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화산파(華山派)
불은 성스러움을 뜻하면서도 그와 함께 패도를 뜻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정화시키면서 그 어떤 것도 태워 버리는 불. 그것은 마교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늘이로군.”
“그렇습니다.”
마교 교주 천마대제 혁린우의 말에 태상장로인 수월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혁린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화로에서 불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성스럽다 생각되는 불꽃이다.
“모든 것은 이 불꽃처럼 자신을 불사르기 마련이지. 특히 사람은 더욱더 그래.”
혁린우는 화로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불길이 거세지며 그의 손을 집어삼키듯 휘감았다. 하지만 혁린우는 전혀 뜨겁지 않은 듯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불덩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사르고 난 뒤 남은 재는 새로운 불씨의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지. 그렇지 않소?”
“불은 모든 것을 소멸시키지만 모든 것을 탄생시키기도 하잖습니까?”
“하하! 맞아, 맞아. 그게 바로 우리 태상장로께서 나에게 가르친 말이었지. 그래서 우리가 불을 숭상하기도 하는 것이고. 소멸과 탄생을 동시에 지니는 것은 불 말고는 없을 거야. 그것은 곧 불멸을 뜻하지.”
혁린우는 웃음을 터트리며 화로에서 손을 거뒀다.
“정파 애들이 오늘을 기념으로 화산에 사람을 보낸다더군.”
“…….”
“우리도 사람을 보내야 하지 않소? 화산엔 크나큰 빚이 있으니까.”
“하지만 화산은 멸문하지 않았습니까?”
“화산파는 멸문했지만 화산은 남아 있소이다.”
“…….”
혁린우는 수월화를 바라보다 눈을 감으며 태사의 깊숙이 몸을 묻었다.
“철영을 보내도록 하지.”
“예? 하지만 그곳은 정파의 중심지입니다.”
“됐소. 철영이라면 충분하니까. 그 양반이 정파 나부랭이들에게 당할 리는 없겠지. 나 역시 그 양반은 한 수 접어주니까. 아니, 차라리 정파 놈들에게 제발 죽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나 역시 중원으로 잠시 외출 좀 해야 하겠소. 연락이 왔더군. ‘그쪽’에서.”
말을 내뱉은 혁린우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수월화는 그 눈빛에 압도되어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마선자(魔仙子) 마옥림께는 어찌 말씀하실 겁니까?
“…….”
수월화의 말에 혁린우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
‘중원에 다녀올 것이오.’
‘어머, 그래요? 저도 가나요?’
‘아니요. 혼자 갈 것이오.’
‘얼마나 걸리나요?’
‘한 서너 달?’
‘…이런, 쉬팍 새……!’
거기까지 생각한 혁린우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잠시 후 결단을 내렸는지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었다.
“몰래 갈 것이오.”
“예?”
수월화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만큼 그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태상장로께서 대충 둘러대시구려. 맞아! 지옥동(地獄洞)으로 애들 수련하는 거 보고, 강연하러 간다고 하시오.”
“…….”
“…그럼 난 이만. 참! 결코 들켜서는 안 되오.”
혁린우는 태사의에서 일어나며 빠르게 경전을 빠져나갔다. 수월화는 그저 안쓰러운 눈으로 경전을 빠져나가는 혁린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
화산(華山).
매화나무가 대표적인 화산은 도가의 명산이자 검파로 유명했던 천하제일문인 화산파가 자리 잡았던 곳으로 중원의 오악(五嶽)으로도 불리고 있다. 그런 매화나무가 유독 많아 매화 향으로 가득 찬 숲길을 여러 사람들이 오르고 있었다.
“이곳이 화산파가 있었다는 그 연화봉이군.”
“네. 꽤 아름답네요? 거기에 매화 향기가 저의 마음을 사로잡는군요.”
“모용 소저의 외모에 비하면 매화나무 따위는 길가의 들풀에 불과하오.”
“어머나?”
두 명의 남녀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에 혀를 내밀었다. 방금 말을 건넨 자는 풍류공자라고도 불릴 정도로 많은 여심을 사로잡은 남궁휘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 소문이 어디 갈까 했는데 지금 보니 어불성설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모용미가 그에게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보였다.
그런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고 있던 모용수의 이마에 굴곡이 졌다.
“한번 크게 당해야 정신 차리려나.”
“크큭.”
모용수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당문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를 문질렀다.
“배가 고픈데?”
당문기의 말에 모용수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문질렀다. 사실 자신도 배가 고팠다.
“저도 그러네요. 그런데 이런 곳에 객잔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풀들도 많은 걸 보니 관리하는 사람도 없는 거 같은데. 여기가 예전엔 길이었다면서요?”
모용수는 허리까지 자라 있는 풀잎을 손으로 휘저으며 말하고는 당문기를 바라보았다.
“조금만 참아 봐. 여기로 올라가면 곧 상궁에 도착할 것이야.”
지도를 펼치며 당문기가 말했다. 지도라고 불리기에는 상당히 조잡해 보이는 그림이었다. 지도라기보다는 약도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모용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런데 그 전에 뭔가 먹었으면 합니다.”
“건포가 있잖은가?”
모용수의 이마에 쳐진 굴곡이 더욱 깊어졌다. 삐쩍 마른 건포가 질린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여행의 묘미는 건포를 씹으며 대로를 걷는 거라고. 그 탓에 세 뭉치나 사 놓은 건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일단 올라가 보도록 하지. 가다가 산짐승이라도 나오면 잡아먹으면 될 테고.”
“하긴, 화산은 오악 중 하나잖아요? 이런 곳에 동물이 없으면 그 어디에도 없겠죠. 거기에 화산파는 사십오 년 전에 멸문을 당했으니 이곳엔 사람들의 발길도 끊겼을 테고.”
“그렇지. 음?”
당문기는 순간 눈을 빛내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사람들이 동시에 발을 멈췄다.
한창 모용미와 대화를 나누던 남궁휘는 앞의 사람이 걸음을 멈추자 얼굴을 구겼다.
“아나, 어떤 자식이 길을 막아?”
“으음…….”
당문기는 뒤에서 튀어나온 욕설에 이마를 구겼다. 그러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남궁휘를 한 번 쏘아본 당문기는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는 한 청년이 낫을 들고 풀을 자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는 모습이지만, 이곳은 사십오 년 전에 멸문한 화산파의 중심지인 상궁의 근처였다. 청년의 모습은 평범하나 있는 장소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저자는?”
“한번 물어보고 오게나.”
“끄응…….”
모용수는 신음을 뱉으며 낫을 들고 있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근처까지 다가갔음에도 청년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낫질에 전념하고 있었다. 얼마나 정성을 들여 낫질을 하고 있는지 손짓 하나하나에 기품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흠흠. 저, 소형!”
“음? 누구쇼?”
말을 걸자 그제야 낫질을 멈춘 청년이 모용수를 바라보았다. 모용수는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본인은 모용세가의 모용수라 하오. 혹시 이곳에 기거하고 계시오?”
“그렇습니다만?”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상궁까지 안내해 주실 수 있소?”
“충분히 실례가 됩니다.”
모용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록 낫질은 천하일품이라고 하나 자신은 모용세가의 차남이다. 결코 이렇게 무시당할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때 사내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이렇게 놔두는 것은 집주인으로서 예의가 아니로군요. 안내하겠습니다. 아, 본인은 진철이라 합니다.”
사내의 시선은 모용수를 넘어 모용미와 그녀의 주위에 있는 여인들에게 가 있었다.
과거 천하제일 문파로서 이름 높았던 화산파의 중심지 상궁에는 거의 다 쓰러져 가는 기와집만이 몇 채 남아 있었다.
진철은 주변을 훑어보며 입가가 저절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몇 년 만에 본 여인들 때문이다.
“다 쓰러져 가는 기와집이라니……. 쯧! 그 명성 높던 화산파도 이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군.”
당문기는 혀를 차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과연 오악이라 불릴 만큼 화산은 아름다웠다. 더군다나 은은하게 풍겨 오는 매화 향에 저절로 풍월을 읊고 싶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안에 자리 잡은 화산파는 조금씩 조금씩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한때 중원을 풍미하던 검파가 사라지는 모습에 당문기는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비록 진철이라는 사내가 이곳에서 기거하며 사람의 손길을 새기고 있다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사라질 것이다. 자연의 법칙 앞에 사람의 존재는 너무나 미약했으니까.
“그런데 배가 고프군.”
“아, 마침 저도 식사를 할까 했는데 잘됐군요. 누추한 곳이지만 들어오시죠.”
진철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건물을 바라보던 남궁휘의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그나마 멀쩡해 보인다지만 다른 건물에 비해서 그렇다는 거다. 과연 저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의심될 정도로 허름했다.
“쯧, 삼류 문파도 이보다는 낫겠군.”
“호호! 그러네요. 하지만 이미 멸문해 버린 화산파에 이런 건물이 남아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대단하다 할 수 있겠군요.”
“흥! 그래 봐야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일일 뿐. 솔직히 본인은 화산파가 천하제일문이었다는 것을 믿지 않소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게 강대했던 문파가 한낱 마교 따위에게 무너질 리 있겠소?”
남궁휘의 말을 들은 당문기와 모용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용수는 앞서 가던 진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들은 대화를 그라고 듣지 말란 법은 없었으니까. 거기에 그의 목소리는 마치 들으라는 듯 상당히 컸다.
진철은 가만히 서 있다가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뭐, 사십오 년 전에 거의 멸문당한 문파니까요. 하하하!”
“음…….”
당문기는 신음을 흘리며 뒤에 있는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궁휘는 콧방귀를 뀌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모용미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내가 대신 사과하겠소.”
“됐습니다.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소형은… 아! 소형이라 불러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그럼 소형은 이곳에서 사시는 거요? 화산과는 무슨 관계가?”
당문기의 물음에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화산파 제십칠 대 장문인입니다.”
“…….”
당문기와 모용수는 물론, 그 뒤에 서 있던 남궁휘나 모용미를 포함한 십수 명의 무림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궁휘와 모용미는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이다. 진철과 그들의 배분은 하늘과 땅의 차이였으니까.
“하! 이런 같잖은 문파에서 장문인이라니.”
남궁휘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당문기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휘! 자네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왜 그럽니까? 맞잖습니까? 저 꼬락서니를 보세요. 누가 화산파 장문인이라 여기겠습니까?”
“자네!”
“흥!”
남궁휘는 고개를 돌리고는 휘적휘적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 같아서는 저런 곳에 발도 디디기 싫었지만 가문을 대표해 이곳으로 왔기에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그 뒤를 모용미와 다섯 명의 사람이 따랐다.
“죄송합니다.”
당문기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투 역시 존대로 바뀌었다. 화산파의 장문인이라면 자신과도 까마득한 배분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진철은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전 당문의 독룡대를 맞고 있는 당문기라 합니다. 부디 후배의 죄를 용서하시지요.”
“괜찮다니까요? 저 하나뿐인 문파입니다. 아까 그 사람이 한 말이 맞아요. 그리고 말 놓으세요. 제가 더 어려 보이니 형님이라 불러도 되겠죠?”
“그, 그럴 수는…….”
“에이, 소심하게 왜 그러세요? 자! 드시지요, 형님.”
“…….”
어느새 형님이 된 당문기는 진철의 손에 이끌려 건물로 향했다. 그 뒤를 모용수와 나머지 인물들이 따랐다.
그때 앞서 가던 진철이 무언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아 모용수를 바라보았다.
“넌 나보다 어려 보이니까 동생 해.”
“예?”
진철의 말에 모용수는 눈을 깜빡였다.
“동생 몰라?”
“하, 하지만.”
“너, 아까 내가 낫질하는 거 봤지?”
“예.”
“내가 생각해도 난 낫질은 타고난 거 같거든. 그런데 너, 나보다 잘할 수 있어?”
“아뇨.”
“그럼 말을 하지 마.”
“…….”
진철은 고개를 돌리며 당문기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바라보고 있던 모용수는 눈을 빛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설마 낫질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넘어질 줄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때 진철이 고개를 돌렸다. 모용수는 뜨끔하며 시선을 돌렸다.
“아차.”
“뭡니까?”
“요깃거리가 없군. 용수는 나와 함께 고기나 구하러 가자.”
“용수?”
“‘모용수’는 길고, ‘수’는 이상하니까. 용수, 좋지? 나도 좋아. 그러니까 따라와. 아, 형님은 안에 들어가 계시죠. 들어가서 마룻바닥에 누워 있으면 참 시원하니까 참고하시고요.”
진철은 당문기의 손을 놓고 모용수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모용수가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왠지 이런 진철이 싫지는 않았다.
당문기는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나머지 인원과 함께 건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모용수에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지?”
“동생 되기 위해 온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전 아직 당신의 동생이 된다고 한 적 없습니다.”
배분이 걸려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한 모용수는 불만을 품으며 입을 열었다.
“짜식, 소심하기는.”
순간 모용수는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진철의 음성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발길도 없던 곳에 인간들이 갑자기 몰려드니 궁금해서 그래. 말해 봐.”
“…….”
모용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마교로부터 무림이 안전할 수 있던 것은 화산파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화산파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건 화산파와 달리 다른 문파들은 그러지 않았다. 어떤 문파는 반수 이상이 본 문에 남아 있었고, 안위의 핑계로 지원조차 하지 않은 문파 역시 수두룩했다.
이런 싸움에 꼭 자신들이 모든 걸 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그때 화산파가 다른 문파들처럼 안위를 생각해 모든 걸 걸지 않았다면? 아마 중원은 마교의 손아귀로 넘어갔을 것이다.
또한 그런 희생을 하며 중원을 구해 낸 화산파이거늘, 지금에 이르러서는 과연 화산파가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무림인이 수도 없이 많았다. 알고 있다 한들 한 번이라도 그들을 위해 향이라도 피운 적이 있던가? 대답은 ‘없다.’였다.
모용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실은… 올해로부터 혈무대전에 참가했던 모든 문파들이 봉문에서 벗어나는 해가 되는 날입니다. 그것을 축복할 겸 혈무대전에서 희생하신 화산파분들께 인사를 올리기 위해 각 문파 후기지수들이 이렇게 오게 된 겁니다. 아, 당문기 형님은 당문의 독룡대 대주로 저희의 보호자이십니다.”
“그러니까 고맙다고 인사나 하러 들른 거군.”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용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책감에 차마 진철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자신들은 화산파를 잊고 지냈거늘, 진철은 아직도 화산파에 남아 선조의 영광과 그들의 안식처를 지키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모용수의 모습에 진철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됐다. 그렇게 신경 쓸 건 없어. 그런데 제사 지내러 오면서 먹을 것도 안 가져오나?”
“예?”
“됐어. 고기나 구하러 가자.”
진철은 모용수의 어깨를 잡아 이끌며 숲 속으로 들어갔다. 진철에게 이끌리듯 딸려 가던 모용수는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
“아, 그런데 들은 얘기로는 화산파는 도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도사가 고기를 먹어도 됩니까?”
“왜? 도사는 고기 먹으면 안 돼? 누가 그러디?”
“원래 그런 거 아닙니까? 도사가 고기 먹으면 무슨 도삽니까? 고기 먹는 도사는 말코입니다.”
모용수의 말은 진철에게 충격이었다. 그는 고기를 무척 좋아했었다.
진철은 무언가 생각하듯 고개를 숙이더니, 잠시 후 모용수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모용수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도사 안 할래.”
“…예?”
진철의 말에 모용수의 표정이 괴기하게 변했다.
당문기 일행은 어떻게 잡았는지 진철과 모용수가 가져온 멧돼지와 노루를 요리했다. 그래 봐야 귀하게 자란 그들이었기에 진철이 손질한 고기를 굽는 게 다였다. 물론 고기를 손질하는 진철의 모습에 적지 않은 인원이 놀라야 했다.
그렇게 제사상을 준비한 당문기 일행은 진철의 안내를 따라 상궁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비석에는 화산파의 모든 장문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비석이 바로 화산파 장문인들의 묘였다.
“그런데 화산파는 십오 대에 멸문하지 않았나요?”
“제 사부님이 십육 대고, 제가 십칠 대입니다.”
“아…….”
진철의 말에 제갈세가의 제갈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어렸을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화산파의 중심지에 와 있는 것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혹시 사부님의 존함이?”
제갈영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나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영웅의 제자일까, 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옥 린 자, 수 자를 쓰십니다.”
“아… 그렇군요.”
안타깝게도 그녀의 기억 속에 옥린수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녀의 표정에 흥미가 이는지 진철이 모용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구지?”
“제갈세가의 셋째 딸입니다. 이름은 제갈영이고요.”
모용수가 답하자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몸을 슬쩍 훑어보았다.
“좋군.”
“예?”
진철은 미소를 지었다. 제법 지적인 듯 보이는 여인이 몸매 또한 훌륭했다.
진철의 말에 의문을 표한 모용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철은 그런 모용수에게 손을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여기가 바로 저희 화산파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예를 갖추시면 되겠습니다. 아, 여인분들은 좀 앞으로 나오시고 남자분들은 뒤로 빠지세요. 거기! 뒤로 가시라니까요?”
진철의 말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왜 자신들이 처음 본 사람의 말에 따라야 하는지 의문을 표하면서도 이곳 주인이라는 생각에 아무 말 없이 따랐다.
맨 앞줄은 여인, 그 뒤에는 남자가 자리 잡았다. 당문기는 그들의 앞으로 나왔다. 이들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그럼 제를 다 올리시면 아까 그 건물로 오세요.”
“자네는?”
당문기는 아까 잘라 놓은 멧돼지 머리에 전표를 꽂아 넣다가 진철의 말에 그를 바라보았다.
식사하면서 살갑게 구는 진철의 모습에 어느 정도 성격을 파악했는지, 당문기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진철에게 말을 놓은 상태였다.
진철은 당문기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매일 드리는 인사예요. 한 번 안 한다고 화내겠습니까? 뭐, 오늘도 드렸고요. 하루에 몇 번씩 너무 자주 하면 싫어해요. 그러니 전 나가 있죠.”
“으음… 뭐, 상관없겠지. 알겠네. 끝내고 거기로 가도록 하지. 끄응, 멧돼지 얼굴이 조금 험악한데…….”
당문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멧돼지의 얼굴에 미소를 만들기 위해 송곳니를 잡고 비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철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상청궁이라 희미하게 쓰인 건물로 향하던 진철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네.”
바로 고개를 숙인 진철은 눈을 비비며 상청궁 안으로 들어섰다.
“무림이라… 귀찮아.”
나지막이 중얼거린 진철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청궁 깊숙이 위치한 장문실. 그곳으로 들어간 진철은 바닥 한가운데 꽂혀 있는 하나의 장검을 바라보았다. 분홍빛이 감도는 검집에 분홍빛의 손잡이가 달린 검이었다. 바로 화산파의 신물인 자하신검이었다.
진철은 망설임 없이 자하신검을 손에 들었다. 자하신검이 살짝 울리며 검명을 토해 냈다. 자하신검을 바라보던 진철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부님, 무림인들이 왔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듯 가벼운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오히려 활활 타오르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우리를 잊고 있던 그들이 이제야 찾아왔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지막하게 입을 열던 그 순간 창문을 타고 넘어온 바람이 진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도 아시다시피 저 상당히 게으릅니다. 하하하!”
진철은 자하신검을 본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고는 등을 돌려 장문실을 빠져나왔다.
결국 멧돼지의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낸 당문기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십수 명의 남녀가 고개를 숙이며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일 대부터 시작하여 십육 대 장문인의 비석까지 수십 번의 절을 반복하고는 제사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문기는 모용수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넌 언제부터 동생이 된 거냐?”
“네?”
모용수가 되묻자 당문기는 상청궁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행동에 모용수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대뜸 하라더군요. 큰 형님도 들으셨잖습니까?”
“끄응, 나한테도 대뜸 형님이라 부르더니만.”
“하지만… 싫지는 않더군요.”
모용수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걸었다. 그 미소를 본 당문기 역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갑게 대하는 그의 모습에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산을 버린 우리에게 그렇게 친근하게 대하다니…….”
“참, 그런데 무공은 어떨 거 같습니까?”
“무공이라… 글쎄?”
모용수의 말에 당문기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멸문을 당하다시피 한 화산이었다. 그리고 진철은 그 화산의 장문인이다.
보통 한 문파의 우두머리라면 절정 고수급 이상의 무공 실력은 지니고 있다. 하지만 화산이다. 이미 멸문해 사라졌다 여겼던 화산이란 말이다.
“내가 보기엔 그다지 무공을 배웠다는 생각이 안 들어. 표시가 안 나. 아까 걷는 거 봤지? 규칙 없이 제멋대로더군.”
“역시 그렇군요.”
“아마 잘해야 한 이류나 될 거 같군.”
당문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명성을 울리던 화산파가 이렇게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사람은 참 좋아 보였는데 말입니다.”
“맞아. 아까 밥 먹을 때도 그렇고 자네에게 하는 것도 그렇고, 보니까 털털하니 사내답고 좋더군.”
“뭐, 무공이 부족하다면 어떻습니까? 사람이 중요한 것을.”
“그렇지? 하하하!”
***
무림맹에서 온 후기지수들이 되돌아간 지 벌써 사 일이 지났다. 진철의 존대에 어색해하던 당문기는 화산에서 며칠 지내면서 금세 친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모용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떠나게 되었고, 진철은 왠지 모를 허전함에 마룻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무림이라…….”
진철은 눈을 끔뻑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파리 한 마리가 그의 콧잔등에 앉은 것이다.
“후!”
입술을 말아 바람을 불자 파리가 날아갔다. 진철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시야에 주변의 모습이 들어왔다.
언제 쓰러져도 당연해 보이는 건물. 비록 진철이 보수공사를 했다고는 하나 전혀 나아진 점이 보이지 않는 건물들이었다.
그런 건물들을 바라보다 진철은 전에 들었던 사부의 말을 떠올렸다.
“화산파의 재건이라…….”
말은 쉽다. 말로는 코딱지로 바위도 부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가장 필요한 것이 진철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돈이었다.
“돗자리라도 펴야 하나.”
마침 기발한 계획이라도 떠오른 듯 몸을 일으켜 세우던 진철은 멈칫하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돈을 벌 생각을 하자니 귀찮았던 것이다.
“무위도식(無爲徒食)이 최곤데.”
혼자 중얼거리던 진철은 양팔을 벌리며 그대로 드러누웠다.
“어차피 사람은 무에서 나와 무로 돌아갈 것이니… 화산파 재건해서 뭐하나.”
며칠 전에 한 다짐이 사그라졌다. 이대로 놀고먹는 것도 좋다고 여겨졌다.
어차피 상청궁 지하에 파 놓은 굴속에는 갖은 영약과 보검, 비급들이 쌓여 있었다. 전부 화산파의 보물이었다. 돈이 없다면 거기서 하나 집어 들고 팔아 버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화산파를 재건하게 된다면 그 영약과 보검은 물론 비급은 더더욱 팔 수 없었다. 후세에 전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흡!”
순간 진철이 눈을 부릅떴다. 영약들이 자신의 손을 떠나간다고 생각하자 배가 아파 온 것이다.
진철은 누운 상태에서 어기적어기적 마룻바닥을 기어 신발이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응?”
뒷간으로 향하기 위해 턱으로 바닥을 짚으며 꿈틀거리던 진철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한 중년인이 뒷짐을 지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흠흠, 네가 이곳 주인이냐?”
“그렇습니다만?”
진철은 잽싸게 일어나 정좌(靜坐)했다. 진철의 눈이 한순간 빛났다.
중년인이 입고 있는 옷이 상당히 귀해 보였다. 며칠 전 이곳에 들른 당문기 등도 귀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중년인이 입고 있는 옷은 격이 달라 보였다.
“혹시 점이라도 보러 오셨소?”
진철의 얼굴에는 근엄함이 떠올랐으며,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현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말투 역시 달라졌다. 진철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봉이다!’
그런 진철을 바라보던 중년인은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오호? 꽤 어려 보이는데 점도 보느냐?”
“물론이오! 본인이 속세에서 천기자(天氣者)라 불리고 있소이다.”
점은커녕 돗자리에 누운 적도 없었다.
중년인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변했다. ‘천’이라는 단어가 별호에 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어린 나이에 대단하구만! 하지만 난 점을 보러 온 게 아니라네.”
감탄을 내뱉은 중년인이 손을 저으며 입을 열자, 진철은 자신에게 도움이 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는지 정좌한 상태에서 그대로 드러누웠다.
“그럼 왜 왔습니까?”
“끄응! 자넨 손님을 항상 그렇게 받나?”
순식간에 달라진 진철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린 중년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다 쓰러져 가는 모습이었고, 건물 중에는 진철이 누워 있는 건물이 그나마 가장 나아 보였다.
“손님은 무슨. 밥이나 축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에도 어떤 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가서 거덜 나게 생겼으니까.”
이 말을 모용수가 들었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었을 것이다. 이곳에 그들이 머무는 동안 식재료는 모두 그가 구해 왔었다.
진철의 말에 흥미가 이는지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오호? 누가 왔다 갔느냐?”
“화산에 올 애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진철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내 이름은 철영이라 한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진철이라 합니다만?”
“진철이라… 하하하! 정파 무림에 신성(新星)이 나타났군.”
“…….”
철영의 뜬금없는 말에 진철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철영은 그 모습에 웃음을 거두고는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철영의 몸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꽝!
어느새 진철의 코앞으로 나타난 철영이 주먹을 뻗어 진철을 강하게 때렸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마룻바닥이 반으로 쩍 갈라지며 주저앉았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이런 쌍! 왜 남의 집은 부수고 지랄……!”
그때 진철의 신형이 철영의 뒤를 점하고 나타났다. 하지만 철영는 이미 예측했다는 듯 몸을 돌리며 팔을 휘둘렀다.
후웅! 펑!
진철의 팔과 철영의 주먹이 맞닿으며 결코 살끼리 부딪친 소리라 할 수 없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호오?”
철영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오 성의 공력을 이용한 공격이라지만, 설마 자신의 공격을 피하고 주먹을 막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것도 진철은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어디 이것도?”
순간 철영의 오른손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독문 무공인 수라멸천강(修羅滅天强)이었다.
“이런!”
붉게 타오르는 주먹이 다가오자 진철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아홉 개의 공간을 점하며 물러났다.
‘구궁보(九宮步)!’
철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결코 잊지 못할 보법이었다.
형이 달라지긴 했지만 저것은 분명 화산파의 보법인 구궁보였다. 그것도 겉핥기식으로 배운 게 아닌 상당한 경지에 오른 모습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대뜸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부숴 놓고 정체는 무슨!”
진철은 바닥에 놓인 매화 나뭇가지를 발로 차 잡아 들고는 철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철영은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투기가 솟구치는 것을 느낀 것이다. 더군다나 그 상대가 화산파의 인물이었다.
진철은 순식간에 철영의 앞으로 다가서며 나뭇가지를 뻗었다. 나뭇가지는 거침없이 철영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철영의 몸이 흐릿해지며 분산되듯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진철로부터 오 장이나 떨어진 철영은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옷자락이 살짝 잘려 있었다.
“멋지군.”
철영은 감탄을 내뱉었다. 진심이었다. 저 나이에 자신의 옷자락을 자르다니. 앞으로 크게 될 놈이 분명했다.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진철이 그에게 다시 달려들고 있었다.
“흡!”
진철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자색 기운을 띠며 철영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철영은 왼발을 주축으로 허리를 비틀며 오른손을 뻗었다. 붉은 기운이 맺힌 주먹과 자색의 기운이 담긴 나뭇가지가 부딪쳤다.
꽝!
엄청난 굉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철영의 신형이 먼지를 뚫고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가득 피어나 있었다.
“이거 물건이구만.”
“물건은 무슨!”
먼지가 걷히자 진철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역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을 구기며 뒤로 물러나 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는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철영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며 주먹을 바라보았다. 철영의 오른손은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진철은 침을 뱉고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들어 철영을 가리켰다.
“빌어먹을! 갑자기 왜 남의 집은 부수고 난리냐고!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미안하군.”
“미안하면 다요! 이거 수리 누가 해 줄 건데? 당신이 할 거야? 당신이 돈을 줄 거야? 아니면 나무를 잘라다 만들어 줄 거야!”
진철이 부서진 마루를 가리켰다.
“돈이면 되나?”
“엉?”
철영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품속에서 금낭을 꺼내 진철에게 던졌다.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금낭을 받아 들었다.
“그걸로 오늘 일은 사과하지.”
“뭐요! 지금 이 아저씨가 나랑 장…….”
금낭을 열며 입을 열던 진철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금낭에는 황금빛이 가득했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돈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진철이 넋을 잃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금낭을 바라보고 있자 철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나한테 오지 않겠나?”
“허? 지금 이 돈으로 날 사겠다는 거요?”
진철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묻자 철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냥 사과의 의미에서 주는 것일세. 돈 달라면서? 그건 그렇고, 어때? 나한테 오면 자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지.”
“도사를 돈으로 꼬시겠다?”
“안 되나?”
“당연하지!”
진철의 확고한 대답에 철영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 가면 미녀들도 가득한데 아쉽군.”
“…….”
순간 진철의 귀가 꿈틀거렸다.
“보, 본인은 도사요.”
“그래그래, 누가 뭐라나? 그런데 자네, 무공은 어디서 배운 건가? 설마 독학?”
“알 필요 없소!”
진철은 금낭을 잽싸게 품에 넣으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철영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삭신이 쑤시는군.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나이 먹는 게 느껴진단 말이야.”
“…….”
“그런데 아직도 화산이 존재할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
“화산은 지금도 존재할 것이고, 언제까지고 존재할 것이오.”
“호오? 자네 혼자지 않나?”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연 철영의 말에 진철이 발끈했다.
“곧 재건할 것이오!”
“오호라, 재건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자네가 화산 장문인인가 보군.”
철영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진철의 몸이 움찍거리며 상청궁을 가로막았다.
진철의 머릿속에는 철영이란 사람은 어느새 건물 파괴범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철영은 그런 진철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잘하면 그놈들을 끝장 낼 수도 있겠군.”
“그놈들이라니?”
“아아, 있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며 눈치 보는 것들이. 크크!”
진철이 궁금하다는 듯 물어봤지만, 철영은 간단히 대답하고는 몸을 돌리며 걸어 나갔다. 그 모습에 진철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철영의 말뜻이 궁금했던 것이다.
“가는 것이오?”
“화산엔 교주 놈이 시켜서 그냥 들러 본 거다. 기회가 닿는다면 또 오도록 하지.”
“교주?”
교주라는 말에 진철의 몸이 살짝 경직되었다. 그러자 철영이 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명교, 그러니까 너네 말로는 마교라는 단체의 장로일세.”
“마교? 설마 그 옛날에 화산파를 이 지경으로 말아먹은 그 마교 말이오?”
“그럼 마교가 거기 말고 또 있나?”
“흠…….”
철영의 말에 진철은 생각에 잠겼다. 그도 그럴 것이, 마교는 자신의 사문을 망하게 한 주범이기 때문이었다.
원한이 없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거짓말. 하지만 진철은 짧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멀쩡히 오시오. 괜히 또 남의 집 부숴 먹지 말고.”
“호오, 그러도록 하지. 참!”
진철의 말이 의외였는지 철영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진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자넨 궁금하지 않은가? 진짜 화산을 이렇게 만든 자들이 누군지 말이야.”
“화산을 이렇게 만든 자들? 그건 당신들이 아니오?”
진철의 말에 철영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역시 그들에게 속아 넘어갔을 뿐이라네. 내가 말하는 것은 정사마를 이간질하여 전쟁에 빠트린 자들을 말하는 거야.”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처음 듣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다면 속세로 내려와 보게나.”
“속세로 내려간다면 알 수 있소?”
“그거야 모르지. 자네가 하기 나름일 테니까. 그렇게 쉽게 정체를 드러낼 놈들이라면 우리 명교와 화산이 이렇게 당했을 리는 없으니까. 크크크! 그럼 한번 잘 생각해 보게나.”
철영은 마치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바로 몸을 돌리고는 산을 내려갔다.
진철은 도망가듯 산을 내려가는 철영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나마 멀쩡했던 상청궁이 거의 무너질 듯 말 듯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을 항상 자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형도, 장난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따르던 사제와 사매들도. 또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한지 얼굴을 찌푸리지만 눈만은 항상 웃고 계셨던 사부님도.
그렇게 천하제일문으로 명성을 떨치던 화산파는 멸문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갑작스레 잃은 반동인 것일까? 옥린수의 마음에 심마(心魔)가 깃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 말코 도사 또 왔네!”
“이런 육시랄!”
홍등가에 들어서던 옥린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자신은 참아야 했다. 비록 지금은 심마가 깃들어 갈피를 못 잡고 있지만, 자신은 어엿한 도사가 아니던가?
옥린수는 방금 내뱉은 욕설에 자신을 탓하며 양손을 모으고 손바닥을 벌렸다.
“무위도식.”
“…미친놈.”
결국 옥린수는 문 앞에서 쫓겨나며 홍등가를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던 옥린수는 살짝 지쳤는지 나무 그늘로 들어가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허허허, 그놈들 참 잘 뛰어노는군.”
옥린수는 저잣거리를 뛰어다니면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어린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는 심마가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혈무대전이 끝난 지금은 수많은 문파들이 봉문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만큼 백성들의 삶은 평화로웠다. 언제 칼을 휘두를지 모를 불안한 무인들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본좌가 바로 천마대제 혁월린이다!”
덩치가 커다란 아이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자기 키만 한 나무 막대를 들고 외쳤다.
“네가 그 사악한 마도의 우두머리더냐? 난 매화검 옥철린이라 한다! 나의 일검을 받아라!”
갑자기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오며 작은 아이가 나무 막대를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덩치 큰 아이는 가뿐히 그 막대를 피해 내고 팔을 휘둘렀다. 작은 아이는 예상치 못한 반격에 어깨를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정파 무림 천하제일인이라는 옥철린도 별거 아니로구나!”
“크윽! 여기서 쓰러질 순 없다! 내 뒤에는 수많은 무림 동도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렇게 쓰러질 순 없단 말이다! 이랴앗!”
작은 아이가 간신히 일어나 비장한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리며 고함을 터트렸다. 그 순간 그 아이의 주변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옥린수은 깜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앗! 똥냄새!”
자신을 혁월린이라 외친 아이가 뒤로 재빨리 물러났다. 그것은 그 뒤에 서 있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옥린수도 돗자리를 끌며 뒤로 물러났다. 뭘 먹었는지 냄새가 그가 있는 곳까지 풍겨 왔던 것이다.
“으, 으으, 으아앙!”
양팔을 벌리며 어떠냐는 듯 눈을 내리깔던 아이는 급속도로 얼굴이 구겨지더니 울음을 터트리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어, 엄청난 무공이었다! 하지만 본좌를 이기기엔 십 년은 이르구나! 파하하하!”
살짝 물러났던 덩치 큰 아이는 양손을 허리에 두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놈 참 악독한 놈이로고!”
어느새 돗자리를 접은 옥린수는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앗! 늙은 요괴가 나타났다! 물리쳐라!”
“우아아아!”
아이들이 외치며 옥린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옥린수는 초절정의 무인. 아이들의 주먹 따위에 고통이 느껴질 리는 없었다.
옥린수는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았던 것인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앗! 저 늙은 요괴가 웃는다! 더 강하게 쳐라!”
“우아아아!”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기자 아이들은 돌을 집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딱딱한 돌이라도 아이들이 던지는 돌에 옥린수가 상처를 입을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옥린수의 몸에서 저절로 호신강기가 솟아나와 아이들의 공격을 아무런 타격 없이 받아 내고 있었다.
“허허허, 그만하거라. 돌은 심하지 않느냐?”
“앗! 저 늙은 요괴가 비웃는다! 더 강한 무기를 들어라!”
“우아아아!”
자신들의 회심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덩치 큰 아이는 더욱 크게 외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자 아이들은 돌을 내려놓고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쇳덩이로 옥린수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깡깡!
쇳덩이가 호신강기와 부딪치자 꽹과리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역시나 이번에도 아무런 타격이 전해지지 않자 옥린수의 입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허허허, 그만하라니까.”
“더 강하게 쳐라!”
“우아아!”
깡깡깡!
“그만…….”
“더 강하게! 사지를 분질러 놓아라!”
“우아아아!”
깡깡!
“그만하라고!”
잠시 후, 쓰러진 십수 명의 어린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도인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초절정의 무인이었다.
해가 저물자 사람들은 하나둘 장사를 접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옥린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음? 저 아이는…….”
옆에서 넘어갈 듯 말 듯 보이는 해를 벗 삼아 귀가하던 옥린수는 걸음을 멈췄다. 그의 앞에 한 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천마대제라 외쳤던 아이였다.
아이의 얼굴은 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코피도 흘렸는지 검붉은 피딱지가 윗입술에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상처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한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옥린수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한 아낙이 어린아이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 역시 어디서 맞았는지 얼굴에 멍투성이였다.
“흐음…….”
무엇을 느낀 건지 옥린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이의 옆으로 가 앉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여전히 앞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고아더냐?”
“…….”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롭더냐?”
“…….”
이번에도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무엇이더냐?”
“…진철.”
“나를 따라가겠느냐?”
“…….”
옥린수의 말에 진철은 입을 닫았다. 진철의 시선은 여전히 아낙과 아이에게 가 있었다.
잠시 후 아낙과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옥린수와 진철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곧 해가 저물자 어둠이 내려앉았다.
“따라가면… 굶지 않아도 돼?”
“물론이지.”
“…따라갈래.”
“그래.”
옥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철 역시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런데 아깐 왜 천마대제라 했느냐? 그 사람 말고 정파 무림에는 영웅이 많을 텐데?”
“…악당은 멋있으니까.”
“그러하냐?”
“응.”
옥린수와 진철은 오솔길을 걸었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
쪼르르…….
호리병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에서 그윽한 향이 새어 나왔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진철은 봉분(封墳)에 매화주를 쏟아붓고 뒤로 물러나 절을 했다.
제십육 대 화산파 장문인, 옥린수.
비석에 쓰인 글씨다. 이 무덤은 옥린수의 무덤이었다.
“사부님, 상청궁이 무너지려고 합니다. 본 파의 상징인 상청궁이 말입니다.”
진철이 봉분 앞에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잠시 봉분을 바라보던 진철은 미소를 지었다.
“마교라는 곳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본 파를 이렇게 말아먹은 그곳 말입니다.”
말을 내뱉은 진철은 잠시 입을 닫았다. 마치 봉분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그렇게 잠시 있던 진철은 실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습니다. 분명 분노해야 하건만, 머릿속으로 생각할 뿐 이 마음속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군요. 참,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화산을 이렇게 만든 자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진철은 봉분 앞에 놓은 술잔을 들어 올려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사부님께서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이 화산을 이렇게 만든 자들이. 저는 궁금하더군요. 그래서 말입니다…….”
진철은 입을 닫고 다시 술잔에 술을 따라 봉분 앞에 내려놓았다.
“하산할까 합니다. 한번 산을 내려가서 중원이 어떤 곳인지 경험도 해 보고, 또 이제야 이곳에 온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화산을 이렇게 만드는 자들을 한번 찾아보고 싶습니다. 혹시 압니까? 그러다가 문파를 재건할 수 있을지.”
말을 내뱉은 진철은 자신의 옆에 놓인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상당히 게으릅니다.”
스르릉.
손에 들린 자하신검이 아름다운 달빛에도 그 광채를 잃지 않으며 자태를 뽐냈다.
진철은 손을 들어 자하신검을 쓰다듬었다. 자하신검이 진철의 행동에 응하듯 검명을 토해 냈다.
“따로 토굴을 파서 그곳으로 영약과 비급 등을 옮겨 놨으니 누가 가져갈 리는 없을 겁니다.”
진철은 자하신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런 그의 손에 하나의 천이 잡혀 들었다. 그러고는 검병과 함께 검집을 묶기 시작했다.
그렇게 단단히 천으로 검집과 검병을 묶은 그는 잘 묶였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허리춤에 맨 진철은 무릎을 꿇고 봉분을 향해 절을 했다.
“당분간 이 화산을 잘 부탁드립니다.”
옥린수를 따라 화산에 올라온 지 십칠 년. 진철은 스물넷의 나이에 그렇게 하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