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검은 그 어떤 것으로 포장한다 하더라도 흉기다
세세호는 하나 남은 손으로 양피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을 꼼꼼하게 살펴본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에 부복하고 있는 수하를 바라보았다.
“제단은?”
“명하신 대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물만 도착하고 때만 도래하면 될 겁니다.”
“훗, 좋아.”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화창하기 그지없는 푸른 하늘이 보인다.
세세호가 시선을 내리자 그곳에 거대한 하나의 제단이 보였다. 수십 장의 높이와 넓이를 지닌 제단. 그곳에서 혈마신이 탄생할 것이다.
“그런데 신룡을 죽이는 일에 장로님들을 보낼 필요가 있었습니까?”
“신룡이라…….”
세세호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광 장로와 본 궁의 정예들을 죽인 혈귀를 처리한 자다. 그런 그를 죽이는 데 그만한 전력은 당연히 투입해야지. 아니, 모자랄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세세호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들이 신룡을 막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들은 시간만 벌면 돼. 혈마신이 부활할 시간만…….”
***
람현을 벗어난 진철과 일행은 부지런히 마차를 몰았다. 날이 저물기 전까지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시진만 더 가면 작은 저수지가 나올 겁니다. 그곳에서 오늘 노숙을 하고 내일 새벽에 출발하면 될 겁니다.”
한정의 말에 함께 마부석에 앉아 있던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산 초입에 들어섰는지 수풀이 꽤나 우거져 있었다.
그렇게 점점 우거지는 숲길을 따라 한 시진을 더 가자 한정의 말대로 작은 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에서 내려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은 갓 시집가는 처녀의 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그들은 람현에서 사 온 건포를 씹으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진 소협은 뭘 할 거요?”
“음… 저는 일단 산보나 다녀오려고 합니다.”
“산보?”
“요 근래 뭔가 깨달은 게 있어서…….”
말을 하던 진철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한정은 눈을 크게 떴다. 진철의 말인즉 무공이 한 단계 더 올라섰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그렇다면?”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실마리를 잡았을 뿐이니까요.”
진철의 말에도 한정은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 진철의 무공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간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할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어올랐다.
그렇다고 흥분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진철의 모습과 너무나 상반되는 자신의 모습에 한정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진철은 그런 한정의 어깨를 두들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이따 자정 전까지는 돌아올 겁니다. 만약 그때까지 오지 않는다면 한 형께서 초번을 서 주시죠.”
“음… 알았소.”
진철은 북궁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진철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다.
“왜? 오랜만에 목욕도 하려고 하는데 따라오려고?”
“…….”
진철의 말에 북궁아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웃음을 흘린 진철은 몸을 돌려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약 이각 정도를 걷자 꽤 넓은 공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진철은 주위를 둘러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넓은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로 인해 공터 밖에서 안을 보기도 쉽지 않아 수련의 장소로는 적당했다.
공터의 한가운데로 간 진철은 좌선을 하고 앉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으며 명상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풀벌레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다 바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밑에서 흐르는 계곡물의 소리, 그리고 어딘가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산짐승들의 소리.
진철은 들려오는 자연의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잠시 후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진철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지어진 미소였다.
“후우…….”
거의 반 시진을 그렇게 앉아 있던 진철은 숨을 깊게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본디 본 파의 검법은 화려한 검법이 많다. 그런 화려함 속에 칼날을 숨기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 화산검법의 특징이다.’
옥린수의 말을 떠올린 진철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진철의 손안으로 자하신검이 빨려 들어왔다.
‘화산파의 검법을 집대성하여 만든 이 화산검결은 그런 화산의 묘리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검법이다.’
진철은 팔을 들어 자하신검을 뻗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팔을 저었다.
진철은 다시 손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그러고는 다시 옆으로 그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던 진철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빨라지기 시작했다.
자하신검이 세 개로 나눠지는가 하면 꽃봉오리를 그려 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봉오리를 단숨에 잘라 내기도 하였다.
‘쾌(快) 속에 환(幻)이 있고 환 속에 유(柔)가 있다. 그리고 그 속에 강(强)이 숨어 있으니, 그 어찌 천하제일이라 할 수 없겠는가?’
그때 허공에 자색의 선을 그으며 검무를 추던 진철의 움직임이 단순해지며 하나의 원을 천천히 그렸다.
‘그 모든 묘리를 한 점에 모아 폭발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개화의 묘리이니.’
진철이 허공에 그린 원 안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그 주위로 강력한 바람이 일어나며 앞으로 쏠려 나갔다. 찌르는 순간 부드럽게 모은 힘을 한 점으로 빠르게 보낸 뒤 폭발시킨 것이다.
‘이것은 만개화향(滿開花香)으로 가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만개화향…….’
화산검결의 이 장인 만개화향을 떠올린 진철의 발이 앞으로 넓게 뻗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뻗은 검을 옆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공간이 검을 따라가듯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만개한 꽃의 향기!’
진철이 넓게 뻗은 검을 허공에 그었다. 그 순간 진철을 중심으로 공간이 달라지는 듯한 현상이 일어났다.
검에서 풍겨져 나간 미풍은 부채꼴을 그리며 숲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후우… 역시 안 되나.”
숨을 몰아쉬는 진철의 이마에 땀이 가득 맺혀 있었다. 한 가지의 초식에 수많은 묘리를 한 번에 넣으려니 심적으로 많이 지쳐 버린 것이다. 그것도 형식만 익혔을 뿐 아직 심득을 얻지 못한 미완성의 무공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공의 무리 역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뭐, 천천히 하다 보면 되겠지. 그래도 도착하기 전까지는 완성해야 하는데…….”
진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는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거 많이 늦겠는데…….”
진철은 머리를 긁으며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잠시 후, 진철이 벗어난 공터를 중심으로 수많은 나무들이 꺾이며 뒤로 누워 버렸다.
***
진철이 산속으로 들어간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된다는 건 아니다. 진철을 어찌할 수 있는 무인은 무림에서도 극소수였으니까. 단지 한정의 걱정은 그가 늦게 오면 늦게 온 만큼 자신의 불침번 역시 길어진다는 것이었다.
“꽤 늦는구려.”
궁술을 연습하던 한정은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북궁아가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북궁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북궁 소저?”
그녀의 갑작스런 반응에 저도 모르게 놀란 한정은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북궁아는 그런 한정에게 말 한마디 없이 몸을 일으키고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어디 가시오?”
한정이 재빨리 묻자 걸음을 멈춘 북궁아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따라오면 죽는다.”
“…….”
북궁아의 겨울바람처럼 차가운 말투에 한정은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 북궁아는 멈췄던 발을 다시 옮겨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익!”
그 순간 한정의 얼굴이 구겨졌다. 왠지 모르게 요새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어라? 한 형 혼자입니까?”
“…….”
진철의 말에 한정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은 진철은 의문을 품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없소!”
“엥?”
냉담하기 그지없는 그의 답변에 진철의 의문은 더욱더 깊어만 갔다.
진철은 궁금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북궁아는 대도까지 들고 갔는지 그녀의 물품은 단 한 개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짐이랄 것도 없었지만.
“흐음, 혹시…….”
“여긴가?”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진철과 한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민둥산의 머리를 한 장년인과 검은 장포를 걸친 청년이 서 있었다.
“그렇습니다.”
청년이 고개를 숙이자 장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혹시 이 중에 신룡이라 불리는 아이가 있는가?”
진철과 한정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진철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입니다만?”
“그런가? 난 귀수자(鬼手子) 무각이라고 한다네. 그리고 이 아이는 혈마대주 낭삼추라고 하지.”
무각이 옆의 청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낭삼추라 불린 이가 앞으로 나서며 진철에게 다가갔다.
“우린 혈궁에서 왔다네.”
“……!”
혈마대라는 말에 몸을 일으키던 한정은 무각의 이어지는 말에 눈을 부릅떴다.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혈궁에서 무사들을 보내온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염치 불구하고 먼저 나서고 싶지만, 여기 이 아이가 신룡 자네에게 물어볼 게 있다고 하더군.”
“저뿐만이 아닙니다.”
“뭐, 상관없지 않나?”
“…….”
무각의 말에 낭삼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검. 독고요가 지니고 있던 혈아였다.
낭삼추는 혈아를 진철에게 겨누며 입을 열었다.
“독고요… 그의 마지막은 어땠는가?”
진철은 그의 말에 독고요의 말을 떠올렸다. 독고요가 혈마대에 있을 때 부대주였던 사내, 낭삼추!
진철은 허리춤에 맨 자하신검을 빼 들며 입을 열었다.
“…멋있었지.”
“훗, 그래?”
웃음을 흘린 낭삼추는 눈을 부릅뜨며 입을 열었다.
“혈마대는 들어라! 혈마환영진(血魔幻影陣)을 펼친다!”
그 순간 주변 숲 속에서 수많은 인형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검은 장포에 삿갓을 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곧바로 진철과 한정을 둘러쌌다.
진철과 한정은 서로 등을 맞대며 다가오는 적을 경계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진철이 한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 형, 내가 신호를 하면 곧장 뒤를 향해 달리세요.”
“그게 무슨…….”
진철의 말에 한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낭삼추가 혈아를 위로 들어 올렸다.
“개진!”
진철과 한정을 둘러싼 사내들이 낭삼추의 외침에 맞춰 그 주위를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돌던 그들은 점점 속도를 올렸고, 그러던 어느 순간 그들의 모습이 기이하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쳇!”
진철이 혀를 차며 빠르게 검을 그었다. 자색의 검기가 전방을 향해 뻗어 나갔다. 진이 완전히 완성되기 전에 부수려는 것이다.
하지만 검기가 사내들에게 도달하는 순간 그들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역시!”
진철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전에 경험한 혈마폭열진과 같은 환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옆에서 서늘한 예기가 다가오자 진철이 그곳을 향해 검을 뻗었다.
카칵!
검의 옆면을 때리며 위로 흘려 버린 진철은 그대로 한 발 뻗어 나가며 주먹을 질렀다. 하지만 진철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스스스!
진철의 주먹이 박힌 흑의인이 옆으로 찢어지듯 흩어진 것이다. 환영이었다.
“큭!”
진철의 뒤에 서 있던 한정이 신음을 터트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당했는지 그의 허벅지에는 붉은 핏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난 상관없지만 한 형이…….’
진철이 힐끗 한정을 쳐다보았다. 잠깐의 격돌이었지만 진의 압박과 환영에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는지 이마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슈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두 명의 흑의인이 한정을 향해 검을 내질러 갔다. 그 순간 진철의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촤악!
“헉!”
“저, 저게 무슨!”
혈마대의 사이에서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진철의 신형이 세 개로 나눠지며 두 개의 신형이 한정의 등 뒤에서 그의 양 옆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모습에 달려들던 무사들도 놀랐는지 주춤거렸다.
그때 진철의 분신 같은 그림자가 검을 휘둘러 각각 서너 개의 검기를 뿌렸다. 그런 진철의 분신이 한정의 앞에서 하나로 뭉쳤다. 절정의 보법으로 만들어진 환상이었다.
쩌쩡!
주춤거린 약간의 시간 때문에 달려들던 흑의인들은 다가오는 검기를 피하지 못하고 검을 들어 막았다. 그에 그들은 달려온 것보다 더욱 빠르게 뒤로 튕겨 나갔다.
두 명의 흑의인이 튕겨져 나가자 진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 하지만 그걸 알아차린 순간 곧바로 다른 흑의인들이 그 구멍을 메워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숙련된 무사들인지 잘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왠지 모르게 흑의인들이 더 늘어난 기분이 들었다.
“괜찮습니까?”
“크윽, 괜찮소.”
한정이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흑의인들보다 실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환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겪는 지금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그야말로 ‘짐’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 한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철은 낭삼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 한 형은 독고 형의 일과는 무관한데… 빼 줄 수 있겠나?”
“훗, 부탁인가?”
“아니, 제안이다.”
“제안?”
낭삼추가 되묻자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한 형을 빼 준다면 자네가 궁금해하는 것을 보여 주지. 독고 형이 어떻게 갔는지.”
“……!”
진철의 말에 낭삼추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옆에 서 있던 그의 수하가 그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혈아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미 네놈들이 본 궁의 제물을 쫓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독고요의 문제를 제쳐 두고서라도 네놈들은 이미 척살령이 내려져 있는 상태란 거지.”
“…….”
낭삼추의 말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진철은 얼굴을 굳혔다. 어느새 진은 더욱 확고해져 완벽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진 밖에 서 있는 낭삼추의 신형이 두 개로 나눠져 보일 정도였다.
진철은 한정의 어깨를 살짝 쳤다. 한정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진철의 입술이 달싹였다.
팟!
그때 한정의 뒤로 세 명의 흑의인이 달려들었다. 그것을 눈치챈 진철의 신형이 다시 분신을 만들며 한정의 뒤로 돌아갔다.
슈악!
진철이 허공을 그어 검기를 부채꼴처럼 넓게 퍼트려 날리자 달려들던 흑의인들이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그 모습에 진철은 다시 검기를 쏘아 내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 순간 그의 옆에서 두 갈래의 예기가 쏘아져 왔다.
진철은 혀를 차며 한정의 등을 밀쳐 그를 넘어트리고는 눈을 빛냈다. 앞과 옆에서 다가오는 다섯 개의 예기가 그의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서걱!
진철의 신형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곧 따라오던 예기에 의해 난도질당해 찢겨졌다.
그 모습에 바닥에 엎드려 있던 한정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것은 진철을 가르고 간 흑의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눈을 부릅뜬 이유는 한정과 달랐다. 진철을 벤 손에서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빠바빡!
마치 돌멩이를 강하게 내려친 듯한 소리와 함께 다섯의 흑의인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에 진철의 모습이 나타났다.
흑의인들에 의해 난도질당했던 진철의 신형은 신기루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과연… 신룡이라 불릴 만하군.”
멀리서 진철을 지켜보던 무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이형환위를 펼쳐 그 자리에서 벗어난 뒤 혈마대의 뒤를 점하고, 그들의 머리를 내려친 검집을.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혈귀를 잡지 못할 터! 어디 한번 계속 보여 보거라.”
무각이 속삭이듯 말하자 그에 답하듯 진철이 자하신검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위로 천천히 들어 올린 다음에 빠르게 내리그었다. 자색의 검기가 반달 모양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슈각!
검기가 흑의인들을 가르고 지나가자 그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환영이었던 것이다.
진철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곧바로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걸렸다!”
진철의 뒤를 따라 수많은 검날이 솟구쳤다. 그 순간 진철이 한정을 향해 외쳤다.
“지금입니다!”
“흡!”
진철의 신호에 한정이 몸을 날렸다. 진철을 따라 몸을 띄운 흑의인들이 있던 자리였다.
“헛!”
“도망간다!”
흑의인들의 시선이 한정에게 쏠렸다.
그 틈을 놓칠 진철이 아니었다. 진철은 내공을 일으켜 온몸에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몸이 떠오른 것보다 더 빠르게 내리꽂혔다.
“천근추(千斤墜)!”
누군가 진철의 모습에 놀라며 외쳤다.
바닥에 착지한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향해 검을 뿌렸다. 그러자 수십 갈래의 검기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흑의인들의 후방을 노리며 쏘아진 것이다.
흑의인들은 빠르게 날아오는 검기를 향해 검을 내려쳤다.
퍼퍼펑!
한밤의 불꽃놀이처럼 공중에서 섬광이 피어났다. 그리고 섬광을 뚫고 수많은 흑의인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그렇게 큰 상처는 입지 않았는지 한쪽 무릎을 꿇고 진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것도 아니었다. 폭 결의 묘리를 이용한 검기에 강한 충격을 받아 몸속이 진탕되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그때 도망가는 줄 알았던 한정이 검을 뽑아 빠르게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섬광 같은 검기가 뻗어 나갔다.
“크억!”
“컥!”
온갖 신경이 진철에게만 쏠려 있던 탓인지 검기를 미처 보지 못한 흑의인 두 명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 모습에 진철이 고개를 돌려 낭삼추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모르겠나?”
“뭐?”
낭삼추가 의문을 품으며 얼굴을 구겼다. 진철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진법은 간파당했다는 것을.”
“뭣!”
낭삼추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환영에 쩔쩔매던 주제에!”
“뭐, 보면 알 것 아닌가?”
“큭!”
낭삼추가 이를 강하게 물었다. 그러고는 혈아를 휘둘렀다.
“쳐라!”
낭삼추의 말에 따라 흑의인들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빨라졌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움직임에도 진철은 여유로움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느새 다가왔는지 한정이 검을 빼 들고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때 흑의인 세 명이 진철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여섯 명의 흑의인이 빠르게 다가왔다. 공중에 뜬 흑의인들의 검에 붉은 기운이 맺혔다.
“귀곡사검(鬼哭死劍)!”
끼야아아!
진의 영향 때문인지 내려치는 흑의인들의 검에서 기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괴기한 소리에도 미소를 유지하던 진철이 팔을 휘둘렀다.
슈악!
진철의 검에서 자색의 검기가 부채꼴로 뻗어 나갔다.
그렇게 검기를 쏘아 낸 진철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반달 모양의 검기가 공중에 떠 있던 자들과 달려오던 자들에게 쏘아졌다.
퍼퍼펑!
붉은 검기와 자색의 검기가 만나자 폭음과 함께 터져 버렸다. 그 순간 진철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퍼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진철이 오 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의 옆에는 세 명의 흑의인이 쓰러져 있었다.
“말했지? 간파당했다고.”
“이익! 죽여 버려!”
그때 흑의인들이 일제히 진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진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치 산보를 나온 것처럼 여유로운 얼굴.
그러나 그 순간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달려들던 흑의인들의 신형이 두 배에서 세 배로 늘어난 것이다.
단순히 인원이 늘어난 게 아니었다. 분신을 사용하듯 갈라진 것이다.
“운무살영검(雲霧殺影劍)!”
흑의인들의 외침이 주변에 울려 퍼졌다. 마치 메아리치듯 울린 목소리에 따라 그들의 검이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일제히 진철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왜 한번 말하면 못 알아듣지?”
얼굴을 살짝 구긴 진철의 눈이 순간 붉게 빛났다 본래대로 돌아오자 그의 검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의 검에서 강렬한 빛이 흘러나왔다.
진철은 몸을 회전시키며 밑으로 내린 그 검을 좌에서 우로 그었다.
후와앙!
따다다다당!
진철을 중심으로 강렬한 바람과 함께 퍼져 나간 자색의 빛이 달려들던 무사들을 삼키자, 금속음이 울려 퍼지며 일제히 튕겨져 나갔다.
퍼퍼퍽!
달빛에 반짝이는 은색의 비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모두 흑의인들이 들고 있던 검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반으로 부러져 바닥에 박혀 버렸다.
후웅!
바람이 주변으로 퍼지자 빛도 함께 사라졌다. 그 중심에 진철이 검을 늘어뜨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 보여 줄 게 있나?”
진철이 낭삼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낭삼추는 자신을 바라보는 진철의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마치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 진을 유지하라!”
낭삼추가 고개를 저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남아 있던 흑의인들이 다시 진철의 주위를 돌며 빈자리를 채워 나갔다.
그 모습에 진철은 혀를 차며 발을 들었다. 그 순간 진철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컥!”
진철을 중심으로 발을 놀리던 흑의인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진철이 그의 뒤에 나타나 목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진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지.”
파팍!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진철의 신형이 또다시 사라졌다. 그러자 삼 장 밖에 있던 다른 흑의인이 움직임을 멈추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런 그의 뒤로 진철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째서냐! 어째서 간파당하는 거지? 네놈에겐 환영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낭삼추가 외쳤다.
진철은 그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수많은 그림자가 빼곡하게 진철을 포위하고 있었다. 분명 환영일 것이다. 하지만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이란 결국 실체를 숨기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지. 더군다나 이상한 점은, 쓰러지는 인원이 늘어갈수록 환영 역시 그 수를 늘려 간다는 거야.”
진철은 목덜미를 집고 있는 사내를 바닥에 눕혔다. 점혈을 당한 것인지 사내는 눈알만 동글동글 굴리고 있었다.
“잠깐 생각해 봤지. 쓰러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림자가 줄어들어야 하는데 왜 오히려 많아질까?”
진철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주변의 숲에 가 닿았다.
“그건 아직 숨어 있는 자들이 있다는 뜻이더군.”
“…….”
낭삼추는 진철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주변 숲에는 아직 이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숨어 있었다. 어둠과 기의 장막을 이용한 환영의 진짜 목적은 투입되는 인원을 눈치채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낭삼추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숲 속에서 대기하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자! 귀찮으니까 한 번에 덤비라고.”
“그 말 후회하게 해 주마! 환마검(幻魔劍)을 펼친다!”
낭삼추가 외치자 일진에 있던 인원이 그대로 진철에게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던 전원이 도약해 진철의 위를 점했다. 사방팔방에서 달려드는 그들로 인해 빈틈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일진으로 달려드는 흑의인들의 검이 검게 물들었다. 운무살영검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그 위를 점하며 다가오는 흑의인들의 검에서는 귀곡성이 퍼졌다. 귀곡사검이었다.
그 두 개의 검법이 서로 상관관계를 일으키며 귀곡사검을 펼치는 검이 짙게 물들었고, 운무살영검을 펼치는 검에 귀곡성이 배어들었다.
더군다나 진에 펼쳐져 있던 기의 장막이 동시에 진철을 압박해 나갔다.
그 가공할 진의 변화에 진철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장난이 아닌데!”
진철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흘리면 내가 죽는다!’
유의 묘리를 이용해 흘리려던 진철은 자하신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러자 검에서 자색의 구름이 피어났다.
그 자색의 기운은 곧 섬광을 일으키며 한 송이의 꽃봉오리로 변했다. 개화를 시전한 것이다.
그때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맹렬한 기운에 진철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머리 바로 위에서 낭삼추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낭삼추의 혈아에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가득 맺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환마검이다!”
“큭!”
진철이 자하신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그의 뇌리로 옥린수의 음성이 스치고 지나갔다.
‘꽃의 향기가 주변을 물들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겠느냐? 일단 꽃이 피어야 하지 않겠느냐?’
‘만개… 화향!’
진철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리고 진철의 자하신검과 낭삼추의 혈아가 만나면서 엄청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
저벅저벅.
산길을 타고 올라가던 북궁아는 물소리가 들려오자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멱을 감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대체 얼마 만에 멱을 감는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약 반각 정도를 걷자 작은 물소리와 함께 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에 반사된 달빛이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북궁아의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마치 자신이 선녀가 된 기분이었다.
콱!
대도가 땅을 파고 들어갔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다음에 지체 없이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펄럭!
상의를 벗어 대도 위에 걸쳤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허허! 제법 아리따운 계집이 이 늙은이에게 좋은 눈요깃거리를 보여 주려고 하는군!”
“……!”
북궁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진철의 목소리는커녕 능구렁이 같은 목소리였다. 더군다나 목소리의 근원지는 먼 곳이 아니라 자신의 바로 뒤였다.
“응? 왜 그런가? 계속 벗지 않고? 어서 이 늙은이의 눈을 호강……!”
파각!
순간 북궁아의 신형이 돌아가며 땅에 박혀 있던 대도가 한 줄기의 섬광을 그렸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몸을 띄워 대도를 피하는 붉은 머리의 장년인이 나타났다.
장년인은 수면 위에 발이 닿자 강하게 차 몸을 띄워 올렸다.
“허허! 고년, 제법 매운 손을 지니고 있구나!”
장년인은 웃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곧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북궁아가 어느새 그의 지척까지 다가와 대도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츄확!
북궁아의 대도가 수면에 떠오른 달을 가르자 물살이 치솟아 올랐다. 기습치고는 놀라울 만한 위력을 지닌 일도였다.
하지만 북궁아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장년인이 또다시 그녀의 도를 피해 낸 탓이다.
파팟!
순식간에 뒤로 몸을 이동시켜 그녀와의 거리를 벌린 장년인은 수면을 벗어나 땅에 발을 디뎠다. 장년인이 미소를 지으며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난 적발투귀 사철림이라고 한다. 혈궁의 장로로 있지. 내가 찾아온 이유는 네년이 더 잘 알고 있겠지?”
“……!”
그의 말에 북궁아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대도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가 어디에서 온 건지 그건 알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적이라는 것이었다.
“좋아, 좋아. 그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 내가 온 보람이 있지!”
북궁아의 모습에 장년인 사철림이 외치며 허리춤에 매달린 도를 쥐었다. 기이한 모습의 박도였다. 그러나 그가 도를 쥔 순간 그의 주위로 공기가 달라진 것처럼 무겁게 변했다.
북궁아는 이를 살짝 깨물었다. 결코 무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긴장한 것을 느꼈는지 사철림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거라. 어차피 죽음은 단 한순간에 끝나는 것이니까. 뭐하면 내가 삼 초를 양보하도록 할까?”
사철림은 한 손에 쥔 박도를 어깨에 걸쳤다. 그 모습에 북궁아가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삼 초를 양보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와 스승조차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사철림의 말은 그야말로 수치 그 자체였다.
촤악!
무릎까지 잠겨 있던 그녀의 다리가 공중으로 떠오르며 물길이 치솟아 올랐다. 몸을 띄운 북궁아는 내공을 실은 발로 강하게 수면을 차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그녀의 뒤로 달빛이 비쳤다. 그 순간 그녀의 모습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일갈은 무서운 위력을 초래했다.
“빙벽파일도(氷壁破一刀)!”
그녀가 외치자 사철림의 입가에 만들어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사철림은 어깨에 멘 도를 앞으로 뻗으며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의 도가 붉게 물듦과 동시에 하얀 한기를 머금은 도가 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쾅!
“큭!”
사철림의 도 위에서 폭발한 한기가 주변으로 퍼지며 순식간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사철림은 상상을 뛰어넘는 북궁아의 위력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가에 자리 잡은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가슴은 흥겹게 뛰기 시작했다.
“대단해! 하지만… 아직 가볍구나! 흐아압!”
사철림의 우락부락한 근육이 꿈틀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그가 기합을 터트리며 굽힌 팔을 펴 북궁아를 떨쳐 냈다.
북궁아는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 순간 북궁아는 눈을 부릅뜨며 다급히 뒤로 몸을 띄웠다. 전방에서 강렬한 기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느냐!”
사철림의 도에서 순간 불길이 일어났다.
콰콰쾅!
요란한 폭음이 주위를 울렸다.
“큭!”
가까스로 사철림의 도를 막은 북궁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도에서 느껴지는 위력도 엄청났지만 주위를 감싸는 불길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탓이다.
“좋아! 좋아!”
사철림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북궁아를 압박해 나갔다. 순간 사철림의 신형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한 바퀴를 돌았다.
“흡!”
북궁아는 서늘한 느낌에 급히 대도를 세로로 세워 앞을 막았다.
콰앙!
북궁아의 신형이 빠르게 뒤로 떨어져 나갔다. 사철림이 몸을 돌리며 강하게 도를 휘두른 탓이다.
저벅!
사철림의 발소리가 강하게 지면을 울렸다.
“내 친우들은 내 도를 이렇게 말하지. 염도(炎刀)!”
사철림은 도를 슬쩍 들어 올리며 앞으로 뻗었다. 도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북궁아가 대도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몸 곳곳이 그을려 있었다.
“네년은 빙도(氷刀), 나는 염도. 과연 누가 이길까?”
“하압!”
사철림이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말하자 북궁아가 기합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로 서리가 끼며 열기를 몰아내었다. 그런 범상치 않은 모습에 사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의 별호에서도 알려 주듯 평소에도 싸움을 즐기는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혈궁에서조차 도법을 쓰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강맹한 도법을 익힌 자는 더욱 드물었다. 수준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녀가 강맹한 도법을 익히고 있고, 그런 그녀와 손을 섞는다는 자체가 연륜을 떠나 무인으로서 즐거울 따름이었다.
***
후두둑! 터덕!
강렬한 폭풍이 지나가자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진철은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은 다름 아닌 토막 난 사람의 신체였기 때문이다.
“쿨럭!”
누군가의 기침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진철은 시선을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낭삼추가 누더기가 된 옷을 걸치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연신 기침을 내뱉던 낭삼추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며 진철을 노려보았다.
“초식명이 무엇… 이냐?”
“…만개화향.”
“엄… 청난 위력이군.”
“그러게… 나도 놀랐어.”
낭삼추는 진철의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다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해 냈다. 그러다 힘이 다했는지 바닥에 다시 몸을 눕혔다.
진철에게 모여들던 기의 장벽이 진철의 힘에 의해 틀어지며 소용돌이쳤고,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모든 흑의인이 도리어 화를 입고 만 것이었다. 거기에 기가 폭발을 일으키면서 위력이 증폭되자, 그 기운을 버티지 못한 흑의인들은 그 자리에서 몸이 터져 버렸다.
“쿨럭!”
낭삼추의 입에서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낭삼추는 독고요를 떠올렸다.
언제나 자신의 앞에서 굳건하게 서 있던 사내. 그는 자신보다 어리지만 늘 자신을 이끌어 준 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낭삼추는 그런 독고요의 눈을 감겨 준 진철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역시 강하군! 충분히 독 대주를 쉬게 할 수 있을 만큼.’
“말… 해 보게. 정말… 독 대주의 마지막은 어땠나?”
낭삼추가 피를 토해 내며 간신히 말하자, 진철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멋있었다고.”
“큭, 크크큭!”
진철의 말에 낭삼추는 웃음을 터트렸다. 계속 핏물이 입으로 흘러나왔지만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의 웃음소리는 작아지며 잦아들었다.
“그래… 그래야… 우리, 독… 대주지.”
“…….”
낭삼추의 고개가 꺾였다. 완전히 숨이 넘어간 것이다.
이렇게 혈궁의 혈마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저벅저벅!
“정파의 후기지수라는 놈이… 완전히 살귀(殺鬼)로군.”
갑작스레 들려온 말소리에 고개를 들자 진철의 시야에 다가오는 무각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지켜보다 혈마대가 모두 죽자 이제야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당신의 부하가 아니었습니까?”
“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나서는 겁니까?”
“훗, 무슨 소린가 했더니만…….”
무각은 진철의 말에 실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옆에 쓰러져 있는 낭삼추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놈들은 말일세, 사실 소모품이라네.”
“……!”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각은 낭삼추의 시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본 궁에서 혈마대란 돌격부대. 그렇기 때문에 죽어 나가는 놈들이 꽤나 많지. 즉, 말 그대로 소모품이라는 것이야. 하지만 이놈들은 그중에서도 꽤 오래 버텨서 정예라 할 수도 있었지. 그런 놈들이 이렇게 간단하게 죽다니… 아깝긴 아깝군. 다른 곳에 사용하면 더 유용하게 쓸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당… 신.”
진철의 부름에 무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져 있었다.
“자네는 정파의 후기지수가 아니던가? 우리는 자네들의 적인 혈궁의 무인들이라네. 절대 섞일 수 없는 적이라는 거지.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우리 사이에 그런 생각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무각의 말에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법이 있는 것이었으니까.
진철이 몸을 돌려 무각을 향했다. 무각 역시 몸을 돌려 진철을 향했다. 무각의 시선이 진철을 훑어보더니 그의 검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검을 뽑지 않더군. 왜인가?”
무각의 물음에 진철이 슬쩍 자하신검을 바라보았다.
“이놈을 뽑으면 제어가 안 돼서 말입니다.”
진철의 말에 무각이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훗, 그렇다 하더라도 뽑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이야.”
“뭐, 그거야 해 봐야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거기에 지금 전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본의 아니게 피를 보게 되었으니…….”
진철이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훑었다. 주변은 터져 버린 시체로 인해 온통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나 역시 이런 광경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럼 빨리 끝내도록 하죠.”
“글쎄, 과연 뜻대로 될까?”
뚜둑!
진철이 목의 관절을 풀고는 무각을 향해 검을 뻗었다. 그 순간 무각의 신형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쾅!
무각이 있던 자리가 터져 나가며 흙이 튀어 올랐다. 갑작스레 검기를 쏘아 낸 것이다.
하지만 진철은 그가 피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런 그의 검이 자색으로 물들었다.
슈슈슉!
자색의 검이 순식간에 십여 번을 긋자 허공을 가르며 자색의 검기가 뻗어 나갔다.
무각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쏘아져 오는 날카로운 검기에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어림없다!”
퍼퍼펑!
무각이 허공을 격하며 장(掌)을 날렸다. 그러자 검기와 부딪치며 폭발을 일으켰다.
이어 무각이 땅을 박차며 진철에게 날아들었다. 귀수자라는 별호에 맞게 그는 조법과 장법의 달인으로 근접전이 특기였다.
진철은 무각이 다가오자 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자하신검이 부르르 떨며 검명을 토해 냈다. 진철은 그대로 무각을 향해 쏘아져 가며 검을 휘둘렀다.
카가칵!
검과 손이 만나며 기이한 소리를 내뿜었다.
진철의 검이 순간 네 개로 나뉘며 무각의 몸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흥!”
무각은 코웃음을 치며 양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양손 역시 두 개씩 나뉘며 진철의 검을 모두 쳐 냈다.
진철은 그 반탄력으로 뒤로 젖혀지는 검을 잡아당기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원심력을 이용해 휘둘렀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무각의 신형이 먼지에 휩싸였다.
하지만 곧 먼지가 걷히자 진철은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무각이 왼손으로 검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치고는 대단해. 하지만 너무 성급하지 않나?”
“흡!”
팡!
무각이 오른손을 뻗자 진철은 급히 몸을 숙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있던 자리에 바람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미풍이 불었다.
뒤로 물러나던 진철은 위로 올린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슈아악!
자색의 검기가 무각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 순간 무각의 신형이 잔상을 남기며 진철을 향해 쏘아졌다.
“뭣!”
진철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급히 검으로 앞을 막았다. 무각이 진철이 뿌린 검기를 간단하게 흘리고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지 않았나? 성급하다고.”
콰콰쾅!
무각의 손바닥이 연속적으로 진철의 검으로 떨어져 내렸다. 진철은 그의 장을 막았음에도 속이 진탕되는 것을 느끼며 뒤로 튕겨 나갔다. 그 정도로 무각의 장법은 위력적이었다.
몇 차례 바닥을 구른 진철은 이를 악물며 손을 뻗어 바닥을 때렸다. 그러자 그의 몸이 잠깐 허공에 떠오르며 바닥에 착지했다.
“후욱, 후욱.”
진철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진철의 심정은 무각의 말대로 상당히 급했다. 그리고 그렇게 조바심이 일어난 탓에 검술에 빈틈이 자주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완전치 않은 깨달음으로 만개화향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펼치기만 한 것이라면 문제가 될 건 없었다. 하지만 혈마환영진을 바탕으로 펼쳐진 환영검의 위력은 진철에게 심각한 내상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서 이 대결을 빨리 끝내려고 했다.
그리고 북궁아의 부재 역시 신경 쓰였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그녀에게도 뭔가 문제가 터졌다는 말과 같았다.
‘쉽지 않겠어.’
진철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검을 꼭 쥐었다. 전에 만났던 마광은 그냥 단순히 무공 수위가 높은 무인이었다면 앞에 서 있는 무각은 싸움꾼이었다. 그것도 절정의 무공을 지닌.
“실은 말이야, 나도 꽤 오랜만에 무림에 나온 것이라네. 그래서 이렇게 손을 섞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거기에 자네의 무공 역시 꽤 높은 것 같고……. 언제 이렇게 즐겨 보겠나? 천천히 하자고.”
무각의 말에 진철은 숨을 고르며 검을 앞으로 뻗었다. 성급하게 달려든다고 해서 쓰러트릴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급하게 무공을 펼쳤다간 당하는 건 자신일 수도 있었다.
진철이 숨을 내쉬자 일순간 그의 기도가 달라졌다. 조금 전에는 폭풍 같았다면 지금은 고요했다.
무각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이런 기도를 뿌린다는 것은 그만큼 진지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준비가 되었으면 이제 슬슬 시작하세. 이번엔 진짜로 부딪쳐 보자고.”
말을 끝낸 무각의 신형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진철은 허공에 검을 세 번 휘둘렀다. 그러자 자색의 검기가 바람을 가르며 무각에게 날아갔다.
파파팡!
공중에서 바람이 터져 나가며 자색의 검기가 소멸됐다. 무각이 장을 뿌려 검기를 막은 것이다. 진철이 뿌린 검기는 무각의 발걸음을 전혀 막지 못했다.
무각은 곧바로 바닥을 강하게 찼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더욱 빠르게 쏘아졌다.
“흡!”
진철은 짤막한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검이 하나의 꽃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따다다당!
지척까지 다가온 무각의 손이 검게 물들며 빠르게 움직였다. 자색의 검과 검은 손이 허공에서 만나며 불꽃을 피워 냈다. 순식간에 십수 번을 부딪친 그들은 거리를 벌리며 떨어졌다.
“좋구나! 하지만 더 보여 보거라!”
무각은 바닥을 차 다시 진철에게 다가갔다. 그런 무각은 끊임없이 진철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을 더욱 즐겁게 만들 무언가를!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검을 강하게 쥐었다. 그러자 검이 그에게 응답하듯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과거 화산파를 지탱한 무공 중 하나인 자하강기였다.
“하압!”
진철이 기합을 터트리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허리를 비틀었다. 그런 그의 검이 허공에 일자를 그려 넣었다. 그러자 그냥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무각을 향해 뻗어 왔다.
무각은 급히 발을 멈추며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이 검게 물들었다. 그의 독수 무공인 흑마귀수장법(黑魔鬼手掌法)이 극성으로 시전된 것이다.
***
카가각!
북궁아가 내려찍는 대도를 흘려보내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흘려보냈다고는 하지만 엄청난 충격에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을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북궁아의 눈이 반짝이며 그녀의 신형이 앞으로 한 발 뻗어 나갔다. 사철림의 어깨에 빈틈이 보인 것이다.
파팍!
북궁아의 발이 높이 떴다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사철림은 그녀의 내려찍기에 양손으로 쥐고 있던 박도에서 한 손을 풀고는 몸을 비틀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그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그런 움직임을 예측했다는 듯 북궁아의 신형이 빠르게 돌아갔다.
후웅! 퍽!
그녀의 돌려차기가 사철림의 가슴에서 터졌다.
주루룩!
사철림의 신형이 숙여지며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나갔다. 하지만 북궁아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발바닥이 그의 가슴에 닿으려는 순간 가로막는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숙였던 몸을 일으키는 사철림의 가슴 앞에 굵직한 팔뚝이 보였다.
“후우!”
북궁아는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그녀는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였다.
사철림의 도법은 묵직하고 담백했다. 마치 도법의 정도를 보는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도에 실린 위력은 강력했다. 도를 한번 막아 갈 때마다 뼛속까지 충격이 와 닿았다.
“제법이구나.”
사철림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땀에 흠뻑 젖은 북궁아의 모습에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 저런 나이에, 그것도 여자가 자신의 도를 이렇게까지 받아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에 저런 가녀린 몸에서 어떻게 그만한 힘이 솟아나오는 건지 그녀의 도에 실린 위력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럼 다시 가 볼까?”
자신과는 달리 더욱 기세를 피워 내는 사철림의 모습에 북궁아는 이를 강하게 물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을 보여 준 것은 아니었다.
스스스…….
북궁아가 내공을 끌어 올리자 그녀의 주위로 짙은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놀랄 것도 없었다. 이미 그녀와 사철림의 격돌로 인해 주변은 그을리고 서리가 끼기를 반복했으니까.
사철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북궁아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천천히 몸집을 키워 가더니 어느 한순간 한기가 터져 나가며 주변을 장악했다.
“그건……!”
사철림의 말에 북궁아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런 그녀의 양 어깨에 약 한 치 정도의 작은 수정이 떠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달밤에 그것을 보니 마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야수의 눈동자와도 같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빙정(氷精).”
북궁아의 입이 달싹였다. 그 순간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빙정에서 엄청난 한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한기는 북궁아의 몸을 감싸듯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북궁아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빙정만큼은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빙정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마음이 무감각해지고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 버렸다. 그래서 북궁아는 엄청난 위력을 지녔지만 그런 영향을 주는 빙정이 싫었다. 자신이 사람이 아닌 단순한 병기가 되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크흣!”
사철림은 자신의 근처까지 다가온 한기에 뒤로 물러섰다.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한기에 놀란 것이다. 그런 한기를 두르고 멀쩡히 서 있는 북궁아가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주위에는 이미 그 한기로 인해 얼음 평원으로 변해 버린 상태였다.
파사삭!
북궁아가 한 발 내딛자 그녀의 발밑에 있던 풀들이 부서져 버렸다. 사철림은 그 모습에 마른침을 삼키며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차가운 냉기가 배 속까지 침범하는 기분이 들었다.
“크크큭!”
돌연 사철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양팔을 펼치며 가슴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열기를 뿜어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의 열기는 곧 빙정의 한기가 사라지듯 식어 들었다.
그럼에도 사철림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내 도법의 이름은 폭염단파도(暴炎斷破刀)라고 한다.”
“…….”
“문답무용이란 말인가? 뭐, 좋지! 다시 어울려 보자꾸나!”
사철림이 강하게 바닥을 찼다.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북궁아를 향해 쏘아졌다.
북궁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도를 들어 도 끝을 사철림을 향하게 했다. 순간 사철림의 눈이 크게 떠지며 몸을 비틀었다.
빠웅!
거대한 하얀색 덩어리! 아니, 그것은 얼음 줄기와도 같았다. 도에서 시작된 냉기 덩어리는 그대로 뻗어 나가며 사철림이 있던 자리를 얼려 버렸다.
“크흣!”
사철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그녀의 냉기 덩어리는 주변의 공기조차 얼려 버렸다. 그래서 가까스로 피했음에도 피해를 입은 것이다.
“크합!”
사철림은 비틀거리다가 균형을 잡으며 다시 강하게 바닥을 찼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북궁아를 향해 날아갔다. 그런 그의 도가 강하게 빛을 뿜었다.
“하압!”
꽈웅!
엄청난 열기가 북궁아를 때렸다. 그러자 북궁아와 사철림을 가리며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극한의 냉기가 열기가 만나 일으킨 현상이었다.
팟!
그런 수증기를 뚫고 하나의 인형이 튀어나왔다. 사철림이었다. 그는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격돌하는 순간 냉기가 뼛속까지 침범한 것이다.
후웅!
그때 거친 바람이 불며 수증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 북궁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를 들고 무표정하게 서 있는 그녀는 사철림의 폭염참에 피해조차 입지 않은 듯, 아무런 상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사철림을 향했다.
“흡!”
그녀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사철림은 등골이 서늘함을 느끼며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그가 있던 자리에 냉기가 터져 나갔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단순히 시선만으로 냉기를 모아 터뜨린 것이다.
‘괴물이로군! 어린 나이에 엄청난 한기를 지녔다고 여겼건만 저것이 그 원인이란 말인가!’
사철림의 시선이 북궁아의 어깨에 떠 있는 두 개의 빙정으로 향했다. 마치 야수의 눈동자처럼 희번덕거리며 반짝이는 그 수정은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것처럼 연신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런 기물(奇物)은 대체 어디서 취한 거지? 아니, 저런 걸 몸에 지니고도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다니. 정말 괴물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사철림은 다시 몸을 날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또다시 주변의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있던 자리가 터져 나가며 한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저런 건 스치기만 해도 즉시 얼어붙고 말 것이다.’
사철림은 이마를 구기며 바닥을 박찼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해 봐야 이 상황이 변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일도에 내 모든 것을 건다!’
순간 달려 나가는 사철림의 신형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폭염단파도를 극성으로 운용한 것이다. 새하얗게 물든 대지를 달리는 그의 모습이 불덩이처럼 변했다.
팡!
다시 대지를 차 내자 그의 신형이 공기를 뚫고 북궁아에게 근접했다. 순간 그의 도가 강하게 빛을 뿜었다.
“지옥염화(地獄炎火)!”
크게 외친 그의 도가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북궁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꽈웅!
***
그의 이름은 정옥진. 하남의 한 산골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이 가난해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지만, 타고난 힘과 체격으로 어린 나이에도 고단한 일을 도맡아 하면서 끼니를 때우며 살아왔다. 그런 그가 고작 은자 스무 냥에 팔려 왔다.
눈앞에 드리운 큰돈에 그의 부모가 그를 팔아 버린 것이다.
물론 가슴이 아프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자녀가 있었기에 그 하나로 인해 나머지가 잠시나마 풍족하게 살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은 견뎌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그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곳에 팔려 오면서 단 한 번도 식사를 거른 적이 없었다. 부모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 생활에도 만족한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팔려 온 지 벌써 오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젠 부모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해질 정도였다.
똑똑!
“예!”
정옥진은 문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팔을 지닌 그는 세세호였다.
세세호는 방 안으로 발을 집어넣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팔려 온 정옥진의 주제에 맞지 않게 방은 상당히 호화스러웠다. 심지어 그의 시중을 드는 시녀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세세호는 그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항상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한 것이다.
“몸은 좀 어떤가?”
세세호가 입을 열자 정옥진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아무런 이상도 없지요.”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 가운데 놓여 있는 탁자로 가 의자를 빼고 그곳에 앉았다.
“자네는 본 파의 귀중한 인재야. 무슨 일이 생기거든 눈치 보지 말고 바로 말을 하게나. 혹시 뭐 부족한 건 없나?”
“아닙니다. 부족한 것이라뇨? 오히려 대인의 베풂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래. 요새 수련은 어떻게 되어 가나?”
“하루하루가 다릅니다. 대인께서 가르쳐 주신 수련법을 할 때마다 온몸에 활력이 넘쳐 오릅니다.”
정옥진의 말에 세세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사 올 당시 무골은 과연 천하제일이라 불릴 정도였지만 그뿐이었다.
세세호는 그에게 몇 가지 무공을 가르쳤다. 바로 독고요가 익히던 혈룡체와 그의 상위 무공인 혈마체(血魔體).
혈룡체가 신체를 단련시키기 위한 외공이라면 혈마체는 내력과 함께 신체를 더욱 견고히 만드는 역할을 했다.
정옥진의 몸을 보자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했는지 체격이 더 좋아진 듯했다.
‘곧 있으면 때가 도래한다. 곧!’
세세호의 눈가에 혈광이 서렸다 사라졌다.
***
극성의 흑마귀수장법은 위력적이었다. 검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충격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큭!”
진철은 허공에 뜨는 것을 느끼며 배 속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내상이 심각해지면서 기혈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파파팡!
무각의 손바닥이 허공을 쳐 냈다. 소림의 백보신권과 같은 절정의 격공장(隔空掌)이었다.
허공에 떠 있던 진철은 이를 악물며 팔을 휘둘렀다. 자하강기(紫霞쾝氣)가 둘린 검이 공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파장을 내려쳤다.
“합!”
허공에서 터지는 파공성에 무각이 바닥을 강하게 쳤다. 그러자 곧 그의 신형이 사라지며 검은 그림자를 남겼다.
“흡!”
진철은 다가오는 그림자에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그의 코앞에 무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즐거운 듯 이를 내놓고 있던 그가 손을 뻗었다.
파파파팡!
“크읏!”
수십 개의 장영이 진철의 시야를 둘러싸며 압박해 왔다.
“받아라!”
그때 진철은 위에서 내려오는 강렬한 기운에 급히 검을 치켜들었다. 그와 동시에 강력한 기운이 그의 검을 내려쳤다.
쾅!
바닥으로 추락한 진철의 신형을 먼지가 뒤덮었다. 그 뒤를 따라 무각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재미가 없구나.”
“나도 재미없다고…….”
먼지를 헤치고 진철이 몸을 일으켰다. 진철은 검을 지탱하고 간신히 서서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무각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노려본다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 자, 보여 보거라. 혈귀를 죽인 너의 진짜 실력을.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뼈를 묻을 것이다.”
“헉… 헉…….”
무각의 양손에 검은 그림자가 감돌기 시작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그림자는 하나의 권갑처럼 그의 양손을 감쌌다.
그 모습에 진철은 굽힌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방법이 없어. 더 이상 끌다간 몸이 견디지 못해. 한 방에 끝내야 한다.’
“후우…….”
진철은 숨을 크게 들이쉬어 내뱉은 후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아무런 힘도 실리지 않은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렇게 숨을 고른 진철은 검을 거둬들이며 왼발을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발검의 자세였다.
‘한 수에 모든 것을 걸려는 셈인가?’
진철의 행동에 무각은 실소를 머금었다.
고수의 싸움은 초식을 교환해 빈틈을 찾고, 그렇게 찾은 빈틈을 더욱 몰아붙여 기회를 만든 후 승부를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어울려 주마.’
무각의 손을 감싸고 있는 검은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그 기운에서 경기가 뻗어 나와 주변을 물들였다.
“으아아…….”
무각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강대한 내공의 운용으로 기혈이 자극받은 것이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손에 뭉쳐 있는 기운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타오르는 강대한 기운이 그의 손에 밀집했다.
쿵!
무각이 강하게 바닥을 밟자 땅이 움푹 파여 들어갔다. 그리고 굽혀진 그의 무릎이 펴지자 땅거죽이 밀려나오며 무각의 신형이 하나의 빛이 되어 쏘아졌다.
‘어디냐!’
섬광처럼 뻗어 오는 무각을 바라보는 진철의 눈이 빛났다. 진철은 무각의 전신을 훑어보며 그의 빈틈을 찾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완벽한 무공이란 없는 법! 반드시 빈틈이 있을 것이다.
‘어디냐!’
순식간에 반 장까지 다가온 무각의 팔이 뒤로 젖혀졌다. 그때 진철이 내놓은 왼쪽 무릎을 굽혔다. 그와 동시에 그의 허리 역시 굽혀졌다.
‘거기냐!’
보였다. 무각의 오른쪽 옆구리부터 왼쪽 어깨까지 그어져 있는 자색의 선이.
“끝이다!”
지척까지 다가온 무각이 검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공기를 밀어내며 다가오는 그의 손바닥이 작은 파장을 그렸다. 그 순간 진철의 검이 허공에 하나의 선을 그었다.
콰쾅!
후두둑!
높게 떠올랐던 흙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진철은 검을 밑으로 늘어트리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바다처럼 깊어 마르지 않을 것 같은 내력은 어느새 바닥을 내보여 공허함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진철의 눈빛은 오히려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단하군.”
후웅!
순간 작은 돌개바람과 함께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중앙으로 무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식명이 무엇이던가?”
“…….”
무각의 물음에 진철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사실 초식명 같은 건 없었다. 단지 눈에 보였던 붉은 선을 따라 검을 그었을 뿐.
그런 진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각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피부와 같은 색을 지닌 어둠이 시야에 들어왔다.
“놀랍군. 내 강기가 부서지듯 사라지다니.”
무각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은 금이 간 돌처럼 자잘한 실선이 그어져 있었다.
무각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피부가 먼지처럼 손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각은 고개를 돌려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진철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무각의 입에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후둑!
그때 무각의 손이 팔에서 떨어졌다. 그 손은 바닥에 닿는 순간 사기그릇처럼 깨져 버렸다. 놀랍게도 깨진 손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크크큭!”
그것을 바라보던 무각의 눈에 광기가 스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하고 기뻐하라! 지금의 승리를 마음속 깊이 새겨 놓아라! 곧 혈마신이 부활하면 지금 느끼고 있는 너의 기쁨은 슬픔이 될 것이요, 너의 희망은 곧 절망이 될 것이니!”
후두둑!
무각의 얼굴이 진흙처럼 갈라지며 부스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흑마귀수장법의 근원이 깨져 버렸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본래 마기를 근원으로 둔 흑마귀수장법은 도가 계열의 무공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화산파의 무공이라면 도가 계열의 정수. 어찌 보면 흑마귀수장법이 깨지는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마기를 담아 둔 그릇이 깨지면서 그 마기가 무각의 전신 곳곳으로 뻗어 나갔고, 이미 탈진해 버린 몸은 그 마기를 감당해 내지 못했다.
“크하하하!”
무각은 부서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그의 양팔이 떨어져 나갔다.
무각은 진철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저승에서 네 동료와 함께 기다리도록 하…….”
점점 부서지며 바람에 날려 가던 무각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허물어져 내렸다. 하지만 진철은 그런 광경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북궁아!’
진철은 급히 한정을 찾았다. 그러다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고는 바로 몸을 날렸다.
커다란 돌덩이에 기대 누워 있던 한정은 혈마대와의 격돌로 일어난 폭풍에 휩쓸려 어딘가 부딪친 건지 정신을 놓고 있었다.
“한 형! 한 형!”
진철이 한정을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진철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뺨을 때렸다.
“한 형!”
“으으…….”
한정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눈이 살짝 떠졌다.
“한 형! 북궁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한정은 세상이 도는 것을 느끼며 진철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진철은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수지가 있는 방향이었다. 진철은 다시 한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곧 다시 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깨어난다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도 못하리라.
진철은 그의 반응에 즉시 몸을 일으키고는 저수지를 향해 내달렸다.
바닥난 내공을 쥐어짜며 반각 정도를 달리자 그의 눈앞에 새하얀 대지가 펼쳐졌다.
진철은 걸음을 멈추며 갑자기 변한 주변 환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대 눈이 올 만한 계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헛!”
주변을 둘러보던 진철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몇 장 앞에서 나타났다.
북궁아가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거기에 그녀의 앞에는 한 장년인이 도를 내려찍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장년인은 그 상태에서 미동이 없었다. 도를 들고 있을 뿐이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재빨리 북궁아에게 달려간 진철은 그녀를 안아 일으키며 맥을 짚었다.
두근!
그녀의 손에서 맥박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굴을 바라보자 혈색 역시 생각보다 좋았다.
“후우…….”
진철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행히도 그녀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진철은 몸을 일으켜 장년인에게 다가갔다. 진철이 코앞에 서 있는데도 장년인은 눈도 깜빡거리지 않으며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읏!”
진철은 장년인에게 손을 뻗어 그의 맥을 잡는 순간 손끝을 침범하는 엄청난 한기에 신음을 터트렸다. 놀랍게도 장년인은 그 상태로 얼어 버린 것이다.
“…….”
진철은 장년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의 사인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걸 파헤칠 때가 아니었다.
북궁아에게 다가간 진철은 그녀를 안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대지에 혹시 몸이 상할까 싶어 어서 이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때 그녀의 어깨를 움켜쥔 진철의 손에 문뜩 힘이 들어갔다.
‘지금은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자.’
진철은 북궁아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
-그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삿갓을 써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내가 길을 걷다 걸음을 멈췄다. 귓가에 들려온 전음 때문이다.
사내의 입이 달싹였다.
-어디서 찾았느냐?
-산서의 람현입니다.
-그들의 예측 경로는?
-삭주의 혈랑파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사마곡을 찾은 이유는 무림오미 중 하나인 안선영이란 계집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마곡에서 몇 개의 마차가 빠져나간 흔적이 발견된 적이 있잖습니까?
-계속 말하라.
사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에게 전음을 보내온 대상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이미 사내의 얼굴에는 이유 모를 확신이 떠올라 있었다.
-조사해 본 바 중원 각지에서 삭주로 꽤 많은 마차가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은밀하게.
-삭주까지의 거리는?
-약 오 일 정도 걸립니다.
-모든 대원들에게 알려라. 목적지는 삭주의 혈랑파. 기한은 사흘!
-존명!
사내의 귓가로 대답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사내의 주위를 맴돌던 기척 역시 사라졌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다리고 있어라. 이번에는 기필코!’
한도군의 눈에 살광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