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에 계속
목차
제8장 사마곡(巳魔谷)
제9장 칠무회(七武會)
제10장 드러나는 음모
제11장 그의 과거
제12장 혈궁과 독고요
제13장 혈귀(血鬼)
제8장
사마곡(巳魔谷)
어둠이 내려앉아 작은 화로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는 곳에 한 사내가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대전 바닥에는 한 중년인이 부복하고 있었다. 제갈야로 변장했던 초여랑이었다.
마궁의 궁주인 유랑천은 그런 초여랑을 바라보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자 초여랑의 몸이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유랑천은 태사의 깊숙이 몸을 묻으며 입을 열었다.
“실패했더군.”
“…….”
“거기에 살성까지 잃고 말이야. 아주 보기 좋게 실패했어. 아주 보기 좋게 말이야.”
“죽여 주십시오!”
초여랑이 외치자 유랑천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큭, 죽여 달라? 네깟 목숨으로 끝날 일이 아니잖으냐?”
“…….”
“살성이란 존재는 그렇게 흔한 게 아니지. 잘만 키우면 본 궁의 큰 이익일 텐데, 잃은 게 좀 아깝군.”
유랑천의 말에 고개를 숙인 초여랑은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치욕적인 것이다. 이번 일을 실패했다는 사실이. 단지 호가장을 멸문시키고 마령환을 빼 오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그래, 마령환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예! 아직 섬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호가장주가 믿는 이는 극소수고 그 대부분의 문파가 멸문당했습니다. 남은 곳은 오직 하나, 안무가뿐입니다.”
“안무가? 아, 그 사마련과 혈궁이 노리고 있다는 무가인가?”
“예!”
“그래? 크큭.”
유랑천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뭔가 생각하듯 손으로 턱을 괴었다.
초여랑은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궁에서 실패란 곧 죽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초여랑은 유랑천의 곁을 삼십 년이 넘게 지켰건만 정작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그의 무서운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결코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철저히 숨기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는 항상 긴장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반각을 침묵하던 유랑천이 입을 열자 초여랑은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긴장하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도와야겠지. 무사들을 보내라. 안무가로……. 이번엔 성공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물론이라… 그건 봐야 아는 거고. 뭐하나? 어서 안 가고.”
“조, 존명!”
초여랑은 다리만 펴고 머리와 허리는 굽힌 상태로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이 웃긴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던 유랑천은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방금까지 초여랑이 있던 자리에 한 흑영이 떨어져 내렸다.
유랑천은 흑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흑영십대(黑影十隊) 중에 셋을 데리고 초여랑을 따라가라. 그리고 그가 실패할 시 대신 처리하도록. 아, 또 한 가지. 초여랑이 실패한다면 올 때는 머리만 왔으면 좋겠군. 실패작은 폐기해야겠지.”
“존명.”
유랑천의 말이 끝나자 깊게 읍을 한 사내는 다시 위로 솟아오르듯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지자 유랑천은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켜 뒤돌아갔다. 그 뒤에는 화로의 빛조차 닿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유랑천에게 그런 어둠은 무의미했다.
유랑천은 거리낌 없이 뒤편의 벽으로 다가가 어느 지점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거친 소리와 함께 대리석이 한 치 정도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벽이 입을 열듯 사라졌다. 그 속은 한기마저 깃들어 있어 마치 무저갱의 주둥이 같았다. 그런 곳에 유랑천은 거침없이 몸을 집어넣었다.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벽은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초여랑!”
“……!”
유랑천의 명으로 안무가로 향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자신의 집무실로 가던 초여랑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가슴까지 흰 수염을 기른 한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마궁의 삼대 호법 중 하나인 마천도(魔天刀) 강산이었다.
“그게 사실이더냐? 사련이 정파 놈들에게 죽었다는 것이!”
“강 호법님을 뵈옵니다.”
초여랑은 깊게 읍을 하며 입을 열었다. 비록 자신이 마궁 내에서 고수에 속한다지만 강산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오로지 힘만이 정의인 마궁 안에서 강산은 초여랑에게 또 다른 하늘이었다.
“흥! 네놈 따위의 인사는 받을 기분이 아니다! 어서 말해라! 사련이 정말로 죽임을 당했느냐?”
“…예.”
강산이 콧방귀를 뀌며 묻자, 초여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재구에게 사련이 죽임을 당했다는 건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초여랑은 사련이 정파인들에게 죽었다고 거짓 보고를 꾸며 마궁에 보냈다.
초여랑은 사련의 죽음을 계획의 일부분으로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강산은 초여랑의 대답에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말년에 얻은 제자였기에 사련에게는 남다른 정이 있었다.
“감히… 감히! 정파 나부랭이 따위가!”
“……!”
울분을 토하는 강산의 몸에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딛고 있던 대리석이 거미줄처럼 금이 가며 먼지를 피워 올렸다.
초여랑은 그 위력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는 계획이 들통 나는 순간 끝장나게 되는 건 정파가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가, 강 호법님, 결코 사련의 무위가 부족해서 당한 것이 아닙니다. 정파 놈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있는 지역에 산공독을 풀고 협공을 가했습니다.”
“뭐라!”
강산은 초여랑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소위 정파라고 불리는 자들이 한 짓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치졸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사실이냐! 정말로 그것들이 산공독을 풀고서 습격을 한 것이야?”
“예!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으득!
고개를 숙이며 이를 강하게 문 강산의 주위로 다시 한 번 기파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휘몰아치던 기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산은 고개를 들어 초여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기광이 서려 있었다.
“지존께선 뭐라 말씀하시더냐?”
“안무가를 치라 하셨습니다.”
안무가라는 말에 잠시 생각하던 강산은 곧 알아차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안무가? 사마련이 노리고 있다던 섬서의 안무가 말인가?”
“예.”
“언제 갈 것이냐?”
“채비가 갖춰지는 대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네놈 외에 또 누가 가느냐?”
강산의 물음에 초여랑은 의문을 품었다. 궁에서 행하는 거사에는 누가 가느냐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누가 가느냐’가 아닌 ‘간다’였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는 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한다는 것.
초여랑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안무가 따위는 저 혼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 큭.”
강산의 웃음에 초여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강산은 상관없다는 듯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눈을 빛냈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내 친히 네놈의 목을 꺾고 중원으로 나갈 것이다.”
“…….”
초여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산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리고는 몸을 돌려 되돌아갔다. 갑작스레 변한 그의 모습에 초여랑이 눈을 빛냈다.
강산은 분노를 잠재우고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무인이었다. 그는 지금 느끼고 있는 분노를 참고 참아, 중원을 향해 한 번에 터트릴 것이다.
***
사마곡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던 진철이 입을 열었다.
“일단 쳐들어가서 속전속결로 정리하고 끝내는 겁니다.”
“음… 누군가 미끼가 되어 준다면 좋겠다만…….”
진철의 말을 받은 기태천이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그의 시선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태천은 그런 진철의 웃음에 얼굴을 구기며 시선을 돌렸다. 기대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냥 가도록 하지.”
“예.”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쪽의 북궁아를 슬쩍 쳐다보았다.
왠지 걱정이 되었다. 멀쩡한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지만 그녀는 분명 칼에 베인 환자였다. 그런 진철의 마음을 안 걸까? 북궁아가 그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뭐지?”
“아니, 그냥 몸조심하라고.”
“…걱정하는 건가?”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진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북궁아가 슬며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고맙다.”
북궁아가 입을 열자 고개를 끄덕인 진철은 다시 시선을 돌려 사마곡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정문에는 여섯 명의 무인들이 병장기를 빼 들고 살벌하게 주변을 훑어보며 철통처럼 지키고 있었다. 그때 그들 중 한 명이 다가오는 진철을 발견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시했다. 하지만 진철은 그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결국 정문 앞에 도착하자 사마곡 무사들은 진철을 둘러쌌다.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여기가 감히 어딘 줄 알고 발을 들여놓는단 말인가!”
“사마곡 아닙니까?”
“그걸 알면서도 여기에 왔단 말이냐?”
“뭐, 그렇지요.”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대문을 등지고 여섯의 무사가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누구도 자신들이 왔다는 것을 안에 알리려 하지 않았다.
진철은 그들의 모습에 미소를 짓고는 발을 들었다. 그가 발을 내려놓는 순간 무사들은 눈을 부릅떠야 했다.
그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진철을 포위하고 있던 무사들은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헉! 어느새!”
갑자기 한 무사가 외치자 나머지 다섯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진철이 어느새 대문 앞에 나타나 손을 뻗고 있었다.
“적이다! 어서 안에 알려야… 컥!”
진철을 발견했던 무사가 다급히 외쳤지만 곧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다. 기태천이 그의 뒤를 점하고 수혈을 짚은 것이다.
한편 기태천의 행동에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던 무사들은 북궁아가 휘두른 대도에 추풍낙엽처럼 허공을 날아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이게 대체…….”
진철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한정에게 슬쩍 시선을 주고는 다시 대문을 바라보았다.
“후우…….”
단전에서 기를 끌어 올려 문에 닿은 손에 내공을 몰아넣자 그의 손이 자색을 띠기 시작했다.
“합!”
진철이 짧은 기합과 함께 손을 힘껏 밀어 넣었다. 그러자 구릿빛의 거대한 대문이 마치 활처럼 그를 중심으로 휘어지기 시작했다.
우드득!
결국 진철의 힘을 견디지 못했는지 커다란 대문이 문지방과 함께 뜯겨지며 장원 안으로 떨어져 나갔다.
“자, 가죠.”
“음, 좋은 인사다.”
기태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자 진철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곁으로 북궁아와 한정이 다가왔다.
한정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문을 열었다.
“참, 그런데 선영 아씨가 어디에 있는 줄은 아십니까?”
“…….”
한정이 다급히 묻자 진철은 기태천을 바라보았다. 그런 기태천은 북궁아를 바라보다 다시 진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무도 안선영이 어디에 감금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사마곡에 무슨 일이 있는지를 알려고만 했을 뿐,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 일단 가죠.”
진철이 입을 열며 장원 안으로 들어가자 기태천과 북궁아기 그 뒤를 따랐고, 한정 역시 머뭇거리며 따라갔다. 어차피 지금 고민해 봐야 별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응?”
장원 안에 들어선 진철은 주변을 둘러보기도 전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급히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세 발의 화살이 내리꽂혔다.
진철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의문을 품던 한정은 바닥에 꽂힌 화살을 보고 화들짝 놀라 주변을 경계했다. 어디서 어떻게 날아왔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달빛에 반사된 수많은 섬광이 진철을 향해 쏘아졌다.
“웃!”
진철은 화살들을 검집으로 튕겨 내며 뒤로 물러섰지만 양옆에서도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다.
팟!
진철은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라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고 나서 진철은 얼굴을 구겼다.
처음에 화살을 날렸던 자들의 기척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이거 성가신데요?”
“그렇군. 고수가 몇 없음에도 괜히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니었어.”
“귀찮아질 거 같습니다.”
“음…….”
날린 화살이 상대방을 맞히든 맞히지 못하든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난다. 벗어나는 동안에는 다른 이들이 엄호한다. 무림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병법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치 군대 같은 움직임이군.”
기태천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슬쩍 몸을 기우는 것만으로 피해 내며 간단한 평을 내렸다.
진철 역시 기태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들의 싸움과는 궤를 달리했다.
“우와아!”
그때 각 건물에서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백 명이 넘게 모인 그들은 진철과 다른 이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검을 들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철퇴를, 어떤 이들은 창을 들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문파가 아닌 연합체의 느낌이었다.
팡!
굉음과 함께 하늘이 밝게 물들었다. 누군가 신호탄을 터트린 것 같았다. 진철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이러다간 죄다 몰려오겠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진철의 말에 기태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험험.”
그때 우두머리로 보이는 염소수염의 한 사내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진철을 훑어보았다.
사마곡의 내당주인 장건이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얼굴에는 가소롭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네놈들이 칠무회냐? 과연 소문만큼 오만 방자하구나. 고작 넷이서 오다니. 크큭, 어디 실력도 소문만큼이나 대단한지 보자. 쳐라!”
장건의 외침에 기태천의 얼굴이 구겨졌다.
“칠무회라…….”
“뭐 어떻습니까? 그건 그렇고,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간 정말로 여기 있는 애들 다 상대해야 할 수도 있겠네요.”
“귀찮은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진철은 앞으로 나섰다. 최대한 빨리 안선영을 찾고 사마곡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 모습에 북궁아 역시 대도를 늘어트리며 그의 옆에 섰다.
한정은 살기를 감추지 않고 사마곡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안선영을 납치한 그들을 보자 저절로 살심이 일어났다. 그런 그의 주위로 가벼운 미풍이 불었다.
탓!
그때 진철이 가볍게 땅을 밟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활을 재고 있던 사마곡 무인들이 화살을 쏘아 냈다. 하지만 진철은 화살을 바라보고도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빠르게 달려 나갔다.
화살은 진철의 신형을 꿰뚫을 듯 다가왔다. 그 순간 진철의 지척까지 다가온 화살이 반 토막이 되어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 뒤를 따르던 화살 역시 같았다.
검기를 휘둘러 화살을 잘라 버린 진철의 주위로 검은 막이 생겼다. 그러자 진철에게 날아오던 화살이 그 막에 막혀 튕겨 나갔다.
“헉!”
장건은 진철의 무위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그의 주위에 펼쳐진 것은 검막(劍膜)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검의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검막은 기본적으로 검기를 다룰 수 있어야 했기에 상승 무공에 속해 있다. 그런 자에게 기(氣)조차 실리지 않은 화살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이익! 뭐하나! 어서 화살을 더 쏘아라! 그리고 망을 준비해라! 천라지망을 펼친다!”
장건은 진철이 점점 다가오자 크게 외치며 명을 내렸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사내가 대답을 하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이곽이 사천당문의 절정 무공인 만천화우(滿天花雨)를 자신의 방식대로 만든 천라지망은 수많은 무인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수십 개의 그물을 던져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창이나 화살로 상대를 처리하는 전법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사마곡을 만든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물은 미량의 철을 섞어 만들기 때문에 칼에도 잘 잘리지 않는 강도를 자랑했다.
마침 그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던 기태천이 얼굴을 구겼다. 꽤 많은 무인들이 그물을 주섬주섬 챙겨 진철의 주위로 몰려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놈들 참… 말로는 들었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놈들이로군.”
기태천의 눈에는 저들의 행동이 빤히 보였다. 그리고 그 상황을 모를 진철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쥐를 노리는 고양이인 양 몸을 바싹 낮추고 진철이 조금 더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기태천의 옆에서 간간이 날아오는 화살을 쳐 내고 있던 북궁아가 진철에게 재빨리 다가가며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러다 진철과 반 장 거리로 가까워지자 바닥을 차 뛰어올랐다.
“이때다! 그물을 던져라! 천라지망을 펼치란 말이다!”
장건의 외침에 그물들이 하늘을 가렸다. 그물로 북궁아와 진철을 동시에 덮을 생각인 듯 최대한 높게, 그리고 넓게 퍼지도록 던졌다.
그물들이 기세 좋게 북궁아와 진철에게 날아들었다. 그때 허공으로 몸을 띄운 북궁아가 가볍게 대도를 그어 허공에 일(一)자를 써 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대도에서 푸른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파사삭!
그물에 하얀 서리가 끼었다.
진철은 얼어붙은 채 떨어져 내리는 그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자색의 검기가 뻗어 나가며 그물을 산산조각 냈다.
그물의 잔해가 바닥에 떨어지자 장건이 눈을 부릅떴다.
“이 괴물 놈들! 창수(槍手)! 창수를 불러라! 그리고 나가 있는 무사들을 모두 불러들여!”
장건이 다급하게 외치자 사마곡의 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방창살진(劍防槍殺陣)을 펼친다!”
장건이 또다시 외치자 이번엔 검을 지닌 무인들이 진철과 북궁아를 가운데에 놓고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창수들이 둘러쌌다.
검을 지닌 무사들이 적의 접근을 막고, 창을 지닌 무사들이 격살하는 병법을 기초로 만든 진법이었다. 그야말로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진법이지만 비슷한 실력을 지닌 무사들의 격전에서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흥!”
어느새 진철의 앞으로 나온 북궁아는 세 명의 무인이 자신의 앞길을 막자 콧방귀를 뀌며 대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세 명의 무인은 검을 세로로 세우곤 다른 한 팔로 검을 지탱했다. 그녀의 대도를 막기 위함이었다.
카각!
불꽃을 튀기며 대도가 검을 훑고 지나가자 무인들이 뒤로 물러섰다. 단 한 수에 세 명의 무인이 물러선 것이다. 만약 체중을 싣지 않고 그냥 막았더라면 그대로 나가떨어졌으리라.
“이런 무식한 년 같으니!”
“창수들은 뭐하고 있어? 빨리 안 찌르고!”
“합!”
북궁아가 휘두르는 대도를 가까스로 막고는 있지만 금방이라도 튕겨 나갈 듯 위태로웠다. 그런 검수들의 사이로 창이 뻗어 나왔다.
창들은 북궁아의 빈틈을 노리고 쏘아졌다. 하지만 창날을 간단하게 피한 북궁아는 대도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꽈광!
거친 소음과 함께 검수들이 튕겨 나가고 창대가 부러졌다.
거대한 구덩이가 북궁아의 앞에 파여 있었다. 그녀는 대도를 늘어트리며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했다.
주변에 있던 무인들은 북궁아의 가공할 위력에 말을 잃은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북궁아가 다시 대도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린 무인들이 다시 그녀의 앞으로 재빨리 다가가 무너진 진을 복구했다.
비록 이류에도 못 미치는 무공 실력이지만 꽤 많은 시간을 공들여 훈련한 듯, 진을 재구축하는 몸놀림이 보통이 아니었다.
“궁수들은 뭐하나! 어서 쏘지 않고!”
“하, 하지만 동료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저년을 막지 못하면 모두가 당할 수 있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장건의 윽박지름에 궁수들은 다시 활을 들어 북궁아를 노리고 쏘아 댔다. 이십여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북궁아에게 쏘아졌다.
북궁아는 거대한 대도를 땅에 세워 방패 삼아 몸을 숨기고는 대도를 비틀어 가며 화살을 튕겨 냈다. 화살이 모조리 떨어져 내리자 어느새 다가온 무인들이 창을 뻗었다.
창날이 그녀의 요혈을 노리며 뱀처럼 다가왔다.
탓!
“헛!”
창을 찌르던 무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북궁아가 그의 창대를 밟고 허공으로 도약한 것이다. 충분히 놀랄 만한 묘기였다.
몸을 띄운 북궁아는 대도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합!”
짧은 기합성과 함께 그녀의 몸이 지면에 꽂혀 들었다. 그와 함께 내공이 가득 실린 대도가 지면을 때렸다.
꽝!
땅거죽이 들썩이자 그녀의 앞에 있던 무인들이 순식간에 뒤로 튕겨지며 진에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무인들이 달려와 뚫린 부분을 메워 진을 복구했다.
‘이대로 가다간 진이 한순간에 무너지겠어. 생긴 거와는 다르게 무식한 년이군!’
장건은 입술을 씹은 채 북궁아를 노려보고는 옆에 있던 수하를 향해 외쳤다.
“네놈은 가서 폭열시(爆熱矢)를 가져오너라!”
“예? 하지만 폭열시는 곡주님의 승인이 있어야만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걸 누가 모르느냐!”
수하에게 윽박지른 장건은 다시 시야를 돌려 북궁아를 쳐다보았다.
자기보다 커 보이는 대도를 거침없이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무신과도 같았다. 그런 북궁아의 옆에서 진철이 그녀의 빈틈을 메워 주고 있었다.
그들의 합격에 사마곡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저것들을 막으려면 폭열시가 필요하단 말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어서 가져와!”
“예, 옛!”
장건이 눈을 부릅뜨며 명령하자 수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황급히 뒤돌아 뛰어갔다.
장건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진철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느새 또 한 번 진이 무너졌는지 그들의 주위로 더 많은 무인이 널브러져 있었다.
‘제길! 과연 소문이 사실이었나! 괴물이 따로 없군.’
장건은 세간에 떠돌던 칠무회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제법 크고 화려한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바로 이곽이 머물고 있는 본관이었다.
‘사마련 놈들은 왜 안 나오는 거야? 이럴 때 나서라고 지원을 요청한 것이거늘!’
장건은 사마련에서 지원을 온 두 명의 고수가 떠올랐다. 그들이 나선다 해도 저들을 과연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졌으리라.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격전지를 바라보았다. 진철과 북궁아의 뒤에서 기태천과 한정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둘은 지금 지켜보고만 있는 상황. 하지만 그 둘이 난입한다면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검방창살진은 순식간에 깨질 것이다.
‘저들이 난입하기 전에 저 연놈들부터 잡는다!’
장건이 생각을 굳히곤 또 다른 수하에게 입을 열었다. 수하는 속삭이듯 말하는 명령에 고개를 끄덕이곤 곧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북궁아는 대도를 거둬들이며 몸을 슬쩍 틀었다. 그러자 그녀의 옆으로 창날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창대를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창을 쥐고 있던 무인이 그대로 끌려왔다.
북궁아는 그대로 진각을 밟으며 팔꿈치로 다가오는 무인의 가슴을 강하게 때렸다.
퍽!
“컥!”
무인은 신음을 터트리며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의 가슴은 함몰되지 않았지만 단 한 수만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력했다.
북궁아는 그대로 무인을 지나치며 몸을 회전시켰다. 그녀에게 세 명의 무인이 검을 뻗어 왔기 때문이다.
몸을 회전시킨 그녀는 검이 지척으로 다가온 순간 강하게 대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강력한 기파와 함께 그녀의 주위로 돌풍이 몰아쳤다.
“큭!”
“컥!”
대도에 맞은 검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북궁아가 펼친 일도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검을 놓친 것이다.
북궁아는 그대로 그들의 품으로 파고들어 가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로 푸른 기파가 한 번 더 터져 나가며 그들을 뒤로 튕겨 내었다.
“응?”
그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그녀를 엄호하듯 빈틈을 메워 주고 있던 진철은 뭔가 이상한 기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인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북궁아의 강력한 위력에 물러나는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앗!”
그때 진철의 신형이 북궁아에게 쏘아졌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 위로 강하게 올렸다. 그러자 북궁아의 신형이 위로 솟구쳤다.
파파팟!
북궁아가 자리를 피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십수 발의 화살이 그 자리에 내리꽂혔다.
진철은 검을 휘둘러 화살들을 튕겨 내고는 강하게 발을 밟았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엿가락 늘어지듯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화살이 더 날아오기 전에 진의 중심지로 파고들려는 것이다.
“어리석은!”
무인들은 진철이 다가오자 비웃음을 머금으며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보아 온 바로는 북궁아에 비해 진철은 별로 위력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검과 창에 꼬치가 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이었다.
카각!
“응?”
진철이 검을 살짝 틀어 그들의 검을 비껴 쳤다. 그러자 너무나 쉽게 검이 옆으로 흩어졌다.
“왜? 그냥 맞아 줄 줄 알았나?”
“이놈이!”
진철이 비아냥거리자 무인들이 분개하며 회수한 검을 다시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진철은 고개를 저으며 턱으로 위를 가리켰다.
“머리 위를 조심해야지.”
“뭐?”
진철의 말에 깜짝 놀라며 시선을 하늘 위로 올린 그들은 눈을 부릅떴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속았지롱.”
퍼퍼퍽!
질풍 같은 빠르기로 휘둘러진 검이 그들의 머리를 강타했다. 비록 검날이 아닌 검집이라 생명에 지장은 없을 테지만 단 한 수에 정신을 놓을 만한 위력이었다.
“치, 치사한 놈!”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무인이 소리쳤다. 하지만 진철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치사한 게 어디 있나? 이기면 장땡이지.”
“뭐!”
“그건 그렇고, 머리 위를 조심해야지?”
“흥! 또 속을 줄 아느냐!”
진철의 말에 콧방귀를 뀐 그들은 진철의 앞으로 몰려오며 진이 무너진 곳을 메웠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검을 뻗었다.
슈아악!
“응?”
그때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그들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곳에는 시푸른 광채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한 인영이 있었다. 바로 북궁아였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그녀의 도가 도명을 토해 내며 주변에 울려 퍼졌다.
“하, 하하. 거짓말…….”
“…….”
한 무인이 얼이 빠진 듯 말을 흘렸고, 그 옆에 있던 무인 이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라면 당장이라도 깨어나고 싶으리라.
“설천압운(雪天壓隕)!”
퍼엉!
푸른 혜성이 떨어지듯 그녀의 대도가 무인들 사이로 떨어졌다. 강한 기파와 함께 먼지가 피어오르며 땅거죽이 들썩였다. 진철은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이미 알고 있다지만 그녀의 무공은 말도 안 되게 파괴적이었다.
북궁아는 내려찍은 도를 들어 가볍게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먼지가 걷히며 그녀가 내려찍었던 지면이 나타났다. 약 팔 장 넓이의 공간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모두 사방으로 튕겨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만큼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죽인 거야?”
진철이 눈을 찌푸리며 묻자 북궁아가 고개를 저었다.
“파괴력을 최대한 넓게 퍼트렸다. 그렇기에 집중되는 위력이 감소했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거야. 아마도.”
“아마도라니…….”
진철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진을 구축하고 있던 대다수의 무인들이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슈우욱!
그때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진철의 귓가에 들려왔다. 북궁아 역시 그 소리를 들었는지 진철을 슬쩍 밀치며 대도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시야에 날아오는 하나의 화살이 들어왔다.
“흥!”
북궁아는 가소롭다는 듯 대도를 휘둘렀다. 화살을 튕겨 버릴 생각인 것이다. 그때 옆으로 비켜섰던 진철의 신형이 다시 북궁아의 곁으로 다가섰다. 북궁아는 진철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라며 도를 비틀었다.
“응?”
화살에 무언가 달려 있는 것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진철의 검이 앞으로 뻗어 나갔고, 자하신검과 화살이 부딪치자 엄청난 섬광과 함께 화염이 그들을 감쌌다.
***
콰광!
갑작스러운 폭음에 사마곡주 이곽은 화들짝 놀라 주변을 훑어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아무도 방 안으로 들이닥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지. 감히 내가 직접 짠 진법을 무식한 무림인들이 어찌 뚫을 수 있단 말인가! 크하하하!’
수하의 보고를 들은 이곽은 이미 침입자들을 알고 있었다.
홍군과 하균이 나가지 말고 기다리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직접 무사들을 지휘했을 테고, 자신의 업적은 더욱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좋은 것 같았다. 수하의 능력은 곧 주군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으로 대소를 터트린 이곽은 홍군과 하균의 표정을 보기 위해 그들을 주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변화 없이 눈을 감고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그런 그들의 무반응에 마음이 상한 이곽이 눈살을 구겼다. 방금 전 폭발음으로 보아 아마도 침입자들은 한 줌의 핏덩이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홍군과 하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무시하듯이.
“음?”
“이건!”
갑자기 홍군과 하균의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깜짝 놀란 이곽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홍군과 하균은 그런 그를 무시하며 자신들의 기감을 건드리는 기운에 신경을 집중했다.
뭔가 사이하면서도 괴이한 기운. 마치 끝없는 무저갱에서 느껴지는 기운 같았다. 느끼면 느낄수록 그 기운에 잡아먹힐 것같이 말이다. 하지만 포근하기도 했다.
“응?”
홍군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기운이 느껴진 곳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기감을 건드리던 강렬한 기운이 마치 언제 나타났냐는 듯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하균 역시 그것을 감지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문지방을 바라보았다.
“뭔가 좋지 않군.”
“아아, 일단 처리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쯧, 설마하니 칠무회가 이런 촌구석에 관심을 갖다니. 다 잡은 고기를 놓친 심정이군.”
홍군은 고개를 저으며 이곽을 바라보았다. 이곽은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내가 말한 대로 모두 처리했느냐?”
“무, 물론입니다. 제물과 함께 납치한 계집들 역시 사마련으로 보냈습니다.”
“좋아. 그것으로 본 련은 너의 충성을 기억할 것이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했을 일입죠.”
“음…….”
이곽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자 홍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곽은 홍군의 손이 어깨에 닿자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꿈에 한발 더 다가섰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이 일에 본 련이 개입됐단 사실이 결코 알려져선 안 된단 말이지. 뭐, 이미 알 놈들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증거 같은 걸 남길 순 없는 노릇이잖나?”
“예?”
이곽이 고개를 들자 홍군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미안하군.”
“그게 무슨… 컥!”
이곽은 가슴을 후비는 차가운 느낌에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들이켠 숨을 토해 내진 못했다. 이곽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밑을 바라보았다. 시퍼런 단도가 그의 가슴에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 째서.”
“넌 생각이 너무 많아.”
“뭐?”
푹!
단도가 칼자루만 남기고 이곽의 가슴속 깊이 박혀 들었다. 이곽은 눈을 부릅뜨며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홍군은 천천히 그를 바닥에 눕히더니 그의 손에 칼자루를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부릅뜬 눈을 감겨 주었다.
“이 정도면 될까?”
“이 정도면 되겠지. 어차피 사마곡은 칠무회를 당해 내지 못한다. 칠무회가 사마곡을 치려는 순간 사마곡의 멸문은 정해진 것이지. 사마곡주는 칠무회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상실감에 자살한다. 이로써 본 련과 사마곡의 관계에 대한 모든 증거가 사라진다.”
“음…….”
“심증은 있겠지만 잡아뗀다면 아무리 그들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겠지. 필요한 것은 명분이니까.”
“좋아, 그럼 가도록 하지. 제물은 보냈으니.”
하균의 말에 홍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죽은 이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너무 큰 꿈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렇게 사라질 놈이었다.
드륵!
“어라?”
“음?”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홍군과 하균은 낯선 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흠칫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젊지만 흐리멍덩한 눈빛을 흘리고 있는 허름해 보이는 사내. 바로 진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