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마령환의 행방
한바탕 전운이 휩쓸고 간 호가장은 삼 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야말로 시끌벅적했다. 그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마혈도 단 한 사람에게 호가장 정문을 내줬다는 것이고, 그 마혈도가 마궁의 무사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제갈세가가 마궁에 붙었다는 것이다. 중원의 두뇌라 불리는 제갈세가가 마궁에 붙었다는 것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제갈세가는 과거 오대세가라 불리며 정파 무림의 기둥이기도 했다. 비록 혈무대전에서 그 세가 약해지기는 했다지만, 제갈세가가 명문 정파인 것은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제갈세가가 마궁에 붙었으니 호가장은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더군다나 마혈도 주재구의 시체를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으니 그들의 두려움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그런데 그놈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당연히 죽지 않았겠습니까?”
“하긴 내가 정찰하러 갔을 때 봤는데, 그 절벽 정말로 까마득한 높이더만.”
“그나저나 지금에서야 이야기하지만, 정말 진철 형님 대단했습니다. 그런 무공을 숨기고 계셨다니.”
당문기의 물음에 답하던 모용수가 진철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숨기다니? 난 숨긴 적 없어.”
“예? 하지만 무공이 이렇게 높다고는…….”
“내가 약하다고 한 적 있어?”
“음…….”
그러고 보니 진철이 직접 자기가 약하다고 한 적은 없었다. 전부 자신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
“없네요. 그런데 그렇게 아무런 기도도 느껴지지 않다니. 대단하십니다.”
“네가 도를 알아?”
“예?”
“도를 알면 돼, 도를.”
“…….”
모용수의 얼굴이 기태천을 향했다.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트리듯 앉아 있던 기태천은 모용수가 자신을 바라보자 얼굴을 구겼다.
“왜? 뭘 봐?”
기태천이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진철을 비롯한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손에는 꽤나 큰 코딱지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코딱지는 포물선을 그리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아닙니다. 도라…….”
고개를 돌린 모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기태천을 바라봐도 뭔가 자신들과는 달라 보였다. 뭐랄까. 접근하지 못할 다른 세계의 인간 같았다.
“그런데 앞으로 뭐하실 겁니까?”
“글쎄,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그럼 저희 집에 들르시겠습니까?”
“너희 집?”
모용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심각한 고민을 하듯 눈을 감고 진중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싫어. 너무 멀리 있잖아?”
“집에 오는 경비는 제가 부담토록 하겠습니다.”
“돈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너무 멀어서 그렇다니까?”
“저희 집에 오시면 삼 몇 뿌리 드리겠습니다. 정력에 참 좋은 거라고 합니다. 동방에서 흘러들어온 것이라더군요.”
“삼!”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옆에서 엿듣고 있던 기태천의 귀 역시 쫑긋해지며 모용수에게 가까이 붙었다. 모용수는 기태천이 다가오자 어색하게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기 선배님도 오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음… 흠흠! 그럼 그러도록 할까? 물론 꼭 삼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야. 우리 곤륜산은 영기가 가득 차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삼 몇 뿌리 정도야 반나절이면 캘 수 있다고.”
“정말입니까?”
진철이 놀랍다는 듯 묻자 기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거기에 기운이 얼마나 영험한지 한 뿌리만 먹어도 족히 몇 달은 잠을 못 이룰 정도라네.”
“오!”
진철이 눈을 부릅뜨더니 기태천의 손을 잡아 갔다. 기태천은 진철이 자신의 손을 잡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 뭐냐?”
“언제 한번 곤륜파에 들르겠습니다.”
“그, 그래라. 그 전에 일단 모용세가부터 가자고.”
“좋습니다.”
둘이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짓는 모습에 모용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았다.
“그런데 도사가 정력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당문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기태천은 당문기를 바라보다 바로 시선을 피했다. 당문기가 음흉한 눈빛으로 기태천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기태천은 헛기침을 한 번 내뱉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력이라니? 본디 삼이란 대지의 기운을 받아 자라는 식물이라네. 그것은 천지와 대지가 소통이 되는 장소에서만 자라기에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라고도 불리지. 도사는 모름지기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아야 하는 법! 그런 도사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고 자라는 삼을 먹는 것이 무에 잘못된 건가?”
“전 도사가 아니라서 정력에만 좋아도 괜찮습니다.”
그때 진철이 껴들며 말하자 기태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화산파는 속세의 문파가 아니던가? 비록 도가 계열이라고는 하지만 속세와 조화를 이룬 문파기도 했다.
기태천은 얼굴을 찡그리고는 탁자에 얼굴을 묻었다. 그때 모용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참, 그런데 형님 일행이라던 그 여인분은 좀 어떻습니까? 한번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 그렇지.”
진철이 고개를 번뜩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북궁아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병상에 누운 지 어느덧 사흘의 시간이 지났다. 사흘이라면 정신을 차릴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진철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당문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그러고 보니 나도 볼일이 있었군.”
기태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용수의 얼굴이 기이하게 변했다. 자신만 볼일이 없었다. 아무도 찾아 주는 이가 없었고, 갈 곳도 없었던 것이다.
“넌 나 따라오면 되잖아?”
“아하!”
당문기의 말에 모용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 일단 그녀에게 가 보겠습니다.”
“음…….”
진철이 재빨리 방문을 나서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태천이 입을 열었다.
“정력이라…….”
“…….”
“아! 당문 대협!”
“음?”
방을 빠져나온 당문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중년인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깨부터 팔까지 붕대를 감은 것으로 보아 꽤 심한 상처를 입은 듯했다.
“허 총관님 아닙니까?
당문기가 알은체하자 고개를 끄덕인 중년인은 호가장의 총관이자 당주인 허천우였다. 그 역시 마혈도의 도기에 당했는지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거기에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는지 붕대를 감은 곳곳에는 아직 핏자국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몸도 성치 않으신 것 같은데 어찌 이렇게 돌아다니십니까? 조금 더 쉬시지 않고.”
“하하, 제 몸만 그렇겠습니까? 우리 호가 문도들 역시 많이 다쳤습니다만 일어나 장 내를 복구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총관이라는 작자가 누워만 있으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무림 영웅분들께서도 계신데 말입니다.”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억지로 웃는 허천우의 말에 당문기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상당히 아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시지요. 금 장주님도 많이 다치신 걸로 아는데, 허 총관님께서 무리하다 쓰러지기라도 하신다면 난리가 날 겁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저 역시 무인이기에 몸 상태를 잘 관리하면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천우가 고개를 숙이자 당문기 역시 고개를 숙이며 그 인사를 받았다. 그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기태천이 당문기를 향해 물었다.
“누구냐?”
“아, 호가장의 총관님이십니다.”
“그래? 그런데 왜 난 처음 보지?”
기태천은 고개를 갸웃하며 허천우를 바라보았다. 허천우는 그런 기태천의 눈빛이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눈살을 구겼다. 거기에다 호가장에 있으면서 총관인 자신을 모른다니. 그 사실이 더욱 기분을 언짢게 만들었다.
“그야 형님께서는 오시자마자 쭉 숙소에만 계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지.”
기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엔 허천우가 당문기에게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저… 분은?”
허천우는 기태천을 슬쩍슬쩍 바라보았다. 당문기가 존대하는 것으로 보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높은 사람이 호가장에 방문했는데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은 호가장의 총관이었으니까.
“나? 기태천.”
기태천은 거만하게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허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아, 이분은 곤륜파의 천검이십니다.”
“…헉! 검왕 천검!”
허천우는 눈이 튀어 나오는 것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곤륜파라는 것도 놀라운데 천검이라니. 천검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마혈도에게 정문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궁 역시 두렵지 않다. 그만큼 천검의 이름은 값지고 무거웠다.
‘그런데 기 대협이 이곳에 온 것을 난 왜 몰랐지?’
분명 자신은 접객당의 당주이자 총관이었다. 그런데 기태천 같은 거물이 왔는데도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업무 태반으로 빈둥빈둥 놀기만 한 것도 아니다. 장 내에 머물고 있는 거물급의 이름과 정보는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저기… 기 대협은 본 장에 언제 오셨습니까?”
허천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보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왔냐는 식으로 들릴 수도 있었기에 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 온 지 며칠 됐지 아마?”
“으음… 이상하군요. 오신 걸 제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귀찮아서 그냥 담 넘어왔지.”
“아, 그렇… 에?”
허천우는 얼빠진 얼굴로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기태천은 그의 눈빛에 뭘 그리 놀라냐는 듯 오히려 당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허천우는 머리를 긁었다. 정말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무림에 위명과 협명이 자자한 천검인지 의심이 간 것이다.
“참, 그러고 보니 호가장주는 일어났는가? 그 친구 내상이 꽤 심했을 텐데.”
“예. 어제 깨어나셔서 지금 기력을 회복 중이십니다.”
“그래? 그럼 잠깐 그 친구를 보러 가야겠군.”
“예?”
허천우가 되묻자 기태천은 턱을 앞으로 내밀면서 복도를 가리켰다. 안내하라는 것이다. 허천우는 어이가 없는지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천검이라 하시지만 조금 무례하십니다. 이곳은 호가장입니다. 비록 무림에 위명이 자자하신 분이라고 하더라도 이제 깨어난 분을, 그것도 저희 장주님을 이렇게 뵐 순 없습니다.”
“흐음, 하긴 그 친구도 하나의 문파를 이끄는 장이니까.”
기태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허천우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말이 통했다 여긴 것이다. 그러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태천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기태천 역시 의아한 듯 그에게 입을 열었다.
“뭐하나? 안내 안 하나?”
“예? 아니,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
“그 친구 내가 구했어. 그러니까 난 그 친구의 은인인 셈이지. 그런 내가 만나고 싶은데 방해할 생각인가? 이 사실을 호가장주가 알게 된다면 은인을 내쳤다는 수하 때문에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게야.”
“…….”
허천우는 진심으로 이 사람이 천검이자 곤륜파의 제자가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무슨 도사가 협박을 한단 말인가?
끝내 허천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입니다. 장주님께서 아직 몸이 편치 않으시니 말입니다.”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도 없다네. 그럼 어서 가세나.”
허천우가 복도를 걸어가자 기태천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 뒤를 돌아 당문기에게 입을 열었다.
“난 잠깐 볼일이 있어 다녀올 테니까, 어디서 시간 때우다가 진철에게 가 있도록 해. 그럼 거기서 보도록 하지.”
“예, 그럼 그러죠.”
당문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돌아 모용수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
금석천은 눈을 뜬 이후로 편히 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가문에 이런 일이 생겼는지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금석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호가장의 미래를 이끌 젊은 무사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은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곧 호가장의 멸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도움을 청해 볼까.’
그동안 자신과 알고 지냈던 여러 문파들에게 도움을 청할까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림의 생리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예전같이 힘을 지니고 있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앞날을 장담하기 힘든 상태였다. 지금 이 상태에서 그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후우… 인과응보(因果應報)인가.”
금석천은 한숨을 내쉬며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십칠 년 전 자신이 행한 일이 그대로 자신에게 닥치고 있었다.
그는 슬쩍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흑색의 반지가 있어야 할 자리.
“다행히 마령환은 빼돌릴 수 있었군.”
금석천이 유일하게 안도하는 부분이었다.
제갈야가 그렇게 호가장의 깊숙이 들어와 있으면서도 왜 가만히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면 분명 그 역시 마령환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마혈도를 저지하지 못했다면 다급한 마음에 제갈야에게 마령환의 위치를 말해 ‘그녀’를 돕게 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마궁의 손에 마령환이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터.
아무리 자신이 마령환을 얻기 위해 살겁을 행했다지만 마궁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태천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친구를 저버린 자신이라지만 껍데기는 정파였으니까.
“정파라……. 내가 과연 정파라 할 수 있는가. 크큭.”
금석천은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트렸다.
똑똑.
“장주님, 허천우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허 총관, 들어오게.”
금석천은 눈가에 살짝 배어 나온 물기를 닦고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허천우와 기태천의 모습이 드러났다. 금석천은 기태천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기 대협, 어서 오십시오.”
“아,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으시게나. 아직 성치 않은 몸 아닌가.”
기태천의 나이는 삼십 대 후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하대에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의 스승은 현 무림 최고 어른인 복마검천(伏魔劍天) 우송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은인이었다. 그런 자의 하대쯤이야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하대할 자격이 충분했다.
“아니요. 은인이 오셨거늘 어찌 누워만 있을 수 있겠소.”
“뭐, 그렇다면야.”
기태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둘러본 후 엄지와 검지를 맞닿게 동그랗게 말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건 언제 줄 텐가?”
“…….”
금석천은 잠시 기태천이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뭔가 기억난 것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물론 지금 드릴 수 있소. 허 총관, 내 금낭 좀 가져오게나.”
“예? 아, 예.”
허천우는 갑자기 금낭 타령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금낭을 가지러 가기 위해 방문을 나섰다. 기태천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돈 많은 사람들은 좋구먼. 호탕하지 않은가?”
“그렇소?”
“물론이지. 그리고 말이야…….”
기태천은 의자를 당겨 금석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야기를 해 보자고. 일단 마궁이 왜 이곳에 왔는지부터 말이지.”
“…….”
금석천은 기태천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금석천은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은인이시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말하고 안 하고는 내 자유요. 내가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시겠소?”
“미안하지만 남자의 비밀 따윈 캐묻고 싶은 생각이 없다네. 단지 궁금해서 물을 뿐이야, 궁금해서.”
기태천이 얼굴을 굳히고 정색하며 말하자 그 모습에 금석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기태천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지. 허물이 있다면, 버리기를 두려워 말라고. 지금 자네는 허물이 무엇이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것을 버리게나.”
“…….”
기태천의 말에 금석천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 가지만 약조해 주시구려.”
“뭔가?”
“이 이야기는 비밀로 붙여 주시구려.”
“물론이지.”
기태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금석천은 숨을 몰아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우, 나도 늙었나 보오. 이 이야기를 꺼내다니.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알고 있는 부분만 말하면 된다네.”
금석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궁은 본 장에서 어떠한 물건을 찾고 있었소. 아주 귀하고, 그 누구라도 가지고 싶은 물건. 그 탐욕으로 인해 살겁마저 일어난 마의 물건을 말이오. 바로 마령환!”
“물건은 죄가 없지. 단지 사람의 욕심이 문제일 뿐. 도사가 어째서 칭송받는지 아는가? 바로 마음을 비우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물욕 역시 사라지게 된다네.”
기태천은 허리를 펴며 살짝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마치 자연의 기운을 느끼려는 모습 같았다.
“자, 느껴 보게. 이것이 바로 자연의 기운이지.”
금석천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조금 전만 해도 돈을 달라고 말하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운 도사시거늘, 어찌 돈을 달라 하셨소? 그것은 물욕 아니시오?”
금석천의 말에 기태천은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왜 그렇긴.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도의 극의를 얻지 못했다네. 즉, 나는 신선이 아니라 사람이란 말일세. 그런 내가 세상을 이롭게 하고 널리 살피려면 뭐가 있어야겠나? 바로 돈이 있어야 하지. 나도 먹고 싸고 해야 하니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단 말이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야. 그 때문에 수많은 도사들이 말코 도사라는 소리를 듣고 다니니.”
기태천은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금석천은 진심으로 고민해야 했다. 과연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가 도사인지 아닌지를.
“자자, 그래서 어떻게 됐나? 그 마령환 때문에.”
“아, 그 마령환은 십팔 년 전 어느 한 문파의 소문주가 발견했다오.”
“그걸 뺏었구나?”
“…….”
순간 금석천이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보자 기태천은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했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금석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빈정거리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분명 그 마령환에 눈이 멀어 일을 저질렀으니까.
“후우, 그렇소. 뺏었소. 그 마령환에 눈이 멀어 단둘뿐인 친구를 내치고 말았소이다.”
금석천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일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마혈도 주재구. 그가 바로 그 당시 마령환의 주인이자 내 친구의 아들이오.”
“호오…….”
기태천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놈 참 당차군.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만한 실력을 기르고 이곳에 왔다는 건가?”
“후후, 그놈 아비의 친구였던 자로서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은 감출 수 없구려. 이유야 어쨌든 본 장을 이렇게 만든 놈이니 말이오.”
“하긴,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아름다운 사랑이니까.”
“…….”
금석천은 또 한 번 끓어오르는 화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태천은 그런 그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건지, 아니면 다음 뒷이야기가 궁금한 건지 눈을 맑게 뜨고 있었다.
“후우, 그 친구가 마령환을 얻은 것은 우연이었다오. 본인과 함께 무림을 활보하다 어느 한 동굴에 들어가 얻게 된 것이니까. 그렇게 그 친구는 마령환을 지니고 나와 헤어졌다오. 그리고 삼 년 후 다시 만났소이다. 그런데 그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소.”
“무슨 일이 있었나?”
금석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그 치욕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지금도 눈만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그 친구는 삼 년 전만 해도 나와 동수를 이루던 실력이었거늘, 그때 만나 비무를 해 본 결과 단 십여 초 만에 패했소이다.”
“그 친구가 수련을 좀 열심히 했나 보군.”
기태천의 말에 금석천은 실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것이 수련으로 이뤄 낸 경지라면 오히려 자신이 그 친구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아니요. 바로 마령환의 힘이었소. 착용자의 내공을 비약적으로 올려 주고, 마기를 다룰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 마령환의 힘 말이오.”
“호오, 마령환에 알려지지 않은 힘이 있었던가?”
금석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마령환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효능이 굉장히 많소. 단지 그 비밀을 밝혀낼 자는 그 인연이 닿는 자이어야 하오. 그렇기에 그 친구와 본인 역시 마령환의 일부분의 힘만 맛보았을 뿐이오.”
“음…….”
금석천의 말에 기태천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금석천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기태천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한 탓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주위의 공기도 변한 것 같았다.
“그 마령환, 몸에 좋던가? 그 뭐냐. 정력이 좋다든가 하는 뭐 그런 거 말일세.”
“참 좋소이다. 경험상 밤마다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더구려.”
“오!”
기태천의 눈이 반짝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금석천이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진지하게 제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니 말이오. 계속 그렇게 빈정거리신다면 다신 입을 열지 않겠소!”
“알았네. 계속하게나.”
“흠흠, 아무튼 본인은 마령환이 마기를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알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오. 그 마령환만 있다면 호가장이 과거의 위명을 되찾는 건 시간문제라 여기고 말이오. 알고 계시오? 본 장은 과거 중원 오십대 문파 안에 들었던 명가였소.”
“음…….”
기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호가장의 위명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기태천을 잠시 바라본 금석천은 다시 입을 열었다.
“본인은 본 장을 부활시키기 위해 몇몇의 동료들과 그 친구의 문파를 치기로 계획을 짰소. 그들은 마령환의 존재도 모르고 그곳에 마공이 있을 것 같다는 말에 거뜬히 손을 내밀었다오. 그리고 그 계획이 절정에 달았을 때, 우리는 그곳을 멸문시켰다오. 하지만…….”
“그의 아들이 살아남아 복수의 칼을 갈았다, 이거로군. 그럼 요 며칠간 괴멸한 중소 문파들이 모두 자네의 동료였던 건가?”
기태천의 물음에 금석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오. 그 아이가 마궁에 들어갔다니.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 호가장이 이렇게 당한 것 역시 말이오.”
“인과응보로군.”
“그렇소. 지난 십칠 년간 난 그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심히 괴로웠다오. 물론 기 대협은 이런 날 비웃겠지만 말이오.”
금석천은 괴롭다는 듯 손을 들어 얼굴을 짚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태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다네. 내가 묻는다고 이야기해 주는 의도가 뭔가? 다른 이들 같았으면 그 마령환을 몰래 빼돌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텐데 말이야.”
“훗, 그도 그렇겠구려.”
금석천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랬을 것이다. 자신 역시 호가장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기태천에게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마령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었기 때문이오. 그리고 친우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기도 했고. 또 기 대협은 그날 제갈야와 본인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들었을 것이 아니오? 그 상황에서 숨겨 봐야 뭐가 달라지겠소. 그 전에 은인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소이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군.”
그때 기태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금석천을 바라보았다.
“과연 마령환을 그가 우연으로 얻은 것일까?”
“…그게 무슨 말이오?”
금석천의 물음에 기태천은 계속 입을 열었다.
“그가 마령환을 얻은 게 우연이 아니라면? 그리고 자네가 마령환을 뺏은 것 역시 우연이 아니라면?”
“…….”
금석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아무리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무림이라지만, 그 시절 그 친구의 가문과 호가장은 수많은 중소 문파 중 하나였소. 그런 작은 문파를 어디에 써먹겠다고 그러겠소?”
자신이 말하고도 씁쓸한지 금석천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기태천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군. 그런데 그 마령환은 아직도 호가장에 있는 것인가?”
“아니요. 마령환은…….”
꽝!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자 입을 열려던 금석천이 고개를 돌렸다. 기태천 역시 그쪽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천우가 방으로 뛰어 들어와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허벅지에 묶인 붕대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니, 몸도 성치 않은 자네가 왜 그렇게 뛰어온 것이야?”
“헉헉, 장주!”
“말해 보게나. 대체 무슨 일인가?”
금석천이 다급하게 묻자, 방 안으로 들어온 그는 손에 쥔 종이를 펼쳐 금석천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제갈야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뭐?”
금석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것은 기태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누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제갈야 말입니다. 제갈세가의 근처 산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시체가 부패된 상태로 보아 사망한 지 열흘은 넘어 보였다고 합니다.”
“그가 왜 거기서 죽었다는 겐가? 얼마 전만 해도 이 호가장에 있었단 말일세. 그런데 죽은 지 열흘? 지금 농담하는 건가?”
금석천의 언성이 저절로 높아만 갔다. 그 모습에 허천우는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으며 금석천의 손에 쥐여 준 종이를 가리켰다.
“사실입니다. 그 문서가 바로 무림맹에서 직접 전달해 온 겁니다.”
“무림맹!”
금석천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무림맹이란 말 때문이었다.
정파 무림의 상위 오십 위에 안에 드는 문파의 문주만이 가입할 수 있는 회(會)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림맹이다. 하나의 회 같은 존재이지만 맹이란 단어를 붙인 것은, 무림맹 회원들이 모두 하나의 단체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즉, 무림맹은 상위 문파들의 모임이었다.
그야말로 정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거대한 단체!
“그렇습니다!”
금석천은 손안에 들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간단하고도 간략한 내용. 허천우가 말한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금석천은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흠, 그렇다면 그 제갈야라는 놈은 본래의 제갈 선생을 죽이고 변장했다는 뜻이로군.”
그때 기태천이 심각하게 입을 열자 금석천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꼈을까? 기태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게나. 제갈세가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정도의 길을 걸어온 명문 중의 명문이라네. 그런데 그러한 문파의 장로인 제갈 선생이 쉽게 마궁과 손을 잡겠는가?”
“으음…….”
금석천은 신음을 흘리며 손에 들린 종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내용이 달라질 리는 없었다. 그는 손을 쥐어 종이를 구겼다.
한편 그런 금석천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태천은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하다가 만 이야기가 있었군. 그래, 반지는 어디에 있는가?”
기태천이 묻자 금석천은 허천우를 바라보았다. 허천우는 고개를 숙이고는 방문을 나섰다. 그가 사라지자 금석천은 다시 기태천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일단 신룡(新龍)을 보고 싶소. 그를 볼 수 있겠소?”
***
진철은 북궁아가 있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북궁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다시 잠에 빠져든 것인지 침상에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진철은 그녀의 옆자리로 의자를 끌고 가서 앉았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를 치유해 주듯 비춰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철은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그녀의 팔을 바라보았다. 붕대로 칭칭 감아 놓은 그녀의 팔은 그녀가 들고 다니는 도와는 달리 가늘어도 너무 가늘었다. 시골의 아낙들보다도 가늘어 보였다.
“음…….”
진철의 시선이 그녀의 팔을 올라타고 어깨를 지나 얼굴로 향했다.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에 걸쳐 있었다.
진철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이 녀석이 이렇게 가녀렸던가?’
머리카락을 치운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 창백했다. 상처가 생각보다 심한지 눈 밑은 검었고,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었다.
“북궁아라…….”
그러고 보니 이름 외에는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 그녀의 무공은 무엇인지, 마혈도를 잡기 위해서 중원에 나왔다지만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은 누구인지.
‘뭐, 상관없으려나.’
그녀가 말하길, 마혈도를 잡는 것이 명령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혈도가 죽은 지금 이 상황에서 더 이상 그녀와 동행할 이유도 없었다.
“음…….”
진철은 이불을 끌어 그녀의 목까지 덮어 주었다.
“오… 빠…….”
“응?”
“오빠아… 오빠. 으음…….”
“……!”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불에서 재빨리 손을 놓고 거둔 그는 경악한 눈으로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귀여운 모습이라니!’
북궁아의 입에서 나온 음성은 평소와는 달리 너무나 가늘었다. 거기에 무뚝뚝한 면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귓가를 간질거리는 목소리였다. 괜히 진철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음… 응?”
“아!”
그때 북궁아가 몸을 뒤척이더니 눈을 살짝 떴다. 진철과 북궁아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진철은 웃는 모습 그대로 굳어 버렸다. 북궁아는 그런 진철의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느껴지는 고통에 아미를 구긴 북궁아는 뭔가를 떠올린 듯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는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자 북궁아가 고개를 흔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여기 있지? 그놈은?”
“그놈?”
“검은 도를 들고 있던 놈.”
“아…….”
진철의 머릿속으로 누군가가 떠올랐다. 마혈도와 처음으로 조우했을 때 북궁아를 이렇게 만든 사내였다.
“모르겠는걸. 아마도 죽은 거 같던데.”
“그렇군.”
“응. 그런데…….”
진철은 북궁아의 눈치를 살짝 살피며 물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잠꼬대야?”
“아… 미안하다.”
북궁아는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때 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그녀의 채취가 바람을 타고 진철에게 풍겨 왔다. 그 채취에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가끔, 그래. 가끔 이럴 때가 있다.”
“…….”
“왜 그래?”
“아, 아니.”
“음?”
“아니라니까.”
진철은 북궁아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북궁아는 그런 그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진철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당한 거야?”
“아, 맞다. 그놈이 비겁한 짓을 했다.”
“비겁한 짓?”
“응. 모래를 뿌렸다.”
“모래를?”
“응. 모래가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런 나쁜 놈이!”
진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북궁아 역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놈은 나쁜 놈이었다. 다음에 걸리면 내가 반드시 쪼개 버리겠어.”
“…….”
“왜 그러지?”
“아니야, 아무것도. 그런데 몸은 좀 어때?”
“음…….”
진철의 물음에 몸을 살펴본 북궁아는 눈을 감았다. 아마도 혈도를 점검하려는 듯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일각이 조금 지나자 눈을 뜬 북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다. 외상도 이 정도의 상처는 금방 아물 것이다.”
“금방?”
“그래. 집에서 받던 수련에 비하면 이 정도는…….”
“…….”
진철은 순간 북궁아의 집안이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대체 어느 집안이기에 수련이 허리가 잘려 나간 것보다 더욱 위험하단 말인가?
“참, 마혈도 말인데, 걔 죽은 거 같아.”
“그런가?”
“응.”
“그렇군.”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인 북궁아를 바라보던 진철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혈도를 잡아 오는 것이 명령이라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그가 죽었으니 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 왜 집으로 가야 하지?”
“그야 마혈도가 죽었으니까.”
북궁아는 진철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하지만 난 가지 않는다.”
“어째서?”
“내가 널 만났을 때 한 말을 잊은 건가?”
순간 진철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섬광이 가르고 지나갔다.
‘난 네놈을 내 하인으로 삼기로 정했다. 왜? 하인이 싫은가? 그럼 종은 어떤가? 그것도 싫으면 노예는?’
“…….”
진철은 어색하게 웃었다. 웃어야 할 것 같았다. 웃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진철은 그렇게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
벌컥!
입을 열려던 진철은 갑작스레 문이 열리자 그쪽을 바라보았다. 북궁아 역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라? 일어났나 보군.”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당문기였다. 당문기는 북궁아를 바라보다 진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 형님께서 부르신다네. 가 보도록 하지.”
“기 형님께서 말입니까?”
“그래. 지금 장주실에 계신다네. 자넬 불러오라더군.”
“음…….”
진철은 슬쩍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북궁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침상에 누웠다.
“다녀오지 그래? 난 조금 더 누워 있을 테니까.”
“아아.”
진철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당문기를 향해 걸어갔다. 당문기는 그런 진철을 바라보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뭡니까? 그 미소는?”
“아니네, 아무것도.”
***
무림에는 칠룡을 최고의 후기지수로 뽑았다. 그들의 무위는 차기 절대 고수 후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는데, 아무리 삼류 문파라도 그 문파 안에서 칠룡이 탄생한다면 그 문파는 차기 오십대 문파 안에 들 수 있다 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리고 문파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또 다른 자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림오미였다.
무림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혜롭고 강한 다섯의 여인을 사람들은 무림오미라 불렀다. 그리고 섬서 동천(銅川)에 자리 잡은 안무가의 안선영은 무림오미의 일인이었다. 그런 안선영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손에 들린 하나의 물건 때문이었다.
“마령환.”
나지막이 중얼거린 안선영은 손아귀에 놓인 반지를 바라보았다.
묵빛을 내뿜고 있는 반지에는 기괴한 문자가 적혀 있었고, 당장이라도 눈을 뜰 듯 금색의 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무림 팔대 기보에 속하는 반지로 그 값어치는 감히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이것이 마령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랬던가?
“후우,”
안선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무게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안선영은 살며시 눈을 감으며 상념에 잠겼다.
평소에 별다른 교류가 없던 호가장으로부터 갑자기 연락이 왔었다. 그리고 가주이자 아버지는 그 연락을 받자마자 자신을 호가장으로 보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섬서에 자리 잡고 있는 정도 문파라지만 평소엔 별다른 기별도 없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안선영은 의문을 표하면서도 호위 무사들과 함께 호가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호가장주로부터 마령환을 받게 되었다. 그때의 금석천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마혈도가 호가장으로 향한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단 일인이었다. 호가장은 그동안 멸문당한 타 문파들과는 달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무림 영웅들 역시 그곳으로 모여들어 전혀 긴장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금석천의 얼굴은 심각했었다. 그리고 마령환을 받은 즉시 쫓겨나듯 그곳을 빠져나와야 했다.
안선영은 조심스레 창문을 가리고 있는 천을 치우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성도에 진입한 지 꽤 오래된 듯했다.
안선영은 출발하기 전에 마부에게 되도록 천천히 가도록 일렀다. 본래부터 강한 세력을 지닌 안무가는 자신이 무림오미에 들면서부터 더욱더 수많은 무림인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러 급하게 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는 없었다. 거기에 지금도 누군가가 자신들의 뒤를 따르고 있을 것이다.
안무가는 섬서의 다른 문파들의 견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안무가가 지금 상태에서 더욱 발전한다면 동천을 포함해 위로는 부현, 밑으로는 위남까지 안무가의 영역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다른 문파에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아가씨, 조금 있으면 성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때 속도를 조금 더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그리고 되도록 평범하게 가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절대로 저희가 급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됩니다. 이곳은 섬서니까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마차 밖에서 들려온 호위 무사의 말에 안선영은 긴장한 얼굴로 다시 마령환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이유 모를 불안함이 가슴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호위를 더 데려와야 했나?’
집안에 있는 수많은 무사들을 생각하던 안선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명도 있었고, 자신 역시 생각하기에 쓸데없이 사람들을 많이 끌고 나와 다른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석천이 붙여 주겠다는 호위 무사도 소수만 받아 오지 않았던가?
아마 이 마차를 바라보고 있는 무인들이나 사람들은 안무가에서 어떤 사람이 바람이라도 쐬러 나온 것으로 비쳐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바랄 뿐이었다.
***
높은 절벽. 그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서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이곳으로 온단 말이지?”
“예. 이제 성도를 벗어나 이곳으로 진입한다고 합니다.”
이곽은 수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자신들의 목표가 곧 이 절벽 밑을 통과할 거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안무가에게 당한 치욕이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이제 곧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이 일이 끝나면 안무가는 동천에서 물러나고 그 지역을 자신의 사마곡이 다스리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다른 지역 역시 노릴 수가 있었다.
‘흐흐흐, 곧 사파 무림의 한자리를 꿰찰 날도 머지않았군.’
이곽은 웃음을 흘렸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만약 곡 내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자신에게 안무가의 장녀가 호위 무사 몇 명만 데리고 호가장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자신은 여전히 안무가의 눈치를 보며 낙천(洛川)에서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거기에 안선영은 천하절색의 무림오미란 말이지.’
이곽은 웃음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흉흉한 눈빛을 지닌 자신의 수하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이때만을 기다려 온 굶주린 늑대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곡주! 목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때 수하 중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와 이곽에게 알렸다. 이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도를 허리춤에서 빼내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자! 이제 시작이다! 우리 사마곡의 이름이 전 무림에 명성을 떨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아아!”
이곽의 말에 따라 그의 수하들이 손을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이곽은 당찬 그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때 저 멀리서 하나의 점이 점점 다가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바라보는 이곽의 눈에서 흉흉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히쭉.
“뭡니까? 그 미소는?”
“아니야, 아무것도.”
“…….”
당문기, 모용수와 함께 방으로 들어선 진철은 기태천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얼굴을 굳혔다. 상당히 음흉한 미소였다. 그리고 조금 전 당문기가 지었던 미소이기도 했다.
진철의 물음에 고개를 저은 기태천은 침상에 누워 있는 금석천을 가리켰다.
“이 사람이 호가장의 장주야. 그리고 이놈은 진철이라고 화산파의 장문인이라 하더군.”
“화산파?”
금석천은 낯익은 문파의 이름에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가 눈을 부릅뜨며 되물었다.
“화산파! 설마 사십오 년 전에 멸문한 그 화산파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렇지.”
“설마 화산에 사람이 남아 있을 줄이야!”
금석천은 멀뚱히 서 있는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그의 시선에 미소를 지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금석천은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러야… 배분의 차이가 있을 텐데.”
“아, 배분은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무림 후배로 여겨 주시지요. 그게 저도 편합니다.”
“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진철을 응시하던 금석천은 잠깐 신음을 터트리다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이해하시게. 아직 몸이 편치 않아 이렇게밖에 반길 수 없는 나를.”
“아닙니다. 편히 말씀하시죠. 저도 딱딱한 격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음, 그렇다면 고맙군. 내가 진 소협, 아니 장문인이라 불러야겠지. 진 장문인을 부른 이유는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함이네.”
“부탁이요?”
진철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인 금석천은 기태천을 한 번 바라본 후 다시 진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그 전에 우리 호가장을 구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지. 밖에 허 총관 있는가?”
금석천이 크게 부르자 문밖에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가서 내가 준비하라 한 것을 가져오게나.”
“예!”
밖에 서 있던 사람의 기척이 사라지자 금석천은 얼굴을 굳히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자넨 혹시 마령환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 아니, 자네도 무림인이니 알고 있겠지.”
“…뭡니까? 그게? 먹는 거예요?”
“…….”
“실은 제가 무림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군.”
진철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금석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마령환은 무림의 기보 중의 기보로 주인을 선택한다고 알려진 하나의 반지라네. 마령환의 주인이 된다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지. 그것은 아주 대단한 물건이라네.”
“그렇군요.”
“아, 그렇지. 화산파의 장문인이니 마령환에 대해서는 몰라도 무림의 기보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않을 텐가?”
“무림의 기보요?”
“음…….”
금석천이 입을 다물며 신음을 터트리자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잘 알려 주시길 바랍니다.”
“후우, 무림의 기보 중의 기보로 무림 팔대 기보라 불리는 것들이 있다네. 마령환 역시 그중 하나에 속하지. 그리고 화산파의 신물이었던 자하신검 역시 거기에 속한다네.”
그때 금석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진철의 허리춤에 매인 검을 본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금석천은 고개를 저었다. 화산파가 멸문할 당시 수많은 무인들이 자하신검을 찾기 위해 이 잡듯 무림을 뒤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하신검은커녕 그 당시 장문인이었던 천하제일검 옥린수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자하신검이 이렇게 쉽게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처럼 웃긴 일도 없을 것이다.
“아…….”
진철이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자 금석천은 말을 이었다.
“자하신검은 무림 팔대 기보의 이름도 달려 있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 정파 무림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네. 뭐니 뭐니 해도 과거 천하제일이었던 화산파 장문인의 신물이니까 말이지. 화산파는 아직도 이 정파 무림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지.”
“음… 그렇군요.”
“그리고 그런 무림 팔대 기보 중에 근래까지 모습을 드러냈던 것은 딱 다섯 가지라네. 나머지 세 가지는 전설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들이지. 아무튼 마령환과 자하신검이 바로 알려진 다섯 가지에 속해 있다네. 나머지 세 개의 기보들은 현재 주인이 정해져 있는 상태지.”
거기까지 말을 하던 금석천은 진철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마령환이라는 물건 때문에 신룡(新龍)인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네.”
“신룡이요?”
진철이 의문을 표하며 묻자 옆에서 가만히 듣던 당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붙여진 별호라네. 마혈도와의 격전은 그 누가 봐도 경이로움 그 자체였으니 말이야.”
“오, 그래요?”
“그렇지. 자넨 이제 유명인이야.”
“오오!”
진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우연찮게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철의 마음을 기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 기뻤다. 그렇다면 훨씬 수월하게 문파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탁이요?”
“그 아이를… 안선영을 지켜 줄 수 있겠는가?”
“안선영?”
진철의 얼굴이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모용수는 눈을 부릅뜨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무림오미! 자화(慈花) 안선영!”
“무림오미? 자화?”
“네! 무림오미 중에 외모는 나머지 네 명에 비해 못하지만 너무나 사랑스럽고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기에 붙여진 별호입니다. 외모 역시 나머지 네 명에 비해서 못하다는 거지, 천하절색이라는 말이 전혀 부족하지 않은 미인이죠.”
“음, 꼭 보고 싶군.”
진철과 모용수의 대화를 듣던 금석천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굳어 갔다. 그가 입을 열었다.
“선영이가 무사히 안무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게나. 비록 내가 호위를 몇 붙이긴 했다지만 왜인지 모르게 불안하군. 후우… 그 아이는 날 잘 모르겠지만 난 잘 알고 있지. 어렸을 때 보아 온 그 아이는 정말 별호대로 사랑스러운 아이일세. 부탁이니 제발 그 아이를 도와주게나. 마령환은 지금 그 아이가 가지고 있다네.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아이는 표적이 되고 수많은 무인들의 추적을 받을 테지.”
“음…….”
금석천이 말을 끝내자 진철은 신음을 흘렸다. 그런 진철의 얼굴에는 고민의 기색이 역력했다.
“글쎄요, 저도 꽤 바쁜 몸이라.”
“여기 있는 당 대협에게 다 들었다네. 딱히 할 일도 없다면서?”
진철의 시선이 당문기를 향했다. 당문기는 진철의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거 하면 뭐 줍니까?”
진철이 다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면서 손에 쥐어진 금자 주머니를 주물럭거렸다. 금석천은 그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구겼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돈을 주지. 아마 안무가에서도 보상이 있을 걸세.”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거절은 못하겠네요. 그런데 지금 안 소저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금석천은 진철과 기태천 등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호가장 정문.
당문기와 모용수는 길을 떠나는 기태천과 진철, 북궁아를 배웅했다. 자신들은 함께 가지 못했다. 가문의 대표로 호가장에 온 것이기에 가문으로 돌아가 결과를 보고해야 했다.
“그런데 기 선배님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모용수의 물음에 당문기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도 기태천이 걱정되었다. 당문기는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괜찮으시겠지. 요 근래 언제 기 형님이 직접 무림에 뛰어드신 적이 있던가? 없으셨지. 거기에 진철과 왠지 마음이 통하시는 것 같아.”
“그렇군요.”
“이번 무림행으로 기 형님의 상처가 조금은 누그러졌으면 좋겠어.”
당문기의 진심 어린 말에 모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기태천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당문기와 모용수는 걱정 어린 눈으로 점점 점이 되어 가는 진철 일행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