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인연의 시작
섬서성에 자리 잡은 보금장(寶金莊)은 섬서성에서 으뜸가는 무가 중 하나였다. 특히 보금장주 복금성의 독문 무공인 평강수(評强手)는 중원에서도 알아주는 수법(手法)으로, 복금성을 절정 고수 반열에 올려놓은 절정 무공이었다. 그런 복금성이 어떻게 당했는지 가슴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었다.
“쿨럭! 네, 네놈!”
복금성이 피를 토하며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흑의인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놈이 누구기에 우, 우리 보금장을 습격하느냐!”
피를 토하며 외친 복금성은 어떻게든 일어서기 위해 양팔을 휘저었다. 흑의인은 그 모습이 재밌는지 미소를 짓고는 발을 들어 그의 오른손을 짓밟았다.
으적!
“크아악!”
피가 튀고 뼈가 드러난다. 내공을 실어 짓밟은 것인지 복금성의 손은 순식간에 피떡이 되어 버렸다.
“십오 년이다. 십오 년간 네놈들을 생각하며 지옥에서 갈고닦은 무공이다.”
“크아악!”
“크크큭.”
흑의인이 발을 비비자 살이 후벼지는 고통에 복금성은 비명을 터트렸다. 부엉이가 울고 있는 야밤에 자신의 손을 밟고 있는 흑의인의 모습은 복금성에게 악마 그 자체였다.
“고통스러운가?”
흑의인이 오른손에 들린 도로 복금성의 팔뚝을 꿰뚫었다. 그와 함께 복금성의 입에서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슬슬 기억이 날 텐데? 십칠 년 전 그날이…….”
“크윽! 서, 설마!”
“네놈은 시작에 불과하다.”
흑의인의 손에 들린 도가 한 가닥의 섬광을 만들어 냈다. 복금성은 눈을 부릅뜬 채로 목이 잘려 나갔다.
흑의인은 잘려 나간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는 도를 휘둘러 핏물을 털어 냈다.
“…….”
도를 갈무리한 흑의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은 흑의인 단 한 명뿐이었다.
“크크큭.”
환하게 뜬 보름달을 올려다본 흑의인, 주재구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너무나 밝게 비치는 달빛 앞에 서 있는 자신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
나뭇가지들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있는 산길. 그곳에 한 사내가 가만히 서 있었다.
“음.”
진철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심각한 고민에 빠져 버렸다. 급하게 내려가서 할 것도 없었기에 천천히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하산한 그였다. 그렇기에 날이 밝아서야 산 초입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길을 걷던 중이었다.
“대체 뭐지.”
진철은 정체불명의 물건 쪽으로 다가가 그 앞에서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옆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를 들어 그 물건을 콕콕 찔렀다.
“음.”
딱딱한 물건은 아닌 듯 나뭇가지가 물건을 파고들었다.
진철은 나뭇가지를 놓고 다시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오 척은 넘고 육 척에 못 미치는 길이. 끝에서 중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 자신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얼굴.
“여자군.”
여자가 확실했다. 그것도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진철은 그녀를 슬쩍 훑어보았다.
‘몸매가 착한데…….’
그녀의 몸을 잠시 감상한 진철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 여자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렇다고 그녀가 날개가 달린 선녀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뚝 떨어진 것이다.
진철은 다시 시선을 돌려 그녀의 상체를 바라봤다. 가슴이 부풀었다 내려앉았다. 가슴에 기복이 있었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
“어떻게 해야 할까나.”
진철은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다. 그냥 깨울 것인가, 아니면 들쳐 업고 산을 내려갈 것인가.
그때 그녀의 몸이 뒤척이면서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 순간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가슴의 골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난 혹시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인가?’
진철은 퍼뜩 스치고 가는 생각에 정좌를 하며 양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무위도식… 무위도식…….”
잡념을 떨치기 위해 진철은 자신만의 도경을 외우며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으음.”
그때 진철은 이상한 기분에 실눈을 뜨며 여인이 누워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
쓰러져 있던 여인이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철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런 진철의 시선과 여인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너인가? 날 구한 것이?”
“아.”
“고맙군. 날 구해 주다니. 뭔가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순간 진철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꺾였다. 그녀의 말투 때문이었다. 진철은 혹시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팍이 더욱 벌어져 버렸다.
“헉!”
진철은 재빨리 양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잊혀 가던 잡념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다시 살아나며 휘젓고 다녔다.
“흐음, 딱히 줄 게 없는 것 같은데.”
여인은 그런 진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하여 몸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찾고 싶은 것을 못 찾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걱정 마라. 내가 널 하인으로 받아 줄 테니까. 분명 너에게는 큰 뜻이 있는 선물이 될 테지.”
“에?”
“왜? 싫은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너에게 줄 선물은 그것뿐이니까. 그러니 거절 같은 건 하지 말았으면 하는군.”
속사포처럼 단숨에 내뱉은 그녀의 말을 가만히 생각하던 진철은 급격히 얼굴을 구겼다.
“난 당신을 도와준 적도 없으니까, 그러한 선물을 받을 필요 없소. 그리고 누가 선물로 그런 것을 받겠소? 그럼 본도는 이만 가겠…….”
슈욱!
진철은 급히 몸을 돌리며 다시 산길을 내려갔다. 아니, 내려가려 했다. 그의 눈앞에 드리워진 날카로운 냉기만 아니었다면.
“…….”
차가운 기운을 뿌리는 새파란 대도가 진철의 목덜미 바로 앞에 멈춰 있었다. 마치 새파란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 같은 예기가 그의 몸으로 느껴졌다.
약 일 척은 되어 보이는 넓이와 오 척은 되어 보이는 길이. 평범한 칼은 아니었다. 결코 그녀가 휘두를 만한 크기의 도가 아니었다.
진철의 이마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가 언제 출수를 했는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것도 이렇게 큰 대도를 휘둘렀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이 큰 칼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설마 이 가련하고 연약한 천하제일의 미녀를 구해 놓고 나 몰라라 하고 그냥 갈 생각은 아니겠지?”
“…….”
“잠시 기절했을 때 네놈이 날 덮치지 않았던 것은…….”
“덮치지 않거든!”
자신도 모르게 발끈한 진철은 그녀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진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아무튼 난 네놈을 내 하인으로 삼기로 정했다. 왜? 하인이 싫은가? 그럼 종은 어떤가? 그것도 싫으면 노예는?”
“말만 다르지 뜻은 다 같지 않소!”
“그래서 싫다는 건가?”
“당연하지 않소!”
“그래? 그럼…….”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진철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죽도록.”
“헉!”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뺀 진철은 공중제비를 돌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그가 서 있던 자리로 한 가닥 섬광이 몰아쳤다. 허공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저절로 질리게 만들었다.
“자, 잠깐!”
“뭐지? 유언이라도 있는 건가?”
말을 내뱉으면서도 계속 도를 휘두르는 그녀의 기세는 마치 태풍과도 같았다.
그리고 마치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며 날아오는 대도는, 결코 그 크기에 맞지 않은 움직임을 보이며 진철을 압박했다.
진철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대도를 피해 몸을 숙이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용천혈로 내공을 밀어 넣으며 대돈혈을 통해 한 번에 터트렸다. 그 순간 땅이 파이며 진철의 몸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흥!”
진철의 몸이 사라지자 그녀는 곧바로 대도를 거둬들이고는 허공으로 몸을 띄우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때 그녀가 있던 자리에 진철의 몸이 나타났다. 한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진 자세로 있던 진철은 그녀를 잡지 못하자 혀를 찼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위력도 말이 안 되지만, 속도 역시 말도 안 되었다.
‘저렇게 큰 대도를 휘두르면서 뭐가 이렇게 빨라!’
공중제비를 돈 그녀는 뒤에 있던 나무 기둥을 발로 차고는 꽤 굵직한 나뭇가지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격한 움직임 때문에 머리가 헝클어졌는지 살짝 고개를 흔든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좋아, 좋아. 이 몸의 종자가 되려면 그 정도의 실력은 갖춰야겠지. 어떤가? 아직도 생각이 변하지 않았나?”
“절대! 영원히!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결코 당신의 종 따위가 될 생각은 없어!”
“후후! 그 기개, 마음에 든다.”
‘난 하나도 마음에 안 들어!’
순간 여인의 몸이 활처럼 구부러졌다가 쏘아졌다. 진철은 급히 몸을 틀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땅이 파이며 대도가 그 자리에 박혀 들었다.
궁신탄영의 묘를 이용해 공격한 그녀는 곧바로 땅에 박힌 대도를 휘둘렀다. 엄청난 괴력에 땅이 갈라지며 모래와 함께 도날이 진철을 향해 날아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정말로 귀찮게 하고 있어!’
진철의 몸이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번 쏘아졌다. 이번엔 그의 왼손에 자하신검이 검집째 들려 있었다.
날아오는 대도를 자하신검을 이용해 머리 위로 흘린 진철은 지금까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빨라진 움직임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목을 허용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진철을 내려다보았다.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니. 대단하군.”
“뭐, 칠 할 정도랄까?”
“오호,”
여인이 놀랍다는 듯 감탄사를 터트리자 진철은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귀찮아 죽겠지만 그 일은 사부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아서 그것을 꼭 해야만 해. 그러니까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았나?”
“귀찮게 한다면? 날 죽일 것인가?”
“…….”
“그렇지 않는다면 이런 협박은 집어치우지 그래? 나, 북궁아는 한번 마음으로 정한 것은 꼭 이루고 마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할 말만 하고 눈을 감은 북궁아는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양팔을 늘어트렸다.
그녀의 모습에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멈추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죽일 자신이 없다면 손 놓지 그래?”
그때 실눈을 뜨고 진철을 내려다보며 입을 연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매우 고혹적인 미소가 주변을 환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 허름하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진철의 옷이 보였다. 진철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지며 야차상처럼 변해 버렸다.
“빌어먹을!”
“아, 그리고 난 돈도 많다.”
“…….”
우걱우걱.
“음…….”
진철은 꺼림칙한 눈으로 식탁을 바라보았다. 산해진미가 펼쳐진 식탁은 아무리 식욕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금방이라도 붙잡아 놓을 만큼 화려했다. 하지만 진철의 젓가락은 음식을 집기는커녕 손조차 대지 않고 있었다.
결코 식욕이 없어서가 아니다. 밤새 산을 걸어 내려왔기에 이미 허기가 진 상태였다.
후루룩!
“왜 그러나? 왜 먹지 않는 거지?”
무엇인가 씹는 소리와 함께 무뚝뚝한 말투가 그의 귓가로 스며들어왔다. 진철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진철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긴 검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렀고,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 그리고 동글동글한 눈동자, 불그스름한 입술, 거기에 일반 남성보다 배는 커 보이는 가슴.
분명한 여인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미인 축에 속할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투는 남자의 입보다도 무뚝뚝했다.
“여기 요리는 상당히 맛있군. 궁에서도 먹어 보지 못한 것들이 참 많아. 아, 그거 안 먹을 텐가? 그럼 내가 먹도록 하지.”
“…….”
허락을 받지도 않고 진철의 앞에 있는 접시를 들고 자신 앞으로 가져간 북궁아는 흡입을 하듯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 치웠다. 누가 보면 걸신이라도 들었다고 할 장면이었다.
진철의 눈이 살짝 그녀의 옆으로 향했다. 마치 탑이라도 쌓은 듯 꽤 높이 올라가 있는 접시는 그녀가 얼마나 먹어 치웠는지를 단숨에 알려 주고 있었다.
“많이많이 먹어 두도록. 그래야 힘쓸 게 아닌가?”
우걱우걱.
또다시 무뚝뚝한 그녀의 말소리가 들리자 진철의 얼굴이 한 번 더 구겨졌다.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과 말투는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진철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대체 배 속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저 많은 것이 다 들어가지? 저 조금한 몸속으로?’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식탁의 음식을 하나씩 하나씩 흡입해 나갔다. 그녀의 손에 닿는 음식은 그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꼭 식탁 위의 음식이 실제가 아닌 허상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안 먹는 건가? 배가 고프지 않나?”
입안 가득히 음식을 집어넣고 말하면서도 결코 음식 조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것도 신기라면 신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꿀꺽!
“오! 이거 참 맛있군. 이것이 서민의 맛인가? 뭔가 독특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있어.”
“…….”
진철은 상념에서 깨어나 눈을 가늘게 뜨고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아직도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식사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그녀를 무시하며 객잔으로 향했고, 그녀는 자신을 뒤따라 객잔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간단히 소면만 주문한 자신과는 달리 온갖 음식을 시킨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진수성찬을 차려 버렸다. 너무나 비교가 되다 못해 왠지 자신이 처량해졌다.
그런 북궁아는 진철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탁의 음식들을 착착 처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거기에 쓰러져 있던 거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진철이 물었다. 북궁아는 그런 진철을 바라보다 입안에 있던 음식물을 삼켰다.
“음… 명령이다.”
짧게 대답한 북궁아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음식을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진철의 눈썹은 꿈틀거렸다.
“명령이라…….”
“그런데 네 이름은 뭐지?”
“진철.”
북궁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하루 종일 식사만 할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진철은 다시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근방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듯 제법 많은 무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 흉흉한 눈빛을 내뿜으며 주변을 연신 둘러보는 것을 보아하니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요새 들어 사람들이 화산 주위로 몰려오는데?”
“화산 부근에 살성이 나타났다더군. 별호가 마혈도(魔血刀)라던가?”
순간 진철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살성. 무림에 무지한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명칭이다.
사람들은 하늘의 별 중 천랑성의 기운을 타고 태어나는 자를 살성이라 불렀다. 그 어떤 무공이든 파훼법을 찾을 수 있는 눈을 지닌 살성은 무림 공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거기에 어떤 계기로 각성을 하게 된다면 선천지기를 소모하면서까지 적아 구분 없이 주변의 모든 이를 죽이고, 끝내는 자신조차 한 줌의 핏물로 만드는 극악무도한 체질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렇기에 살성을 발견하면 그 즉시 처분하고, 절대 무공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현 무림의 법도였다. 하지만 그 법도를 깬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다.
그 예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혈무대전 당시의 마교 교주 혁월린이었다.
살성의 체질과 함께 최강의 무공을 익힌 그의 위력은 가공했다. 그 때문에 아직도 그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가 상당히 많았다. 그가 죽었다고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강했으니까.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얼마 전에 보금장이던가? 그곳이 살성에게 멸문을 당했다고 했다.”
“…….”
진철은 굳은 얼굴을 보이기 싫은지 고개를 숙여 젓가락을 바라보았다. 살성이라는 명칭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짓눌렀다.
“가야겠군.”
진철은 북궁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 입구로 향했다.
그때 수많은 장정들이 객잔 입구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누구를 찾는 듯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 계집이다!”
한 사내가 북궁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수많은 사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 앞에 서 있던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옆으로 물러섰다.
“네 이년! 감히 우리 애들을 그렇게 만들고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가운데 서 있던 장한이 외치자 북궁아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남은 교자를 입안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혼나고도 또 나타나다니. 너희들은 강시와도 같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군. 아니, 바퀴벌레인가? 밟아도 계속 꿈틀거리는 것이 말이다. 정말 잡초 같은 근성이야.”
“뭐랏?”
퉁명스럽게 내뱉은 북궁아의 말에 발끈한 장한은 허리춤에 맨 소태도를 빼 들며 소리쳤다.
“저년을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 내 오늘 저년의 간을 꺼내 얼마나 부었는지 꼭 확인해야겠다!”
그가 대장인 듯, 그의 말에 따라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북궁아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산만 한 덩치의 사내들이 그녀를 포위하며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태평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식탁에 걸쳐 놓은 대도를 쥐었다.
“죽어도 원망 말거라.”
“죽엿!”
장한이 외치자 사내들이 일제히 소태도를 빼 들며 북궁아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대도가 허공에 한일자를 그려 넣었다.
새파란 도가 냉기를 뿜으며 허공을 긋자 근처에 있던 사내들이 터져 나오는 냉기와 풍압에 휩쓸려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녀의 앞에 있던 식탁들 역시 허공으로 비산했고, 객잔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진철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싸늘한 풍압에 급히 몸을 띄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저런 무지막지한 년이 어디 있어?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다치면 어쩌려고… 어?’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북궁아가 쓰러져 있던 사내들의 다리 사이를 대도로 그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움츠렸다. 자신이 당한 것도 아닌데 괜히 등골이 오싹해진 것이다.
사내들의 물건을 순식간에 그어 버린 그녀는 다시 도를 휘둘러 사내들의 목을 쳐 나갔다. 한 치도 거리낌 없는 행동이었다.
진철은 그 모습에 혀를 차고는 그녀에게 신형을 날렸다.
쩡!
“큭!”
“읏!”
생각보다 강한 압박감에 진철은 신음을 터트렸고, 예상치도 못한 반발력에 북궁아는 한 발 물러섰다. 그러다 자신의 도를 막고 있는 것이 진철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하는 거지? 나랑 해보겠다는 건가?”
“하나 말 안 한 게 있는데, 나 이래 봬도 도사라고. 그러니 내 앞에서 행하는 살생은 그냥 보고 넘어갈 수가 없다, 이 말이야.”
“호오, 그래서 막겠다는 건가? 나 역시 하나 말 안 한 것이 있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막고서 살아 있는 사람은 세상에 딱 두 명밖에 없다.”
진철은 검집을 통해 느껴지는 압박감이 점점 강해지자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부터 세 명으로 늘겠군.”
순간 북궁아의 표정이 무표정으로 변하며 팔을 강하게 뻗어 진철의 검을 떨쳐 냈다. 그 순간 북궁아의 도가 허공을 두 번 갈랐다.
진철은 반탄력으로 몸을 빼다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갈래의 도기를 보며 다시 이를 악물었다. 그 도기를 피한다면 자신의 뒤에 있는 사내들이 두 동강 나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제길!”
진철의 검집에서 자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진철은 그대로 검집을 휘둘러 도기의 옆을 후려쳤다. 그러자 도기가 공중에서 방향을 바꿔 바닥과 지붕에 충돌했다. 패도의 기운을 가진 도기를 쳐 내서 흘려버린 것이다.
“야!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얼굴을 구긴 진철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나뭇조각을 피하며 그녀를 향해 나아가려다가, 북궁아가 대도를 내려놓자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실력으로 널 누르는 것은 현재 불가능하다. 그러니 칼부림은 오히려 손해일 뿐이지.”
“…….”
북궁아는 도를 갈무리하고는 식탁 위에 금 한 냥을 내려놓고 진철을 지나쳐 객잔 입구로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오자 사내들은 자리를 피해 길을 터 주었다.
북궁아는 객잔 입구에 서서 뒤돌아 진철을 바라보았다.
“식사는 다 했다. 안 갈 건가?”
북궁아는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그대로 객잔을 나갔다.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리는 손아귀를 간신히 진정시키며,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무언가를 잠재우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써야 했다.
“빌어먹을…….”
진철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그녀를 따라 객잔을 나섰다.
***
쿨럭!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에 입을 열자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마혈도 주재구는 땅에 장도를 꽂고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보금장을 멸문시키고 호가장으로 이동 중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발작 때문이었다.
그때 주재구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주위에서 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클클, 여기서 포기하시렵니까?”
주재구는 익숙한 목소리에 살기를 풀고는 도를 들어 올렸다. 그런 주재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크큭.”
포기라는 말에 웃음을 내뱉은 주재구는 몸을 일으키며 마혈도를 허리춤에 매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발작의 기운이 아직도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
툭.
그의 발치로 작은 병이 떨어졌다. 주재구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당신이 목표에 도달할 시 저희 마궁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겁니다. 그분께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재구는 귓가로 들려오는 음성을 흘리며 병을 열어 입안으로 쏟아 넣었다. 텁텁하지만 청량한 무색의 액체가 입속으로 들어가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살성의 기운을 잠재우는 약이기에 일정 시간마다 복용해야 하긴 하지만, 먹을 때마다 무언가 자신을 억압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그리 썩 좋은 기분이 아니다.
“살성의 기운을 어서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만드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약도 듣지 않는 단순한 살인마가 될 터이니. 클클.”
그 말을 끝으로 기척이 사라지자 주재구는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재촉했다.
***
“음…….”
마을을 벗어난 진철은 산길을 걸으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막상 화산파를 재건한답시고 하산을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문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분명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문도를 들이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고, 명성을 알리고 예전처럼 구대문파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많은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가진 돈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당장 내일 먹을 것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물론 전에 철영이 준 금자들이 있긴 하지만 그걸 쓰자니 뒤가 구렸다.
“돈, 돈, 돈.”
진철의 얼굴이 구겨졌다. 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이 서러워진 것이다.
“돈이 필요하면 하인이 되어라. 그렇다면 돈을 주마. 이런 특혜는 지금껏 없었다.”
뒤따르던 북궁아가 입을 열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 말을 들은 진철의 이마가 순간 꿈틀거렸다. 힘줄이 튀어나온 것이다.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속으로 도경을 외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돈이 아주 많다.”
“하?”
살짝 입을 벌린 진철이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뭔가 말하려는 순간 진철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십수 명의 사내들이 진철과 북궁아를 둘러싸며 모습을 드러냈다.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그들은 진철과 북궁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뉘시오?”
진철은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들 중 가장 탄탄한 근육질 몸을 지닌, 두목으로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가진 거 다 내놔! 그럼 살려 주마!”
“…….”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던 진철은 귀를 후볐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 사내는 얼굴을 구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셋을 세겠다! 그때까지 가진 것을 모조리 꺼내 놓지 않는다면 죄다 죽는 거야!”
“뭐라고?”
또다시 진철이 귀를 후비며 입을 열자 두목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손에 든 도끼를 허공에 그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죽고 싶어? 빨리 내놓지 못해?”
그제야 사내가 한 말을 알아들었는지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품속을 뒤지던 진철의 손에 무언가가 딸려 나왔다. 그의 돈주머니였다. 진철은 그 주머니를 산적에게 던졌다.
“흥! 제법 기특한 놈이로군! 그런데… 응?”
산적은 웃음을 흘리며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의문을 품으며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주머니 속에는 철전 한 냥만 들어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자신이 놀림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신경질 적으로 고개를 들며 진철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감히 날…….”
입을 열며 도끼를 다시 허공에 긋던 사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진철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진철이 그의 말을 무시하며 길옆으로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우지직!
“헉!”
사내와 산적들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길옆으로 다가간 진철이 그곳에 솟아 있는 나무 기둥에 맨손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마치 두부에 파고 들어가듯 아주 쉽게 주먹을 쑤셔 넣은 진철은 산적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 번… 뭐라고 그랬지?”
우저적!
진철의 손아귀에 나무 기둥이 한 움큼 찢겨져 나왔다. 박아 넣은 손을 펴 그대로 나무를 찢듯 뜯어 놓은 것이었다.
산적들은 진철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야.”
“아… 예?”
진철이 다시 입을 열자 산적 두목은 얼떨결에 존댓말을 내뱉었다. 진철은 그를 바라보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보기 좋은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를 바라보는 산적 두목은 자신의 몸을 휘감는 한기에 더더욱 몸을 떨어야 했다.
진철이 금낭을 그에게 던졌다. 너무나 헐어서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금낭이었다.
진철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진 거 다 채워 넣어라.”
북궁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걷고 있는 진철을 바라보며 의문을 품었다. 산적들에게 가벼운 훈계를 하며 빼앗은 돈은 고작 은자 두 개였다.
“너는 이상하군. 돈이 필요하면 나에게 말하면 된다. 그렇다면 쉽게 돈을 얻을 수 있지. 그런데 고작 산적들에게 뺏은 몇 푼의 돈을 가지고 그렇게 즐거운 모습을 보이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응?”
진철은 고개를 돌려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뺏다니?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뺏은 게 아냐. 나의 훈계로 선도를 걷게 될 그들에게서 잠시나마 물욕을 잊도록 하기 위해 잠깐 맡아 둔 것뿐이야.”
“음…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지?”
“마혈돈가 마돈혈인가 그놈 잡으러 가지.”
진철은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눈을 치켜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디까지 따라올 생각이지? 그만 따라와 줬으면 하는데?”
북궁아는 그런 진철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대도를 어깨에 들쳐 메었다. 진철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대체 저 가녀린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지 참 궁금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뭐가?”
북궁아는 살짝 고개를 틀고는 진철을 바라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내 하인이 될 때까지다.”
“…….”
진철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북궁아는 그런 진철을 보며 실소를 내뿜고는 그를 지나쳐 갔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마혈도가 어디 있는지 아나? 난 알고 있어. 이제 내가 앞장서도록 하지.”
“…….”
북궁아는 진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리고서 다시 길을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철의 얼굴은 더더욱 구겨지더니 야차상처럼 변해 버렸다.
“제기랄!”
진철의 처절한 외침이 산속으로 메아리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