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5/29)

제4장

호가장(虎加莊)

호가장의 장주는 호씨 성이 아닌 금씨 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호가장이라 불린 이유는 바로 호가장의 검법인 태호천강검에 있었다.

절정 검법인 태호천강검은 과거 천하 십대 무공에 들 정도로 뛰어나고 난해한 검법이었다. 거기에 태호천강검은 강력한 중검을 펼치는 검법으로 그 기세가 마치 호랑이와 같았다.

그렇게 호가장의 이름은 장주의 성이 아닌 검법에서 따온 것이었다.

또한 화산 근처에 자리 잡은 호가장의 뒤편에는 거대한 절벽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숲이 우거지고 난해한 진이 펼쳐져 있어 호가장은 근 백오십 년간 단 한 번도 타 문파의 침략을 허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 호가장의 집무실에 여러 무인이 모여 앉아 있었다. 바로 호가장을 대표하는 호가장주와 장로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문파에서 파견 나온 무인들 역시 그 자리에 모여 있었다.

“마혈도는 아주 악덕한 놈입니다! 그놈이 우리 호가장을 왜 노리는지 알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칼을 내민 이상 결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흠… 그건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겠소? 일단 그가 언제 호가장을 노릴지가 중요 사항이오. 그리고 그의 세력이 있는지 알아야겠지.”

호가장주 금석천은 신음을 흘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제갈 선생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제갈야는 금석천의 물음에 손에 들린 책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혈도가 지금까지 행한 악행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마혈도는 상당히 잔인한 인물입니다. 그러면서도 꽤 머리가 좋은 인물이지요.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누구와 동행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 그의 얼굴을 본 사람조차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우리가 그의 행실을 알고 있는 것 역시 그가 미리 전서로 공격할 문파에 알려 줘서 그런 겁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실력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지요.”

제갈야는 말을 끊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려 목을 축였다. 쌉싸래한 맛이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들이켠 탓에 입이 텁텁해져 온 제갈야가 얼굴을 구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그가 행한 행실로 보아하니 그에 대해 두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 경우에 따라 저희 측의 행동도 달라지겠지요.”

“그것이 무엇인지요?”

제갈야는 무림오대세가이자 무림의 머리인 제갈세가의 일원이었다. 거기에 그의 배분 역시 호가장주에 비해 낮지 않았기에 금석천은 반존대를 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한 가지는 그가 아주 뛰어난 무인이라는 점입니다. 천하 오대 고수에 버금갈 정도로 말이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에게 세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천하 오대 고수라니!”

호가장주는 제갈야의 입에서 나온 말에 화들짝 놀랐다.

천하 오대 고수. 다른 말로 오천이라 불린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호가장 같은 중소 문파는 하룻밤에 괴멸시킬 수 있는 무위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의 무위가 만약 오천과 같다 한다면 생각보다 이 일은 크지 않습니다.”

“예? 하지만 오천의 무위라면 이곳에 있는 무인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그를 상대하기엔 벅차지 않소?”

금석천의 의문에 제갈야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단 일인이라면 충분히 이곳에 있는 무인만으로도 처치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에게 세력이 붙어 있다면 이것은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갈야는 금석천의 의문에 입을 닫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무인들은 제갈야의 눈빛에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에게 세력이 있다면 이는 전쟁이 될 수 있습니다.”

“전쟁!”

“전쟁이라니!”

“서, 설마 마교인가!”

순식간에 집무실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전쟁이란 단어는 그만한 위력이 가지고 있었다. 과거 혈무대전을 직접 겪어 보지는 못했지만 간접적으로 겪은 첫 번째 세대의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장주! 무림맹에 전서를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큰일입니다!”

“마, 마교라니!”

“이럴 때가 아니오! 어서 무림 동도들을 모아 단합해야 하지 않소!”

호가장의 장로들과 무인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어렸을 때부터 혈무대전에 대해 들으며 자라 온 그들이다. 전쟁의 공포를 모를 리가 없었다.

탕!

순간 청량한 기운이 집무실을 휩쓸었다. 호가장주가 내공을 실어 탁자를 내려친 것이었다.

떠들썩하게 소리치던 무인들이 순간 입을 닫고 호가장주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호가장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제갈야를 바라보았다.

“계속 말씀하시오, 제갈 선생.”

제갈야는 미소를 지으며 금석천에게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모두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생각과는 달리 마교는 아닐 것입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오?”

“마교는 지난 혈무대전으로 교주를 비롯해 대부분의 장로를 잃었습니다. 그들이 입은 피해를 생각해 보면 아직은 도발할 시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들도 화산을 잃고 수많은 영웅들을 잃었습니다. 그로 인해 소실된 무공 역시 많았고, 그 피해는 만금에 비할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음…….”

제갈야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면 제갈 선생은 또 다른 세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오?”

“다른 세력이야 많지요. 북해의 북해빙궁이 있고, 남만의 세력들도 있고, 서역의 세력들 역시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직은 어느 단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정보가 부족하니까요.”

제갈야의 말에 아무도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새외의 세력이 중원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비록 중원의 힘이 강대하다고는 하지만 북방의 맹주인 북해빙궁 역시 마교와 같은 힘을 지닌 세력이다.

거기에 남만의 세력들은 또 어떠한가? 온갖 독물과 맹수들이 자리 잡은 남만에서 당당하게 세력을 넓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강함은 결코 중원에 못지않았다.

게다가 서역의 포달랍궁은 이미 중원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강대한 세력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갈야의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다른 세력의 등장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아주 강력한… 마교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세력의 등장 말입니다.”

제갈야의 말은 무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그런!”

“제삼의 세력이란 말이오?”

또다시 무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금석천은 다시 한 번 탁자를 쳐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제갈야를 바라보았다.

“제갈 선생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오?”

“마혈도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말을 끊은 제갈야는 자신의 손에 들린 책자로 눈을 돌렸다.

“여기에 나온 바로는, 마혈도는 하루에 하나의 문파를 멸문시키며 이동하고 있습니다. 벌써 일곱 개의 문파가 멸문을 당했지요.”

“그렇소. 그렇기에 이 금석천이도 무림 동도의 힘을 빌리고 있지 않소.”

금석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야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혈도가 이동하며 멸문시킨 문파와 멸문된 시기를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우금장과 보금장의 거리는 약 사흘의 거리가 되오. 이 시간은 일반 무인이 걸어갈 시간이지요. 한데 우금장이 멸문된 이틀이 지나 보금장이 멸문했습니다. 그 이틀의 시간은 무인들이 달려가 도착할 시간입니다. 그 말인즉, 마혈도는 지치지도 않는 인물처럼 이동하며 문파들을 멸문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 그런!”

금석천은 자신도 모르게 당혹성을 터트렸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혈도는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천하 오대 고수라도 쉬지도 않고 이동하며 중소 문파들을 괴멸시키기에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도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들도 알고 있다시피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혈도가 전설상에 나오는 강시가 아닌 이상 말이지요. 물론 강시가 맞지 않느냐는 의문을 지니신 분들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마혈도는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음…….”

“여기서 한 가지 결정적인 단서가 생깁니다. 시간적 단서지요. 만약 마혈도에게 세력이 있다면? 지금 그가 행하고 있는 이 행보는 결코 거짓도, 무리도 아니라는 겁니다.”

“…….”

제갈야가 입을 닫자 집무실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그의 논리적인 말에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삼 세력의 등장. 그것은 이 무림에 강한 혈풍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

“후우, 꽤 심각한 상처였지만 이젠 괜찮을 겁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에 안색이 좋진 않지만 몸조리를 하고 음식을 섭취하도록 하세요. 일단 약제를 제조해 놓겠으니 깨어난다면 식사 후 그것을 먹이기 바랍니다.”

“고맙소.”

진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의원은 방문을 나섰다.

모용수와 함께 호가장에 도착한 진철은 그의 안내에 따라 재빨리 숙소로 향했고, 의원을 불러 북궁아를 치료토록 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 그녀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형님, 대체 이분은 누구시고 어쩌다 이렇게 된 겁니까?”

“아!”

모용수의 물음에 마혈도가 생각난 진철은 얼굴을 구겼다. 그러고는 자하신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갑니까?”

“마혈도 잡으러.”

“예?”

“마혈도 잡으러 간다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은 진철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모용수가 재빨리 몸을 날려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혈도라뇨?”

“무슨 말이긴? 마혈도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이해가 안 가냐?”

“아니, 마혈도는 오늘 축시에 이곳으로 공격을 온다고 이미 예고가 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모용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진철에게 말해 주었다. 그것은 마혈도가 오늘 밤 자정에 호가장을 멸문시키겠다고 통보를 해 왔다는 것이다.

모용수의 말을 듣던 진철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며 얼굴을 구겼다.

“허, 어처구니가 없네. 그놈은 뭐하는 놈이래? 습격하려면 보통 몰래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애초에 뭐 때문에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거야?”

“글쎄요. 사실 마혈도에게 멸문당한 문파는 꽤 됩니다만 아직 그 이유는 밝혀진 게 없습니다. 아! 그런데 마혈도를 만나셨다고 했죠?”

“응. 그런데?”

“정말입니까? 마혈도를 만나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괜히 이 호가장에 무인들이 몰려드는 게 아니라고요.”

“그래서?”

“정말로 마혈도 만나신 거 맞습니까? 혹시 다른 사람 아니에요?”

진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 못 믿냐?”

모용수가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믿을 수가 있어야 믿지.’

모용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다시 진철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그것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겁니다. 마혈도는 절정을 넘어선 도법의 대가라 불려요. 그런 사람에게서 살아왔다는 건 최소한 절정의 무공을 지녔다는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모용수는 슬쩍 진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순간 진철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딱!

“아얏!”

“이놈이 어딜 그렇게 훑어봐? 나도 무공 좀 하거든?”

“크으, 그렇다고 때리……!”

순간 모용수의 얼굴이 굳었다. 진철이 손을 드는 것은커녕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만약 진철이 적이었다면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에이, 설마… 아니, 혹시 형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모용수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어? 진철이 아닌가?”

“어라? 당 형님 아니십니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는 바로 당문기였다. 진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당문기 역시 미소를 지었지만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아니,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냥 이런저런 일이 생겨서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선 어쩐 일이십니까?”

“나야 뭐, 마혈돈지 마돈혈인지 하는 놈 때문에 여기 있지. 소문은 들어 봤지? 요새 사람들 죽이고 다니는 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머리카락을 치렁치렁하게 내리고 눈빛만 번뜩이는 놈일 거야.”

“맞아요. 정말 그러고 다니더군요.”

“응?”

진철이 수긍하자 당문기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그때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침상에 누워 있는 북궁아가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이었다.

당문기는 잽싸게 진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

“제 일행입니다.”

“자네 하산한 지 얼마나 됐지?”

“엊그제 하산했습니다.”

“허!”

당문기는 진정 놀랍다는 듯 숨을 들이켰다.

“자네 솜씨가 상당히 좋군. 아님 기질이 뛰어난 건지도…….”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진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당문기는 지나가는 어투로 말했다.

“하산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저런 아름다운 소저와 함께하는 건가? 정말 대단하이.”

왠지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당문기는 유부남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말투가 퉁명스러워진 것이다.

당문기는 어색하게 웃고 있는 진철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장가도 일찍 가는 거 아닌가 몰라?”

“예?”

“장가 말이야. 결혼 몰라?”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는 진철의 말에 당문기가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알긴 압니다만, 도사도 장가갑니까?”

“물론 안 되지. 도사가 무슨 장가인가? 도사가 장가가면 그야말로 말코 도사지. 하지만…….”

“하지만?”

당문기는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진철의 귓가에는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화산은 속가와 도가가 만나 이뤄진 문파. 즉, 화산은 제외야.”

“헉!”

그것은 충격이었다. 진철이 되물었다.

“하지만 도사는 고기도 먹으면 안 된다고 하던데요?”

“누가?”

“용수가요.”

“…어찌 화산파 장문인인 자네가 용수의 말을 듣고 따르고 있나?”

“그, 그럼?”

당문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진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했잖은가? 화산파는 속세와 섞인 곳이라고. 화산파는 결혼해도 되고, 술 먹어도 되고, 고기 먹어도 돼. 뭐, 장문인인 자네가 도가만을 추구하겠다면 안 되겠지만 말이야.”

“…….”

진철은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순간 모용수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자신을 바라보는 진철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 몰랐던 건가?”

당문기가 묻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쯔쯔. 뭐, 나머지 이야기는 이따가 볼일이 끝나면 천천히 하도록 하고, 일단 난 호가장주를 만나러 가야겠어. 지금도 그쪽으로 가다가 모용수, 저놈이 의원을 급하게 찾았다기에 뭔 일인가 해서 들른 거지.”

거기까지 말한 당문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방문을 나섰다. 그때 당문기가 다시 진철을 바라보며 한마디 내뱉고는 방문을 나섰다.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하게나.”

“……?”

진철이 의문을 품자 모용수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 형님께선 유부남입니다.”

“그런데?”

“…….”

진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모용수를 바라보았다.

모용수는 잠시 볼일이 있다는 말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혼자 방 안을 서성이던 진철은 숙소를 나왔다.

북궁아가 편히 쉬도록 한 배려도 있지만 왠지 답답한 마음에 바깥 공기를 쐬고 싶었다.

진철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호가장 내를 서성거렸다.

비록 급하게 들어오느라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안에 있는 무인들은 밖에서 줄서 기다리고 있는 무인들과는 다른 이들인지 복장을 맞춰 입은 자들이 많았다. 호가장의 무사들 같았다.

“음…….”

주변을 둘러보던 진철의 눈이 한순간 빛났다. 그의 시야에 다른 복장을 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것도 흰색의 단아한 무복을 차려입은 여인들이었다.

모두 허리춤에 검을 매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 같았다. 무림인이라 그런지 몸매가 상당히 좋아 보였다.

“좋군.”

“좋아.”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옆에서 난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옆에는 허름한 옷차림의 중년인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산적 같은 외모에 거대한 덩치를 가진 인물이었다. 거기에 턱수염도 숭숭 나 있어 절대 좋아 보이는 인상이 아니었다.

“음?”

중년인이 진철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몸에 멍청하게 생긴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중년인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의 호리호리한 몸이 마음에 안 든 것이다. 남자는 남자답게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뭔가?”

“아닙니다.”

진철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중년인 역시 고개를 돌려 여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중년인의 얼굴이 펴지며 다시 미소가 걸렸다.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형님, 여기서 뭐하십니까? 어? 진철 자네도 여기 있었군.”

“응? 아, 문기 아닌가?”

“어? 형님.”

진철과 중년인의 고개가 돌아갔다. 솜털을 바라보는 고양이와 같은 몸짓이었다. 그곳에는 당문기가 모용수와 함께 서 있었다.

“자네, 날 불러 놓고 어딜 다녀오는가?”

“형님, 볼일은 다 끝나신 겁니까?”

“…….”

진철과 중년인이 동시에 입을 열자 당문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잠깐 회의가 있어 집무실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볼일은 끝났네, 진철. 그런데 형님, 여기 진철과 아는 사이입니까?”

“아니, 지금 처음 만났네.”

“그렇군요.”

당문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처음 뵙겠군. 이분이 바로 곤륜파에서 오신 기태천 선배시네. 무림에서는 검왕 천검으로 잘 알려진 분이시지. 혹시 알고 있나?”

진철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화산이나 그 근처에서만 지냈던 진철에게는 무리가 있는 질문이었다.

기태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비록 자랑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천검이라는 무게는 감히 누구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였다.

검왕(劍王) 천검(天劍).

절대 고수 중 삼왕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검왕이란 호칭을 지니고 있는 자가 바로 기태천이었다. 어디 가서 천검이라는 별호만 대면 그 어느 문파든 간에 우두머리가 맨발로 뛰쳐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진철은 몰랐다. 모르는 것도 그냥 모르는 것이 아니라 들어 본 적도 없는 듯했다. 그렇기에 기태천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사파 놈들을 더 족쳐야 하나?’

위명을 조금 더 날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기태천은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그런 기태천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뭐냐?”

“아뇨.”

기태천의 말에 진철은 짧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기태천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문기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을 데리고 숙소로 향했다. 그렇게 걸으며 당문기는 기태천에게 진철을 소개했다. 그리고 기태천은 적지 않게 놀라야 했다.

‘화산파라니!’

이미 멸문당한 줄 알았던 화산파였다. 그런데 진철이 그곳의 장문인이라며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결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모용수가 머물던 방은 현재 북궁아가 잠들어 있기에 그 옆방으로 들어선 그들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 그렇지.”

당문기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진철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진철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누리끼리하게 빛바랜 책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뭐예요? 이게.”

그의 입에서 나온 말 역시 퉁명스러웠다.

“마혈도에 대한 정보다.”

“마혈도? 마혈도가 누구냐?”

방바닥을 뒹굴던 기태천이 관심을 보였다.

“아, 마혈도요? 그놈은…….”

입을 열던 당문기가 눈을 부릅떴다. 진철이 바닥에 몸을 눕혀 뒹굴었기 때문이다.

순간 기태천이 두 명으로 보였다. 이건 심각한 일이었다. 만난 지 일각도 되지 않아 저렇게 닮아 가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요새 꽤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놈입니다.”

“나쁜 놈이란 거네?”

“그렇죠.”

“흠…….”

진철이 바닥에 누운 상태에서 책을 펴 들자 관심이 가는지 기태천이 꿈틀거리며 진철의 옆으로 기어갔다. 진철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명색이 검왕이시라는 분이 자세가 뭐 그래요?”

“왜?”

“마치 애벌레 같잖아요.”

“애, 애벌레라니! 이것이 요새 유행하는 새로운 수행법이다. 네놈은 화산파라며? 그것도 모르냐?”

“음…….”

진철의 눈이 기태천의 거대한 엉덩이로 향했다. 들쑥날쑥하며 앞으로 조금씩 다가오는 모습이 뭔가 신비로워 보였다. 진철은 다시 책자로 눈을 돌렸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놈이 그렇게 유명해?”

“그렇다더군요.”

“나보다?”

진철의 눈이 다시 기태천에게 돌아갔다. 기태천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산적 같은 외모로 해맑은 미소를 짓자 흉악해 보였다.

“명성은 모르겠지만 외모로 보자면 기 선배가 더욱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거 같군요.”

“그렇지? 내가 왕년에 여자깨나 울리고 다녔어.”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책자로 시선을 돌렸다. 기태천 역시 책자를 바라보았다.

왠지 닮아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당문기와 모용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만나면 안 될 사람끼리 만난 것 같았다.

진철은 책 표지를 바라보다 첫 장을 넘겼다. 그때 무언가가 그의 손을 잡아챘다. 기태천의 손이었다.

“같이 좀 보자.”

“그냥 주무시죠. 이런 건 저희 같은 후배에게 맡기시고 말입니다.”

“음… 그래도 선배 된 입장에서 후배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하는 법이야. 그래야 나중에 대접을 받을 수 있거든.”

“그런 겁니까?”

“암, 그렇고말고.”

기태천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진철이 넘기려는 첫 장을 다시 펼쳐 읽어 나갔다.

“눈에 보이는 건 다 죽이는 자이니, 발견 즉시 가까운 관아에 신고하거나 도망간다. 흠… 이상한데? 관아는 무림에 대해 신경을 안 쓰는 법이거늘.”

“그럼 무림인은 법도 없는 겁니까?”

“없을 리가 있나? 다만 법보다 더 가까운 것이 있을 뿐이지.”

기태천이 주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은 진리였다.

“이야! 이거 엄청 나쁜 놈이네. 거기에 싸가지도 없어 보여.”

어느새 다 읽었는지 기태천이 감탄하듯 입을 열었다. 진철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싸가지 없어 보인다니요?”

“흔적을 남기지 않잖아? 머리가 꽤 좋은 놈 같아.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머리 좋은 놈치고 싸가지 있는 놈 못 봤다.”

“저 있잖아요.”

진철이 미소를 짓자 기태천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기태천은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진철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잠이나 자련다. 마혈도는 무슨 마혈도냐? 어차피 일이 년 싸돌아다니다가 죽을 놈인데.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니라.”

“일장춘몽이라…….”

“다른 말로 세상만사 다반사라고도 하지.”

기태천이 배를 하늘로 하고 눕자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자를 덮었다. 자기 위함이다.

“음…….”

그 모습을 보고 있단 당문기와 모용수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들도 방바닥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모든 게 귀찮아지는 네 사람이었다.

“아, 그런데 일장춘몽하고 세상만사 다반사하고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

“…….”

“…….”

그때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연 모용수의 질문에 방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

남궁세가는 무림에서 알아주는 세가였다. 수많은 절정 고수를 배출해 낸 남궁세가에는 유명한 세 가지의 검법이 있다. 바로 천둔검법과 지둔검법, 그리고 가주만 익힌다는 태천지둔검법이 그것이었다.

남궁휘는 어린 나이에 천둔검법을 육 성까지 익혀 무림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칠룡이 아닌 팔룡이었다면 분명 한자리를 꿰찼으리라 소문난 그였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외모는 그에게 옥동자라는 별명을 주기 충분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 당황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남궁휘의 눈이 바닥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남궁세가주인 아버지의 말에, 아니 명령에 따라 호가장으로 온 그는 상당히 불쾌한 상태였다. 오자마자 이류 문파의 문하생들과 천객조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정찰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짜증이 일었지만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선 아무 말 없이 따라야 할 그였기에 군말 없이 다녀왔다.

“음냐.”

“쿨…….”

남궁휘는 혹시 뭔가 잘못 봤나 하는 생각에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남궁휘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의 방에 네 명의 사내가 서로 부둥켜안고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인으로 보이는 이의 자는 모습은 아주 가관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책자를 붙들고 흐뭇하게 웃으며 자고 있었다.

거기에 허름한 옷차림의 청년의 얼굴은 어디선가 본 듯 상당히 낯이 익었다.

“서, 설마 화산파 장문인!”

남궁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기억난 것이다. 허름한 옷차림이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자신의 추리에 잠깐 감탄하던 그는 다시 냉정한 상태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호가장으로 올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온다 하더라도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고 있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들 외에 두 명이 더 있었지만 둘 다 등을 돌려 자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감히 신성한 자신의 방에서 몰래 잠을 자고 있다니. 그것은 일벌백계해야 할 큰 죄였다.

“으음, 달순아… 크크큭.”

그 순간 중년인의 입이 열리며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에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가, 감히 내 방에서… 헉!”

분노에 주먹을 들어 올리던 남궁휘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중년인의 입이 벌어지며 투명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려 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남궁휘는 앞뒤 가릴 거 없이 행동을 취했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뻐걱!

“흐아흥~!”

십수 년의 단련으로 탄탄해진 남궁휘의 다리가 휘둘러지며 중년인의 얼굴을 강타했다. 얼마나 강하게 찼는지 흘러내리려던 침이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중년인의 입에서 괴상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실이 끊어진 연처럼 떠오르더니 구석에 처박혔다.

“헉헉!”

남궁휘가 거친 숨을 내쉬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중년인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광기마저 돋보였다.

“뭐, 뭐야?”

“뭐지?”

“무슨 일이야!”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자 바닥에 누워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들의 눈앞에는 어떤 한 남자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서 있었다.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있는 것이 마치 원수를 만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방구석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헉!”

진철이 놀라 소리쳤고, 당문기의 눈이 크게 떠졌으며, 모용수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기태천이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진철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며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그인 것 같았다.

남궁휘를 바라보는 진철 일행의 눈빛이 변했다. 곧 끌려갈 제물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일장춘몽이라…….”

진철이 말하자 당문기와 모용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휘의 인생이 곧 하나의 꿈으로 변해 사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호가장 인근 숲 속.

한 인영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당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주재구는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비어 버린 단전에서 작은 기운이 솟아나 그의 세맥으로 뻗어 나갔다.

몇 번 숨을 몰아쉰 주재구는 힘겹게 다리를 옮기며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에게로 다가갔다.

정확히 왼쪽 가슴에 꽂혀 있는 검은 도가 주인을 부르는 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주재구가 도병을 잡자 그제야 떨림을 멈춘 도는 시체의 가슴에서 떨어져 나왔다.

주재구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검은 무복에 검은 도를 쥐고 있는 자. 바로 사련의 시체였다.

사련의 무위는 대단했다. 하지만 그 역시 누군가와 격돌했는지 꽤 지쳐 있었다. 그런 몸으로 자신의 도와 살성의 힘을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주재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주재구는 이유 모를 기분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저 하늘이 마치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재구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왔다. 궁에서도 버림받은 몸이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뿐.

호가장이 자리한 방향을 바라보던 주재구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

남궁휘은 무림오대세가에서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남궁세가의 차남이었다. 그렇기에 어디를 가든 황홀한 대접을 받았다. 거기에 돈도 많았다. 그렇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싶은 것은 대부분 가질 수 있었다. 남궁휘는 그렇게 귀하게 자랐다.

“허리 똑바로 안 펴냐?”

“…허억!”

무언가가 남궁휘의 팔을 훑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팔의 힘이 풀리면서 바닥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쿵!

“컥!”

남궁휘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기태천이 코를 후비며 입을 열었다.

“똑바로 안 하냐?”

“크윽!”

이것은 굴욕이었다. 대남궁세가의 차남이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본단 말인가?

맞지만 않았어도 결코 이런 자세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무슨 수법을 썼는지 몸 안의 내공은 느껴지건만 자신의 마음대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 탓에 온몸이 담에 걸린 것처럼 아파 왔다.

“야, 야, 팔이 후들거린다. 그거밖에 못하냐?”

“내, 내가… 누, 누구인 줄 알… 고 이러는 게, 게요?”

“네놈이 누군지는 내가 알 바 아니고. 똑바로 해라. 또 얻어맞기 싫으면.”

기태천은 남궁휘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방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 옆에서 모용수가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 기태천의 행동이 너무한 것 같기도 했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행동이었다. 어떻게 감히 무림말학(武林末學)이 검왕의 얼굴에 발 도장을 찍어 놓는단 말인가?

드르륵.

그때 방문이 열리며 북궁아의 상태를 살펴보고 온 진철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철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기태천 옆으로 가 몸을 눕혔다. 그 모습을 보던 기태천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말도 없이 옆에 누웠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자신의 무게가 안 선다고 생각했다.

“앗, 저놈 팔을 굽혔는데요?”

“뭣?”

기태천이 입을 열려는 찰나 진철의 말에 그의 시선이 남궁휘에게 향했다.

남궁휘는 속으로 세상 모든 욕을 쏟아부으며 안간힘을 써 팔을 다시 폈다. 맞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들거리는 움직임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의지를 거부한 움직임이었다.

남궁휘에게 눈빛을 쏘아 준 기태천은 다시 진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기태천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철이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은 것이다.

“네놈은 만날 잠만 자냐?”

“아까 자다 깨서 그런지 졸리네요.”

“어린놈이 무슨 잠이 그렇게 많아?”

“에이, 큰 형님도 참… 무슨 잠에 나이를 따지십니까? 그리고 이따 자시부터 밤새야 할 거 같아서 미리 자 둬야 합니다.”

어느새 기태천은 큰 형님이 되었다. 하지만 기태천은 그 호칭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자시? 자시에 뭔 일 있냐?”

“모르셨습니까?”

“뭐가?”

기태천이 정말로 모른다는 듯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철은 당문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기태천을 이곳에 부른 이가 당문기였다.

당문기는 진철이 자신을 바라보자 모용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명하기 귀찮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용수가 자신의 시선을 외면한 채 몸을 눕히고 눈을 감은 것이다.

‘진철이 둘?’

당문기는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오늘 축시에 마혈도가 호가장을 습격한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자시부터 준비를 한다고 하더군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말 없었잖아?”

기태천이 벌떡 일어나며 묻자 당문기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를 속였다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진철이 기태천을 향해 물었다.

“몰랐어요? 그럼 여긴 왜 오신 거예요? 마혈도를 잡으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

“문기, 저놈이 여기 오면 밥 주고, 재워 주고, 여자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 왔지.”

“먹고 놀러 왔다는 거군요. 그래서 예쁜 여자라도 보셨습니까?”

“음… 그게 사실은…….”

진철의 물음에 기태천이 말끝을 흐리며 눈을 지그시 떴다. 진철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등을 돌리며 자는 줄 알았던 모용수 역시 몸을 일으켰다. 관심이 생긴 것이다.

“너넨 아느냐? 이 무림에 미녀라고 소문난 다섯 명의 여인을. 그들을 무림오미(武林五美)라 칭하지.”

“아뇨.”

진철이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무림에 관한 것을 물어보는 것은 시골의 꼬마에게 황제가 오늘 뭐했냐고 묻는 거와 같았다.

“전 압니다.”

모용수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저놈이 어리다고 여자에 관심이 많구먼. 너도 어린데 왜 모르냐?”

“전 도사잖습니까?”

진철이 정좌하며 양손을 모았다.

“무량수불.”

“…….”

기태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오늘 만나서 이상하게 친근한 사이가 되었지만, 알 수 없는 점이 어딜 봐서 진철이 도사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점은 이상했다. 자신도 도사라고 하기엔 뭐했지만 진철이란 놈은 더했다.

“야, 넌 화산파라며? 그런데 무량수불이 뭐냐? 무량수불이?”

“에? 도사는 다 무량수불 하는 거 아니에요?”

“지랄.”

진철의 의문을 기태천이 한마디로 위축시켰다.

“무량수불은 아미타불의 다른 말이야. 그런데 도가가 왜 불가처럼 무량수불 하고 있냐?”

“책에서 봤는데 무당파는 무량수불 한다던데요?”

“걔네는 개파 조사가 소림사 출신이니까 그렇지.”

“아. 그럼 화산파는 어떻게 인사를 합니까?”

“화산파는 말했다시피 속가와 도가가 합친 문파야. 그래서 그런지 인사법이 무당과는 다르지. 문헌에 따르면 화산파는 포권을 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도호를 대며 인사나 감사를 표한다고 하더군.”

“오!”

진철이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창피했는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기 형님께선 뭐든지 다 알고 계시는군요? 존경합니다.”

“뭘 이런 거 가지고.”

기태천이 다시 몸을 눕히며 코웃음 쳤다. ‘이 정도는 기본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때 모용수가 바싹 다가와 앉았다.

“그래서 그 다섯 미녀분들이 어쨌다는 겁니까?”

“맞아!”

진철도 깜빡했는지 몸을 일으키며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기태천은 진철과 모용수의 시선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혼자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즐거운 것일 줄은 몰랐다.

“좋아. 그 무림오미 중에 가장 예쁜 여자가 누굴까?”

“글쎄요.”

“아까 그 무림오미 중 한 명을 바로 코앞에서 봤지. 찰랑이는 머릿결, 그리고 도톰한 입술과 오뚝한 코. 특히 그녀의 눈동자가 예술이었어.”

“오!”

진철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모용수의 코에서는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눈은 충혈된 듯 빨간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거기에다가!”

번뜩!

진철과 모용수의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귀는 이보다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기태천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따 말해 주지.”

“에이…….”

진철과 모용수가 아쉽다는 듯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태천은 몸을 돌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엎드려 있던 남궁휘의 눈은 핏발이 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

주재구의 가문은 무가였다. 그것도 무림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뛰어난 무가였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에 끝났다. 어느 날 문제가 생긴 것이다.

처음 본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주재구는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별 생각 하지 않고 그들을 잊었다. 그리고 그날 밤 수많은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렇게 그의 가문은 멸문했다.

이유는 몰랐다. 단지 비명 소리와 병장기 소리가 사라지자 살아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찬란하게 빛나며 언제까지고 발전해 무림의 한 기둥이 될 줄 알았던 가문은 한순간에 끝이 나 버렸다. 하룻밤 만에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고 잿더미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이 년 동안 방황을 하다 우연찮게 들어간 마궁에서 십오 년간 무공을 갈고닦았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견뎌 냈기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주재구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오늘의 증인이 되고 싶은지 달이 자신의 몸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내린 주재구는 자신의 손안에서 도명을 뿜어내고 있는 묵도를 쓰다듬었다. 주인이 어떤 마음을 지니고 이곳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에 잘 웃지도 않는 주재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몸의 상태는 최악이었건만 이상하게 마음만은 가벼웠다.

주재구의 다리가 움직였다. 그런 그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호가장의 집무실. 그곳에 금석천과 제갈야가 앉아 있었다.

“무림 동도들은 어떠신지요?”

“그들의 상태는 괜찮습니다만… 역시 마혈도가 나타나야만 알 것 같습니다. 다만 예상대로라면 마혈도는 이곳에서 뼈를 묻겠지요.”

“그렇소?”

금석천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집이 광택을 발하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제갈 선생은 십칠 년 전 우리 호가장의 일을 알고 계시오?”

과거를 회상하듯 입을 연 금석천의 모습에 잠시 뜸을 들인 제갈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계시겠구려.”

“그렇지요.”

제갈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호가장에 숨겨져 있는 물건. 그것은 십칠 년 전 수많은 중소 문파를 피로 물들게 한 물건이었다. 대문파들은 대부분 봉문에 든 시기기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피를 흘린 적이 있었다.

“이번 일은… 역시 그 일 때문이겠지요?”

“…….”

금석천의 말에 제갈야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려 입을 축였다. 금석천이 말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자신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마혈도에게 멸문당했던 문파들이 호가장과 함께 무림을 피로 물들인 적이 있었던 문파들이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사라진 곳에는 여우가 왕 노릇을 한다고 했던가? 그때의 호가장은 무림의 새로이 떠오르는 샛별과도 같은 문파였다.

“본디 무림이란 은원과 원한으로 맺어지는 곳. 본인 역시 무림인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의 빚을 받아야겠지요.”

금석천은 자신의 검을 옆에 놓고는 살짝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체념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뜨자 그에게서 강대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닐 것이오. 본인은 꼭 이루어야 할 일이 있소이다. 부디 부탁이오, 제갈 선생. 이 호가장에 희망을 주시구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에 맡겨야지요. 다만, 장주께서는 이 사실만 알고 계십시오.”

“말씀하시구려.”

제갈야는 잠시 말을 끊은 뒤 금석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또박또박 한 글자씩 내뱉었다.

“무언가를 얻는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뜻. 그에 대한 책임은 바로 호가장에 돌아갈 것입니다.”

“…….”

금석천은 제갈야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받아야 할 빚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기억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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