하도록 훈련받은 티가 역력했다.
'그저 단심맹의 무리일 뿐, 역모의 무리라고밖에 할 수 없으니....!'
파박! 파아악!
화살 몇 대가 더 날아와 땅에 박혔다.
달려나가다가 다시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운신이 불편했다.
군산에 상륙하고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옷을 말릴 여유? 그런 것은 사치였다.
젖어버린 옷에 겨울바람을 맞고 있으니, 측량키 어려운 고역이었다. 항룡진결, 뛰어난 내력으로도 견디기 어렵다. 움직이는 몸짓 하나하나가 고통이다. 체력이 계속하여 고갈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아.... 하아.....!"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끊기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아름드리 나무 하나를 등지고는 숨을 골랐다. 그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 좁은 섬 안에서 이 상태로 이틀 밤낮을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섬 지형 대부분이 구릉이라 숨을 곳도 마땅치 않아. 다른 무인들과 합류해야만 한다.'
군산에 들어온 무인들은 많다. 경황 중에 동정호를 건너오면서도 무림인들을 실은 배를 몇 척이나 보았던 장현걸이다. 그들이 군산말고 달리 가는 곳이 있지도 않을 터, 분명 이 섬 어딘가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군산에 왔다면 그들이 있을 곳은 단 한 곳으로 정해져 있었다.
'상비사(湘妃祠)밖에 없다.'
무림맹의 개맹식이 열리기로 했던 곳이 바로 상비사다. 소상반죽의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만리동정의 명지. 무인들이 그곳으로 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상비사로 가야 해.'
지금으로서는 그곳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뒷길은 막힌 지 오래다.
용케 선착장에 도착한다 해도 타고 나갈 배가 있을 리 만무했다. 비관적이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상비사란 곳이 무림맹의 개맹식 장소라는 사실이다.
무림맹은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를 주축으로 한 맹회인 바, 그런 곳에 오는 무인들은 하나같이 문파를 대표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단심맹이 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해도 능히 방어할 수 있는 고수들이란 이야기였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르며 내력을 도인했다. 입에서 만이 아니라 이제는 온몸에서 하얀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군산은 작아. 신법을 최대로 펼치면 상비사까지 일다경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비관적으로만 보아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마음부터 가다듬어야 살 수 있다. 일단은 눈앞에 있는 관군들의 벽을 돌파한다. 그 다음은 그 이후로 생각하기로 했다.
'가자!'
장현걸이 아름드리 나무 뒤에서 뛰쳐나왔다.
땅을 박차고 달리는데, 그 속도가 전에 없이 대단했다. 적들의 반응도 빨랐다. 기다렸다는 듯 화살비가 날아들었다.
'맞아줄쏘냐!'
만리추풍의 개방비전이었다.
취팔선의 묘리를 구사하며 화살들을 피해냈다. 피하지 못할 것 같은 화살들은 타구봉과 단심궤를 휘두르며 쳐냈다.
비산하는 화살들 사이로 반대푠 과목 숲이 가까워 왔다. 추위를 막기 위한 털옷과 얇은 갑주들을 착용한 관병들의 모습들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비켜라!"
화살 두발이 장현걸의 어깨와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엷게 번지는 핏물.
날카로운 고통들은 얼어붙은 몸에 차라리 활력이라 할 수 있다.
그대로 돌진하는 장현걸이다. 그의 몸이 관병들 사이로 깊게 파고들었다.
퍼어억!
타구봉에 얻어맞은 관병 하나가 땅을 굴렀다. 묵직한 위력이었다. 지체없이 몸을 휘돌리며 비서각 일초를 펼쳐냈다.
빠악!
발끝에 걸리는 느낌이 둔중했다. 머리를 가격당한 관병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이놈들은....!'
단숨에 두 명을 쓰런뜨린 장현걸이다.
기세를 올려서 한꺼번에 제압하려고 했지만 적들의 반응이 예상밖이다. 그의 눈이 기광을 띠었다.
'동요하지 않는다! 군인들이되 군인들이 아냐!'
두 사람이 쓰러졌는데도 별반 당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두 명 잃는 것쯤이야 별것이 아니다. 그런 느낌이었다.
'설상가상이로군!'
조금이라도 당황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침착하게 활을 거두어들이며 자세를 가다듬는 적들이다.
접근전이었다. 적들이 일제히 도갑을 치켜들며 장비하고 있던 군용박도(軍用朴刀)를 빼 들었다.
'무인, 관병이 아니라 무인들이다!'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무인으로서 키워진 자들이었다.
복식과 군율의 관군의 그것이되, 싸움에 직면한 모습은 강호인의 그것이었다
게다가 적들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관병들 뒤편으로부터 흑의를 입은 진짜 단심맹 무인들도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다. 사면초가, 첩첩산중이란 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 덤벼보아라!"
채챙! 파바바바박!
장현걸이 기세 좋게 외쳤지만, 정작 적들에게서는 기합성도, 경고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데 그 사나움이 대답했다.
일제 돌격.
무공 수준은 어떨지 몰라도 함부로 받아내기 쉽지 않은 돌진이다. 이미 지쳐버린 장현걸임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퍼억! 빠아악!
장현걸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며 선봉으로 달려오는 관병들을 쳐냈다.
타구봉과 각법을 적절히 조화시켜 싸우는데, 일격 일격에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채앵! 철컥!
쓰러뜨린 자가 열명에 이르렀을 때다.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날아오는 박도들의 숫자가 많아지는데 도통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타구봉으로는 모자라 단심궤까지 휘두르며 적의 공격을 막아보았지만 역부족이다. 장현걸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길! 버텨낼 수 없겠어!'
궁병들이 마음놓고 장현걸을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들은 관군의 궁병들이되, 근접전에도 충분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인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중간중간에 제대로 무공을 익힌 단심맹 무인들까지 섞여있으니 장현걸 혼자서는 돌파해 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피해야......'
장현걸은 부딪침 대신에 회피를 택했다.
몸 상태만 정상이었어도 어떻게든 해보겠으나, 지금 그에겐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개방 후개라면 그 이름값만으로도 일당백의 고수를 뜻하는 법이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도 안 좋았다.
"큭!"
나무들을 박차고 몸을 띄워보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박도가 그의 발목을 스쳤다.
자칫하면 한쪽 발이 통째로 날아갈 뻔한 일격이다. 얼어붙은 옷,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들었다.
터억! 촤아악!
두꺼운 나무둥지를 뛰어넘어 땅에 착지했다.
쭈욱 미끄러지는 발에서 다시 한번 오싹함을 느꼈다
'제기랄! 땅이......!'
이것도 문제였다.
나뭇가지와 땅바닥에 쌓여있는 미끄러운 눈도 도주를 방해하는 데 큰 요소가 되고 있었다. 위태위태하게 몸을 날려 측면으로 빠져나왔다. 어렵사리 확보한 거리다. 관병들과 단심맹 무인들이 그를 쫓아 방향을 꺾어왔다.
피잉! 피이잉!
몇 발짝 나가지 않았을 때다.
벌써부터 들려오는 화살의 파공음에 장현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왜 이렇게 빠른 것이냐!'
재빨리 몸을 숙이며 돌아보았다,
관병들 중 삼분지 일이 어느새 대형을 갖추고 화살을 쏘아온다.
엄청난 공격 전환이다. 상상을 초월한 조직력이었다.
'위험하다! 이것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걱정이 물밀듯 밀려온다.
상비사에 모여 있을 구파의 무인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지만 이렇게 뛰어난 전투력이라면 구파와 육가의 무인들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적들의 힘을 보아 하건대 상비사도 위험에 처해 있을 가능성이 노후할 듯했다.
파파파팍!
장현걸이 발끝에 힘을 더했다. 그러나 생각뿐이다. 속도가 제대로 나질 않았다.
너무나 맣은 체력을 소모했던 까닭이다. 군산까지 헤엄쳐 온것, 몸을 말릴 새도 없이 이어진 싸움, 진기(眞氣)만으로 보충하기엔 체력소모가 터무니없이 컸다.
쒸익! 쒜에엑!
결국은 따라잡힌다.
등 뒤로 휘둘러지는 협도(狹刀) 한자루가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장현걸이 뛰어가던 기세 그대로 몸을 돌리며 단심궤를 휘둘렀다.
따아앙!
도신을 쳐내면서 다시 몸을 돌렸다.
임기웅변이었다. 경험으로 부지하는 목숨, 절묘한 몸놀림이었다.
그의 눈에 하얀 눈밭 저 앞으로 높게 늘어선 대나무 숲이 비쳐들었다.
장현걸의 눈이 가늘어졌다.
'숲... 매복이 있을 텐데.'
이곳이라고 적이 없을까.
그럴 리 없다.
불행하게도, 그리고 예상했던 그대로.
앞쪽의 대나무 숲 사이로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저것들은.... 설마.....!'
적들이 있다는 것쯤이야 대단할 것도 없다. 하지만 장현걸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나무 숲 사이로 뛰쳐나오는 적들 때문이었다.
히끗히끗한 얼굴들, 그냥 적들이 아니었다. 꼭두각시 하얀 가면, 암행중랑장 조홍과의 만남때 합비에서 보았던 신마맹 백면뢰들이다.
'단심맹 하나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
군산을 장악한 것은 단심맹만의 힘이 아니다.
신마맹도 왔다. 그것은 그만큼의 위험이 가중되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큰일이다! 죽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겠어!'
더욱더 다급한 마음이 된 장현걸이다.
뛰쳐드는 신마맹 백면뢰들을 피해 방향을 꺾었다. 대나무 숲을 스쳐가는 그의 옆으로 쏘아지는 화살들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위태위태한 도주였다.
한순간 멈추면서 붙은 무인을 떨쳐 내고, 또다시 뛰기를 몇 차례.
도주하는 자나 추격하는 자들이나 끈질기기는 매한가지다.
휘이익!
마침내 언덕 하나를 더 넘었다.
저 멀리 상비사 터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주변.
싸움이다.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격전의 현장들이 그의 눈앞에 비쳐들었다.
'역시.....'
상대는 물론 관병들을 비롯한 단심맹 무인들이다.
백면뢰 괴인들도 간간히 섞여 있었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낮게 펼쳐진 구릉지 전역에서 수백을 헤아리는 무인들이 살벌하기 그지없는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장현걸은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재빨리 전황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권의 동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격전이다.
푸른색 도포.
도복을 입은 도사들이 밀집 대형을 이룬 채 적진을 돌파하는 중이었다.
'청성, 청성파구나!'
대번에 알아보았다.
청운검법은 그 발검과 탄법에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청성파 도인들.
도사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작은 체구의 노도사였는데,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청성파의 오선인 중 하나라는 삼청 진인 같았다. 고작 오십 명도 안 되는 숫자로 까마득히 몰려드는 단심맹 군사들을 용케 물리치고 있었다.
'중앙은 종남이다. 저쪽은 점창인가!'
중앙에는 종남이 있었다.
종남의 수는 청성파보다 많았다. 칠십은 족히 되어 보였다.
종남파.
벽뢰신수 곽전각의 이름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고수는 없는 듯하다.
도리어 숫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포위당한 상태가 워낙 나빴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점창은....'
어느 쪽이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점창은 조금 나은 편이었다.
실전에 능한 이들이라서 그렇다.
본래 점창의 무공은 실전적이기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사일검과 관일창이 쏘아질 때마다 엄청난 양의 핏물이 치솟고 있었다. 삼십여 점창 무인, 대나무 숲을 경계로 펼쳐지는 공방전은 그 어떤 싸움보다 살벌하기만 했다.
'삼파.... 소림과 무당은 없구나!'
구파의 세 개 문파가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무너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만큼 다른 문파의 출현이 절실하다.
소림과 무당은 무림틔 태산북두, 그들이 온다면 활로가 열릴 가능성이 충분한 상황이었다. 장현걸의 눈이 자연스레 섬 바깥쪽, 멀리 보이는 동정호 호변을 훑었다.
'제기랄, 역시.....'
행여나 오고 있을까.
오고 있더라도 쉽지 않다.
소림과 무당 대신 그의 눈에 비쳐 든 것은 수상의 격전뿐이었던 것이다.
장현걸 자신이 겪었던 것처럼, 군산 저편의 수상(水上)은 전장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도리어 그가 건너올 때보다 열 배는 악화된 전황이다.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전경.
군함들이 돌진하고 쾌속선이 선회한다.
연기를 피워 올리며 가라앉는 배들도 한두 척이 아니다.
배가 들어오는 선착장은 이 싸움터와 다를 바가 없었고, 주변의 백사장 역시 핏물로 얼룩지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였다.
".......!!"
달리면서 수상을 훑어가던 장현걸의 눈이 섬 한쪽에 닿았다.
선 한쪽에 다가드는 배들. 그의 눈이 번쩍이는 빛을 발했다.
'상륙 중이다! 어느 문파냐!'
험한 수전을 돌파하고 섬에 이른 배들이다.
같은 모양의 쾌속선 몇 척.
잘 보이질 않는다. 거리가 멀 뿐 아니라 달리고 있기에 흔들리는 시야다. 안력을 돋우어보았지만 역시나 어렵다. 배에서 내리고 있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만 보였다.
'도(刀), 도인가!'
파팍!
잠시, 아주 잠시 동안 멈추어 섰다.
아무리 작게 보인대도 한 가지는 분간이 가능했다.
도(刀)였다. 배에서 내리는 그들 모두가 허리춤에 한 자루 도를 매달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다.
그의 머리 속에 육가의 일익을 담당하는 하나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팽가다. 하북팽가!'
하북팽가가 도법으로 유명하다고 하여 육전(陸戰)에만 강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수전과 산전, 어느 지형에서도 강인한 힘을 보이기로 유명한 곳이 하북팽가다.
비록 예전만큼 세가 강하지는 않다고 하지만, 팽가가 하북성 오대 수계 중 하나인 대청하(大靑河) 수로에서 가지는 힘은 그야말로 막강하다 알려져 있었다.
그런 팽가이기에 여기까지 뚫고 올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
소림과 무당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문파들이 오고 있더라도 결국엔 수상의 군선들을 뚫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이 필요했다. 섬 전체, 아니 동정호 전체가 거대한 전장으로 변해 있다는 말이었다.
쐐액! 쐐애액!
'제길!!'
잠시 정신을 팔았을 뿐이지만, 적들의 접근을 허용하기에는 충분했다.
화살 한 대가 그의 등을 스쳐 가며 차가운 아픔을 선사했다.
전황을 확인하려다가 목숨까지 날리겠다. 다시 한번 욕지기를 내뱉으며 황급히 몸을 굴렸다.
'구파의 안위가 문제가 아니야! 내가 먼저 죽겠어!'
지척까지 따라붙은 적들만도 수십을 헤아린다.
장현걸이 단심궤를 지니고 있는 한 적들도 집요함을 보일 수밖에 없다. 아니, 단심궤를 알아보아서라기보다는 죽을 때까지 따라붙을 뿐이다. 그냥 따돌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이대로는 도망치지 못한다. 어느 쪽에든 붙어야......'
언덕을 뛰어 넘으며 몸을 날렸다,
청성, 종남, 점창.
셋 다 기라성 같은 문파들이라지만 어느 곳도 안심할 수는 없다.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다. 단심맹과 신마맹의 준비가 지나치게 철저했기 때문이다.
막 당도한 하북팽가는 어떨까.
그 쪽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여기서 그들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것만도 문제일뿐더러, 전성기가 지난 현재의 팽가는 육대세가중에서도 말석을 차지하는 곳이라 평가 받고 있다. 냉정히 판단컨대, 팽가보다는 청성이나 점창이 믿을만하다.
무림맹 전체를 박살내려는 단심맹과 신마맹.
장현걸의 머리에 넷 중 한 문파의 이름이 새겨졌다.
'삼청 진인.... 결국은 청성 밖에 없어.'
결정이 이루어 진 것은 순간이었다.
삼아남을 확률이라 한다면, 뛰어난 고수가 있는 쪽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장현걸의 진로가 동쪽으로 꺾였다.
그러나 장현걸은 다음 순간, 절로 신형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축을 뒤흔드는 폭음 때문이었다. 폭음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청성파의 밀집 대형 한가운데에서 불기둥이 솟고 있었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육편들이 검은 연기에 섞여 험악한 광경을 만들었다.
'화, 화탄(火彈)!'
생각이 짧았다.
물에 빠진 것이 어째서였던가.
동정호 뱃길에서 겪었으면서도 예상하지 못했다니, 한탄스러울 지경이다.
그 위력이야 수상이나 육지에서나 다를 바가 없는 법.
제아무리 뛰어난 무인들이라도 밀집 지역에서 화포의 공격을 받으면 견뎌낼 재간이 없다. 청성파 도인들이라고 예외가 있을 진가. 십 수 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흩어지고 말았다.
'제 편까지 죽이는군! 이들은 미쳤어!!'
화탄이 지척에서 터지고 있는데 단심맹 무인들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다.
폭발에 말려드는 무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관군이 동원되고 군함들이 나왔을 때, 이미 이야기는 끝났던 것.
처음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놈들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되면 소림과 무당이 와도 장담 못한다. 전멸을 면치 못해!'
방법이 없었다.
앞쪽은 화탄이 터지는 지옥이고, 뒤쪽에는 그를 잡아죽이려는 적들이 가득하다.
'그래도 쉽게 죽어줄 수는 없지.'
순순히 목숨을 내주기엔 지금까지 해왔던 싸움이 아깝다.
돌아갈 수 없는 길.
지옥일지언정 싸움터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법을 펼치는 그의 얼굴에 강한 결의가 묻어났다.
'일단은 화탄을 봉쇄한다! 나중에라도 살길을 찾으려면 그 수밖에 없어.'
무림인들의 생명을 하나라도 더 구하려면 화탄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림인들의 생명을 구한다? 어설픈 영웅심의 발로가 아니다. 그 자신도 살길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콰콰쾅!
또 한 번 터지는 소리.
군산의 대지를 뒤흔드는 폭음이다.
장현걸이 땅을 박찼다. 적을 등 뒤에 매단 채, 그의 신형이 전장을 향하여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