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6장 (17/29)

제16장

희망은 절망의 밑거름이다

삭주까지는 어느새 하루 정도의 거리만 남겨 두고 있었다. 진철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 북궁아를 보며 의문을 품었다. 그때 그 하얀 대지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궁금했던 것이다.

북궁아가 빙공을 익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단순한 빙공이 아닌 절세의 빙공이라 불릴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것도.

하지만 그렇게 대지의 모든 것을 얼려 버릴 정도의 위력을 지니진 않았다. 그러기엔 아직 북궁아의 공부가 부족했다. 만약 그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자신에게 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숨기고 있었던가.’

진철은 손을 뻗어 북궁아의 맥을 짚었다. 그런 진철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녀의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혈도가 마치 얼음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력을 집어넣어 억지로 녹인다면 녹일 수도 있겠지만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니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그녀에게서 손을 뗀 진철은 마차 밖으로 나왔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그런 격전 끝에도 마차가 부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차가 부서지거나 말이 죽었다면 제시간 안에 삭주에 도착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진철은 주변을 둘러보며 한정을 찾았다. 한정은 마차에서 말을 빼내어 풀을 먹이고 있었다.

“꽤 귀하게 자란 놈인지 입이 고급인가 보오.”

진철은 한정에게 다가갔다. 한정은 그런 진철에게 보여 주듯 말이 뜯다 만 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시오. 뜯다 말고 뜯다 말고 하지 않았소? 분명 여물만 먹고 자랐기에 이런 풀들이 입에 맞지 않는 거요.”

고개를 끄덕인 진철은 말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에 한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진철 역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아 돌아올 수 있겠소?”

“…….”

“정말 선영 아씨를 구출해 낼 수 있겠소?”

한정의 말에 진철은 그를 바라보았다. 한정의 얼굴은 상당히 수척해진 상태였다. 거기에 아직도 머리에 입은 외상이 다 낫지 않았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진철은 한정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일로 똑똑히 보고 느꼈을 것이다. 적이 가진 힘의 위력을. 그리고 그들 앞에서 무력했던 자신을.

“솔직히 난 겁이 난다오.”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턱!

진철은 한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

한정은 고개를 숙였다. 진철은 그런 그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습니다.”

“무엇을?”

“오늘 하루만 더 고생해서 마차를 몰아 주십시오.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정은 진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진 소협의 부탁이라면.”

진철은 한정의 마음에 고마움을 표하며 몸을 돌렸다.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간 진철은 삭주에 도착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삭주에 도착한 한정은 도심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한적한 곳에 마차를 세웠다. 아직 마차 안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진철과 깨어나지 않는 북궁아를 호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마차의 문이 열리지 않자 한정은 발만 동동 굴렀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 날이 밝았다.

밤을 지샌 한정의 눈가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몇 시진.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한정은 결단을 내렸는지 활과 자신의 검을 점검했다. 만약 진철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자신 혼자라도 갈 생각인 것이다.

끼익!

그때 마차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그곳을 바라본 한정의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졌다. 진전이 있었는지 한층 더 깊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진철이 어느새 깨어난 북궁아와 함께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은 모든 이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리고 기대감을 갖도록 한다. 사람들은 그 기대감을 지니고 집 밖으로 나서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그것은 세세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세호의 얼굴에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드디어 오늘인 것이다. 몇 년 동안 준비해 온 것들이 결실을 맺는 날이었다.

어젯밤에 모든 제물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제단이 완성되었다. 이제 몇 시진 후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오늘 달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때!’

세세호는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신 햇살로 인해 미간이 구겨졌지만 그의 시선은 하늘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좋은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도착해야 할 전서구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가 다 되도록. 세세호는 그 뜻을 잘 알고 있었다.

‘혈마대의 전멸. 그리고 무각, 사철림 장로의 죽음!’

낭삼추는 신룡을 처리하는 즉시 전서구를 보내기로 했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는 건 간 이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

‘신룡, 대체 어떤 놈이기에.’

분명 보통이 아니었다. 비록 혼자 다 처리한 것은 아니지만 혈궁은 장로 셋을 잃고 혈마대와 혈사대를 모조리 잃었다. 그만한 전력이면 웬만한 중소 문파는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쓸어버릴 전력이었다.

‘그놈이 설마 절대십오인에 가까운 실력을 지녔단 말인가? 고작 그 나이에? 아니면 반로환동한 전대 고수?’

무림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끔 그런 자들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절정의 무공 수위를 지니고 무림을 제집처럼 돌아다니던 자들이.

그럴 때마다 무림은 그를 중심으로 판도가 바뀌곤 하였다.

물론 혼자 힘으론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인물에게는 수많은 인연이 몰리는 법이다. 그들은 항상 그 인연을 이용해 무림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지금도 그러한 예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천무제 담덕!

그가 언제 무림에 나왔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수많은 사파인들을 학살하고 정파의 지지를 받으며 절대십오인이 된 그였다. 거기에 이제는 칠무회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로 절대십오인에 버금가는 무공을 지녔다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세호는 신룡이 이곳에서 죽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곳에는 절대십오인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혈귀가 세 마리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혈궁의 무사만 삼백 가까이 존재했다. 설령 천무제가 온다 하더라도 살아 돌아갈 수 없으리라.

똑똑.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곧 나가겠다.”

세세호는 창가에서 몸을 돌리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기대감과 흥분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어서 오거라. 네놈이 과연 영웅이 될지, 아니면 혈마신의 행보에 밑거름이 될지 지켜보도록 하마.’

***

안선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이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은 점도 있었지만, 이곳에는 자신처럼 끌려온 걸로 보이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지금 자신이 갇혀 있는 밀실에도 열 명이 넘는 여인들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비록 무공은 익히지 않았지만 무림 세가에서 자랐고, 무림오미라 불리는 안선영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이 단순한 인신매매가 아니라는 것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여인들이 필요한 이유가 대체 뭐냐는 것이었다.

“아씨… 혹시 밤을 지새우신 건가요?”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일어났는지 함께 끌려온 시녀가 불안한 눈으로 안선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안 와서요.”

시녀는 몸을 일으켜 안선영 옆에 앉았다. 그녀는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눈이 잔뜩 부어 있었다.

안선영은 그런 시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산뜻한 미소가 어두운 밀실을 환하게 밝히는 것 같았다. 그런 안선영의 미소에 시녀의 눈이 다시 붉어졌다.

“흐흐흑! 아씨! 가여운 아씨!”

시녀는 안선영이 너무나 가엽게 느껴졌다. 저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녀이건만 어딘지도 모를 곳에 끌려와 고초를 겪는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아씨가… 아씨가…….”

“전 괜찮아요.”

안선영은 시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끼익!

그때 거친 소리와 함께 밀실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안선영은 갑작스레 들어오는 빛에 눈살을 구겼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던 다른 여인들도 역시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모두 일어나라! 어서!”

문을 통해 횃불을 든 사내와 함께 세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니 무림인인 듯싶었다. 그들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한 여인들을 거칠게 깨워 일으켰다.

“꺄악!”

“흐흑!”

머리채를 부여 잡힌 여인이 비명을 터트리자 그 옆에 있던 여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사내는 갑작스런 울음소리에 얼굴을 구기며 손을 떨쳤다. 그러자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여인이 바닥을 구르며 나가떨어졌다.

“죽고 싶으면 더 울도록 해라! 이 자리에서 즉시 목을 쳐 줄 테니까!”

사내가 검을 뽑으며 으르렁거리자 일순간 울음을 터트리던 여인들이 일제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이미 터진 울음이 그칠 리는 만무했다.

“히끅! 히끅!”

딸꾹질 소리와 함께 악착같이 울음소리를 내뱉지 않으려는 여인들로 인해 밀실은 순식간에 온갖 소리로 가득 차올랐다.

“으… 시끄러워!”

“네가 쓸데없이 협박해서 그런 거 아니냐. 여자를 그렇게 다룰 줄 모르니 만날 영영이에게 당하고 다니지.”

“쳇! 그년 얘기는 여기서 왜 꺼내?”

“잘들 논다.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계집들이나 꺼내!”

횃불을 들고 있는 사내가 얼굴을 구기며 외치자 나머지 두 명의 사내는 입을 닫으며 여인들을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여인들은 그들의 거친 행동에 비명을 질러 댔다.

그렇게 여인들을 밖으로 내몰던 한 사내가 눈을 빛냈다. 안선영을 발견한 것이다.

“허! 절색의 미모로군.”

사내는 히쭉히쭉 웃으며 안선영에게 다가갔다. 그때 안선영의 시녀가 그녀와 사내의 사이를 막아섰다.

“네 이놈! 이분이 누군 줄 알… 꺄아!”

사내는 얼굴을 구기며 자신을 가로막는 여인의 뺨을 후려쳤다.

“네년은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길을 막는단 말이냐?”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안선영이 쓰러진 시녀를 감쌌다.

“대체 당신들은 누군가요? 하늘이 무섭지도 않나요? 이런 일을 벌이다니.”

“흥! 바보 같은 말을 하는군. 어디 한번 하늘의 맛을 보여 주도록 해 볼까?”

사내가 바지춤을 움켜쥐자 안선영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사내의 머리에 불똥이 튀었다.

“야! 야!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꺼내와! 제물에게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아냐?”

“예예.”

사내는 투덜거리며 안선영과 시녀의 팔을 움켜쥐고 밀실 밖으로 향했다.

“아!”

밖으로 나온 안선영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어젯밤보다 더 많은 여인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수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대, 대체 이게…….”

안선영은 무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지성을 갖춘 그녀라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모두 제단으로 끌고 가라!”

“예!”

어디선가 튀어나온 목소리에 일제히 대답한 사내들은 여인들을 이끌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금 밖으로 나온 안선영 역시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사내들에게 끌려갔다.

인파에 파묻혀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한 안선영은 약 이각 정도를 걸었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을 때 그녀의 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맙소사… 대체 여기가 어디기에…….”

안선영의 입에서 잠꼬대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바로 눈앞에 수십 장 높이의 커다란 제단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저걸 사람이 만든 것일까? 라고 생각될 정도로 제단은 웅장했다.

다른 여인들 역시 그런 웅장한 모습에 위축이 되었는지 이곳저곳에서 소곤거렸다.

“모두 조용!”

그때 제단 중간쯤에서 한 장년인이 바람에 장포를 날리며 근엄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런 근엄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한쪽 팔이 없었다. 왼쪽 소매가 거침없이 바람에 펄럭였던 것이다.

“모두들 들어라!”

장년인이 말하는 순간 안선영은 얼굴을 구겼다. 그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외치는 것처럼 크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무림의 고수!’

안선영은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이렇게 넓게 퍼트리는 건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나의 이름은 세세호라고 한다. 이미 예측한 이들도 있겠지만 본좌는 혈궁이라는 무림 방파에 소속되어 있다.”

‘혈궁!’

안선영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혈궁! 그 이름을 어찌 모를까? 무림을 구축하는 거대 세력중 하나로 자신의 가문쯤은 마음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멸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문파였다.

‘맙소사! 혈궁이라니! 그럼 이곳이 혈궁이라도 된단 말이야?’

안선영의 얼굴에 그림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혈궁은 아무리 머리를 굴린다 하더라도 탈출하거나 빠져나갈 수 있는 문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왜 이곳에 왔는지 상당히 궁금할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너희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오늘 부활하실 혈마신님의 제물이 되기 위함이다!”

“……!”

안선영은 평생 놀랄 걸 오늘 다 놀란다고 여길 정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물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안선영뿐만 아니라 다른 여인들 역시 세세호의 말에 놀랐는지, 혈궁이란 말에도 조용하던 그녀들이 제물이란 말을 듣자마자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트렸다.

“조용!”

그녀들의 울음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세세호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미 터진 울음이 멈출 리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죽을 목숨 뭐가 두려울까? 단지 이렇게 죽는다는 사실이 서러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세세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더는 소리치지 않고 자신이 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슬퍼하지 말거라! 너희들의 피는 혈마신님의 거름이 되고 살이 되어 평생을 살아가게 될 터이니! 너희들의 희생으로 무림은 일통이 되고 너희들의 가족은 혈궁의 군림 아래 평온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입을 닫은 세세호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 섬서 안무가의 여식인 자화 안선영이 있을 것이다! 손을 들어 보아라!”

안선영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자신을 호령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납치한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씨! 안 돼요! 손을 드시면 안 돼요!”

안선영은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 옆에 서 있던 그녀의 시녀가 안선영의 팔을 붙들었다.

“저도 혈궁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들은 적이 있어요. 그들은 여인을 단지 성적 도구로만 알고 질리면 피부를 벗긴다고 해요! 그리고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식인종이라고요! 그야말로 악마들이에요!”

안선영은 시녀의 말에 살짝 아미를 구겼다. 사실이 왜곡돼도 너무나 왜곡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요. 저자의 말을 들어 보면 어차피 오늘 죽게 되죠. 그럴 바에는 저자들의 속셈이 대체 뭔지 알고 죽는 게 나아요.”

“그래도 안 돼요, 아씨! 포기하지 말아요! 꼭 주인어른께서 무사들을 이끌고 아씨를 구하러 오실 거예요!”

“…….”

시녀의 말에 안선영은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희망을 가진다 하더라도 시녀가 한 말이 실현이 되기엔 혈궁이란 벽이 너무나 컸다.

“꺄아!”

그 순간 공간을 가로지르는 비명 소리가 장내를 덮었다. 흐느끼던 여인들이 일제히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턱!

세세호는 목이 잘려 죽은 여인의 머리를 잡고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팔을 타고 내려와 괴기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당장 나오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이들을 전부 이렇게 죽일 것이다!”

“아, 아씨!”

세세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여인이 비명 아닌 비명을 내질렀다. 바로 안선영의 시녀였다. 안선영이 시녀의 팔을 뿌리치며 손을 들었던 것이다.

“제가 바로 안선영이에요!”

안선영은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손을 든 그녀의 팔은 부들부들 떨려 왔고, 다리 역시 후들거려 살짝만 건드려도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질 것 같았다.

“훗, 귀중히 모셔라.”

“예!”

세세호의 말에 그 옆에 있던 수하가 대답하고는 안선영을 향해 달려갔다.

안선영이 정파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한 도박인데 제대로 걸린 것이다.

안선영과 세세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세세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

“생각보다 시간이 별로 없군요. 계획을 약간 수정해야겠습니다.”

진철은 한 장의 양피지를 펴면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전에 독고요가 전해 준 혈랑파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는 문서였다. 그 안에는 혈랑파가 삭주에서 자리 잡은 곳과 건물의 배치까지 그려져 있었다.

“보시다시피 혈랑파는 삭주에서 약간 떨어진 외곽에 존재합니다. 뒤로는 호가장처럼 절벽으로 되어 있어 오직 앞으로만 진입할 수 있는 구조이죠.”

진철이 혈랑파의 뒤쪽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하지만 이건 거짓입니다. 사실 저 절벽은 거대한 절진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합니다.”

“절진?”

“예. 그것도 이만한 규모의 진이라면 꽤 많은 공을 들인 듯합니다.”

진철의 말에 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크기의 면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전부 진으로 덮으려면 그곳에 들어간 시간과 정성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과연 혈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진철의 손가락이 혈랑파의 입구로 향했다.

“여기서 한 형은 계획대로 합니다. 그리고 북궁아는 따로 움직이지 말고 한 형을 호위하도록 해.”

북궁아는 진철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획대로 한 형이 시선을 분산시키면 전 그 틈을 타 장 안으로 들어설 겁니다.”

진철의 손가락이 장 안으로 향했다.

“끝까지 남아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적당하다 싶을 때 바로 몸을 빼세요. 결코 무리하지 마시구요. 특히 북궁아.”

진철이 고개를 들어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북궁아 역시 진철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가장 궁금한 것은 전에 벌였던 일전에 대해서였다. 사람으로서 그만한 한기를 가지기에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철은 묻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만의 비밀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라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으리라.

“몸은 어때? 할 수 있겠어?”

그녀의 상태를 살펴봤었기에 진철은 걱정 어린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북궁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적은 기운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 기운에서 엄청난 한기가 흘러나왔다.

“문제없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 안 되겠다 싶으면 한 형을 호위하면서 그 자리를 바로 벗어나도록 해.”

“그러지.”

북궁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진철은 살짝 의문을 품었다. 예전 같았으면 도를 빼 들고 달려들 정도로 살기를 내보이던 요구였기 때문이다.

“대신에 한 가지 부탁… 아니 소원이 있다.”

“그럼 그렇지. 뭔데?”

“그건… 그때 가서 말해 주지. 이번 일이 끝난 후에.”

“흠…….”

진철은 얼굴을 살짝 구기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곤란한 소원은 안 돼. 상식적으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해.”

“그 정도면 됐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

진철은 다시 양피지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그렇게 혈랑파로 잠입하면 전 이곳으로 갈 겁니다. 이 양피지에 따르면 그곳에 제단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제단?”

“예. 혈마신의 부활을 위한 제단 말입니다. 그리고 제물은 그곳에서 혈마신에게 먹힌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 그리고 오늘 달이 사라진다고 하더군요.”

진철의 말에 한정이 눈을 크게 떴다.

“달이 사라진단 말이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모르겠습니다. 단지 그렇게 적혀 있더군요. 그리고 그 시점으로 혈마신의 부활은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형과 북궁아는 달이 사라지려고 할 때 즉시 몸을 빼세요. 전 안 소저를 구출하고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나겠습니다.”

진철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모이는 것은 이곳이 되겠습니다.”

진철이 가리킨 곳은 바로 지금 그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

사람들은 말한다. 시간은 금이라고. 괜히 금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시간은 잡지 못하고 되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은 어떻게 쓰냐에 따라 천금의 값어치를 할 때가 있고 쪽박을 차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세세호의 경우가 그랬다. 이제 두 시진 후면 그 결과가 드러나게 된다.

세세호는 정옥진과 함께 제단으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그만큼 시간에 맞춰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조금 일찍 제단으로 향한 것이다.

정옥진은 제단에 도착한 후 하나의 탕약을 마시고 정신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다. 혈마신을 부활시키기 위한 의식이.

제단에 가까워질수록 절망에 찬 비명이 귓가를 때리기 시작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정옥진을 바라보니 그 역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약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듯 보였다. 그만큼 들려오는 비명에는 사람의 혼을 빼놓게 만들 정도로 사기(邪氣)가 가득 담겨 있었다. 모두 제물이 되기 위한 약을 섭취했기 때문에 나오는 사기였다.

“얼굴색이 안 좋군. 몸이 안 좋은가?”

“아닙니다, 대인. 하지만 이 비명 소리는…….”

정옥진의 상태가 왜 그런지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물어본 세세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날 믿는가?”

“물론입니다. 제가 대인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정옥진의 확고한 대답에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앞에는 하나의 지옥도가 펼쳐져 있을 것이다. 하나 자네는 일말의 의심을 품지 말고 나만 따라오도록 하게나.”

“예.”

“자네를 잡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자네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자 역시 있을 것이야. 하지만 그들에게 일말의 시선조차 주면 안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세호의 거듭 강조되는 말에 정옥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들려오는 비명에 저 앞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대충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혈랑파 본관을 빠져나온 세세호와 정옥진은 뒷문을 통해 쭉 걸어갔다.

“이곳은 절벽이 아닙니까?”

정옥진이 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 맺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눈앞에는 절벽이거늘, 그곳에서 수많은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절벽이라…….”

세세호는 실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뒤로 하나의 그림자가 떨어져 내렸다.

“진을 거둬라.”

“존명!”

세세호의 말에 대답한 인영은 근처에 있던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놀라운 은신술에 정옥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핏 기척이 느껴지기는 하나 눈으로 볼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옥진은 그게 신기했다. 단지 체력을 기르고 내공만 쌓았을 뿐 이렇다 할 무공은 하나도 익히지 않은 그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드드드!

지축이 순간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져 있던 절벽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며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대체!”

정옥진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입을 쩍 벌리며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오른 거대한 제단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법도 한데 그런 제단의 주위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발가벗은 채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정옥진은 경악한 눈으로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세세호는 그런 정옥진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제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옥진은 그의 그림자라도 놓칠세라 얼른 따라붙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은 주변의 여인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으음!’

문뜩 정옥진은 아랫도리가 뻣뻣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고통스러운 듯 절망스러운 얼굴로 비명을 내지르는 여인들에게서 이유 모를 성욕을 느낀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들에게 달려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정옥진의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세세호가 정옥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저것들에게 시선도 주지 말라고. 저 여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야. 하나의 짐승과도 같은 존재들이지. 저들은 이미 이성을 잃었어. 공포와 절망만을 느낄 뿐.”

세세호의 말에도 정옥진은 여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게 많을 것이네. 하지만 조금만 참게나. 곧 모든 것을 알려 줄 테니. 다만, 이 모든 것이 중원을 위해서라는 것만 알아 두게.”

“중원을… 위해서…….”

정옥진이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 중원을 위해서.”

여인들로 이뤄진 절망의 파도를 헤치고 지나 제단에 도착한 세세호와 정옥진은 계단을 타고 제단 위를 향해 올라갔다.

약 반각 정도 걸어 올라가자 오 장 넓이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쇠사슬에 묶여 벽에 매달려 있었다.

“저 여인은…….”

놀라우리만치 뛰어난 미모와 자태를 뽐내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정옥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세세호는 그런 정옥진을 힐끗 쳐다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녀는 바로 안선영이었다.

세세호는 안선영을 향해 걸어갔다. 안선영은 정신을 잃은 건지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녀의 앞까지 다가간 세세호는 안선영의 아랫배에 손을 대고 내공을 운용했다.

우웅!

그녀에게 살짝 내공을 흘려 넣자 안선영의 몸이 약한 진동을 일으켰다.

“으음…….”

안선영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그러다 바로 앞에 세세호가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부릅떠지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곧 묶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녀의 눈에는 공포가 감돌기 시작했다.

“아, 악마! 대체 날 어찌할 셈이야!”

더 이상 그녀의 입에서는 존댓말이 나오지 않았다. 극악의 공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그녀도 점차 이성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글쎄…….”

세세호는 말끝을 흐리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제단 밑의 광경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보이느냐? 저 모습들이.”

세세호가 팔을 뻗어 밑을 가리키자 안선영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발가벗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인들을 본 것이다.

“모두 제물들이다. 혈마신의 의식에 들어갈. 그리고 너 역시 마찬가지.”

“……!”

안선영이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세세호는 더 이상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딱!

세세호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뒤로 예의 그 흑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세호는 흑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의식을 준비하라.”

“존명!”

흑영이 땅으로 꺼지듯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서는 하나의 탕약이 들려져 있었다.

세세호는 그에게서 탕약을 받아 들고는 정옥진에게 다가갔다.

“이것을 마시게나.”

“이 약은 무엇입니까?”

“자네의 미래라네. 이걸 마시면 자네는 변하게 될 거야. 세상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존재로 말일세.”

“우러러보는…….”

정옥진은 세세호에게서 탕약을 받아 들고는 천천히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한 모금씩 삼켜 끝내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마셔 버렸다.

“윽…….”

정옥진은 시야가 감겨 오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세세호는 그런 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옥진은 몸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턱!

정옥진이 완전히 정신을 놓자 세세호가 그의 신형을 붙잡았다. 세세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혈향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백 명의 여인을 죽여 피의 요람을 만들어라!”

세세호가 크게 외치자마자 수많은 여인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그녀들 사이에서 잠복하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그녀들을 향해 휘두른 것이다.

“배덕한 짐승 같으니라고! 하늘이 절대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절대로!”

세세호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안선영이 악에 받친 듯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세세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제단 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소리는 안선영의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넌 아직 아니야. 아직 너에게는 희망이 있으니까.”

“그게 무슨!”

“크크큭, 크크크.”

세세호의 시야에 죽어 버린 여인의 시체를 끌고 올라오는 무인들이 들어왔다.

‘그 희망이 더욱 큰 절망으로 변했을 때, 그때가 더 맛있는 법이지.’

***

도심 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너무나 조용해 사람이 살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 도심의 사이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진철이었다.

진철은 조용히 어둠과 어둠 사이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북궁아와 한정이 따랐다. 이미 자신들을 찾아와 공격을 한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몸을 숨겨야 했다.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진철은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달이 구름 사이로 비치고 있었다.

진철은 잠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달이 구름에 가려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진철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몸을 숨기고 움직이기에 아무리 빨리 이동한다 하더라도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 시진을 이동하자 도심의 외곽이 나타났다.

“저기인 것 같구려.”

한정이 그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축제를 하듯 환한 빛으로 휩싸인 건물이 홀로 존재하고 있었다. 거리는 약 일각 정도 달리면 도달할 것 같았다.

“정말로 저들은 혈마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존재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것 같구려.”

한정은 얼굴을 구기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철이 얼이 빠진 듯 그곳을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그가 다시 불렀다.

“진 소협?”

“…….”

“진 소협!”

“아!”

한정이 재차 부르자 진철이 정신을 차리고 한정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그런데 무슨 일이오? 저곳에 뭐라도 있소?”

“안 느껴지십니까?”

“뭐가 말이오?”

진철의 말에 한정이 되물었다.

“아, 아닙니다.”

진철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런 진철의 얼굴에 진지함이 묻어 나왔다.

‘엄청난 사기다.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기운이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라니.’

진철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사기에 민감한 도가 계열의 심공을 익혔기에 먼 거리에서도 사기가 느껴진 것이다.

혈랑파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기는 그 정도로 엄청났다.

“그럼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진철의 신형이 어둠을 뚫고 나갔다.

“읏!”

뒤에서 잘 따라오던 북궁아가 갑자기 신음을 내뱉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진철과 한정은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한정이 묻자 북궁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마치 역겨운 냄새라도 맡은 듯 구겨져 있었다.

“엄청난 사기가 느껴지고 있다.”

“사기?”

한정이 되물었다.

“아마도 저 건물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흘러나오는 엄청난 사기. 혈마신이란 존재는 전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군요. 저런 사기를 지닌 존재가 나타난다면… 정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재앙일 테니까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한정은 고개를 돌려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몸이 으스스했던 이유가?”

“예. 사기에 노출돼서 그럴 겁니다. 무림인조차 이 정도인데 일반인이라면 단순히 고뿔에 걸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진철은 조용해도 너무나 조용했던 도심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정말 터무니없는 괴물이 저곳에 있을 겁니다. 준비됐습니까?”

진철이 한정을 바라보았다. 한정은 그런 진철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몸을 돌린 진철의 앞에는 거대한 장원이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불구덩이를 찾아오는 하루살이를 찾듯이.

***

“꺄아아악!”

“아아아!”

혈랑파 안에 있던 혈궁의 무사들은 귓가를 때리는 비명에 환장할 지경에 이르렀다. 첫 비명이 터진 지 한 시진이 넘었는데도 끊임없는 비명들이 귓가를 뒤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단순히 귀가 아파 오는 게 아니었다. 그 비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지어는 헛구역질까지 나기 시작했다. 체면이 있어 참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언제까지일지 몰랐다.

“빌어먹을!”

한 무사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얼굴을 잔뜩 구겼다.

“이건 도저히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비명이 아니야. 대체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의 고개가 비명이 터져 나오는 곳으로 돌아갔다.

“제길! 조금만 더 참아. 누군 뭐 괜찮아서 이렇게 서 있는 줄 알아?”

“으으! 저 소리를 더 듣다간 내가 미쳐 버릴 거 같다고!”

동료의 말에 소리를 지른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어? 저분은 취하람 장로님이 아니신가?”

그때 그들의 곁에 있던 내시 수염의 무사가 한 곳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무사들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그곳에는 언제 나왔는지 취하람이 모습을 드러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 빌어먹을. 저런다고 해서 뭐가 보이긴 하나?”

두 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무사들은 취하람의 흉을 보며 침을 내뱉었다.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가 언짢게 보였기 때문이다.

“쳇! 그래도 귀머거리라 그런지 이 비명은 듣지 않아 참 좋겠네!”

본래 상관에게 충성을 다하던 무사들의 성격이 차츰 변해 가기 시작했다. 사기가 가득한 비명의 영향이었다. 내공의 수위와는 달리 사기의 영향은 정신적으로 나약한 자를 먼저 침식해 갔다.

“그런데 어딜 저렇게 보는 거야?”

무사들은 취하람이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들의 눈에 붉은 점이 하나 보였다.

“저 별은 유난히 붉네.”

“제길! 이런 상황에 별은 무슨!”

무사들의 눈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직접 제단 안에 들어갔다면 그들의 성향은 변해도 진작에 변했을 것이다. 그것도 잔혹한 살인마로.

“어? 저 별… 점점 커지는 거 같은데?”

슈아악!

내시 수염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하늘에 떠 있던 별이 갑자기 커지며 급격하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

푹!

그 별은 곧 하나의 화살이 되어 내시 수염의 가슴에 박혔다. 그 순간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화염에 휩싸였다.

“으악!”

사내의 비명에 순간 주변에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내시 수염의 사내는 홀로 비명을 내지르며 타오르는 불길에 저항했다. 하지만 그건 무의미했다.

잠시 후 사내의 움직임이 줄어들며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살이 타오르는 소리와 냄새만이 주변에 퍼질 뿐이었다.

슈악!

또다시 불화살이 허공에 치솟아 올랐다. 그렇게 수 발의 화살이 연달아 건물 위로 떨어졌다.

“저, 적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무사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습이었던 것이다.

“카하!”

그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있던 취하람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그러더니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슈욱!

기름 주머니를 단 불화살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갔다. 화살은 장벽을 타고 넘어가 커다란 건물 위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순식간에 열 발의 화살을 쏘아 넘긴 한정은 활을 챙기며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진철과 북궁아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북궁아, 한 형을 잘 지켜 줘.”

“걱정 마라.”

진철의 말에 북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둘 다 몸조심하십쇼.”

진철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진철은 혈랑파 안으로 잠입할 것이다. 그리고 안선영을 구해 낼 것이다. 한정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럼 가도록 합시다, 북궁 소저.”

한정이 입을 열자 북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북궁아의 시선은 진철의 뒤를 따라갔다.

꾹!

북궁아는 손을 강하게 쥐고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근처에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 탓이다. 진철이 사라지자 갑작스레 나타난 기운이었다.

“음?”

자리를 뜨려던 한정은 북궁아의 표정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그 역시 갑작스레 느껴지는 강렬한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흡!”

한정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앞에 하나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천천히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는 단지 걷는 것뿐인데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공간이 잠식되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는 두 눈을 감고 있었고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당신은?”

한정의 말에 그는 양손을 가슴 위로 올린 후 합장을 하였다.

-내 이름은 취하람. 그대들이 신룡의 동료들인가?

한정은 갑작스레 들리는 음성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이 목소리는 대체? 전음? 설마 당신이?”

한정이 다시 고개를 돌려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시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 번 묻겠다. 그대들이 신룡의 동료들인가?

“당신은 대체?”

“누구긴, 적이겠지!”

북궁아의 도가 빛을 뿜었다. 사내가 있던 자리에 냉기가 내리꽂혔다. 하지만 북궁아는 도를 거두지 않고 그대로 위를 향해 그었다.

하얀 냉기가 공중으로 뻗어 나가며 폭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나의 목적은 신룡을 홀로 제단으로 보내는 것. 그리고 그의 동료를 죽이는 것. 너희들은 여기서 뼈를 묻을 것이다.

“뭣?”

취하람의 말에 한정이 놀라 되물었다. 그의 말뜻은 이미 진철을 보았음에도 그냥 가게 보내 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함정이라는 것!

“설마!”

“피햇!”

한정의 몸이 옆으로 밀려나갔다. 그 순간 그가 있던 자리로 강력한 기운이 내리꽂혔다.

“크흣!”

한정은 밀려들어 오는 흙먼지에 눈을 가리며 그 자리에서 바닥을 굴렀다.

“방해된다. 여기서 피하도록!”

북궁아가 한정의 앞에 서며 입을 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한정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고는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지금 자신은 그녀에게 방해만 될 뿐이었다.

“어서! 널 지키면서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북궁아가 다시 말하자 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무운을 빌겠소!”

북궁아는 멀어지는 한정에게 시선도 주지 않으며 도를 들어 올렸다. 취하람은 눈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 한정이 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북궁아를 향했다.

-가는 건가? 이상하군.

“……?”

-뭐, 상관없겠지. 그곳에는 그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럼… 어울려 보자꾸나!

취하람의 신형이 바람을 가로질렀다. 그런 그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가는 실처럼 펄럭거렸다.

“흥!”

북궁아는 코웃음을 치며 그대로 도를 내리그었다. 그러자 또다시 하얀 냉기가 터져 나가며 그대로 취하람을 향해 쏘아졌다.

꽝!

한기가 주변을 흔들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북궁아는 그 모습에 도를 살짝 내렸다. 정통으로 취하람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먼지를 뚫고 나오는 검은 인형에 북궁아는 급히 도를 추켜올렸다.

꽝!

가까스로 든 도 위로 강력한 경기가 터져 나갔다. 북궁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녀의 신형이 뒤로 밀려나갔다.

북궁아는 어깨가 뻐근해져 옴을 느꼈다. 그때 북궁아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취하람이 도약하며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우웅!

북궁아의 도가 하얀 빛을 토해 냈다. 그리고 취하람이 지척에 다가온 순간 북궁아의 도가 허공에 하얀 선을 그었다.

쾅!

돌풍이 몰아치며 또다시 흙먼지가 주변을 물들였다. 그런 흙먼지를 뚫고 북궁아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쿵!

“큭!”

빠르게 바닥을 구르던 북궁아의 신형이 나무에 부딪치며 멈춰 섰다. 북궁아는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북궁아의 시야에 먼지를 뚫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취하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공격으로는 날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날 음살권마라 부르지. 그 이유를 알려 주도록 하마.

취하람의 손에 맺혀 펄럭거리던 기운이 순간 그의 주먹으로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작은 소용돌이처럼 그의 주먹을 감쌌다.

파앙!

북궁아와 오 장이나 떨어져 있던 취하람이 주먹을 강하게 떨쳤다. 허공을 친 그의 주먹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가며 허공을 가르고 북궁아에게 날아갔다.

‘권풍?’

북궁아는 날아오는 기운에 도를 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쿵!

“큭!”

북궁아는 강력한 기운에 팔목이 저려 오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터트렸다. 그 순간 북궁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웽!

“악!”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순간 엄청난 소리가 그녀의 귀를 강타한 것이었다. 북궁아는 저도 모르게 도를 놓으며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무인이 무기를 놓으면 안 되지.

땅에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를 들었는지 취하람이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북궁아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도에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그때 취하람의 주먹이 다시 움직였다.

파팡!

두 번의 파공성과 함께 예의 그 기운이 다시 북궁아에게 날아들었다. 북궁아는 급히 다리에 힘을 주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그녀가 있던 자리가 움푹 파이며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땅거죽이 터져 나갔다.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린 북궁아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어느새 취하람이 그녀의 코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펑!

취하람의 주먹이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그의 주먹이 닿으려는 순간 몸을 비틀어 피한 것이다. 북궁아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몇 바퀴 몸을 굴린 후 곧바로 일어선 북궁아는 취하람을 향해 도를 겨누었다. 하지만 취하람은 가만히 서서 북궁아를 등지고 있는 상태였다.

취하람은 북궁아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린 후 입술을 틀어 올렸다. 그 모습에 북궁아가 도를 그었다.

슈아악!

강렬한 도기가 취하람에게 뻗어 나갔다. 하지만 취하람은 그녀의 도기를 몸을 슬쩍 젖히는 것만으로 피해 내며 허공을 때렸다. 그 순간 북궁아가 그 자리를 벗어나며 또다시 도기를 쏘아 보냈다.

쾅!

시간의 차이를 두고 날아오는 것을 피하지 못했는지 도기가 취하람의 몸을 때렸다.

북궁아는 그것을 보았음에도 계속 몸을 회전시키며 도기를 날려 보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도기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충돌했다.

쿠르릉!

한기가 먼지와 함께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북궁아는 숨을 몰아쉬며 도를 바닥에 늘어트렸다. 한 호흡에 강력한 도기를 연달아 날린 결과였다.

-호, 내 공격을 피하고 도기를 날린다라……. 그럴듯하군.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갑작스런 취하람의 전음에 북궁아가 깜짝 놀라며 한 발 물러섰다.

후웅!

강력한 돌풍이 몰아치자 안개처럼 주변을 가리던 한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취하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을 펼쳐 허공을 향해 양손을 뻗고 있는 그의 모습에 북궁아는 다시 한 발 물러섰다.

히죽!

취하람의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그걸 본 북궁아는 저도 모르게 도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기 때문이다.

팟!

취하람이 강하게 바닥을 찼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다시 북궁아를 향해 쏘아졌다.

“칫!”

북궁아는 혀를 차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취하람이 더 빨리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북궁아는 몸을 비틀어 그의 권풍을 피해 냈다. 도를 들어 막으면 위력도 위력이지만 예의 그 소리가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생각이었다.

슈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북궁아의 코앞에 취하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몸을 비트는 사이 취하람이 그녀에게 접근해 온 것이다.

주먹을 틀어쥔 취하람이 북궁아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북궁아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북궁아는 급히 고개를 비틀었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하얀 이를 드러낸 취하람의 얼굴이 보였다.

퍽!

취하람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소리가 그녀의 귀를 강타했다.

“꺄악!”

무방비로 당해서 그런지 더욱 큰 타격을 입은 북궁아의 신형이 흔들거렸다. 그 틈을 타 취하람의 발이 채찍처럼 그녀의 옆구리를 때렸다.

“컥!”

북궁아의 신형이 빠르게 나가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크윽!”

북궁아의 몸이 꿈틀거렸다. 발차기에 당하는 순간 배 속이 진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를 뒤흔드는 소리로 인해 눈앞이 어지럽기까지 했다.

취하람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발을 옮겼다.

-나를 이기기 위해선 너의 고막을 찢어야 할 것이다. 자! 그럼 계속해 볼까?

고개를 든 북궁아는 천천히 걸어오는 취하람을 바라보며 이를 강하게 물었다.

***

혈랑파 안으로 들어온 진철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림자를 이용해 몸을 숨겼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름을 양분 삼아 타오르는 화염이 건물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수많은 무사들이 불을 끄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칫, 그냥 들어오는 게 차라리 나앗으려나.’

진철은 물동이를 들고 뛰어다니는 무사들을 바라보다 건물 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지붕 위에 있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화염이 피어오르지 않은 지붕을 고르기 시작했다.

‘저기서… 저기로…….’

목표를 정한 진철은 곧장 실천으로 옮겼다. 다리에 힘을 주고 바닥을 박차자 그의 신형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십 장 떨어진 건물 뒤로 이동했다.

“응?”

“왜 그래!”

“아니, 뭔가 방금 지나간 거 같은데…….”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불이나 꺼!”

무사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진철은 근처에서 두리번거리던 무사의 기척이 멀어지자 숨을 내쉬었다.

‘휴, 들킬 뻔했다.’

진철은 얼굴을 구겼다. 이동하는 순간 발밑에 있던 돌을 잘못 밟아 신형이 비틀거렸다. 그 때문에 발각이 될 뻔했다.

진철은 다시 고개를 돌려 다음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

쾅!

바닥을 내리찍은 취하람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앞에는 북궁아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녀가 얼마나 지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 도를 들었고 지금도 도를 들고 있었다.

‘부질없는 짓을…….’

취하람은 그녀의 모든 행동이 부질없다고 느껴졌다. 분명 그녀가 지닌 한기는 절세의 빙공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주먹을 뚫을 수 없었다.

‘성이 북궁이라고 했던가?’

취하람은 그녀의 성과 그녀가 뿜어내는 한기를 느낀 순간 그녀가 북해빙궁의 사람이라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이만한 한기를 내뿜는 빙공은 극히 적었고, 북궁이란 성은 무림에서 북해빙궁에서만 사용하고 있었다.

‘온실 속에서 자란 꽃 주제에!’

자신은 어떠한가? 이 무공을 손에 넣기 위해 귀를 찢어야했고 수십 명의 혈투 속에서 살아남아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거기에 그녀가 자신을 이길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합!”

북궁아가 기합을 내뱉으며 도를 휘둘렀다.

취하람은 도의 움직임을 느끼며 공기의 흐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도가 몸에 닿으려는 순간 속도가 감소하는 것이 느껴졌다.

취하람은 그것을 간단히 피해 내며 그녀에게서 거리를 벌려 뒤로 물러섰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분명 그녀의 도에 실린 위력은 강력했다. 하지만 그 강력함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도가 닿는 순간 뭐에 겁먹었는지 급격하게 위력을 줄여 버린 탓이었다. 마치 나이 든 스승이 어린 제자와 비무를 하는 것처럼.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속 그렇게 한다면 넌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취하람의 눈이 빛났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그의 눈은 감겨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착각이 들었다. 그가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빠르게 북궁아를 향해 쏘아졌기 때문이다.

“큽!”

북궁아는 급히 허리를 젖혔다. 그런 그녀의 얼굴 위로 취하람의 주먹이 뻗어 나갔다.

그 순간 북궁아가 바닥을 찼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이 취하람의 턱을 향해 치고 올라갔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취하람은 고개를 비틀었다.

촤악!

그녀의 무릎이 취하람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취하람의 신형이 북궁아에게서 떨어졌다.

북궁아는 그대로 다리를 올려 허리에 힘을 주고는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런 그녀의 두 발이 땅에 닿으려 할 때 묵직한 경기가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취하람이 권풍을 쏘아 날린 것이다.

북궁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날리며 널찍한 대도를 들어 가로막았다. 그리고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권풍이 도를 때리는 순간 터져 나올 소리에 나름대로 대비한 행동이었다.

펑!

‘어?’

권풍을 막은 북궁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권풍은 위력적이긴 하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들려오긴 했지만 그 크기가 전 같지가 않았다.

‘마치 어딘가 반사된… 아! 혹시…….’

예상과는 다르게 별다른 타격 없이 바닥에 착지한 북궁아는 빠르게 다리를 움직이면서 취하람에게 도기를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취하람이 그녀의 도기를 간단히 피하면서 허공에 주먹을 때려 권풍을 날려 왔다.

그 순간 북궁아가 눈을 빛냈다.

그녀는 날아오는 권풍을 피하지 않고 도를 들어 막았다. 그리고 권풍이 도에 닿으려는 순간 바닥을 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펑!

‘역시!’

허공에 몸을 띄워 권풍의 충격을 흘려버린 북궁아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그가 펼치는 무공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이젠 내 차례야!’

북궁아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는 취하람의 주위를 맴돌며 도기를 쏘아 보냈다.

하지만 취하람에게는 의미 없는 행동으로 보였다. 눈이 아닌 기로 적을 찾는 그였기에, 그녀가 아무리 이리저리 움직이며 도기를 쏜다 하더라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긴가!’

북궁아의 기척을 느끼다 그녀가 움직임을 멈춘 순간 그곳으로 권풍을 쏘아 보낸 취하람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아무래도 권법가였기에 근접전이 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취하람이 발을 멈추며 급히 양팔을 들어 올렸다.

쾅!

그런 취하람의 양팔 위로 한기가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분명 권풍을 날렸을 터인데!’

취하람의 얼굴에 놀람이 피어났다. 그런 취하람의 위로 한기가 연달아 내리꽂혔다.

“큭!”

취하람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방어 초식을 펼치지 못하고 단지 강기가 둘린 주먹으로 도기를 받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날아드는 도기의 시간 차도 너무 짧았다.

“하압!”

그때 가는 비명 소리가 들리자 취하람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위험하다!’

취하람은 자신의 위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에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런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충격을 받으면서 내공을 끌어 올려 내상을 입은 것이다.

취하람은 기혈이 뒤틀리는 고통을 맛보면서도 내공을 계속해서 끌어 올렸다.

그 고통을 견딘 보람이 있는지, 취하람의 두 주먹을 감싼 소용돌이가 더욱 굵어지며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해지기도 전에 북궁아의 도가 그 위를 강타했다.

“빙벽파일도!”

콰앙!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기운이 취하람의 위에서 폭발했다.

북궁아는 뿜어져 나오는 경기를 이용해 공중제비를 돌며 취하람의 뒤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취하람을 바라보았다.

“컥!”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있던 취하람의 입에서 핏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양다리는 종아리까지 땅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방심은 금물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당하다니!’

취하람은 단전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과 저릿저릿한 팔의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헉… 헉…….”

거칠게 숨을 내쉬던 취하람은 다시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기혈이 찢기는 고통과 함께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방금 그 충격으로 몇 군데 혈도가 막혀 버렸는지 내공의 운공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이렇게!’

“크하아아!”

취하람의 입에서 거대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그가 있던 자리가 폭발하며 흙더미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다리를 구속하던 것에서 풀려나자 취하람은 몸을 돌리며 북궁아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그의 몸 곳곳에선 핏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혈도가 터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런 요인으로 일어난 승부 따윌 인정할 것 같더냐!’

취하람이 달려들자 북궁아는 무릎을 굽히며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치명상을 입은 것과는 달리 맹렬한 기세로 돌진하는 취하람의 모습에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상태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강렬한 기세… 하지만!’

취하람의 모습을 자세히 눈여겨보던 북궁아의 무릎이 펴지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크아아!”

취하람은 다가오는 북궁아의 기척을 느꼈는지 양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그런 그의 양손에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인해 그의 양팔이 순식간에 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죽어라!’

북궁아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오자 취하람의 오른손이 비틀어지며 허공을 갈랐다. 맹렬히 쏘아지는 기운에 북궁아가 상체를 비틀었다.

촤악!

주먹이 북궁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녀의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주먹의 풍압을 이기지 못해 코피가 터져 버린 것이다.

‘걸렸다!’

취하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고는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펑!

그의 주먹이 허공에서 터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뿜었다. 그와 함께 몸을 비튼 취하람의 왼손이 북궁아가 피한 곳으로 정확하게 꽂혔다.

펑!

다시 공기가 터지며 소리가 퍼져 나갔다. 순간 취하람의 얼굴이 굳어지며 창백하게 변했다.

‘…느낌이 없다?’

왼 주먹에서 느껴져야 할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빙룡강쇄(氷龍降碎)!”

그때 북궁아의 목소리와 함께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순간 취하람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콰앙!

새하얀 비룡이 취하람의 몸을 삼키며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척!

바닥에 착지한 북궁아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하얗게 얼어붙은 취하람의 모습이 보였다.

쩌적!

순간 취하람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금은 점점 영역을 넓혀 갔고 끝내는 취하람의 전신으로 뻗어 갔다.

쩍!

취하람의 주먹이 갈라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잘게 부서진 취하람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북궁아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당신은… 조금 더 이성을 붙잡고 있어야 했어!’

마음속으로 취하람에게 말을 건넨 북궁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우연찮게 몸을 띄워 그의 권풍을 막지 않았다면 지금 쓰러져 있는 것은 자신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취하람에게 조금이라도 냉정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면 방금 전과 같은 공격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취하람의 주먹이 북궁아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허공을 터트린 순간 북궁아는 급히 몸을 띄우며 도를 들어 올렸었다. 그 덕에 허공에서 터져 나온 경기가 북궁아의 도를 밀어냈고 결국 그녀가 거리를 벌릴 수 있게 도와준 것이었다.

거기에 취하람은 북궁아가 당했을 거라 여기며 곧바로 주먹을 날렸었다. 하지만 북궁아는 이미 그에게서 떨어져 있던 상태. 그의 공격은 닿지 않았다. 그렇게 완전히 무방비가 된 취하람에게 일격을 넣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꾹!

도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킨 북궁아의 시선이 혈랑파로 향했다. 그때 주변에서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화재를 진압하던 혈랑파의 무사들이었다. 불이 완전히 꺼지자 들려온 소음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북궁아는 그대로 몸을 날려 그 자리를 피했다. 이미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이지만 적들의 앞에서 휴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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