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8/29)

제7장

추적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가까스로 다물었다. 허름한 옷이 아니라 비단으로 만들어진 도복을 입은 그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묵직한 주머니가 느껴졌다. 철영이 주고 간 금자와 마혈도의 현상금, 금석천이 준 금자가 들어 있는 금낭은 그의 기분은 좋게 만들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품 안에 넣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냐?”

“아닙니다, 아무것도.”

기태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진철이 재빨리 품에서 손을 빼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돈을 지니고 있으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도둑으로 보인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진철은 기태천을 경계했다. 그런 진철의 마음을 모르는 기태천은 고개를 살짝 꺾으며 의문을 품었다. 그때 기태천의 머릿속으로 금석천이 건네주던 두툼한 금낭이 스쳐 지나갔다.

‘저 자식 설마…….’

기태천의 얼굴이 구겨졌다. 진철이 치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철은 주변을 경계하고는 괴기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뒤를 북궁아가 대도를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진철은 주변을 둘러보다 북궁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아? 그 칼 내가 들어 줄까?”

“아니, 괜찮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래? 다행이네. 사실 그 칼 엄청 무거웠거든.”

“…….”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길을 바라보았다. 길 양옆에는 화전이 펼쳐져 있었다. 지대가 높은 곳이었기에 논보다는 밭이 더 많았다. 그런 화전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화산이 떠올랐다.

기태천은 가만히 진철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넌 지금까지 화산에만 있었다고?”

“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하산한 거냐?”

“글쎄요.”

진철은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비록 문파를 재건시키겠다고 하산했다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왠지 그것은 핑계 같았다.

그런 진철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문기 등이 처음 화산에 올라 만났던 것,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보름의 시간, 하산한 후 북궁아를 처음 만났던 사건.

“문파를 재건하려고 하산했는데…….”

“했는데?”

진철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재미있네요. 이제 막 하산했으니 한번 속세를 즐겨 보려고 합니다.”

“그렇지. 속세는 참 즐겁지. 수많은 인연이 기다리고 있거든. 거기에 도를 닦는 도사라면 반드시 속세에 대해서 직접 경험을 해 봐야 하지. 그래야 자신이 도를 닦을 때 지금 하는 게 도를 닦는 건지 접시를 닦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렇지요. 정론이십니다.”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어. 산속에서 도만 닦다가 중생을 구한다고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악이야. 산속에서 도만 닦던 사람이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사람마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거늘.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협객이라 칭하고 칭송하기까지 하지.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쯧쯧.”

혀를 차는 기태천의 모습에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이제야 도사답게 보였다. 그리고 역시나 그에게 어떤 과거가 있다고 느꼈다.

‘다음에 물어봐야지. 크크크.’

사실 남의 과거사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었다.

그런 진철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태천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렇기에 도사는 멀리 보고, 많은 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네. 그런 나에게 한 가지 소리가 들리는구나.”

“예?”

“얼마나 뜯어냈냐?”

기태천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았다. 호가장에서 얼마나 받았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음…….”

진철이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아, 산이 보이는군요.”

“…….”

진철이 대놓고 무시하자 기태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진철이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악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지만 꽤 큼지막한 산이 높게 솟아올라 있었다. 호가장에서 동천으로 갈 수 있는 최대한 빠른 길이 그곳으로 나 있었다.

“산은 별론데.”

“저도 산은 별로입니다.”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

“헉헉!”

한정은 나뭇가지에 옷이 찢겨져도 거침없이 산길을 내달렸다. 그런 그의 뒤로 두 명의 사내가 따라붙었다. 한정은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더욱더 발을 강하게 밟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때 등 뒤에서 예기가 느껴졌다.

한정이 급히 몸을 숙이자 그의 등을 스치고 두 개의 수리검이 허공을 갈랐다. 뒤따라오던 사내들이 던진 것이다.

팟!

한정이 몸을 숙이는 바람에 달리던 다리를 멈추자 뒤따라오던 사내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강하게 바닥을 밟아 도약하며 한정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궝!

두 사내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한정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한정은 이미 몸을 허공으로 띄워 공중제비를 돌고 있었다.

“헛!”

“이런!”

그때 한정의 검이 허공을 그었다. 푸른빛의 검기 두 갈래가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퍼퍽!

피가 튀어 오르며 사내들의 상체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한정은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고 끓어오르는 내공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검병을 쥔 손에는 더욱 강하게 힘을 주며 주변을 살폈다.

호가장의 촉망받는 기재인 한정은 안선영의 호위로서 그녀를 따라가게 되었다. 호위는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성도를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일도 없이 평화로웠다.

하지만 성도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무림인들이 급습해 왔다. 그 탓에 함께 호가장을 떠났던 호위 무사 다섯이 죽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안무가의 무사들 역시 대부분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안선영이 납치를 당했다.

“크윽!”

동료들의 죽음이 떠오르자 한정은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그때 한정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수 명의 무사들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한정은 다시 발을 놀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저기 있다! 꼭 죽여야 해!”

도망가는 한정의 모습을 보았는지 사내들의 속도가 빨라졌다. 평소 같았다면 모두 베어 버리겠지만 지금은 너무나 지쳤다. 수십의 무인들을 뚫고 이 사실을 호가장에 알려야 했기에 무리했던 것이다.

조금 전 뿌린 검기로 인해 내공은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태.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놈들!”

욕지거리를 내뱉은 한정은 젖 먹던 힘까지 더해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

산길을 올라가던 도중 진철은 궁금한 표정으로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형님은 삼왕 중 천검이시라면서요?”

“그렇지.”

“그럼 형님께선 이 무림에서 몇 번째로 강합니까?”

“음…….”

진철의 물음에 잠깐 생각한 기태천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모르다니요?”

“몰라. 누가 젤 강한지, 누가 젤 약한지. 단지 추측해 볼 뿐이지. 솔직히 말해서 절대 고수들 중에서 서로 싸워 본 사람들은 몇 없거든.”

“그래요?”

기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무림에 절대 고수라 불리는 이는 날 제외하고도 열아홉이나 더 있어. 그중에는 내 사부도 들어가 있고 다른 이들도 들어가 있지.”

“오호! 그럼 기 형님은 사부님과 동급으로 유명하다는 말입니까? 사부님께서 상당히 자랑스러워하시겠군요.”

그때 기태천의 머리로 어떠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네가 미쳤구나? 명성 좀 얻었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 꼬라지를 보니.’

사부가 몽둥이를 잡고 자신을 노려보았던 과거가 떠오르자 기태천은 고개를 저었다.

“없어. 그런 일은 절대 없어. 그 속 좁은 늙은이가 과연 그럴까? 에이, 그 무슨 망발이냐?”

“망발이라…….”

“그렇지, 망발이지. 아무튼 현 무림의 절대 고수는 그 정도야. 뭐, 무림은 넓고 깊으니 확실치가 않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 정도지. 그들을 무림은 이렇게 부르고 있지. 오천 칠성 삼왕. 줄여서 절대십오인.”

“오호, 이름 한번 뻔지르르하네요.”

“그렇지?”

기태천이 미소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러했다.

“그중에 오천은 말 그대로 하늘같은 무위를 지닌 다섯 명의 절대자를 말하지. 그리고 칠성은 말하기가 좀 그렇군. 삼왕은…….”

“삼왕은요?”

그때 기태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멀리서 홍의를 입은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진철 역시 그를 발견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지켜보았다.

“이 별호는 아주 우연찮게 얻은 거야. 어쩌다 보니 어떤 문파하고 한바탕하게 됐는데, 그때 사파 놈 한 놈하고 마교 놈 한 놈하고 나하고 같이 그 문파하고 싸우게 됐어.”

“호오, 어쩌다가요?”

기태천의 얼굴이 구겨졌다. 비틀거리는 홍의인의 옷은 곳곳이 찢어져 있었고, 머리카락 역시 헝클어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 홍의인이 돌연 몸을 돌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홍의인의 등 뒤에 두 명의 흑의인이 몸을 드러냄과 동시였다.

홍의인의 뒤에 나타났던 흑의인들은 몸이 갈라지며 피를 뿜어냈다.

“우연이라니까? 그땐 설마 그놈들이 사마외도 놈들일 줄이야 어찌 알았겠어? 정말 감쪽같이 속았지. 검왕이라는 건 그때 얻은 별호야. 아무튼 그 절대십오인 중에서도 사부와 나처럼 실력 차가 크게 벌어지는 사람이 있고, 막상막하의 실력을 지닌 사람들도 있겠지. 어쨌든 누가 젤 강한지, 누가 젤 약한지는 겨뤄 보기 전에는 몰라.”

“오호, 그렇군요.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최소한 수많은 무림인들 중에서 이십 위 안에는 드신다는 거잖습니까?”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홍의인과 가까워지자 입을 열던 기태천의 얼굴이 크게 굳었다. 그것은 진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조차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남자였기 때문이다.

“남자로군.”

“남자지요.”

“원래 이런 상황에는 대부분 여자여야 하지 않냐?”

“그렇지요.”

사내가 어느새 일 장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흑의를 입은 다섯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기태천과 진철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갈 길도 바쁜데 귀찮은 일에 휘말린 것 같았다.

그들 역시 진철 일행을 발견했는지 두 명의 흑의인이 앞의 사내를 지나치며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진철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팟!

그때 뒤에서 가만히 있던 북궁아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흑의인에게 다가간 그녀는 어깨에 걸쳐 있던 대도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음?”

흑의인들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빠른 반응에 눈을 부릅뜨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대도를 바라보며 검을 세로로 세웠다. 그녀의 대도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 모습에 북궁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치 가소롭다는 듯.

꽝꽝!

두 갈래의 푸른 줄기.

두 흑의인의 몸이 온 방향으로 그대로 튕겨 나갔다. 북궁아의 대도가 그들의 검을 부숴 버림과 동시에 그들의 몸을 날려 버린 것이었다.

두 명의 흑의인을 날려 버린 북궁아는 다시 바닥을 차 나가며,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사내를 지나쳐 뒤에 있는 세 명의 흑의인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살(殺)!”

셋의 사내들은 앞으로 나온 북궁아를 보며 제각각 자세를 취했다. 그녀를 베어 버리고 사내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사내들의 검이 북궁아의 각 요혈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흥!”

북궁아는 자신을 향해 찔러 오는 검을 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대도를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온몸에서 푸른 냉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흑의인들은 그런 기운을 느끼지 못했는지 북궁아를 향해 쏘아져 갔다.

흑의인들이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북궁아는 기합을 터트리며 하늘 높이 들어 올린 대도를 강하게 내려쳤다.

꽈과앙!

“크아악!”

“아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땅거죽이 들썩거리며 치솟아 오르는 푸른빛의 장벽.

달려들던 다섯의 사내들은 그대로 허공으로 튕겨 나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

기태천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펼친 북궁아의 무공 때문이었다. 가녀린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 파괴적인 무공이었다.

기태천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다물며 입을 열었다. 아주 조용한 목소리였다.

“정말 무식한 무공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철은 그렇게 말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서 비틀거리던 사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허우적거렸기 때문이다. 간신히 그가 쓰러지기 전에 그의 몸을 부축한 진철은 그의 맥을 짚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소?”

“호, 호가장으로…….”

“에?”

“호가장으로 가서… 어서 알려야 합니다……. 서, 선영 아씨께서…….”

“음?”

선영이라는 말에 기태천이 다가왔다. 기태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뭔가 변고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선영 아씨라면 안선영, 그 아이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사내의 숨이 거칠어졌다. 진철은 기태천을 바라보다 다시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단 몸부터 추스르도록 하시오.”

진철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안선영을 안다는 것은,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 줬다는 것은 안무가나 호가장 둘 중에 한 곳에서 온 사람들이라 여겼기에 그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

안무가는 동천을 다스리는 문파로 흔히 말하는 중소 문파였다. 하지만 그 세가 결코 약하지 않아 섬서의 대표적인 문파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사마곡에 사마련 애들이 있다고?”

안무가의 가주 안철기의 눈이 빛났다. 방금 총관이 가져온 소식 때문이었다.

윗동네에 자리 잡은 사마곡은 틈만 나면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하곤 했다. 하지만 요새에 들어 그 횟수가 잦다 했더니만 믿는 구석이 있어 그런 모양이었다.

“그 사마귀 새끼들은 하여간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군. 그래서? 사마련에서 왜 사마곡에 애들을 보냈대?”

“그게 사마곡주의 생일이라 사마련에 초대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일잔치나 하러 왔다는 거군? 그런데 사마련에서는 누가 왔다든?”

“그게…….”

총관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패도군 홍군과 사이검 하균입니다.”

“뭐?”

안철기의 눈이 부릅떠졌다. 총관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 때문이었다.

“홍군과 하균이라면 사마련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 아냐? 아니, 그것들이 뭘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섬서야 화산파가 멸문하고 이렇다 할 세력이 없잖습니까? 그러니 사마련에서도 탐내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뭐, 그렇긴 하군. 젠장, 사마곡 놈들을 쓸어버리든가 해야지. 사마련 놈들 때문에 한동안 그놈들 눈치만 보면서 살게 생겼군.”

안철기는 혀를 차며 의자 깊숙이 몸을 구겨 넣었다. 정파의 최대 문파이자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화산파가 멸문한 이후 섬서성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사파는 섬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정파 역시 그 섬서를 지키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렇기에 섬서에서는 하루도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나저나 선영이는 무사히 도착할지 모르겠군.”

“선영 아씨는 걱정하지 마시지요. 괜찮으실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된단 말이야. 후우! 마음이 편치가 않아. 호가장도 어떻게 마혈도의 습격을 견뎌 내긴 한 모양이긴 한데.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일이 또 있는 것 같아. 그것도 신경 쓰인단 말이지.”

“가주…….”

총관은 그런 안철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가문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한지 잘 알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가족에게 소홀한 것도 아니다.

“음… 역시 안 되겠어. 일단 무사들에게 말을 해 놔야겠어. 혹시 모르니 긴장하고 있으라고 말이지. 비상사태가 터지면 바로 달려갈 수 있게 말이야.”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쿵쿵!

“응?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럽지?”

갑자기 지면을 울리는 발소리에 안철기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다.

그런 안철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문이 갑자기 열리며 한 젊은 무사가 급히 가주실로 들어섰다.

“허허허…….”

안철기는 무사의 안하무인적인 행동에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네놈이 아주 미쳐 돌아갔구나? 정신이 빠졌어. 대체 어느 소속의 무사…….”

“가주님! 큰일입니다! 선영 아씨께서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무사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총관이 그 정적을 못 이기고 침을 삼켰다. 마치 물이 한 바가지는 넘어가는 듯 상당히 큰 소리가 가주실에 울렸다.

그때 안철기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뭣이라! 선영이가 납치를 당해?”

“옛! 가주!”

“허어!”

안철기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큰 충격에 자신도 모르게 다리의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소수의 무사만 보낸 것이 후회되었다.

“대체 어디냐! 감히 어떤 잡놈들이 선영이를 납치해 갔단 말이냐!”

“그, 그것이…….”

무사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답답함을 느낀 안철기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소식을 가져온 자가 어디에 있느냐? 내 가서 직접 묻겠다!”

“그자는 상처가 너무 심해 지금 치료 중입니다.”

“이익!”

안철기는 의자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며 손잡이를 강하게 내려쳤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그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사마곡 그놈들이?”

***

“그러니까 사마곡 그놈들이 안 소저를 납치했다 그거군요.”

“그렇소.”

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웠다. 비록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탈출한 것이지만 그의 임무는 안선영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이 이렇게 사지 멀쩡히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더군다나 동료들 역시 걱정이 되었다.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까?

진철은 그런 한정의 얼굴을 바라보다 하늘로 시선을 주었다.

한정은 기절한 지 이틀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운기조식에 빠져들었고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예… 면목이 없습니다.”

“음… 그런데 왜 안 소저를 납치해 간 것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소. 난 호가장의 무사이지, 안무가의 무사가 아니니까 말이오. 하지만 풍문으로 어느 정도 들은 것이 있소.”

“그게 뭡니까?”

진철의 물음에 한정은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 안무가는 상당히 힘든 상태라고 하오. 섬서는 아시다시피 정파와 사파의 세력권이 골고루 분포된 지역이라오. 그렇기에 지금 당장이라도 정사대전이 터질 수도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그중에서 안무가는 섬서의 북쪽에 자리 잡은 유일한 정파라오.”

“유일한 정파라……. 그렇다면.”

“그렇소. 지금 안무가는 주위의 많은 사파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오. 만약 작은 불씨 하나가 타오른다면 즉시 전쟁이 터질 정도라오.”

“으음…….”

진철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쟁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호가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마혈도가 사람들을 학살하던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사람은 어째서 그렇게 다른 이들을 죽이고 피해를 입히는 것인지.”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지.”

“사람이라…….”

기태천의 말에 진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한정이 다시 입을 열자 이내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놈들이 분명 이렇게 말했소. 선영 아씨를 되찾고 싶다면 사마곡으로 오라고.”

“음, 그럼 가도록 하죠.”

진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기태천 역시 일어섰다.

“하지만 지금 이 인원으로 간다면 개죽음일 뿐이오! 사마곡은 절정의 고수는 몇 없지만 이백의 무인들이 존재한다오! 고작 네 명으로 감당하기엔 바위를 계란으로 치는 격이오!”

“뭐,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지요. 그리고 호가장주께 이미 안 소저를 지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어떻게든 되겠다니…….”

황당한 눈으로 진철을 바라보던 한정은 진철 일행이 산길을 걷자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다시 진철이 고개를 돌려 한정을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사마곡은 어디로 가지요?”

산길을 벗어나 작은 마을로 들어선 진철 일행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객잔부터 찾았다. 물론 도중에 한정이 빨리 가야 한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기태천이 그의 수혈을 짚고 진철이 객잔까지 끌고 왔다. 그리고 다시 한정의 수혈이 풀리고 정신이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앞에 소면이 놓여 있었다.

한정은 화가 난 눈으로 진철과 기태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시선을 무시하는 건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진철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한정은 눈을 부릅떠야 했다.

“뭐라고요? 저분이 정말 검왕 천검이시란 말이오!”

한정이 소리치자 객잔 안의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기태천은 소리친 한정의 모습에 얼굴을 구겼다. 한정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디다 대고 삿대질이야?”

“아, 미, 아니 죄송합니다.”

한정이 고개를 숙이며 기태천에게 사과했다. 기태천과 한정의 차이는 정말로 까마득한 차이였다. 그것이 배분이든 무공이든 나이든. 마흔이 훨씬 넘어 보이는 나이였던 것이다.

한정의 사과에 손을 저은 기태천은 다시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향해 뻗었다. 그때 한정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찌해서 천검께서 저희 호가장에 들르셨던 겁니까?”

“음… 그건…….”

기태천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자신이 정말로 놀고먹기 위해 호가장을 들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닐 정도로 안면이 철판인 것도 아니었고 소문을 내고 다닐 말도 아니었다.

“기 형님께서는 놀고먹기 위해 호가장에 들르셨던 겁니다.”

기태천의 얼굴이 굳었다. 진철이 잽싸게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기태천은 그런 진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기태천은 더더욱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에서 불꽃을 뿜어낼 것처럼 이글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돼지고기 볶음이 식탁 위에 놓이자 진철에게서 시선을 돌린 기태천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호가장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군요.”

“그렇소. 마혈도가 호가장에 도착하기 전에 떠났고 풍문을 들을 시간도 없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호가장이 마혈도 따위에게 당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소. 호가장은 그만큼 강하니까!”

한정이 단정을 짓듯 말했다. 한정은 그만큼 호가장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믿음 역시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형님, 도사시라면서 왜 그렇게 고기를 잘 먹습니까?”

“음?”

진철이 마침 기태천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입안 한가득 고기를 씹고 있던 기태천의 눈이 흔들거렸다. 왜 또 자신을 걸고 넘어지냐는 눈빛이었다.

“이거 제가 내는 겁니다. 조금만 드세요. 그리고 도사가 고기가 뭡니까? 고기가. 소채를 드셔야지.”

“꿀꺽! 야, 너도 고기 잘 먹잖아?”

“전 도사가 아니잖습니까?”

“허!”

진철은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기태천의 모습에 보란 듯이 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인마, 너도 도사라며?”

“도사라…….”

기태천의 말에 젓가락을 슬쩍 내려놓은 진철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도사 하기에는 제가 좀 그렇잖습니까? 그래서 고민해 봤습니다. 과연 내가 도사를 할 수 있는 인물인지 아닌지. 그러다 내린 결론이 도사는 나중에 천천히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리잖습니까? 이 나이에 무슨 도사입니까? 아직 보고 배울 게 많을 나이인데.”

“…….”

그렇게 말한 진철은 다시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독점해 가기 시작했다.

기태천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살을 구겼다. 저렇게까지 말했는데 다시 고기를 집어 먹기가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고기의 맛이 쉽사리 잊히지가 않았다.

“야, 나도 고기 좋아한다.”

결국 참지 못한 기태천이 지나가는 듯 말하자 진철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고기 좋아합니다.”

“나도 좀 먹자.”

“드시지요.”

“응? 먹지 말라며?”

“드시지 말라고는 안 했습니다. 다만…….”

“다만?”

“이거 제가 내는 겁니다.”

‘치졸한 놈.’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정말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놈이 훗날 도사가 된다니.

인생의 선배이자 도사의 선배로서 한탄하고도 통곡할 일이었다. 결국 기태천은 훗날을 기약하며 소채를 씹었다. 마치 소채에서 지푸라기 같은 맛이 났다. 물론 먹어 본 적은 없다지만 이런 맛일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고기 외의 다른 음식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흠흠!”

한정이 진철과 기태천의 투덕거림을 들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소문으로 들은 천검의 모습이 실제의 모습과 많이 달라 보였다. 거기에 살생을 금해야 하는 도사가 고기를 먹는 모습은 말코의 그것이었다.

“왜? 불만 있어?”

“아닙니다.”

자신을 노려보는 기태천에게 고개를 저은 한정은 자신의 앞에 놓인 소면을 한 젓가락 먹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납치된 안선영이 떠올랐다.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거짓말일 것이다. 자신이 호위해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임무를 실패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에 상처가 갔고, 그녀를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역시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소. 나 혼자라도 먼저 가 봐야겠소.”

기태천의 정체를 알았기에 한정이 정중하게 말하고는 칼을 쥐고 일어섰다. 그때 진철이 입을 열었다.

“걱정됩니까?”

“당연하지 않소?”

“일단 안 소저는 안전하실 겁니다. 그들은 안 소저를 데리고 무슨 협박이나 협상을 하려는 것 같은데, 안 소저에게 해가 가해진다면 그건 물거품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역시 빨리 구해 내는 것이 낫겠군요. 안 소저도 많이 불안해하고 있을 테니까요.”

“…….”

한정은 고개를 숙였다. 진철의 말이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식사를 끝내고 출발하도록 하죠. 그래야 힘쓸 게 아닙니까? 막상 가서 몸이 지쳐 있다면 그거야말로 본말전도가 아니겠습니까?”

“…….”

미소를 지으며 진철이 말하자 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한정은 고개를 돌려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기태천은 그의 시선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한 행동과는 전혀 다른 믿음이 가는 미소였다. 그에 결국 한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

‘크흐흐, 좋아. 너무 쉽잖아?’

사마곡주 이곽은 너무 쉽게 풀린 일에 웃음을 흘렸다. 안선영을 호위하고 있던 대부분의 호위 무사들을 죽이고도 아군의 피해는 고작 십여 명의 사망자와 몇 명의 경상자가 다였다. 일류 무사로만 이뤄진 안선영의 호위 무사들을 상대로 이 정도의 피해는 매우 경미하다고 할 수 있었다.

‘멍청한 정파 놈들. 고작 칼만 휘두르면 다인 줄 안단 말이지.’

혹시나 해서 준비한 쇠 그물에 걸려 든 물고기처럼 아등바등하던 호위 무사들은 제대로 칼 한번 뽑지 못하고 날아온 화살에 꼬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장창을 든 무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살아남은 것은 안선영과 그녀의 시녀, 그리고 도망간 무인 단둘뿐이었던 것이다. 대승도 이런 대승이 없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사마곡의 당주인 장건이었다.

“곡주님! 곧 곡에 도착합니다요.”

“좋아. 모두 도착하는 즉시 회포를 풀라 하라! 이런 날에 술이 빠질 순 없겠지!”

“알겠습니다요. 흐흐.”

웃음을 흘리며 돌아선 장건을 바라보던 이곽은 슬쩍 마차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안선영이 타고 있는 마차였다. 아마 지금쯤 불안감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것이다.

안선영은 소문대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품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지만 참아야 했다. 인질이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했고, 그래야 원하는 것을 아무런 피해 없이 얻을 수 있었다.

이곽의 머릿속에는 낙천을 벗어나 동천과 함께 섬서의 북쪽을 완전히 자신의 세력 안에 넣는 그림이 그려졌다.

‘피를 흘릴 필요가 없는데도 흘린다면 그거야말로 바보 멍청이지.’

이곽은 자신의 머리에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학사 출신인 그는 정파에게 가문이 멸문하기 전까지 수많은 책을 읽어 왔다. 그렇기에 병법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곽은 자신의 눈앞에 사마곡 입구가 들어오자 어깨를 쫙 펴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 같은 모습이었다.

“와아아!”

“아, 아씨!”

“…….”

갑작스럽게 함성이 들려오자 안선영은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그녀의 옆에서 시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지만 그녀마저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불안해한다 해도 이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세요. 저들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해도 가하지 못할 것이에요. 절 믿으세요.”

“예, 아씨…….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시녀의 표정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선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여겼다.

‘저들이 만약 내 목숨을 노렸던 것이라면 처음 보자마자 죽였을 것이다. 포로는 필요 없겠지. 하지만 살려서 데리고 왔다는 것은 뭔가 협상을 하겠다는 뜻. 그러나 문제는 그 협상의 내용과 목적을 모른다는 건데…….’

안선영은 슬쩍 눈을 옆으로 돌렸다.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고 문 역시 닫혀 있어 밖이 보이지 않지만 함성 소리로 들어 보아 사마곡 내에 도착한 듯싶었다.

‘일단 사마곡의 무인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자. 알려진 수는 일류 무사 다섯에 이류 이하의 무사가 이백, 그리고 절정 고수는 단 세 명. 하지만 이 함성 소리는…….’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이곽의 얼굴이 드러났다. 안선영은 흉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다 왔소, 안 소저. 곡 내로 들어왔으니 마차에서 내리시구려. 소저가 기거할 곳을 안내해 줄 터이니.”

“이런 일을 벌이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여기나요?”

“크하하! 그냥 넘어가면 어떻고 안 그러면 어떻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소저가 걱정할 정도로 우리 사마곡은 약한 곳이 아니라오.”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사마곡은 멸문을 막지 못할 거예요.”

“글쎄, 그건 그때 가서야 아는 것이고. 일단 내리시구려.”

이곽이 문 앞에서 비켜서자 안선영은 입술을 깨물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본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인들의 수가 너무나 많았다. 대충 잡아도 오백은 거뜬히 넘어 보였다. 알려진 수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상황.

‘내가 납치당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분명 아버님은 가의 무사들을 끌고 이곳으로 오실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숫자라면… 필패야!’

“이래도 본 곡이 멸문할 것이라 여기시오?”

“…….”

빈정거리는 이곽의 말에 안선영은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싸늘한 눈초리에도 이곽은 웃음만 흘릴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안 소저와 저년을 기거할 곳으로 안내해 주거라! 난 잠깐 볼일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요!”

이곽은 안선영과 시녀를 가리키며 자신의 옆에 있던 수하에게 명을 내리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뒤를 두 명의 인원이 더 따라 들어갔다. 그 뒤를 바라보던 안선영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과연 소문대로인가? 실력이 부족한 무인들로 괜히 낙천의 패자가 된 게 아니었어. 이렇게 많은 인원을 지금까지 숨겨 온 것만으로도 알 수 있어. 이곽,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냥 단순히 치고받는 무인들과는 달라. 하지만 다행히도 마령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선영은 품속에 감춰 둔 작은 반지를 떠올리며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마령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안다면 바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마령환의 가치는 자신의 목숨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니까 말이다.

“자, 가시지요. 흐흐흐.”

“……!”

안내하기 위해 곁으로 다가온 무인이 그녀를 훑어보며 웃음을 흘렸다. 생각을 멈춘 안선영은 그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그녀가 지혜롭고 생각이 깊다고 해도 여자였던 것이다.

“그 계집애를 데려왔는가?”

“예, 그렇습니다.”

“좋아. 이번 일이 잘 성사된다면 자넨 본 련의 지부장이 될 수 있음이야.”

“어이쿠, 감사합니다.”

이곽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내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사내들은 바로 패도군 홍군과 사이검 하균이었다.

“비밀리에 본 련의 무사를 데리고 왔지만 이 사실은 일이 성사되기 전까지 결코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만약 알려진다면 무림맹의 개입은 피하지 못할 테니까.”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멍청한 늙은이들. 내가 네놈들보다 배는 똑똑하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굽실거리는 이곽은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홍군과 하균의 눈빛 역시 곱지 않았다. 뼛속까지 무인인 자신들이 볼 때에는 잔머리를 돌리며 자신들과 연을 이으려고 하는 이곽의 성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인이라면 모름지기 칼로 묻고 대답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군.”

“예?”

“검왕이 이 근방에 나타났다고 한다.”

“검왕? 설마 검왕 천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검왕이라 불리는 이가 그놈 말고 또 있던가?”

“…….”

이곽이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얼굴을 보지 못한 하균은 이곽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혹여나 그놈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란 말이다. 그렇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터이니.”

“하지만 이곳에 있는 무사의 수만 오백이 넘습니다. 아무리 검왕이라고는 하지만 이 인원을 모두 감당해 낼 수는 없을 겁니다.”

“허…….”

이곽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홍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곤륜파는 지난 혈무대전으로 그 세가 많이 약해졌다고들 하지만 이미 사십 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믿지 못할 소문이지. 그리고 수백 년이나 명맥을 이어온 명문이 그렇게 쉬어 보이더냐? 더군다나 검왕이라면 곤륜제일검수라 불리는 이. 그런 자를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네놈은 검왕이 어떻게 그런 별호를 얻게 되었는지 모르는가 보군.”

“…….”

“검왕은 과거 마도 놈 한 놈과 본 련의 장로인 창왕(槍王) 일점사(一点死) 하후 님과 함께 한 문파를 멸문시킨 적이 있지. 그 문파의 문도는 족히 일천을 넘어섰다. 거기에 일류급 이상의 무사만 이백을 넘었지. 그러한 문파를 단 세 명이서 괴멸시켰다. 이제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겠는가? 아무리 이런 놈들이 수백이 모여 봐야 검왕 단 한 사람만도 못하다는 뜻이다, 이 멍청한 놈아.”

“……!”

고개를 숙인 이곽의 눈이 부릅떠졌다. 언젠가부터 검왕이 중원의 절대 고수로 올라섰지만, 그가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인지는 지금에서야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단 세 명이서 천 명을 몰살시켰다는 것조차도 놀라웠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마곡에 있는 모든 무사들이 달려들어도 그의 옷깃조차 상하게 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정파 놈들은 지나치게 우직하다. 싸움에 꼭 칼만 휘두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곽이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검왕이 자신들의 일을 방해한다면 자신들의 장기를 활용하여 그를 잡아서, 자신의 앞에 거만하게 서 있는 두 늙은이의 콧대를 꺾어 주리라!

“흥! 멍청한 놈 같으니.”

한편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홍군과 하균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입을 닫았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는다면 그건 그의 운이라고 여긴 것이다.

***

식사를 끝낸 진철 일행은 낙천을 향해 서둘러 경공을 펼쳤다. 북궁아와 한정이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진철이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그들은 단칼에 거절했다. 북궁아는 진철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고, 한정은 자신의 몸을 살필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다고 해서 더는 여유를 부릴 수도 없었다. 사마곡이 무슨 이유가 있어 안선영을 납치한 것은 사실이나, 그녀가 위험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되도록 빨리 구출해 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런데 이 길이 맞는 건가?”

진철은 걸음을 멈추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객잔을 벗어나 대로를 달린 그들은 산길로 들어섰고 어느새 세 시진이나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이미 지나쳐 온 길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저녁을 넘기고 밤이 될 때까지 달린 것이다. 거기에 지금은 새벽이었다.

진철과 기태천의 얼굴은 결코 맑지 않았다. 땀도 땀이지만 밤이슬에 옷이 젖어 축축했다. 그것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한정이 뒤를 돌아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상당한 몸으로 잘 달리고 있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창백한 안색이었다.

“그렇소. 이 길로 쭉 가면 곧바로 낙천이 나올 것이오.”

“그런데 사마곡은 어떤 곳입니까?”

“음…….”

진철의 물음에 한정은 얼굴을 살짝 구겼다. 사마곡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마곡은 낙천의 모든 문파를 집어삼켜 세를 불린 문파라오. 그렇기에 결속력은 다소 부족하지만, 다양한 기술이 모여 있어 정공만을 고집하는 정파에게는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요. 절정 고수가 몇 존재하지 않는 낙천 주변에서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문파라 할 수 있을 정도라오.”

“음…….”

“그리고.”

“그리고?”

진철이 되묻자 한정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놈들은 아주 치졸한 놈들이오.”

“치졸?”

“그렇소.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뒤돌아 도망치기 일쑤고, 온갖 치사한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몰려 있으면 바로 그물을 던져 움직임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대결에서 산공독을 사용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는 놈들이라오.”

“오!”

진철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똑똑한 놈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한정은 그런 진철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더욱 구기며 말을 이었다.

“모름지기 무인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오?”

“그렇지요.”

“명예나 맹세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남자의 자존심이 있지 않소?”

“물론입니다.”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의 수긍에 한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놈들은 그런 게 전혀 없다오. 상대하지 못할 족속들이란 말이오. 그런 놈들이 모여 있는 사마곡은 그야말로 오합지졸 중의 오합지졸이라 할 수 있소!”

“오오.”

진철이 또다시 감탄사를 터트렸다. 한정의 온몸에서 사나이의 기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기태천이 실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런 오합지졸 놈들한테 그렇게 털리고 도망 온 거냐?”

“…….”

기태천의 빈정거림에 한정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니, 형님은 왜 사람 속을 긁고 그러십니까?”

“엥?”

진철의 말에 기태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진철이 저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기태천이 생각하기에 자신보다 더 나쁜 놈은 진철이었다. 그리고 얍삽했다.

기태천에게 핀잔을 준 진철은 다시 한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악독한 놈들이라면 주변 문파의 표적이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소. 하지만 그 주위에 있는 정파라고는 안무가 한 곳뿐이라오. 그 지역은 사파 지역으로 정파인은 웬만해서는 출입을 하지 않고, 또 들어선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체는 결코 밝히지 않는 지역이라오. 한데 어느 문파가 거기까지 가서 사마곡을 토벌하겠소? 같은 악독한 사파들끼리? 사마곡은 그 지역의 사파들의 영주라오.”

“음…….”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이익 없이 움직이는 자는 극소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영 아씨께서 납치된 사실을 안무가에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오. 만약 안무가의 무인들이 가를 빠져나간다면 다른 사파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요.”

“그렇겠군요.”

거기까지 말한 한정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조금만 가면 낙천이 보일 것이다.

그렇게 반 시진을 더 달리자 그들의 시야에 반딧불같이 작은 불빛들이 들어왔다.

***

낙천에 도착한 진철 일행은 한정을 따라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낙천에 수많은 무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단 숨기로 하고 그들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저들이 우리가 올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건가?”

진철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소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한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를 것이오. 우리가 지나온 길은 사람이 다니지 않거니와 그 어떤 매복도 없지 않았소?”

“그렇긴 한데, 무사들이 참 많군요. 마치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음…….”

한정이 보기에도 그랬다. 거리를 활보하는 무인들과 같은 복장을 한 자들이 한 번씩 객잔에 들어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한정은 밖으로 나가는 무인을 슬쩍 바라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반 시진만 수소문을 해 보도록 하겠소. 식사를 끝내고 반 시진 후 다시 이 객잔에서 모이기로 합시다. 상대에 대해서 잘 알면 알수록 좋을 테니까. 작은 소문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모아 주시오. 그리고 이 낙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진 않소.”

“그럼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말한 진철은 젓가락을 들어 소면을 먹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밤새 달렸기에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럼 전 서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진 소협은 동쪽으로, 북궁 소저는 북쪽으로 가 주십시오.”

식사가 끝나자 한정은 진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기태천을 향했다.

“그리고 기 선배님은…….”

“난 뭐?”

기태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정은 감히 그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닙니다. 기 선배님은 객잔에서 정보를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한정의 말에 기태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지금 막 식사를 끝낸 터라 움직이기 귀찮았다.

진철이 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밥을 먹은 직후에 움직이는 건 진철 역시 싫어했다.

“난 절대로 얘랑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조용히 듣고만 있던 북궁아가 입을 열었다.

한정이 시선을 돌려 북궁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한정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손가락은 진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음…….”

한정이 진철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체 무슨 사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진철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북궁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 좀 들어. 지금 고집 부릴 때가 아니잖아?”

“그렇다면 내 노… 읍!”

“거기까지! 그만!”

진철이 재빨리 북궁아의 입을 막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너 자꾸 이러면 안 데리고 다닌다? 말을 잘 들어야 예쁨 받을 거 아냐?”

진철의 말에 북궁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그를 노려보았다. 그제야 진철이 입에서 손을 떼었다.

북궁아는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는 옆에 놓인 대도를 들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곁눈질로 한정을 슬쩍 바라보았다.

“흡!”

한정이 황급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흥!”

그의 모습에 북궁아가 콧방귀를 뀌며 객잔 밖으로 나섰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우리도 가도록 하죠.”

객잔을 나선 진철은 한정의 말에 따라 동쪽 방향으로 향했다. 거리에는 두세 명의 무인들이 조를 이뤄 도심을 돌아다니는 것이 확실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기와지붕 위로 올라탄 진철은 적당한 상대를 물색하기 위해 주변을 훑어보았다.

“오!”

그때 먹잇감을 찾았는지 진철의 눈이 반짝거렸다. 진철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하아암!”

암수는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토해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혹시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오늘 밤 잠은 다 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이제 사마곡에 들어온 지 고작 두 달이 조금 넘은 신입이기 때문이다.

“후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암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야, 좀 어때? 뭐라도 발견했냐?”

“아! 장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의 옆으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암수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갔겠냐?”

“…….”

암수보다 몇 년 더 빨리 사마곡에 들어온 장항은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입을 열었다.

“하여간 네놈도 참 고생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들어오다니.”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네놈은 몰라도 된다. 그냥 넌 시키는 것만 하면 돼.”

“그래? 난 꼭 알고 싶은데.”

“뭐? 이놈이?”

장항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끼눈을 치켜뜨며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낯선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뭐… 헉!”

장항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바로 앞에 있던 사내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퍽!

그때 둔탁한 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울렸다.

장항은 갑작스런 고통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암수는 무슨 일인지 바닥과 진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고, 사라졌던 사내는 무언가를 집어 들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장항은 사내가 들고 있는 물건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저건… 돌?’

“어라? 한 방에 안 가네.”

사내는 의외라는 듯 장항을 바라보고는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 들린 돌이 갑작스레 커졌다.

퍽!

기태천은 시큰둥한 눈으로 진철을 바라보다 그의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철의 옆에는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기절시켜서 데리고 왔다?”

“그렇죠. 그냥 버리고 오긴 뭐하잖습니까?”

기태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늘어져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약 자신이 저 두 사람을 기절시켰더라도 데리고 왔을 것이다. 경비가 삼엄한 도심 한가운데서 심문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뒤처리 역시 문제였다.

“음…….”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기태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침까지 흘리며 자고 있는 그들이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남들이 편한 것을 보면 왠지 배가 아픈 그였다.

“일단 저것들 좀 깨워 봐라. 뭐 좀 물어보게.”

“네.”

진철은 젊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젊었고 생김새도 왠지 아는 것도 많아 보였다.

“으음…….”

진철이 살짝 진기를 불어넣자 정신을 차린 사내는 흐린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에 산적같이 생긴 중년인 하나와 허름해 보이는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쿵!

“악!”

사내는 순간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뒤통수를 쥐고는 신음을 흘렸다. 뒤에 벽이 있는 것을 모르고 박아 버린 것이다.

“아주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크큭.”

진철은 기태천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자네 이름이 뭔가?”

“아, 암수라고 하는뎁쇼.”

“암수? 뭐, 상관없겠지. 그래. 자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 줬으면 하는데.”

“전 아무것도 모르는뎁쇼.”

암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모른다는 얼굴로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그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옆으로 누워 있는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데요?”

“…….”

순간 기태천은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어마어마한 기운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야! 똑바로 물어봐야 할 거 아냐?”

“어떻게요?”

진철의 물음에 기태천은 눈을 부릅떴다. 진철이 순진무구한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허허…….”

기태천은 허무한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암수에게 다가갔다.

암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태천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산적 같은 그의 얼굴이 점점 악귀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뚜둑!

기태천이 마주 잡은 손에서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악!”

“응? 무슨 소리지?”

객잔에 돌아온 한정은 갑작스레 들려온 비명에 화들짝 놀라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기태천이 머물고 있는 방이 분명했다.

한정은 의아함을 품으며 방으로 향했다.

끼익!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한정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말해! 말 안 해? 몰라? 왜 몰라? 그럼 아는 건 뭔데?”

퍼퍼퍽!

“끄어억~!”

그곳에는 한 중년인이 젊은 사내를 거칠게 패고 있었다. 그렇다. 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패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무슨 원수를 대하는 것처럼 기태천의 손놀림은 질풍 같았다. 그 앞에서 진철이 옆으로 누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정은 진철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오?”

“아, 오셨습니까? 잠깐 심문을 하는 중입니다.”

“심문이라…….”

진철의 말에 다시 기태천에게 시선을 돌린 한정은 광기에 휩싸인 듯 손을 놀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렸다.

‘두 번만 심문하면 사람 잡겠군.’

한 반각 정도 더 암수를 때리던 기태천은 얼굴을 구기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놈 정말로 모르는가 보다. 재워. 그리고 쟤 깨워.”

“예.”

짧은 말과 짧은 답변이었다.

진철은 잽싸게 일어나 암수의 수혈을 짚고 그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을 깨웠다.

“으음… 여긴… 헉! 네놈은!”

일어나자마자 진철을 본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에게서 떨어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쿵!

“악!”

“…….”

벽에 머리를 찧고 뒤통수를 부여잡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던 기태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짓도 두 번 보니 재미없구나.”

“크크큭.”

웃음을 흘리는 진철을 힐끗 쳐다본 기태천은 양손을 다시 마주 잡아 관절을 풀고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히끅!”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 올린 사내의 입에서 딸꾹질이 튀어 나왔다. 그의 시야에 악귀 같은 기태천의 얼굴이 들어왔다.

일각의 구타 끝에 입을 연 장항이란 사내의 말에 따라 사람이 드문 길을 통해 사마곡에 도착한 진철 일행은 근처에 있는 풀숲에 몸을 숨겼다. 그들은 북궁아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기에 결국 장항의 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수풀을 헤쳐 사마곡의 정문을 바라보던 기태천이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저었다. 장항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이었다.

“하필 칠무회(七武會)가 온다는 게 웬 말이야?”

“그런데 칠무회가 뭡니까?”

기태천의 말에 진철이 묻자 기태천과 한정이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묻는 거냐?”

“그야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지요.”

“하아!”

미소를 지으며 하는 진철의 말에 기태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진철은 화산에서 하산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그것도 이번에 무림에 나온 것이 초행이니 뭘 더 바라겠는가?

그런 기태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철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세히 알려 주시죠.”

“…….”

진철의 말에 기태천의 시선이 한정을 향했다. 귀찮으니 네가 알려 주라는 무언의 눈빛이었다.

“흠흠.”

기태천의 시선에 한정이 헛기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칠무회는 무림의… 아니 정파의 집법당이라고 볼 수 있소. 만약에 정파 문파가 사파 문파와 비밀리에 내통을 하거나 한다면 그것의 증거를 확보하고, 내통한 정파 문파를 괴멸시킨다오.”

“괴멸이라면… 모두 죽인다는 말입니까?”

진철의 말에 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말 같은 정파인이라지만 결코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라오. 하지만 그들은 수호자의 특징도 지니고 있기에, 사파 문파가 정파 문파를 핍박한다면 그 사파 문파를 괴멸시키기도 한다오.”

“굉장히 강한가 보군요?”

“물론이오. 그렇지 않다면 괴멸당하는 건 칠무회일 테니까. 거기에 칠무회의 회주가 바로 천무제 담덕이라오. 다섯 개의 하늘이라 불리는 오천 중 하나인 천무제 말이오. 그런 담덕에게 반기를 든다는 건 그 어떤 문파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오.”

“아… 천무제!”

진철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알은체했다. 천무제 담덕의 이름은 화산 인근 마을에서도 자주 들었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체는 그렇게 알려진 게 많지 않다오. 칠무회의 인원이 몇 명인지, 그들의 무공 특징은 무엇인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오. 이 무림에 칠무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칠무회주 천무제 담덕과 그를 보좌하는 각 대주의 명칭들뿐이오.”

“대주요?”

한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소. 일 성부터 칠 성까지로 불리는 일곱의 무인들이 바로 대주라오. 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 역시 없다오. 그들의 얼굴을 본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오.”

“아니, 난 한 놈 알고 있어.”

“예? 정말입니까?”

그때 기태천이 끼어들듯 말하자 한정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칠무회의 대주와 마주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칠무회는 한 문파를 적으로 간주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사파건 정파건 모두 죽여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기태천의 별호를 떠올린 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절대 고수 중 하나인 검왕이었다.

“내가 그놈 처음 봤을 때는 정말 피에 미친놈인 줄 알았다. 문파 안에 있는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싹 죽이는데 와… 정말 악마 같은 놈이더군.”

“아니, 그런 놈을 그냥 보내 줬단 말입니까?”

“그럼 어떻게 하냐? 그들을 구해 주려고 해도 뭔가 명분이 있어야 구해 주지. 그놈들은 그야말로 악인이었다고.”

“하지만…….”

“시끄러.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그 얘기는 이제 꺼내지도 마.”

진철은 자신의 말을 자른 기태천에게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의 입장과 위치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닫았다.

그가 나서서 사파인들을 도왔다면 곤륜파 역시 곤란해졌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기태천은 곤륜파에서 문책을 피하지 못했을 테고, 최악에는 칠무회와의 일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칠무회는 되도록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인 단체라오. 문제는 그런 칠무회가 오늘 사마곡을 친다는 건데, 칠무회가 도착하기 전에 무사히 선영 아씨를 구출해 낼 방법을 찾아내야 하오.”

“그런데 사마곡에서 그렇게 정확히 칠무회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걸 알면서 왜 도망가지 않는 겁니까? 칠무회는 꽤 강하다면서요?”

진철의 물음에 한정은 잠시 생각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보질 못했으니 그러는 거 아니겠소? 나 역시 칠무회의 소문이 약간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하긴 한다오.”

“그러니까 자신들이라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소. 거기에 칠무회는 결코 자신들의 습격을 숨기지 않고 미리 통보한다오.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라는 식으로.”

“자존심을 건드리는군요.”

“그렇소.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무인들에게 그만한 도발만큼 통할 것도 없잖소?”

한정의 말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음… 정리를 해 보자면 사마곡은 필히 칠무회에게 멸문을 당한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우리는 사마곡이 멸문을 당하기 전에 안 소저를 구출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그렇소.”

“음… 그럼 가도록 하죠.”

그때 진철이 몸을 일으키며 수풀을 헤치고 나갔다. 한정은 순간 그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라며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가 버린 진철이었다. 그리고 진철의 뒤를 따라 기태천과 북궁아가 수풀을 헤치고 나가자 한정이 당황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물론 아무 생각도 없었다.

***

“저곳이 사마곡인가?”

“예!”

“참으로 안타깝고도 안타깝군. 너무나 안타까워.”

“…….”

흰 무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달고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 아래는 작은 불빛들로 반짝이는 도심이 펼쳐져 있었다.

“회(會)에서는 명이 내려왔는가?”

“예. 새벽에 작전을 계시하라는 명이 내려왔습니다.”

“그래?”

부복을 한 사내가 입을 열자 흰 무복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혀로 입술을 축였다.

“오랜만에 쓰레기들을 치우겠군. 과연 저놈들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 그렇지 않나?”

“모든 것은 사성(四星) 님의 뜻대로.”

“크크크.”

사성이라 불리는 사내의 눈가로 광기가 스쳤다. 하지만 그 광기는 언제 나타났냐는 듯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런 그의 주위로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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