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혈귀 (2)
‘이제 고작 남은 시간은 이각이다. 이각만 있으면 혈마신이 부활한다!’
세세호는 하늘을 올려보다 점점 다가오는 시간에 미소를 지었다.
세세호는 고개를 내렸다. 그의 앞에는 하나의 커다란 욕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욕조에서는 기이하게도 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곳이 아니라 사방 곳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백 명의 여인들로 만들어진 욕조였던 것이다.
여인들은 모두 발가벗겨진 채 살해당했는지 옷을 입고 있는 시체는 단 한 구도 없었다.
그리고 시체의 공통점은 또 있었다. 왼쪽 가슴에 손가락 하나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 그곳에서 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릇은 준비되었느냐?”
“예!”
세세호가 뒤를 돌아보며 묻자 무사 두 명이 고개를 숙였다.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그릇을 욕조에 넣어라. 크크큭.”
“존명!”
우렁찬 대답과 함께 두 명의 사내가 몸을 돌렸다. 그런 그들의 앞에 하나의 인형이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다. 시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상처가 하나도 없다는 것과 건장한 남자라는 것이었다. 바로 정옥진이었다.
사내들은 정옥진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세세호를 지나 시체로 만들어진 욕조로 다가갔다. 그 둘은 정옥진의 몸을 들어 올리다 다시 내리며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욕조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넣어야 합니까?”
“그냥 집어 던져. 어차피 그 몸은 그릇에 지나지 않아.”
“존명!”
철퍽!
무사들은 그대로 힘을 주어 정옥진을 욕조 안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자 그의 몸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액체가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세세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벽에 매달려 있던 안선영은 이미 예전에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무림에 적을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녀는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맨몸으로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지르는 여인들의 모습은 지옥도와 같았다. 거기에 여인들을 강제로 끌고 와 심장에 검을 꽂아 넣는 모습은 정신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세세호는 몸을 늘어트리고 있는 안선영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고는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다섯 명의 노파를 바라보았다. 모두 검은 장포를 두르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들은 기이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주문을 외워라!”
세세호의 명이 떨어지자 노파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그녀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귀곡성같이 들리기도 했고 곡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또 어떻게 들으면 불경을 읽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세세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세세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달이… 사라진다!’
세세호의 시야에 조금씩 어둠에 물들어 가는 보름달이 들어왔다.
‘이, 이럴 수가!’
제단에 도착한 진철은 저절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제단 주위에는 수십 명의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 주위에는 약 백 명의 여인들이 발가벗은 채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들이 바로 사기의 정체였다.
‘윽! 이건 무슨 냄새?’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빼던 진철은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냄새에 얼굴을 구겼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요 근래 많이 맡아 본 냄새였다.
‘피 냄새!’
진철의 고개가 추켜 올라갔다. 그런 그의 시야에 붉게 물든 제단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중간쯤에 괴이한 모습의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눈에 내공을 집중해 안력을 키우던 진철의 눈이 순간 부릅떠졌다.
‘서, 설마!’
진철의 시야에 그 정체가 드러났다. 바로 사람의 시체로 만들어진 언덕이었다.
그때 그 근처로 두 명의 사내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양손으로 쥐고 있던 무언가를 언덕 위로 집어 던졌다. 그 순간 붉은 액체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언덕이 아니야!’
진철은 양피지에서 봤던 한 문장을 떠올렸다.
<처녀성을 간직한 백 명의 여인에서 나온 피로 목욕을 하고, 백 명의 피에서 정수를 뽑아 섭취하고, 백 명의 처녀와 정을 나눠 정기를 흡수한다.>
‘큭!’
순간 진철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쩌릿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언제 있었냐는 듯 곧바로 사라졌다. 대신에 엄청난 슬픔과 원망이 몰려들었다. 이미 죽어 버린 백 명의 여인들이 마치 한목소리로 저주를 거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진철은 다시 눈에 내공을 집중했다. 그런 그의 시야에 욕조 옆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장년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를 살피던 진철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세세호!’
그의 옷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걸 본 순간 직감했다. 하지만 그가 세세호가 맞을 것이다. 그가 입은 옷이 일단 화려했고, 그들 딴에는 귀중한 의식이기에 아무나 저 자리에 설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높은 사람들 중에 외팔이가 흔하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뭘 보는 거지?’
진철은 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세세호의 모습에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들었다.
“헉!”
진철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뱉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달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발 늦지 않기를!’
진철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으며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 들었다. 한정이 그려 준 안선영의 화상(?像)이었다.
‘어? 가만!’
무릎을 굽혀 땅을 박차려던 진철은 뭔가 떠올랐는지 다시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런 진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게 제단을 바라보던 진철의 눈이 다시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고는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세세호의 뒤에 묶여 있는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것이다.
“사로 아로홈!”
노파들의 입에서 사람의 언어라 할 수 없는 괴기한 음성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세세호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세세호의 동공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드디어 달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이다.
“홈바니 수하라샤!”
달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노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제단을 울리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그때 무언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아주 작았다. 하지만 세세호의 귀를 피해 가진 못했다. 실제로 욕조 안의 핏물은 용광로에서 끓어오르는 쇳물처럼 거품을 내뿜으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혈마신이 부활한다!’
세세호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이때를 위해 몇 년을 기다렸던가? 몇 년을 준비해 왔던가? 몇 년을 참아 왔던가!
쿠르릉!
하늘도 혈마신의 부활을 알리는지 어느새 모여든 먹구름에서 용오름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제! 이제 무림이 내 품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세세호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하나 남은 손을 강하게 쥐었다. 그의 손은 흥분으로 인해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사실 세세호는 혈마신을 완전하게 부활시킬 생각이 없었다. 혈마신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혈궁이란 단체는 그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무림을 차지하기 위한!
“오너라! 혈마신이여! 무림을 나에게 선사해 다오!”
“놀고 있네!”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외친 세세호의 옆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세세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그것을 피해 냈다.
세세호를 지나쳐 간 강력한 경기가 제단의 한구석에 박히며 폭발을 일으켰다.
“자네가 신룡인가?”
세세호는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세세호의 앞에 하나의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횃불을 등지며 나타난 진철은 세세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하신검을 강하게 쥐었다.
“그래! 네놈을 벌하기 위해 하늘에서 강림하셨도다!”
“큭, 크크큭, 크하하하하!”
진철의 말에 세세호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
그의 행동에 진철은 의문을 가졌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등장하면 수많은 무사들과 함께 달려들 줄 알았다.
물론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세호의 바로 뒤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안선영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구해 내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몸을 드러내야 했다.
“미친 짓을 벌이더니 진짜로 미쳤군. 아니, 본래 미쳤으니 이런 일을 벌이는 거겠지?”
“크크큭.”
진철의 말에 자극을 받은 건지 세세호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세세호는 진철에게서 고개를 돌려 제단 밑을 바라보았다.
“보이는가? 저 수많은 벌레들이.”
“뭐?”
“저 벌레들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세세호가 손을 뻗어 가리키자 진철이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절망에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녀들이 내뱉는 소리에는 엄청난 사기가 깃들어 있었다.
“대체 저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진철은 무공도 익히지 않은 여인들이 저러한 사기를 내뿜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공도 익히지 않았으면서 저러한 사기를 내뿜을 수 있는 존재는 말 그대로 귀신 외에는 없었다.
“자네 눈에는 저들이 사람으로 보이는가?”
“그럼 사람이 아니면… 흡!”
여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던 진철이 숨을 들이켜며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자신의 두 눈을 파내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쑤셔 넣어 자해하는 여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양반이었다. 어떤 여인은 자신의 손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저들은 이미 반시체라네.”
“뭐?”
“흔히들 말하는 꼼수를 좀 부렸지. 혈마신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거라서 말이야.”
진철의 반문에 세세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진철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당신… 죽여 버리겠어!”
진철의 말에 세세호는 실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안선영을 바라보았다.
“걱정 말게나. 저 아이에게는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세세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진철을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네. 자네는 중원을 고금 최초로 일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나?”
“뭐?”
“말 그대로 어떻게 하겠냐는 말일세. 이런 말이 있지.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법이라고. 그래서 난 꿈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네. 어떤가? 자네가 볼 때 난 아름다운가?”
“…….”
진철은 세세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날 마인이라고 하는 걸까? 난 단지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뿐인데 말이야.”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며 꾸는 꿈은 망상일 뿐이다!”
“망상?”
진철의 반박에 세세호가 다시 실소를 지었다.
“다른 이들을 희생시킨다라……. 그럼 그 기준은 대체 뭘까? 내가 다른 이들을 위해 이 꿈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저들은 날 희생해 살아남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들의 삶은 거짓이고 망상이 되는 걸까?”
진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세세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난 망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사람은 각자를 위해서 살아가니까. 나 역시 나를 위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내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얻었고 능력 역시 된다. 그렇다면 그건 망상이 아니지 않겠는가?”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일단 맞아라! 미친놈은 매가 약이지!”
진철이 강하게 발을 굴렀다. 그런 그의 신형이 세세호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팟!
순식간에 세세호의 지척으로 다가간 진철의 검이 공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하지만 세세호는 사뿐하게 뒤로 한 발 물러나며 그 공격을 피해 냈다.
“어림없다!”
그 순간 진철의 검이 방향을 바꿔 세세호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세세호는 그것마저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빠르게 손을 들어 올렸다.
파팟!
반짝이는 빛과 함께 진철과 세세호의 신형이 서로 떨어졌다.
“허, 거기서 초식이 바뀔 줄이야. 역시 신룡이라 불릴 만하군. 하지만 아직 부족해.”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맞아라!”
진철이 다시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의 검이 자색의 선을 허공에 그려 넣었다. 검기를 날려 보낸 것이다.
그 순간 세세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흡!”
진철은 순간 느껴지는 오싹한 기분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진철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훑고 지나갔다. 날아오는 검기를 피하며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이동한 세세호가 손을 휘두른 것이다.
“호!”
세세호는 진철의 반응에 놀랍다는 듯 입술을 모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 잡았다.
“이것도 피할 수 있을까?”
“큭!”
츄악!
진철의 위로 지나간 세세호의 팔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진철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왔다. 진철은 그것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다리에 힘을 주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진철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균형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상태에서 급히 몸을 빼냈기 때문이다.
“과연… 놀랍군.”
“이 자식!”
진철은 이제 세세호를 당신이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그를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 짓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그가 벌인 일들을 보면 사람이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사람의 탈을 쓴 악마였다.
“그런데 검을 뽑지 않는군. 이유가 뭔가?”
“검으로 패는 게 취미거든!”
“특이한 취미를 지니고 있군.”
“네놈보다는 나아!”
진철이 이를 악물며 다시 바닥을 박찼다. 세세호는 그 모습에 코웃음을 내뱉으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본래 있던 장소에서 삼 장이나 멀어졌다.
“그런데 정말로 검을 뽑지 않아도 괜찮을까?”
“물론!”
“이 녀석들에게도?”
세세호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뭔가를 찾는 듯 잠깐 뒤적거린 그는 천천히 손을 빼내었다. 그런 그의 손에 붉은 빛이 감도는 수정이 잡혀 나왔다.
그것을 바라본 진철의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하, 하하. 설마.”
진철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런 진철의 모습에 세세호의 입가에 자리 잡고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자네도 아는 모양이군. 흡!”
세세호가 짧은 기합과 함께 붉은 수정에 내공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수정이 더욱 붉은 빛을 토해 내며 주변을 밝게 물들였다.
“크헤엑!”
“캐액!”
“크롸아!”
괴기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몸을 날려 오는 존재들.
그것을 바라보던 진철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혹시나 했던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세호는 진철을 바라보며 붉은 수정, 혈정을 들어 올렸다.
“자네에게 정식으로 소개하겠네. 혈마신의 수호 호위가 될 혈귀라고 한다네.”
혈귀들은 세세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가슴을 크게 펼치며 포효했다.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혈귀들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엄청났다.
“이들은 독고요처럼 실패작이 아닌 완성품이라네. 자네가 노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을 거야. 아니면 부족한가?”
“…충분히 차고도 넘치는군.”
“크크큭!”
진철의 말에 웃음을 흘린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가 쥐고 있던 혈정이 다시 강하게 빛을 뿜어냈다.
“가자꾸나, 아가들아.”
“크헤헤엑!
세세호의 말에 응답하는 것처럼 가장 앞서 있던 혈귀가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듯 나머지 두 마리의 혈귀 역시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런 그들의 앞에 진철이 자하신검을 꼭 쥐고 입술을 강하게 물고 있었다.
“후우!”
진철은 다가오는 혈귀들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긴장했던 온몸의 근육이 풀어지며 내공을 빨아들였다.
탓!
진철의 발이 강하게 바닥을 찼다. 혈귀들을 향해 마주 달려가던 진철의 검이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자색의 검기가 쏘아져 나갔다.
펑!
달려들던 혈귀가 날아오는 검기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몸으로 받았다. 혈귀를 강타한 검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럼에도 혈귀는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는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혀를 찬 진철은 검을 양손으로 잡고 내공을 주입시켰다. 그러자 자색의 강기가 검을 덮었다. 자하강기였다.
“크에엑!”
지척으로 다가온 혈귀가 진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뭔가 초식이 있는 것이 아닌 그냥 휘두르기였다. 하지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위력적이었다. 그 순간 진철이 발을 빠르게 놀렸다.
쉭!
진철이 상체를 비틀자 혈귀의 손이 가슴을 지나쳐 갔다. 진철은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허리를 숙였다. 그런 진철의 등 위로 또 하나의 혈귀가 허공을 훑으며 지나갔다.
‘지금!’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팔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런 그의 앞에 마지막으로 뒤따라오던 혈귀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쾅!
번뜩이는 빛과 함께 혈귀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진철이 밑에서 그어 올린 탓이다.
공중으로 뜬 혈귀는 강력한 위력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촤악!
바닥을 끌면서 다리를 멈춘 진철이 다시 다리를 굽혔다.
‘역시 위력적이고 빠르지만… 간단하다!’
팡!
진철의 다리가 펴지자 그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지나갔던 혈귀들도 다시 몸을 돌려 진철에게 달려들었다. 역시나 단지 빠르게 달려들 뿐이었다.
‘이번엔!’
진철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달려들던 혈귀를 향해 자하강기가 뻗어 나갔다.
꽝!
혈귀의 얼굴에 자색의 강기가 틀어박히자 옆으로 빨려 나가듯 떨어져 나갔다.
진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릎을 굽혔다. 그런 진철의 앞에 다른 혈귀가 양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대로 내려찍으려는 것일 것이다.
“흡!”
진철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그의 검이 갑자기 빨라지며 혈귀의 가슴을 갈랐다. 혈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로 떨어져 나갔다.
쿵!
떨어져 나간 혈귀가 뒤따라오던 혈귀에 부딪쳤다. 그 둘은 서로 엉키며 바닥을 굴렀다. 진철은 그대로 몸을 띄우며 검을 강하게 내리그었다.
콰앙!
순간 제단이 뒤흔들리며 진동을 일으킨 착각을 일으켰다. 자하강기가 내리꽂힌 곳은 움푹 파여 먼지를 피워 냈다.
바닥에 착지한 진철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처박힌 혈귀들에게서는 더 이상의 움직임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진철은 몸을 돌려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진철이 검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이젠 네놈 차례다. 각오는 됐나?”
“훗, 과연… 그냥은 상대할 수가 없는 건가?”
세세호는 실소를 지으며 혈정을 강하게 쥐었다. 그러자 강한 빛이 흘러나왔다.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이 들 정도로 사악한 기운을 지닌 빛이었다. 진철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드드드!
그때 바닥이 진동을 일으켰다. 진철은 섬뜩한 느낌에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일어섰는지 세 마리의 혈귀가 진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쳇! 쉽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진철은 혀를 차며 다시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내공을 일으켰다. 그의 검에 자색의 강기가 둘러졌다.
진철은 자세를 잡으며 혈귀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흐아아…….”
혈귀들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런 혈귀들의 몸에서 붉은 안개 같은 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거 설마…….”
진철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붉은 안개에 휩싸였던 독고요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붉은 안개가 혈귀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자! 다시 시작해 보게나.”
세세호가 입을 열자 혈귀들이 일제히 포효를 내뱉었다. 혈귀들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진철은 검을 다시 제대로 잡으며 무릎을 굽혔다. 그 순간 혈귀들의 눈이 길게 늘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철이 무릎을 폈다.
팟!
불꽃이 튀겼다. 진철의 검과 혈귀의 주먹이 부딪친 결과였다.
진철은 밀려들어 오는 충격을 느끼며 주먹을 살짝 폈다. 검병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갈 듯 혈귀의 주먹을 따라갔다. 한 치 정도 검병이 손을 벗어나자 그 순간 검병을 쥐었다. 그러고는 혈귀를 지나쳤다. 충격을 흘린 것이다.
‘역시 강해!’
조금 전 격돌과는 다르게 너무나 강해진 혈귀의 모습에 진철은 마른침을 삼키며 발을 놀렸다. 독고요와의 싸움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절대 다리를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혈귀들의 공격은 빠르고 강했다. 하지만 너무 직선적이라 보법만 잘 사용한다면 별다른 피해 없이 그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저 붉은 안개를 뚫어야 한다는 거지!’
속으로 외친 진철은 다급하게 바닥을 강하게 찼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크헤엑!”
진철을 사이에 두고 달려들던 혈귀들은 그가 허공으로 떠오르자 똑같이 바닥을 차올랐다. 그 순간 진철의 신형이 다시 빠르게 내려왔다. 혈귀들이 따라 떠오르자 천근추를 시전한 것이다.
쿵!
진철이 디딘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진철은 곧바로 고개를 치켜 올리며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받아라!”
촤악!
진철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반달형의 강기가 혈귀들을 향해 뻗어 갔다.
쾅!
허공에서 강기가 터져 나가며 혈귀들의 몸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붉은 안개가 모여들어 혈귀들의 몸을 보호하는 바람에 어떠한 상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철 역시 그걸 예측하고 있었는지 연달아 강기를 날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쿵!
혈귀들이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연달아 맞은 강기에 충격을 받았는지 혈귀들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 어떤 상처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개화를 펼쳐 저 안개를 없애기엔 너무 반탄력이 강해. 하지만…….’
진철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혈귀들을 바라보다 혀로 입술을 축였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견디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혈귀들을 처리하고 세세호를 상대할 때까지 체력이 버텨 줄지가 의문이었다.
‘역시 속전속결로 끝낼 수밖에 없겠어.’
생각을 정리한 진철은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마치 춤을 추듯 덩실거리는 그의 움직임은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런 진철의 검이 옅은 자색을 띠기 시작했다. 자하강기와는 다른 기운이었다.
휙!
자색의 빛이 허공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그림은 곧 한 송이의 꽃이 되었다.
‘개화!’
진철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순간 완전히 몸을 일으킨 혈귀들은 진철에게 당한 것이 화가 나는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는 진철에게 쏘아져 갔다.
슈아악!
혈귀들의 손에 붉은 기운이 맺혔다. 진철은 혈귀들이 근처까지 다가오길 기다렸다. 개화는 공격 초식이 아닌 반격 초식이기 때문이다.
“크아앙!”
가장 앞서 다가온 혈귀가 입을 벌려 포효를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그 앞에 있던 진철의 눈이 반짝였다. 위로 올라가 있던 진철의 검이 꽃봉오리를 내려쳤다.
화악!
순간 진철의 앞에 그려진 자색의 꽃봉오리가 피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혈귀들의 주먹이 꽃봉오리와 부딪쳤다.
번쩍!
강한 빛이 주변을 물들였다. 진철은 검을 타고 들어오는 엄청난 반발력에 이를 악물었다.
‘이 무식한 것들! 하지만 또 당할까 보냐!’
반탄력이 진철의 팔을 타고 올라와 그의 어깨에 도달했다. 그때 진철이 바닥을 차며 허공에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반탄력이 그의 온몸을 삼켜 버렸다.
후왕!
허공에 떠오른 진철의 몸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갔다. 진철은 이를 악물며 몸을 뒤집어 공중제비를 돌았다.
팡!
몸이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진철이 팔을 내뻗었다. 그의 손에서 경기가 뻗어 나가며 바닥을 때렸다. 그러자 진철의 몸이 다시 허공에 떠올랐다.
그렇게 몇 장을 물러난 후 그는 천근추를 시전했다.
쿵!
‘큭!’
반탄력을 흘려보냈음에도 아직 여파가 남아 있는지 진철은 이를 악물며 견뎠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잠시 후 반탄력이 완전히 사라지자 진철은 고개를 들어 혈귀들을 바라보았다.
개화가 펼쳐진 곳은 일 장 너비의 웅덩이가 파여 있었고 혈귀들은 제각각 떨어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진철처럼 몸을 띄워 충격을 흘리기는커녕 오히려 개화를 향해 달려들던 상태였기에 그들이 받은 충격은 보통의 두 배 이상이었다. 그 여파 때문인지 혈귀들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 안개가 상당히 옅어져 있었다.
진철은 내공을 끌어 올려 검에 강기를 둘렀다. 붉은 안개가 많이 약해졌을 뿐이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가까운 곳에 쓰러져 있던 혈귀의 손가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꿈틀거림은 곧 커다란 움직임으로 변했고 그 혈귀의 상체가 천천히 들렸다.
“크르르…….”
혈귀가 완전히 일어나며 이를 드러냈다. 그런 혈귀의 입가에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머지 두 마리의 혈귀 역시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그럼 그렇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상하게 독고요보다는 그들이 약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독고요가 그들의 공격 속도와 반응 속도를 훨씬 상회했다. 같은 혈귀인데도 말이다.
‘뭐, 약하면 나야 좋은 거지.’
독고요를 떠올리던 진철은 혈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좀 약해졌겠지?”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혈귀들이 더욱 흉흉한 기운을 뿌리기 시작했다.
‘괜히 말했나?’
진철은 검을 고쳐 쥐고는 상체를 숙이며 다리를 굽혔다.
“크아앙!”
가장 앞에 있던 혈귀가 포효를 내지르자 그 뒤에 있던 혈귀가 서로 다투며 진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굶주린 늑대가 양을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팡!
진철의 무릎이 펴지며 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런 진철의 검이 달려드는 혈귀들을 수십 조각으로 쪼개 버릴 듯 수많은 선을 그렸다.
쩡!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염소수염의 혈귀가 날아오는 진철의 강기를 후려쳤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수많은 강기가 쏟아졌다. 그러자 그의 몸이 들썩이며 속도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뿐, 상처 입은 야수처럼 더욱 기세를 피워 냈다.
그때 그의 어깨에 자색의 강기가 강타했다.
퍽!
그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강기가 그의 몸을 두들겼다.
그 모습을 본 진철이 검을 강하게 쥐었다. 그러자 그의 검에서 더욱 짙은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 힘을 모은 것이다.
슈학!
허공으로 떠오른 염소수염을 향해 바닥을 박차려던 진철이 바람을 가르는 강렬한 소리에 급히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하나의 붉은 선이 나타났다.
혈귀의 붉은 눈을 바라본 진철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갑작스레 나타났기 때문이다.
화악!
그때 뭔가가 진철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진철은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며 검을 치켜들었다.
쾅!
“큭!”
진철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지나간 혈귀에게 정신을 빼앗긴 사이 뒤에 있던 또 다른 혈귀가 달려든 것이다.
진철은 팔을 통해 전해져 오는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염소수염의 혈귀가 분노한 얼굴로 또다시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진철은 자세를 제대로 잡기도 전에 그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쾅!
또다시 붉은 기운이 검을 때리자 진철의 몸이 들썩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주먹이 붉은 섬광이 되어 진철에게 떨어졌다.
‘모, 몸이 으스러질 것 같아!’
진철은 계속 뒤로 밀려났다. 그런 그의 발이 엉키기 시작했다. 너무나 강력한 혈귀의 공격에 팔조차 저려 왔다. 이러다간 언제 방어가 뚫려 공격을 허용할지 몰랐다.
‘제길!’
진철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천근추를 시전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와 함께 진철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뒤로 물러나며 흩어 버리던 충격을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받았기 때문이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고통을 참으며 공격을 받아 내던 진철의 눈이 순간 빛났다.
훅!
진철의 머리 위로 붉은 주먹이 스치고 지나갔다. 진철이 갑작스레 무릎과 허리를 굽혀 몸을 숙인 것이다. 그러자 혈귀의 오른쪽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진철은 망설임 없이 그곳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주먹을 거둬들이던 혈귀의 몸이 들썩였다. 혈귀의 몸이 충격으로 비틀거리자 진철이 굽혔던 무릎을 펴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쿵!
진철의 어깨가 혈귀의 가슴을 때렸다. 그런 혈귀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진철은 그것을 바라보며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손에 들린 자하신검 역시 진철을 따라 회전하며 혈귀의 가슴에 다시 박혀 들었다.
꽝!
팔을 끌어당기듯 강하게 휘두른 검이 혈귀의 가슴에서 폭발을 일으키자 혈귀의 몸이 뒤로 빠르게 나가떨어졌다.
‘기회다!’
진철의 다리가 바닥을 구르며 순식간에 혈귀의 앞으로 이동했다. 그런 진철의 검이 강하게 빛을 뿜었다.
슈학!
그 순간 옆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진철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진철의 눈동자에 붉은 섬광이 박혀 들었다.
퍽!
‘대단하군!’
세세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것처럼 단순한 공격만 하는 혈귀였다. 하지만 그들의 빠른 몸놀림과 위력은 그러한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런 세세호의 눈에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혈귀의 공격을 막는 진철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순간 세세호의 눈이 빛났다. 진철이 몸을 숙여 혈귀의 공격을 흘려보내고는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혈귀의 가슴을 강하게 친 진철이 충격을 받은 혈귀를 밀치며 다시 한 번 검을 내려쳤다. 그리고 진철이 바닥을 박찬 순간 세세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철의 옆으로 쇄도하는 붉은 그림자를 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진철에게 붉은 그림자가 꽂히는 순간 진철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텅! 터텅!
허공에 뜬 진철이 바닥에 몇 번 튕기며 굴러갔다. 그런 진철에게서는 더 이상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세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견디며 싸워 온 게 놀라울 정도였다.
세세호는 혈정을 바라보았다. 혈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처음과는 달리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만큼 혈귀들 역시 많은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뭐, 상관없나.’
세세호는 혈귀가 이렇게까지 손상을 입을 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걱정을 하진 않았다. 혈귀의 능력은 더욱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렇게 되면 혈정이 깨질 위험이 있어 혈귀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자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혈마신이 부활하기 전까지 말이다.
‘혈마신이 완전하게 부활하게 된다면…….’
세세호의 시선이 시체로 만들어진 욕조로 향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혈귀는 말 그대로 혈마신의 호위에 불과했다. 그것도 혈마신이 완전해지기까지의…….
혈마신이 완전히 부활하게 된다면 더 이상 혈귀는 쓸모없게 된다. 그때가 되면 적들의 앞에서 혈귀는 모든 능력을 개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지… 응?’
다시 혈귀들에게 시선을 돌린 세세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방금 진철의 몸이 꿈틀거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세세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진철의 몸이 꿈틀거리니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설마 살아 있단 말인가!’
“크으…….”
몸을 일으키는 진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왼쪽 어깨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혈귀가 그를 덮치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고 붉은 섬광이 그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아… 더럽게 아프네…….”
중얼거리듯 투덜거린 진철은 피가 흘러내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만큼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컸기 때문이다.
진철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에 정렬하듯 서 있는 혈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다시 일어난 진철의 모습에 이를 드러내며 적대감을 토해 냈다.
진철은 그런 혈귀들의 모습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신이 번쩍 드는구먼.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진철은 한 손으로 검을 들어 올려 혈귀들을 가리켰다.
“자, 아직 끝은 나지 않았어. 다시 시작해야지? 내가 피눈물을 머금으며 너희를 구원해 주마.”
“크르르!”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야.”
팟!
말을 끝낸 진철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혈귀들은 그 모습에 당황한 듯 황급히 진철을 찾았다.
퍽!
그때 가장 우측에 서 있던 혈귀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혈귀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자신의 가슴을 찌른 존재를 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등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혈귀는 그대로 고꾸라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자신들의 동료가 당했기 때문일까? 혈귀들이 재빨리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는 진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진철의 다리가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독문 보법인 구궁보였다.
‘천리향(千里香) 진보(震步).’
속으로 중얼거린 진철의 신형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퍼퍽!
달려들던 혈귀들의 몸에서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들의 팔이 기이하게 꺾여 버리며 피가 허공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혈귀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진철을 쫓아 몸을 돌렸다.
혈귀들을 지나쳐 멀어진 진철이 허공에서 몸을 돌리며 검을 그었다. 그러자 자색의 강기가 반달처럼 혈귀들을 향해 쏘아졌다. 혈귀들은 하나 남은 팔을 들어 강기를 향해 뻗었다.
쾅!
강기가 혈귀들과 부딪치자 강력한 경기가 주변으로 흩어지며 먼지를 피워 냈다. 그 순간 하나의 그림자가 허공을 갈랐다.
퍽!
먼지를 뚫고 혈귀의 신형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런 혈귀의 가슴에 진철의 검이 꽂혀 있었다.
우웅!
진철의 검이 진동을 일으키며 밝은 빛을 토해 냈다. 그 순간 혈귀의 가슴에서 뭔가가 터져 나가며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버렸다. 검을 꽂은 상태에서 검에 둘린 강기를 터뜨려 버린 것이다.
넓어진 구멍에서 핏줄기와 함께 진철의 검이 떨어져 나왔다.
진철은 검이 완전히 혈귀의 가슴에서 빠져나오자 발을 들어 혈귀의 몸을 강하게 밀어 찼다. 그 덕에 바닥에 떨어진 혈귀가 바닥을 구르다 멈췄다. 그런 혈귀의 몸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몸을 감싸던 붉은 안개 역시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자, 계속해야지?”
진철이 몸을 돌려 마지막 남은 혈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진철의 기세를 느낀 것인지,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혈귀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 혈귀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진철은 상처를 입어 축 늘어진 어깨를 뒤로 빼며 한 발 앞으로 나서고는 혈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렇게 잠깐 서로를 바라보던 진철과 혈귀가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후웅!
제단을 비추고 있던 횃불들이 일제히 꺼질 듯 흔들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잠해지며 죽어 가던 불씨가 맹렬히 타올랐다. 그런 횃불들 사이에 진철과 혈귀가 서로 몸을 맞대고 있었다.
“크르르…….”
혈귀의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진철의 얼굴이 그런 혈귀의 얼굴과 한 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눈을 맞추고 있었다.
“이젠 그만 눈을 감도록 해.”
진철이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퍽!
<혈귀들은 나를 비롯해 모두 혈궁에서 버림받은 자들이라오. 무의미한 살생에 회의를 느끼는 자들이기에 혈귀가 된 그들의 영혼은 상당히 상처를 입고 있을 거라오. 그들을 구원해 주는 길은 단 하나. 그들의 숨을 끊어 주는 것. 당신이 이 양피지를 보고 있다면 내가 죽었거나 이미 혈귀가 되어 있다는 뜻. 나와 그들을 구원해 주시오.>
독고요가 준 양피지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빠르게 고통 없이 혈귀들의 숨을 끊어 주고 싶었지만 그들의 몸을 감싼 붉은 안개로 인해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격전을 벌인 것이다.
진철은 쓰러지는 혈귀의 몸을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바닥에 누운 혈귀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평온해 보였다.
꾹!
검을 강하게 쥔 진철은 몸을 일으켜 세세호를 바라보았다. 그런 진철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대단하군. 혈귀를 처리하다니. 과연 독고요를 죽였다는 것이 요행은 아니었나 보구나.”
세세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놀랍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게 혈기를 없애다니… 도가 계열의 무공을 익혔나 보군.”
“…….”
“어느 문파 소속이지? 곤륜? 무당? 공동? 그것도 아니면 종남?”
세세호의 물음에 진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그럼 어디지? 그만한 수준의 무공을 익힐 문파가 또 있던가?”
세세호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진철은 살짝 얼굴을 구겼다. 왼쪽 어깨에서 고통이 느껴진 탓이다. 그런 진철이 입을 열었다.
“화산.”
“화산?”
되묻는 세세호의 말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세호는 진철의 말을 곱씹었다.
“화산… 화산이라……. 화산이란 문파가 있던가?”
세세호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떠오르는 문파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 순간 세세호의 눈의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 멸문당했다던 그 화산파?”
“어느 문파인지가 무슨 상관이야? 중요한 건 내가 도사고 넌 사람의 탈을 쓴 마귀라는 거지.”
진철이 중얼거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왼손은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세세호는 그런 진철을 바라보며 놀랍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귀라니? 너무한 거 아닌가? 그나저나 정말 의외야. 멸문한 줄 알았던 화산파라니… 정말 놀라워.”
“더 놀라운 걸 보여 줄 테니까 시작하자고.”
진철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에 세세호가 실소를 지었다.
“애송이가…….”
“덤벼, 늙다리. 넌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좋아, 시작하자고.”
세세호가 어깨를 털자 그가 걸치고 있던 장포가 펄럭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세세호의 허리춤에 하나의 검이 메여져 있었다.
세세호는 하나 남은 손으로 검병을 움켜쥐고는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주문을 외우고 있는 노파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멈추지 말고 계속하도록.”
노파들은 세세호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계속 주문을 외워 갔다. 하지만 애초에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기에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런 세세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천하제일이라 불리던 화산파의 검법이라. 잔뜩 견식해 주마, 애송이.”
“시끄러, 늙다리.”
진철은 세세호의 말을 받아치며 곧바로 그를 향해 파고들었다.
따다당!
진철의 검과 세세호의 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불꽃이 튀겼다. 세세호의 검은 과연 사도의 무공같이 사이하고 괴이한 기운을 뿌렸다. 그의 검에 맺힌 사기가 진철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반발력을 일으켰다. 서로 상극의 성질이 부딪친 결과였다.
“사실 네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
“아까 말했거든?”
여유롭게 입을 여는 세세호의 모습에 진철이 얼굴을 구겼다. 그와 달리 자신은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력도 상당히 많이 고갈된 상태였다. 거기에 혈귀에게 당했던 상처가 계속 신경 쓰였다. 마치 마비가 된 듯 감각이 없었던 것이다.
“저 안선영이란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서라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진철이 말끝에 힘을 주어 외치며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세세호는 그 움직임 역시 여유롭게 피해 냈다. 순식간에 삼 장이나 떨어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불쌍한 아이로군. 아마 오미 중 자화 안선영의 가문은 섬서의 안무가랬던가?”
“……?”
계속되는 세세호의 말에 진철이 살짝 얼굴을 구겼다. 계속 입을 여는 의도를 몰랐기 때문이다.
“안무가는 이미 멸문했다.”
“뭐?”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세세호는 진철의 반문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안무가는 이미 멸문했단 말이다. 그것도 시간이 꽤 흘렀어. 그러므로 안무가의 혈족은 안선영 혼자다. 참으로 불쌍한 계집이지.”
세세호의 시선이 살짝 안선영을 훑었다. 진철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네놈의 짓이냐?”
“아니, 그건 아니지. 혹시 마궁이란 곳을 아는가?”
“마… 궁!”
진철의 얼굴에 놀람이 피어났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원인은 마궁 때문이었다. 그들이 마혈도를 호가장에 보내지 않고 마령환을 뺏으려고만 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표정을 보니 아는가 보군. 그들이 한 것이다.”
“그걸 네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아냐고?”
세세호는 실소를 지었다.
“난 혈궁의 장로다. 내가 알고자 한다면 대부분의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지.”
“그럼 마궁이 있는 장소 역시 알고 있나?”
“왜? 알고 싶나?”
“물론!”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세세호가 땅을 박차며 진철에게 날아들었다.
“그렇다면 날 쓰러뜨려 보거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거든!”
진철 역시 세세호를 향해 달려갔다.
휘릭!
세세호의 검에서 검은 기류가 회오리치며 팔목까지 휘감아 올라갔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진철을 향해 검을 뻗었다. 강력한 경풍이 그의 검을 타고 진철에게 쏘아졌다.
순간 진철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자색의 검기가 회오리치며 다가오는 경풍과 충돌하자 돌풍이 일어나며 그 기운이 주변으로 흩어졌다.
파락!
진철의 옷자락이 거칠게 펄럭거렸다. 하지만 진철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상하좌우로 마구 그었다. 수많은 검기들이 거미줄처럼 엉키며 세세호를 향해 날아갔다.
“흥!”
그 모습에 코웃음을 친 세세호의 검이 허공에 원을 그렸다. 그런 세세호의 입이 달싹였다.
쾅!
검기로 만들어진 그물이 세세호의 검과 충돌한 순간 폭발해 버렸다. 그와 함께 먼지가 피어올라 세세호의 신형을 가렸다. 하지만 곧 세세호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먼지 속에서 걸어 나오자 진철이 미간을 구겼다.
“이런 잔재주로는 나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한번 보여 봐라. 혈귀를 죽인 네 검법의 위력을!”
진철에게 외친 세세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런 세세호의 검이 다시 검은 기류로 휩싸였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간에!’
진철은 이를 악물며 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자하신검이 진동을 일으키며 빛을 뿜어냈다. 그는 그렇게 검에 자하강기를 두르고 세세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압!”
진철이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자색의 빛이 허공을 그으며 경풍을 일으켰다.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세세호가 그런 간단한 칼질에 당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신형이 살짝 비틀어지며 진철의 검이 애꿎은 허공만 베었다. 그와 동시에 세세호의 검이 진철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획!
순간 진철의 신형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리고 지척으로 다가온 세세호의 검을 진철의 검이 강하게 내려쳤다.
깡!
세세호의 검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 바람에 세세호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그 틈을 타 진철의 검이 다섯 개로 나뉘어 세세호를 향해 쏘아졌다. 그 순간 세세호의 눈이 빛을 뿜었다. 그것을 본 진철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거두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핏!
무언가 진철이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어느새 몸을 돌린 세세호는 진철이 행동에 실소를 지었다.
“완벽하게 잡은 기회를 놓치다니. 어리석군.”
“장난하냐?”
진철이 다시 세세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진철의 검이 세 가닥으로 나뉘며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허공을 찔러 갔다.
세세호는 뒤로 물러나며 진철의 검을 일일이 쳐 냈다. 하지만 쳐 낸 검이 다시 회전을 일으키며 빠르게 다가왔다.
세세호는 침착하게 찔러 들어오는 검을 막아 갔다.
‘빌어먹을, 더럽게 안 맞네! 그럼 조금 힘을 실어서…….’
계속 쓸모없이 내공을 소모하자 진철은 마음이 다급해져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왼쪽 어깨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역시 어리군!’
진철이 검에 힘을 싣는 순간 연속적으로 찌르고 들어오던 공격의 간격이 약간 넓어졌다. 하지만 세세호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스팡!
‘이런!’
강하게 휘두른 검이 세세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철은 그 모습에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며 다급하게 검을 거뒀다. 하지만 이미 세세호의 검은 진철의 허리를 노리며 갈라 오는 중이었다.
“흐합!”
진철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진철의 검이 갑자기 빨라지며 세세호의 검을 막아섰다.
쾅!
세세호의 기운과 진철의 기운이 부딪치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그 충격으로 진철과 세세호의 몸이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타탓!
뒷걸음질 치며 뒤로 물러선 진철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세세호를 노려보았다.
세세호는 그런 진철의 모습에 입을 모았다. 설마 그 자세에서 자신의 검을 막을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하지만!”
세세호가 내공을 일으키자 그의 검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류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런 무공으로 날 상대하기엔 십 년이 이르다!”
그렇게 외치며 세세호의 신형이 돌진해 오자 진철이 빠르게 검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허공을 수십 번 긋자 거미줄처럼 엮인 검기가 세세호를 향해 날아갔다.
“하압!”
세세호는 날아드는 검기 다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콰쾅!
검기 다발이 폭발을 일으키며 잘려 나갔다. 세세호가 잘라 버린 것이다. 세세호는 전혀 충격받지 않은 듯 그대로 몸을 날려 진철을 향했다.
“어서 빨리 보여 보란 말이다!”
외치는 세세호의 검이 순간 더욱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의 검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류는 어느새 검을 넘어 일 장의 높이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공기가 그 검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환상을 일으킬 정도였다.
진철은 갑작스레 커진 그의 기운에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일순간 진철의 검이 허공을 빠르게 그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마구잡이로 그은 것이 아니라 강하게 단 한 번만 그었다.
쾅!
진철의 검과 세세호의 검이 충돌하며 거대한 기의 폭발을 일으켰다.
진철은 상상을 뛰어넘는 충격에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그런 그의 몸이 경풍에 휩쓸려 뒤로 날아갔다. 하지만 세세호는 몸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충격을 이겨 내고 진철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런 그의 검에서 폭발적인 힘이 터져 나오며 그대로 진철을 강타했다.
쾅! 쿠당!
진철의 신형이 바닥을 구르며 튕겨 나갔다. 그런 진철이 꿈틀거리더니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긁힌 상처가 쓰려 오며 왼쪽 어깨에서는 다시 핏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
고개를 숙이며 일어난 진철의 동공이 살짝 풀려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지만 정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세세호 역시 그것을 눈치챘는지 빠르게 진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엔 세세호의 검에 걸린 검은 기류가 그의 팔목을 타고 올라가 어깨까지 덮었다. 대신에 검에는 검은 소용돌이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세세호의 검이 빠르게 진철의 머리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때 진철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진철의 눈동자에 세세호의 모습이 투영되듯 비쳐졌다.
‘꽃이 향기를 뿜으려면…….’
진철의 몸이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세세호의 움직임 역시 느려졌다. 세세호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다가 끝내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진철의 검 역시 느려졌다.
확!
진철의 앞에 천천히 하나의 꽃봉오리가 그려졌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순간 느려졌던 세세호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이건 뭐야!’
세세호는 적지 않게 놀라야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진철의 앞에 생겨난 한 송이의 꽃봉오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세호는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그대로 진철과 함께 베어 버릴 생각인 것이다.
훙!
세세호의 검이 진철의 꽃봉오리에 닿았다. 그러자 역시나 거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세세호의 검에 맺힌 검은 기류를 밀어내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몸을 삼켜 버렸다.
그때 진철의 검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꽃이 피어야 한다.’
화악!
세세호는 빛이 폭발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눈앞을 가리던 흰 빛이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을 강타하던 충격 역시 사라지기 시작한다.
세세호는 이 현상에 속으로 안도했다. 그의 몸을 엄습한 충격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과연 혈기로 만들어진 혈귀의 혈운(血雲)을 없앨 만한 위력이었다.
세세호는 자신의 몸을 압박하던 충격이 완전히 사라지자 공중제비를 돌기 위해 허리에 힘을 주었다.
자신이 공중제비를 돌고 바닥에 발을 디디는 순간 진철의 목숨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펼친 무공도 어떻게 펼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진철은 아직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때 세세호는 다신 경험할 수 없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
세세호는 순간 자신의 몸이 늘어진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세세호의 눈동자가 살짝 뒤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눈에 여인들의 시체가 보였다. 그 순간 세세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세세호는 자신을 당기는 알 수 없는 힘에 대항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몸은 시체로 만들어진 벽에 빠르게 박혀 들어갔다.
쾅!
시체들과 뒤엉킨 세세호의 신형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그의 옆에 몇 구의 시체가 함께 널브러졌다.
툭! 투툭!
그때 시벽(屍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동으로 시작된 그것은 크게 번져 나갔고 곧 시체들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긴 벽의 틈 사이로 검붉은 핏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
그때에 정신이 든 진철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그런 진철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이다. 어깨에 나 있는 상처는 바닥을 구른 탓에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가 더 벌어졌는지 꽤 많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철은 어깨의 혈을 짚어 지혈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그런 진철의 앞에 한쪽이 허물어져 널브러진 시체들이 들어왔다.
“큭!”
진철은 강렬한 혈향에 신음을 내뱉었다. 구역질이 저절로 치밀어 오르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마 혈마대원들의 시체를 보지 않았다면 시체들에게 별로 내성이 없는 그는 헛구역질을 했을 것이다.
꿈틀!
그때 시체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진철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핏물과 시체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진철은 어깨가 오싹해지는 기분에 몸을 떨었다.
‘설마 귀신은 아니겠지?’
도사라면서 귀신을 무서워하던 진철은 마른침을 삼켰다.
철벅!
완전히 몸을 일으킨 그것은 천천히 비틀거리면서 한 발 내밀었다. 그의 발밑에 흘러내리고 있는 핏물이 사방으로 튀겨 나갔다.
“으아아…….”
그것의 입이 열렸다. 진철은 얼굴을 구겼다. 피로 목욕을 한 듯 보이는 그는 허리까지 머리카락을 기른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딴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이유 모를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응?’
순간 진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점점 커지며 결국엔 그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진철의 눈에 바닥에 흘러내린 피가 천천히 사내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스스스.
피가 거꾸로 흘러 올라가는 모습은 참으로 괴기했다. 그 피는 사내의 발목을 타고 올라가 그의 허벅지를 감싸고 허리를 감쌌다. 그러고는 끝내 얼굴까지 감싸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핏물 사이에 드러난 사내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크으아아!”
콰웅!
순간 사내의 입에서 거대한 고함이 흘러나오며 그의 주위로 강력한 풍압이 터져 나왔다.
파팍!
진철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대기를 갈랐다. 바람을 가른 것이다. 그런 진철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돌풍을 일으킨 사내로 인해 주변에 있던 시체들이 사방팔방 흩날리며 날아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발밑에 있던 피들은 오히려 사내를 향해 달려가듯 흐르고 있었다.
“으아아아!”
사내가 양팔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단 밑에서 비명을 지르던 여인들의 몸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다. 허리를 뒤로 젖히며 입을 벌린 그녀들의 입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이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으아아!”
사내의 입에서 고함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저러다 숨이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진철은 또다시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공중으로 떠오른 여인들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제단을 향해 뻗어 오고 있었다.
제단에 도착한 피는 사내의 머리 위에서 멈추며 뭉치기 시작했다. 사내는 혈광을 번뜩이며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씩 뭉치기 시작한 핏덩이는 점점 부풀어 가더니 제단을 다 덮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인들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사람의 몸에 있는 피가 저렇게 많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잠시 후 모든 피가 빠져나갔는지 여인들의 몸이 미라처럼 쭈글쭈글해졌다.
툭! 투툭!
허공에 떠 있는 여인들의 몸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부스러기처럼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백 명의 여인들이 먼지로 변하며 바람에 날렸다.
사내는 그런 여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하늘에 뻗고 있었다.
번쩍!
순간 사내의 혈광이 빛을 토해 냈다. 그러자 허공에 고여 있던 핏물이 빛을 내뿜으며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중첩이 되듯 그 양을 줄여 가던 피는 끝내 주먹의 크기로 뭉쳐 들었다.
“아아아!”
사내의 입에서 괴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맞춰 작게 뭉쳐 버린 핏덩이가 천천히 내려와 사내의 입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쿵!
순간 사내를 중심으로 제단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또다시 강풍이 터져 나왔다. 진철은 이를 악물며 그 바람에 저항했다.
투확!
사내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빛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빛이 제단을 삼키고, 잠시 후 그 빛이 사라지자 주변은 사람의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 고요함에 진철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그의 앞에 하나의 인형이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었다. 혈귀처럼 또렷하지는 않지만 붉은 안개가 수증기처럼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마치 피가 엉겨 있는 듯했다. 그런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왔다.
순간 진철은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이든 빨아들일 것 같은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친 것이다.
사내는 주춤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진철의 모습에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드디어 혈마신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