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일검 3-제14장 계획 (15/29)

3권에 계속

목차

제14장 계획

제15장 검은 그 어떤 것으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흉기다

제16장 희망은 절망의 밑거름이다

제17장 혈귀 (2)

제18장 혈마신(血魔神)

제19장 태동하는 무림

제14장

계획

삭주에 자리 잡은 혈랑파는 대외적으로는 단순한 사파 성향을 지닌 중소 문파 중 하나였다. 하지만 혈랑파의 진정한 모습은 단순한 중소 문파가 아닌 혈궁의 숨겨진 지부.

그런 혈랑파의 현 문주이자 혈궁의 장로인 귀랑 세세호는 장내로 나와 세 명의 장년인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다들 오랜만이구려.”

“허허, 세 장로의 훤한 신수를 보아하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구려.”

“오랜만이오, 세 장로.”

세세호가 포권을 취하며 예를 차리자 그의 앞에 서 있는 장년인들이 마주 포권을 취했다.

세세호는 미소를 그리며 옆을 바라보았다.

“취 장로는 여전하구려.”

입을 굳게 닫고 눈을 감고 서 있는 장년인의 모습에 세세호는 입을 열었다.

“…….”

취 장로라 불린 장년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옆에 서 있던 붉은 장발의 장로가 웃음을 터트렸다. 적발투귀(赤髮鬪鬼) 사철림이었다.

“허허허! 취 장로는 아마 백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구려.”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하람은 혀를 뽑고 두 눈을 봉인한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무공의 여하를 떠나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내뿜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고 말도 못하고 거기에 듣지도 못하는 그가 어떻게 혈궁의 장로직에 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장님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자,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도록 합시다.”

세세호가 길을 열며 손을 뻗자 세 명의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원탁을 둘러싸 앉은 세세호와 다른 세 명의 장로들은 만났을 때와는 달리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궁주님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오. 어떻소? 탈출한 혈귀를 잡아들이셨소?”

한 톨의 머리카락도 없는 무각이 입을 열자 세세호는 미소를 지었다.

“정예들을 보냈소이다. 마광 장로, 그리고 혈마대와 혈사대를 보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잡아들일 터이니. 그런데 혈마신 님의 제물은 어찌 되었소?”

무각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지금 후송 중에 있소이다. 아마 며칠 되지 않아 도착하게 될 것이오.”

“그렇다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구려.”

“그렇소. 한데…….”

세세호가 말을 끌며 신음을 흘렸다. 무각과 다른 이들은 세세호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왜 그러시오?”

“혹시… 사마곡을 알고 계시오?”

“사마곡이라… 아, 혹시 사마련과의?”

“그렇소. 사마련과 본 궁이 일을 진행시키던 곳이었소.”

세세호의 말에 뚜렷하게 기억이 떠오른 무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세세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마곡이 멸문했다오.”

“음? 그게 무슨 말이오?”

미처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무각이 되물었다.

“사마곡에 검왕과 칠무회가 들이닥쳤다고 하오.”

“검왕! 칠무회!”

이번엔 취하람 역시 세세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만큼 검왕과 칠무회가 사마곡을 쳤다는 사실은 예상외였다.

“그렇다면 본 궁의 꼬리가 잡힌 것이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소. 그렇다면 벌써 이곳으로 검왕이나 칠무회가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테니 말이오. 하지만 아직 검왕이나 칠무회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하오.”

“음…….”

“거기에 검왕과 칠무회가 함께 행동한 것이 아니라 우연찮게 그곳에서 만난 것이라고 하더구려. 단지 문제는 후송 중인 제물을 노리는 자가 있는 것 같소.”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꼬리가 잡힌 것 같지 않다면서 노리는 자가 있다니?”

사철림이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세세호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라오. 검왕이나 칠무회에서는 제물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소. 그들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들과는 달리 제물들을 추적하는 자가 몇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소. 혹 마혈도라는 자를 알고 있소?”

“마혈도? 물론이오. 얼마 전까지 무림 공적이라며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든 자가 아니오?”

“그렇다면 신룡이란 별호를 얻은 자를 알고 있소?”

“신룡?”

사철림은 생각에 잠겼다. 혹시 신룡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는지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룡이란 별호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세세호는 역시나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신룡이 무림에 등장한 것은 최근이라오. 바로 단신으로 마혈도를 제압하면서 얻은 호칭이니까.”

“단신으로 말이오? 살성의 체질을 지닌 마혈도를 상대로?”

“그렇소. 물론 그걸 본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신룡과 마혈도가 격전한 뒤에 서로 같은 방향으로 사라지고 신룡만 돌아왔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혈도는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하오. 그렇다면 죽었다든지, 그게 아니면 신룡에게 패하여 몸을 추스르고 있는 것 아니겠소?”

“음… 그렇겠구려.”

사철림의 대답에 세세호는 다른 이들을 둘러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신룡이라는 자가 제물의 뒤를 쫓고 있는 것 같소.”

“그게 사실이오?”

“그렇다면 우리의 계획이 이미 밝혀진 것 아니오?”

사철림과 무각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세세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하지 않았소? 아무리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큰일은 언젠간 소문이 나는 법. 정파 무림 역시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을 것이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그에 따른 증거가 없기 때문일 것이오.”

세세호의 말에 무각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신룡이라는 자가 제물을 뒤쫓는다는 것은 증거를 찾기 위해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소. 그런데 이상한 게, 보통 그렇게 뒤쫓는다면 모습을 숨겨야 하건만 그들은 대로를 활보하듯 전혀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있다는 것이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들이 제물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 아니오?”

사철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살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세세호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렇구려.”

“그자를 처리하면 되겠구려. 훗, 신룡이란 별호는 중원에서 특출한 후기지수에게 내려지는 별호이거늘, 그런 별호를 얻고 금세 사라지다니.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하군.”

사철림의 말에 세세호와 무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에게는 아무리 살성을 제압한 신룡이라 하더라도 이제 무림에 나온 신출내기에 불과했다.

똑똑!

“문주님.”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세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지금 손님들을 접대하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급보입니다.”

“흠…….”

망설임 없는 수하의 말에 세세호는 살짝 얼굴을 구겼다.

“우리는 괜찮소. 급한 일 같은데 들여보내시오.”

“그렇다면… 들어오너라.”

세세호가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문을 열고 들어온 수하는 세세호에게 한 장의 양피지를 건네주었다. 세세호는 그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사철림과 무각은 그 양피지에 흥미를 가진 듯 세세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덜컹!

놀랍게도 지금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세세호가 벌떡 일어나며 수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수하는 그런 그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그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이게 사실이란 말이냐!”

“예.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허허!”

수하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린 세세호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시오?”

갑작스레 변한 그의 모습에 사철림이 다급하게 물었다. 세세호는 입을 열지도 않고 손에 쥐고 있던 양피지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사철림과 무각은 그 양피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광 장로 사(死). 혈귀 사(死). 혈마대 소수 생존. 혈사대 멸(滅).

신룡 북상(北上).>

양피지를 훑어보던 사철림과 무각은 부릅뜬 눈으로 고개를 들어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그들의 말에 세세호는 고개를 돌려 수하를 바라보았다.

“말해 보아라. 신룡이라는 자가 마 장로와 혈귀를 죽이고 혈마대와 혈사대를 그리 만든 것이냐?”

“아닙니다. 마광 장로와 혈마대, 혈사대를 그리 만든 것은 혈귀이고, 그 혈귀는 신룡이란 자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우직!

수하의 대답에 세세호가 쥐고 있던 의자 받침이 살짝 으깨지며 먼지로 변해 버렸다. 세세호가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 올린 탓이다.

“신룡, 그자를 당장 처리해야 하오!”

사철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그의 말에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수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신룡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는 의식불명의 상태라고 합니다.”

“하긴, 마 장로를 죽인 혈귀를 상대하고도 멀쩡할 수 있을 리는 없겠지. 그나저나 혈귀를 제압하다니…….”

세세호의 얼굴이 구겨졌다. 살성을 처리한 자라는 것도 꺼림칙했다. 거기에 비록 미완성인 혈귀라지만 그마저 제압했다고 한다. 결코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톡톡.

세세호는 눈을 감으며 탁자를 두들겼다. 고민에 빠질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약 일각 정도를 그렇게 있던 세세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낭삼추 대주는 어디에 있는가?”

“신(新)혈마대와 함께 람현(嵐縣)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신룡의 정보를 모으고, 한 시진마다 낭 대주에게 보내라. 그리고 낭 대주에게는 신룡을 처리하라고 명하도록.”

“예!”

세세호는 대답하며 밖으로 나가는 수하를 바라보다 장로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순히 명성 좀 얻은 세상모르는 철부지인 줄 알았건만 이무기였다니. 더 크기 전에 처리해야겠소. 앞으로 장로님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소.”

“본 궁의 일이라면 도움이랄 것도 없이 당연히 나서야지요.”

세세호의 부탁에 사철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덜컹!

흔들리는 마차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거친 소리와 함께 들썩였다. 마차 안에 있던 여인들이 순간 짧은 비명을 터트리며 서로 끌어안았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를 찾기는 힘들지만, 이미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아, 아씨.”

“괜찮아요.”

안선영은 자신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시녀는 여전히 떨리는 눈망울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안선영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지금쯤이면 이미 본 가에서도 이 소식을 알 터. 곧 있으면 가의 무사들이 저희를 구해 줄 거예요.”

“예, 아씨…….”

시녀가 고개를 숙였다. 안선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남몰래 깊은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말했지만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안선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사마곡에서 잠시 머물 때 그들은 자신의 몸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마령환에 목적이 있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목적이 마령환은 아니라는 것.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납치한 거지? 그리고 이 사람들은 누구지? 단순히 인신매매?’

거기까지 생각한 안선영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인신매매라면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자신이 아니어도 되었으니까.

‘분명 사마곡주는 날 이용해서 본 가에게서 뭔가 얻어 내려고 했어. 보나 마나 영역 확장이겠지. 그런데 그렇게 협상을 하려면 내가 곡 내에 있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텐데… 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하자 안선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왠지 이러는 게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흑!”

누군가 눈물을 흘리는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곧 전염병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약해져선 안 돼!’

안선영은 나약해지는 자신을 다잡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호랑이 입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정신만 차린다면 살 수 있다고 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자. 그것이 나중에 무의미진다 하더라도 생각하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하는 것뿐이야.’

안선영은 손에서 느껴지는 시녀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문뜩 부모님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길현을 벗어난 지 어느새 오 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철은 여전히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시 들렀던 의원에서는 단지 정신을 잃었을 뿐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했다.

“후우.”

진철의 감긴 눈을 바라보던 북궁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진철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는 찬물에 적신 천을 이마에 올려 주었다.

히이힝!

그때 말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궁아는 여전히 진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가 쓰러져 있는 것이 왠지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진철이 자신을 보냈을 때 가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덜컥!

“북궁 소저, 잠시 쉬시는 게 어떻겠소?”

문이 열리며 한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궁아는 고개를 들어 한정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오 일째 저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처는 이미 다 아물어 활동하는 데 별다른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밤새도록 간호에 열중한다면 나중에는 그녀 역시 쓰러질 수도 있었다.

“어차피 말들도 지쳐서 잠시 쉬어야 할 것 같소. 그러니 북궁 소저도 좀 쉬시구려.”

“…….”

북궁아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진철만 바라보고 있자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한정이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러다 소저가 먼저 큰일 나겠소. 의원이 그러지 않았소?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이라고.”

북궁아가 자신의 손을 잡은 한정을 향해 눈을 치켜떴지만 한정은 물러섬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부축하며 마차 밖으로 나왔다.

아무런 저항 없이 끌려나오는 그녀의 몸에 한정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사이에 많이 야윈 것이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보통 때 같았으면 자신을 향해 싸늘한 눈빛을 뿌리며 손을 뿌리쳤을 그녀지만 이젠 그럴 힘도 없어 보였다.

“진 소협은 내가 돌보도록 하겠소. 그러니 잠깐이라도 쉬시구려. 이건 부탁이 아니라 강요라오. 북궁 소저가 건강해야 진 소협이 깨어났을 때 마음 편히 소저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겠소?”

거듭되는 한정의 설득에 북궁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옆에 놓인 바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며 살짝 비틀거렸다.

한정은 깜짝 놀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그녀를 부축하여 바위를 향했다. 그렇게 바위에 북궁아가 엉덩이를 붙이자 한정은 다시 한숨을 내뱉고는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한정이 마차 안으로 사라지자 북궁아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 법도 하건만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짹짹!

새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그제야 주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차가 세워진 길옆에는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웅장한 나무들이 줄을 서듯 빼곡하게 심어져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던 북궁아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진철과 한정이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진철. 화산파의 후예라고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다지만 화산파의 무게를 어찌 모를까?

화산파는 정파 무림에서 그야말로 전설 그 자체였다. 그런 곳의 마지막 후예를 노예가 되라며 따라다니고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을 정파에서 알게 된다면 필시 조용하게 넘어가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북궁아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러고는 양팔을 동그랗게 말아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노예가 되라는 말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말인지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억지라도 부리지 않는다면 진철을 따라다닐 명분이 서지 않았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북궁아는 문뜩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자 진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분명 적다면 적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적은 시간에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진철에게 목숨을 구원받기도 하였다.

‘만약 깨어나지 않는다면… 아니, 깨어날 거야. 분명.’

북궁아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마차 안에 있던 한정이 급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진 소협이 깨어났소!”

북궁아는 바위에서 급히 몸을 일으켜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곧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마차 밖으로 하얀 손이 튀어나온 것이다.

잠시 후 완전히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인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 잡았다.

“좋은 날씨네?”

“아…….”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진철의 모습에 북궁아는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숨도 안 자고 간호했다오.”

“…….”

한정의 말에 진철은 북궁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 야윈 게 한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이상은 없는 걸로 보아, 아마도 진 소협이 깨어나는 걸 본 순간 긴장이 풀려 잠시 정신을 놓은 것 같소.”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각도 같았기 때문이다.

한정은 그런 진철을 바라보다 마차 밖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진철은 북궁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진철은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꺼내자 한 장의 낡은 양피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독고요가 죽기 전에 주었던 양피지였다.

펄럭!

양피지를 한 번 허공에 털자 양피지가 쫙 펴지며 깨알 같은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철은 가만히 그 양피지를 바라보다 눈을 구겼다.

꼬르륵!

순간 진철의 배 속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피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진철은 그것을 접어 품 안에 집어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프네.”

북궁아가 깨어난 것은 만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푹 잤던 것인지 비교적 안색이 돌아온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주위부터 둘러보았다. 하지만 찾는 이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떴을 때 진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길 내심 바랐기 때문이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바로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꽤 많은 거리를 달려온 듯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후우…….”

그 순간 숨소리가 들려왔다.

북궁아는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진철이 가부좌를 튼 상태로 명상에 빠져 있었다. 북궁아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다 머뭇거리며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한 일다경쯤 지나자 진철이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아…….”

몸을 돌리던 진철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북궁아의 모습에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잘 잤어?”

“…….”

진철의 물음에 북궁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무안했는지 진철은 시선을 돌리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다.”

“응?”

그때 들린 목소리에 진철이 고개를 돌려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북궁아는 고개를 숙이며 다시 입을 달싹였다.

“죽… 는 줄 알았다.”

“하, 하하…….”

“웃겨?”

“응?”

북궁아가 벌떡 일어나며 진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 북궁아의 눈이 흔들거렸다.

진철은 주춤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다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다시는 홀로 보내지 마. 그랬다가는 다음엔 정말 죽여 버릴 거야.”

그녀의 살벌한 말에 진철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북궁아가 그의 손을 쳐 냈다. 하지만 진철은 다시 머리에 손을 올렸다. 북궁아는 다시 쳐 냈다.

툭.

진철이 또다시 머리에 손을 올리자 그제야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걱정해 줘서.”

진철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자 북궁아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진철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어 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한정이 멀뚱히 서서 진철과 북궁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푸드득!

하얀 전서구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낭삼추는 자신의 손에 들린 쪽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

뒤를 돌아보니 수하 중 한 명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낭삼추는 쪽지를 구겼다.

“마광 장로님이 죽고 전(前) 혈마대, 그리고 혈사대가 거의 전멸했다는군.”

“예?”

낭삼추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의외인 듯 수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낭삼추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독고요, 그자가 그랬겠지.”

“……!”

낭삼추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대로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람현의 한 객잔을 차지하고 자리 잡은 지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슬슬 좀이 쑤셔 오고 있던 참이었다.

“신룡이라는 자를 아느냐?”

“신룡이라면… 요새 갑자기 등장한 후기지수가 아닙니까?”

낭삼추의 물음에 그의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낭삼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독고요를 죽였다고 한다.”

낭삼추의 말에 혈마대원들은 일제히 눈을 부릅떴다.

방금 독고요에게 마광 장로와 전 혈마대, 혈사대가 괴멸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독고요를 신룡이라는 자가 죽였다고 한다.

“서, 설마…….”

“아마도 사실이겠지. 그것이 우연이든 실력이든 신출내기는 아닌 것 같군. 아무튼 그 신룡이 지금 이 람현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목적지는 삭주!”

“그렇다면…….”

“후…….”

숨을 내쉰 낭삼추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의 장포가 펄럭이며 바람에 날렸다. 그의 앞에 서 있던 혈마대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부복했다.

“지금부터 삭주로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조사해라. 상대는 마차를 끌고 있으니 그 길은 한정되어 있을 터. 그리고 신룡에 대해서 모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모으도록. 오늘 내로!”

“존명!”

객잔 안이 울리며 순간 진동을 일으켰다. 독고요는 대원들의 우렁찬 대답에 눈을 빛내며 입술을 축였다.

“감히 나의 먹이를 빼앗아간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똑똑히 알게 해 주마.”

***

한정은 불이 꺼지지 않도록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져 노숙을 하기로 한 것이다.

타닥!

불길에 휩싸인 장작이 갈라지며 불씨를 토해 냈다. 한정은 불쏘시개를 이용해 모닥불을 휘저었다. 그러자 몇 개의 덩어리가 김을 피우며 굴러 나왔다. 고깃덩어리였다.

한정은 그 고깃덩어리를 진철에게 건네고 북궁아에게도 건넸다. 진철은 고기에 묻은 굳어 버린 진흙을 털어 내며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데 진 소협, 할 말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오?”

“아!”

한정의 말에 진철은 고깃덩어리를 내려놓으며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다시 나온 그의 손에는 양피지가 한 장 들려 있었다.

“이건 독고 형이 주고 간 것입니다. 여기에는 혈랑파에 대한 것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안 소저를 납치한 이유 역시.”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보면 안 소저를 납치한 목적은 어떤 존재를 위한 제물인 듯합니다.”

“제물?”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북궁아는 그런 진철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처녀성을 간직한 백 명의 여인의 피로 목욕을 하고, 백 명의 피에서 정수를 뽑아 섭취하고, 백 명의 처녀와 정을 나눠 정기를 흡수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아마도 안 소저를 납치한 이유는 그 때문인 듯합니다. 거기에 안 소저 외에도 수많은 여인들이 납치를 당했을 겁니다.”

“그런!”

진철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한정이 눈을 부릅떴다. 그만큼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적어도 삼백 명의 여인을 죽인다는 말이 아닌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는 겁니까!”

“그 존재의 이름은 혈마신. 그를 깨우기 위한 제물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혈마신?”

한정이 되묻자 진철은 양피지를 바라보았다.

“혈궁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적인 존재로 부활하게 된다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재앙을 뿌린다는 악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혈궁에서는 그 혈마신을 부활시켜 중원을 침범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독고 형과 같은 혈귀라 불리는 자들은 바로 그 혈마신의 호위라고 합니다.”

“이럴 수가…….”

한정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철에게서 혈귀에 대해 들어 그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강력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혈귀로 인해 절대 쓰러질 거 같지 않던 진철이 오 일이나 정신을 잃지 않았던가? 그런데 진철은 그런 혈귀들이 고작 호위대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서 무림 동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지 않겠소? 삼백여 명이나 되는 여인들을 납치하고 살해하려는 그들이니 동도들의 힘을 구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좋겠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 말이오?”

진철은 식어 가는 고깃덩어리를 조각내어 입안에 넣고 씹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한 형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이 산서 지방은 사파와 중립 문파들의 영역입니다. 만약 정파에서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면 이건 정파에서 사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파 무림의 개입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소! 잘못하면 삼백 명이나 되는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게 된단 말이오!”

“네,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파가 사파의 영역에 침범하게 된다면 그건 곧 정사 간의 전쟁으로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삼백 명의 목숨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냥 그들이 죽도록 손 놓고 있자는 것이오?”

“제 말을 들어 보시지요. 만약 사파가 뭘 잘못 먹어 길을 열어 준다고 하더라도, 동료를 모으고 제 시간 안에 삭주에 도착하긴 어렵습니다. 제물을 희생해 혈마신이 태어나기까지 이제 고작 칠 일이 남은 상태니까요.”

“……!”

크게 놀라는 한정의 모습에 진철은 다시 입을 열었다.

“칠 일 후… 혈랑파로 끌려간 모든 제물들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 그렇다면… 칠 일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불행 중 다행이라면, 여기서 삭주까지는 삼사 일 거리라는 겁니다.”

안심하라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진철의 말을 들은 한정은 온몸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혈랑파가 이미 혈궁의 지부라는 것은 알고 있는 상태였다.

혈궁이 무엇인가?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거대한 단체가 아닌가.

혈궁의 무사만 해도 몇천이 훌쩍 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고작 세 명이었다.

비록 혈궁으로 곧바로 가는 게 아니라 지부로 향한다고 하지만 그런 혈궁의 지부였다. 결코 세 명이서 뭘 어찌할 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물론 저희가 삭주로 향하는 도중에 안 소저를 발견한다면 좋지만, 그들 역시 마차로 후송 중일 겁니다. 그것도 은밀하게. 거기에 삭주로 가는 길 역시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한 가지 의견을 말할까 합니다.”

한정은 고개를 들어 순식간에 축 처진 눈으로 진철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렇게 안 소저를 납치한 자들을 뒤쫓는다고 해도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상태입니다. 거기에 말했다시피 어느 길로 가는지조차 모르지요. 아까 지나쳐 온 마을에서도 수상한 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제물들을 후송 중입니다.”

한정은 지금까지 지나쳐 온 마을들을 떠올렸다.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안선영의 모습을 알려 주며 수상한 자들이 지나갔는지 수소문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수상한 자들을 봤다고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저희는 안 소저를 찾는 것을 당분간 포기합니다. 그리고 하루 시간을 둬서 오 일 안에 삭주에 도착합니다.”

“그게 무슨!”

진철의 말에 한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굉장히 흥분했는지 붉게 달아오른 그는 진철을 노려보았다.

“절대 그럴 순 없소! 아씨를 찾는 것을 포기하자니!”

“아예 포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희는 삭주의 혈랑파로 곧장 향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동안 저희는 마을마다 들러 안 소저의 행방을 묻고 하느라 꽤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말고 그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갖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

한정의 물음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북궁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혈랑파에서의 싸움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치열할 겁니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의미 없는 죽음입니다. 저희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안 소저를 구출하러 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 오 일간…….”

진철은 미소를 지우며 입을 열었다.

“살아남기 위한 준비를 할 것입니다.”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진철의 말에 한정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진철은 그런 한정과 북궁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진철의 입에서 계획이 흘러나올 때마다 그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진철의 계획을 들었음에도 기운이 나지 않는지 한정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진철이 그런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겼다. 한정은 고개를 들어 진철을 바라보았다.

“너무 걱정 마시죠.”

“그런 말을 들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구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미리 포기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지게 됩니다.”

진철의 계속되는 말에도 한정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진철은 그런 한정과 눈을 맞추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아십니까? ‘사람은 먼 곳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너무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은 발밑을 보지 못한다.’ 지금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

진철은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정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정은 진철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그런 한정의 어깨를 다시 두들기고는 고개를 돌렸다.

“음…….”

그러다 바위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북궁아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걸음을 옮겼다. 북궁아는 밤하늘의 별이라도 일일이 세고 있는 듯 진철이 곁에 다가왔음에도 하늘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진철은 북궁아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똑같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꽤 많은 별이 청량한 빛을 내뿜으며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별을 바라다 봤을까? 북궁아가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살아올 수 있는 거겠지?”

“…겁나?”

진철의 물음에 북궁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겁이 나는 건 아니다.”

“두렵다면 숨길 필요 없어.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평등해지는 법이니까. 겁이 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 게 아니다.”

다시 고개를 저은 북궁아가 고개를 돌려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 역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지 가슴이 너무 두근거린다.”

“…….”

“그리고 정말 죽는 게 두렵다고 해도 난 떨어지지 않을 거다.”

북궁아는 손을 들어 가슴 언저리를 짚었다.

“여기가 말하고 있어. 떨어지게 된다면 설령 살게 된다 하더라도 후회하게 될 거라고. 난 후회하고 싶지 않다.”

북궁아의 단호한 말에 진철은 그녀를 바라보다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그의 손길에 안심이 되는지 북궁아가 눈을 감았다.

그렇게 또다시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녘 동이 트자 진철과 일행은 바로 마차를 타고 출발했다. 아무리 추격을 포기하고 곧장 혈랑파로 향하기로 했다지만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람현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다. 람현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했다.

“이럇!”

한정이 말고삐를 내려치자 마차가 밤이슬에 젖은 땅을 힘차게 내달렸다.

마차는 한 시진 정도를 달리자 큰 도시에 도착했다. 바로 람현이었다.

삭주성에서 현에 속하는 람현은 제법 큰 도시다. 성도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그 주위에 별다른 도시가 없기에 대부분의 물품과 사람들이 람현으로 모여들기 때문이다.

람현에 도착한 진철은 마차를 맡기고 간단한 요기를 하기 위해 곧바로 객잔으로 향했다.

“일단 두 시진 동안만 람현에 머물겠습니다. 그 시간 안에 각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서 다시 이 객잔으로 모입니다.”

진철이 소면을 삼키며 말하자 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북궁아는 그의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얼굴을 구겼다.

“또 떨어트리면 죽여 버린다고 말했을 텐데?”

“…….”

북궁아의 살기 어린 말에 진철은 뒷머리를 긁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번은 참아 주라. 너나 나나 서로 필요한 물건이 있을 거 아냐? 안 그래? 너 같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서… 그래! 찌찌 가리개…….”

퍽!

진철이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치며 말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 찻잔이 틀어박혔다. 진철은 얼굴에 묻은 찻물을 닦아 내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서로 민감한 물품이 있을 거 아냐? 그런 것도 구입하고 해야 하니까 딱 두 시진만 각자 행동하자. 응?”

“흥!”

북궁아는 진철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난 일단 대장간에 들른 다음에 삭주까지의 지름길을 알아보겠소.”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그럼 다 먹었으면 슬슬 일어나죠.”

진철이 소면 그릇을 들어 국물을 들이마셨다. 다시 그릇을 내려놓자 깨끗하게 비워진 안이 번들거렸다.

한정은 그 모습에 살짝 얼굴을 구겼다. 자신은 다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길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제대로 식사를 끝내지 못했었다. 이상하게 객잔에만 들어오면 식사를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먼저 가시구려. 난 식사를 다 끝낸 다음에 나가도록 하겠소.”

“뭐, 그럼 그렇게 하세요. 갈까? 참, 대도는 가져가지 마. 너무 눈에 띄니까. 나가서 문제 일으키지도 말고.”

진철은 방에 놓여 있던 대도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북궁아는 다시 콧방귀를 뀌며 빠르게 객잔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다시 어색하게 웃음을 흘린 진철은 그녀의 뒤를 따라 객잔 입구로 발을 옮겼다.

“참!”

“음?”

그때 진철이 고개를 돌려 한정을 바라보았다.

“계산은 가장 늦게 먹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

“…….”

한정은 자신도 모르게 젓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잘 알고 있겠지? 신룡을 발견하면 그 즉시 몸을 숨기고 미행하도록 해. 어차피 람현에서 삭주로 가는 길은 단 한 곳. 거기에 노숙할 만한 장소도 딱 한 곳이니까.”

“예.”

낭삼추의 말에 뒤따르던 수하가 대답했다.

낭삼추는 학사풍의 옷을 입고 거리를 나와 있는 상태였다. 날카로운 칼과 같았던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부잣집 도련님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가 변장한 이유는 조금 전 신룡으로 보이는 자가 람현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리 한번 얼굴을 보려는 생각에 거리에 나왔다.

“애들은?”

“지시하신 대로 명을 내려놨습니다. 대부분의 대원들은 그 곳에서 대기 중이고, 몇몇은 람현에서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좋아.”

낭삼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상대는 독고요를 처리한 자이기 때문이다.

‘독고요.’

낭삼추의 머릿속으로 독고요의 얼굴이 떠올랐다. 굳게 다문 입술과 형형한 빛을 뿌리는 눈은 그야말로 사내 중에서도 사내다웠다. 비록 자신보다는 어렸지만 적진을 향해 달려가 누비는 무공과 대원들을 다루는 솜씨는 궁에서도 으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존경하게 된 것이다.

그런 사내를 죽인 자가 신룡이라 하였다. 흥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룡… 꼭 네놈은 내 손으로 죽여 주마.’

순간 저도 모르게 내공을 일으킨 낭삼추의 주위로 미풍이 불었다. 뒤따르던 수하가 흠칫 놀라며 낭삼추에게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도, 도련님!”

‘아차!’

수하의 말에 정신이 든 낭삼추가 긴장을 풀자 부풀어 오르던 그의 장포가 가라앉았다.

낭삼추는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나 자신의 모습을 본 자가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서로 각자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던 것인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낭삼추에게 시선을 주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후우…….”

낭삼추는 숨을 깊게 몰아쉬고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대로를 걸었다.

그러나 곧 그의 걸음이 다시 멈추고 말았다. 자신과 십여 장의 거리에서 다가오고 있는 한 여인이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거대한 대도를 등에 메고 사뿐하게 걷는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그녀에게서 이유 모를 매력이 풍겨져 나왔다.

그런 그녀가 낭삼추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향기가 낭삼추의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낭삼추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그러다 그녀가 인파에 묻혀 사라지려고 하자 얼른 걸음을 옮겼다.

“뭐, 잠깐은 괜찮겠지.”

“대… 아니 도련님?”

뒤에 서 있던 수하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지만 낭삼추는 미소를 지으며 발을 멈추지 않았다.

***

북궁아는 마음이 너무나 답답했다. 진철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았다.

자신의 행동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그런데도 진철은 자꾸 자신을 밀어내었다. 그것이 너무나 야속했다.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땐 정말로 씹어 먹어 주겠어.’

북궁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을 주어 강하게 쥐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자신이 장터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달은 북궁아는 손에 들어간 힘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젠 뭘 하지…….’

진철은 분명 필요한 물품을 사 오라고 했었다. 그런데 딱히 필요한 게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가자니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북궁아는 얼굴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잡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온갖 세공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북궁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궁으로 귀환하면 눈앞에 있는 장신구들은 그야말로 싸구려 그 자체였다. 하지만 북궁아는 그 장신구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손을 뻗어 장신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귀걸이였다. 그냥 길에 돌아다니는 돌을 깎아 만든 것 같은데 빛이 반사되는 자태가 아름다웠다.

북궁아는 자신도 모르게 귀걸이를 귀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청동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왠지 창피했기 때문이다. 북궁아는 재빨리 귀걸이를 내려놓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장신구도 감히 그 자태를 뽐내지 못하는구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학사풍의 젊은 청년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북궁아의 옆으로 다가오며 그녀가 내려놓은 귀걸이를 들어 올렸다.

“이것이 마음에 들던 것 아니오? 주인장, 얼마요?”

“예예, 철전 스무 개만 주십쇼.”

“흠…….”

사내는 품속에서 금색 실로 수놓아진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 든 그는 중년인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다네.”

“예예! 감사합니다요!”

중년인이 넙죽 고개를 숙이자 고개를 끄덕인 사내는 몸을 돌려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북궁아가 어느새 자리를 벗어나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꽃은 가시가 있는 법이지.”

***

객잔을 나온 진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객잔 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살핀 다음 곧바로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창문을 통해 잡아 놓은 방으로 들어온 진철은 곧바로 침대로 몸을 날렸다. 그런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랜만에 구속에서 풀려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자고 방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잠깐 누워 있던 진철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사실 진철은 지금까지 사부와의 비무 외에는 이렇다 할 결투 경험이 없었다. 실전이 거의 전무한 것이다.

그에게 주재구, 홍군과 하균, 그리고 독고요와의 싸움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특히 독고요와의 싸움에서는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당하는 건 오히려 자신일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독고요가 준 양피지에는 혈랑파에 그런 혈귀가 세 명이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깨달은 것을 하루빨리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시켜야 했다.

명상에 빠져든 진철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싸웠던 상대들이 다시 떠올랐다. 자신과 동등한 실력을 갖추도록 설정한 상상 속의 적들이었다.

홍군의 도가 진철의 허리를 갈라 왔고, 하균의 검이 머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주재구의 도강이 따랐다. 진철의 뒤에서는 독고요가 혈기를 내뿜으며 장풍을 쏘았다.

진철은 언제나처럼 검을 뽑지 않고 그들을 맞상대했다. 실제보다 더욱 뛰어난 실력을 지닌 하균은 홍아일섬을 연달아 펼치며 진철을 압박했다.

연속적으로 날아오는 붉은 강기를 흘리며 뒤로 물러서던 진철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진철은 급히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런 그의 발밑으로 검은 도강이 훑고 지나갔다.

주재구의 쾌도식인 일섬(一閃)이었다.

가까스로 피한 진철은 숨 돌릴 새도 없이 검집을 위로 추켜올렸다. 진철을 따라 허공에 몸을 띄운 홍군이 월파단흑도를 펼친 것이다.

꽝!

강력한 도강이 진철의 몸을 때리자 그의 몸이 빠르게 바닥에 내리꽂혔다.

“컥!”

진철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붉은 신형이 떨어져 내렸다. 곧이어 핏빛 안광을 뿌리며 떨어져 내린 독고요의 권강이 진철을 덮쳤다.

“헉헉!”

상상 속에서 깨어난 진철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그의 옷은 각혈로 인해 흥건히 젖어 있었다. 머릿속에서의 대결은 상상을 뛰어넘어 실체에게도 충격을 준 것이다.

진철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상까지 입고 말았다.

자신과 동등하게 무공 수위를 높인 상상 속의 적들은 그야말로 폭풍처럼 진철을 몰아쳤다. 하지만 다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혈도의 도법은 분명 빠르고 강하지만 그만큼 단순하다. 도법의 정석이라 불릴 만큼. 하균이라 불리던 자의 검술은 그야말로 쾌검식. 하지만 위력이 약하다. 그리고 홍군이라 불린 자는 폭발적인 도법과 노련한 경험이 있지만 내력의 소모가 너무 크다.’

진철은 자신과 싸웠던 자들의 무공의 특징들을 파악해 나갔다. 그들의 무공 속에서 만개화향으로 가는 단서를 잡아 내기 위함이었다. 모든 것은 만류귀종이라 하지 않던가?

진철은 마혈도의 강(强)을, 하균의 쾌(快)를, 홍군의 폭(爆)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또다시 명상에 빠져들었다. 그런 진철의 주위로 하얀 운무가 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체되었던 그의 무공이 실전을 겪고 명상을 통해 한 계단 올라서려 하고 있었다.

***

한정은 객잔을 나서자마자 바로 대장간을 들렀다. 검을 손질할 숫돌을 구입하기 위함이었다.

“철전 열 개만 주시구려.”

숫돌을 챙겨 준 대장장이가 입을 열자 한정은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거기서 철전 열 개를 꺼내 넘겨주던 한정의 눈이 순간 이채를 발했다.

“저기 있는 활들은 파는 겁니까?”

한정이 손을 뻗어 전시되어 있는 활들을 가리키자 그곳을 바라본 대장장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하나 사실 거요?”

“예. 좋은 놈으로 하나 골라 주시죠.”

한정의 말에 대장장이는 시큰둥한 얼굴로 활이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대장장이는 활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중간쯤에 있는 것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약 다섯 자 정도의 장궁을 든 그는 활줄을 몇 번 당겨 보더니 바로 한정에게 넘겼다.

“이 정도면 어떻소? 나름 손재주 있는 사람이 튼튼하게 만든 놈이라 어디에 내놔도 괜찮다오.”

“흠…….”

한정은 받아 든 활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러고는 대장간 밖을 향해 팔을 뻗고 활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활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활대가 휘었다.

그런 한정의 눈앞에 몇 명의 사내들이 지나갔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삿갓을 쓴 사내들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풍기는 기세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마치 그들이 거기 있는 거라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들을 향해 조준한 한정은, 그들이 인파에 가려 시야에서 사라지자 활대를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좋군요. 몇 번 써 봐야 알겠지만 표적도 잘 보이고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내가 팔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괜찮은 놈이니 만족스러울 거요. 은자 두 개만 주쇼.”

활치곤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은자를 꺼내 들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참, 화살은 얼마나 합니까?”

“한 묶음에 철전 다섯 개요. 화살도 구입할 거요?”

“네. 흠… 네 묶음만 주시죠.”

“꽤 많을 터인데…….”

대장장이의 말에 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장이는 그 모습에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나온 그의 품에는 네 묶음의 화살이 안겨 있었다.

“이 시복(矢服)은 그냥 덤이라오. 어차피 헐은 것이라 제값 받기는 뭐하니 그냥 가져가쇼.”

“고맙습니다.”

대장장이가 등 뒤에 메고 있던 시복을 한정에게 건네주고는 끈으로 네 묶음의 화살을 하나로 묶기 시작했다.

“자, 여기 있소.”

한정은 값을 치르고 화살을 받아 들며 등에 들쳐 메었다. 그러고는 대장간을 나섰다.

“흐음…….”

한정의 시선이 조금 전 흑의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뭐, 상관없겠지.”

한정은 고개를 돌리며 다시 대로를 걸어갔다. 기름 주머니를 사야 했기 때문이다.

***

“소저, 혹시 성명을 알 수 있소? 본인은 낭삼추라고 하오만?”

낭삼추가 미소를 띠며 북궁아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북궁아의 입이 열리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낭삼추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벌써 한 시진이 넘게 무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다시 펴졌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그녀에게서 왠지 모를 매력이 다시 느껴진 것이다. 모름지기 여자는 이래야 굴복시키는 맛이 있다고 생각됐다.

“소저.”

낭삼추가 북궁아의 손을 잡아챘다. 순간 북궁아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낭삼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낭삼추의 얼굴에 미소가 자리 잡았다. 드디어 관심을 가져준 것이다.

낭삼추는 북궁아의 손에 귀걸이를 얹어 주었다.

“소저와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북궁아가 시선을 내리자 조금 전 자신이 만지작거리던 귀걸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북궁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낭삼추를 바라보았다.

“험험, 그러니까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와 차나 한잔하실 수 있겠소?”

“…….”

낭삼추의 말에도 북궁아는 입을 열지 않고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낭삼추는 그녀의 시선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실은… 후우!”

숨을 깊게 몰아쉰 낭삼추는 북궁아와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와 같은 소저는 처음 보오. 그대를 본 순간 깨달았다오. 난 소저와 같은 여인을 기다려 왔다는 것을. 이 부근이 너무나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구려.”

낭삼추는 자신의 뒤에 꽃이 핀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라 기분이 그러했다. 더군다나 지금 한 고백은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고백이었다.

미인은 용기 있는 자가 얻는다 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서 왠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

북궁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손을 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놓여 있던 귀걸이가 허공을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 귀걸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나가던 행인이 밟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하지만 북궁아는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길을 걷기 시작했다.

순간 낭삼추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진심 어린 고백이 무시를 당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귀걸이가 밟히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짓밟힌 기분이 들었다.

탁!

낭삼추가 순간 일 장을 이동하며 북궁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 순간 북궁아의 신형이 빠르게 돌았다.

“흡!”

갑작스런 그녀의 몸놀림에 낭삼추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의 목 언저리에는 어느새 출수한 것인지 북궁아의 또 다른 손이 놓여 있었다.

“한 번만 더 귀찮게 하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

북궁아의 사늘한 말에 낭삼추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수도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범상치 않았다.

북궁아는 낭삼추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그를 한 번 노려보고는 수도를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빌어먹을…….’

낭삼추는 이를 악물며 눈을 빛냈다. 아무리 반한 여인이라고는 하지만 일개 계집이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준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했기 때문이다.

낭삼추는 저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 올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하지만 곧 멈춰 서고 말았다. 북궁아의 앞으로 호리호리하게 생긴 한 인형이 나타난 것이다.

“필요한 건 다 샀어?”

“…….”

북궁아는 말을 건네 오는 진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빠르게 돌렸다. 그러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에 진철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진철은 명상을 끝내고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왔었다. 그러다 북궁아를 발견하고 아까 객잔에서의 일도 있고 해서 친근하게 말을 건넸건만 북궁아의 반응은 북풍 그 자체였다.

“저기… 아직도 삐친 거야?”

“흥!”

진철이 조심스레 입을 열자 북궁아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진철은 뒷머리를 긁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낭삼추의 눈이 부릅떠졌다. 북궁아가 진철의 손을 뿌리치기는커녕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따라와 봐.”

“어, 어디를…….”

“아, 글쎄 따라와 보면 알아.”

진철이 손을 잡아당기자 북궁아는 가녀린 요조숙녀처럼 그의 뒤를 따라갔다.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해맑았다.

그 광경은 낭삼추의 눈에 핏발에 서게 만들기 충분했다. 낭삼추의 장포가 바람 넣은 가죽 주머니처럼 부풀어 올랐다.

-대주!

순간 낭삼추의 귓가에 전음이 들려왔다. 낭삼추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흑의인이 객잔 옆 그늘진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저자입니다.

-저자라니?

-신룡 말입니다. 저자가 바로 신룡입니다.

‘저놈이?’

낭삼추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호리호리하게 생겨 칼조차 쥐기 힘들어 보이는 자였다. 그런 그가 독고요를 죽였다니.

‘네놈이… 신룡!’

낭삼추가 이를 악물고는 진철을 찢어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것은 진철과 북궁아가 인파에 묻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낭삼추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놈을 죽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군.’

낭삼추의 뇌리에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따라가던 북궁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디 가는 건데?”

“어허! 말이 많다.”

북궁아가 다시 묻자 진철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를 걷자 진철의 발이 멈추었다. 북궁아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온갖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는 잡화점이었다.

“사과의 의미로 마음에 드는 거 한 가지 사 줄게.”

“…….”

여기까지 와서 부끄러운 건지 진철은 콧잔등을 긁으며 시선을 돌렸다. 북궁아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전시대 앞으로 다가갔다.

“…….”

일각이 흐르고 이각이 흘렀다. 처음에 부끄러웠던 진철의 얼굴은 평온하게 돌아왔고 지금은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북궁아가 똑같이 보이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대충 고르지?”

“음…….”

북궁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던 장신구를 내려놓고 다른 것을 들어 올렸다.

다시 반각이 흘렀다. 그러자 진철이 북궁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못 고르겠어?”

북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한숨을 내쉬며 목걸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끈으로 된 줄에 옥이 하나 달려 있는 조잡한 목걸이였다.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이걸로 하자. 다음에 다시 사 줄게.”

“응…….”

진철이 목걸이를 들어 보이자 북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값을 치르고 그가 목걸이를 건네주자 북궁아는 마치 소중한 아이를 받는 아낙처럼 목걸이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런 그녀의 눈은 목걸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 진 소협. 북궁 소저?”

잡화점에서 나오자 진철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정이 짐을 바라바리 싸들고 진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여기가 맞아?”

“그렇습니다. 이 근처에서 신녀님을 보았습니다.”

일화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앞에 있던 북궁아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신녀님을 미행하다 걸리면 경을 치르는 것 아닙니까?”

“그럼 어떻게 하라고? 빈손으로 그냥 궁으로 돌아가라고? 궁주님 성격을 몰라서 그래? 그냥 가 봐. 백 일 동안 알몸으로 궁 앞에 묶여 있을 수도 있어.”

“음…….”

월화의 말에 일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궁걸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빌어먹을 진철인지 진똥인지, 그런 놈이 대체 어디가 좋다고 신녀님께서 따라다니시는 건지, 원…….”

칼처럼 시린 북풍을 백 일 동안 알몸으로 맞는다고 생각하자 오한이 돋는지, 살짝 몸을 떤 월화는 투덜거리며 일화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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