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장 (11/29)

제10장

드러나는 음모

마궁주 유랑천은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한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유랑천이 손에 힘을 주어 금속을 밀어 넣자 거친 소음과 함께 금속이 들어갔다. 그 순간 무언가가 걸리는 소리와 함께 그를 막고 있던 벽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유랑천은 망설임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

벽 속은 밀실로 이뤄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 원탁이 놓여 있었다. 그 원탁을 둘러싸고 다섯 개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는데, 네 개의 태사의에는 이미 사람들이 착석해 있었다.

네 명의 사내들은 유랑천이 밀실로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움직임에 유랑천이 손을 들었다.

“늦었구려.”

“미안하오. 본 궁에 일이 좀 생겨서.”

“아아, 들었소. 호가장을 치려다 오히려 된통 당하셨다면서요?”

“하하! 뭐, 그렇게 됐소이다.”

유랑천이 웃음을 터트리며 빈자리로 가서 앉자 나머지 네 명의 사내들 역시 자리에 앉았다.

“각자들 바쁘실 텐데, 이거 괜히 불러들인 게 아닌가 싶소.”

“아니. 우리들도 마침 할 말이 있었으니, 적당한 시기에 모인 것 같군.”

유랑천의 말에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수염이 배까지 내려오는 그 사내는 바로 사마련주 구찬휘였다.

“그렇소? 훗, 그럼 본인이 먼저 입을 열도록 하겠소.”

유랑천이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고는 좌중을 훑어보았다.

“사마련주와 혈궁주께서 섬서의 안무가 때문에 골치를 썩고 계시다 들었소. 그래서 본 궁에서 안무가를 치기로 했소이다.”

“그렇다면 본 련은 한 시름 놓게 되겠군.”

“귀 궁의 지원에 감사드리오.”

구찬휘와 혈궁주가 유랑천에게 입을 열었다. 유랑천은 그들에게 손을 들어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러실 필요는 없소. 이 정도의 지원은 당연한 것이오.”

“그렇게 말하니 고마울 따름이군.”

“그건 그렇고.”

유랑천은 시선을 돌려 혈궁주를 바라보았다. 유랑천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혈궁에서는 어떻소? 잘 되어 가고 있소?”

“일단 문제는 없소. 사마련에서 잘 도와주고 있으니 말이오.”

“그렇소? 그런데 내 한 가지 들은 소식이 있는데…….”

유랑천의 말에 사내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혈귀(血鬼) 중에 한 마리가 탈출했다면서요?”

“……!”

“오호…….”

혈궁주는 미처 예상치도 못한 말에 이를 악물었다. 숨긴다고 숨겼건만 알려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세 사내는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혈궁주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들킨 것이니 발뺌해 봐야 좋을 건 없었다. 오히려 의심만 살 뿐.

“그렇소. 혈마신을 보좌하기 위해 완성되어 가던 혈귀가 본 궁을 벗어났소이다. 하지만 이미 있는 위치를 알아냈고 정예들을 투입했으니, 그 일은 곧 처리할 수 있을 거요.”

“그렇소? 그럼 걱정은 없겠구려. 하지만 최대한 빨리 잡을 수 있길 부탁드리오. 괜히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어선 곤란하니까. 그리고 사마련은 어떻소? 섬서에서의 일은?”

유랑천이 구천휘에게 시선을 돌리자 구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섬서의 삼 할이 본 련의 손에 들어왔다. 섬서를 먹게 된다면 무림을 일통하는 데 더욱 쉬워지겠지.”

“후후후, 그렇구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기분이 좋구려.”

“크흐흐.”

그때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사내가 웃음을 흘렸다. 산적같이 거친 수염을 지니고 굳건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이었다. 마치 한 마리의 호랑이처럼 강한 기도를 흘리고 있는 사내. 남림의 주인 철림군이었다.

“남림주는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냥 웃음이 나오는군.”

“그 말씀은?”

“섬서라… 섬서는 정말 좋은 땅이지. 하지만 우리와는 맞지 않아. 그래서 우리 남림은 운남을 먹도록 하지. 그걸 말하려고 온 것이다.”

“오호.”

철림군의 말에 유랑천은 눈을 빛내며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혈궁과 사마련이 몰래 일을 진행한다면 남림은 대놓고 당당하게 일을 처리한다. 그들의 행동 방식은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운남에는 점창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의 사천은 정파의 중심지였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보단 보이는 곳에 더욱 많은 신경을 쓰기 마련. 남림이 운남을 향한다면 무림맹은 필시 운남을 지원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무림맹의 시선을 멀리 돌릴 수 있다면 앞으로의 거사를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거 좋구려, 남림주.”

혈궁주 역시 유랑천과 같은 생각인지 미소를 지었다. 남림에서 무림맹의 시선을 끌어 준다면 혈마신의 부활이 더욱 수월해질 수 있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실은 본 궁에 한 가지 정보가 들어왔소.”

유랑천의 말에 다른 넷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유랑천은 그들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칠무회가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요.”

“그렇다면?”

“천무연합(天武聯合), 그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소이다. 아무래도 냄새를 맡은 것 같소.”

유랑천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다른 넷의 사내가 눈을 부릅뜨더니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움직일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단지 요 근래 잠잠하던 그들이 다시 움직였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을 뿐.

“끝까지 숨길 수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만, 모두 하는 일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어야겠소. 그놈들의 집요함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유랑천의 말에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의 집요함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상태다. 거기에 마의 종주라는 마교와 북해의 세력은 결코 무시할 만한 전력이 아니다. 아니러니하게도 그들이 손을 잡고 있다지만 마교와 북해는 과거 무림 일통을 외쳤던 문파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럼 이만 해산하도록 하겠소. 다음 연락이 있을 때까지 서로 최선을 다해 주시구려.”

유랑천이 말을 마치자 남림주 철림군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각자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철림군은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놓인 탁자에서 과일 하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

“으아아악!”

한 사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뜨며 급히 가슴을 매만졌다. 그렇게 가슴을 더듬던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코끝을 맴도는 비릿한 냄새에 사내는 고개를 들어 멍한 눈으로 주변을 스치듯 훑어보았다. 그런 사내의 눈이 다시 부릅떠졌다.

수많은 사람이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는데 하나같이 검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인 듯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괴, 괴물!”

그때 누군가 외쳤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보니 주변에 놓여있는 시체들의 동료로 보이는 한 무사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검을 들고 있었다.

그는 쉴 새 없이 떨리는 손으로 쥔 검을 용케 놓치지 않고 사내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흡!”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입을 닫았다. 그는 손을 들어 입을 매만졌다. 자신의 목소리는 낯선 이의 목소리였다. 그때 비릿한 냄새가 더욱 강하게 코끝을 찔러 왔다.

사내는 슬쩍 시선을 내려 양손을 바라보았다.

“이… 건!”

두 손에 한가득 묻어 있는 새빨간 액체. 그곳에서 풍겨 나오는 비린내는 손에 묻은 액체가 바로 피라는 것을 똑똑히 알려 주고 있었다.

“큭!”

그때 화끈한 고통이 사내의 머리를 강타했다. 무사는 사내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허리를 숙이자 재빨리 그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버려, 이 괴물!”

사내가 구긴 얼굴을 들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시퍼런 섬광이 날아들었다. 사내가 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제대로 피하지 못했는지 그의 팔에서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큭!”

화끈한 고통에 사내가 팔을 바라보며 뒤로 물러났다.

“으아아!”

갑작스런 고함에 고개를 돌려 보니 무사가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사내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리며 그의 검을 피해 냈다.

“죽어. 죽어! 이 괴물!”

‘대체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신체 어딘가 닿는다면 금방이라도 잘려 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검이 푸르게 빛나며 날아들었다.

‘대체 내가 왜!’

사내는 가까스로 검을 피해 내며 속으로 소리쳤다.

영문을 모르겠다. 대체 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주변에 있는 시체들은 대체 무엇인가? 저자는 왜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며 죽이려 하는 건가!

그의 머릿속은 온갖 의문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런 사내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저 검에 맞아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네가 죽이면 되잖아.>

“뭐?”

갑작스런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때를 노리고 검이 목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간신히 몸을 비틀어 피하긴 했지만 다리가 엉켜 바닥을 나뒹굴었다.

“큭!”

팔에 난 검상에 흙이 들어갔는지 상처 부위가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느낄 시간도 없이 찔러 들어오는 검에 상체를 뒤로 빼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검은 그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사내는 주위의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검과 자신의 움직임이 느려진 것을 느꼈다.

‘아,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어. 죽기 직전에는 이런 현상을 경험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난 죽는 걸까?’

검이 천천히 다가온다. 슬쩍 시선을 올려다보니 검을 뻗고 있는 무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있었다.

‘날 죽이는 게 그렇게 기쁘다는 건가? 대체 왜?’

사내는 무사의 미소를 보는 순간 되레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가 싫은가?>

‘당연하지 않나!’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에 사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죽여라.>

‘나보고 살인을 하라는 건가?’

사내가 되묻자 내면의 목소리가 웃음을 흘렸다.

<크크큭, 그렇게 죽여 놓고 또 하나를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뭐?’

<주변을 훑어봐라.>

내면의 목소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미 사내의 눈은 주변의 시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숨을 거둔 이들. 그러고 보니 멀쩡한 시체는 단 한 구도 없었다. 사지 중 하나 이상은 찢어져 버린 듯 떨어져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동자에 사내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그때 사내의 머릿속에 벼락이 치며 잊었던 기억이 하나씩 하나씩 떠올랐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기억을 떠올리자 사내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장의 고동에 맞춰 내면의 목소리가 사내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내, 내가 아니야!’

<나는 곧 너이고 너는 곧 나이니라.>

‘거짓말!’

<나를 거부하지 마라.>

‘으아아…….’

<나에게 몸을 맡겨라.>

‘아아아…….’

<전부 죽이는 거다. 크크큭.>

그때 느려졌던 검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 검이 사내의 어깨를 꿰뚫었다. 사내는 불에 몸을 지지는 것 같은 고통에 몸서리쳤다.

무사는 다시 검을 들어 올리고는 빠르게 사내의 목을 향해 내려쳤다. 그 순간 사내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

산서성.

몽고와 맞붙어 몽고의 문화와 중원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강수량이 적어 가뭄에 강한 옥수수 같은 것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 이곳은 꽤나 많은 무역 상인이 드나들었다. 그런 무역 상인으로 변장한 진철 일행은 한 객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정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소면을 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진철이 한정에게 잽싸게 말했다.

“음식 앞에서 한숨 쉬는 거 아닙니다.”

“아, 그렇지.”

한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철과 북궁아에게 사과했다.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북궁아는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한정은 고개를 숙여 소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시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사마곡을 벗어난 지도 어느덧 닷새가 흘렀다. 그곳에서 얻은 문서에 따르면 분명 안선영은 산서의 삭주에 있는 혈랑파(血狼派)로 갔다고 적혀 있었다. 이름만 보아도 잔혹한 사파 문파로 느껴졌다. 한정은 그녀가 겪을 고초를 생각하니 또 침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정은 문뜩 사마곡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그는 시선을 돌려 슬쩍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가 보여 준 무위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어느 누가 갓 약관이 지난 나이에 사마련의 패도군을 이기고 칠무회의 앞에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칠무회를 막아섰던 그의 모습은 한정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마곡을 벗어나며 그가 말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본 파를 다시 일으키는 날, 그날 이후로 다신 양민들이 무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아무 힘 없는 양민을 함부로 죽이는 자나 단체가 나온다면, 그들은 알게 될 것 입니다. 매화의 향기가 얼마나 매서운가를!’

‘그러고 보니 본파가 화산파라고 했던가?’

한정은 한 번도 화산에 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화산파에 대한 소문은 충분히 들어 온 그였다. 비록 멸문했다지만 천하제일의 문파였지 않은가? 과거 마교의 발걸음을 막아 낸 단 하나의 문파인 화산파. 그들은 이미 전설이었다.

한정은 다시 한 번 진철을 바라보았다. 배가 고픈지 단 세 젓가락에 소면을 다 먹어 치운 그는 어느새 시켰는지 새로 나온 소면을 먹고 있었다.

그렇게 소면을 먹는 진철의 모습에서는 기품이 느껴지는 듯했다. 과연 명문의 자제라 할 수 있는 모습! 특히 만두를 소면에 싸 먹는 방법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발상이었다.

“밥상 앞에서 고민하는 거 아닙니다.”

“아, 그렇지.”

진철의 지적에 다시 한 번 사과를 한 한정은 다 식어 버린 소면을 먹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생각한다 해도 일단은 먹고 힘을 내야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그러고 보니 이 길이 맞는 겁니까?”

진철의 질문에 한정은 생각해 놓은 길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일단 여기 길현에서 관도를 타고 올라 람현을 지나 삭주로 갈 생각이오.”

“그게 최단 거리인가 보군요.”

“그렇소.”

고개를 끄덕인 한정은 다시 면발을 집어 들었다. 일단 소면이 입에 들어가자 군침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없던 입맛도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면발이 한정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진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안무가에는 연락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꽤 걱정할 텐데요?”

“음…….”

한정은 그의 물음에 신음을 터트리며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대답했다.

“이미 서찰을 보냈소. 선영 아씨는 산서에 있고 우리가 가서 구해 올 테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안 한다면 아버지가 아니겠지. 아마도 다른 문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 거요.”

말을 끝낸 한정은 다시 면발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 많이 집어 올렸다. 충분히 식었기에 이 정도의 양도 문제없었다. 하지만 면발이 한정의 입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또다시 진철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 산서에는 정파가 없습니까? 있다면 도움을 청하면 될 터인데.”

한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자꾸 먹으려고 할 때마다 질문하는 그가 얄미웠기 때문이다.

“산서성은 정사 중간의 세력이나 사파의 세력들로 이뤄진 지역이라오. 그렇기에 정파들은 이 지역에 발을 디디려고 하지 않소. 산서성은 그야말로 낭인과 사파들에겐 낙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라오.”

혹시 몰라 산서성의 세력 구도까지 말해 준 한정의 눈이 기광에 휩싸였다. 이번엔 꼭 먹고 말리라는 기운이 그의 온몸에서 풍겨져 나왔다.

‘다시 한 번 말 걸어 봐라. 무공이고 나발이고 간에 사생결단을 낼 테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던가? 한정은 속으로 곱씹으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식사를 끝낸 듯 물을 마시다가 한정과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하지만 한정에겐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미소일 뿐이었다.

한정은 속으로 진철을 욕하며 면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입에 넣기 전 슬쩍 진철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말을 걸까 해서였다. 하지만 진철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한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밥 먹는데 앞사람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한정은 진철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소면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꽝!

그 순간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면발을 입안에 집어넣으려던 한정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거칠게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그의 손가락이 진철을 가리켰다.

“이 쌍! 밥 좀 먹… 헛!”

한정이 울분이 쌓인 듯 크게 외치다 말고 숨을 들이켰다. 진철의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 왔기 때문이다. 진철은 그의 반응에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돌렸다.

‘봉?’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진철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의문의 인영은 진철을 덮치고 바닥을 굴렀다.

식탁 위에 놓인 음식물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진철에게 쏟아졌다.

팟!

북궁아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옆에 놓인 대도를 낚아채듯 잡으며 몸을 돌렸다. 한정 역시 식탁 옆에 풀어 놓은 자신의 검을 잡아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한 자세를 잡았다. 그런 그들의 시야에 검은 인영이 날아왔던 객잔의 입구가 들어왔다.

끼익!

객잔의 입구가 열리며 여러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적색 바탕에 용무늬로 치장한 도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단 한 명도 객잔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는 듯 입구를 막아섰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 역시 붉은 도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검을 들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창을 들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여기 한 멍청이가 굴러왔을 텐데. 어디 본 사람 있나? 음… 아! 저기 있군.”

그는 큰 소리로 말하고는 찾던 이를 발견했는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진철 일행이 있는 곳이었다. 그때 북궁아가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내는 그런 북궁아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녀가 쥐고 있는 대도로 시선을 돌렸다.

피식.

도를 본 그가 실소를 지었다.

“엄청난 도로군. 보기에도 꽤나 묵직해 보여. 그건 정말로 쇠로 만들어진 건가?”

“…….”

“무게에 상관없이 그걸 들고 있으니 정말 무식해 보이는군.”

그 순간 북궁아의 팔이 움직였다. 그의 말 때문이었다. 자신을 모독하고 살아남은 자가 있던가? 진철조차 자신을 모독한 적이 없었다.

턱!

북궁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음식물과 먼지로 더럽혀진 진철이 그녀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그는 북궁아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북궁아의 눈썹이 한 번 더 꿈틀거렸다. 눈앞의 사내를 단번에 반으로 쪼개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선이 많아.

진철의 전음에 주변을 둘러본 북궁아는 눈을 감으며 도에서 손을 놓았다.

사내는 그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흥, 겁먹었나? 정말 쇠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보군. 그럼 뭐로 만들어진 거지? 특이해.”

사내가 자신의 도에 관심을 가지며 다가오자 북궁아의 눈이 번뜩하고 뜨였다.

“흡!”

그 시선을 마주친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언제든지 출수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은 사내의 모습에 뒤에 서 있던 그의 수하들이 당황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대, 대장님.”

“왜 그러십니까?”

“너희는 못 느꼈느냐?”

“예? 무엇을…….”

“…….”

수하가 되묻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기분 탓이라 여기며 자세를 풀었다. 저렇게 가련하게 생긴 여인이 그만 한 기세를 뿜어내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여겼다.

“헤헤, 저기… 대인께서 무슨 일이신지?”

그때 한정이 앞으로 나서며 미소를 지었다. 사내는 북궁아를 한 번 쳐다본 후 한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놈들은 뭐하는 놈들이지?”

“예? 저희는 그냥 행상인입죠. 여기 여인은 저희가 고용한 낭인입니다. 요새 세상이 좀 흉흉해야지요. 헤헤.”

“그래? 그럼 그 칼은?”

사내의 시선이 한정의 손을 향했다. 한정은 그의 시선을 받는 순간 왼손에 느껴지는 검집의 감촉에 아차 하며 검을 뒤로 숨겼다.

“요새 세상이 하도 흉흉해서 제 몸을 지킨답시고 며칠 전에 싸구려 검을 하나 구입했습니다요. 예.”

“음…….”

한정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그런 상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요새는 삼류 무공이라도 익히려는 상인까지 생겨나고 있는 추세였다.

특히 행상인은 이 지역 저 지역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언제 산적들에게 습격을 당할지 몰랐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약간의 호신술 정도는 대부분 익히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거기 쓰러져 있는 놈을 넘겨라.”

“예예, 물론 그래야죠.”

한정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자 북궁아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이런다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도를 빼 들고 싶었다.

한정이 뒤로 물러서자 뒤에 있던 무인들이 몰려와 쓰러져 있는 사내를 끌고 갔다. 그런 무인들을 바라보던 붉은 창의 사내는 진철을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콧방귀를 뀌며 객잔을 벗어났다.

그렇게 사내들이 사라지자 한정은 한숨을 내쉬며 진철에게 다가갔다.

“잘 참았소. 그런데 저들의 복장으로 보아 아마도 혈룡파의 사람들 같군.”

“혈룡파요?”

“이 근처를 관리하는 꽤 큰 사파라오. 저 끌려간 사내에게는 미안하지만 괜한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지 않겠소?”

진철의 물음에 답한 한정은 고개를 숙여 밑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가 먹다 만 소면이 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먹고 싶었지만 결국 못 먹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눈이 갔다.

진철은 몸을 일으키며 옷에 묻은 음식물을 대충 털었다. 그러고는 객잔 입구를 주시했다.

“자, 그럼 가도록 하죠.”

“응?”

진철이 말하자 북궁아와 한정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진철은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보상을 받으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형의 말대로 우린 상인이니까요.”

***

혈룡파의 돌격대인 귀룡대주 양박산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어깨를 폈다. 그들의 시선에는 공포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 지역을 다스리는 혈룡파 문주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수련해 삼십이 넘는 나이에 일류의 경지에 오른 혈룡파의 기대주였다.

그런 배경과 실력으로 인해 그는 이 지역에서 왕과 다름이 없었다.

“흥, 버러지 같은 것들.”

양박산은 양민들의 시선에 눈살을 구기며 걸어갔다. 그에게 양민들은 자신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서둘러 본 파로 돌아간다. 문주께서 한시라도 빨리 이놈을 잡아 오라 하셨으니.”

“예!”

양박산의 말에 무인들이 소리쳤다.

어느 날 갑자기 그를 부른 혈룡파 문주는 한 장의 양피지를 건네주며 그 안에 그려져 있는 이를 속히 잡아들이라 명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양박산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의문을 품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고민같이 머리가 아픈 것은 자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양박산은 양피지 하나만 들고 이 지역을 일주일 동안 이 잡듯 뒤졌다. 그리고 결국엔 찾아냈다. 도중에 그가 도망가려 했지만 이렇게 잡아들였다. 이제는 본 파로 되돌아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성과를 인정받는 일만 남은 것이다.

어느덧 장터를 벗어나자 사람들의 기척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몇 각을 더 걸어가자 길을 걷는 사람은 혈룡파 무사들 외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양박산은 대로에서 몸을 틀어 옆에 나 있는 골목길로 향했다. 대로에 비해선 꽤 좁은 탓에 두 명이 두 팔을 벌리면 막힐 정도였지만 혈룡파로 돌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골목길로 들어선 양박산은 순간 얼굴을 구겼다.

“음…….”

양박산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오며 슬쩍 몸을 떨었다. 갑작스러운 한기가 그의 몸을 덮친 것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척을 살폈다. 혹시 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나 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살펴도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기요!”

“응?”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세 명의 남녀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양박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세히 보니 조금 전 객잔에서 만났던 행상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양박산의 눈에 이채가 발했다.

“뭐냐? 네놈들은?”

양박산을 뒤따르던 무사 한 명이 뒤를 돌아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행상인, 진철이 서 있었다.

진철은 그런 무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피해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뭐?”

“그러니까 피해 보상 말입니다. 어디 보자… 일단 지저분해진 제 옷값하고, 다 먹지 못했던 음식물 비용하고, 거기에 저희들이 여기까지 온 시간 비용. 총 금자 삼십 냥이 되겠습니다.”

“…….”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입을 여는 진철의 대꾸에 말을 건넸던 무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행상인 주제에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는 것조차 목숨을 내놓아야 하거늘, 당당히 돈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철은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큭, 크크큭!”

그때 양박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역시 진철의 행동이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가? 이 지역의 왕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돈을 달라고 하다니.

“돈이라……. 그래 뭐, 일단 내가 잘못했으니 달라면 줘야지.”

한바탕 웃음을 흘린 양박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철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금낭을 꺼내 열었다. 그렇게 금낭 안을 뒤적거리던 그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진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나도 보상받아야 할 게 있군.”

“예? 보상이라뇨?”

양박산의 말에 진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박산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건넸다.

“내가 길을 가는데 감히 붙잡은 값. 거기에 나에게 돈을 요구한 값. 그리고 내가 입을 열게 한 값. 총 금자 삼백 냥이다.”

“…….”

“왜, 너무나 큰 액수에 할 말을 잃었나? 그렇다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지. 네놈들의 목숨값으로.”

양박산이 말을 끝내자 그의 수하들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진철은 그들의 따가운 시선에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그건 곤란한데 말입니다.”

“곤란하긴? 고통은 순간이란다. 이 두 놈은 잡아 족치고 저 계집만 끌고 와. 오랜만에 몸보신 좀 해야겠구나.”

양박산의 시선이 북궁아를 향했다. 침침한 객잔에서 보았을 땐 잘 몰랐지만 햇볕에 나온 그녀를 보자니, 미모가 가히 평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웡!

순간 허공에서 빛이 번쩍였다. 양박산은 생각지도 못한 기습과 속도에 눈을 부릅뜨며 창대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창대를 돌리며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 냈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에 푸른빛의 도가 내려 꽂혔다.

“계집?”

차갑게 입을 연 북궁아는 다시 도를 휘두르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런 그녀에게 혈룡파의 무사들이 달려들었다.

“대주님!”

“흥!”

북궁아는 눈을 빛내며 콧방귀를 뀌고는 크게 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에게 달려들던 무사들이 미처 그녀의 도를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하고 사방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빠르기도 빠르기였지만 워낙 길목이 좁아 제대로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박산은 그녀의 위력에 화들짝 놀라며 마른침을 삼켰다. 보기에도 간단히 휘두른 도건만, 결코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째 당당하다 했더니만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양박산이 소리치자 북궁아가 땅을 차며 그에게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혈룡파 무사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 양박산에게 다가간 그녀는 빠르게 도를 휘둘렀다.

양박산은 눈을 부릅뜨며 자세를 잡고 창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우웅!

창대가 떨려 왔다. 양박산은 이를 악물며 떨어져 내리는 도를 향해 창을 뻗었다.

카가각! 쿵!

대도가 창대를 타고 내려가 바닥에 꽂혔다. 양산박은 그녀의 대도를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큭!”

창대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팔까지 떨려 오는 것을 느낀 양박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상을 뛰어넘는 위력이었다. 칠 성의 공력을 쏟아 넣어 간신히 그녀의 한 수를 막은 것이다.

“네년이 감히 나를 공격하다니! 난 이 지역을 다스리는 혈룡파의 귀룡대주 양박산이다! 네년이 정녕 죽고 싶은 게냐!”

북궁아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

“네 실력으로?”

“뭐라?”

“설마 지금 한 수가 전력이 실린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

그렇게 말한 그녀의 전신에서 기도가 피어올랐다.

“흡!”

그녀의 기세를 정면에서 받은 양산박이 주춤거렸다. 그녀의 모습이 갑자기 커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이대로 물러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잠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진철이 북궁아를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진철은 양박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너지?”

“뭐?”

“너냐고.”

“…….”

양박산은 황당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진철을 바라보았다. 북궁아야 무위가 범상치 않으니 그렇다 치지만,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행상인이 다짜고짜 자신에게 반말을 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철은 그런 그의 생각은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날린 놈이 너냐고.”

진철의 손가락이 수하들이 붙잡고 있던 사내를 향했다. 양박산은 그 사내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하하!”

고개를 돌려 웃음을 터트린 진철은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맞아야지.”

“뭣?”

팡!

순간 진철의 신형이 양박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화들짝 놀란 양박산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날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진철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양박산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런 그의 시야에 수십 개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퍼퍼퍽!

온몸에 진철의 주먹을 허용한 그는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그에 실린 위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몸을 뒤로 빼내며 충격을 흘리지 않았다면 단 한 수에 끝났을 만한 위력이었다.

“금자 삼십 냥 주기 싫지? 그렇지? 그럼 그냥 맞아.”

진철의 말에 양박산은 주춤거리면서도 창대를 강하게 쥐었다.

‘비, 빌어먹을! 감히!’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갈고닦아 온 자신의 무공을 믿었다. 그렇기에 쉽게 무릎을 굽힐 순 없었다.

양박산이 내공을 일으키자 그의 주위로 미풍이 불었다. 그 모습에 진철이 입술을 모았다.

“호, 한번 해보자고?”

“죽여 버리겠어!”

“그러든가.”

“이익!”

양박산이 땅을 박차고 진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창이 순간 여러 개로 나눠지며 진철의 전신을 찔러 갔다.

진철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에 놀란 건 오히려 양박산이었다. 팔 성 이상의 내공이 담긴 공격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오히려 그 공격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우습다는 거냐! 그렇다면 뚫어 주마!’

양박산이 이를 악물자 창대가 진동을 일으키며 빛을 발했다.

푸푸푹!

창날과 함께 양박산이 진철을 꿰뚫고 지나갔다.

양박산은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소를 짓던 양박산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피를 뿜으며 쓰러져야 할 진철이 안개가 흩어지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날 찾나?”

“헉!”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양박산은 배에 틀어박히는 묵직한 느낌에 헛바람을 내뱉었다.

퍽!

“이건 객잔에서 밥상 엎은 죄!”

“컥!”

퍽!

“이건 보상을 하지 않은 죄!”

양박산의 허리가 다시 꺾였다. 진철이 연달아 그의 복부에 주먹을 박아 넣은 것이다.

퍽!

“이건 보상은커녕 오히려 흉기를 휘두른 죄!”

“크어어…….”

진철이 마지막으로 쑤셔 넣은 주먹에 양박산은 다리가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렸다.

“뭐야? 허약하네.”

“도련님!”

“대주님!”

진철이 그런 양박산을 바라보며 말하자 주위에 있던 무사들이 진철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그들의 앞에 북궁아가 나타났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북궁아가 도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도에서 도풍이 휘몰아치며 무사들을 뒤로 날려 버렸다.

“거참, 허약한 놈들이네.”

뒤에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에 그들을 지켜보던 진철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내는 뭐 하나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잘생겼군요.”

한정이 다가오며 말하자 진철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진철은 한정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저도 한 인물 하지 않습니까?”

“…….”

한정이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이름 모를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철 역시 그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굴까요?”

“음…….”

한정은 진철의 물음에 눈을 빛냈다.

“모르겠소. 어찌 알겠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은 것을.”

“그렇군요.”

진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으음…….”

“어라?”

갑작스러운 신음 소리에 진철과 한정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때 사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내는 가늘게 뜬 눈으로 진철과 한정을 바라보고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비볐다. 그럼에도 진철과 한정이 사라지지 않자 착각이 아닌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누구… 신지?”

“아,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라네.”

“아… 헉!”

그때 사내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진철과 한정의 주위에 쓰러져 있는 무인들을 발견한 것이다.

사내는 두려움 반, 놀람 반이 담긴 눈으로 진철과 한정을 바라봤다.

“다, 당신들은 대체…….”

“아, 이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지.”

진철이 사내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사내는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젖혔다.

“이거 보이나?”

진철이 자신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겨 사내에게 보여 주었다. 사내는 그런 진철의 옷자락을 바라보다 다시 진철에게 시선을 주었다.

“보이오. 옷자락에 묻은 음식 찌꺼기까지 확실히 보인다오.”

“그래? 그럼 이거 누가 했는지도 아나?”

“그걸 내가 어찌… 설마?”

사내의 반응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나? 그래서 보상을 받아야 할 거 같은데. 혹시… 돈을 좀 가지고 있나?”

“돈?”

“그래!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바로 그 돈!”

진철의 말에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없소이다.”

“그래?”

진철은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며 미소 지었다.

“그럼 몸으로 때워야지.”

진철의 미소에 사내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참!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무, 무엇이오?”

진철은 사내의 질문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생각할 땐 어떤가? 나도 한 인물 하지 않는가?”

“…….”

***

흔들.

“으음…….”

양박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양박산은 몸을 뒤척였다.

흔들흔들.

또다시 누군가 자신의 몸을 흔들어 오자 양박산은 얼굴을 구기며 자신을 흔드는 그것을 쳐 냈다. 그러고는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짝!

“악! 이 쌍!”

순간 얼굴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양박산은 눈을 부릅뜨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뺨을 후려갈긴 대상을 바라보며 눈을 치켜떴다.

“이 쌍?”

“헉! 아, 아버… 딸꾹!”

양박산은 자신의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 중년인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바로 양박산의 아버지이자 혈룡파의 주인인 양호각이었다.

양호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양박산을 쳐다보았다.

“네가 그동안 나에게 불만이 많았나 보구나.”

“아, 아버지, 그게… 딸꾹! 아니…….”

“쯧쯧.”

양호각은 주변을 훑어보며 혀를 찼다. 그의 시야에 널브러져 있는 수하들이 들어왔다.

“잡아 오랬더니만 여기서 낮잠이나 처자고 있던 게냐? 게다가 저 꼴은 대체 뭐냐?”

“딸꾹! 그게 아니라.”

“잘한다, 잘해.”

고개를 저으며 또다시 혀를 찬 양호각은 몸을 일으키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붉은 장포를 두룬 세 명의 장년인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놓친 것 같소.”

“그런 것 같구려.”

양호각의 말에 가장 앞에 서 있던 장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옆에 있는 장년인과는 달리 금실로 화려한 무늬를 짜 넣은 장포를 입고 있었다.

양호각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시겠소? 무사들을 풀어 더 찾아볼 터이니 본 파로 돌아가시겠소?”

“아니요. 우리끼리 한번 찾아보겠소. 하지만 혈룡파의 문주께서도 함께 찾아 주신다면 고맙겠구려.”

“그렇다면 무사들을 풀도록 하겠소.”

“도움에 감사드리오.”

장포의 사내들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양호각 역시 고개를 마주 숙여 포권을 취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장포의 사내들은 바로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기척을 감췄다. 양호각도 놀랄 만한 경신술이었다.

“대단하군.”

“아, 아버지, 저들은 누굽니까?”

어느새 딸꾹질이 멈췄는지 몸을 일으킨 양박산은 적지 않게 놀라며 물었다. 방금 보여 준 경신술은 지금의 자신으로선 결코 불가능한 경지였기 때문이다.

“쯧.”

양박산의 물음에 혀를 찬 양호각은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자란 놈! 한번 말해 보거라! 왜 여기에 그렇게 누워 있었는지.”

양호각이 눈을 치켜뜨며 묻자 양박산은 자신의 질문이 무시당했음에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우물쭈물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 그게…….”

“쯧쯧! 칠칠치 못한 놈! 자세한 이야기는 본 파에 가서 듣겠다. 네놈은 어서 거기 있는 놈들을 깨워서 오거라!”

양박산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양호각이 다시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려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양박산은 그런 양호각의 모습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진철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한참 뒤 양박산은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시야에 아직도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수하들이 들어왔다.

양박산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자신의 창을 집어 들었다.

“이 쌍! 일어나!”

양박산의 발바닥이 가장 가까운 곳에 누워 있는 수하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

먼지와 음식물로 더렵혀진 옷을 언제까지고 입을 수 없기에 진철 일행은 사내를 데리고 저잣거리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옷가게로 향했다.

진철은 주인이 골라 준 푸른 장포를 들어 올리며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어때?”

“잘 어울린다.”

“그냥 말하지 말고, 좀 보고 말하지 그래?”

주변을 둘러보던 북궁아는 진철의 말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철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매우 잘 어울린다.

“그래?”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독고요라 하오.”

“음… 그래. 난 진철이라 하고 뒤에 있는 여인은 북궁아라고 하지. 그리고 그 옆은 한정. 한 형이라 부르면 될 거야.”

진철이 말하자 북궁아는 슬쩍 고개를 숙였고 한정은 포권을 취했다. 독고요 역시 마주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바라는 건 딱 두 가지일세. 내 소중한 식사와 옷을 망쳐 놓았으니, 자네도 불만은 없겠지?”

“…….”

독고요는 진철의 말에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혔으니 그에 맞는 보상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일지라도 참아야 했다.

“우리가 가는 곳까지 짐꾼을 해 줬으면 하는군. 그리고 길안내도.”

장포를 옆에 내려놓고 다시 옷을 고르던 진철이 입을 열었다.

“뭐요!”

독고요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치켜 올라갔다. 진철이 바라는 것이 너무 심한 요구였기 때문이다. 눈을 부릅뜬 독고요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왜, 불만 있나?”

“그게 말이 된다고 여기오? 고작 옷과 식사를 망쳐 놓은 것 때문에 어딘지도 모를 곳까지 짐꾼이라니. 거기에 길안내라니!”

독고요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은 진철은 옆에 있는 주인을 바라보았다.

“주인장, 이거 얼마요?”

“예, 은자 세 개만 주십쇼.”

“석 냥?”

“예예.”

비싼 가격에 진철의 얼굴이 구겨졌다. 석 냥이면 며칠은 놀고먹을 수 있었다. 아니, 자신이라면 한 달은 놀고먹을 자신이 있었다.

“쩝, 여기 있소. 좀 비싸구려.”

“헤헤, 비싸긴요. 여기 산서 지방은 원래 제대로 된 물품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이 정도면 싼 겁니다요.”

주인장은 진철이 내민 은자를 재빨리 받아 들고는 게 눈 감추듯 품속에 집어넣었다.

진철은 역시나 아쉬운지 주인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은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시야에 여전히 눈을 치켜뜬 채 있는 독고요의 모습이 잡혔다.

“흐음…….”

신음을 흘린 진철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한정과 북궁아를 쳐다보았다.

“심했나?”

“당연하잖소.”

“아니, 적당한 요구다.”

처음에 대답한 건 한정이었다. 그 후 북궁아의 말이 한정의 말꼬리를 잡고 따라왔다.

한정은 어이없다는 듯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식사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다. 그리고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이대로 죽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한 식사는 그렇게 망쳐 버린 식사가 된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를 맛보게 되는 거지.”

“그렇게까지…….”

한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을 흐리자 진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니.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식사는 그만큼 성스럽고 숭고한 행위니까 말입니다. 그런 행위를 망친 것은 천신께서도 분노할 일이지요.”

어느새 북궁아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진철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린 한정은 몸을 돌렸다.

한정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독고요에게 입을 열었다.

“진 소협의 말에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마시오. 본래 저런 성격의 사람인지라.”

“으음…….”

한정의 말에 독고요는 슬쩍 눈썹을 꿈틀거렸다. 본래 저런 성격이라는 말 때문이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못할 성격 같았다. 그런 독고요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한정이 말을 돌렸다.

“저희는 지금 람현으로 가고 있습니다만. 독고 형께선 어디로 가고 계신지요?”

“저는…….”

독고요가 슬쩍 말을 흐렸다. 한정은 가만히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독고요는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갈 곳도 없으면 그냥 같이 가지?”

그때 진철의 목소리가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말에 독고요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렸다. 한정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람현까지는 힘들더라도 근처까지 길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까 보니 형장께서도 이 지역에서는 안전하지 않으신 듯한데.”

한정의 말에 독고요의 눈에 기광이 서렸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자신에게 안전하지 않았다.

“협박이오?”

독고요의 말에 한정이 고개를 저었다.

“서로 돕자는 거지요. 상부상조하자는 뜻입니다.”

독고요는 가만히 한정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뭐가 그렇게 진지한지 북궁아와 무거운 목소리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는 것이오?”

“아, 삭주로 가고 있습니다.”

“삭주!”

독고요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목소리에 진철과 북궁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독고요의 앞에 서 있던 한정은 갑작스런 그의 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한 발 물러났다.

“왜 그러오?”

“삭주는… 삭주는 악마가 살고 있는 곳이오!”

“악… 마?”

한정이 의문의 목소리를 내자 독고요는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미처 피하지 못한 한정의 어깨를 강하게 쥔 독고요는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그렇소! 배덕하고도 천륜(天綸)을 역행하는 악마!”

“…….”

한정은 어깨에 가해지는 힘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부릅뜨며 말하는 독고요의 기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런 독고요의 눈에는 붉은 실이 그어져 있었다.

“일단 진정하지 그러나?”

진철이 독고요의 팔목을 잡았다. 독고요는 팔목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화들짝 놀라며 한정의 어깨에서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슬쩍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아, 아니 괜찮소. 그런데… 삭주에 있는 악마라니?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오.”

“그건… 음?”

다시 고개를 들어 입을 열려던 독고요는 한정의 어깨 너머로 누군가를 발견한 듯 말을 끊고는 몸을 돌렸다. 진철 일행은 그의 반응에 몸을 돌려 그가 바라보았던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붉은 장포를 두른 장년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그러다 장포인의 시선이 독고요에 가 닿았다. 들킨 것이다.

삐익!

장년인이 손을 들어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칫!”

탓!

“어?”

그때 독고요가 갑자기 바닥을 박차고는 옷가게 뒤로 달려갔다.

진철은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하고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무공을 익힌 움직임이었다. 한정 역시 그의 몸놀림에 살짝 놀랐지만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오?”

“글쎄요. 그건 그렇고, 기껏 구한 종이 달아나게 생겼네요.”

“종이라니…….”

“흐음… 응?”

그때 진철의 신형이 빠르게 돌며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펑!

“큭!”

둔탁한 타격과 함께 진철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진철은 자신의 손에 막힌 묵직한 기운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시야에 붉은 장포를 뒤집어쓴 장년인의 모습이 잡혔다.

장년인은 자신의 기습을 막은 진철의 무위에 살짝 놀란 듯했지만 곧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그와 함께 진철의 손에 잡힌 주먹에서 강력한 기가 몰아쳤다.

“흡!”

펑!

콰앙!

장년인이 짧게 기합을 흘리자 허공에 뜬 진철의 몸이 파공성과 함께 옷가게로 빨려 들어갔다.

“꺅!”

“뭐, 뭐야!”

주위에서 옷을 고르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소란에 비명을 지르며 호랑이를 본 토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

한정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장년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한정의 얼굴 앞으로 한 줄기 섬광이 뻗어 나갔다. 북궁아가 대도를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장년인은 바닥을 차 뒤로 몸을 날린 뒤였다.

“누, 누구냐!”

그제야 정신이 든 듯 한정이 검을 빼 들고 장년인을 겨눴다. 하지만 장년인은 비틀어 올린 입술을 열지 않고 그대로 한정에게 쇄도했다.

“빨라!”

한정이 다급하게 외치며 몸을 뒤로 빼며 검을 내려쳤다. 장년인의 움직임이 너무나 빨랐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한정의 검을 간단하게 피한 장년인의 손이 한정의 목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때 그의 옆에서 다시 한 줄기의 섬광이 쏘아졌다.

“음?”

장년인은 묵직한 기운에 황급히 방향을 바꿔 기운이 뻗쳐오는 곳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허공에서 주먹과 대도가 만나자 번쩍이는 빛과 함께 주변에 돌풍이 몰아쳤다.

탓!

장년인은 바로 그곳에서 몸을 빼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돌풍이 걷히며 북궁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북궁아는 그런 장년인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떴다. 그의 묵직한 기운이 아직도 도를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장년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주먹에 붉은색의 강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권강(拳쾝)!”

한정이 놀랍다는 듯 외쳤다. 장년인은 그런 한정을 바라보다 다시 북궁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북궁아가 대도를 내리며 바닥을 박차 장년인에게 달려들었다.

쩡!

대도와 권강이 만나자 또다시 주위에 돌풍이 휘몰아쳤지만 아까와는 달리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고 서로에게 공방을 쏟아부었다.

“흡!”

북궁아가 짧게 기합을 터트리며 튕겨져 나오는 대도를 따라 몸을 돌리며 장년인의 목을 향해 다시 휘둘렀다. 하지만 장년인은 살짝 목을 젖힌 것만으로 그녀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렇게 북궁아의 팔이 허공으로 치솟자 장년인의 눈에 그녀의 빈 옆구리가 들어왔다.

쐐엑!

지금과는 전혀 다른 빠른 주먹이 그녀의 옆구리를 향해 쏘아졌다. 강기에 둘러진 그의 주먹을 허용한다면 북궁아의 상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릴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북궁아의 몸이 비틀어지며 회전했다. 그렇게 그의 주먹을 피해 냈다.

순식간에 펼쳐진 공방이었다. 장년인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옆에서 다가오는 강력한 기운에 급히 몸을 숙여야 했다.

서걱!

장년인이 뒤집어쓰고 있던 장포의 윗부분이 살짝 잘려 허공에 떠올랐다. 북궁아가 몸을 회전시키며 그의 목을 갈라 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을 피해 낸 장년인은 안도할 시간도 없이 턱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에, 숙였던 머리를 급히 위로 치켜 올려야 했다.

장년인은 치켜 올린 머리를 완전히 젖히더니 다리를 강하게 차 올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팡!

장년인이 있던 자리에서 파공성이 터지며 한기가 퍼져 나갔다. 북궁아가 한기를 공중에서 터트린 것이다. 만약 그 공격을 단순히 피해 내거나 허용했다면, 넓게 터진 한기에 장년인의 얼굴이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날 수도 있는 위력이었다.

그 역시 그 사실을 아는지 북궁아와 거리를 벌렸다.

“난 혈강이라 한다. 무림에 나와 너와 같은 여류 고수는 처음이로군. 이름은?”

“…….”

“훗, 말은 필요 없단 건가?”

마치 쇠를 긁는 것 같은 혈강의 목소리에 한정과 북궁아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목소리에 사기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두통마저 생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것도 받아 보거라. 용혈권(龍血拳)이라고 한다.”

순간 그의 주먹에 둘린 붉은 강기가 흔들거리며 그의 팔꿈치까지 덮어 갔다. 그런 그의 강기가 마치 실타래가 풀린 듯 가닥가닥 빠져나와 주먹과 팔에 매달려 흔들거렸다.

“읍!”

한정은 주변을 누르는 중압감에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이 근처만 공기가 달라진 것처럼 몸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그런 한정의 손에 식은땀이 가득 맺혔다.

북궁아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얼굴을 굳혔다.

이 정도의 기도를 뿌리는 인물이라면 본 실력을 보여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진철에겐 괜찮다고 했지만, 칼에 베인 상처가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아 본 실력을 보이게 되면 상처가 다시 터질 수도 있었다.

그런 북궁아의 상태를 알아차린 것인지 한껏 기도를 뿜어내던 혈강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앞으로 쏘아졌다.

“흡!”

북궁아는 급히 몸을 숙였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한 줄기의 혈광이 스쳐 지나갔다. 피해 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북궁아의 머리에 있던 혈강의 팔이 갑자기 꺾이며 그녀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졌다.

파팡!

순간 번쩍이는 빛과 함께 북궁아의 신형이 삼 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헉헉.”

갑작스런 움직임 때문인지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어깨와 옆구리에서 붉은 액체가 옷에 배어 나왔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어깨를 허용하고 말았다. 거기에 순간 전력으로 몸을 움직이고 말았다. 그 대가로 아물던 상처가 버티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크큭.”

북궁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북궁아가 급히 고개를 치켜 올리니 삼 장이나 떨어져 있던 혈강이 그녀의 코앞에서 입술을 틀어 올리고 있었다.

“끝이다.”

나지막하게 입을 연 혈강의 붉은 안광이 북궁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혈강의 주먹에 맺힌 붉은 기운이 더욱 밝게 빛을 뿜어냈다.

슈악!

혈강의 붉게 물든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꽂혀 들어왔다.

‘당한다!’

북궁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쾅!

“북궁 소저!”

커다란 폭음과 함께 먼지가 북궁아와 혈강을 가리자 한정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붉은 장포의 혈강이 펼친 무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경지의 격이 달랐다. 그런 무공을 상처 입은 북궁아가 제대로 받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똑똑히 보였다. 북궁아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는 붉은 권강이!

후웅!

그때 갑작스러운 미풍과 함께 먼지가 주변으로 흩어졌다.

“아!”

한정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놀람은 혈강 역시 느꼈다. 누군가 북궁아의 앞에 서서 혈강의 주먹을 가로막고 있었다.

“으… 아파라.”

투덜거리는 낯선 목소리에 혈강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전력은 아니지만 팔 성의 공력이 실린 혈암권이었다. 바위는 물론 웬만한 쇳덩이조차 뭉개 버릴 수 있는 위력이 실린 권이다. 그런데 그것이 막힌 것이다.

“아…….”

북궁아는 자신의 앞에 드리운 그림자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통에 천천히 눈을 뜨다 탄성을 터트렸다. 자신의 앞에 굳건히 서 있는 사내. 바로 진철 때문이었다.

진철은 혈강과 북궁아의 사이에서 혈강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고 있었다.

“여인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되지.”

“큭.”

진철이 입을 열자 혈강은 이를 강하게 물며 손을 떨쳤다. 진철은 그런 그를 보내 주는 듯 가만히 손을 놓아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아?”

“아, 괘, 괜찮다.”

진철은 북궁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쓰다듬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는 대략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이렇게 다치면서까지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종이라…….’

진철은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상처 입으면서까지 나를 지켜 주려 하지 않아도 돼. 난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으니까.”

“그, 그건…….”

북궁아는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내 것은 내가 지킬 뿐이다. 난 너, 널 종으로 삼겠다고 했으니, 내가 지켜야 하는 건 당연한 거다.”

“그래?”

진철은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몸을 돌렸다.

“그래도 그렇게 다치지는 마.”

북궁아의 시선이 진철을 향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북궁아의 눈에 그런 진철의 등이 크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몸을 돌린 진철은 권강을 줄기줄기 뿌리고 있는 혈강을 바라보곤 목을 꺾어 관절을 풀었다.

“넌 누구냐?”

“…….”

“넌 뭔데 다짜고짜 날 친 건데?”

“…….”

“말 안 해?”

진철이 기지개를 펴듯 양팔을 벌려 가슴을 활짝 열었다. 그렇게 온몸의 관절을 한 번씩 푼 진철은 여전히 말이 없는 혈강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말을 못하는 건가?”

“죽어!”

진철의 비웃음 때문인지 혈강이 눈을 부릅뜨며 달려들었다.

혈강의 팔에 맺힌 권강이 붉은 섬광이 되어 진철의 머리를 노리고 쏘아졌다.

진철은 양팔을 활짝 벌리고는 혈강의 권강이 근처에 다가온 순간 몸을 틀며 팔을 휘저었다.

“뭣!”

혈강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기이한 기운이 자신의 옆에서 불어왔던 것이다.

패도적인 기운이 아닌 부드러운 기운. 하지만 절대적인 힘이 담긴 듯 몸이 그 기운에 밀려 옆으로 떨어져 나갔다.

쾅!

진철의 옆에 있던 벽에 혈강이 처박히면서 허물어졌다.

진철이 천천히 팔을 휘저으며 원을 그리자 피어오르던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 진철의 주위로 작은 돌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크윽!”

신음을 터트린 혈강은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단전에 있는 모든 내공을 뽑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팔꿈치까지 맺혔던 권강이 그의 어깨까지 퍼져 나갔다.

색도 한층 더 짙어진 붉은색!

“허억!”

“큭.”

혈강의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사기에 한정과 북궁아가 숨을 들이켜고는 얼굴을 구겼다. 한정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철은 여전히 춤을 추듯 팔을 휘저었다. 그의 팔이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작은 돌풍이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크아아…….”

혈강이 기합을 흘리며 다리를 굽히고는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발밑에 있는 땅거죽이 먼지를 뿜어내며 내려앉아 버렸다.

“감히 중원 놈이!”

혈강이 외치며 다리를 강하게 폈다. 땅거죽이 밀려 나가며 혈강의 신형이 빛살처럼 진철에게 쏘아졌다. 그 순간 옆으로 돌아서 있던 진철의 신형이 혈강을 향했다.

진철은 벌린 양팔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강하고 빠르게 혈강을 향해 모았다.

혈강은 그 모습에 기합을 터트리며 주먹을 뻗었다.

쿠르릉!

“으아아!”

꽝!

커다란 폭음과 함께 진철과 혈강의 손이 서로 부딪쳤다. 그와 함께 먼지가 피어오르며 그 둘을 가려 버렸다.

한정은 거기서 뿜어지는 파동에 미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북궁아는 대도를 바닥에 찍어 간신히 그 자리에서 버티고 앉아 있었다.

“진 소협!”

바닥을 구르던 한정이 간신이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간이 흐르자 먼지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한정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먼지가 완전히 걷히자 양손을 맞대고 있는 진철과 혈강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 소협!”

한정이 다시 외쳤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환해져 있었다.

생채기 하나 없이 양손을 앞으로 뻗고 있는 진철과는 달리, 혈강은 붉은 장포가 찢겨져 버려 상체가 훤히 드러난 상태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진철은 양팔을 거두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혈강의 입에서 각혈이 터져 나왔다.

혈강은 뒤로 한두 발 물러서더니 힘이 빠진 듯, 한쪽 무릎을 굽혔다.

“쿨럭! 무, 무슨 초식이냐.”

“초식이라……. 그냥 무의 묘리라고 할까나?”

혈강이 고개를 들었다. 진철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강(强)을 이기려면 두 가지의 방법이 있지. 하나는 유(柔)로 제압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더욱 압도적인 강으로 제압하는 것.”

“크크큭.”

혈강은 끊임없이 각혈을 하면서도 웃음을 흘렸다.

“네놈이 그 정도의 실력자라면 지금의 격돌로 날 죽일 수 있었을 터. 어째서 날 살려 둔 거지? 정파의 알량한 배려심이라는 것이냐?”

“흐음, 일단 난 도사라서 말이지.”

혈강의 질문에 진철이 대답하자 그는 다시 웃음을 흘렸다.

진철은 혹시 그가 미쳤나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순간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피해!”

“흐아아!”

진철이 뒤를 돌며 외치자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기의 돌풍이 일어났다.

진철은 급히 내공을 끌어 올리며 팔을 휘저었다.

꽝!

“크윽!”

진철의 목소리에 몸을 돌린 한정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기의 파동에 신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잠시 후 기파가 지나가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진철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혈강은 어디 갔는지 사라져 있었고 진철만이 서 있었다.

“쳇, 도망갔네.”

진철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북궁아에게 다가갔다.

터진 상처에서는 상당량의 피가 흘러나와 북궁아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창백했다.

진철은 북궁아의 등에 손을 대고 내공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내공을 주입하던 진철은 어느 정도 그녀의 기혈이 안정되자 몸을 일으키며 한정을 바라보았다.

“한 형, 난 일단 독고요를 찾아오겠습니다.”

“에?”

“아까 그의 말을 들어 보니 삭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그를 일단 찾은 다음에 정보를 얻으면 선영 아씨를 찾을 때 상당한 도움이 되겠죠.”

“아!”

진철의 말에 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한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녀올 테니 그녀를 부탁합니다. 아까 들렀던 객잔이 좋겠군요.”

“나, 나도 갈 거다.”

북궁아가 대도를 기둥 삼아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진철이 북궁아의 수혈을 짚은 것이다.

“다쳤을 땐 푹 쉬어야지.”

진철이 쓰러지는 북궁아를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한정에게 북궁아를 넘겨주었다. 자신의 짐도 함께 말이다.

“그럼 객잔에서 뵙겠습니다.”

“알았소. 조심하시오.”

한정의 말에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탓!

바닥을 박찬 진철의 신형이 한정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한정은 그런 진철의 모습을 바라보다 북궁아를 옮기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졌다. 그의 눈앞에는 북궁아의 커다란 대도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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