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그의 과거
“헉헉!”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숨어든 독고요는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바닥에 주저앉으며 끓어오르는 기혈을 진정시켰다.
“큭!”
독고요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레 기운을 끌어 올리는 바람에 단전 한구석에서 기이한 기운이 그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 것이다. 독고요는 안간힘을 쓰며 그 기운을 단단히 붙잡았다.
“놀랍군. 혈룡의 기운을 이렇게까지 다스릴 수 있다니. 꼭 연구해 보고 싶어.”
“읍!”
독고요는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눈을 부릅뜨며 재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벽 위에 올라서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잡혔다.
금색 무늬가 있는 붉은 장포를 두른 장년인. 혈궁의 장로인 혈영서생(血影書生) 마광이었다.
“이, 이 자식!”
독고요는 그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절로 살심이 일어나며 잠재우던 기이한 기운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그런 독고요의 눈이 붉게 물들어 갔다.
“크크큭, 하지만 완전히 제압하진 못한 모양이군. 그래도 놀랄 만한 일이야.”
“크윽! 이놈!”
장년인의 놀림 같은 말에 반응한 것인지 독고요의 눈이 더욱 붉게 물들어 갔다. 하지만 그 순간 독고요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두통에 시달리는 것처럼.
“크으윽!”
“호오, 거부하는 건가? 혈룡기(血龍氣)를? 얼마 전, 본 궁의 무사 수십을 학살한 네놈이?”
“학… 살?”
장년인의 말에 독고요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독고요의 뇌리로 어떠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시체.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을 향해 검을 뻗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상처를 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한 무인.
“컥!”
독고요는 다시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또다시 엄청난 고통이 머리를 강타한 것이다.
장년인은 독고요를 바라보며 입술을 틀어 올렸다.
“거부하지 마라! 그것이 네놈의 운명이니! 이제 곧 강림하실 혈마신 님을 모실 운명!”
마광의 말에 끝나자 그의 옆으로 십수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모두 붉은 장포를 걸친 사내들이었다.
사내들은 마치 마광의 명을 기다리듯 그 자리에 서서 독고요를 주시했다. 마광은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혈마대(血魔隊)다. 알고 있겠지? 크크, 네놈을 위해 친히 데리고 왔다. 자! 그를 거둬들여라.”
마광의 명이 떨어지자 혈마대가 벽을 박차고 독고요를 향해 쏘아졌다. 독고요는 여전히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 혈마대가 다가서는 순간 독고요의 머리가 갑작스레 들렸다. 그런 그의 눈이 붉게 물들어 혈광을 내뿜고 있었다.
“으아아!”
독고요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독고요에게 다가가던 혈마대는 그의 반응에 급히 다리를 멈추고 그를 주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독고요의 입이 열렸다.
“크르르…….”
괴기한 소리를 내뱉는 독고요의 입가에 한 줄기의 침이 흘러내렸다.
마치 상처 입은 야수처럼 몸을 웅크리고 혈마대를 경계하는 모습은 짐승의 그것과 같았다. 그 모습에 혈마대가 주춤거리며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마광은 혀를 차며 외쳤다.
“뭣 하느냐! 어서 거둬들이지 않고!”
마광의 외침에 주춤거리던 혈마대가 일제히 독고요에게 달려들었다.
팟!
“음?”
순간 독고요의 혈광이 한층 더 강해지며 그의 주위로 강렬한 기파가 피어올랐다. 혈마대가 그것을 느낀 순간 독고요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꽝!
“컥!”
혈마대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독고요가 한 혈마대원의 목을 움켜잡고 벽에 박아 넣고 있었다. 너무나 빠른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크윽!”
목을 잡힌 혈마대원은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렸다. 독고요는 그의 모습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얼굴을 내밀었다.
“크르르.”
독고요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기이하게 구겨진 그의 얼굴은 상대에게 혐오감을 주기 충분했다.
뚜둑!
순간 독고요의 손에 잡힌 혈마대원의 목이 어긋나며 그의 혀가 입 밖으로 내밀어졌다. 독고요가 힘으로 목을 꺾어 버린 것이다.
독고요는 목이 꺾인 사내를 옆으로 던지며 몸을 돌렸다.
마광은 그 모습에 얼굴을 구겼다.
“과연 전 혈마대주인가? 하지만 아직 혈룡기를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하는군.”
마광은 미소를 지었다. 혈룡기를 완전히 다스리게 된다면, 아니 혈룡기가 완전히 온몸의 혈도에 퍼지게 된다면, 결코 이 정도의 위력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대, 대주.”
한 혈마대원이 독고요의 모습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독고요의 사나운 눈빛에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그는 아무 말도 통하지 않는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독고요를 둘러싼 혈마대원들은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크아!”
그때 독고요가 포효를 내지르며 다시 바닥을 차올랐다.
혈마대는 그의 기세에 각자 자리를 피해 거리를 벌렸다. 그 순간 갑작스레 독고요가 방향을 틀어 한 명의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독고요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다시 땅을 박차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독고요 역시 즉시 방향을 틀어 그를 뒤쫓았다. 너무나 빠른 반응과 속도였다.
“큭!”
독고요가 어느새 바로 앞으로 다가오자 사내는 몸을 급히 뒤로 젖혔다. 그런 사내의 얼굴 위로 독고요의 손이 훑고 지나갔다. 가까스로 피해 낸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사내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나갔다 여겼던 독고요의 손이 어느새 방향을 바꿔 사내의 얼굴을 뒤덮은 것이다.
꽝!
사내의 몸이 땅에 처박히자 독고요의 움직임이 멈췄다. 독고요는 숙였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런 그의 손에는 사내의 얼굴이 잡혀 있었다.
“크르르…….”
독고요가 사내의 얼굴을 쥔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자리를 잡았는지 혈마대원들이 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혈마대의 독문진법인 혈향아랑진(血香牙狼陣)이었다.
우웅!
기가 요동치며 혈마대원의 팔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양손이 붉게 물든 혈마대원들은 독고요를 중심으로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독고요는 그런 그들의 기세를 느꼈는지 더욱 으르렁거리며 그들을 경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포효를 내지른 독고요는 양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사내의 얼굴에서 핏물이 튀어 오르며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크아아!”
함성을 내지른 독고요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의 주위를 맴돌던 혈마대는 갑작스레 달려오는 그의 모습에 피하기는커녕 함께 앞으로 달려들었다.
독고요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사내에게 팔을 휘두르자 사내는 급히 몸을 젖혔다. 그러고는 붉게 물든 손으로 독고요가 내민 팔을 향해 찔러 갔다.
서걱!
독고요의 팔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사내의 경기가 스쳐 지나가자 옷자락이 잘리며 베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독고요의 손이 허공에서 방향을 바꿔 그대로 사내에게 내리꽂혔다. 그때 독고요가 움직임을 멈추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슈앙!
그 순간 달려들던 혈마대원이 주먹을 떨쳐 경기를 날렸다. 그 붉은 섬광은 독고요를 향해 날아갔다.
텅!
독고요가 손을 휘두르자 붉은 경기가 튕겨 나갔다. 그때 독고요의 시야에 수많은 사내가 진각을 밟는 모습이 잡혔다.
바닥이 파일 정도로 강하게 진각을 밟은 사내들은 독고요를 향해 권을 내질렀다. 그러자 그들의 주먹에서 붉은 경기가 독고요의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퍼퍼펑!
미처 그들의 공격을 방어하지 못한 독고요의 몸에 붉은 경기가 틀어박히며 들썩였다.
쿵!
허공에 떠 있던 독고요의 몸이 바닥에 떨어져 내리자 먼지가 피어올랐다.
“끝인가? 하지만… 정말로 실망스럽군. 고작 이 정도의 힘을 위해 혈룡기를 거부하고 있는 건가?”
마광이 괴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웃음이 섞여 있으면서도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광의 표정이 변했다. 독고요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크르르…….”
짐승의 소리를 내는 독고요의 몸에서 강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하게 혈광과 기도를 뿌리는 독고요의 모습에 혈마대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 명중시킨 공격에 온몸의 혈도가 다 터져 버렸어야 했기 때문이다.
“끄떡도 하지 않다니…….”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혈마대원들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독고요는 목을 꺾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의 온몸에서 붉은 실 같은 기가 흘러나왔다. 마치 그릇을 넘쳐 오르는 물처럼.
파앙!
순간 독고요의 신형이 허공을 갈라 자신과 마주 서 있던 혈마대원의 앞에 나타났다.
“헛!”
그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몸을 뒤로 빼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뻗어 나간 독고요의 손에 목이 붙잡혔다.
“크윽!”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독고요의 손가락이 쥐어짜듯 사내의 목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신음을 터트리면서 독고요의 팔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독고요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힘을 가했다.
“대, 대… 주.”
“……!”
그때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에 독고요의 혈광이 살짝 흔들렸다. 사내는 그런 독고요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죽은 것이다. 그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독고요의 손을 흠뻑 적셨다.
털썩!
독고요가 손을 풀자 사내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독고요는 그런 사내의 시신을 바라보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크으으…….”
독고요의 입에서 갑작스레 신음이 흘러나왔다. 독고요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다 실성한 사람처럼 머리를 부여잡고 무릎을 굽혔다.
“크으윽! 크윽! 으으윽!”
독고요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붉은 기 역시 흔들리며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했다. 혈룡기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광 역시 그 사실을 눈치챈 듯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이미 장악하기 시작하는 혈룡기를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대항하다니!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것인가!’
마광은 독고요를 주시했다. 그는 혈룡기에 대항하느라 주변의 혈마대에게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마광은 이를 악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때다! 어서 저놈을 회수해라!”
마광의 말에 혈마대가 다시 천천히 독고요를 향해 다가갔다. 또 언제 돌변해 습격해 올지 몰랐다.
탁!
“큭! 장로님을 뵙습니다!”
그때 마광의 옆으로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옷자락이 거의 찢어져 몸이 다 드러난 혈강은 마광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마광은 혈강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다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좌 호법! 대체 그 모습은 무엇이더냐!”
“다, 당하였습니다.”
“뭐라? 대체 누구한테 말이냐! 감히 누가 혈궁의 거사를 방해한단 말이냐!”
“그게…….”
혈강이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답답했는지 마광이 다시 호통을 치려다 입을 닫았다. 혈강의 뒤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야, 죄다 시뻘거네.”
그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장내에 들어서면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무척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마광은 갑작스레 등장한 젊은 사내의 모습에 얼굴을 구겼다. 모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강은 뒤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곤 눈을 부릅떴다.
“설마…….”
혈강의 모습을 본 마광은 다시 진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그에게 당한 것 같았다. 혈강은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절정의 고수. 그런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은 젊은 사내 역시 최소 절정의 무위를 지녔다는 말과 같았다.
“저자입니다. 저자에게 당해 증거인멸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리석은!”
마광은 좌 호법의 말에 호통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다시 젊은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놈은 누구냐!”
“나?”
마광의 물음에 젊은 사내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진철. 그리고 당신들을 혼내 줄 사람.”
“하하.”
진철의 말에 마광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메마른 웃음은 곧 폭소로 변했다. 무척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크크큭, 혈마대는 들어라! 즉시 몸을 빼도록!”
마광의 명에 혈마대가 독고요의 곁에서 몸을 날려 마광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광은 슬쩍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마광은 다시 진철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런 그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좌 호법! 본 궁은 패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
“먼저 가거라. 네놈의 복수는 친히 내가 해 줄 터이니.”
“…감사합니다!”
혈강은 고개를 들어 진철을 한 번 노려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얼굴 곳곳에서 볼록하게 뭔가가 튀어나오면서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퍼억!
혈강의 얼굴이 터지며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진철은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천천히 쓰러지는 혈강의 모습을 바라보다 급히 시선을 돌렸다. 머리가 터진 그 모습에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 것이다. 하지만 마광은 혈강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혈강이 완전히 바닥에 몸을 눕히자 다시 진철을 바라본 마광이 입을 열었다.
“한번 마음껏 발버둥 쳐 보거라. 네놈이 감히 본 궁의 거사를 방해하고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크크큭, 크하하하!”
마광은 한껏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곳에서 모습을 감추듯 뒤로 몸을 날렸다. 혈마대 역시 마광을 따라 모습을 숨겼다. 그럼에도 진철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고개를 숙여 입을 막고 있었다.
***
월화와 일화는 북해빙궁에서 나름 촉망받는 후기지수로 젊은 나이에 신녀의 눈에 들어 그녀의 호위 무사가 된 무인이었다.
신녀수호대에서 대주와 부대주의 자리를 얻은 그들은 갑작스러운 신녀의 가출(?)에 그녀를 찾기 위한 수색대를 맡게 되었다.
북해서부터 한 달이 넘도록 수색을 해 온 그들은 결국 중원에까지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물론 그동안 계속되는 수색에 그들의 정신은 피폐해져 있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녀를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빙궁에서의 끊임없는 압박에 그들의 심신은 지칠 때로 지쳐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이 지금은 밤하늘의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꿈이 아니겠지?”
“그럴 겁니다.”
“아냐, 혹시 몰라. 꿈일 수도 있단 말이지.”
월화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일화를 향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월화는 묘하게 기뻐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꿈일 수도 있으니 한 대만 맞아 봐라. 그리고 아프면 말해.”
“…….”
슈앙!
일화는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그의 옆으로 섬광 같은 주먹이 훑고 지나갔다.
월화는 살짝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왜 피해?”
“그럼 맞아야 했습니까?”
“물론이지. 그래야 꿈인지 아닌지 알 거 아냐?”
월화의 말에 일화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 순간 월화의 시야에 거대한 손바닥이 잡혔다.
짝!
월화의 양 볼에서 불똥이 튀었다. 일화가 양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어떻습니까? 대주. 아픕니까?”
“…아프군.”
월화는 화끈거리는 양 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을 번뜩이며 정면을 주시했다.
“그렇다는 건!”
“꿈이 아니란 겁니다.”
월화의 말을 일화가 받았다. 월화는 저절로 찢어지는 입을 미처 다물지 못했다. 찾은 것이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자신들의 신녀를 말이다.
***
한정은 북궁아를 업고 땀을 흘려 가며 그녀의 대도를 질질 끌었다. 정말 욕이 나올 정도로 무거운 대도는 북궁아를 업은 채 들고 가기에 상당히 벅찬 무게였다. 그런 한정의 앞에 두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한정은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얼굴을 살짝 구겼다.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그들이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뭡니까?”
한정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두 사내는 한정에게는 관심이 없는 듯 북궁아와 그녀의 대도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뭡니까?”
한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제야 그들은 북궁아에게서 시선을 떼곤 한정을 바라보았다.
“그런 자넨 누군가?”
“하?”
한정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초면에 반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뭐, 중요한 건 자네가 누구인가가 아니겠지. 자네의 등 뒤에 업혀 있는 그녀, 받아 가겠네.”
“뭐라고?”
사내의 말에 한정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동시에 한정의 복부에 묵직한 일격이 꽂혔다.
“컥!”
한정은 숨을 멎게 하는 주먹에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점점 굽혀져 가는 자신의 다리에 이를 악물었다. 한정은 그의 얼굴을 기억하겠다는 듯 고통 속에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흥!”
그는 허물어져 가는 한정을 바라보며 코웃음 치고는 그의 등 뒤에 업혀 있는 북궁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한정이 사내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사내는 적지 않게 놀라며 한정을 바라보았다. 한정은 한껏 찡그린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치, 치사하고 비겁한 놈.”
“뭣!”
사내가 얼굴을 구기며 반문했다. 하지만 한정은 이미 바닥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사내는 한정의 그런 모습에 주먹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내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시선이 많습니다.”
“칫!”
주변을 훑어보고 혀를 찬 사내는 북궁아를 부축했다. 그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는 북궁아의 대도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곧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
“음…….”
창가에 서 있던 천무제 담덕은 예상치 못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전서를 읽으며 신음을 흘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칠무회의 부회주인 호강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덕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자하신검을 발견했다고 하는군.”
“예? 자하신검이라면 과거 화산의 신물이었던 그 보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그 외에 뭐가 있겠나?”
담덕은 전서를 구기며 내공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산매진화가 일어나며 전서가 재로 변해 흩날렸다.
호강철은 그 재를 바라보고는 다시 담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자하신검을 확보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하신검은 무림 팔대 기보로 그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리고 그 검이 상징하는 것 역시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치입니다.”
“알아,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 자하신검에 주인이 있다고 하더군.”
“예?”
담덕의 말에 호강철은 눈을 크게 떴다.
자하신검이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그 검의 주인까지 나타났다는 것은, 무림의 세력도를 크게 변화시킬 만한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하신검의 주인이 마음먹고 무림에서 세력을 만들게 된다면 칠무회의 입지는 물론 다른 정파들의 입지 역시 크게 흔들릴 것이다. 뭐라 해도 자하신검은 중원 무림을 구한 화산파의 신물이었으니 말이다.
“혹시 자네 신룡이라고 아는가?”
“신룡이라면… 전에 마혈도를 제압한 자가 아닙니까? 어린 나이에 뛰어난 무공을 소유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마혈도라……. 마혈도는 나도 들은 적이 있지. 아무튼 그 신룡이라는 아이가 자하신검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군.”
“…….”
호강철은 살짝 눈을 구겼다.
신룡이란 별호는 그렇게 간단하게 없애 버릴 만한 별호가 아니었다. 거기에 지금도 신룡에 대한 명성과 소문이 더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파 무림을 공포에 몰아넣은 마혈도를 제압한 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하신검이라. 하하!”
담덕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검에 대한 욕심은 예전에 버렸다고 생각했건만… 자하신검이라…….”
몸을 돌린 담덕은 호강철을 지나치며 입을 열었다.
“한번 보고 싶구먼. 자하신검을.”
“존명.”
“…가”
“음…….”
“가가.”
“아!”
독고요는 귓가에서 들리는 가늘고 고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뒤를 돌아보았다.
“……!”
독고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긴 머리를 곱게 땋은 여인이 달빛을 등지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그는 벅차오르는 가슴에 입을 열었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가.”
그녀의 입이 열리자 독고요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매만졌다.
“아… 아…….”
독고요의 입에서 기쁨과 슬픔이 담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존재함을 이 손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녀는… 너무나 보고 싶었던, 너무나 간절하게 바랐던 안식처가 아니던가?
“영… 매.”
“가가.”
그녀가 독고요의 손에 기대서 환하게 웃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미소. 그런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마음을 짓누르던 것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아, 이 편안함과 안락함.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볼을 다시 쓰다듬자 그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영 매…….”
그녀의 애정 어린 손길에 마음이 편안해져 오는지 잠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 따뜻한 손길에서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이젠 괜찮으니 쉬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을까?”
그녀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그런가? 정말로… 괜찮을까?”
“물론이에요, 가가.”
독고요가 그녀의 볼을 쓰다듬던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이 마치 비단과도 같다.
그렇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바라보던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독고요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
독고요의 눈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영 매!”
절망이 담긴 외침을 내뱉은 독고요의 시야에 그녀의 이마를 뚫고 나온 칼날이 들어왔다.
“영 매!”
“어이쿠!”
진철은 갑작스레 일어선 독고요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독고요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독고요는 식은땀이 가득 배인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꿈인 것이다. 그것도 악몽 같은 꿈.
“에고, 놀래라. 뭐야? 무슨 발작이라도 생긴 건가?”
“아, 당신은…….”
진철이 다가오며 입을 열자, 그제야 그를 발견한 듯 독고요가 고개를 들어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왜 그런가?”
“당신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오.”
“그래? 그런데 어쩌나, 이미 상관해 버렸는데.”
진철의 말에 독고요가 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진철은 그런 눈빛을 받으면서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 붉은 장포를 뒤집어쓴 사람들,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이오.”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삭주에서 온 사람들인가?”
독고요의 눈이 빛났다. 진철은 그 눈빛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말 좀 해 주지 그래?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에 가야하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오?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물론.”
대답하는 진철의 시선이 독고요의 시선과 만났다. 독고요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하지만 그 전에 왜 그곳으로 가려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겠소?”
“이유라… 뭐, 별거 없어. 단지 한 소저가 납치를 당했는데 삭주의 혈랑파에 있다더군.”
“납치?”
“아아, 납치.”
독고요의 눈이 다시 사납게 변했다. 진철은 그런 독고요에게 간단하게 삭주로 가는 이유와 목적을 알려 주었다. 독고요는 가만히 그 말을 듣다가 다시 납치라는 대목에서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 여인과 당신은 어떤 관계요?”
“관계라…….”
진철은 생각에 잠겼다. 어떤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런 관계도 아닌데?”
“그런데 그녀를 구출하겠다는 것이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에도?”
“물론이지.”
“어째서?”
독고요의 반문에 진철이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거야 약속했으니까.”
“약속?”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구출하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렇지 않나? 남자라면 한번 한 약속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지.”
“자존심이라…….”
“남자의 한마디는 천금보다 무겁고 값진 것이 아닌가?”
진철의 말에 독고요는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도 이렇게 말했었다. 남자가 한번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고.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보내 주지 않았던가? 홀로 오랜 시간을 기다릴 것을 알면서도.
“그런데 혈랑파에 대해서 잘 아는 거 같군.”
“모르지는 않소.”
“호오, 그래? 그거 잘됐군.”
독고요는 의아한 눈으로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그런 독고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알려 줘 보게나. 혈랑파에 대해서.”
“음…….”
독고요는 다시 한 번 진철의 눈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랑파의 진정한 모습은 단순한 사파의 문파가 아니라오. 바로 혈궁의 지부.”
“혈궁?”
진철은 낯익은 문파에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분명 들어 보기는 했지만 정확히 뭐하는 곳인지,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독고요는 그런 진철을 바라보며 살짝 얼굴을 구겼다.
“설마 모르는 거요? 혈궁이란 문파를?”
“음… 아! 기억났다.”
진철은 이제야 생각난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독고요는 그 모습에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 혈궁이 몰래 섬서에 만든 지부가 바로 혈랑파라오.”
“뭔가 일을 꾸미고 있나 보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오?”
진철은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본모습을 숨기는 놈치고 뒤가 구리지 않는 놈은 본 적이 없거든.”
“그렇소? 훗, 뭐 그도 그렇구려. 맞소. 혈궁은 지금 다른 이들 몰래 일을 꾸미고 있다오. 그것도 아주 위험하고 나쁜 일을 말이오.”
“참, 그 전에 먼저 물어볼 게 있는데.”
“뭐요?”
진철이 말을 끊으며 입을 열자 독고요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혈궁과 혈랑파를 잘 알고 있는 거지? 혈궁이라면 분명 천하에서 으뜸이 가는 문파라 들었어. 그렇다면 분명 그곳에서 비밀스럽게 추진하는 일은 밝히기 어렵겠지. 괜히 천하의 으뜸이 아닐 테니까. 하지만 자넨 알고 있어. 어째서일까?”
진철의 물음에 독고요의 몸이 움찔거렸다. 독고요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자신을 바라보는 진철의 눈을 주시했다.
“내가 그곳의 첩자라는 거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렇다면 이렇게 쫓겨 다닐 일도 없겠지. 단지 자네의 사정을 좀 듣고 싶어서 말이야.”
“훗, 본인의 모든 것을 밝히란 거요?”
“왜? 싫어? 혹시 아나? 자네가 잘못되면 대신에 내가 뭘 해 줄 수도 있을지.”
진철의 말에 독고요의 눈이 부릅떠졌다.
진철의 말을 달리 해석하면 자신 대신에 혈궁에 칼을 내밀어 줄 수도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 무림에 존재하는 그 누가 혈궁에 단신으로 칼을 내밀겠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그… 말, 진심이오?”
독고요가 이를 악물며 되묻자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가 사라진 진지한 얼굴이었다. 흐리멍덩한 눈빛은 사라지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내대장부의 모습이었다.
“남아일언 중천금. 말했잖아?”
“…….”
독고요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진철이 조금 전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면 당장이라도 그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말하고 있었다.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자신은 할 수 있다고.
“그 말… 믿겠소.”
“믿으라고. 믿으면 복이 온다니까.”
웃음기 있는 진철의 말에 독고요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가 정말로 자신을 속인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고작 그 정도란 뜻이니까.
“난… 혈궁 돌격대인 혈마대의 대주였소.”
입을 연 독고요는 슬쩍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진철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의 난 아주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오. 주위의 모든 사람은 날 저주했고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았소. 그 이유가 웃기게도 내가 태어난 후 그 동네에 가뭄이 계속되고 안 좋은 일만 생겼기 때문이라오.”
“천운은 사람의 손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크큭, 맞는 말이오.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었소이다. 아무튼 그렇게 가족에게 버림받았던 난, 어린 나이에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소. 정말 안 해 본 짓이 없었다오. 도둑질은 물론 동냥질까지. 거지들의 틈바구니 속에 끼어 밥을 먹기도 하였고 그들에게 죽을 정도로 맞아 본 적도 있었다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다 어느새 철이 들어 보니 한 장원의 하인으로 들어가게 되었소.”
그때의 시절이 생각나는지 잠시 말을 멈춘 독고요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런 독고요의 얼굴에 먹구름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지난 일이라지만 쉽게 잊을 수 있는 세월이 아니었다.
“아무리 철이 들었다고는 하나 신체적인 나이로는 아직도 어린애였다오. 그런 어린애가 덩치가 산만 한 장정들 속에서 뭘 할 수 있겠소? 그땐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맞았다오. 기분이 나쁘단 이유로, 그리고 단지 짜증 난다는 이유로 말이오.”
“으음…….”
“살기 위해 버텼다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정말 그땐 뭘 위해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 쳤는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소. 하하.”
독고요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그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짝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다가온 한 여인이 있었다오. 장영영. 장원 주인의 딸이었소. 만인의 사랑을 받아 오며 자란 여인이라 그런지 상당한 미인이었다오. 그리고 마음씨 역시 고왔소.”
“여자는 미모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정이지.”
“후후후, 그렇소?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오. 그녀는 나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을 챙겨 주었다오. 내가 밥을 굶을 땐 몰래 식사를 챙겨 주었고, 어딘가 다치면 치료를 해 주기까지 했소.”
“사랑했구나?”
진철이 잽싸게 물었다.
독고요는 진철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리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독고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소. 사랑했소. 이 목숨이 사라져도 그녀만큼은 지켜 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오.”
“사랑은 독과도 같지. 아주 달콤한 독.”
진철이 말하자 독고요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적당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녀와 자신의 관계라면 더욱더 와 닿는 비유였다. 주인의 딸과 하인의 사랑은 그만큼 위험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그녀를 거절했다오. 그녀가 주는 모든 호의를 말이오. 그녀에게 조금씩 빠져드는 내 자신이 두려웠기 때문이오. 하지만 그녀를 몰아내면 몰아낼수록 그녀를 미워할수록, 더더욱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는 날 발견할 수 있었다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난 그녀 없인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오.”
“오오.”
진철이 흥미 가득한 눈으로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난 그녀를 위해 남몰래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오. 물론 무공이라고 해 봐야 단순한 기마 자세를 취하고 체력을 기를 뿐이었지만 말이오. 하지만 그런 작은 일이라도 그녀를 위해서라는 생각에 한없이 즐거웠다오. 너무나 즐거워 멈추지 못했다오.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 인생을 변화시킨 계기인 것 같소.”
독고요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삼 년의 세월이 흐른 독고요의 몸은 군살 없이 빼어난 몸이 되어 있었다. 낮에 지칠 정도로 일을 하고 밤에 한 수련은 몸을 상하게 만들 수도 있었지만, 장영영의 보살핌에 독고요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갔다. 그것이 계기였다.
그날도 독고요는 다른 하인들과 함께 장원의 잡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몇 명의 장년인이 장 내로 들어섰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다른 손님들을 수없이 보아 왔던 독고요였기에 별다른 관심을 지니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장년인 중 한 명이 독고요에게 관심을 지녔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날 밤 독고요는 장주의 부름을 받았다.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연회장에 들어선 독고요는 장주의 손짓에 우물쭈물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인으로서 감히 연회장에 몸을 들인 것도 경을 칠 노릇이었기에 이런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인사를 올리거라. 장 어르신이시다.”
“소인 독고요라고 하옵니다.”
장주의 말에 독고요는 솟아오르는 궁금증을 억누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장년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몇 살이더냐?”
“열다섯이옵니다.”
“호오, 어린 나이에 제법이구나?”
장년인의 눈이 독고요의 몸을 훑었다. 얼핏 보았을 때도 놀랐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더 놀라운 신체였다. 그야말로 타고난 무골이라고 할 수 있는 몸. 군살 없는 몸과 떡 벌어진 어깨 때문인지 그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음에도 왠지 모르게 당당함이 묻어 나왔다.
“앞으로 네가 모실 분이시다. 내일 아침 당장 떠날 테니 준비를 해 놓거라.”
장주의 말에 독고요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추켜올렸다. 장주는 독고요의 반응에 의아한 듯 되물었다.
“싫은 게냐?”
“아, 아니옵니다.”
독고요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하지만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숙소의 앞에서 장영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들었어. 곧 떠난다고.”
“…….”
“그냥 갈 생각이었어?”
“…….”
독고요는 감히 그녀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장영영은 그의 모습에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예전에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그랬었지? 먹여 주고 재워 준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독고요 역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장영영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살짝 안았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그랬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남자가 하는 말은 지켜야 하는 거야. 안 그래?”
끄덕.
독고요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영영은 그의 머리를 더욱 힘주어 안으며 입을 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장 어르신은 무림의 고수이셔. 혹시 알아? 그분께 무공을 배워 무사가 될지?”
끄덕.
여전히 독고요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를 감싼 장영영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렇게 무사가 되면, 아주아주 강해져야 해. 알았지?”
말을 잇는 장영영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강해지면… 꼭 데리러 와야 해. 알았지? 이 바보야.”
그렇게 독고요와 장영영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모르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야심한 새벽에 독고요는 장원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나와 그녀는 헤어지게 되었다오.”
독고요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장이라도 손만 뻗으면 잡힐 것처럼.
“흐끅! 흐끅!”
“음?”
독고요는 옆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독고요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철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탓이다.
“왜, 왜 그러시오?”
“흐끅! 왜 그러냐고? 왜 그러냐고! 너무 슬프잖아!”
진철은 눈동자를 글썽이며 외쳤다. 독고요는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 난 무림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오. 그 후로 난 혈궁에 입궁하게 되고, 오 년 후 혈마대주란 직책을 얻을 수 있었다오. 궁금하지 않소? 무공을 늦게 배우기 시작했음에도 어찌 그렇게 빨리 절정 고수가 될 수 있었는지.”
진철은 소매로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독고요는 그 모습에 자신의 손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악마의 힘을 받아들였다오.”
독고요는 장년인을 따라 혈궁에 입궁하게 되었다. 그리고 혈궁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알기도 전에 한 석굴에 갇혀야만 했다. 그 석굴에는 독고요 외에도 수십 명의 소년이 있었다. 모두 중원 각지에서 팔려 오거나 끌려온 소년들이었다.
독고요는 그 석굴에서 삼 년의 시간을 보냈다.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순진했던 소년들은 모두 한 마리의 짐승이 되었고 악마가 되었다. 그것은 독고요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기 위해서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년들은 점점 말을 잃어 갔고 잠을 잘 때도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잠을 청해야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힘든 일상에 당연히 낙오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낙오자는 그 자리에서 자살을 하거나 다른 소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석굴에서 독고요와 소년들이 익힌 무공은 두 가지였다.
혈룡체(血龍體)와 혈룡기(血龍氣).
혈룡체는 혈룡기를 받아들이기 위한 기초 무공으로 몸을 닦고 체력을 기르는 기본 공이었다. 하지만 말이 기본 공이지 혈룡체가 담고 있는 묘리는 상승 무리였다. 갓 무공에 입문한 아이들이 익히기엔 무리였다.
그런 혈룡체였기에 그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소년들은 혈룡기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거나 혈도가 터져 죽음을 면치 못했다.
삼 년의 시간이 흐르자 석굴에서 나온 사람은 독고요를 비롯해 단 세 명에 불과했다. 석굴에 들어갔을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온 그들은 특별 대접을 받았다.
혈궁은 그들에게 각자 하나의 단체를 맡기게 되었는데 그중에 독고요는 혈마대를 맡게 되었다.
혈마대의 임무는 돌격대. 그렇기에 타 조직보다 더 강한 무공을 지녔고 잔인한 성향을 지녔다.
독고요가 그런 혈마대를 맡은 지 다시 삼 년이 지난 후 사건이 발생했다.
독고요는 불타는 장원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주위에 장원의 식솔인 여인들과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때 독고요를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혈마대의 부대주인 낭삼추였다.
“대주, 남아 있는 무인은 모두 추살했습니다.”
독고요는 불타는 장원을 한동안 응시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귀환한다.”
“예. 모두 거점으로 귀환한다!”
독고요의 말에 낭삼추가 몸을 돌리며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혈마대원들은 모두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는 납검을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악마! 이리의 송곳니같이 시퍼러며 혈랑의 눈처럼 붉은 핏빛의 잔혹한 악마여!”
그때 한 아이가 독고요를 향해 소리쳤다. 독고요는 걷던 발을 멈추며 뒤를 돌아 아이를 바라보았다. 꽤나 곱게 자란 듯 뽀얀 피부를 지닌 아이는 무릎을 꿇은 채 그를 향해 소리쳤다.
“언젠가 우 씨가 네놈들을 찾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그때까지 죽지 말고 살아 있어라!”
이를 갈며 말을 토해 내는 아이의 두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독고요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독고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몸을 돌려 길을 걸었다.
혈랑파는 삭주에 자리 잡은 혈궁의 가장 큰 지부 중 한 곳이었다.
혈랑파에 도착한 독고요는 보고를 위해 문주실로 향했다. 문주실에 들어서자 혈랑파의 문주이자 혈궁의 장로인 세세호는 탁자에 놓은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독고요가 들어왔음에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말하시게.”
잠시 후 세세호가 입을 열었다.
“전에 명하신 우가장을 멸하였습니다.”
“음.”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 놓인 문서를 집어 들었다. 이번 일에 혈마대가 했던 행동들이 적혀 있는 보고서였다.
세세호는 문서를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아주 훌륭하게 잘 해 주었구려, 독 대주.”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오.”
세세호는 고개를 숙인 독고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독고요는 의문을 표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본 궁에서는 멸문시키라고 명했던 것 같은데. 어린아이와 아낙들을 살려 두었구려. 이유가 무엇이오?”
“…….”
독고요에게 묻는 세세호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하지만 독고요는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그들은 본 궁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건 독 대주가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 아니오. 대주는 본 궁의 명령에만 따르면 된다오.”
“…….”
“그만 나가 보시오.”
세세호의 말에 독고요는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하고 문주실을 나섰다.
세세호는 방을 나서는 독고요의 등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문주실을 나선 독고요는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일반 무인들과는 달리 대주급은 자신만의 연무장을 지니고 있어 다른 이들의 방해를 받을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독고요는 연무장을 즐겨 찾았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후우…….”
연무장 중앙으로 간 독고요는 가부좌를 틀며 숨을 몰아쉬었다. 단 한 번의 호흡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잔혹한 악마여!’
독고요의 머릿속에 눈물을 흘리며 외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분명 뼈를 깎는 고통으로 무공을 익힐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한 원한이 그 아이에게 있었다.
독고요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철없던 꼬마의 손은 어느새 다른 이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악마의 손이 되었다.
“…….”
독고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이 순간 붉게 보였다.
독고요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언제부터 적들을 걱정했단 말인가?’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손을 쓰는 데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고 상대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던 자신이 달라지고 있었다.
독고요는 문뜩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지?”
저녁이 되어서야 연무장에서 나온 독고요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낭삼추가 건네준 쪽지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낭삼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독고요는 그를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에는 세세호의 명령이 적혀 있었다.
<장가장 멸(滅).>
짧은 내용의 글. 하지만 그걸로 인해 독고요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독고요는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어 종이를 구겼다.
“이유가 무엇이냐?”
“이유는 없었습니다. 단지 명령만 내려왔을 뿐.”
“…….”
낭삼추의 말에 독고요는 이를 강하게 깨물었다. 그런 그의 주위로 살기가 퍼져 나갔다.
낭삼추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 올렸다.
“대, 대주.”
마른침을 삼킨 낭삼추는 독고요를 불렀다. 하지만 독고요의 귀에 닿지 않는지 한번 피어난 살기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가서 전하라. 내일 새벽에 출발할 터이니 푹 쉬라고 말이다.”
“예, 옛!”
살기 어린 독고요의 말에 낭삼추는 다급히 대답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독고요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 번 노려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장시간 하늘을 바라보던 독고요의 눈에 어떤 결의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가장을 공격했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소.”
진철의 물음에 독고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엔 장가장이 멸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조금만 자신이 생각을 달리했다면 장가장이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음,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그날 자정… 난 홀로 장가장을 찾아갔다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전력을 다해 달린 독고요는 달이 뜬 야심한 밤에 장가장에 도착했다. 그런 그의 몸은 상당히 지쳐 있었다. 항상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무인이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뉘, 뉘시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독고요를 마주한 문지기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걸어왔다.
독고요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순간 눈매가 가늘게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던 하인이었건만 지금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 년의 시간은 그렇게 한 소년을 바꿔 놓기 충분했다.
“그, 급한 일이오. 장주께선 안에 계시오?”
“계시오. 한데 이 야밤에 대체 무슨 일이오? 그리고 당신은 대체?”
“후우, 다행이구려. 급히 장주께 드릴 말씀이 있소. 알려 주실 수 있소?”
“지금은 안 된다오. 나중에 날이 밝으면 다시 찾아오시구려.”
문지기는 고개를 저으며 쥐고 있는 창대에 힘을 주었다. 그가 억지로라도 들어오려고 한다면 혼을 쏙 빼놓겠다고 생각하면서.
“정말 안 되겠소?”
“안 되오!”
“하아, 장 씨 아저씨, 나 독고요입니다.”
“아, 글쎄 당신이 독고요건 나발이건 안 되는 건 안 되는… 뭐?”
갑작스레 놀란 문지기가 독고요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간 바라보던 문지기는 또다시 화들짝 놀라며 독고요의 몸을 껴안았다.
“정말 독고요로구나!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그건 나중에……. 일단 장주 어르신 좀 뵐 수 있겠습니까?”
독고요의 말투가 달라졌다. 모르고 지나쳤다면 모를까 알면서도 하오체를 쓸 수는 없었다.
문지기는 독고요의 부탁 어린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그래도 안 돼. 아무리 네 부탁이지만 지금 장주께선 주무시고 계시지 않나? 그런데 어찌 깨울 수 있겠는가?
단호한 그의 말에 독고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자신은 꼭 들어가야 했다.
고개를 숙인 독고요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장 씨 아저씨.”
“응?”
퍽!
문지기의 몸이 뒤로 서서히 넘어갔다. 어느새 독고요가 그의 뒤를 점한 후 뒷목을 내려친 것이다.
독고요는 쓰러지는 그를 받고는 천천히 문지방으로 안고가 앉혔다. 독고요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독고요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문으로 걸어갔다. 이제 저 문을 열게 되면 자신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끼익.
거친 소음과 함께 대문이 활짝 열렸다. 그 순간 독고요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낭… 삼추?”
“결국 오셨습니까?
낭삼추는 건물 앞에 있는 계단에 앉아 독고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삼류 보초 따위의 시선은 언제든지 따돌릴 수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들의 실력을.”
“…….”
독고요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낭삼추가 설마 여기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거기에 그는 홀로 온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혈마대 역시 이곳에 있다는 말과 같았다.
낭삼추를 노려보던 독고요는 주변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장가장은… 이미 멸한 건가?”
“아닙니다. 그들은 편히 자고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럼?”
“예, 아직 살아 있습니다. 당신이 아끼고 항상 바라보았던 장 아씨도 말입니다.”
“……!”
독고요는 다시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낭삼추의 입에서 나온 이름 때문이다.
낭삼추는 그런 독고요의 반응에 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설마 모를 것이라고 여겼습니까? 우린 대주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놈…….”
독고요의 주위로 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살심을 품은 것이다.
독고요는 찢어 죽일 듯 날카로운 눈으로 낭삼추를 바라보았다.
낭삼추는 그의 눈을 응시하다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를 바라보는 낭삼추의 눈에는 슬픔이 내려앉아 있었다.
“대주… 다시 돌아오십시오. 당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비켜라.”
“대주.”
“비키라고 했다.”
독고요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검이 들려 있었다. 평범한 검보다는 짧은 검신을 지닌 검이었다.
낭삼추는 그 검을 보며 눈을 빛냈다. 자신들에게도 지급된 검이었기 때문이다.
“혈아(血牙)…….”
혈아를 뽑았다는 것은 자신들을 적대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오로지 적을 처리할 때만 뽑아 드는 혈아였기에 낭삼추는 눈앞이 아늑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넌 것이다.
숨을 크게 몰아쉰 낭삼추는 이를 악물고는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혈마대는 대주를 깊이 존경하였습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고개를 들어 올린 낭삼추가 양팔을 벌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 두 자루의 검이 쥐어졌다.
“혈마대원은 들어라. 이 시간부로 전 혈마대주, 독고요는 본 궁을 배신했으므로 포획에 들어간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시엔… 사살해도 무방하다.”
“존명.”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낭삼추의 말이었건만 그 말이 들렸는지 사방에서 혈마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있었던가?’
독고요는 그들의 모습에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비키라고 하지 않았느냐!”
독고요가 소리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혈마대원들도 독고요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 역시 모두 검을 빼 든 상태였다. 살기가 장 내에 가득 차올랐다.
카각!
독고요가 내려친 검을 앞에 서 있던 혈마대원이 검을 뻗어 가로막았다. 하지만 독고요는 예상했다는 듯 다른 손으로 상대방의 팔목을 제압하며 그의 품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뭣!”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퍼퍽!
상대방의 복부에 칼자루를 박아 넣은 독고요는 쓰러지는 혈마대원을 옆으로 눕히며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단검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너희의 실력은 내가 잘 알고 있다.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그 자리에서 비켜서!”
“그럴 순 없습니다!”
독고요가 외치자 다른 이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독고요는 눈살을 구기며 크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검기가 다가오는 이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꽝!
검기를 막은 혈마대원들이 뒤로 물러섰다. 상당한 압박이었기 때문이다.
“혈마검기에 이 정도의 위력을 실을 수 있다니… 과연 대주!”
낭삼추는 대원들의 모습에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역시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자신들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너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의 수혈을 짚어 놓아라. 괜히 활개 치거나 도망 다니면 귀찮으니까.”
“존명!”
낭삼추의 말에 뒤에 서 있던 다섯의 인물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낭삼추는 그들을 바라보다 다시 독고요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키란 말이다!”
소리치며 달려드는 독고요의 검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피해라!”
누군가 외치자 혈마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틈을 타 독고요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의 앞에는 낭삼추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독고요의 눈에 살심이 깃들었다.
“비켜! 낭삼추!”
“그럴 순 없습니다.”
기합과 함께 소리친 독고요의 검이 낭삼추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낭삼추는 양팔을 머리 위로 들며 두 손에 들린 검으로 그의 검을 막아 냈다.
꽝!
낭삼추의 신형이 뒤로 밀려 나갔다. 그런 낭삼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비등하다고 여겼건만 그와의 격차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독고요는 물러나는 낭삼추의 모습에도 만족하지 않은 듯 계속해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카각!
옆에서 휘둘러 오는 검을 막은 낭삼추가 다른 손에 들린 검으로 독고요의 목을 노리고 베어 갔다.
독고요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의 검을 피해 내었다. 그때 독고요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얼굴을 노리고 낭삼추의 무릎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파팍!
순간 번쩍이는 빛과 함께 독고요의 신형이 삼 장 뒤로 물러났다. 낭삼추 역시 일 장 정도 뒤로 물러나며 양손을 독고요를 향해 뻗었다.
“후우.”
숨을 몰아쉬는 독고요의 볼이 붉게 물들어 갔다. 낭삼추의 무릎이 스쳐 간 탓이다.
“이때다!”
독고요의 양옆에서 두 줄기의 붉은 빛이 쏘아졌다. 독고요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뒤로 살짝 빼냈다. 그런 그의 검에 붉은 기운이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쏘아지는 검기를 베어 버리고 앞으로 튀어 나갈 생각인 것이다.
“대주! 당신의 생각은 이미 읽히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소?”
“뭣?”
그때 낭삼추의 말과 함께 그의 검에서 붉은 섬광이 쏘아졌다. 그 날카로운 검기는 허공을 자르며 독고요를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독고요의 뒤에서도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그를 둘러싼 혈마대원이 일제히 혈마검기를 날린 것이다.
독고요는 이를 악물며 검에 더욱 기를 몰아넣었다.
우웅!
독고요의 기운을 견디기 힘든 것인지 검이 진동을 일으키며 그의 손안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독고요는 그런 검을 더욱 힘주어 잡고는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며 검을 휘저었다.
꽈르릉!
독고요를 향해 쏘아 오던 혈마검기들이 일제히 소멸되었고, 독고요를 중심으로 땅이 들썩거리며 돌풍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그의 엄청난 위력에 다른 혈마대원들이 튕겨 나갔다.
낭삼추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혈마천복세(血魔天伏細). 혈룡기가 팔 성에 들어선 건가! 헛!”
탄성을 내뱉은 낭삼추는 갑자기 독고요의 신형이 사라지자 헛바람을 들이켜다 옆에서 느껴지는 예기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독고요의 신형이 그의 옆구리를 노리고 쏘아 온 것이다.
낭삼추는 재빨리 다리에 힘을 주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독고요 역시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끈질기게 그를 뒤쫓았다.
“도망가지 마라!”
“빌어먹을!”
독고요의 말에 욕지거리를 내뱉은 낭삼추는 물러나던 다리를 멈추고 강하게 몸을 지탱했다. 그런 낭삼추의 검이 붉게 물들어 갔다.
독고요 역시 낭삼추의 모습에 더욱 힘을 가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빠르기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꽝!
힘껏 내려친 독고요의 검에 낭삼추의 발이 땅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그러자 낭삼추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풀린 낭삼추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미 독고요의 손이 그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퍼퍽!
“컥!”
두 번이나 주먹을 허용한 낭삼추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며 독고요의 허리를 베었다. 그때 독고요가 낭삼추의 어깨를 부여잡고 그의 머리 위로 물구나무를 섰다. 그렇게 그의 뒤로 돌아간 독고요는 몸을 회전시키며 낭삼추의 목을 베어 갔다. 하지만 그의 목 바로 앞에서 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요, 독 대주!”
“……!”
순간 거대한 외침과 함께 독고요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시야에 한 여인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세세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놀랍구려, 독 대주. 엄청난 위력이오.”
장 내를 둘러본 세세호는 휘파람을 부르며 감탄을 터트렸다. 장 내는 파인 땅과 쓰러져 있는 혈마대원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무림인은 세 푼의 실력을 감춰야 한다고 하건만… 독 대주는 오 푼의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모양이오? 예상을 뛰어 넘는 실력이구려.”
“세 장로!”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어 외친 독고요에 의해 검이 파르르 떨리자 낭삼추의 목이 살짝 베어졌다. 그 따끔함에 낭삼추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세세호는 그의 모습에 혀를 찼다.
“쯔쯔. 낭 부대주,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만 꼴이 그게 무엇인가?”
“며, 면목이 없습니다.”
낭삼추의 말에 다시 혀를 찬 세세호는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독 대주, 검을 거두시구려. 이 아리따운 여인의 목에서 붉은 피를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세 장로!”
“어서!”
세세호가 다시 한 번 재촉하자 독고요는 낭삼추의 목에 댄 검을 서서히 내렸다. 낭삼추는 그제야 그에게서 벗어나며 뒤로 물러섰다.
“낭 부대주, 독 대주를 제압하라.”
“…예!”
낭삼추는 세세호의 말에 독고요에게 다가가 그의 무릎을 굽히고 혈을 짚었다.
“큭!”
몸이 뻣뻣해지자 신음을 터트린 독고요는 살기 어린 눈으로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세세호는 그의 눈빛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독 대주, 참 어리석소, 어리석어……. 그냥 본 궁의 명령에 따랐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니오?”
세세호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무릎을 꿇고 아직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독고요를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바로 장영영이었다.
“독 대주는 그것을 아시오? 이 여인은 이미 뛰어난 미모로 인해 혈궁주께서 몇 번이나 얻으려고 했던 여인이라오. 하지만 이 여인은 이미 임자가 있다는 이유로 혈궁주의 제의를 거절했다오. 바로 독 대주 때문에 말이오.”
장영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제야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독고요를 확인한 그녀는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목이 살짝 베이며 핏방울이 맺혔다.
세세호는 잽싸게 그녀의 어깨를 짚으며 그녀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몸을 제압한 것이다.
“하하하! 독 대주, 어떻게 이런 미녀의 마음을 얻으셨소? 대단하구려, 대단해.”
세세호는 장영영의 목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바라보고는 그녀의 목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을 살짝 핥았다. 장영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수치심 때문이리라.
“세세호!”
“오호, 이젠 장로라고도 불러 주지 않는 것이오?”
독고요가 눈을 부릅뜨며 외치자 장영영의 목에서 입을 뗀 세세호가 독고요를 향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린 여기서 독 대주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할 생각이오. 이미 이렇게 독 대주가 제압된 거 강제로라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품위가 없지 않겠소?”
세세호가 낭삼추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낭삼추가 그의 앞에 검을 내밀었다. 독고요의 애병인 혈아였다.
독고요는 그 검을 바라보다 다시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세세호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단전을 파괴하시오. 독 대주가 직접 말이오.”
“……!”
다시 독고요의 눈이 부릅떠졌다. 세세호는 그의 반응이 즐거운지 다시 웃음을 흘렸다.
“대주가 직접 단전을 부순다면 이 장원의 모든 사람을 살려 주겠소. 아, 물론 이 계집도 마찬가지라오.”
세세호가 손을 뻗어 장영영의 턱을 쓸었다. 장영영의 신형이 다시 떨렸다.
독고요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장영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이 잘게 떨렸다. 눈을 꾹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깨달은 것이다.
“어떻소? 하겠소이까?”
세세호가 고개를 들어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그런 세세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세세호는 낭삼추를 향해 시선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낭삼추가 독고요의 점혈을 풀어 주고는 품을 뒤져 한 알의 단약을 건네주었다.
“단전이 파괴될 때의 고통을 줄여 줄 것입니다.”
독고요는 손안에 쥐어진 단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장영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겁이 날 것이다. 따뜻한 사람들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 온 그녀였기에 이런 상황은 처음일 것이다. 그런 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다. 더욱더 강한 무인이 되어서.
“세세호… 약속은 지키는 것인가?”
“남아일언 중천금!”
“…믿겠다.”
독고요는 바닥에 놓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장영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독고요는 이를 악물고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독고요의 손에 들린 검이 복부를 향해 찔러 갔다.
“크윽!”
단약을 섭취하지 않고 그냥 단전을 찔러 버린 독고요는 단전이 파괴되는 고통에 이가 부서지도록 악물었다.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지 않는가?
스으으.
단전이 부서지자 독고요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세세호는 탄성을 내지르며 손을 뻗었다.
“지금이오, 마 장로!”
그때 독고요의 뒤로 한 장년인이 나타났다. 마광이었다. 그는 독고요의 혈을 짚으며 반 자 가까이 되는 붉은 침을 꺼내들었다.
“크흑! 다, 당신은!”
“입을 열면 안 되지.”
자신을 바라보는 독고요에게 말을 건넨 마광은 웃음을 흘리며 그의 아혈마저 점해 버렸다. 그러고는 독고요의 천주혈에 침을 꽂아 넣었다. 그 순간 독고요의 눈이 부릅떠졌다. 단전이 파괴되는 고통보다 훨씬 큰 고통이 그의 뇌리를 강타한 것이다.
독고요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점혈이 되어 있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에겐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독고요는 그 고통에 정신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놓지 못했다.
“독 대주.”
세세호는 그런 독고요에게 다가갔다. 그와 눈높이를 맞춘 세세호는 슬쩍 뒤를 돌아보며 장영영을 바라보고는 다시 독고요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이제 피만 바라보고 원하는 혈귀가 될 것이야. 바로 혈마신의 호위가 될 것이지. 혈마신께서 지상에 강림하는 날 자네는 가장 먼저 구원을 얻게 될 게야. 좋지 않은가? 아, 그리고 약속을 어겨서 미안하지만… 우리가 언제 배신자를 그냥 놓아준 적이 있던가?”
“……!”
“배신은 피로 갚아야겠지.”
딱!
세세호가 손가락을 튕기자 독고요의 눈이 또 한 번 부릅떠졌다. 독고요의 시야에 장영영의 목을 뚫고 나온 검 한 자루가 보였다. 그 뒤에는 낭삼추가 서 있었다. 낭삼추는 그녀의 목에 박힌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검을 따라 붉은 선혈이 솟아올랐다.
“아… 아아…….”
장영영은 힘없이 쓰러지면서도 독고요에게 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장영영이 천천히 독고요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그 손 역시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부르르.
독고요의 몸이 쉴 새 없이 떨렸다. 그의 눈에선 피눈물이 흘러내렸고, 붉은 기운은 더욱더 맹렬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투둑!
“큭!”
마광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분노할수록 강해지는 것이 혈룡기의 특성이기에 그의 기운이 점점 증폭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운은 마광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으으윽!”
마광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독고요의 천주혈에 박힌 침이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혈룡기가 침을 밀어내고 있었다.
마광은 급히 고개를 들어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큭! 이 이상은 힘들 것 같소! 세 장로! 어서 대법을 시전하시오!”
“하지만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잖소!”
“더 이상 기다리다간 아예 기회가 사라질 것이오! 빨리!”
마광의 외침에 세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독고요의 단전에 양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의 장삼이 부풀어 오르며 세세호 역시 붉은 기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드드드!
세세호가 기를 끌어 올리자 독고요의 몸이 더욱더 떨리기 시작했다. 독고요는 시선을 장영영에게 둔 채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압!”
세세호가 기합을 터트렸다. 그가 내공을 흘려 혈룡기를 억누르고 있었지만 혈룡기의 기운은 한 줌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갔다.
드드득!
“이, 이상은 무리오!”
“크윽! 조금만 더!”
마광은 더욱 기를 끌어 올리며 혈룡기의 기운에 대응했다. 그렇게 침을 박아 넣는 한편 재빨리 다른 손으로 품 안을 뒤져 하나의 단약을 세세호에게 넘겼다.
“어서 먹이시오!”
마광의 외침에 세세호는 단숨에 기운을 끌어 올려 독고요의 단전에 몰아넣었다. 그러자 독고요의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그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세세호가 그의 입안에 단약을 넣었다.
콰콰쾅!
그 순간 거대한 기의 폭발과 함께 세세호와 마광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쿠르르!
독고요의 중심으로 돌풍이 몰아쳤다. 거대한 기의 소용돌이.
낭삼추의 신형이 뒤로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미처 그 기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휩쓸렸다가 견디지 못해 쓰러진 것이다.
세세호와 마광은 끈적끈적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에 눈을 빛내며 기운에 맞섰다.
그렇게 기의 소용돌이에 맞서기를 잠시. 장 내가 잠잠해지며 기가 독고요를 향해 몰려들었다.
꿀꺽.
세세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먼지로 가려진 장 내의 중심에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숨기지도 않은 기척. 그리고 그 존재감. 모든 것을 압도하는 기세였다.
“크르르…….”
순간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세세호와 마광은 자신도 모르게 기운을 끌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세세호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예기에 몸을 비틀었다.
“크악!”
세세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몸을 비튼다고 비틀었지만 피하지 못한 것이다.
세세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 세세호의 눈에 자신의 팔을 들고 있는 독고요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안개로 가려진 독고요의 모습이.
“크아앙!”
독고요는 크게 포효를 하며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기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크흑!”
세세호는 미처 그 기운에 맞서지 못하고 튕겨 나가고 말았다. 독고요는 붉어진 눈으로 그런 세세호를 내려다보고는 자신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장영영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그 후 난 그녀의 시신을 묻고 지금까지 혈궁에 복수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다오. 그러다가 이곳에 왔고, 산공독이 든 음식을 먹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었다오. 그리고 내 안에 깃든 힘을 완전히 내 것으로 하려고 하고 있지만…….”
“있지만?”
진철이 묻자 독고요는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오. 살심은 더욱 깊어지고 마음속의 혼란은 가라앉질 않소. 만약 다음에 내가 자제력을 잃고 혈귀에 잡아먹히게 된다면 그땐… 아마 되돌아오기 힘들 것이오.”
“음…….”
진철이 신음을 흘리자 독고요는 진철을 바라보았다.
“내가 혈귀에 잡아먹히게 된다면… 그땐 당신의 손으로 마무리를 지어 주시오. 아무리 혈궁의 잔혹한 무사였던 나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양민을 학살하는… 무인의 법도까지 잊은 놈은 아니라오. 그리고 혈랑파에는 과연 몇이나 되는 혈귀가 있는지 알 수 없소. 분명한 건 나 외에도 있다는 것이오. 그들 역시 꼭 처리해 주시길 바라오.”
독고요의 확고한 말에 진철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에이, 무슨 그런 살벌한 말을…….”
“당신도 무인이라면 알 것이오. 자신의 칼에 깃든 긍지를! 그리고 이성을 잃은 살인마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독고요는 진철의 어깨를 잡으며 눈을 빛냈다.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그렇게 된다면 자네를 도와주겠네.”
“고맙소.”
진철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자 독고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독고요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늘 위에 뭔가 휘날리는 것을 본 것이다. 독고요는 다시 진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붉은 장포를 입은 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소?”
독고요가 다급하게 묻자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이상하게 변했을 때 물러나던데?”
“이런!”
독고요가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어깨 위로 하나의 섬광에 스쳐 지나갔다. 그 섬광이 독고요가 기대고 앉아 있던 벽에 꽂히자 그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뭐, 뭐야 이건?”
진철이 놀라 벌떡 일어나곤 고개를 돌렸다. 금이 생긴 벽에는 붉은색의 검이 꽂혀 있었다.
“혈아.”
독고요가 중얼거리며 그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주인의 손길을 기다렸다는 듯 검명을 토해 냈다.
“그 검이?”
“내 애병이오. 그리고 혈궁에서 뺏은 애병을 건네준다는 것은… 피하시오!”
그때 독고요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두 개의 화살이 그들에게 쏘아졌다. 독고요는 그 화살을 쳐 내려는 진철의 목덜미를 잡고 힘껏 위로 내던졌다. 그리고 독고요 역시 곧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콰쾅!
“크흑!”
날아온 화살이 진철과 독고요가 있던 자리에 꽂히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미처 폭발의 범위 밖으로 벗어나지 못한 진철은 신음을 흘리며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킨 후 사방을 둘러보며 당혹감이 깃든 얼굴로 독고요를 찾았다.
“이, 이게 무슨…….”
“화약이오.”
독고요가 진철의 곁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그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이런 도심 한가운데서 화약을 사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화약?”
진철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무리 무림에 대해서 모른다지만 군과 무림의 관계에 대해서조차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군이 무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무림이 양민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약조를 지켰을 때만이었다. 만약 무림인들이 양민들을 학살하거나 어떤 일로 인해 국가에 피해가 간다면 군은 반드시 무림을 향해 창날을 들이밀 것이다.
거기에 화약은 나라에서만 관리할 수 있게 황제가 친히 명을 내렸던 물품이 아니던가? 그런데 화약을 사용한다는 것은 황제의 명을 어긴 반역과도 같은 일이었다.
“미친놈들!”
진철이 깊숙이 파인 구덩이와 허물어진 담벼락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런 위력을 지닌 벽력탄을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터트렸다면 수많은 사상자를 냈을 것이다.
“칭찬 고맙군!”
그때 진철과 독고요의 앞에 마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광은 폭발의 위력이 마음에 드는지 미소를 지으며 폭발이 일어난 곳을 바라보고는 다시 진철과 독고요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물이 어떤가? 표정이 왜 그러지? 설마 혈귀를 되찾기 위해서 우리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왔을 거라고 여기는가?”
마광은 일그러지는 진철과 독고요의 표정에 웃음을 흘렸다.
“이보게, 독고요, 혈귀를 되찾는다는 것은 계획이 틀어졌을 때 소각시킨다는 것과 같다네. 사용하지 못하는 도구는 곧 쓰레기니까. 쓰레기는 소각시켜야지. 안 그런가?”
“이 자식!”
진철이 마광을 향해 튀어 나갔다. 하지만 마광은 여전히 웃음을 흘리며 품속에서 둥근 물체를 꺼내 가볍게 던졌다.
“피하시오!”
독고요가 부릅뜬 눈으로 외치자 진철이 바닥을 차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러자 둥근 물체가 빛을 뿜으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진철은 벽력탄의 엄청난 위력에 다시 한 번 놀라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광!”
폭발로 인해 가려진 마광을 찾아 독고요가 외쳤다.
“크크크, 이제 시작이야, 이제……. 한번 받아 보거라. 본 궁이 배신자에게 주는 선물을!”
“이 자식!”
진철이 주먹을 말아 쥐며 외치자 마광의 기척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두 개의 화살이 다시 날아들었다. 진철과 독고요는 급히 땅을 박차 오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잡히면 죽을 줄 알아!”
꽈앙!
화살이 진철 일행이 서 있던 자리에 박히자 섬광과 함께 폭발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