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장 (19/29)

제18장

혈마신(血魔神)

“제길!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흑의인의 무사가 소리치자 그 옆에 있던 동료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불화살을 쏘아 낸 사람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런 그들의 주위에는 새카매진 건물과 불길에 그을린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날아오는 불화살에 딸려 온 기름으로 인해 빨리 불을 제압하지 못해서 타 버린 것이다.

무사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혹시 침범한 적이 없나, 그리고 아직까지 꺼지지 않은 불씨가 없나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그 자리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때 건물의 틈바구니에서 하나의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한정이었다. 북궁아가 취하람과 싸우는 사이 혈랑파로 진입한 것이었다. 그는 사나운 눈으로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한정은 혈랑파에 들어와 대부분의 모든 건물을 뒤졌다. 혹시 안선영이 어딘가에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체 어디에!’

한정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여기까지 와서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그건 웃음거리도 되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한정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건물을 발견하고 다시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 그의 신형이 빠르게 이동했다.

***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혈마신과 눈을 마주친 순간 모든 것을 보여 주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 탓이었다.

혈마신이 천천히 진철을 향해 걸었다. 그의 몸은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고 평범했지만 진철은 그가 한 발씩 다가올 때마다 거대한 산이 다가오는 위압감을 느껴야 했다.

“흡!”

순간 진철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신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네게서 그리운 냄새가 나는군. 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 와. 왜 그럴까?”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진철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라졌던 혈마신이 진철의 바로 뒤에 붙어 있었다. 그런 그의 붉은 눈동자가 출렁거리듯 흔들렸다.

고개를 숙여 진철을 훑어본 혈마신이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그런 그의 시선이 진철의 왼쪽 어깨에 가 닿았다.

“왠지 네 피는 맛있을 거 같군. 많은 도움이 될 거 같아.”

촤악!

자색의 선이 그어지며 혈마신의 얼굴이 반으로 갈라졌다. 순간 한기를 느낀 진철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그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혈마신의 얼굴이 곧 흩어지며 사라졌다. 허상이었다.

진철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의 앞에는 어느새 이동한 건지 오 장 밖에서 혈마신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물 밖으로 나온 붕어 같군. 불안에 떠는 마음이 여기까지 느껴지고 있어.”

혈마신은 마치 장난감처럼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몇 번 숨을 들이켠 진철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혈마신이란 존재인가 보군?”

“혈마신? 그렇게 불리기도 했지.”

진철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글쎄… 그때그때 불리던 이름이 달라서 말이야.”

순간 진철의 검이 빠르게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자색의 강기가 뻗어 나가며 혈마신을 강타했다. 강력한 강기의 위력에 바닥이 파이며 먼지가 일어났다. 진철은 그 모습을 보았음에도 곧바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팟!

진철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이며 혈마신이 있던 자리로 쏘아졌다.

슈악!

진철의 검이 다시 빠르게 공간을 갈랐다. 그 순간 먼지 속에서 뭔가가 붉게 빛났다.

쾅!

커다란 폭음과 함께 돌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날아갔다. 자신의 강기를 막은 혈마신을 향해 검을 내려친 것이다.

화악!

그때 먼지를 뚫고 붉은 무언가가 뻗어졌다. 진철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촤악!

붉은 갈고리가 진철의 신형을 찢고 나갔다. 그렇게 찢긴 진철의 모습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 역시 허상이었다.

“칫!”

뒤로 물러선 진철은 가슴팍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혀를 찼다. 완벽하게 피하지 못하고 스쳐 버린 탓이다.

“쿠쿠쿡…….”

혈마신이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의 손가락에는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진철의 피였다. 혈마신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쪽! 소리 나게 빨아들였다.

“과연… 과연 맛있어.”

“미친놈.”

진철의 입에서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그런 진철의 말에도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던 혈마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더 먹고 싶은데?”

“누가 준… 큽!”

진철이 허리를 젖히며 몸을 눕혔다. 그 위로 붉은 섬광이 훑고 지나갔다. 다시 몸을 일으킨 진철의 시야에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는 혈마신이 들어왔다.

“어차피 먹힐 거 피하지 말라고.”

혈마신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 해 봐야 아는 거지.”

진철이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의 옷이 바람에 펄럭였다. 혈마신은 그 모습이 재미있는 듯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부질없다는 걸 모르나?”

“…….”

진철이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혈마신은 실소를 짓고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진철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깡!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한 발 내딛는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혈마신을 향해 진철이 검을 뿌린 결과였다.

그때 진철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진철의 잔상을 붉은 손이 훑고 지나갔다. 혈마신의 손이 진철의 공격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치고 들어온 것이다.

몸을 회전시키며 혈마신의 옆으로 돌아간 진철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 원심력이 가해지며 혈마신의 등을 때렸다. 하지만 그 순간 혈마신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빌어먹을! 너무 빠르잖아!’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진철의 몸이 빠르게 숙여졌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붉은 손이 쏘아졌다. 진철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끼며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쾅!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혈마신이 주먹을 뻗는 도중에 진철의 머리를 따라 내리꽂은 것이다.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달려 나가던 진철이 균형을 잡으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진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쩡!

진철의 신형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갔다. 어느새 접근한 혈마신이 그를 때린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가까스로 그 주먹을 막은 진철은 검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충격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슈학!

혈마신이 바닥을 박찼다. 단지 한 번 찼을 뿐인데 그의 신형이 빠르게 진철에게 뻗어 나갔다. 그런 혈마신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순간 진철은 자신을 덮쳐 오는 붉은 섬광에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콰앙!

폭발과 함께 진철의 신형이 더욱 빠르게 날아갔다. 약 오 장의 거리를 날아간 진철이 바닥을 굴렀다.

“흠…….”

그런 엄청난 위력을 펼쳤음에도 혈마신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역시 불안정하군.”

투덜거리듯 중얼거린 혈마신은 고개를 꺾어 목의 관절을 풀었다. 그러고는 쓰러져 있는 진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이제 시식을 해 볼까?”

혈마신이 혀를 내밀어 입 주위를 핥았다. 그런 그에게 지금 진철은 맛있어 보이는 한 끼의 식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혈마신은 곧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진철의 손가락이 미묘하게 꿈틀거리고 있던 것이다.

“크윽!”

그때 진철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진철은 땅을 짚은 손에 힘을 주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그의 몸은 피와 흙먼지로 지저분했고 입고 있는 옷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킨 진철이 고개를 들어 혈마신을 바라보았다. 진철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내며 입을 열었다.

“나 아… 직 안 죽었다.”

“…….”

진철의 말에 혈마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그의 얼굴이 천천히 변화했다.

“큭, 크크크.”

혈마신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은 곧 커져 갔다.

“크하하하하!”

허리를 굽혀 가면서까지 웃어 젖히는 혈마신의 얼굴은 정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가득했다.

진철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사자 앞에서 재롱떠는 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진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폭소를 하던 혈마신이 몸을 들어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럼 날 더 재밌게 해 주라고.”

팡!

순간 혈마신의 신형이 진철을 향해 쏘아졌다. 진철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뒤로 물러나며 검을 앞으로 뻗었다.

땅!

진철의 검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혈마신이 간단하게 쳐 올린 것이다.

그런 진철의 앞으로 혈마신의 신형이 도달했다. 진철의 눈에 혈마신의 붉은 안광이 틀어박혔다.

퍽!

***

천천히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던 달은 어느새 나왔는지 대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울창한 숲 속까지는 그 빛이 닿지 않았다. 그런 숲 속의 한가운데에 한 인형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북궁아였다.

스아아.

북궁아의 주위에는 한기로 가득한 안개가 펼쳐져 있었다. 아마 평범한 인물이 그곳에 온다면 차갑고 짙은 한기에 몸을 떨며 그곳을 벗어났을 것이다.

운기조식을 하는 북궁아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북궁아의 코로 하얀 안개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한기가 그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자 북궁아의 입에서 깊은 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지금이라면…….’

북궁아는 몸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한기를 느꼈다. 지금 상태라면 빙정을 뽑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취하람에게 당한 상처가 역으로 복이 된 격이었다.

본래 빙정을 뽑으면 그 후로 약 한 달간 빙정을 뽑아 낼 수 없었다. 거기에 빙정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북궁아는 여자로서의 자격을 잃게 된다. 처음엔 감정이 무뚝뚝해지고 그다음엔 넘쳐 나는 한기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다. 위력이 위력인 만큼 그만한 뒷감당은 북궁아 자신에게 돌아왔다.

며칠 전 빙정을 뽑아 그녀의 한기는 상당히 올라간 상태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직 빙정의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

‘진철…….’

북궁아는 멍한 웃음을 짓고 있는 진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딘가 빠진 거 같고 생각이 없는 듯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하는 그였다. 세상에 그렇게 흔한 남자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은 그에게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 왔고 또 욕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만큼 집착도 강해졌다. 무공을 익히면서 사라졌던 감정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이 진철을 만나면서부터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그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마음에 온기가 찾아오는 것 같았다.

‘내가… 지키겠어.’

북궁아의 눈이 반짝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팍!

손을 뻗어 바닥에 박혀 있는 대도를 뽑아 든 북궁아는 그것을 어깨에 걸치며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꽤 높은 건물이 숲 속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뚝!

붉은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또다시 핏방울이 한 방울 더 떨어졌다.

“크윽…….”

진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진철의 어깨에 하나의 손이 틀어박혀 있었다. 바로 혈마신의 손이었다.

그리고 혈마신의 팔목에는 진철의 검이 팔을 누르고 있었다. 혈마신이 손을 찔러 오는 순간 그의 손목을 내려쳤지만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고 그대로 진철의 왼쪽 어깨를 꿰뚫어 버린 것이었다.

팍!

혈마신이 손을 빼내자 진철의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진철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할짝.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혈마신이 손에 묻은 피를 입으로 가져가 혀로 핥았다. 그런 괴이한 모습에 진철의 얼굴은 더욱더 구겨졌다.

“과연 맛있어.”

마치 진미(珍味)를 음미하듯 눈까지 감으며 피의 맛을 감상하던 혈마신이 입을 열었다.

“맛있다면 다행이네.”

진철이 능청스럽게 입을 열자 혈마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맛있어. 이런 맛은 참 오랜만이군.”

혈마신은 갓 부활한 주제에 마치 수십 년을 살아온 것처럼 말했다. 그런 혈마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더 주지 그래?”

“내가 죽으면 실컷 먹으라고. 죽일 수 있으면 말이지.”

“그래?”

혈마신이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지며 진철의 앞에 나타났다.

“그럼 죽이면 되겠군.”

혈마신이 손을 뻗어 오자 진철은 급히 상체를 비틀었다. 하지만 이미 지쳐 버려 그의 몸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바람에 다리가 엉키며 휘청거렸다. 그것을 놓칠 혈마신이 아니었다.

진철의 가슴 앞으로 뻗어 나갔던 혈마신의 주먹이 옆으로 휘둘러졌다.

퍽!

“컥!”

진철이 외마디 비명을 내뱉으며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을 구른 진철의 신형이 꿈틀거렸다. 혈마신은 그런 진철을 바라보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러고는 눈을 살며시 감으며 숨을 들이켰다.

“하아… 그래, 이 향기야. 절망으로 물들었지만 깨끗한 피 냄새.”

“큭, 제길…….”

진철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땅을 짚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해 가며 느릿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진철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앞에 어느새 다가왔는지 혈마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거 알아?”

“무엇을?”

“넌 진짜 미친놈이야.”

“큭!”

진철의 말에 혈마신이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손이 진철의 머리를 덮었다. 진철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머리를 내주었다.

그런 진철에게 혈마신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왔다. 코가 닿을락 말락 가까이 다가온 혈마신이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지. 난 신이야. 그러니까 미친놈이 아닌 광신(狂神)이 맞는 거겠지!”

확!

진철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혈마신이 진철의 머리를 쥔 손을 떨쳐 버린 것이다.

쿵!

진철의 신형이 힘없이 날아가다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진철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내상이 돋은 것이다. 거기에 피를 너무 많이 쏟았는지 그의 눈이 점점 감겨 왔다.

‘…하지만 여기서 눈을 감을 순 없어!’

진철은 다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장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억지로 웃을 힘도 없었던 것이다.

혈마신은 진철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일어나는 거지? 그냥 편히 누워 있으면 될 것을.”

“말… 안 했던가?”

진철이 허리를 숙인 상태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진철이 고개를 들어 혈마신을 바라보았다. 혈마신의 얼굴에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난 도사거든. 도사는 잡귀를 처치해야 하잖아? 그러니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야지. 내 앞에 이렇게 커다란 잡귀가 있으니까 말이야.”

“…….”

진철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던 혈마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계속 일어서면서 죽으라고.”

혈마신은 진철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그의 신형이 천천히 다가왔다.

진철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고는 허리를 완전히 폈다. 그런 진철의 반응에 혈마신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가오는 발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몸이 과연 버텨 줄 수 있을까?’

진철은 단전에 있는 내공을 슬쩍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내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체력이 부족한 것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검을 쥐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어차피 하지 못하면 죽을 거!’

진철이 생각을 굳히며 눈을 빛냈다. 그때 혈마신이 진철에게 다가왔다. 그러다 진철의 코앞에 발을 멈추고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츄악!

그 순간 진철의 온몸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갑작스레 내공을 끌어 올리자 상처가 그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더 커진 것이다.

혈마신은 그 모습에 약간 놀란 표정만 지었을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때 진철의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파학!

진철과 혈마신의 사이에 한 송이 꽃이 생겨났다. 그때 혈마신의 얼굴이 굳어지며 빠르게 진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철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강하게 검을 그어 올렸다.

번쩍!

강한 빛이 진철과 혈마신을 집어삼켰다.

촤악!

그 빛을 뚫고 진칠의 신형이 뒤로 밀려나갔다. 그런 진철의 눈이 반짝였다. 손에 감각이 있던 것이다.

터텅!

뒤로 날아가던 혈마신이 바닥과 충돌하고는 몇 바퀴를 굴러 나갔다. 그러다 혈마신이 바닥을 때리며 몸을 허공에 띄웠다. 균형을 잡기 위함이었다.

슈학!

그 순간 진철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 진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허공에 흩날렸다.

한편 허공에서 균형을 잡고 바닥에 내려선 혈마신은 눈을 크게 떴다. 진철이 코앞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쾅!

진철의 검이 혈마신의 가슴을 강렬하게 찔렀다. 그러자 혈마신이 허공에 떠오르며 튕겨 나갔다. 그런 진철의 주위로 강력한 경풍이 몰아쳤다.

잠시 후 날아가던 혈마신이 바닥을 구르며 멈춰 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철의 신형이 순간 비틀거렸다.

털썩!

진철의 무릎이 굽혀지며 바닥에 붙었다. 그의 눈도 점점 감겨지고 있었다. 진철은 고개를 저어 정신을 붙들었다. 그때 진철의 눈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혈마신이 보였다.

“크크큭!”

몸을 일으키는 혈마신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의 입에서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웃음을 터트리며 완전히 몸을 일으킨 혈마신은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폭소하기 시작했다.

“크크큭! 크하하하! 하하하!”

웃어 젖히는 혈마신의 몸에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큰 타격은 입히지 못했는지 혈마신의 행동에는 전혀 어색한 점이 없었다.

“재밌어! 재미있다고!”

혈마신이 뒤로 젖혔던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크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진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진철은 얼굴을 구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미 신체가 한계를 넘어서 버렸는지 일어나는 그의 신형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진철은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이 몸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좀 더! 조금 더 노력해 봐라!”

광기에 찬 혈마신의 목소리가 주변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런 혈마신의 눈에 혈광이 감돌았다.

진철은 다가오는 혈마신을 바라보며 내공을 일으켰다. 하지만 혈도 곳곳이 찢어지는 느낌에 끌어 올리던 내공을 흩어 버리고 말았다.

으득!

진철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진철의 옆에서 붉은 섬광이 날아들었다.

퍽!

진철의 신형이 끊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았다. 일 장을 날아간 그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다신 움직이지 않았다.

혈마신은 그런 진철을 바라보다 붉은 섬광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혈마신의 얼굴에는 이미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개자식!”

그곳에는 세세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진철로 인해 잃었던 정신이 지금에서야 돌아온 것이었다.

진철의 개화로 받은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세세호가 혈마신의 옆에 가 섰다. 그러고는 진철을 내려다보았다.

“큭.”

세세호의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갔다. 진철의 꼴이 우스웠던 것이다.

만약 조금만 빨리 진철이 도착했다면 그는 정파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혈마신은 부활했고 이제 백 일에 걸쳐 처녀의 정수를 흡수하면 완벽하게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누구도 혈마신을 막을 수 없게 된다.

‘무림이 내 손안에 들어오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세세호는 무림을 최초로 일통해 무림의 황제가 된 자신을 떠올리며 혈마신을 바라보았다.

“드, 드디어! 탄생했구나! 혈마신이여!”

세세호가 혈마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때를 위해서 혈궁주 밑에서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해 가며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이었다.

퍽!

그때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세세호의 눈이 부릅떠졌다.

세세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야에 뱃가죽을 뚫고 들어온 하나의 손이 들어왔다. 혈마신이 세세호의 배에 손을 쑤셔 넣은 것이다.

“쿨럭! 대, 대체 왜?”

세세호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혈마신은 세세호를 가만히 지켜보다 천천히 얼굴을 내밀어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그런 혈마신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내 장난감을 건들지 마.”

쾅!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던 혈마신이 세세호의 배에서 손을 빼내며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결코 살과 살이 맞닿은 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폭음이 터지며 세세호가 빠르게 튕겨 나갔다.

혈마신은 그런 세세호의 모습에 미련 없이 신형을 돌리고는 진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일어나라.”

혈마신이 말했다. 하지만 쓰러져 있는 진철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혈마신은 그의 무반응에 살짝 얼굴을 구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서 일어나.”

혈마신은 어느덧 진철의 앞까지 다가가 그의 뒷목을 움켜쥐고는 간단히 들어 올렸다. 진철의 몸이 허공에서 축 늘어졌다.

혈마신은 그런 진철의 앞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긁힌 것 같은 상처가 자잘하게 나 있는 손이었다.

혈마신은 자신의 손을 한 번 바라보더니 진철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상처가 보이나? 네가 입힌 상처야. 이런 두근거림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난단 말이지.”

혈마신의 붉은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재밌게 놀아 보자고!”

혈마신이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진철이 허공을 날아가더니 바닥을 굴렀다.

혈마신은 여전히 진철이 몸을 일으키지 않자 구긴 얼굴을 더욱 찡그리며 진철을 향해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네놈의 머리를 잘라 평생 들고 다니겠다!”

걸어가는 혈마신의 몸에서 붉은 안개가 넘실거리며 피어났다. 그 순간 혈마신의 눈이 빛을 발하며 빠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그런 그의 눈에 하얀 섬광이 번뜩였다.

쿵!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 중앙에는 어느새 나타난 건지 북궁아가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진철!’

북궁아는 바로 고개를 돌려 쓰러져 있는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신형이 빠르게 진철에게 다가갔다. 북궁아는 진철을 제대로 눕힌 후 그의 맥을 짚었다.

‘살아 있어!’

비록 미약하기는 하나 분명히 맥이 잡혔다. 북궁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몸에 살짝 내공을 불어넣었다.

“컥!”

진철의 입에서 시커먼 피가 터져 나왔다. 몸속에 고여 있던 죽은피를 토해 낸 것이다. 그렇게 피를 토해 내자 진철의 혈색이 밝아졌다.

일단 위급 조치를 취한 북궁아는 그의 몸을 안아 들고 제단의 벽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다시 그곳에 눕혔다.

슥.

‘바보처럼 또 다치다니…….’

북궁아는 진철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렇게 잠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본 북궁아가 몸을 일으키고는 뒤로 돌았다. 그곳에는 하얀 냉기가 서린 손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 혈마신이 있었다.

북궁아가 살짝 아미를 구겼다. 지금 혈마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기에 알몸이었다. 하지만 진짜 얼굴을 구긴 이유는 자신이 쏘아 낸 도기를 받고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또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군.”

혈마신은 고개를 들어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그때 북궁아가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의 모든 피가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킨 탓이다.

“그런데… 너에게서도 좋은 냄새가 나. 저놈하고는 다르지만 말이야. 너도 맛있겠어.”

혈마신이 북궁아를 가리키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북궁아는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쟤를 저렇게 만든 건 너겠지?”

“물론.”

“그럼 죽어.”

쉬악!

북궁아의 대도가 대기를 갈랐다. 그러자 하얀 섬광이 번뜩이며 한기가 혈마신에게 몰려갔다. 혈마신은 실소를 흘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쾅!

혈마신의 전신에 한기가 들이닥쳤다. 북궁아는 그 모습에도 연신 도기를 날려 보냈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도기를 날린 북궁아가 그 자리에서 도약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빙룡환(氷龍環)!”

그녀의 도에서 쏘아진 하얀 용이 혈마신에게 떨어졌다.

쿠르릉!

하얀 냉기가 대지를 물들이며 수증기처럼 피어올랐다. 바닥에 착지한 북궁아는 고개를 들어 그곳을 바라보았다.

훙!

그때 강력한 돌풍이 몰아닥치며 냉기를 흩어 버렸다. 그 중앙에서 혈마신이 혈광을 뿌리며 서 있었다.

“재밌어. 재미있다고!”

뜬금없이 소리친 혈마신의 신형이 북궁아에게 쏘아졌다. 북궁아는 발을 살짝 띄우며 도를 세워 앞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 혈마신의 주먹이 도를 강타했다.

쩡!

북궁아가 밀려나가며 신음을 내뱉었다.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몸을 띄웠지만 혈마신의 위력은 그것을 상회했다. 북궁아는 저릿저릿한 팔에 이를 악물고는 공중제비를 돌아 바닥에 착지했다.

혈마신은 그런 북궁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놈보다는 재미가 없군. 그리고 저놈에게서 계속 맛있는 냄새가 나.”

혈마신이 진철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북궁아가 눈을 빛냈다. 그런 그녀의 도가 허공을 갈랐다.

슈각!

퍼엉!

그녀의 도에서 쏘아진 도기는 혈마신의 간단한 손짓에 소멸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북궁아는 차가운 시선으로 혈마신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를 건들이면 죽일 것이야.”

“건들이지 않으면 살려 준다는 건가?”

“아니.”

“훗, 어쩌자는 거지?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난 저놈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 저렇게 맛있는 ‘음식’을 포기할 수는 없거든.”

“그럼… 죽어!”

순간 북궁아의 전신에서 하얀 기류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닥에 하얀 냉기가 깔리며 얼어붙었다. 이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번쩍!

북궁아의 눈이 빛을 발하자 그녀에게서 냉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을 바라보는 혈마신이 얼굴을 굳혔다.

눈을 살짝 감았다 뜬 북궁아의 눈이 하얗게 변해 갔다. 그녀의 머리카락 역시 하얗게 물들었다. 그런 그녀의 양어깨에 투명한 수정이 떠올랐다. 빙정을 뽑아 낸 것이다.

“너…….”

혈마신이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몸에서 붉은 혈기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군.”

그렇게 중얼거린 혈마신이 팔을 뻗어 북궁아를 가리켰다. 그 순간 그의 손에서 붉은 섬광이 튀어 올랐다.

콰앙!

북궁아가 허공에 도를 내려쳤다. 그러자 그녀의 앞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며 그 기운이 양쪽으로 뻗어 나갔다. 혈마신이 혈기를 쏘아 낸 것이다.

북궁아는 그런 혈기를 잘라 버리며 혈마신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이 떠오르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혈마신은 살짝 얼굴을 구겼다.

“그 표정도 마음에 들지 않아!”

소리친 혈마신의 신형이 북궁아에게 쇄도했다. 거대한 기세를 풍기며 다가오는 혈마신을 바라보는 북궁아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한편 정신을 잃은 진철의 몸에서는 자색의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딱!

“아야!”

진철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 하늘과 푸른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자신을 가리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 진철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프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이가 물었다. 그는 진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진철은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마주 잡았다. 사내는 팔을 당겨 진철을 일으키고는 살짝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기에……. 그리고 솔직히 진 소협이 날 괴롭힌 것도 적지 않게 있지 않았소?”

“독고요…….”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을 하는 이는 바로 독고요였다. 독고요는 진철의 부름에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기는 진 소협이 올 곳이 아닌데… 왜 온 것이오?”

“음… 글쎄?”

진철의 말에 독고요는 실소를 머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처럼 흔들거리며 아무것에도 구속받지 않은 듯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뭐, 왔으니 할 수 없겠구려. 그런데 내가 한 부탁은 어찌 되었소?”

“음…….”

독고요의 말에 신음을 흘린 진철은 살짝 얼굴을 구겼다.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 그래도 어찌어찌 혈귀들은 땅으로 돌려보냈어.”

“대단하구려. 그 혈귀들을 전부…….”

“아아, 그런데 한 마리가 남아 있단 말이지. 혈마신이라는…….”

“큰일이구려. 그가 완전히 부활하게 된다면 혈귀를 땅으로 돌려보낸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데.”

독고요의 말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투덜거렸다.

“근데 그놈 사기야. 강해도 너무 강한 거 있지? 내가 눈으로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니까? 거기에 위력은 또 얼마나 강한지 공격을 흘리며 막아도 몸 안이 진탕되는 거 같더라니까.”

“크크큭.”

“뭐야? 왜 웃어?”

진철이 독고요를 꼬나봤다. 자신은 그렇게 얻어맞고 왔는데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에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아니요, 아니요.”

독고요는 손을 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동안 웃음을 흘린 그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 말고 또 나와 약속한 것이 있지 않소?”

“아…….”

독고요의 나직한 목소리에 진철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독고요는 그런 진철을 바라보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켰다.

“가서 그녀를 구해 내시오.”

입을 연 독고요가 발을 내디뎠다. 그런 그의 앞에는 한 여인이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독고요의 얼굴에 행복감이 피어났다.

“아.”

그녀에게 가던 독고요가 뭔가 생각났는지 몸을 돌려 진철을 바라보았다.

“남아일언.”

“…중천금.”

독고요의 말을 진철이 받았다. 독고요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점점 사라져 가는 독고요와 여인을 바라보더니 잠시 후 눈을 감았다.

쾅!

“으음…….”

진철은 요란한 소리에 살짝 눈을 떴다. 그러자 누군가 혈마신과 격돌을 벌이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쩌엉!

하얀 섬광과 붉은 섬광이 허공에서 격돌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철의 눈이 어느 순간 부릅떠졌다. 하얀 섬광의 주인공을 확인한 것이다.

‘북궁아!’

하얗게 변한 머리를 휘날리며 냉기가 맺힌 백도를 휘두르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런 그녀를 상대하는 혈마신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거기에 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때 진철의 고개가 살짝 꺾였다. 자신의 몸이 너무나 가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철은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북궁아가 저렇게 실력이 뛰어났나?’

진철은 의문을 품으며 북궁아를 살펴보았다. 그때 북궁아의 어깨에서 빛나고 있는 투명한 수정이 눈에 들어왔다. 양쪽 어깨에 각각 떠 있는 그것은 자석(磁石)처럼 북궁아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중 하나는 마치 잘 세공된 보석처럼 멀쩡한 듯 보였으나 다른 한쪽은 반 정도가 부서져 있었다.

쾅!

갑작스레 폭음과 함께 강렬한 경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북궁아가 내려친 도를 혈마신이 양손으로 받들 듯 막아서고 있었다. 북궁아의 도와 혈마신의 손은 약 한 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상태였다.

파직!

그 사이에서 불똥이 튀며 번쩍거렸다. 그런 그들의 주위로 바닥이 금이 가며 돌조각들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비등비등한 힘의 격돌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획!

그 순간 혈마신이 손바닥을 왼쪽으로 기움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북궁아의 도는 갑자기 사라진 저항에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쾅!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북궁아의 무표정한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눈에 붉은 섬광이 비쳐졌다.

쩌엉!

촤악!

쇠 울림과 함께 북궁아의 신형이 뒤로 밀려났다. 당했다고 생각한 순간 북궁아의 도가 혈마신의 주먹을 가로막은 것이다.

“으아아!”

그 모습에 혈마신이 고함을 터트리자 그의 주위로 강력한 여파가 퍼져 나갔다. 그런 혈마신의 신형이 북궁아를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쩡! 쩡!

북궁아의 신형이 흔들리며 뒤로 밀려나갔다. 그렇게 혈마신의 주먹을 막아 가던 북궁아가 눈을 빛냈다.

서걱!

급히 숙인 혈마신의 머리 위로 북궁아의 도가 훑고 지나갔다. 그녀의 도에 잘린 핏빛 머리카락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머리카락이 형태를 잃어가더니 핏방울이 되어 풍압에 밀려 떨어져 나갔다.

“어리석은!”

허리를 굽힌 혈마신의 주먹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강력한 혈기가 모여들었다. 그때 북궁아의 신형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를 따라 회전하는 대도에 한기가 스며들면서 주변을 얼렸다.

“켈! 죽어랏!”

혈마신이 혈기가 가득 맺힌 주먹을 북궁아를 향해 뻗었다.

팟!

그 순간 북궁아의 신형이 뒤로 빠지며 어느새 들어 올린 대도를 강하게 내리그었다.

콰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북궁아와 혈마신의 신형이 사라졌다. 충돌의 여파로 제단이 부서지면서 먼지가 그들의 모습을 가린 것이었다.

투확!

그때 먼지를 뚫고 북궁아와 혈마신의 신형이 각각 양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터텅!

바닥에 몇 번 튕기듯 굴러가던 북궁아가 손을 뻗어 바닥을 때렸다. 그러자 그녀의 신형이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착지했다.

“후욱… 후욱…….”

북궁아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왔다.

쩌적!

그때 북궁아의 어깨에 남아 있던 수정 하나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리고 그나마 멀쩡했던 또 다른 수정은 금이 가며 반으로 부서져 버렸다.

“큭!”

북궁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이 흰색에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빙정이 깨지면서 한계를 초월하던 한기가 점점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크으아아아!”

순간 거대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북궁아는 고개를 치켜들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혈마신이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상체는 반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상처가 급속도로 얼어붙고 있었다.

“네년이 감히! 감히!”

혈마신의 눈에서 혈광이 튀었다. 그런 그가 북궁아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때 그의 옆에서 강렬한 경기가 쏘아졌다. 고개를 돌리는 혈마신의 눈에 자색의 강기가 들어왔다.

쾅!

온 정신을 북궁아에게만 집중해 미처 강기를 막지 못한 혈마신이 바닥에 튕기며 떨어져 나갔다. 북궁아는 그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요란하게도 싸웠네.”

그곳에는 어느새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진철이 서 있었다. 진철은 살짝 얼굴을 구긴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북궁아를 향해 손을 들었다.

“여…….”

“…….”

북궁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진철은 그녀가 자신을 무시하자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 바닥에 누워 있던 혈마신이 몸을 일으켰다.

“개잡것들! 전부다 씹어 삼켜 주마!”

혈마신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때 북궁아가 몸을 일으키며 대도를 들어 올렸다. 혈마신의 신형이 빠르게 쏘아져 온 것이었다.

큐웅!

북궁아의 도에서 순간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의 상체가 앞으로 나갔다. 혈마신에게 달려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북궁아의 어깨를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그 손은 북궁아의 어깨를 잡아당기더니 그녀를 앞질러 나갔다.

뻗어 오는 붉은 섬광을 자색의 강기가 감쌌다. 그렇게 혈마신의 손을 타고 올라가던 검이 어느 순간 휘어지며 그의 팔을 튕겨 냈다.

“뭣?”

혈마신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 그의 몸이 옆으로 쏠려 나갔다. 무언가가 몸을 잡아당기듯 빨려 간 것이었다.

진철이 혈마신의 힘을 이용해 그를 떨쳐 버린 결과였다.

쾅!

혈마신의 손에 맺힌 혈기가 바닥을 때리면서 커다란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진철이 뒤를 돌았다. 그의 뒤에는 반쪽 남은 빙정조차 완전히 깨져 버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북궁아가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 나에게 맡기고 쉬도록 해. 수고했어.”

‘진… 철.’

북궁아는 진철을 바라보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진철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진철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가 터져 나갔다.

“으아아!”

어느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혈마신이 다시 고함을 터트렸다. 그런 그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버러지 같은 놈이!

혈마신의 신형이 진철을 향해 쏘아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분명 빠르긴 했지만 아까랑 비교하면 많이 둔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혈마신은 갓 태어나서 불안전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진철의 개화를 맞고, 각성한 북궁아와 격돌하면서 지쳐 가기 시작한 것이다.

‘절대 힘으로 부딪치면 안 돼.’

진철의 신형이 흔들렸다. 구궁보를 펼친 그의 신형이 혈마신을 향해 뻗어 갔다. 혈마신은 진철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주먹을 뻗었다.

투확!

그가 주먹을 떨칠 때마다 공기가 터져 나가며 경풍이 휘몰아쳤다. 그 때문인지 누더기가 된 진철의 옷이 강하게 펄럭거렸다. 하지만 진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혈마신의 움직임을 그대로 눈에 담았다.

‘지금!’

순간 진철의 검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런 그의 검이 혈마신의 주먹을 감싸듯 휘감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검이 주먹을 튕겨 냈다. 또다시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순순히 당하려 하지 않는지 혈마신이 이를 악물며 떨어져 나가는 자신의 힘에 대항했다.

그때 진철의 신형과 함께 원심력이 실린 자하신검이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회전했다.

“으아아!”

혈마신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런 그의 눈에 쏘아져 오는 자색의 검이 들어왔다.

쩌엉!

검이 혈마신을 강타하자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고는 수 장을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쳇!”

진철은 얼굴을 살짝 구기며 혀를 찼다. 팔목이 저려 오며 어깨의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의 묘리를 이용해 그를 튕겨 냈는데도 이만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죽이겠어!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찢어 씹고 말리라!”

“그 자식 말은 참 살벌하네…….”

혈마신이 몸을 일으키며 외치자 진철이 투덜거렸다. 그런 그의 말을 들었는지 혈마신의 몸에서 더욱 강대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진철의 눈이 척 가라앉았다.

진철은 서서히 혈마신에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몸에서 수증기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꽃의 향기가 날리려면…….’

진철의 보폭이 넓어지더니 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꽂이 피어야 한다.’

자하신검의 끝 부분에 꽃봉오리가 피어났다. 평소 개화를 펼칠 때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봉오리. 하지만 그 빛은 더욱 뚜렷했다.

혈마신 역시 그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양 주먹에 혈기를 모았다. 순식간에 모인 혈기가 강하게 진동을 일으켰다. 혈마신은 그런 손의 감촉을 느끼며 한 발 앞으로 뻗어 나갔다.

푹!

그때 혈마신의 오른쪽 허벅지에서 핏물이 튀어나왔다.

혈마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떻게 살아 있던 것인지 엎드려 있던 세세호가 고개를 들어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은 붉은 수정을 혈마신의 허벅지에 쑤셔 넣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니라면… 존재할… 이유가 없어!”

“이익!”

“같이 가자꾸나!”

세세호가 피를 토하며 외쳤다. 그런 그에게 이를 악문 혈마신의 왼발이 날아들었다. 세세호는 반사적으로 팔을 내려 자신의 가슴을 막았다.

혈마신의 다리가 그의 팔에 닿았다. 그러자 세세호의 팔이 부러지며 그의 신형이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혈마신은 그런 세세호를 끝까지 바라볼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진철이 그의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만개화향이다!”

“크아아!”

진철의 검에 맺힌 꽃봉오리가 피기 시작하자 혈마신은 몸을 비틀며 양 주먹을 진철에게 뻗었다. 그때 혈마신의 허벅지에 박혀 있던 붉은 수정이 빛을 토해 냈다.

혈마신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그곳으로 돌렸다. 그 순간 혈마신의 몸에 꽃봉오리가 닿으면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혈마신의 양 주먹에 맺힌 혈기를 간단하게 날려 버리며 그를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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