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악양의 상황은 극에 이른 혼란 그 자체였다.
마치 전쟁이 난 것 같다.
보이는 것은 오직 무인들 뿐이요, 백주의 거리에서 신법을 전개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연선하도 다를 것은 없었다.
곧바로 악양의 화산 지부로 달려들어 가 서천각을 찾았다.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전황부터 물었다.
"어떻게 되고 있지?"
"연 사저 아니십니까? 화산도 도착한 겁니까?"
"아니, 화산은 오지 않았다. 지금은 둘뿐이야. 급하다. 다른 말을 할 상황이 아니니 돌아가는 상황부터 말해라."
"아, 알겠습니다. 일단 악양의 상황부터 말씀드리자면, 이곳으로 오고 있는 여러 문파들이 파상적인 습격을 받고 있다 하였습니다. 적들의 숫자와 규모가 워낙 다양하여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만, 현재는 몇몇 원로 명숙들 사이에서 신마맹이라는 이름이 조심스레 거론되고 있다 합니다."
"신마맹!! 그랬군, 확실히 그런 이름이었어!"
하얀 가면을 쓴 괴인들.
어디서 보았나 했더니, 수십 년 전에 쓰여진 서천각 문서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연선하가 두 눈을 빛내며 서천각 제자를 재촉했다.
"군산은? 군산이 먼저야. 군산의 상황은 어때?"
"보시는 대로입니다. 동정호 뱃길이 온통 막혀 버렸고, 지금은 격한 수상전이 펼쳐지고 있는 중입니다. 관가의 수군들이 갑작스레 무림인들의 선박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어쩔 수없이 반격하는 이들이 나와 버렸고, 그것이 여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였지?"
"오늘 새벽부터입니다. 왜 수군들이 무림인들을 공격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개방에서도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 합니다."
"개방? 개방이 와 있나?"
"예. 천품신개 풍대해 장로께서 사결 이상 개방 정예들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혼란에 빠진 무림인들을 수습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힘을 쓰고 계십니다."
"강호인들을 수습하고 있다고? 풍대해가?"
"예? 풍, 풍 장로께서......."
"아니, 아니야. 말이 잘못 나왔어. 군산 내부는? 군산 내부의 상황은 어떻지? 아직 알 수 없나?"
연선하의 얼굴은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변해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며 다급하게 묻는 모습이 무척이나 생소하다. 서천각 제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예에. 군산 내부의 상황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대로라면, 군산에서도 격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아직 윤곽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군산 내부에 들어가 있는 문파들은?"
쉴 새 없이 퍼붓는 질문이었다.
서천각 제자가 탁자 위에 놓인 문서들을 내려보며 하나하나 문파들의 이름을 열거했다.
"구파로는 청성파, 점창파, 종남파가 있습니다. 청성은 삼청진인께서 이끌고 계신다 하였는데, 점창과 종남은 누가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악양을 거치지 않고 바로 군산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육대세가 중에서는 오늘 아침, 하북팽가가 군산으로 출발했었는데 악양으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당도했거나 아니면......."
"침몰했겠지. 그러면 지금 수상에서 싸우고 있는 문파들은 어떤 문파인가?"
"어디 어디가 나가 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개별적으로 출발한 무인들도 많고, 구파 이외의 무인들도 상당수 있기 때문에 싸움의 흐름이나 피해 상황을 산출하기가 힘이 듭니다."
"적들도 어떤 자들인지 잘 모르겠군. 군부의 군함만 있는 것이 아니겠어."
"예. 그럴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악양에는 어떤 문파들이 와 있지?"
"먼저.... 아까 말씀 드린 개방이 있습니다. 지금 서천각도 개방과의 연계를 통해 움직이고 있지요."
"개방과의 연계? 누굴 통해서?"
"이삼(李三)이라고 풍장로께서 보내주신 인물입니다."
"지금 안에 있나?"
"아니요. 방금 전 북문에 있는 개방지부로 돌아가셨는데요. 만나보시겠다면 언제든 불러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만나지 않겠어. 지금 여기 서천각은 누가 맡고 있지? 동한 사제인가?"
"예. 맞습니다."
"지금 있어?"
"아니요, 전황을 알아보시느라....."
"사제가 오면 전해줘. 한 자도 틀리지 말고 그대로.:
'어떤 말씀을......?"
"개방과의 연계를 끊어. 절대로 그들을 믿지 마. 분명히 이야기해."
"예? 개, 개방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개방과의 연계를 끊어. 그들이 주는 정보는 십중팔구 가짜야. 절대로 믿으면 안 돼. 알겠어?"
연선하의 목소리는 강경했다.
아연실색한 서천각 제자다. 개방을 믿지 말라니.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는 청풍까지도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화산 매화검수로서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될 거야. 그 말도 전해."
"알겠습니다. 연 사저."
"다시 묻겠어. 개방 말고는 또 어디가 있지?"
"개방 외에 바로 한 시진 저네 도착한 아미파가 있습니다. 만불신니께서 아미복호승들을 대동하고 오셨다 합니다."
"만불신니. 만불정의 그 만불신니?"
"예. 그분 맞습니다."
연선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청풍을 돌아보았다.
바로 악양에 들어오기 전, 아미파의 흔적을 확인했던 두 사람이다.
그곳에 남아 있던 제마곤들.
희생당한 아미파 승려들의 유품이다.
만불신니 정도의 고수다 있었으면서도 아미복호승들이 몇 명이나 죽음을 당했다면, 적습의 강도도 보통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연선하가 고개를 저으면 되물었다.
"그 밖에는?"
"구파로는 해남파 몇 명, 곤륜파 몇 명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다야? 소림과 무당은 오지 않았어?"
"감감무소식입니다. 아무래도 이곳에 오는 동안 적습에 막혀버린 것 같습니다."
연선하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소림과 무당을 막는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미파의 상황을 생각하자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겪었던 사건이나 전투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 봐야 했다.
"육대세가는?"
"개방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전력이 육대세가 쪽에 있습니다. 모용세가 모용가주께서 직접 와 계시지요."
"모용가주?"
찌푸러진 얼굴에 한줄기 밝은 빛이 깃든다. 모용가주, 천수사의 이름은 지금까지 거론된 고수들 중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육대세가는 없고? 황보세가는 지척이잖아. 아직 안 온 건가?"
"예. 너무 가까워 도리어 천천히 출발하려 했던 모양입니다. 남궁세가가 거의 다 왔다고 한 것이 한참 지났는데, 아직까지 정작 도착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모용세가밖에 믿을 곳이 없다는 말이로군."
전력이 지나치게 부족했다.
이름값으로만 치자면 모두가 천하를 넘볼 만한 문파들이다.
그러나 전투는 이름값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인의 숫자.
고수들의 숫자.
너무도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군산도 악양도, 이래서는 위험할 따름이었다.
"마지막 질문이야. 지금 현재 군산으로 갈 수 있는 배는 없어?"
"구, 군산으로 말입니까?"
"그래."
"지금으로서는 아미에서 군산 행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있지만?"
"갈 수 있는 배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선(戰船)으로 쓸 만한 배들은 이미 전부 다 동정호로 나가 버렸기 때문이죠. 뱃사공도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아무도 가려고를 안 하겠지요. 그나마 용기 있는 뱃사공들이 있기는 했는데, 바로 반 시진 전 청성파를 따라 군산으로 출발해 버렸습니다.
"청성? 청성은 먼저부터 군산에 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것이 사실 청성파는 본래 처음부터 악양은 거친 후 군산으로 출발했습니다만, 출발 당시 둘로 나뉘어 일부가 악양에 남아 있었습니다. 군산 쪽은 삼청진인께서, 악양쪽은 태안진인께서 이끌고 계셨지요. 하지만 이렇게 된 만큼 군산쪽의 안위가 걱정된 나머지, 이곳에 계시던 태안진인께서 남아 있던 제자들과 몇몇 무림인들을 규합하여 군산으로 떠나시게 된 겁니다."
"무모하군. 그 정도로는 어려울 텐데."
"모용세가 측에서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청성파로서도 마음이 급했을 테니까요. 더욱이 개방 측에서도 한시 빨리 군산에 고수들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함에 따라...."
"그랬나. 개방...... 역시 풍대해야."
연선하가 이를 갈 듯 말했다.
무림인들을 군산으로 내모는 풍대해.
그 의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무림맹 고수들을 군산에 고립시킨 후 한꺼번에 죽여 버리려는 것이다. 군산이라는 죽음의 함정으로 무림맹을 박살 내려는 계책이다. 그 음험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가자. 움직여야겠어."
돌아서는 그녀다.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연선하.
뒤에 서 있는 서천각 제자가 그녀를 불러 세운 것은 그때였다.
"잠시만요, 연 사저."
"왜?"
"아직 말씀 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저, 연 사저께선 지금 군산으로 들어가시려는 것이지요?"
"맞아, 그런데?"
"그.... 서천각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만, 특기할 만한 사람이 한 명 악양에 와 있습니다."
"특기할 만한 사람?"
"예. 그 사람이라면 군산으로 배를 몰아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서요."
"무림인?"
"아닙니다. 관인이에요. 마영정이라고 아실런 지 모르겠습니다."
"마영정. 마 제독? 해군(海軍)의?"
"예. 맞습니다. 알고 계셨군요!"
"알다마다. 한데 마 제독이 왜 이곳에 와 있지? 설마 하니, 적 수군의 군함들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남왜의 소탕이 끝난 후, 휴양차 동정호에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도 지금쯤 이 사태에 대해 크게 궁금해하는 중일 테지요."
"연관이 없다면 그렇겠지."
그녀의 두 눈에 복잡한 비치 떠올랐다.
마영정. 마 제독.
그는 무척이나 유명한 남자다.
몇 년에 걸쳐 이루어졌던 남왜 해적 토벌전.
무림인들까지 대거 동원되었던 긴 싸움을 끝까지 해내고, 결국 철혈의 제독으로서 이름을 날린 대명 수군의 영웅이 바로 마영정이었다.
"....마 제독은 어디에 있어?"
"용린루(龍鱗樓)에 계십니다."
"용린루? 악중로(岳中路) 구석에 있는?"
"예. 그곳 맞습니다."
"허름한 곳 아니었나? 제독 같은 거물이 왜 거기에?"
"그것까진 잘... 그래서 여태껏 악양에 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여하튼 알겠어. 거기부터 가봐야겠네. 다른 할 말은 없고?"
"아, 예에. 무, 무운을 빌겠습니다."
"고마워. 동한에게 전하란 것 잊지 마!"
"예. 걱정 마십시오."
연선하가 몸을 돌렸다.
정보를 얻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시간을 꽤나 많이 썼다. 시간만 많이 쓴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넘어야 할 언덕이 남아 있다. 가라앉은 눈빛, 청풍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장로님, 새로운 정보입니다."
"보고하라."
"모용세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군부와의 접선을 시도하려는 모양입니다."
"누가 움직였지? 모용십수인가?"
"예. 한 명이 호광성 군부 관계자를 수소문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추격을 붙여 놓았습니다."
"모용십수라면 쫓기 어려울 거야. 일단 동향만 파악해 봐. 그 부분은 내가 처리하겠다."
"알겠습니다."
"다른 것은?"
"모용십수 다른 한 명이 반 각 전에 만불신니와 접촉했습니다. 군산행을 만류하고 있는 거으로 사료됩니다."
"모용가주.... 지략가라더니, 발 빠르게 움직이는군. 그렇다면 모용가주 곁에 있는 것은 둘뿐인가?"
"아닙니다. 지금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가? 나머지 둘은?"
"한 명은 악양 내부의 정보를 모으고 있는 듯 합니다. 다른 하나는 위치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모용가주 혼자란 말이렸다."
"예, 그렇습니다."
풍대해의 눈이 번쩍이는 기광을 발했다.
온화해 보이는 안색 위로 감추어진 살기가 우러나왔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파악이 안 된다는 모용십수 하나를 마저 찾도록 해라. 어떤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모용가는 그렇고... 다른 정보는 없는가?"
"있습니다. 반 시진 전쯤, 악양으로 한 쌍의 남녀가 들어온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한데 그것이 심상치 않는 인물들로 보이는지라...."
"어떤 이들이기에?"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한 명은 화산파 천류여협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하나는 그... 청홍무적검이라는 질풍검 청풍이라고...."
"무엇이?"
풍대해가 목소리를 높이며 되물었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날 만큼 놀란 얼굴이었다.
"연사진에서 일을 벌인 이후로 질풍검이라는 명호가 떠돌고 있습니다."
"청풍, 사신검(四神劍)의?"
"예, 맞습니다. 하지만 정확하진 않습니다."
"계산밖의 놈이로다. 왜 온 것 같나?"
"모르겠습니다."
"알아봐."
"예. 죄송합니다. 그리고...."
"더 있군. 보고해."
"예. 그보다 반 시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시진 전쯤, 동정호 북부에서 단심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단심궤라고?"
"그렇습니다."
"누구인가, 이번엔."
"그것이 송구스럽게도...."
"설마.......!"
"그렇습니다. 팽가 오호도로 사료됩니다."
툭!
손에 들려 있던 죽간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인자함으로 가장되었던 풍대해의 얼굴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악다문 이빨 사이로 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호도! 살아 있었단 말인가."
"......."
"그래서, 어디로 갔지?"
"군산으로 배를 띄운 것 같습니다."
콰앙!
풍대해가 탁자를 내려쳤다. 그가 명령했다.
"마맹(魔盟)에 연락해. 표자정(豹子精)과 황풍괴(黃風怪)를 투입하라고."
"두 명이나 말입니까?"
"그렇다. 지금까진 너무 가볍게 보았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단심맹의 일원으로서 풍대해를 보좌해 온 심복이다.
지시를 받았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는 모습. 아직도 보고할 것이 남았기 때문이다. 풍대해가 두 눈에 노화(怒火)를 떠올리며 물었다.
"또 있나?"
"마지막입니다."
"이번에 누구인가?"
"강호인이 아니라 관군입니다. 마영정이라고...."
"마영정이라면 남해 해군(海軍) 제독 아닌가? 그가 악양에 있었나?"
"그렇습니다. 작은 객잔에 머무르고 있어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
"왜 이곳에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휴양이라고 했지만, 그것도 사실을 모르는 일이라..."
"길게 이야기할 것 없다. 죽여."
"해군 제독인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남해를 기억해라. 오륜 왜장은 어렵게 구한 검호(劍豪)들이었어. 해군 제독...... 그저 군부의 개일 뿐이지만, 방치해 두면 상당히 위험한 요소가 될 것이다. 살려두는 것이 더 위험하단 말이지. 여기에 와 있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지금 죽여놓는 것이 좋아."
"그럼 처치하겠습니다. 누구를 보내는 것이....?"
"은각(銀角). 그 하나면 충분하다. 당장 움직여."
진면목을 드러내는 풍대해다.
실업(殺業)을 논하는 대화.
음모(陰謀)와 살계(殺計)가 오가는 곳.
개방의 인의대협, 천품신개 풍대해의 거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