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영정과 권욱, 용아는 그들을 군산에 내려주기 무섭게 수상의 전장을 향하여 선수를 돌렸다. 백병으로 군함 하나를 제압한 후, 싸움을 재개할 생각이라 하였다.
무모하다면 무모한 계획. 하지만 실패할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반역이든 무엇이든, 군함에 오른 수병들 전체가 역모의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을 터, 주모자가 되는 지휘관들만 척살하면 될 것이라 하였고, 분명 그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계책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이렇게 도착했다. 이제는 한 사람을 찾아야 해."
군산에 오른 연선하의 첫마디였다.
여기까지 온 지금.
이제는 풀어놓을 수밖에 없다. 청풍이 물었다.
"찾아야 한다니, 대체 그가 누굽니까."
"그가 누군지는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저."
"......."
"말하지 않는 것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청풍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러나 연선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가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다 이야기 해 줄 수 없는 것은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 무림맹의 일부가 적들과 손을 잡았고, 관가에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가 있다는 것을. 지금 도와주어야 하는 이가 그 주모자들의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그가 있어야 진신을 밝히고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어."
"무림의 안위가 걸렸다는 이야기도 그래서입니까?"
"그래."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적들이 접근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에워싸면서 병장기를 치켜들고 있다. 이십여 명에 이르는 적들, 갑주를 입은 관군들 사이에 흑의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여럿 섞여 있었다.
"무림인들이로군, 죽여라."
흑의무복을 입은 자들 중 한 명이 음산함 목소리로 말했다. 군산에 당도하는 무림인들을 무작정 공격해 온 듯, 아직까지도 마르지 않은 선혈이 그들의 병장기 끝에 묻어 있었다.
쐐애액! 쐐액!
상륙하는 자들을 이유불문하고 공격한다.
무도하고 잔인한 자들이었다. 거칠게 달려드는데 그 기세가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살검을 제대로 구사한다. 그러나........'
이만큼의 인원, 이런 방식으로 상륙자들을 공격해 왔다면 꽤나 많은 무림인들을 죽일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나빴다.
일격.
선두에서 달려들던 세 명의 흑의무인이 일순간에 피를 뿌리며 뒤쪽으로 튕겨 나갔다.
쩌정! 파아아아!
땅을 나뒹군 세 명의 무인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백색의 검날이 대지를 갈랐다. 네 명의 관군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뿌려지는 피.
아깝다.
검날을 보여줄 가치조차도 없었다. 백색의 검이 검집으로 돌아갔다.
호피 문양 흑백의 호갑이 둔중한 힘을 품은 채 사방으로 몰아쳤다.
퍼억! 퍼벅! 퍼어억!
관군들의 대도가 몇 자루가 되었든, 호갑의 질주를 막을 수 있는 칼날은 단 한 자루도 없었다. 순식간에 관군 두 명이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고, 무인 셋이 허리를 꺾으며 땅바닥을 굴렀다.
폭풍과도 같은 기도. 막대한 무력이다. 그가 발하는 맑은 목소리가 양광이 내리쬐는 시린 겨울 하늘을 시리도록 갈라놓고 있었다.
"이들은 단심맹이 아닙니까?"
"단심맹, 어떻게 알았지?"
"일전에 싸워본 적이 있습니다."
주작검을 얻을 때 부딪쳤던 이들이다. 그들과 비슷한 기도에 비슷한 무공, 단숨에 알아보는 것이 당연했다.
".......!'
"이놈들이었군요. 어디가 이렇게 큰일을 벌이나 했더니."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 적들을 쓰러뜨려 놓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청풍이다.
태연하게 말하는 그의 앞쪽으로 남아 있는 적들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청풍이 발을 옮기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을 열어라. 도망치는 자는 잡지 않겠다."
앞으로 나아가는 청풍의 기세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도망치고 싶어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적들.
청풍의 발이 눈 내린 대지에 족적을 만든다. 움직이지 못하는 작들을 훌쩍 지나쳐 버린 청풍의 뒷모습, 뒤따르는 연선하의 두 눈에 다시 한 번 크나큰 감탄의 빛이 어렸다.
'수준을 달리하는 무공이다. 이미 일대종사를 논할 만한 힘이야.'
그것이 청풍의 진면목이었다.
악양에서 은가면의 괴인을 물리칠 때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선상에서 어검으로 짐작되는 기예를 선보였지만, 그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더 나아간다.
아까 본 것이 달랐고, 조금 전 본 것이 다르며, 지금이 또 달랐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성취였다.
쐐애애액!
적들을 단숨에 제압한 그들은 움직임을 지체하지 않았다.
군산은 크지 않은 섬.
일단 지대가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가니, 아수라장이 된 군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섬 전체가 폭격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래서는....!"
한 편의 지옥도가. 너무도 어지럽게 얽혀있어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격전만도 십여 개에 이르고 있었다.
"위험하군요. 일단 뛰어들고 봐야겠습니다."
"잠깐! 멈춰봐!"
청풍은 먼저 몸부터 날리려고 했다. 하지만 연선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빠른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누구 하나를 구할 때가 아닙니다. 당장만 해도 위태로운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멈추라고 한 것은 그래서가 아냐. 적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그래. 포위를 당했으니 뭉쳐서 뚫어야 할 텐데 극서도 어려워. 화포의 포격 때문이지. 봐, 모두가 산개해서 싸우고 있잖아."
"어떻게 하자는 이야깁니까."
"알단 화포부터 막아야 해. 많은 사람들을 구하자면."
일리 있는 말이다. 전투능력으로 따지자면 관군이나 단심맹 무인들보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무인들이 더 강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밀리고 있는 것은 적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화포의 위협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한데 뭉쳐서 돌파하지 못하니 대형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적들에게 에워 싸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어려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병들을 치자는 말이군요."
"그래. 일단 저쪽부터 가야겠어."
연선하가 포격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가리켰다. 청풍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보의 신법을 전개했다.
쐐애애액!
놀라운 속도였다.
공간을 압축하고 눈길을 질주하는데 발자국조차 남지 않을 정도였다.
곳곳에서 적들이 뛰쳐나왔지만 청풍의 움직임은 결코 거침이 없었다. 막아서는 자들은 백호검 호갑을 휘둘러 일격에 날려 버렸고, 달려들지 않는 자들은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엄청난 빠르기.
연선하로서는 그의 뒤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혼신의 힘을 다 짜내야 할 지경이었다.
콰쾅! 콰콰쾅!
화포의 발사음이 가까워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무인지경으로 달려나가는 청풍의 시야에 수십 명의 관군들과 또 그만큼의 단심맹 무인들이 비쳐들었다
"기, 기다려! 적들이 너무 많아!"
족히 백여 명에 이르는 적들이었다.
화포부터 봉쇄해야 한다는 것은 전투에 능한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일. 그런 만큼 적들의 방어 역시 철통 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포격을 중단시키기 위해 달려들었다가 실패하고 죽은 무인들의 시체가 이곳 저곳에 널려 있었다.
'위험해!'
입고 있는 옷, 다양한 복장들이 죽어간 그들의 신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청성파의 도인들도 있고, 점창의 무인들도 있다. 화산과 가까운 종남의 무인들도 몇 명이나 쓰러져 있었다.
"풍 사제!"
적진을 향하여 돌파하는 청풍의 모습이 무모하게만 보였다. 그가 지닌 놀라운 기량을 확인한 게 바로 조금 전이었지만, 그래도 적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다. 만반의 태세를 갖춘 채 청풍을 맞이하는 적들, 단신으로 뚫고 들어가기에는 그 누구라도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다.
쩡! 쩌저정!
그러나 연선하의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는 모른다.
청풍의 수준을. 초상승의 경지를.
순식간에 적들의 일각을 허물면서 깊숙이 들어간다. 쌍검을 꺼내지도 않고, 오직 하얀색 백호검을, 그것도 검집째 휘두르는데 그 누구도 일격을 버텨내는 자가 없었다.
퍼엉! 퍼어어억!
장판파의 장비가 그랬던가. 아니면 상산의 조자룡이 그랬던가.
일당백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땅을 울리는 호보의 진각에 땅에 덮힌 눈가루가 비산했고, 휩쓸어 몰아치는 백야참에 적들의 병장기가 박살났다.
쓰러지는 적들로 길을 만든 것은 순간이었다. 땅에 박힌 대포 세 기가 지척이다. 청풍의 왼손이 호갑의 중간을 잡고, 백호검의 오른손이 강한 힘을 품었다.
'어떻게 하려고.....'
연선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대포의 포신으로 몸을 날리는 청풍. 땅을 박차는 진각음이 들린다. 호갑으로부터 백색의 검신이 뛰쳐나왔다,
쩌어어어엉!
금강탄, 강철이 강철을 꿰뚫어 부수고 있었다.
백호검이 가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대포의 포신 그 자체였다. 일격에 두 쪽으로 갈라지는 대포의 포신이다.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쿵! 쩌어엉!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청풍은 그와 같은 놀라운 광경을 두 번이나 더 보여주었다. 세 기의 대포를 그런 식으로 모조리 파괴해 버린다.
청성과 점청, 종남이 힘을 합쳐 달려들고도 할 수 없었던 그것을 가볍게 해내는 그였다. 충격에 휩싸인 적들을 무인지경으로 몰아치며 연선하에게 돌아오는데, 그녀의 얼굴에도 적들과 똑같은 놀라움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다음은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정신 없이 청풍을 따라가는 연선하였다.
절세(絶世)라는 말은 이럴 때 필요한 말이다.
절세고수를 왜 절세고수라 부르는가.
절세고수는 싸움의 향방을 단숨에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싸움이 아무리 큰 싸움이라도 마찬가지다. 이전에 철기맹의 발호를 북풍단주 한 사람이 박살 내놓았듯, 청풍에게도 군산혈전의 흐름을 바꿀 만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파아아아아!
고조되는 기세다.
청풍은 곧바로 다음 목표를 찾았다. 두 번째 포격진이 저편에 있다. 화포의 발사음이 들리는 곳을 향하여 폭풍처럼 질주했다.
"앗! 저기!!"
연선하의 경호성이 들린 것은 적들의 지척까지 접근했을 때였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청풍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그곳.
이전까지와는 다른 광경이 비쳐 들고 있었다.
'저것은......?'
적들의 움직임이 묘했다.
이쪽과는 관계없이 어떤 한 지점을 향하여 몰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 숫자도 엄청났다.
방금 전에 박살 낸 포격진에 비교하더라도 두 배는 족히 넘을 만한 규모였다.
'누군가 싸우고 있다.'
관군들, 단심맹 무인들, 처음 보는 흰 가면의 무인들까지 적들의 모습도 다양하기만 하다.
그들 모두가 한곳을 노린다. 적들의 살기가 한 점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포위당했군.'
그렇다.
적들의 모습이 알려주는 것은 하나다.
누군가가 그 가운데 있다는 뜻. 안쪽에서 들려오는 연속적인 격타음이 이 적진에서의 외로운 싸움을 알려주고 있었다.
"거기야! 거기에 그가 있어!"
청풍보다 먼저 그 누군가를 알아본 연선하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수많은 적들 사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남자의 신형이 언뜻언뜻 엿보이고 있었다.
'누가 되었든.......!'
그 사람이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구하고 봐야 했다.
청풍은 알지 못했다. 그 생각이 한 순간에 바뀌게 될 것이라고는.
백호검을 비껴 들고 적들을 향해 뛰어든 그다.
연선하가 말하는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금강호보가 강력한 진각음을 발했다.
터어엉!
대지를 부는 바람이다.
바람에 휩쓸린 적들이 피를 뿜으며 이곳 저곳으로 튕겨 나갔다.
퍼억! 쩌어어엉!
하나둘.
인(人)의 장막이 걷혀가고 있었다.
마치 경극의 막이 오르는 것처럼.
어떤 배우가 나타날지 모르는 극적인 장면에서와 같이.
청풍의 눈앞으로 안쪽, 그 남자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타악! 퍼어억!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보법이었다.
화살이 박히고 검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등이 보였다.
지쳐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 한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철궤가 들려 있다.
퍼억!
비틀거리던 그 남자가 적의 창봉에 얻어맞으며 균형을 잃어버렸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안 돼!"
뒤쪽으로부터 날카로운 경호성이 울려 퍼졌다.
여인의 목소리다. 바짝 따라붙고 있었던 연선하다. 청풍의 몸이 본능적으로 짓쳐 나갔다. 남자에게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낸 일격, 병장기의 충돌음이 사방을 채웠다.
쩌엉! 쩌저저정!
청풍의 검이 선회하여 움직였다.
지친 목소리가 청풍의 귓전을 울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고맙소. 덕분....에....!!"
꺾여진 무릎을 어렵사리 돌려 세운다.
일어나는 남자.
하지만 그 남자의 몸은 청풍은 보는 순간 단번에 굳어지고 말았다. 감사의 인사도 끊겨 버렸다. 청풍의 눈이 그 사람의 얼굴에 닿았다.
'설마........'
이것이 경극의 한 장면이라면.
결국, 비극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청풍의 눈에 가득한 것은 불신의 빛이다.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후... 개?"
피칠갑을 한 얼굴이었다.
얼굴 곳곳에도 험한 상처들이 나 있지만, 그렇다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악연 중의 악연이었다. 강호에 나와 엮어왔던 인연들, 가장 떠올리기 싫었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쩌정! 쩌저정!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후개.
장현걸이었다니.
하지만 청풍은 그대로 굳어 있을 수가 없었다.
적들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맞이하는 청풍의 검이 백야참의 반원을 그렸다. 사방에서 몰려들었던 적들의 병장기가 한꺼번에 튕겨져 나갔다.
"괜찮아요?"
연선하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장현걸에게 하는 말이었다.
장현걸의 팔을 잡으며 그를 부축하는 모습이 청풍의 시야 한 켠에 칼날처럼 박혀들었다.
'어찌하여......!!'
그것은 충격, 일대 충격이었다.
거칠게 내치는 백호검에 청풍의 격동이 깃들었다. 격동이 그대로 몰아치는 힘이 되니, 믿을 수 없는 무력이 되어 뻗어나간다. 적들의 육신이 무차별도 터져 나갔다.
퀴유웅! 퍼억! 콰아아앙!
몇 번이나 검을 내뻗었는지 모른다.
청풍의 전면, 십 장 거리가 박살낸 병장기와 부서진 육신들로 가득찼다.
이제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살기다. 파멸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파였다. 누구도 다가올 수 없는 기세에 적들의 공격이 일순간 멈추고 말았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겁니까."
몸을 돌리며 말하는 청풍의 목소리엔 불과 같은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마치 남강홍의 모습이 그의 몸 밖으로 뛰쳐나온 것 같았다. 연선하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구하고자 하던 이가 누구였는지 계속하여 감추려 했던 그녀.
이제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연선하가 청풍과 장현걸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서라 하여 여기까지 끌려왔는데, 그 결과가 이런 것이었다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사저는 알고 있었군요. 그에 대해서."
"그래. 그가 네게 한 일. 알고 있었어."
이제 와 감출 수도 없다.
연선하가 결심이라도 한 듯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했던 그대로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확인 받은 기분은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허탈함에 가까웠다. 청풍이 씹는 듯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런데도 이래야만, 이렇게 해야만 했습니까?"
청풍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연선하의 얼굴에도 진한 슬픔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너밖에 없었으니까."
가슴에 직접 와 닿는 목소리.
그렇다.
그런 것이다.
청풍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머리 속에 과거에 들었던 맑은 목소리들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