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혈궁과 독고요
꽈앙!
“음?”
갑작스러운 폭음에 고개를 돌린 월화는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눈살을 구겼다. 일화 역시 그 연기를 발견하였는지 굳은 표정으로 그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넌 저게 뭐로 보이냐?”
“뭔가 터진 거 같군요. 그리고 이 냄새는…….”
월화의 물음에 답하던 일화가 눈을 감으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코끝으로 매캐한 향이 느껴졌다. 다시 떠진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악마의 피조물이군요. 화약이라 불리는.”
“역시.”
월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경을 극도로 끌어 올렸다. 빙궁에서 사용이 엄격하게 제한된 화약이 사용됐다는 것은 이곳에 자신들의 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신녀님도 부상을 당한 상태 아닙니까?”
“음… 신녀님이 비록 빙정(氷精)을 지니셨다고는 하지만 그러는 것이 좋겠지. 응?”
그때 월화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일화 역시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들의 앞에 한 장년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월화와 일화는 그 장년인이 한발 한발 다가올수록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장년인이 일 장 안에 들어온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흠!”
“큭!”
월화와 일화는 자신들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나며 기를 끌어 올렸다. 갑작스레 돌변하는 그의 기세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장년인은 그런 월화와 일화를 보곤 코웃음 치며 계속 길을 걸어 나갔다.
그렇게 장년인이 인파 속으로 들어가자 월화와 일화는 기운을 잠재우며 그가 사라졌음에도 계속 그곳을 응시했다.
“뭔가… 일어날 것 같군.”
“저도 그럴 거 같습니다.”
월화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월화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북궁아를 보다가 일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일화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는 대도를 월화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공기 중으로 녹아 들어갔다. 상승의 은신술인 것이다.
일화가 완전히 은신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월화는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
탓!
날아드는 화살을 뛰어넘은 진철은 더욱 다리에 힘을 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의 뒤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저 자식들 이곳을 초토화시킬 작정인가!”
진철은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쉴 새 없이 발을 놀렸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잡아내고 싶지만 그렇게 된다면 양민들의 피해가 더욱 커질 것이다.
“일단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해야겠소.”
독고요 역시 같은 생각인지 진철을 향해 말을 건넸다.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독고요와 함께 힘껏 바닥을 차올라 지붕 위로 올라갔다.
“기다렸다!”
“흡!”
그때 낯선 외침과 함께 진철과 독고요의 발밑에서 섬광이 폭발했다.
꽈앙!
지붕의 파편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 바람에 주위에 있던 양민 몇 명이 그 파면에 맞아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벽력탄을 던진 혈마대원들은 그들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진철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죽은 건가?”
“이 미친놈들!”
“응?”
그 순간 들린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들의 시야에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진철과 독고요의 모습이 잡혔다. 혈마대원들은 재빨리 발을 놀려 신형을 뒤로 빼내었다. 하지만 진철의 손이 그보다 빨리 움직였다.
퍽!
“컥!”
“권풍?”
진철의 손에서 뿜어져 나간 권풍에 혈마대 한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아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의 무위에 살짝 놀랐을 뿐, 별다른 반응 없이 그 자리에서 몸을 피했다.
탓!
지붕의 멀쩡한 부분에 착지한 진철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키려는 사내에게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내가 잡히면 죽는다고 했지?”
“큭, 크크크.”
진철이 이를 갈며 말하자 그의 손에 잡힌 사내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진철을 바라보다 슬쩍 시선을 돌려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우, 우리의 승리다, 독고요!”
“뭐?”
사내는 자신의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순간 독고요가 진철을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피하시오!”
“어?”
순식간에 진철의 뒤로 이동한 독고요는 그의 목덜미를 잡고 몸을 빼내었다. 그 순간 홀로 남은 사내의 몸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꽈앙!
“큭. 뭐, 뭐야!”
“…….”
진철은 자신의 얼굴에 묻은 살점을 털어 내며 눈을 부릅떴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독고요는 폭발이 일어난 자리를 바라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방금 자폭한 사내는 자신이 혈마대주였을 때 부하로 있던 사내였다. 같이 한솥밥을 먹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죽이려고 목숨까지 내던지고 있었다.
독고요는 왠지 모르게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 차려!”
그때 진철이 독고요를 힘껏 밀치며 그 자리를 피해 냈다. 그와 동시에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와 꽂혔고, 폭발과 함께 그나마 남아 있던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우어어!”
발밑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낀 진철은 급히 경공을 전개해 떨어져 내리는 잔해를 밟으며 바닥에 내려섰다.
“제길,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아!”
진철은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나머지의 잔재들을 피해 내달렸다. 그의 옆으로 독고요가 따라붙었다. 옷의 이곳저곳이 그을리긴 했지만 치명상은 피한 듯했다.
“이러다가 도시가 초토화되겠소.”
“알아! 그래서 이렇게 도망 다니잖아!”
독고요의 말에 진철이 소리쳤다. 만약 이곳이 도심이 아니라 평지거나 산속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사방으로 검기를 내뿜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눈먼 칼에 죽을 수 있는 평범한 양민들이.
“이쪽으로!”
독고요가 갈림길에서 방향을 틀며 진철에게 외쳤다.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
창밖을 바라보던 마광은 창문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모두 끝마쳤습니다. 이제 덫에 걸리기만 하면 됩니다.”
“좋아.”
마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입에 달았다. 혹시나 몰라 혈사대(血死隊)까지 끌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지 않았다면 일은 지금보다 더욱 복잡해졌으리라.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천운이지. 독고요, 과연 그 운이 어디까지 갈지 내가 친히 봐 주도록 하겠어.”
웃음을 흘리는 마광의 뒤에는 수북하게 쌓인 벽력탄이 놓여 있었다. 마광은 고개를 돌리더니 그 벽력탄들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도록 만들어 주마.”
마광의 웃음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
“제길! 정신이 하나도 없네.”
담벼락에 몸을 숨긴 진철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까 있던 곳보다는 인적이 드물었지만, 그만큼 상대의 공격이 거세질 수도 있었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봉인 줄 알았건만 알고 보니 혹이구먼, 혹이야. 에고, 종 하나 얻어 보자고 이게 뭔 생고생이래.”
“종?”
“그래. 종!”
독고요의 의문에 진철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요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를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 걱정이 없다고 해야 할까?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부럽구려.”
“응? 뭐가?”
“아니요.”
독고요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자 진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신이 이 고생을 하는데 혼자만 즐거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쳇, 그나저나 이젠 어쩔 거야? 상대방은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고 벽력탄을 퍼붓고 있다고.”
“음…….”
진철의 말에 독고요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내 주변을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혈궁도 벽력탄을 많이 가져오진 않았을 것이오. 천금보다 비싼 벽력탄이니 말이오. 아마 처음에 우리들의 기세를 제압하려고 그렇게 쓴 것 같지만 이젠 곧 바닥을 보일 것이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군.”
한숨을 내쉰 진철은 입을 열고는 슬쩍 골목길을 내다보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이상했다. 사람 한둘이 지나갈 법도 한데 지나가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 도심에서 빨리 빠져나가야 할 거요. 벽력탄이 터졌으니 곧 관군이 들이닥칠 것이오. 그러면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수도 있소. 일단 저기 외곽 쪽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소.”
독고요가 손가락을 들어 동쪽을 가리켰다. 진철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꽤 큼지막한 산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까지만 가면 웬만해선 추적을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퍽!
“응?
그때 진철의 눈앞으로 뭔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진철은 식은땀을 흘리며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서, 설마.”
그 구멍을 확인한 독고요와 진철이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닥을 살펴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두꺼워 보이는 철시가 그곳에 박혀 있었다.
슈슈슉!
뭔가가 바람을 빠르게 가르는 소리가 진철과 독고요의 귓가에 울렸다.
진철은 독고요를 한 번 바라보고는 몸을 일으키며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것은 독고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자리를 뜨자 기다렸다는 듯 벽에 구멍이 숭숭 뚫리며 철시가 지면에 박혀 들었다.
“이 미친것들 정말 너무하는 거 아냐!”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버린 담벼락을 벗어나며 진철이 외치자, 그의 말에 대답하듯 다시 철시가 날아들었다. 진철은 급히 머리를 숙였다. 철시가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면에 박혀 들었다.
“기다렸다!”
그때 낯선 목소리와 함께 다시 붉은 화살이 그들에게 쏘아졌다.
“이런 젠장!”
진철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신들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쏜 화살인지, 날아오는 화살은 어느덧 진철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렇다고 검으로 쳐 내기도 뭐했다. 언제 폭발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응? 폭발? 그러고 보니 저 화살!’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분명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은 사마곡의 그 화살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위험!”
진철이 화살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독고요가 달려오는 속도에 더 힘을 가하며 그를 밀쳤다. 그 바람에 진철과 몸이 엉켜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콰광!
그러자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 지면이 움푹 파였다.
“뭐하는 짓이오? 저런 화살을 손으로 쥐려 하다니!”
독고요는 진철의 행동에 얼굴을 구기며 따졌다. 너무 무모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화살의 소리에 급히 몸을 일으킨 독고요는 진철과 함께 앞에 있는 큰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일단은 어떻게든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건물 안으로 들어선 독고요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화염이 자신들을 향해 덮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꽈앙!
엄청난 화염이 객잔 안에서 터져 나오며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자 삼 층으로 이뤄진 건물이 허물어지듯 무너져 내렸다.
턱!
바닥에 내려선 마광은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활활 타오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혈귀와 절정 고수라 하더라도 저 안에서 살아 있을 수 없었다. 쇠조차 녹여 버릴 만한 화력 안에서 사람이 대체 무슨 수로 살아남는단 말인가? 호신강기를 펼쳐도 한순간에 재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끝입니까?”
“그렇겠지.”
마광의 뒤로 수많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 장포를 걸친 혈마대와 혈사대였다.
혈사대는 자신들이 만든 위력에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혈마대는 기이한 표정으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독고요는 과거 자신들의 대장이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웃음을 친 마광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주변을 정리해라. 결코 본 궁의 흔적이 남아서는 안 된다.”
주변을 훑어보자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에 조금만 시간을 지체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기엔 화약도 모자랐고 인원도 부족했다. 재빨리 정리하고 뜨는 것이 상책이었다.
드드드!
그때 고개를 숙이며 마광의 명령에 대답하려던 혈마대와 혈사대가 고개를 들었다. 대지가 미약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광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당혹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무엇이 떠올랐는지 재빨리 몸을 돌려 불타고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투확!
갑자기 불길과 함께 무너진 잔해들이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저… 저… 저!”
마광은 부릅뜬 눈으로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잔해가 솟구친 곳에서 두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철과 독고요였다.
“이 자식들…….”
진철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자색의 기운에 둘린 자하신검이 들려 있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살아남은 것이냐!”
마광이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죽기는커녕 그들의 옷에는 그을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진철은 마광의 말을 무시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 순간 진철의 검에 맺힌 자색의 기운이 더욱 밝은 빛을 발했다.
“궁금하면 일단 맞아!”
“피, 피해라!”
마광과 혈궁 무사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진철은 상관없다는 듯 강하게 팔을 휘둘렀다.
자하신검에 맺힌 기운이 자색의 물줄기로 변하며 지면을 강하게 때렸다.
쿠콰콰쾅!
땅거죽이 들썩이며 구덩이가 파였다. 결코 벽력탄에 뒤지지 않는 파괴력에 마광은 뒤로 물러나면서 절로 입이 벌어졌다. 말도 안 되는 위력이었기 때문이다.
“괴물 같은 놈!”
“뭐?”
바닥에 착지한 진철은 마광의 외침에 다시 팔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자색의 검기가 부채꼴을 그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퍼펑!
검기에 맞은 혈궁 무사들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폭(爆) 결을 이용해 단순히 충격만 주어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내상을 입히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혈사대는 뒤로 물러나 폭열시를 장전하고 혈마대는 앞으로 나서 진을 갖춰라!”
마광이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그러자 혈마대원들이 앞으로 나서며 진철과 독고요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 혈사대가 폭열시를 활에 재기 시작했다.
“흥! 그냥 보고만 있을 줄 아나?”
달려드는 혈마대에게 진철이 마주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다시 검을 횡으로 그었다. 하지만 그 순간 진철의 앞에 있던 혈마대원들이 몸을 옆으로 빼냈다. 그러자 그 틈으로 두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폭열시였다.
진철은 급히 검을 거두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제길!”
독고요는 다시 돌아온 진철을 힐끗 쳐다보았다.
“조심하시오. 이들은 정예라오.”
독고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철은 자하신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 진철의 앞에 혈마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마광은 그 모습에 언제 당황했냐는 듯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이것이 바로 본 궁이 자랑하는 혈마폭열진(血魔爆熱陣)! 한번 받아 보거라!”
마광이 소리치자 진철과 독고요를 둘러싼 혈마대원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독고요는 진철과 등을 마주하며 앞에서 달려오는 혈마대원을 보고는 혈아를 들어 올렸다.
“혈궁의 진법은 사이한 술법이 깃들어 있소! 더군다나 혈마폭열진이라면… 제대로 걸리면 아주 골치가 아파질 테니 최대한 빨리 진을 벗어나야 하오.”
“사이한 술법?”
독고요의 말에 의문을 표하던 진철은 두 명의 혈마대원이 갑작스레 달려들자 미처 대답을 듣지 못하고 급히 몸을 회전시켰다.
“흥! 이런 것쯤… 어?”
핏!
그 순간 진철은 허리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급히 몸을 띄워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자 그가 서 있던 자리로 두 줄기의 섬광이 훑고 지나갔다.
“뭐, 뭐지?”
바닥에 착지한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매만지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공격해 오던 자들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느려졌기 때문이다. 즉, 자신은 그들이 공격하기 전에 피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움직임을 멈추자 그들의 움직임은 상반되게 갑작스레 빨라졌다.
“환술이오!”
“환술?”
“그렇소.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갑작스레 빠르게 보이게 한다든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느리게 보이도록 하는 술법이 이 진에 숨어 있소. 하지만 이 진의 진정한 모습은… 흡!”
말을 하던 독고요가 갑자기 혈아를 바닥에 꽂으며 기합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의 전방으로 부채꼴의 붉은 기운이 바닥에서 터져 나왔다. 그 바람에 그에게 달려들던 혈마대원이 그를 공격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술법 따위로는 이 몸을 어찌할 순 없어! 술법 따위!”
얼굴을 잔뜩 구긴 진철이 외쳤다. 복잡하고 머리 아픈 건 질색이었다. 자신은 단순하게 살고 싶었다. 그렇기에 행동도 단순했다.
“모조리 부숴 버리면 돼!”
진철이 내공을 끌어 올리자 검집에 들어 있는 자하신검이 진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진철은 신경 쓰지 않고 공중으로 떠오르며 강하게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자하신검에 맺혀 있던 자색의 강기가 수십 다발로 변하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때 진철의 앞에 있던 혈마대원들의 모습이 지워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콰콰쾅!
강기 다발이 대지를 강타하자 기의 폭발과 함께 먼지가 솟아올랐다. 바닥에 내려선 진철은 허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그런 진철의 양옆으로 두 개의 예기가 빠르게 다가왔다. 진철은 급히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등 위로 스쳐 지나가야 할 예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코앞에 두 발의 화살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꽝!
‘이번에야말로 해치웠다!’
폭발하는 폭열시를 바라보는 마광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똑똑히 본 것이다. 폭열시가 진철의 코앞에서 터진 것을.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저 거리라면 절대 피하지 못하리라.
“크크크, 혈마폭열진은 환술로 혼란시키고 폭열시의 파괴력으로 적을 몰살하는 것이 목적인 진법! 결코 절대 고수라 하더라도 이 진 안에서 멀쩡하진 못할 것이다.”
“아, 그래?”
“……!”
마광의 눈이 크게 떠졌다. 대체 오늘 하루 만에 몇 번이나 놀라는 것일까?
마광의 눈에 화염이 걷히며 서서히 드러나는 진철의 모습이 들어왔다. 옷가지가 살짝 그을렸을 뿐 별다른 상처가 없어 보이는 모습에 마광은 경악하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 정말 괴물이란 말인가?”
“뭐?”
마광의 말에 눈을 치켜뜬 진철은 목을 비틀어 관절을 풀었다.
뒤에 서 있던 독고요는 그런 진철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따뜻하면서도 뭔가 이질적인 기운. 따뜻함에 이끌려 손을 뻗으면 베어 버릴 것 같은 기운에 화염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진철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대체 그 기운은 뭐란 말인가?’
사이한 기공과 술법이 가득한 혈궁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기운이었다.
“그나저나 대단해. 나한테 두 번이나 ‘그’ 기운을 사용하게 만들다니. 보답을 해 줘야겠는데……. 말했지? 잡히면 죽일 거라고. 나 지조 있는 남자야. 한번 말한 건 꼭 지킨다?”
진철은 자하신검을 어깨에 걸치며 입을 열었다. 진철의 신형이 앞으로 늘어지는 엿처럼 뻗어 나갔다.
“피해라!”
진철의 빠른 움직임에 소리친 마광은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벽력탄을 진철에게 던지며 몸을 빼내었다. 그리고 혈마대와 혈사대 역시 마광을 따라 재빨리 몸을 날렸다.
“도망가지 말라고!”
진철의 검이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벽력탄에 매달린 심지 중간이 베어지며 벽력탄은 터지지 않고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그때 독고요가 다급하게 진철을 붙잡았다. 진철은 얼굴을 구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사람들이 너무 많소. 더 이상 저들과 격돌하게 된다면 필시 피해가 커질 것이오. 일단 계획대로 저 산으로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내가 살아 있는 한 저들의 추적은 계속될 테니 말이오.”
독고요의 말에 진철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속되는 벽력탄 공격에 집이 몇 채 무너져 있었고 화염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파편에 맞아 이곳저곳이 다친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모두 무림과 관계가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젠장!”
진철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주변이 이렇게 되도록 가만히 놔둔 자신에게 화가 났고, 간접적으로나마 다른 이들을 다치게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응?”
그런 진철의 얼굴에 의문이 생겼다. 그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곳을 잠시 바라보던 진철은 그들을 확인하자 잔뜩 얼굴을 구겼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여겼다.
“그럼 일단 저 산으로 가. 난 잠깐 볼일 좀 보고 따라가도록 하지.”
“볼일이라니. 무슨 말이오?”
“아, 글쎄 좀 가 있으라고. 앙?”
“…….”
눈을 부라리며 말하는 진철의 모습에 독고요는 그를 잡아챈 팔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몸조심하시오.”
“아아.”
독고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철은 곧바로 바닥을 차 몸을 날렸다.
독고요는 그런 진철을 바라보다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그와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진철과 독고요가 사라지고 잠시 후 멀리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
“제길, 대체 무슨 일이야? 전쟁이라도 일어난 건가?”
북궁아를 업고 달려가던 월화는 또다시 터진 폭음에 얼굴을 구겼다. 북궁아는 어디서 다쳤는지 상처를 입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마을 곳곳에서는 큰 폭음이 계속해서 들렸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혀를 찬 월화는 잠시 걸음을 멈춘 뒤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달려 나갔다.
‘어서 빨리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해. 이곳은 너무 위험해.’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그 본질은 사람이었다. 벽력탄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면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사실. 그렇기에 월화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긴장을 푸는 순간 멀리서 들리는 폭음이 자신의 코앞에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응?”
그때 월화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멈추며 공중으로 높이 도약했다. 그런 월화의 발밑으로 경풍이 휘젓고 지나갔다.
“큭, 뭐지? 적인가!”
건물의 지붕 위에 내려선 월화는 고개를 돌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꽤 빠른데?”
“……!”
월화의 몸이 순간 회전하며 그의 팔이 푸르게 물들었다. 뒤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팡!
“아닛!”
월화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비록 내공을 급히 끌어 올려 그 위력이 감소되었다고는 하나 쉽게 막을 만한 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내는 그 기습을 손쉽게 한 손으로 막고 있었다.
“정말 급해 죽겠는데 일이 자꾸 꼬이네.”
월화의 주먹을 잡고 있는 사내가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약간 그을린 옷을 입고 어수룩하게 생긴 사내. 진철이었다.
“넌 누구냐!”
“그건 내가 물을 말… 웃차!”
월화의 말에 대답하던 진철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푸른 섬광이 훑고 지나갔다. 은신해 있던 일화가 진철을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일화는 너무나 쉽게 피한 그의 반응에 놀란 듯 황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고수!’
일화는 월화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왔다.
“자, 그럼 일단은…….”
진철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갑작스레 달려들었다.
팡!
진철의 주먹이 허공을 강타했다. 그리고 일화의 신형이 옆으로 꺾여 있었다. 피한 것이다.
‘빨라!’
“호, 제법인데! 하지만 나도 바쁘다고!”
놀랍다는 듯 감탄을 터트린 진철은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그러자 지붕이 울리며 일화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를 제압하기에는.
진철은 일화가 무의식적으로 뻗어 오는 주먹을 마주 잡으며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리를 걸자 일화의 몸이 일순간 공중에 떠올랐다. 진철은 그의 몸을 그대로 밑으로 내리꽂았다.
쿵!
“큭!”
등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일화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진철은 그런 일화의 목을 누르며 월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내놓지 않으면 얜 죽어. 어쩔래?”
“……!”
월화는 뒤로 한 발 물러나며 일화를 바라보았다. 일화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진철을 노려보다 월화를 향해 소리쳤다.
“전 괜찮습니다! 어서 자리를 피하십쇼.”
“하지만!”
“어서!”
월화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일화와 자신은 대주와 부대주 이상의 관계였다. 단 하나밖에 없는 친구이자 형제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도망가라고 하고 있었다.
“어서!”
일화가 다시 외쳤다. 월화는 고개를 돌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벗어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 순간 진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논다. 누가 보내 준데?”
“큭!”
진철이 손에 힘을 주자 일화가 신음을 터트렸다. 월화가 그 모습에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진철의 신형이 빠르게 쏘아졌다. 월화는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으나 그보다 진철이 더 빨랐다.
퍽!
“컥!”
복부에 진철의 주먹이 틀어박히자 월화는 신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진철은 그런 월화의 등에 매달린 북궁아를 뺏어 안으며 뒤로 몸을 날렸다.
진철은 북궁아의 맥을 짚었다. 맥박이 정상으로 뛰는 것이 느껴졌다.
“후우, 다행이네.”
진철은 북궁아의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신녀님께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
월화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잔뜩 구긴 상태에서 소리쳤다. 상대가 너무나 강했다. 그의 앞에서 자신과 일화의 무위는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신녀?”
“그렇다!”
진철의 얼굴이 괴기하게 변했다. 그러고는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분명 빼어난 미모에 범상치 않은 무공 실력을 지닌 그녀였다. 그런데 신녀라니?
“그분은 우리 북해빙궁의 신녀님이란 말이다! 설마 그것을 모르진 않겠지?”
“…….”
진철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북해빙궁의 신녀라니? 북해빙궁은 진철도 들어서 잘 알고 있다.
북해의 절대 패자인 북해빙궁. 그들의 영향은 북해를 넘어 이 중원까지 닿고 있지 않은가?
“그럼 너네는 누군데?”
진철의 물음에 월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난 신녀님을 수호하는 신녀수호대의 대주 월화다! 더 이상 신녀님께 손을 대었다간 용서치 않으리라!”
“…….”
월화는 진철을 향해 검을 뽑아 들며 자세를 잡았다. 어떻게든 북궁아를 돌려받겠다는 기세가 그의 온몸에서 피어났다. 진철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북궁이라……. 하지만 쉽게 믿을 수는 없겠지.’
생각을 정리한 진철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러다 너 죽을 수도 있어. 그래도 덤빌 거냐?”
“물론! 그것이 수호대로서의 운명!”
“호, 그래? 생각보다 뼈대가 있는데?”
“문답무용!”
월화가 진철을 향해 뻗어 갔다. 그의 검이 진철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진철은 머리를 살짝 틀어 그의 검을 피해 냈다. 그 순간 월화의 검이 방향을 바꿔 진철의 머리를 베어 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진철은 살짝 몸을 뒤로 빼며 간단하게 피했다. 그러고는 한 손을 뻗어 쉽게 월화의 손을 제압했다. 검을 쥔 손을 잡은 것이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흡!”
진철은 제압한 손을 뻗으며 월화의 다리를 걸었다. 그 순간 월화가 공중으로 도약하며 다른 한 손으로 진철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진철은 살짝 얼굴을 구기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잡은 손을 밑으로 강하게 당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균형을 잃은 월화가 진철의 뒤로 넘어가며 엎어졌다.
“그럼 이야기를 들어 볼까?”
진철은 월화의 손에서 뺏어든 검을 그의 목에 가져다 대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북해빙궁에서 신녀가 가출했는데 그 신녀가 여기 있는 북궁아고, 너희는 이 애를 찾기 위한 수색대라고?”
“북궁아라니! 어디 감히 신녀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
진철은 살짝 얼굴을 구겼다. 월화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기 때문이다.
진철은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녀가 자신을 따라다닌다면 무림행이 즐거울 것이다. 혼자보단 둘이 낫고 둘보단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게 낫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면 북궁아와 떨어지기 싫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거기에 자신과 함께 다닌다면 또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다.
“되돌려 보내는 편이 낫겠지.”
“뭐?”
진철의 중얼거림에 월화가 눈을 치켜떴다. 진철은 고개를 들다 월화의 눈빛에 얼굴을 다시 구겼다.
“계속 그렇게 치켜뜨면서 쳐다보면 맞는다?”
“…….”
월화는 슬쩍 진철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대체 북궁아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북궁아는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후우.”
다시 한숨을 내쉰 진철은 꾸부정하게 구부린 허리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가.”
“뭐?”
“데려가라고.”
“…….”
진철은 북궁아를 월화에게 건넸다.
월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북궁아를 받아 들고는 진철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깨어나면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고 해. 다 큰 처자가 가출이 뭐냐? 가출이.”
입을 연 진철은 월화에게서 등을 돌리며 지붕 위를 걸었다. 월화는 왠지 그의 어깨가 처졌다고 생각했다.
진철은 다시 고개를 돌려 북궁아를 한 번 바라보고는 지붕위에서 몸을 날렸다.
***
“으음…….”
북궁아는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북궁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살짝 아파 왔다. 북궁아는 손을 들어 머리를 잡고는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
북궁아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아! 깨어나셨습니까?”
그때 등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눈치챈 건지 월화가 달리다 말고 걸음을 멈춰 섰다. 일화 역시 월화에게 다가와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북궁아는 월화와 일화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얼굴을 구겼다.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것이 이유였다.
“여기는 대체.”
“아, 지금 본 궁으로 신녀님을 모시고 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상처가 있으셔서 일단 의원을 찾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
월화는 북궁아가 완전히 정신 차리자 그녀를 내려놓았다.
북궁아는 바닥에 발을 딛자 살짝 비틀거렸지만 곧 균형을 잡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월화와 일화에게 꽂혔다.
“너희가 여긴 어쩐 일이지?”
“본 궁에서 신녀님을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북궁아의 말에 월화와 일화가 부복을 하며 입을 열었다. 북궁아는 그들의 대답에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문뜩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북궁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은 보지 못했느냐?”
“어떤… 아! 혹시…….”
월화는 북궁아에게 한정의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북궁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알고 싶은 인물은 한정이 아니라 진철이었기 때문이다.
“아, 또 한 명이 있었습니다. 어수룩하게 생긴.”
북궁아의 눈이 반짝였다. 월화는 그녀의 눈빛에 진철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야기를 끝낸 월화는 북궁아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신녀님을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신녀님, 그와 무슨 관계이신 겁니까?”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혹시 아느냐?”
“예?”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묻고 있느니라.”
북궁아는 월화의 질문을 무시한 채 그에게 물었다. 월화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팔을 들어 손을 뻗었다. 그가 가리키는 손끝에 큰 산이 하나 걸려 있었다.
“저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래? 일화.”
“예!”
북궁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일화를 불렀다. 일화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북궁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일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북궁아가 뻗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신녀님!”
일화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북궁아의 손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이 쉴 새 없이 떨렸다. 감격스러웠기 때문이다.
일화는 북궁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그런 그의 눈에 일그러진 북궁아의 표정이 들어왔다.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은 일화는 재빨리 손을 내렸다.
“도.”
“아.”
그제야 그녀가 바라는 것을 알아챈 일화는 자신의 손에 들린 대도를 북궁아에게 건네주었다.
북궁아는 도를 쥐고는 허공에 두어 번 휘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월화와 일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잘 계시느냐?”
“예. 물론 정정하십니다. 궁주님과 궁후님께서도 하루빨리 신녀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 알았다. 너희는 먼저 궁에 가 있도록 해라.”
“예?”
북궁아의 말에 월화와 일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말 때문이다. 그동안 그녀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가. 그런데 먼저 가라니.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북궁아는 몸을 돌려 월화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 신녀님!”
월화가 그녀의 행동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 북궁아가 다시 고개를 돌려 월화를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볼에 살짝 홍조가 그려졌다.
“돌아가서 신랑감을 데려가겠다고 그리 말씀드려라.”
북궁아의 신형이 월화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사라진 것이다.
월화는 재빨리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랑감… 이라니?”
뭔가에 홀린 듯한 일화의 말에 월화는 눈을 부릅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
진철을 피해 몸을 숨긴 마광의 얼굴은 괴기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진철의 무위 때문이었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개뼈다귀 같은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신에 지닌 무공은 괴물과도 같았다. 폭열시마저 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지 않았던가?
‘제길, 내가 나서도 질 것 같은데.’
마광은 자신을 결코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아무리 절정 고수라고는 하나 자신은 혈궁의 장로직을 무공보단 지식으로 얻었다. 그렇기에 빠질 수 있으면 빠졌고 능력 밖의 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 자신의 감이 알리고 있었다. 그는 위험하다고.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그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마광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떠오른 것이다. 독고요와 진철, 둘 모두를 처리할 방법이.
마광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물체가 손안에 느껴진다.
“크크크, 기대가 되는구나.”
담벼락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마광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
양박산은 부하들을 이끌고 거리를 수색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혈룡파 문주인 양호각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다 큰 나이에, 그것도 부하들 앞에서 들은 잔소리는 양박산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길, 이놈들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대주님!”
양박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한 사내가 양박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였다.
“뭐냐?”
“저기…….”
그 사내는 뒤를 돌아 손을 뻗었다.
양박산은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양박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 양박산의 눈에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바로 독고요였다.
독고요는 혹시 모를 추적자를 주의하며 건물의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발각되어 여기서 포위라도 된다면 그땐 정말로 이 지역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독고요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폭발 때문인지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모두 불안해하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만약 그놈이 다시 나온다면…….’
독고요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공을 사용했더니 가슴이 진정되질 않고 벅차게 뛰고 있었다.
독고요는 얼굴을 살짝 구기며 다시 이동했다.
“여어!”
그때 독고요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독고요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거리를 벌렸다.
“난 참 운이 좋아. 네놈을 여기서 보다니 말이야.”
“당신은?”
독고요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귀찮은 상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양박산이었다.
양박산은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독고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 걸친 창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거 아나? 내가 네놈 때문에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나를 놓아주시오.”
“그럴 순 없지. 애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했는데 어떻게 풀어 주겠어? 그건 그렇고, 다른 연놈들은 어디 갔지?”
양박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있는 사람은 독고요 한 명뿐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뭐, 상관없겠지. 일단 네놈이라도 데려가야겠어.”
“그냥 못 본 척해 주면 안 되겠소? 쓸데없이 다치게 하긴 싫소.”
“하!”
독고요의 말에 양박산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알기로 그의 무공 수위는 그야말로 삼류 그 자체였다.
양박산은 눈을 빛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랑 장난하나? 쳐라!”
양박산이 외치자 그의 주위에 있던 사내들이 독고요를 향해 달려들었다.
독고요는 입술을 깨물며 혈아를 꺼내 들었다. 조용히 지나가긴 글렀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끝내야 했다.
“칫!”
독고요는 생각을 정리한 후 강하게 바닥을 차 앞으로 튀어 나갔다. 순식간에 무사들의 곁으로 다가간 독고요는 검을 뻗어 바로 앞에 있는 무사의 어깨를 찔러 갔다.
“크헉!”
무사는 독고요의 순간적인 빠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어깨에 검을 허용하고 말았다.
“흡!”
독고요는 무사의 어깨에서 검을 빼면서 진각을 밟았다. 그러고는 어깨로 그의 가슴을 밀쳐 냈다.
독고요의 어깨가 무사의 가슴에 박혀 들자 사내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그때 독고요의 양옆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다가왔다.
독고요는 바닥을 차 공중제비를 돌았다. 독고요의 발밑으로 다른 귀룡대원의 검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상대의 공격을 피한 독고요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몸을 숙여야 했다. 그의 등 뒤에서 다가오는 날카로운 예기를 느낀 것이다.
“죽어!”
독고요의 등 뒤로 검이 훑고 지나갔다. 그는 몸을 회전시키며 팔을 휘둘렀다.
퍽!
“큭!”
귀룡대원의 복부에 검병이 틀어박히자 그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그 모습에 독고요가 번개처럼 그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귀룡대원의 신형이 순간 공중에 떠올랐다. 그렇게 바닥에 쓰러진 그는 정신을 잃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단숨에 두 명의 귀룡대원을 쓰러트린 독고요는 슬쩍 뒤로 물러섰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박동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내공을 쓰면 쓸수록 박동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한 번에 처리한다!’
아직 다섯 명이 남은 것을 확인한 독고요는 입술을 깨물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일수에 끝내기 위함이었다.
“흡!”
독고요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가 변하자 양박산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흐합!”
독고요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독고요가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거대한 진동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일순간 귀룡대원 다섯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치 땅이 그들을 튕겨 내듯 올려 쳤기 때문이다.
“위험해!”
양박산이 크게 소리치며 창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다. 그의 눈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혈아를 휘두르는 독고요의 모습이 잡혔다.
쾅!
거대한 충격음이 퍼지며 충돌의 여파로 인해 돌풍이 몰아쳤다.
“큭!”
강기를 휘두른 독고요가 무릎을 꿇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박동은 단순한 느낌을 떠나 고통까지 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먼지가 걷히자 장내에는 한 사람만이 서 있었다. 양박산이었다.
독고요가 강기를 뿌릴 때 양박산 역시 모든 내공을 끌어 올려 창으로 그 강기를 내려친 것이다. 하지만 창에 실린 위력만으로는 독고요의 강기를 버텨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독고요가 강기를 완전히 뿌린 게 아니라 도중에 거둬들였기 때문이다.
“커헉!”
양박산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들고 있던 창은 부러져 창대만 남아 있었고,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양박산의 눈에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렇게 강맹한 기운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독고요는 천천히 양박산을 향해 걸어갔다. 양박산은 독고요가 다가오자 뒷걸음질 쳤다.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거대한 거인과도 같았다.
“오, 오지 마!”
“…….”
“오지 말라고!”
양박산이 외쳤지만 독고요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양박산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다 발뒤꿈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으아아…….”
양박산의 입에서 기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다가오는 독고요의 모습은 양박산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그 순간 양박산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 어떤 아낙이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박산은 어디서 힘이 난 것인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험하오!”
양박산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그의 의중을 파악한 독고요가 외쳤다. 하지만 이미 양박산은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간 뒤였다.
양박산은 아낙을 제압하자마자 품에서 단도를 꺼내 그녀의 목에 대었다.
아낙은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다 목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연신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양박산은 웃음을 흘리며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다가오지 마!”
“놓아줘.”
“다가오지 말라고!”
독고요가 한 발 다가서며 입을 열자 양박산이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독고요는 그 자리에 멈춰서 양박산을 주시했다. 그때 독고요의 눈이 부릅떠졌다. 양박산의 옆으로 한 장년인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마광이었다.
독고요가 양박산의 부하들과 일전을 벌이는 사이, 그를 발견한 마광은 주변에 은신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가 지금 찾아왔다.
“크크큭, 정말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로군.”
마광은 웃음을 흘리며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마광!”
“내가 말했던가? 자넨 그 약한 마음 때문에 언젠가 고생하게 될 거라고. 크큭, 혈궁의 무사가 웬 정파 흉내를 낸단 말인가?”
마광은 양박산을 바라보았다. 양박산은 갑자기 나타난 그의 모습에 얼굴을 구겼다.
“당신은…….”
“네놈은 몰라도 된다.”
“뭣?”
양박산이 눈살을 구겼다. 마광은 그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고는 독고요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이제 전에 했던 것을 계속해야겠지?”
“마광!”
마광의 말에 독고요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 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마광은 독고요의 움직임에 재빨리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붉은색이 감도는 수정이었다. 혈귀를 조종하는 그 수정을 마광은 혈정이라 불렀다.
“이미 늦었어!”
우웅!
마광이 혈정을 앞으로 내밀자 갑자기 빛을 뿜으면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독고요는 움직임을 멈추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엄청난 고통이 뇌리를 강타한 것이다.
“끄아아…….”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고통에 독고요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크크크, 이로써 완벽한 혈귀가 탄생할 것이다! 네놈의 자아는 파괴되고 명령에만 따르는 살인 병기가 될 것이란 말이다!”
마광이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고통에 몸서리치는 독고요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가닥가닥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독고요의 몸을 묶듯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를 강하게 문 독고요의 입에서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크윽, 끄으. 마, 마광!”
독고요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광을 노려보았다. 마광은 그의 모습에 놀랍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저항하는 건가? 혈룡기의 폭주를? 대단하군, 대단해.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끄으으!”
혈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자 독고요의 몸이 활처럼 꺾였다.
“이게 무슨!”
그때 장내로 한 인영이 나타났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독고요를 바라보는 이는 진철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호오, 네놈도 왔는가? 일부러 찾아와 주다니 좋군.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보아라. 혈귀의 탄생을!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절대 고수에 버금가는 혈귀의 앞에서는 절망을 맛볼 것이다.”
마광은 웃음을 흘리며 진철을 바라보고는 다시 독고요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 어서 혈룡기를 받아들여라! 그리하여 혈마신의 호위가 되어 세상을 피로 물들여라!”
“끄아아아!”
혈정의 진동이 강해졌다. 그에 따라 독고요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기운 역시 강해졌다. 하지만 독고요는 여전히 정신을 놓지 않으며 혈룡기에 대항했다.
혈룡기에 잡아먹힌다면 본래대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더군다나 장영영의 복수조차 못하고 이대로 사라질 순 없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
양박산은 독고요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며 혼비백산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독고요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너무나 기분 나빴다. 검붉은 기운은 피를 연상시켰고 그 기운이 커질수록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오는 것 같았다.
“사, 살려 주십쇼. 끄룩!”
양박산의 품에 안겨 있는 아낙이 소리쳤다. 그녀는 눈이 까뒤집어졌고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다. 일류 고수인 양박산조차 그 기운에 견디기 힘든데, 아무런 무공을 익히지 못한 그녀에게 독고요가 내뿜는 기운은 그야말로 독과도 같았다.
“큭, 더럽게!”
양박산은 아낙의 침이 자신의 팔뚝에 묻자 그녀를 밀치며 그녀의 목에 단도를 꽂아 넣었다. 그러자 아낙이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으아아아!”
그때 독고요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독고요를 향했다.
문뜩 독고요의 눈에 쓰러진 아낙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독고요의 눈에 들어온 아낙은 장영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