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북경 : 성장
아이는 꿈을 꾸고 있었다.
황량하고 거친 사막, 그리고 거기서 불어오는 후끈한 모래바람 그리고 하늘 높이 떠서 세상을 굽어보는 태양까지 그곳은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했던 곳이다.
다시 끝없이 펼쳐진 녹색의 초지
하늘과 땅이 붙어 버린 곳.
그리고 붉은 물로 염색한 그의 아버지의 옷,
아버지의 옆에 박혀 있는 검푸르고 붉은 창.
아이는 요 며칠간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병풍처럼 사막, 모래바람, 피, 창, 옷, 웃음, 사막, 모래바람, 피, 창, 옷, 웃음 계속해서 아이는 아비의 죽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랬 동안 반복했을까.
더 이상 무엇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새로운 태양이 뜨는 것을 보면서 용악은 침전됐던 정신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떠지지 않는 눈꺼풀 밖으로 붉게 물든 세상이 보이고 삐그덕 거리는 나무판이 어긋나는 소리와 자세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용악은 슬슬 정신을 차려가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지... 난 왜 누워 있는거지?’
용악은 기억을 천천히 하나씩 더듬어 가며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지 생각을 이어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그 파란 하늘과 붙어있는 푸른 녹지. 그 한가운데 서있는 무언가...
“아......”
아버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가슴에 창을 박아 넣던 아버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느냐?”
“예.”
“깨어나거든 연락하도록”
“예. 장군님”
“꼬맹아. 빨리 좀 일어나라. 내가 언제까지 너를 돌봐야 하는 거냐? 내가 이래 뵈도 북경에서 알아주는 사람이란 말씀이다 이 말이다. 응? 향월이를 못 본지가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건지 원. 다 너 때문이다 이 말이다.”
용악을 돌봐주던 병사는 장군이 나가자마자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병사만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용악이 쓰러진지도 벌써 2달이 넘어 3달이 다 되 가고 있었다.
비록 훈련을 받지는 않지만 그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용악만 돌봤을 병사가 얼마나 지루 했을 것 인가.
병사는 용악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방금 전에 깨어난 용악은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병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내가 쓰러진지 벌써 2개월이나 지났다고? 그럼 여기는 어디지... 왜 여 기 와 있는거지...’
일단은 병사에게 자신이 깨어났음을 알리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벌려 말을 하려 했으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알 수 없는 신음소리 뿐이었다.
“으으으....”
“으응? 무슨 소리지?”
병사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혹시 용악이 깨어났나 싶어서 용악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용악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어어?! 꼬마야, 꼬마야 정신이드냐? 잠깐만 기다려라.”
병사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 허승대장군께 기별을 넣고 의약당에 가서 의원을 모셔왔다.
오랜동안 이 한 순간을 위해 준비해 온 듯 병사의 몸놀림은 망설임이 없었다. 의약당의 의원은 도착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용악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면서 물수건을 가지고 얼굴을 닦아 주었다.
“정신이 드느냐?”
용악는 자신의 얼굴을 닦고 있는 차가운 물수건을 느끼며 점점 정신을 되찾고 있었다.
‘이 목소리는 누구지.. 병사가 나가서 누구를 데려 온거야.’
용악은 눈을 뜨려 애를 썼지만 떠지지는 않았다.
눈물과 속눈썹이 달라붙어 용악이 깨어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누군가 용악의 눈을 물수건으로 깨끗하게 닦고 나서야 서서히 눈을 뜰 수 있었다.
다행이도 해가 저무는 시간이여서 햇빛은 그리 밝지 않아 용비의 눈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어스름하게 붉은 빛이 창을 통에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는...”
용악은 말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노력하였으나 온몸이 물에 빠진 솜처럼 축 늘어져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다리가 자신의 다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용악이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알았는지 어깨를 가만히 누르며 말을 했다.
“아이야. 아직 몸을 움직이는 것은 무리란다. 네가 움직이지 않은 지도 벌써 2개월이 넘어가니... 비록 그동안 꾸준히 너의 몸을 주물러 혈액순환을 도왔지만 아직 근력이 회복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단다. 아..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어쨌든 좀 더 누워 있거라.”
용악은 자신에게 말을 하며 자신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형적인 의원의 옷차림에 긴 흰 수염이 있는 나이들은 의원인 듯 했다.
“어떻소? 괜찮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누군가 의원에게 말을 건넸다. 문은 빛에 지나가는 곳이 아닌 그늘진 곳 이어서 누군지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를 보아 자신의 아버지 나이와 비슷할 듯 했다.
“예, 장군님 몸에 큰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못해서 영양 결핍이 조금 있고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굳어 있는 것뿐입니다. 1주나 2주정도만 운동을 하면서 음식 조절을 한다면 보통 아이들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흠.. 그럼 건강을 되찾을 때 까지 잘 돌봐주시구려. 너는 저 아이가 건강을 찾을 때 까지만 같이 있다가 다시 복귀하도록”
장군이라 불린 사람은 의원에게 부탁을 하고 용악을 돌봐주던 병사에게 명령을 내린 후 밖으로 나갔다.
의원과 병사의 노력으로 용악은 1주일 후에 침상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으며 2주가 다 되어 갈 때 쯤에는 예전처럼 뛰어다니고 창을 쥘 수 있었다.
그동안 용악은 이곳이 대장군부 라는 것과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사람이 허승대장군이라는 사실과 연왕은 남쪽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내려갔고 북경에는 허승대장군 만이 와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실을 용악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의 걱정은 아버지의 시신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과 서축군이 어떻게 하고 있는 가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아 용악은 궁금증을 혼자서 삭히고 있을 뿐이었다.
용악이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을 때, 용악은 자신을 돌봐주고 있는 허승대장군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왜 자신을 돌보고 있는가에 대해 궁금했지만 꾹 참고 허승대장군을 만나기만을 기다렸고 마침내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다. 용악은 자신을 돌봐준 병사를 따라 대장군부 안에 있는 허승대장군이 머무는 곳으로 행했다.
허승대장군이 머무는 곳이 도착하자 그 병사는 다른 병사에게 용악을 맡기고 떠났고 용악은 다른 병사의 뒤를 따라 허승대장군이 머무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대장군부는 그가 살던 서축의 병영과 비슷해서 큰 위화감이나 어색함은 들지 않았다.
용악이 들어선 방에는 단정하게 정리된 서고가 한쪽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장군도와 창 및 여러 가지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창을 뒤로 하고 놓인 의자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나이는 짧게 자란 검은수염과 단정하게 정리한 흰머리 하나 없는 검은머리로 보아 3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 호위였던 강린 아저씨가 저런 모습이었다.
능숙하게 서류를 정리하고 직인을 찍고 무언가를 쓰면서 정리하는 모습이 마치 숙련된 문사처럼 보였다.
'이 사람이 허승대장군?'
용악을 데리고 온 병사는 나가지 않고 책상 맞은편에 위치한 의자에 앉았고 용악을 자신 옆에 놓인 의자에 앉혔다. 책상 맞은편에 앉은 허승대장군은 용악을 바라보지도 않고 서류를 정리하면서 용악에게 물었다.
기세나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을 주는 맑지 않은 목소리였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대충 알고 있겠지? 내가 누군지도 말이야... 그럼 내가 왜 너를 데리고 있는지는 알겠나?”
그 사람은 마치 제자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스승처럼 용악에게 물었다.
‘당신이 왜 나를 데리고 있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내가 왜 여기 있는거지? 서축에 있지 않고? 서축군은 어떻게 되었지?’
용악은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를 바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