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3장 (14/29)

제13장

혈귀(血鬼)

후웅!

독고요의 주위로 돌풍이 몰아쳤다. 모든 이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바람이 진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바람에 실려 온 혈향 때문이었다. 그 비릿한 혈향이 진철의 머리를 쭈뼛 서게 만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데.”

진철이 중얼거리며 자하신검에 손을 가져갔다. 차가운 검병이 손안에 느껴졌다.

한편 그와 다르게 마광은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완성한 것이다. 혈귀를.

마광의 손에 들린 혈정이 은은하게 빛나며 약한 진동을 내뿜고 있었다. 마광은 그 진동에 무척 흡족해했다. 혈귀를 조종하는 돌인 혈정을 쥐고 있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슈학!

“헉!”

그때 먼지구름을 뚫은 붉은 기운이 마광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광은 당혹감을 터트리며 뒤로 물러났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끄악!”

마광의 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허리의 반이 뜯겨져 나간 양박산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양박산의 다리가 서서히 굽혀졌다.

슈학!

다시 한 번 먼지구름을 뚫고 붉은 섬광이 쏘아졌다.

퍽!

양박산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머리가 사라진 그의 몸이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마광은 침을 삼키며 독고요가 있는 방향을 주시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격이었다. 그리고 강력했다. 과연 자신이라면 받아 낼 수 있을까?

“장로님!”

그때 마광의 주위로 혈마대와 혈사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독고요를 찾다 사이한 기운에 이끌려 온 것이다.

“장로님, 대체 이 기운은?”

혈사대주가 마광에게 물었다. 하지만 마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먼지구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선을 떼는 즉시 양박산을 날려 버린 일격이 자신에게 날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독고요를 가렸던 먼지구름은 붉은 섬광 덕인지 서서히 걷어졌다. 그러자 독고요의 모습이 나타났다.

붉은 안개에게 보호받듯 휩싸여 있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광을 바라보았다.

후웅!

그 순간 독고요의 몸에서 거대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너무나 강한 기세에 마광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혈사대와 혈마대는 독고요가 내뿜은 기운에 자신들도 모르게 무기를 빼 들었다. 그러고는 혹시 모를 위험에서 마광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둘러쌌다.

“으으.”

혈마대원 중 한 명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는 독고요의 기세에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독고요와 눈이 마주치자 그 혈마대원은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뿜어내었다. 약한 이의 몸부림이었고 공포를 이겨 내기 위한 허세였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팟!

마광의 눈이 부릅떠졌다. 독고요의 신형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파삭!

그때 수박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릿한 혈향이 주변을 물들였다. 마광과 다른 이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독고요가 한 혈마대원의 머리에 주먹을 쑤셔 박고 있었다.

독고요는 그의 머리에서 손을 빼내더니 뇌수와 피로 물든 자신의 손을 살짝 핥았다.

“으으으.”

“괴, 괴물인가!”

너무나 괴이하고 구역질 나는 그 모습에 혈궁의 무사들이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눈에 공포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독고요가 자신들의 동료를 공격했을 때 기척조차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공격이 자신들에게 향했다면 자신들 역시 죽는지도 모르고 허무하게 죽었을 것이다.

독고요는 자신의 손을 계속 핥더니 끝내는 손가락까지 빨았다. 손에 있는 모든 피를 핥아 먹은 것이다. 그렇게 모든 피를 빤 독고요가 고개를 들었다.

혈궁의 무사들과 독고요의 시선이 중앙에서 만났다. 그 순간 독고요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진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단 한 단어로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학살.

독고요의 신형이 사라질 때마다 혈궁 무사 한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붉은 안개에 둘린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피의 사신 그 자체였다.

“으아아!”

한 명이 겁에 질린 나머지 실성했는지 비명을 지르며 독고요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독고요가 손을 뻗는 순간, 그의 손에서 나간 붉은 섬광이 사내의 검을 부숴 버림과 동시에 머리를 날려 버렸다.

“제, 제길! 폭열시를!”

혈사대 몇몇이 폭열시를 꺼내 독고요를 향해 재었다. 하지만 그들은 눈을 부릅뜨며 그 자리에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독고요가 순식간에 그들에게 뻗어 나간 것이다. 거기에 너무나 빠른 몸놀림에 조준을 하지 못했다.

슉!

한 명이 실수인지 폭열시를 쏘았다.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기에 폭발한다면 다른 이들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꽝!

“끄악!”

“사, 살려 줘!”

폭열시의 화염이 독고요를 강타한 순간 근처에 있던 다른 이들 역시 화염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폭열시를 쏜 사내는 동료들의 상태는 관심도 없다는 듯 독고요를 맞혔다는 사실에 괴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어느새 절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화염이 흔들거렸다.

슈학!

“컥!”

화염을 뚫고 붉은 인영이 폭열시를 날린 사내의 목을 움켜쥐었다. 사내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느낌이었다.

사내의 목을 움켜쥔 상태에서 뜯어 버린 독고요는 다른 손으로 쓰러지는 사내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독고요의 팔을 타고 사내의 피가 흘러내렸다.

독고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키키킥.”

독고요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가 웃는다면 아마도 저런 웃음소리일 것이다.

혈궁의 무사들은 독고요의 웃음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들 사이로 다시 붉은 섬광이 몰아쳤다.

“비, 빌어먹을! 이게 대, 대체!”

마광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분명 자신이 혈정을 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 독고요는 마광의 의지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있었다.

마광은 다시 한 번 내공을 끌어 올려 혈정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혈정이 붉은 빛을 뿜으며 진동했다.

“크륵!”

순간 독고요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런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마광을 향해 눈을 돌렸다. 독고요와 마광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크르르.”

독고요의 입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이 더욱더 붉어졌다.

웅웅!

“이, 이런!”

마광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독고요와 눈이 마주친 순간 혈정이 엄청난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혈정에서 흘러나온 보이지 않는 밧줄에 묶여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파삭!

혈정의 진동이 더욱 심해지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독고요 역시 더욱 괴기한 소리를 흘리며 몸서리쳤다.

“제길! 지금이다! 폭열시를 쏴라!”

마광이 다급하게 외쳤다. 더 이상 혈정으로 그를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체 이유가 무엇이기에 유독 독고요만 이렇게 혈정의 제어를 벗어나려 한단 말인가? 다른 혈귀들은 전혀 이렇지 않았다.

슈슉!

폭열시 두 발이 독고요를 향해 날아갔다. 그 폭열시의 기척을 느꼈는지 몸서리치던 독고요가 머리를 치켜들고는 눈을 내리깔며 폭열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붉은빛이 더욱 강해졌다.

그와 동시에 폭열시가 독고요의 몸에 작렬했다.

꽝!

빠각!

독고요의 몸이 화염에 휩싸이자 혈정이 깨지며 먼지로 변해 버렸다.

마광은 혀를 차며 전방을 주시했다. 혈정이 깨졌다는 것은 곧 그 혈정에 제압된 혈귀가 죽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혈귀와 혈정은 심령(心靈)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응?”

그때 먼지로 변한 혈정이 바람에 날리듯 독고요가 있는 자리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마광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흡!”

마광이 눈을 부릅뜨며 몸을 뒤로 젖혔다. 본능적으로 한 움직임이다. 그런 마광의 위로 붉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강기 덩어리는 마광의 뒤에 있던 혈궁의 무사들에게 작렬했다. 폭발음과 함께 그들의 몸이 터져 버렸다.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은 마광은 섬뜩한 느낌에 그들의 죽음을 확인할 새도 없이 몸을 회전시켰다.

꽝!

가까스로 마광이 피해 내자 붉은 강기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마광은 몸을 굴리며 재빨리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바닥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독고요는 허리를 펴고는 머리를 하늘 위로 올린 채 눈만 돌려 마광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혈정의 제어를 벗어난 거지? 대체 이유가 무엇이냐!’

마광은 속으로 외치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양팔에 붉은 강기가 둘러졌다.

“키키킥!”

그런 그의 모습이 재미있는 것일까? 독고요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독고요의 붉은 눈동자가 선을 그렸다.

훙!

순식간에 마광의 앞으로 이동한 독고요의 주먹이 그의 머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마광은 급히 고개를 숙여 그의 주먹을 피해 냈다. 그리고 독고요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가며 주먹을 뻗었다.

쾅!

마광의 주먹에 둘린 강기가 독고요의 턱에 맞닿으며 터져 나갔다.

마광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타격감에 미소를 그렸다. 정확하게 박혀 들어간 것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독고요는 다시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먹에 맞닿은 독고요의 턱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고, 심지어 독고요의 입에 걸린 미소조차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키키키킥!”

독고요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며 그의 눈이 빛났다. 마광은 위험을 감지하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독고요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쩡!

마광의 신형이 빠르게 옆으로 날아갔다. 그런 마광의 팔이 기이하게 꺾여 있었다. 가까스로 독고요의 주먹을 막았지만 그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다.

옆으로 날아간 마광은 어떤 건물의 벽에 틀어박혔다. 벽이 자잘하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광은 일그러진 얼굴로 독고요를 찾았다.

“케케케.”

“……!”

마광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빼냈다. 그러자 금이 생긴 벽이 허물어지며 그를 덮었다. 독고요가 어느새 마광의 코앞에서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크윽!”

그는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자신을 내려다보는 독고요의 모습에 신음을 흘렸다.

“크헥!”

“아, 안 돼!”

독고요가 괴이한 기합을 내뱉자 그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광은 그 모습에 절규 어린 비명을 지르며 멀쩡한 팔을 앞으로 뻗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가슴을 활짝 펴며 포효하던 독고요의 눈이 천천히 내려갔고 그의 몸이 마광을 향해 숙여졌다. 그와 함께 독고요의 붉게 물든 주먹 역시 마광을 향해 떨어졌다.

그 주먹은 마광의 팔을 부러트리며 그의 얼굴에 꽂혔다.

“…….”

진철은 멍한 표정으로 독고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지으며 마광이었던 고깃덩어리를 향해 계속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독고요의 두 손은 피로 흠뻑 젖은 지 오래였고, 그의 얼굴과 몸 역시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주먹을 날리던 독고요는 이제 질렸는지 마광의 몸에서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향해 입을 가져갔다.

“미, 미친!”

진철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도 모르게 자하신검을 움켜쥔 것이다. 지금의 독고요는 결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에 만났던 마혈도는 지금 독고요의 모습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탓!

그때 진철의 앞으로 하나의 인영이 떨어졌다. 검은 장발에 거대한 도를 들고 있는 여인. 북궁아였다.

진철은 그녀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북궁아는 그런 진철을 노려보았다.

“아, 저…….”

“…….”

진철이 입을 열다가 북궁아의 차가운 표정에 머리를 긁었다.

“왜 돌아온 거야?”

“말했지? 넌 내 것이라고. 그런 네가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간단 말이지?”

“그게…….”

너무나 직설적인 북궁아의 말에 진철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북궁아는 그 모습에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그런데 저자는…….”

북궁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독고요의 모습 때문이다.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핥아먹는 그의 모습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로군.”

북궁아가 대도를 들어 올리며 독고요를 겨눴다. 그런 그녀의 몸에서 냉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크헥?”

그 냉기를 느낀 것일까? 독고요의 붉은 눈이 북궁아를 향했다.

천천히 손을 내린 독고요는 몸을 돌려 북궁아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녀를 관찰하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훑어보았다.

“키키킥.”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독고요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북궁아는 대도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녀의 대도가 푸른 빛을 내뿜었다.

슈앙!

갑작스레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북궁아가 도를 뿌렸다. 그러자 푸른 냉기가 독고요를 향해 쏘아졌다. 독고요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쿠르릉!

푸른 도기가 독고요의 전신에 작렬했다. 냉기가 터져 나가며 대지에 하얗게 서리가 꼈다.

북궁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대도를 바라보더니 다시 독고요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쉽게 맞은 것이다.

“위험!”

그때 진철이 뭔가 느꼈는지 급히 북궁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쾅!

진철의 옷이 펄럭이며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북궁아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비틀거리며 진철의 등 뒤에서 떨어져 나갔다.

“크윽!”

진철이 이를 악물었다. 팔을 통해 느껴지는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헤엑.”

독고요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진철의 모습에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었다. 그러고는 북궁아를 훑어본 것처럼 진철을 바라보았다.

“크헤헤헥! 크크큭, 키키킥!”

갑자기 독고요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발견한 듯 기쁜 표정인 그의 모습에 진철이 얼굴을 구겼다.

“시끄럽… 잖아!”

진철이 강하게 팔을 밀었다. 그러자 독고요가 그에게서 떨어졌다. 일 장 정도 물러선 독고요는 연신 웃음을 흘렸다.

진철은 찡그린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 순간 진철의 뇌리에 독고요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혈귀에 잡아먹히게 된다면… 그땐 당신의 손으로 마무리를 지어 주시오. 꼭!’

진철은 검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기도가 피어올랐다.

진철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그런 진철의 주위로 공기가 내려앉았다. 마치 그의 주위만 다른 공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진… 철?”

북궁아가 몸을 일으키며 진철을 불렀다. 그녀가 평소에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소의 모습은 그야말로 자연의 바람과 같은 모습이었다. 비록 장난기가 심하지만 자유분방하고 따뜻하면서도 인간미가 느껴지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날카롭게 날이 선 한 자루의 검과도 같았다.

“약속을 했지. 이렇게 되면 내 손으로 끝을 내 주겠다고.”

“진철…….”

“넌 가서 한 형을 찾아 줘. 이놈은 내가 맡을 테니까.”

“하지만…….”

북궁아가 대도를 움켜쥐며 진철에게 다가갔다. 지금 독고요가 뿌리는 기운은 위험하다고 그녀의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철을 돕고 싶었다. 그때 진철이 고개를 돌려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날 믿어.”

“아…….”

진철의 등이 크게 다가왔다. 두 번째였다. 북궁아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잠시간 그의 등을 바라보던 북궁아는 대도를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날려 장내를 벗어났다.

진철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크헤에.”

독고요는 진철과 북궁아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진철은 그를 바라보며 자하신검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검집과 검병에 천이 묶인 상태였다.

독고요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검의 봉인을 풀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자신이 아니게 된다. 더군다나 자신 역시 어찌 될지 몰랐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진철은 자신이 내뱉은 목소리가 가슴을 무겁게 누르는 것을 느꼈다.

진철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는가 모르겠는데, 난 도사라고. 그런 도사한테 살인을 하라니? 너무 심한 부탁 아니야?”

자하신검에 자색의 기운이 덧씌워졌다. 그 순간 진철이 강하게 땅을 찼다. 그의 신형이 독고요에게 뻗어 나갔다.

“그러니까 되도록 제정신을 차려 보라고!”

자색의 강기를 두른 자하신검이 독고요에게 떨어져 내렸다.

쾅! 쾅!

흙이 튀며 먼지가 일어났다. 그 사이로 진철의 검이 먼지를 가르며 날아갔다.

먼지로 인해 상대방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을 법도 했지만, 독고요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기운은 그가 어디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붉은 기운은 단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진철의 검이 그에게 닿는 순간 붉은 기운이 독고요의 몸으로 모여들었다.

쾅!

붉은 기운이 출렁거리며 충격을 흡수했다. 혀를 찬 진철은 뒤로 몸을 날리며 거리를 벌렸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크헤엑!”

독고요의 몸이 붉은 안개를 뚫고 진철에게 쏘아지듯 다가왔다.

진철은 이를 악물며 신형을 비틀었다. 찢어진 천과 핏방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독고요의 손톱에 스치고 만 것이다.

“아, 쓰라려.”

진철이 슬쩍 어깨를 바라보았다. 따끔함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진철이 눈을 부릅떴다. 독고요의 얼굴이 코앞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독고요의 붉은 눈동자가 진철의 뇌리에 틀어박혔다.

퍽!

“큭!”

진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그의 신형이 다시 뒤로 밀려 나갔다.

진철은 검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해 앞으로 내밀고 있는 상태였다. 막는다고 막았건만 그 충격까지 다 막아 내진 못했다.

“키키킥!”

얼굴을 구기고 있는 진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독고요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제길, 완전히 미쳤군.”

독고요의 공격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빠르고 강력하다. 실수로 한 대라도 맞게 된다면 치명상이 될 수 있었다.

“미친놈에게는 매가 약이지!”

진철의 신형이 독고요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붉은 기운이 독고요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순간 진철의 신형이 독고요의 앞에서 흩어지듯 퍼졌다. 그러고는 독고요를 포위하듯 아홉 방향을 점했다.

구궁보의 변형이었다.

“맞아라!”

진철의 검이 허공에 자색의 선을 그려 냈다. 한두 개가 아닌 수십 개의 선이 독고요의 몸을 난타했다.

퍼퍼퍼퍽!

독고요를 둘러싼 붉은 기운이 출렁거렸다. 하지만 진철은 공격을 거두지 않고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그러던 일순간 진철의 신형이 하나로 합쳐지며 그의 검이 독고요의 가슴에 작렬했다.

쾅!

독고요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그런 독고요의 가슴에 빈틈이 생겼다. 붉은 기운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진철이 강하게 땅을 찼다. 순식간에 독고요의 앞으로 다가간 진철의 검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자 거대한 섬광이 독고요의 가슴에 꽂혔다.

쾅!

“크에엑!”

다시 굉음이 터지며 독고요의 몸이 뒤에 있는 벽으로 빨려 들어갔다. 벽이 허물어지며 잔해가 독고요를 덮었다.

진철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부분이 따끔거리기 시작한다. 몸 안에 있는 또 다른 기운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제길, 가만히 좀 있어라.’

진철은 그 기운을 붙잡아 매며 눈을 빛냈다. 그의 시야에 독고요가 묻힌 잔해가 들썩이는 것이 잡혔다.

펑!

“크르르…….”

잔해가 터져 나가며 독고요의 모습이 드러났다. 웃음기가 사라진 독고요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독고요의 가슴은 옷이 찢어지는 바람에 훤히 드러난 상태였다. 그런 그의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진철의 얼굴이 구겨졌다. 검기충천을 몸으로 받고도 고작 멍만 생겼기 때문이다.

“크아앙!”

독고요가 포효를 터트렸다. 그러자 그를 주위로 기의 돌풍이 몰아쳤고 그 순간 독고요의 신형이 사라졌다. 진철은 혀를 차며 허리를 숙였다.

슈칵!

진철의 머리 위로 독고요의 손톱이 훑고 지나갔다.

퍽!

독고요의 턱이 흔들거렸다. 진철이 검병으로 그의 턱을 올려 친 것이다.

“크르르.”

“……!”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독고요가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큭!”

진철은 재빨리 검을 옆으로 세웠다. 그와 동시에 검 위로 독고요의 주먹이 꽂혔다. 그러자 진철이 먼지를 일으키며 튕겨 나갔다.

진철은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강하게 바닥을 찼다. 그의 몸이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 순간 그가 있던 자리로 붉은 섬광이 훑고 지나갔다.

“제길! 이거나 맞고 떨어져라!”

허공에 뜬 진철이 팔을 휘둘렀다. 검이 공중을 가르자 자색의 기운이 독고요를 향해 뻗어 나갔다.

쾅!

강기가 그를 강타하자 먼지가 일어나며 독고요의 모습이 사라졌다. 진철은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힘차게 굴렀다. 이런 걸로 쓰러질 그가 아니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엿가락처럼 신형을 늘어트리며 다가간 진철이 검을 밑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스궝!

먼지구름을 가른 진철의 검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독고요가 어느새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슉!

그때 진철의 귓가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철은 이를 악물고는 검을 밑으로 내리그으며 신형을 돌렸다.

쩡!

검이 독고요의 손목을 때렸다. 그 바람에 독고요의 주먹이 틀어졌다. 그때 독고요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붉은 기운이 팔을 감쌌다. 그러고는 그대로 진철을 향해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튕겨 나갔다.

“크헥!”

독고요가 그런 진철을 따라 몸을 날렸다. 진철이 허리를 꺾으며 공중에서 신형을 비틀었다. 독고요의 손톱이 진철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크윽!”

천이 찢기며 핏방울이 튀었다. 진철은 고통에 눈을 찡그리며 강하게 팔을 휘저었다. 자하신검이 독고요의 등을 강타했다.

꽝!

독고요가 땅바닥에 처박히며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진철은 재빨리 뒤로 몸을 날리며 자세를 잡았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어깨와 허리의 상처가 시야에 들어왔다.

“쳇.”

자신은 이렇게 상처를 입었건만 독고요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그것이 신경 쓰였다.

“크헤에에엑!”

그때 독고요가 몸을 일으키며 괴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기의 파동이 그를 중심으로 퍼지며 먼지구름이 흩어져 버렸다.

화악!

기의 파동이 덮치자 진철의 옷과 머리카락이 펄럭였다.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파동 속에서 엄청난 사기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혈기에 감싸인 독고요의 눈이 더욱더 붉어졌다. 붉은 안광을 뿜어내며 한 발씩 진철을 향해 걸었다.

“제길!”

갑작스레 진철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양팔을 벌렸다. 진철의 팔이 천천히 춤을 추듯 곡선을 그렸다. 그러자 자하신검이 검명을 토해 냈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검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이.

“이걸로도 정신 못 차리면 난 정말 모른다!”

진철의 몸에서 은은한 자색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기분이 드는 기운은 진철의 주위로 퍼져 나갔다.

진철의 검이 다시 허공을 천천히 베었다. 옆으로 베고 위에서 아래로 베었다. 그리고 다시 곡선을 그렸다. 그러자 그의 앞에 한 송이의 꽃봉오리가 피어났다.

“크헤엑!”

그 기운을 느낀 것일까? 독고요의 눈이 부릅떠지며 그의 신형이 진철을 향해 뻗어 갔다.

진철은 천천히 독고요를 향해 검을 뻗었다. 그러고는 그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검을 위로 쳐올렸다.

“개화.”

마혈도 주재구를 무력화시켰던 화산검결의 개화가 다시 펼쳐졌다. 독고요가 혈기에 둘린 주먹을 날렸다.

번쩍!

독고요의 손이 꽃봉오리에 닿는 순간 자색의 강한 빛이 주변을 물들였다. 태양처럼 밝은 빛은 주변 일대를 집어삼켰다.

꽝!

그때 폭발음과 함께 빛 덩어리에서 독고요와 진철의 신형이 튕겨 나왔다.

튕겨져 나온 진철은 몇 번 바닥을 구르더니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잡았다. 그런 진철의 상체는 모조리 찢겨져 맨몸이 드러난 상태였고, 이곳저곳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크흐윽!”

진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손목이 부러질 것처럼 얼얼했던 것이다.

‘뭐 이런!’

개화는 완성되었다. 하지만 검이 독고요에게 닿으려는 순간 엄청난 저항이 일어났고 개화는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그리고 그로 인한 반발력은 그대로 진철의 몸을 강타해 버렸다.

“빌어먹을.”

진철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내상보다 개화를 밀어낸 그 힘이 더 신경 쓰였다. 개화를 다시 펼친다 하더라도 그 힘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 더 이런 충격을 받으면 쓰러지는 건 자신일 것 같았다. 그만큼 개화로 인해 받은 반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크웨에엑!”

진철처럼 바닥을 굴렀던 독고요가 몸을 일으키다 말고 허리를 굽혔다. 그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독고요 역시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듯했다.

그렇게 피를 토해 내던 독고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몸 역시 만신창이였다. 거기에 몸을 두르고 있던 혈기도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크아아아!”

독고요의 입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진철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화가 더 난 거 같은데. 이왕이면 그냥 쓰러져 주면 좀 좋아?”

진철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자신 역시 지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몸속에서 또 다른 기운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더욱 불안해져 왔다.

“흡!”

진철이 숨을 들이켜며 급히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그의 얼굴 위로 혈기에 둘린 주먹이 훑고 지나갔다. 독고요가 어느새 접근해 주먹을 날린 것이다.

진철은 바닥을 차 발로 독고요의 턱을 쳐 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독고요는 비틀거림도 없이 그대로 쇄도해 주먹을 뻗었다.

퍽!

“컥!”

진철의 몸이 튕겨 나갔다. 바닥을 구른 진철이 몸을 일으키다 말고 허리를 숙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헉헉.”

진철이 입가를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진철이 급히 허리를 틀었다. 독고요가 또다시 주먹을 뻗어 온 것이다.

‘지금!’

독고요의 주먹을 피해 낸 후 진철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자색으로 물든 진철의 주먹이 독고요의 옆구리에 꽂혔다.

펑!

독고요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때 진철의 검이 허공을 십여 번 그었다. 자색의 검기가 독고요의 전신을 두들겼다.

“크에엑!”

독고요가 비명을 터트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 모습에 진철이 허공으로 몸을 띄우고는 팔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자하신검이 검명을 토해 내며 진동했다. 그러자 자하신검으로 진철의 내공이 빨려 들어갔다.

우웅!

“이제 좀 쓰러져라!”

진철이 검을 내리긋자 자하강기가 독고요를 향해 쏘아졌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독고요의 눈이 커지고 그런 그의 앞에 그나마 남아 있던 혈기가 몰려들었다. 그 순간 독고요의 몸에 자하강기가 작렬했다.

꽝!

“아…….”

독고요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독고요는 그녀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지만 이내 흠칫 놀라며 손을 내렸다. 그의 손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여인이 손을 뻗어 독고요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에 대었다.

여인은 독고요의 피 묻은 손이 무섭지도 않은지 미소를 지었다. 그에 반해 독고요의 손에는 잔떨림이 가득했다.

“나, 나를… 기다리는 것이오?”

독고요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독고요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독고요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행복감이 깃든 미소였다.

독고요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독고요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헉헉.”

바닥에 착지한 진철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진철의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체력을 넘어선 내공을 운용한 탓에 단전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자하강기가 떨어진 곳에는 일 장이 넘는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독고요가 누워 있었다. 그를 감싸던 혈기는 완전히 사라졌는지 독고요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정말… 미치겠네.”

중얼거리는 진철의 눈이 빛났다. 독고요의 손가락이 꿈틀 거린 것이다. 그 꿈틀거림은 점점 커졌고, 독고요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크륵.”

일어선 독고요의 입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역시 상당히 지쳤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독고요의 입가에 미소가 잡혔다. 섬뜩한 미소였다. 그런 독고요의 신형이 진철에게 다가왔다. 전보다 확실히 느린 속도지만 그렇다고 아주 느린 것도 아니었다.

진철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는 검을 들었다. 이대로 쓰러질 순 없었기 때문이다.

“……!”

그때 독고요의 움직임이 멈췄다. 진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독고요가 상당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크흐윽! 크흑! 크르르…….”

독고요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무릎을 꿇고는 땅에 머리를 박으며 연신 신음을 터트렸다.

“좀 쓰러져라, 이놈아.”

진철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대로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 것이다.

“크하악… 크으… 끄아아아!”

그때 독고요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양팔을 벌린 채 하늘을 향해 가슴을 벌린 독고요의 눈에 핏기가 점차 가시기 시작했다. 그런 독고요가 입을 열었다.

“지, 지금이오!”

“……!”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독고요가 제정신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독고요는 진철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어서, 어서 지금 날 찌르시오! 어서!”

“뭐?”

“약속하지 않았소? 혈귀에 잡아먹힌다면 당신의 손으로 날 보내 주기로! 크흑!”

머뭇거리는 진철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친 독고요가 갑자기 신음을 터트리며 허리를 숙였다.

땅을 짚으며 진철을 바라보는 독고요의 눈이 다시 핏빛에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핏빛이 사라진 독고요가 피를 토하며 입을 열었다.

“어서… 어서 날 쉬게 해 주시구려. 어서!”

“큭!”

독고요의 말에 진철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진철의 몸에서 은은한 자색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진철은 양손으로 검을 쥐며 땅을 박찼다. 그러고는 검을 앞으로 세웠다. 그러자 검이 빛을 뿜어내며 검강이 덧씌워졌다. 그 모습을 본 독고요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 순간 독고요의 눈이 또다시 핏빛으로 물들며 신음을 흘렸다. 간신히 몰아낸 혈귀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크르르!”

“제기랄!”

욕지거리를 내뱉은 진철이 검을 앞으로 뻗었다. 그때 독고요의 눈이 다시 핏빛에 잠겨 버렸다. 혈귀가 다시 독고요의 몸을 장악한 것이다.

혈귀가 진철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진철에게 닿지 못하고 도중에 멈추고 말았다.

푹!

“……!”

독고요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색의 강기가 그의 가슴을 관통해 등을 뚫고 나와 있었다. 그런 독고요의 몸이 뒤로 서서히 넘어갔다.

털썩!

독고요가 쓰러졌음에도 진철은 한참 동안 그의 가슴에서 검을 거두지 않았다. 비록 검집에 들어 있는 상태에서 찌른 것이라지만, 검집에 덮어씌워진 자하강기는 약화된 독고요의 가슴을 뚫기에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큭!”

진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독고요의 가슴을 찌르는 순간 그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슬픔과 연민이 느껴졌던 탓이다.

그때 진철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진철의 눈에 서서히 떠지는 독고요의 눈이 보였다.

눈이 부신 듯 천천히 뜨던 독고요의 눈이 갑작스레 부릅떠졌다. 그런 그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쿨럭! 해냈… 구려.”

피를 토해 내며 독고요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런 독고요의 눈은 혈기가 완전히 사라져 정상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독고요는 하늘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고, 고맙소.”

“…약속한 일이잖아.”

“그래도 고맙소. 쿨럭!”

“…….”

거듭되는 인사에 진철은 입을 열지 못했다. 왠지 그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진철이 대답을 하지 않아서일까? 독고요의 눈동자가 내려가 진철을 바라보았다. 독고요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표정 지, 짓지 마시오. 다, 당신은 나를 구원해 준 것이라오.”

“…….”

이번에도 진철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진철을 바라보던 독고요가 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힘이 없는지 꿈틀거리기만 할 뿐 들어 올리지 못했다.

“내… 품 안에 양피지 한 장이 있을 것… 이오. 그 안에 혈랑파의 모든 것이 들어 있소. 그것을… 가져가시오.”

독고요의 얼굴에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의 눈이 반 정도 감겼다. 졸려 왔기 때문이다. 어서 눈을 감고 푹 자고 싶었다.

“가서… 당신이 구하고 싶은 그녀를 구해 내시오.”

독고요가 반쯤 뜬 눈으로 말하자 고개를 숙인 진철의 입술이 달싹였다.

“남아일언.”

“…중천금. 후훗.”

진철의 말을 독고요가 받았다. 하지만 그 말이 웃겼던 것일까? 독고요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렇게 독고요는 움직임을 멈췄다.

갑자기 많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단지 부탁으로 인해 여기까지 왔다. 그렇기에 그렇게 큰 책임감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결심을 해야 했다. 그래야만 이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훗.”

진철은 곧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생각하고 결정했던 일들을 실행으로 옮길 땐 전부 반대로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것저것 따지고 행동할 정도로 머리가 좋지도 않았다. 생각을 하고 행동해 왔다고 여겼건만 실제로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해 왔던 것이다.

진철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돌렸다. 독고요의 시신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철은 손을 뻗어 독고요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다시 꺼낸 그의 손에는 한 장의 양피지가 들려 있었다.

진철은 양피지를 펼치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몸을 뉘었다. 갑작스레 졸음이 밀려오자 만사가 귀찮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어둠이 밀려오고 있는지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던 진철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진철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끼야악!”

서걱!

붉은 피가 뿌려지며 비명을 내지르던 아낙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녀의 목을 자른 흑의인은 미소를 거두지 않고 쓰러지는 아낙의 가슴에 한 번 더 검을 꽂아 넣었다. 그런 아낙의 주위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렇게 아낙의 작은 경련마저도 멈추게 만든 흑의인은 곧 시선을 거두며 다른 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안무가의 가주 안철기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호위들이 방 앞을 지키고 있다고는 하나 밖에서 나는 비명 소리를 들어 보니, 곧 적들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여, 여보…….”

안철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는 아내를 살짝 안아 주었다. 그녀도 무가의 안주인.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알고 있다 하더라도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괜찮을 것이오.”

“여보.”

“내가 살아생전에 다른 이에게 원한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소. 필시 오해가 있을 것이오.”

안철기는 아내를 진정시켰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가주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음.”

안철기는 총관의 목소리에 자신의 애병을 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으시오.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걱정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이렇게 무턱대고 자신의 수하들을 죽이지도 않았을 터. 그의 아내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를 보내야 했다.

“다녀… 오세요.”

“음…….”

안철기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아내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총관과 그의 호위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적의 수는?”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수하는 얼마나 되는가?”

“그 역시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총관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자 안철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

안철기는 총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총관이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자 안철기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호위들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모두 자신이 키운 제자와도 같은 자들이었다. 손수 무공을 가르쳐 준 자도 있었고 함께 무공 수련을 한 자도 있었다.

“가지.”

“존명!”

우렁찬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안철기는 그들을 응시하다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선영이가 더욱 보고 싶구나.’

안철기는 자신의 애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다그닥! 다그닥!

“으음…….”

진철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눈을 뜬 것이다. 진철은 반쯤 감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너무나 어두워서 그런지 여기가 어디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사물도 구분하기 힘든 만큼 지쳤기 때문이다.

다만 들리는 소리나 몸으로 느껴지는 떨림으로 이곳이 마차 안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깼어?”

그때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철이 시선을 돌려 목소리를 쫓았다. 긴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진철의 입이 달싹였다. 여긴 어디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인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좀 더 자.”

포근한 목소리였다. 진철은 비몽사몽 중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북궁아는 그런 진철을 바라보며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넘겼다. 그런 그녀의 입이 달싹였다.

“바보.”

***

해가 저물어 별이 반짝이는 달밤에 두 명의 관병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오늘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어디에 사는 미친놈인지 도심에서 벽력탄을 난발한 것이다. 그렇기에 푹 자야할 이 시간에도 비상이 걸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맡은 임무는 짜증에 화를 더했다. 가만히 있어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시체를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놈이 사건의 주도자인가?”

“중요 인물이라고 합니다.”

“쯧쯧, 젊은 나이에 요절했구먼.”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관병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척 보기에도 이십 대의 나이인 거 같은데 만신창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당했는지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가슴 한 가운데에는 손가락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응?”

고개를 돌리던 관병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옆에 서 있던 후임이 앞으로 고꾸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로 한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 누구냐!”

“훗.”

장년인은 관병의 말을 무시하며 코웃음 쳤다. 그와 동시에 관병의 눈이 다시 부릅떠졌다. 목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진 것이다.

“흠…….”

장년인은 쓰러진 관병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독고요의 주검이 놓여 있었다. 장년인은 다리를 굽히고는 독고요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는 특이하게도 다섯 개의 금가락지가 끼어져 있었다. 장년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역시…….”

뭔가 알아낸 것일까? 장년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장년인의 손이 검게 물들더니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독고요의 상체를 덮었다. 그러자 독고요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드드드!

떨림이 지속되며 독고요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렇게 장년인의 무릎까지 떠오른 독고요의 눈이 갑자기 부릅떠졌다. 붉게 물든 눈이 귀안처럼 빛났다.

턱!

갑작스레 독고요의 팔이 장년인을 향해 뻗어졌다. 하지만 장년인은 간단하게 독고요의 손목을 잡으며 그를 제압했다.

“그어어!”

독고요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년인은 그 모습에도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아니, 더 짙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이미 혼이 빠져나갔음에도 이러한 반응이라니……. 역시 혈정을 흡수했단 말인가? 그럼 혈정은… 이곳에 있겠군.”

독고요의 상체를 덮은 어둠이 갑작스레 한곳으로 몰렸다. 단전이 위치한 부분이었다. 어둠은 독고요의 복부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그 순간 독고요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고, 붉은 눈에서는 혈광을 뿌렸다.

“흡!”

장년인이 독고요의 몸에 댄 손을 갑작스레 위로 올리자 독고요의 몸이 새우처럼 꺾였다. 그리고 그의 복부가 붉게 물들며 천천히 갈라졌다.

우웅!

약한 진동을 일으키며 독고요의 배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붉은 수정. 혈정이었다.

장년인은 혈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혈정과 장년인의 손 사이에 작은 벼락이 일어났다. 하지만 장년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혈정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독고요의 눈이 감기며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털썩!

바닥에 떨어진 독고요의 몸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망자에게 이런 건 필요 없겠지. 그런데…….”

장년인은 손에 쥔 혈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단해. 폭주한 혈귀를 제압하다니. 흥미가 생기는데?”

장년인은 다시 독고요를 한 번 쳐다보고는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곧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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