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156)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지만, 청풍이 쓰러져 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터져 나간 대지 위에 일어나는 청풍이다.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의 양이 지독히도 많았지만, 묘하게도 아무런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육신이다. 일어날 수 없는 몸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일으키는 몸이 무척이나 가벼웠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세상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백호무, 청룡결, 주작살, 현무갑.

 배운 것과 배우지 않은 것까지 한꺼번에 모두 다 펼쳐 놓을 수 있을 듯했다.

 "일어났나? 놀랍다. 이해할 수 없어."

 육극신의 눈이 평생에 처음 경험하는 불가해(不可解)로 얼룩졌다.

 청풍의 전신에 신비한 노을 빛이 서린다.

 기(氣)였다.

 신공(神功)이었다.

 자연에 충만한 기(氣)를 무한정 받아들인다. 천인(天人)의 경지였다.

 "마지막이오. 내가 받은 모든 것을 여기에 걸겠소."

 상처를 입은 육신에, 뒤틀려 버린 기혈이다.

 받아들이는 기(氣)는 무한정이었지만, 그 기를 받아들이는 그릇은 이미 그 힘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은.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잠깐의 시간으로도 족했다.

 이번 격돌로 끝나기 때문이다.

 청풍의 눈이 질풍의 바람을 머금었다.

 땅을 박찼다. 육극신의 파검이 가까워졌다.

 그에 맞서는 청풍.

 청풍은 어떠한 검도 선택하지 않았다.

 주작검을 놓고 현무검까지 놓아버렸다.

 떠올라 맴도는 네 개의 신기(神器)가 그의 마음속에 섞여 들었다.

 우우우웅!

 최후의 순간에 돌입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시공의 정점이 거기에 있다. 모든 시간이 하나로 이어지고, 모든 공간이 어떤 시점에서 멈추었다.

 소리가 없어지고 색이 없어졌다. 냄새도 촉감도, 차갑게 느껴지던 겨울바람도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은 빛이다.

 빛까지 없어진 그의 심안(心眼)에 무시무시한 기의 파도가 비쳐 들었다.

 육극신이었다.

 육극신을 이루고 있는 기(氣)의 본체가 그의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들은 기(氣)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유형 만물의 비롯됨은 기(氣)에 있으니, 스스로의 안에 있는 기(氣)를 느끼는 것이 첫째요, 다른 사물 안에 있는 기(氣)를 느끼는 것이 두 번째다. 천지간에 충만한 기(氣)를 끌어 쓰며 음과 양, 만재(萬在)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곧 운기(運氣다."

 사부의 목소리가 오랜 사공을 뛰어넘어 청풍의 귓전을 울렸다.

 청풍의 몸에 비친 노을 빛이 진해졌다.

 청풍의 기(氣)가 세상 만물의 기(氣)와 섞여 우주(宇宙)의 이치를 품었다.

 사신검도, 육극신의 파검도, 그의 숨소리에 온전히 생동한다.

 화산의 검, 사신의 검, 질풍의 검.

 결국은 그것도 하나로 귀결된다,

 사부가 넘겨준 의지, 그가 만나온 사람들과의 인연, 모든 것이 청풍의 마음속에 있다.

 청풍의 검.

 그의 생명이 발산하는 검의 울림이 육극신과 그의 파검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버언쩍!

 빛의 난무가 뒤따랐다,

 난무하는 빛의 향연 끝에 명멸하는 생명이다.

 혼돈을 피어올라 산산이 흩어진다.

 두 사람의 기(氣)가 장엄한 빛 무리로 하늘 높이 사라지고 말았다.

 치링! 치리링!

 청풍의 등과 허리로 네 개의 검이 날아와 검집에 꽂혔다.

 그것이 마지막이다.

 손가락 하나 들 힘도 남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가슴, 청풍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사부의 원수를 갚는다고 했던가. 이제야 알겠다. 그 빛, 똑같은 노을 빛이다. 그는 내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고수들 중 손꼽을 정도로 강한 자였다. 그 사부에 그 제자다."

 육극신의 목소리는 아득했다. 생기를 잃어가고 있음에도 그 안에 가득한 위엄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문에서 멸시를 받아 결국 죽음으로 내몰렸던 사부님. 그러나 청풍의 사부님은 천하를 굽어보던 절대고수의 머리 속에 강자(强者)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여한(餘恨)이 없었다. 육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화산에서 해줄 수 있는 그 어떤 보상보다도 의미 있는 한마디였다.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 가눌 길 없는 허무(虛無)의 사슬이 끊어지는구나. 한 번 검이 부러졌을 때 끝냈어야 했던 것을....... 이젠... 쉴 수 있겠어."

 마음에 직접 전해지던 육극신의 목소리가 결국 완전히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가 쓰러지고 있었다.

 청풍에게 기나긴 사연이 있었던 것처럼, 육극신에게도 그가 걸어온 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길이다. 반 토막 남았던 파검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고, 멈추지 않던 파멸의 의지도 그 검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쿵!!

 일대 거성(巨星)이 떨어지는 순간이다,

 동시에 청풍의 몸도 쓰러진다. 대지에 몸을 눕힌 두 영웅,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그 들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누가.... 누가 이겼지?"

 두 사람 모두 쓰러졌으니, 무공으로 뚜렷한 승자를 가릴 수가 없다.

 동귀어진이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가 승자다. 두 사람 모두 죽었다면 동패(同敗)요, 두 사람 모두 살았다면 무승부다. 하나 둘 다가드는 듯하더니, 이내 수많은 사람들이 격전지로 몰려들었다.

 ".......!!"

 "상세가 심각합니다! 큰일입니다!"

 가장 먼저 움직였던 것은 다름 아닌 하운과 매한옥이었다.

 매한옥이 청풍을 살피는 동안 하운은 육극신의 기척을 엿보았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던 하운, 그의 안색이 크게 굳었다.

 '생기(生氣)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청풍의 상세도 큰일이었지만, 육극신의 죽음은 더 큰 문제다.

 몰려드는 비검맹의 무인들이 까마득했다.

 비검맹은 공명정대한 문파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척에 이른 두 검존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안 된다......! 서둘러야 해!'

 하운은 그 흔한 경호성조차 울리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청풍을 들쳐 업고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상세가 악화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서두르지 않으면 죽는다.

 매한옥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 찼지만, 그 역시도 일순간에 사태를 파악하며 하운을 뒤따랐다. 검을 뽑고 한발 먼저 큰 소리로 외쳤다.

 "매화검수는 길을 열어라!!"

 매화검수들의 상황 판단도 빠르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나의 싸움이 끝나고, 새로운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뒤쪽으로부터 전해지는 살기가 엄청났다.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모조리 죽여라!!"

 무시무시한 내력이 담긴 목소리가 대천진을 사납게 휩쓸고 있었다.

 이곳에 온 검존들 중 하나, 영검존이었다. 그의 전신에서 강렬한 마기(魔氣)가 뿜어지고 있었다.

 채채채챙!

 비검맹 무리들이 달려들었다. 두 검존도 직접 몸을 날려왔다. 대기하던 매화검수들이 모여들며 그들을 막기 위한 진용을 짰다.

 '매화검수들만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어떻게든 살려야 하는데!!'

 하운의 발이 더 빨라졌다.

 비검맹이 강호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측했던 일이다. 오히려 놀란 것은 비검맹 측일 터, 설마하니 육극신이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채챙! 슈각!

 당황했기도 했으련만 적들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빨랐다. 달려들며 검을 날려오는데 그 기세가 사납기 그지없었다. 매한옥이 앞으로 나아가며 적들을 베어 넘겼다.

 채채챙! 채챙!

 매한옥의 검은 강했다.

 화산무공의 정수를 제대로 구사하는데, 그 위력이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렵다.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미리 생각해 두었던 도주로로 뛰고 있었음에도 돌파가 여의치 않은 것이다. 비검맹의 살기를 너무 가볍게 본 것이 문제였다.

 채애앵! 촤아악!

 급기야는 느려지기 시작한다. 달려가던 하운의 속도가 줄어들고 있었다.

 매한옥 한 사람만으로는 무리다. 모든 방향을 다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매한옥이 미쳐 막아내지 못한 적들의 흉수가 하나둘, 하운의 곁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위험하다.....! 돌파하지 못하겠어!'

 매한옥의 얼굴에 다급함이 감돌았다. 매한옥의 방어를 뚫고 들어온 비검맹 무인 한 명이 검을 날려오고 있었다. 청풍을 들쳐 업은 왼손에 힘을 더하고, 오른손으로는 허리의 검을 뽑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역시도 손을 써야만 했다.

 채앵!

 적을 검을 튕겨내는데, 운신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기식이 엄엄한 청풍 때문이다.  청풍의 상세는 그저 심각한 정도가 아니었다.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죽을지 모른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빠져나갈 길이 막막해 보였다.

 쩌어엉! 빠악!

 그때였다. 구원의 손길이 다가온 것은.

 하운과 매한옥을 따라붙으며 한 자루 철봉을 휘두르는 이가 있었다.

 젊은 남자였다. 허름한 누더기를 입고 있었다.

 "이쪽이오!"

 한 명을 더 물리친 그자가 하운을 돌아보며 외쳤다. 강철로 만들어진 타구봉, 그 얼굴을 알아본 하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철살개? 개방이?!"

 "수로맹에서도 배를 보내주었소. 생문(生門)은 육로가 아니라 수로요!"

 퍼억! 콰아앙!

 적들을 헤집고 있는 것은 철살개 한 명이 아니었다.

 어느새 나타난 초로의 거지 하나가 매한옥의 곁에서 팔선각의 절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비켜라!"

 마대 자루에 걸려 있는 칠결 매듭이 그의 신분을 나타내 준다. 폭급한 목소리가 웅혼한 내력을 담고 있었다. 개방 장로, 광풍개였다.

 파바박! 쐐애액!

 철살개, 광풍개.

 두 사람 모두 한때 청풍을 쫓아와 일전을 벌였었던 고수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활로를 열어주고 있다. 그 두 명뿐 아니라, 대천진 한쪽으로 수십에 이르는 개방 거지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대규모의 싸움, 청풍을 구하기 위한 일전이었다.

 "저기에서 꺾어지면 되오! 그분이 기다리고 있소!"

 철살개가 뒤로 빠지며 후미를 맡았다. 적들의 추격이 거세다. 저 멀리로 영검존과 태검존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하운과 매한옥이 강가의 길을 돌아 대천진 외곽에 이르렀다. 바위로 가려진 지형, 흑색의 철선, 수로맹의 쾌속선이 그곳에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어서 배에 오르시오!"

 하운과 매한옥의 얼굴에 놀라움의 표정이 스쳐 갔다. 

 뜻밖의 인물이었다.

 개방 후개, 장현걸이다. 청풍의 적이었으되, 도리어 목숨을 구원 받았고, 이후 인의대협이라 알려졌던 풍대해 장로의 만행을 폭로하며 개방을 통째로 뒤엎은 장본인이었다.

 "어찌하여 여기에......!"

 "설명할 여유가 없소. 사내대장부가 감당 못할 은혜를 입었으면 마땅히 갚아야 한는 법 , 죽을 때까지 갚아도 모자랄 따름이오!!"

 장현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순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쾌속선 무풍(無風)에 오르는 하운과 매한옥이다. 조심스럽게 청풍을 내려놓고 보니, 매한옥으로서는 또 한 명의 익숙한 얼굴을 만날 수가 있었다. 수로육손 백언이다. 그가 무풍의 철노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뵙소만 인사할 여유가 없군! 서두릅시다!"

 백언은 지체 없이 노를 저었다.

 빠르게 강물로 나아가는 그들 뒤로 영검존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무풍을 향하여 뛰어오르려던 그가 일순간 몸을 멈추고 한쪽을 돌아보았다. 강변을 따라 걸어오는 한 명의 승려 때문이다. 마른 몸에 병약해 보이는 승려(僧侶). 하지만 그 외모와 달리 그의 몸에서는 놀랍도록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기파가 뿜어지고 있었다.

 "수로맹주의 친우요. 함께 왔지. 검존은 그가 막아줄 것이오."

 "검존을 둘입니다. 저 승려 혼자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수로맹주의 친우는 한 명이 아니라오."

 노를 저어가는 백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깃들었다.

 한 명이 아니라는 말, 어찌 되었든 두 검존의 추격을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단 고비는 넘겼다는 말이었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청풍의 상세라고 할 수 있었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청풍의 호흡이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해명선사와 모용세가의 청백신의를 수배해 두었지. 늦지 않으면 좋겠는데."

 "청백신의와 해명선사를?"

 하운의 반문에 장현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백신의와 해명선사는 두 사람 모두 신의(神醫)라 이름이 높은 인물들이었다.

 예상 밖의 조력자 장현걸.

 부상을 치료할 의원들까지 찾아두었다 하니, 그야말로 놀랍다 아니할 수 없다. 의원들을 만날 때까지. 그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살 수 있다. 희망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나저나......."

 장현걸의 목소리.

 독백처럼 하는 말이다. 천천히 이어지는 몇 마디 이야기가 전에 없이 깊은 울림을 품었다.

 "그 육극신을 쓰러뜨리다니.... 질풍검.... 강호의 역사가 새로 쓰이겠어."

 바람이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무엇인가 날고 있어야 그 바람의 존재를 알 수가 있다.

 육극신의 싸움이 끝나고, 하나의 숙명이 사라진다.

 바람과 함께 날고 있는 인연들, 과거의 인연들이 그 기적 같은 숙명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었다.

[한백무림서] 화산질풍검 제 27장 질풍검(疾風劍)

 화산질풍검의 탄생.

 그것을 기점으로 화산파에서는 지대한 변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문규의 엄격함은 그대로였으나 제자들의 문풍에서 느껴지던 각박함은 훨씬 더 줄어들었다 이야기되며, 보무제자에서 매화검수로 이어지는 계급화의 폐단도 예전보다 크게 적어졌다고 한다.

 화산성검과 화산옥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새롭게 개편된 매화검수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력을 뽐내게 되었으며, 화산질풍검의 자하진기는 자하신공(紫霞神功)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명명, 화산파 최강의 내공심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화산질풍검의 독문무공인 사신검공(四神劍功)은 화산파의 절기로는 편입되지 않았지만, 질풍검 일맥으로 전수되었으며, 훗날 질풍검은 그 자하신공을 바탕으로 화산파 고유의 무공들을 집대성하였다고 알려진다.

 한때 강호난세에 휩쓸려 크게 흔들렸던 화산파는 그와 같은 질풍검의 능력을 발판 삼아, 다시금 천하 검문의 수좌를 넘볼 수 있게 되었다 하니, 그것은 일대 영웅의 존재가 문파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질풍검이 거하는 운대봉 자하연(紫霞淵)은 화산무학(華山武學)의 성지로 받들어지게 되었고, 질풍검의 사신검은 화산무력의 상징으로서 화산검문이 무가지보(武家之寶)로 여겨지고 있다. 그 외에도......중략.....

 한백무림서 인물편.

 제삼장 화산파 中에서.

 몇 해가 지나도 화산의 장엄함은 변함이 없었다.

 새로운 해가 밝는 때, 춘절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 고향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리운 얼굴들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온 중원천지를 수놓았다.

 화산에도 그것은 어김이 없는지라.

 바람처럼 강호를 떠돌던 사람들도.

 한곳에 눌러앉아 풍월을 흘려 보내는 사람들도.

 결국은 세월 따라 변해가는 세상에 누군가를 찾아서 제각각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그 뻗어서 엉키는 수많은 길들의 끝에.

 화산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화산 운대봉 중턱.

 자하연(紫霞淵)이라 불리는 연못이 있었다.

 기암과 수목이 신비롭게 조화되어 있어 경치가 좋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 이름, 노을이 지면 마치 석양이 그 연못 안에 빠져들기라도 한 것처럼 빛이 나 더욱더 아름답게 변하는 장소였다.

 "그 소문 들었나?"

 "무슨.....?"

 "성혈교의 외팔이 사도(使徒) 이야기."

 "외팔이... 풍 사제에게 팔을 잃었던 그 남자 말입니까?"

 "그래, 그자."

 자하연으로 향하는 길이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올라오는 남자 두 명이 있었다.

 "그자는 무척이나 강했지요. 한데 그자가 왜.....?"

 "그자가 금마륜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다더군."

 "금마륜? 성혈교의?"

 "정확히는 성혈교였던... 이겠지."

 "그렇기도 그렇군요."

 "성혈교의 부활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버렸고.... 금마륜이 도리어 그 성혈교에게 광륜을 겨누고 있다는 소문도 이제는 다들 인정하고 있는 바지. 그런 금마륜에 사도가 함께한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야."

 "내분인지도 모르지요."

 "내분....이라기엔 좀 더 복잡한 것이 아닐까."

 "어느 쪽이든 금마륜이 성혈교와 싸운다고 한다면 우리로서는 나쁘지 않은 이야기일 겁니다."

 "그도 그렇겠지."

 두 사람은 같은 나이다. 하지만 먼저 소요관을 통과했던 쪽이 사형으로 불리고 있다. 매화검수 시절의 호칭, 이미 그 굴레를 벗어난 후였음에도 그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자하연으로 오르는 두 사람의 얼굴엔 무거운 화제와는 별개로 오랜 만의 만남에 대한 반가움만이 가득했다.

 "이쪽도 슬슬 움직여야 하겠어요?"

 "맞는 말이다. 서천각에서도 서두르고 있어. 벌써 매화검수들도 하산을 시작했고 말이야."

 "이래저래 풍 사제만 고생하겠군요."

 "이번에 우리도 도와야지. 가릉대혈전 때는 심했어. 적지에 고립된 평검수 열 명을 구한다고 오백 명 무인 한가운데로 뛰어들다니....."

 "하하. 사형은 안 그러셨습니까?" 저번 신마맹과 싸울 땐 사형도 만만치 않았죠."

 "그때는 너도 있었잖아. 서로 얼굴에 금칠 하는 짓은 하지 말자고."

 웃음을 주고받는 남자 둘.

 그들은 다름 아닌 하운과 매한옥이었다.

 깊은 밤 화산 중천에 고결하게 빛나는 별, 화산성검(華山星劍) 하운.

 차가운 매화 그늘을 떠나 아름다움을 발하는 검, 화산옥검(華山玉劍) 매한옥

 이제는 원숙의 경지에 이른 그들, 강호에서 화산을 말할 때 반드시 나오는 이름들이다. 당금의 화산파를 이끄는 강력한 주축들이었다.

 "그나저나 사저가 늦는군요. 자하연이 지척인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지. 또 개방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지요. 아, 저기 오는군요."

 "역시나 함께 오시는군."

 "어? 그런데 한 명이 더 있는데요?"

 꺾여서 올라오는 길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오는 세 사람이 있었다. 가장 익숙한 얼굴은 가운데 있는 여인. 한 명은 겨우 안면을 텄으나 아직까지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였고, 한 명은 전혀 모르는 자였다.

 "간만에 뵙습니다."

 "좀 늦었어? 그렇지?"

 하운과 매한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연선하가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를 낸다. 시간이 비껴가기라도 한 듯, 아직까지도 이십 대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그녀였다.

 "이제는 제 집처럼 드나드는군요. 개방 일은 잘되셨나 봅니다."

 "말에 가시가 돋쳤군 그래."

 "돋칠 만도 하지요. 연 사저는 아직도 많은 제자들의 우상이니까요."

 "하하. 그런가?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는데."

 "요즘 들어 함께 보이는 일이 잦습니다. 강호에서도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그럴리가..... 무림의 일 때문에 만나는 것뿐이라고. 공적(公的)인 관계일 뿐이야. 우린."

 "제발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랍니다."

 매한옥의 핀잔에 연선하와 장현걸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백결신룡, 오늘날엔 개방용음(?幇龍吟)이라 불리는 장현걸이다.

 오른팔 흰 매듭 하나 짊어지고, 예전 개방을 되찾아가는 그다. 잘못되었던 삶의 길, 그 누구보다 먼 길을 돌아왔던 그의 얼굴에도 이제는 정명한 기도가 충만해 있었다.

 "그보다, 이분은 누구신 지?"

 하운이 연선하와 장현걸의 뒤쪽을 따라 올라오던 남자를 보면 물었다.

 뒤로 묶은 머리, 젊은 얼굴에 진한 눈썹과 강한 눈빛을 지녔다. 날카로운 얼굴 선을 갖고 있었으나, 그리 어두운 인상은 아니었다.

 "처음 뵙겠소. 화산성검과 화산옥검, 그 자자한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소. 내 이름은 한백(韓白), 자(字)는 백림(白林)을 쓰고 있소."

 "화산파, 하운이오."

 "매한옥이오."

 무림의 협객이라기보다는 문사(文士)에 가까운 기도를 지니고 있다. 한백,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자. 하운과 매한옥으로서는 생소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화산에는 여러 번 올라와 봤지만, 이처럼 쟁쟁한 분들을 뵐 기회는 이제껏 없었소. 두 분을 보니 알겠소. 화산의 고절함은 역시나 이렇게 이어지는가 보오."

 공치사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솔직한 말 안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상당했다. 화산의 위기와 그 극복을 잘 알고 있다는 눈빛이다. 범상치 않은 남자,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칭찬이 과하군요. 한데 어쩐 일로 이 험지까지 걸음을 하셨소?"

 "사람을 배우고자 왔소. 전할 물건이 있기도 하고."

 "전할 물건? 누구에게 말이오?"

 "청풍 대협께 말이오."

 한백의 목소리는 굵었다.

 무공을 익혔는지, 익히지 않았는지 모호한 기도를 품고 있는 남자다. 이토록 험한 화산을 올라오면서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보면, 내력이 정심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평온한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무공을 익힌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이한 자였다.

 "풍 사제에게 어떤......."

 하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을 때다. 연선하가 끼어들며 하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만, 하운 사제. 사제는 경계심을 거두도록 해. 한 공자는 그런 분이 아니야."

 원래부터 한백을 알고 있었다는 어투였다.

 그녀의 말. 하운이 날카로운 눈빛을 지워냈다. 그가 포권을 취하며 한백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세상이 어지러운 만큼 나도 모르게 검의 예기(銳氣)만 늘려놓았던 모양이오. 무례하게 군 것은 사죄하리다."

 "무례라니 당치 않소. 뛰어난 무예에 그토록 겸손한 인품이라니, 과연 화산 차기 장문으로도 손색이 없겠소."

 웃으면서 말하는 한백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여전히 가볍지 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마치 예언과도 같이 하는 말, 깊이를 알 수 없는 한백의 눈빛에 하운의 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 화법(話法)은 도통 변한 게 없군요? 한 공자도 정말 못 말리겠어요. 여하튼, 자세한 이야기는 올라가서 나눠요. 우리는 당신과 당신 친구들이 할 만한 이야기엔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까."

 연선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화산파 차기 장문을 논하는 것. 천하의 판도를 논하는 대화다.

 한백과 그의 친구들.

 대체 어떤 인물들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 대화를 일상적으로 한다는 것. 대체 어떤 이들이 있기에 천하의 대사를 그토록 가볍게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한백은 더 이상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자하연이 가까워 올수록, 그 얼굴에 기대감이 어린 표정을 지어낼 뿐이다. 고대하던 것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위로 오르는 발길이 힘찼다. 이윽고 자하연의 지척에 이르렀을 때다.

 화산 준봉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래를 돌아보던 장현걸이 고개를 갸웃하며 옆에 오르던 매한옥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만통 어르신도 이곳으로 오신다고 하셨던 것 같던데?"

 "만통자께서 자하연까진 오르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단지 장문인을 뵈러 오셨을 뿐이라고....."

 "아, 어르신은 벌써 만나 뵈었나?"

 '만나 뵈었지요. 본 파로 오셨었습니다. 운수(運數)이야기를 하던데, 무슨 말이지 도통 알아듣기가 힘들었던 지라....."

 "그렇지, 그 양반이 하는 말은 언제나 그래."

 다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두런두런 옛사람들을 추억하자니, 어느새 자하연 앞이다.

 연못 주위로 둘러 처진 기암괴석들 사이로 신비로운 기화요초들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겨울을 몰아내기 위해 새싹을 틔우며 애를 쓰고 있었다.

 자하연 옆을 돌아가자 작은 화단과 담장이 나타났다. 담장 안쪽의 넓은 공터에는 놀랍게도 이리저리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있었다.

 솜털 채운 도복을 입은 소동(小童)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풍경이다. 아이들 중 한 명이 일행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운(雲) 사부! 매 사부!"

 와아아 하며 뛰어오는 아이들만도 열 명에 달했다. 기껏해야 대여섯 살에서 열 살 남짓한 꼬마들이다. 하운과 매한옥이 서로를 돌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너희들이 여긴 어떻게?"

 "응! 태사부님께서 사모(師母)가 심심해할까 봐 같이 놀러 오자셨어!"

 "태사부님?"

 "매 사부는 태사부도 몰라? 풍 사부한테 무공 배우러 오면 가끔 같이 가르쳐 주셔. 머리가 막 하얀데, 꼭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아!"

 무작정 매한옥의 품에 안긴 소동이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 옆으로 달려온 아니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그 쪽을 본 매한옥과 하운의 안색이 단숨에 변했다. 연선하와 장현걸, 한백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음도 물론이다.

 "검신.... 께서......!"

 포권을 취하며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일행이다.

 매화검신 옥화진인이 거기에 있었다. 풍암당, 작게 내걸린 조그만 집 쪽에서 천천히 걸어나오는데 그 모습이 아이들의 말처럼 하늘에서 온 신선과도 같았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나. 장대한 화산의 품에선 다 같은 아이들일진대."

 무공의 강자라기보다는 구도(求道)의 선인이다. 너무나 넓어서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기도다. 압도적이라는 표현만으론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정도였다.

 "제자, 하운. 검신을 뵙습니다."

 "제자, 매한옥입니다. 검신을 뵙습니다."

 "검신이라니! 검은 버린 지 오래다. 그저 옥허일 뿐이니라."

 "그래도 진인께서는 언제나 제자들의 마음속에 신검이실 따름입니다."

 연선하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더할 나위 없는 공경함이다. 장문인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존경심이었다.

 "그쪽은 후개인가? 용두방주가 걱정을 하더니만, 자넬 보니 이제는 그 친구도 한시름 덜었군."

 "개방의 장현걸입니다. 여러 어르신들께 끼쳐 드렸던 심려에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허허허.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아. 이쪽은... 그렇군. 그대가 바로 날개들을 그리는 자였나?"

 옥허진인이 한백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린다는 것은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그저 보고 배우고자 함입니다."

 "붓 끝에 천하를 되짚어보고 싶은 마음이라.... 그것도 좋겠지. 팔황이든 제천이든 어느 쪽에서든 말이야. 그렇지 않느냐, 아이야?"

 옥허진인이 이번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집에서 나온 여인,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더 피어나는 아름다움이다. 

 서영령이었다.

 팔황에서 구파로 시집온 특별한 여인.

 그녀의 목소리가 자하연을 감싸며 울려 퍼졌다.

 "천하를 그리고자 한다면 맑은 눈이 있어야겠죠? 듣기만 했었는데 이런 분도 오시고..... 영락없이 혼자 지내야 할 것으로 생각했더니, 손님들이 많이 오셨네요."

 활짝 웃는 서영령이었다.

 순수함이 깃든 얼굴, 불룩하게 곡선이 생겨 있는 배에는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그것을 본 연선하가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생! 아이가 생긴 거여?"

 "호호. 그런가 봐요, 언니."

 "세상에....! 못 본 사이에..... 정말 축하해!!"

 연선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내더니, 이내 달려가 서영령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하운과 매한옥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너희는 축하 안 해?"

 "우리는 알고 있었답니다. 사저."

 "사저, 명색이 서천각 각주시면 그 정도는 알았어야지요. 누굴 만나러 다니기에 그리도 무심하셨답니까."

 매한옥이 핀잔을 주며 흘끗 장현걸을 돌아보았다. 장현걸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한데... 혼자 지내야 될 줄 알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 몰랐나요? 풍랑은 지금 여기에 없어요."

 "없다고? 어딜 가고?"

 모두가 뜻밖이라는 표정들을 한다. 특히 한백의 표정은 아연실색에 가까웠다.

 "어딜가긴요, 북풍단주에게 갔죠."

 "아, 그렇구나! 저번이 여름이었으니까... 시일이 벌써 그렇게 되었지.....!"

 연선하가 무릎을 치며 미간을 좁혔다.

 "그렇죠. 저번에는 여섯 달을 기약했으니까요."

 서영령의 대답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사람 한백만 제외하고.

 그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서영령에게 물었다.

 "북풍단주라니... 그게 대체 무슨 이야깁니까?"

 "북풍단주와의 비무죠."

 "비무라면... 무공을 겨룬다는 말입니까? 두 사람이?"

 "예. 비무에.... 다른 것이 있나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서영령이다.

 그러나 한백은 결코 그것을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알지 못했을까.

 무당의 마검, 북풍단주와 화산의 질풍, 청홍무적이라면 온 천하가 주목할 엄청난 대결이다. 그런 중대한 사건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한백으로서는 상당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글쎄요. 이번에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죠."

 "이번이라면... 저번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럼요, 저번만이 아닌걸요."

 서영령이 연선하를 돌아보며 곱디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그녀가 연선하에게 물었다.

 "언니, 이번이 몇 번째죠?"

 "글쎄다. 세 번째였나, 네 번째였나?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네 번째? 그보다는 더였던 것 같은데....."

 서영령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운이 매한옥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다섯 번째 아니었나?"

 "그럴 겁니다. 다섯 번째."

 매한옥이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했다. 그것을 들은 한백이 놀란 얼굴로 그대로 물었다.

 "다섯 번... 다섯 번이나 싸웠단 말입니까. 결과는, 결과는 어땠습니까?"

 "한 번도 못 이겼죠. 무당의 마검은 정말 강해요."

 서영령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청풍이 매번 졌다는 이야기다.

 별반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반응, 연선하가 웃으며 물었다.

 "저번에 몇 초 차이로 졌다고 했었나? 이번에는 가능성이 있어?"

 "저번에는? 반 초 차이까지 왔다고 했는데... 여하튼 거의 근접했다고 그랬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승부는 모른대요. 북풍단주도 계속 강해진다나 봐요, 매번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고....."

 "거기서도 더 뻗어나갈 길이 있나?"

 "모르죠. 사신검을 네 자루 다 뽑고, 자하신공을 극성으로 펼쳐도 흑색의 마검으로 펼치는 십단금 일 초를 받아내기 힘들대요."

 "사신검 네 자루를 다 뽑는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군. 근래 들어 풍 사제가 검을 뽑은 적이 있기는 했나?"

 "없지요. 요즘에는 호갑조차도 잘 들지 않던데요. 한데 사신검을 다 뽑고도 이기지 못한다니, 하기야... 북풍단주의 십단금도 인간의 무공이 아니긴 합니다만."

 두 사람의 대결을 상상 속에서나마 그려보는 그들이다.

 좀처럼 꺼내지 않는 신검들을 모조리 뽑아 든 청풍.

 파멸적인 강력함을 자랑하는 무당의 마검, 명경.

 생사를 가르는 싸움이 아니라 지닌 바 무공을 비교하는 비무일지언정, 그것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경천동지의 광경이 되리라.

 "십단금은 강하죠. 그래서... 요즘엔 풍랑도 새 무공을 만들고 있어요. 태사부님께서도 많은 도움 주셨고요. 이번 비무 때 한번 시험해 본다 했는데....... 호호, 어찌 될지는 모르겠네요."

 "글쎄, 뭐 잘되겠지. 다쳐서 돌아오지나 않으면 다행인 거 아냐? 도대체가.... 제 부인은 혼자 남겨두고 말이야.... 홀몸도 아닌데."

 "그렇게요. 언니하고 두 분께서 따끔히 혼 좀 내주세요."

 "혼을 내줘? 혼내줄 능력이 있어야 혼을 내줄 게 아닌가."

 불만이 어린 듯, 불쑥 뱉어놓은 매한옥의 말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모두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이 잦아들 때다.

 한백이 한숨을 내쉬며 한 장의 서신을 꺼내 들었다.

 서영령에게 건네는 서신,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여기까지 와서 만나지도 못하다니, 아쉽군요. 이것은... 제천(制天)의 이름으로 온 겁니다. 청풍 대협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이번에는 위험한 일 아니겠죠? 그러길 빌어요."

 "황보세가 때처럼은 아닐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럼 잘 받아놓을게요. 아참, 이러지들 말고 다들 안으로 들어오셔요. 이렇게 밖에서 서 계시게 만들다니, 제가 정신이 없네요."

 서영령이 손뼉을 치며 짝 말했다.

 웃으며 그녀를 뒤따르는 그들이다.

 강호의 미랴,

 젊은 남녀들의 등 뒤로 다시금 시끄럽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남았다. 하운과 매한옥의 마지막 대화가 그 웃음소리 뒤로 내려앉았다.

 "그나저나... 벌써 다섯 번이나 되었군. 그 북풍단주에게."

 "그러게 말이지요. 풍 사제도 대단한 것이... 언젠간 기어코 이겨놓으려는 모양입니다. 후후후."

 *                   *                       *

 바람이 불어온다.

 청풍.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자연을 마음껏 들이켰다.

 융통무애, 조화교원.

 평상심이 찾아오며 기(氣)의 흐름이 맑아졌다.

 커다란 조화의 힘이다.

 평상심을 아무것도 담지 않은 무(無)의 경지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틀린 이야기다.

 평상심은 말 그대로, 삶을 살아가는 평상시 그대로의 마음이다. 언제나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숨을 쉬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듯, 그저 살아가는 일상이 곧 평상심의 경지를 말한다.

 함께 웃고, 함께 근심하며, 함께 슬퍼하고, 함께 즐거워한다.

 그것이 삶이었다.

 청풍은 서영령과 깉을 같이하며, 인간의 도(道)를 얻었다.

 "백호는 금(金)이고, 청룡은 목(木)이죠? 주작은 화(火)고, 현무는 수(水)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오행(五行)으로 보았을 때 하나가 빠지죠. 토(土) 말이에요."

 "토(土)라........"

 "예. 오행을 사방으로 배치한다면, 중앙의 자리가 되겠죠.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대지(大地)야 말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니까요. 옛 사람들은 중앙에 있는 신수(神獸)로 황룡(黃龍)을 말하기도 하고, 등사(騰蛇)나 구진(句陳)이 있다고도 했는데.... 그렇다면 중앙에 있는 검(劍)은 없을까요?"

 "중앙에 있는 검... 글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래야 오행기(五行氣)가 완성되는 것 아이에요? 그러면 더 강해질 수 있잖아요."

 "물론 일리 있는 말이야. 하지만 령매.... 나에게 오행기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아."

 "예?"

 "북풍단주와 겨루는 것은 승패를 가르기 위함이 아니야.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지. 게다가 난 이미 필요한 것을 다 얻었어."

 "다 얻었다고요?"

 "그래. 령매가 있잖아."

 그렇다.

 청풍은 이미 모든 것을 얻었다.

 사람을 얻고, 함께할 생명을 얻었으니 또 다른 검 따위는 원할 필요가 없었다.

 진기도 마찬가지였다.

 자하진기, 자하신공은 음양이 교통하는 신기(神氣)다. 거기에는 이미 하늘과 땅이 함께 있었다.

 중앙에 토(土)를 둔다고 하더라고 그 꼭대기엔 하늘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인간이 있다.

 수화목금, 천지인.

 보는 방식의 차이다. 결국 사람은 사람의 길을 가야 했다.

 사람은 볼이 아니다. 물도 아니다.

 나무도, 금도, 땅도 아니었다.

 인간지로(人間之路), 거기에 무공도 사랑도 협도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결국은 하나라는 이야기다?

 그렇지 만도 않았다.

 사람이 가는 길이라고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이 있는 법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청풍이 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굳이 하나를 꼽자고 했을 때.

 바람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흥, 노상 바깥으로 나돌기만 하면서..... 요즘 강호에서 풍랑을 뭐라 하는지 알아요? 멈추지 않는 바람이래요!"

 "바람은 원래 멈추지 않는 법이잖아."

 "거 봐요."

 "대신 한곳을 영원히 맴돌 수도 있지."

 "...내 곁이라고는 말 못할걸요?"

 "왜 말 못해. 영원토록 맴돌 곳이 령매의 옆에 말고 어디에 있겠어."

 "농담 말아요."

 "농담이라니. 무슨 소리야."

 따듯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청풍의 팔에 고개를 파묻는 서영령.

 자신의 배를 감싸 안는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감만이 가득했다. 손을 뻗어 더 큰 곡선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배를 쓰다듬고, 맑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청풍의 얼굴에도 밝은 웃음이 떠올랐다.

 지는 해,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노을 속을 스쳐 갔다.

 노을을 비껴 간 바람.

 내일 아침이 되고, 언제가 밤을 지나 다시 한낮을 달릴 때.

 그것은 온 천하를 휩쓰는 질풍이 될 수도 있으리라.

 청풍.

 화산의 질풍검.

 잔잔한 미풍으로 시작한 한 사람이, 천하를 질주하는 질풍이 될 때까지.

 그의 삶은 그의 이름처럼 한줄기 바람과도 같았다.

 <화산질풍검> 마침.

 작가 후기.

 또다시 하나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무당과 화산을 들르고 나니, 저절로 소림의 숭산에 눈이 갑니다만... 다음 이야기로 무엇을 쓰게 될지는 아직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2005년 질풍검이 달려온 만큼 다사다난하게 보낸 일 년입니다.

 다음 이야기가 무엇이 되든지 간에, 내년에는 조금 더 즐거운 나날과 함께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화산질풍검에 못다 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군산에서 벌어졌던 일들과 악양에서 있었던 암투들, 그리고 육극신과의 싸움 직후, 청풍이 무사히 살아나가게 된 장면 등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화산질풍검에서는 훗날 쓰게 될 다음 이야기들을 위하여 내용의 상당 부분을 아껴두게 되었습니다.

 혹,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있으셨거나 전개상 급박하게 넘어간 부분들이 있으셨다면, 군산대혈전의 또 다른 주역인 팽가오호도와 어쩌면 바로 다음에 쓰게 될지 모를 소림의 백무한의 이야기에서 마저 보충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윤곽을 잡아놓고 스토리를 확정한 이야기들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 한백무림서가 완결되는 그날까지, 긴 시간 함께해 주시길 염치 불구하고 간곡한 부탁의 말씀 올립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행복화 건강이 함께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한백림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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