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9장 (20/29)

제19장

태동하는 무림

모든 싸움이 끝났다. 완전하게 부활하면 그 존재만으로도 세상의 재앙이 된다던 혈마신은 불안전한 형태로 격돌을 벌이다 사라져 버렸다. 만약 며칠의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점점 완벽해지는 그에게 오히려 진철과 북궁아가 당했을 것이다.

만개화향의 위력은 강력했다. 혈마신을 집어삼킨 빛은 그의 몸을 완전히 분해시켜 버렸다. 도가 무공의 정수가 담겨 있어 상극이 되는 마기나 혈기, 혹은 사기에 치명적이었기에 혈마신이 받는 위력은 본래의 배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무공을 불안전하고 지쳐 버린 혈마신이 견뎌 낼 리가 없었다.

진철은 텅텅 비어 버린 몸을 이끌고 제단의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안선영이 묶인 채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었다.

진철은 안선영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 주었다. 그냥 그녀의 몸을 감싼 형태라서 푸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진철은 쇠사슬에서 해방되자 천천히 쓰러지는 안선영을 받아 들며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맥을 짚었다.

두근!

약하지만 분명히 뛰고 있는 맥이 느껴졌다. 진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단전을 쥐어짜 내공을 끌어 올리고는 안선영의 몸에 흘려보냈다.

“으음…….”

약간 창백했던 안선영의 혈색이 돌아오며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서서히 눈을 떴다.

“아!”

흐릿한 눈으로 진철을 살펴보던 안선영은 낯선 얼굴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진철은 그런 안선영을 그냥 놓아주었다.

“다, 당신은 누구죠?”

안선영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호가장주이신 금석천 대협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입니다.”

“아!”

안선영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당한 일이 떠오르자 서러움이 복받쳐 오른 것이었다.

“호가장주께서 말씀하시길, 안 소저께서 안무가까지 잘 가셨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셨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

안선영은 진철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진철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키고는 그녀를 부축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잠깐.”

진철은 안선영을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어느새 정신을 잃어 쓰러져 있는 북궁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벅!

진철은 북궁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북궁아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런 그녀의 몸은 전에 사련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때보다 더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진철은 북궁아의 얼굴을 살짝 바라보고는 그녀의 대도를 집어 들었다. 역시나 묵직한 그 무게에 진철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보다시피 이런 상황이라 부축해 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고개를 돌린 진철이 괴기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안선영에게 말을 건넸다.

“괘, 괜찮아요.”

어느새 울음을 그친 안선영이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지금 혈랑파의 정문은 아직 혈궁의 무사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길로 돌아갈 것입니다. 길이 험하니 발밑을 조심하세요.”

“…….”

안선영은 진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철은 그렇게 제단을 벗어났다. 아마 날이 밝으면 이 일대에는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진철은 약 반 시진에 걸쳐 혈랑파를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몸은 땀범벅으로 축축하게 변해 있었다.

“크으…….”

진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땀이 상처에 배어 들자 쓰라렸기 때문이다.

그때 진철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멀리서 검은 인형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인형이 근처까지 다가오자 진철의 얼굴에 안도감이 감돌았다. 바로 한정이었던 것이다.

혈랑파를 뒤지고 뒤지던 한정은 도저히 안선영을 찾지 못하자 진철을 믿기로 하고 약속 장소로 먼저 와 있었다. 하지만 몇 시진이 지나도 진철이 나타나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다시 혈랑파로 들어가려던 차에 진철과 마주친 것이었다.

“진 소협!”

한정은 진철과 북궁아의 몰골에 창백해진 얼굴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북궁아와 그녀의 도를 진철에게서 받아 들었다.

“잠깐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진철이 지친 목소리로 말하자 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공을 끌어 올리고는 북궁아의 몸에 흘려보냈다. 그러자 그녀의 혈색이 돌아오며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왔다.

한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안선영을 발견하였다.

“선영 아씨!”

“예?”

한정이 외치며 다가오자 안선영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곧 걸음을 멈추었다. 진철과 동료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정은 안선영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간 얼마나 큰 고초를 당하셨습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저… 그, 그게…….”

안선영은 한정이 연신 자신의 손을 흔들어 대자 당황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때 그들의 사이로 두 개의 인형이 빠르게 내려섰다. 한정은 그들의 기척에 잽싸게 안선영을 등지며 그녀를 가로막았다.

“신녀님!”

바닥에 내려선 그들은 북궁아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바로 북궁아의 호위 무사인 일화와 월화였다.

월화는 재빨리 북궁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장삼에 손을 붙이고는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화가 고개를 돌렸다. 일화는 진철을 노려보며 그에게 다가갔다.

“다, 당신!”

노한 표정으로 다가가던 일화의 걸음이 멈췄다. 전에 진철에게 덤볐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떠오른 것이다.

“신녀님이 대체 무슨 일을 당하신 거야!”

“…미안하군.”

진철은 일화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거기에 그녀가 저런 상태가 된 것은 자신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녀님이 잘못된다면 난 당신을 절대 용서치 않겠어!”

일화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때 월화가 일화를 불렀다.

“대주님! 신녀님이 깨어나셨습니다!”

“뭣?”

일화의 신형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런 그의 눈에 꿈틀거리는 북궁아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으음…….”

“시, 신녀님! 정신이 드십니까?”

일화가 외치자 그의 말에 대답하듯 북궁아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런 그녀는 월화와 일화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는 진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철은 감히 그녀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북궁아는 그런 그의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느낀 것이었다.

“네? 그게 사실인가요!”

그때 안선영의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진철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북궁아와 일화, 월화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안선영이 끊임없이 흔들거리는 눈으로 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정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진철이 한정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한정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실은… 아까 선영 아씨를 찾기 위해 혈랑파에 잠입했었소. 그러다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낸 것이 있는데…….”

말끝을 흐리던 한정이 늘어트린 주먹을 쥐며 입을 열었다.

“선영 아씨의 가문인 안무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소식이오.”

“아.”

진철의 뇌리로 세세호의 말이 떠올랐다.

‘안무가는 이미 멸문했다.’

안선영은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의 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아, 아버지… 어머니께서…….”

“…….”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진철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한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한 형께서는 안 소저를 데리고 먼저 호가장으로 돌아가 주세요. 저도 곧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멀쩡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제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짐만 될 뿐이죠.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진철의 거듭되는 말에 한정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몸조심하시오.”

“한 형도 조심하십시오.”

한정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진 안선영을 일으키며 부축하고는 진철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바로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진철은 점점 멀어지는 한정과 안선영을 바라보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북궁아에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던 북궁아는 다가오는 진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척!

진철은 북궁아의 앞으로 가 한쪽 다리를 굽히며 북궁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 갔다.

일화와 월화는 그 모습에 진철을 막아서려고 했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북궁아의 모습에 몸을 돌리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좀 어때? 많이 아파?”

진철이 말을 건네자 북궁아는 서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북궁아는 그런 그의 손길이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감으며 그 손길을 음미했다.

“말했잖아. 날 조금 더 믿어 달라고.”

“…….”

진철의 말에 북궁아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또다시 진철이 입을 열자 북궁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네 부탁을 들어줄게. 무엇이든 말해.”

“…무엇이든?”

“그래, 무엇이든.”

입을 연 북궁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난… 나는… 단지 네가 내 옆에…….”

“위험!”

그때 일화와 월화가 동시에 외치며 검을 빼 들었다.

퍼퍽!

“큭!”

두 번의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일화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월화는 그런 일화의 모습에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물체가 월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윽!”

월화는 허벅지를 때리는 강력한 충격에 다리가 꺾이며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허벅지에는 한 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일화의 어깨에도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런데 꽂혀 있는 화살은 단 한 발뿐이었다.

‘설마!’

일화는 섬뜩한 마음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일화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졌다.

“시, 신녀님!”

흔들리는 일화의 눈에 진철을 끌어안고 있는 북궁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일화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북궁아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등에 하나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아…….”

진철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벙긋거리고 있었다. 그런 진철의 얼굴을 북궁아가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느껴지는 힘이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북궁아는 안간힘을 쓰며 일그러지는 얼굴에 미소를 그려 넣었다.

푹!

“컥!”

그때 북궁아의 몸이 한 번 더 들썩였다.

진철은 배 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에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런 그의 시야에 북궁아의 배를 뚫고 자신의 배에 박힌 한 자루의 검이 들어왔다.

턱!

진철의 얼굴을 북궁아가 들어 올렸다. 진철은 그녀의 손길에 힘없이 고개가 올라갔다. 그러자 북궁아가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힘에 겨운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진철은 북궁아를 안은 손으로 그녀의 등을 더듬었다. 그러다 차가운 검과 함께 삐쭉 튀어나온 화살이 손에 잡히자 그것을 힘껏 움켜쥐었다.

“크읏!”

진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검을 쥔 그의 손은 검날이 파고들어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아플 거야. 참아!”

팍! 쨍그랑!

단숨에 검을 뽑은 진철은 검을 그대로 놓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남아 있는 화살의 활대를 부러트렸다. 그 고통 때문인지 북궁아의 몸이 다시 들썩였다.

진철은 쓰러지는 북궁아의 신형을 받아 들었다. 그런 북궁아의 손이 천천히 진철을 향해 올라왔다. 그러다 힘이 다했는지 그녀의 손이 다시 내려갔다. 진철은 그녀의 손을 재빨리 움켜쥐었다.

“저, 정신 차려.”

진철의 목소리가 떨리며 흘러나왔다. 그런 진철의 시야에 점점 눈을 감는 북궁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정신 차리라고!”

진철은 저도 모르게 북궁아를 안은 팔을 흔들었다. 하지만 곧 화들짝 놀라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 진철의 행동에 눈을 감는 북궁아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 잡았다.

털썩!

북궁아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고개도 뒤로 젖혀져 축 늘어졌다. 그때 진철의 눈이 반짝였다.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흥! 그러게 애초에 말을 들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냐?”

낯선 목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마곡에서 헤어졌던 한도군과 칠무회의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에 등장에도 진철은 여전히 북궁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털썩!

진철은 천천히 북궁아의 몸을 바닥에 눕혔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차, 차가워…….”

진철의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갑자기 등장한 칠무회의 무사들을 경계하던 일화와 월화가 빠르게 북궁아에게 다가갔다.

일화는 바로 북궁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차갑게 식어 가는 북궁아의 체온이 느껴졌다. 일화는 다시 손을 뻗어 북궁아의 맥을 짚었다.

두근!

‘뛴다! 하지만 약해지고 있어!’

일화는 점점 약해지는 북궁아의 맥박을 느끼며 막막해지는 것을 느꼈다.

“쯔쯔, 죽었나 보군. 하긴 뭐, 어차피 죽여 살인멸구를 해야 했으니까 상관없나?”

한도군이 빈정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진철의 고개가 돌아갔다.

‘흡!’

한도군은 얼굴을 굳히며 발걸음을 멈췄다. 초점을 잃은 듯 공허한 눈빛의 그를 본 순간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온몸을 덮친 것이다.

꾹!

진철은 바닥에 떨어진 자하신검을 집어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일화를 바라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이곳을… 벗어나.”

“뭐? 이 새끼야!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냐! 애초에…….”

“어서 꺼지라고!”

“…….”

진철이 자신의 말을 끊으며 외치자 일화는 어이가 없는지 검을 뽑아 들었다.

“이 개새끼야! 너 때문에 지금 신녀님이!”

일화가 진철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달려들려고 하자 월화가 다급하게 그를 막아섰다.

짝!

“정신 차리십쇼! 지금은 신녀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월화가 일화의 뺨을 후려쳤다. 일화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느낌에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곧장 북궁아를 향해 몸을 돌린 다음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개새끼. 기억하고 있어라. 여기서 죽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갈 것이란 것을!”

“…….”

일화는 진철을 향해 입을 열고는 곧장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순간 칠무회의 무사들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자신들이 진철을 습격했다는 소문이 나면 안 되기에 살인멸구를 할 생각인 것이다.

월화는 이를 악물며 그대로 돌파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 올렸다.

슈학!

그때 월화와 일화를 지나친 자색의 강기가 칠무회 무사들에게 작렬했다.

콰쾅!

“끄아악!”

칠무회 무사들은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느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월화가 고개를 돌려 진철을 바라보았다. 진철은 허리를 굽히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얼굴을 구긴 월화는 곧장 다리에 더욱 힘을 가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빌어먹을! 그걸 놓치다니!”

한편 빠르게 멀어져 가는 북궁아와 그 호위 무사들을 바라보던 한도군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추격대를 꾸려 그들을 따라가게 하였다. 하지만 그 순간 진철이 검을 끌며 길을 가로막았다.

“내 뒤로는 한 놈도 못 간다.”

“개 같은 소리! 닭 목 비틀 힘도 없는 주제에!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

한도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의 말에 따라 칠무회 무사들이 진철을 빠르게 지나쳐 갔다.

파팟!

허공에 자색의 선이 수십 개가 그어졌다.

“마, 맙소사…….”

“어떻게?”

진철을 지나가던 무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진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들의 몸이 토막 나며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내렸다.

“우웩!”

진철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진철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 진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닭 목을 비틀 힘도 없다고? 그럼 보여 주도록 하지. 너희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닭 목 비틀 힘을.”

진철이 천천히 자하신검을 앞으로 세웠다. 검끝이 바닥을 향하고 검병이 위를 향한 상태였다.

진철은 혈마신에게 당한 상처 때문에 잘 움직이지도 않는 왼손으로 검집을 잡았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검병과 검집을 묶은 천의 매듭을 풀었다.

“잘 보고 똑똑히 기억하라! 네놈들이 얼마나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는지!”

무명천이 바닥에 떨어지자 진철은 검병을 잡아 가며 소리쳤다. 그런 진철이 검병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자하신검이 검집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거대한 돌풍과 함께 자색의 빛이 진철의 몸을 삼켰다.

***

“괜찮으십니까, 아씨?”

“흐, 흐흑!”

한정은 안선영의 어깨를 부축했다. 그녀의 떨림이 손을 타고 한정에게 전해져 왔다.

한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가문이 불타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찮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한정은 바보 같은 질문을 한 자신을 탓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힘내시죠. 저희 호가장이 아가씨께 힘이 되어 드릴 겁니다.”

안선영은 한정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참, 마령환은 잘 가지고 계십니까?”

그때 생각났다는 듯 한정이 묻자 안선영은 닭똥 같은 눈물을 훔치며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꺼내자 그녀의 손바닥에 묵광을 뿜어내는 작은 반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마령환, 호가장주께서 주신 무림의 기보. 이것만 있으면… 어?’

그 순간 안선영이 벌게진 눈으로 한정을 바라보았다. 한정은 그녀의 반응에 의문을 품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마령환을… 제가 지니고 있다는 것은 호가장주님만 알고 계세요. 그런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그리고 제 기억에는 분명 절 호위했던 사람 중에 살아난 사람은 저와 시녀뿐이었어요. 모든 무사분들이 죽임을 당하셨죠.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호위대의 생존자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안선영의 말에 살짝 경직된 한정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때 경황이 없으셔서 잘 기억이 안 나시는 듯한데. 아씨께서 명을 내리셨잖습니까? 습격당한 사실을 본 장에 알리라고…….”

안선영은 살짝 한정의 손을 어깨에서 떨어트리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저도 모르게 물러난 발걸음이었다. 한정은 그런 안선영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안선영이 마령환을 쥔 손을 가슴에 품으며 입을 열었다. 한정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량하게 맑은 밤하늘에 주변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런 말을 아시겠지요. ‘자신의 분에 넘치는 물건은 화를 부른다.’ 정말 딱 떨어지는 말이 아닙니까?”

“당신…….”

“뭐, 어차피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 죽어 나가는 무림입니다. 그런 무림에서 아녀자 한 명이 죽는다 하더라도 관심 갖는 이는 없겠죠.”

한정은 고개를 내려 안선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한정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전 마궁에서 왔습니다.”

“마… 궁!”

“아시나 보군요?”

한정의 말에 안선영의 신형이 잘게 떨렸다. 모를 리가 없었다. 방금 전 진철이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킨 곳이 바로 마궁이라고!

안선영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한정을 노려보았다.

“우리에게… 우리에게 대체 무슨 원한이 있어서!”

안선영의 입에서 한이 서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런 걸로 눈 깜짝할 한정이 아니었다.

한정은 어깨를 으쓱이며 안선영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녀가 가슴에 모으고 있는 손을.

“당신이 들고 있는 그 물건 때문입니다. 그건 아무나 지니고 있을 물건이 아니니까요.”

“고작 이따위 반지 하나에!”

“마령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당신에게는 단순한 반지일지는 모르겠으나, 본 궁에서는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입니다. 자, 그럼 그만 마령환을 넘겨주시겠습니까?”

안선영은 뒤로 물러섰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런데 마령환마저 빼앗길 순 없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유일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킨 그들에게 순순히 넘겨주기도 싫었다.

“그냥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진 소협이 그동안 고생한 걸 봐서 웬만하면 그냥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아, 악마!”

한정이 손을 벌리자 안선영이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한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안녕히 가시죠.”

“……!”

말을 끝낸 한정이 바닥을 찼다. 그와 동시에 안선영의 눈동자에 하얀 섬광이 들이닥쳤다.

퍽!

***

수많은 사건 사고가 하루에도 번번이 일어나는 중원에 큰 사건이 생겨났다. 맑고 푸른 하늘로 수많은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그런 전서구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건물이 있었으니 십여 장 높이의 커다란 건물이었다.

바로 정파 무림의 연합체인 무림맹이었다.

무림맹의 군사인 연효연은 고작 약관의 나이에 인정을 받았을 만큼 뛰어난 두뇌를 지닌 지력가였다.

그녀의 앞에는 커다란 원탁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원탁을 둘러싸고 수많은 중년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모두 무림맹의 장로직을 맡고 있는 정파의 우두머리들이었다.

“지금까지의 무림은 폭풍전야의 시기라 할 정도로 조용하고 고요했습니다. 이는 모두 무림의 평온을 위해 여러분들께서 힘써 주신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연효연은 앞에 놓인 양피지를 한 장 집어 들고는 좌중을 훑었다.

“하지만 지금 그 평온을 깨려 하는 자들이 무림에 등장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께서도 익히 알고 있는 사도의 무리들입니다.”

연효연은 양피지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현재 사도의 우두머리인 사마련에서는 비밀스럽게 각지로 퍼져 있는 사파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력부대인 흑혈대가 섬서 외곽에서 대기 중이라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양피지에서 눈을 뗀 연효연이 고개를 들었다.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새외의 세력인 남림이 운남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이미 운남의 반이 남림에게 넘어간 상태라고 합니다.”

“뭣? 남림이!”

“대체 무슨 이유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중년인들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었지만 처음 듣는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에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린 연효연은 옆에 놓여 있는 작은 나무망치를 들어 내려쳤다.

탕탕!

“모두 조용히 하십시오.”

연효연의 말에 흥분하던 중년인들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에 맹주님께서 정천대를 소집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에 대해 혹시 하실 말씀이나 내놓으실 의견이 있으십니까?”

연효연의 말에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심정도 같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천대라면 믿을 만했다. 대원 모두가 각 문파의 대주급은 되는 무공을 지니고 있고 대주는 대문파 장로급의 무공 수위를 지녔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력 역시 높아 많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정예 중의 정예였다.

“그럼 모두 동의하시는 걸로 알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혹시 신룡이라는 후기지수를 아십니까?”

연효연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있었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눈을 빛내며 연효연의 말에 집중했다. 뭐니 뭐니 해도 그는 호가장에서 무림 공적인 마혈도를 처리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 신룡이라는 자가 화산파 출신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화산파?”

장로들에게서 놀람이 피어났다. 연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화산파는 정파 무림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는 문파입니다. 비록 오래전에 멸문을 당했다고는 하나 그 명성은 아직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우리 연배만 해도 화산파의 위용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

하얀 턱수염을 쓰다듬던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도우였다.

연효연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신룡의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라는 맹주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문영추 장로님께 맡기고 싶은데 장로님께서는 수락하시겠습니까?”

연효연의 시선이 문영추를 향했다. 말랐지만 굳건하게 뻗은 눈썹과 야무지게 닫힌 입술이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주는 이였다. 그런 그가 입고 있는 자색의 무복에는 금실로 매화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없소. 오히려 본인이 부탁하고 싶을 정도라오.”

문영추의 입이 열리자 연효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문영추의 매화문이 바로 화산파의 진전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시다면 이 일은 문영추 장로님께 맡기겠습니다. 문영추 장로님께서는 신룡의 신병을 확보! 그의 정체를 밝힌 후 맹으로 데려오시면 될 것입니다.”

“알겠소.”

연효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문영추의 말에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이것으로 되었나요?”

회의를 끝내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연효연이 문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로 하나의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소. 연 군사께서 큰 도움을 주셨소.”

“글쎄요.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군요.”

“말씀하시오.”

연효연이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앞에는 한 중년인이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바로 칠무회의 회주인 천무제 담덕이었다.

“칠무회 정도 되는 단체라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 않나요? 그런데 어째서 제게 부탁한 건가요?

“그거라면 연 군사께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만?”

“무엇을 말인가요?”

“…….”

담덕은 연효연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반문하자 눈을 빛냈다.

‘여우같은 년!’

“연 군사께서도 알다시피 우리 칠무회는 무림의 평온과 안녕을 위해 여러모로 힘을 쓰고 있는 실정이라오. 거기에 남림이 중원을 침범하면서 오히려 손이 부족할 정도라오. 그러니 무림맹에 부탁하는 수밖에.”

“아하… 그러시군요.”

연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담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가 보겠소. 좋은 소식 기다리겠소.”

“그러세요. 배웅은 않겠어요.”

담덕은 고개를 돌려 연효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연효연은 그 미소를 본 순간 가식적인 미소라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담덕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비록 천무제가 정파의 인물이라고는 하나 무림맹에 적을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친히 무림맹에 몰래 나타나 군사인 내게 부탁을 한다? 신룡… 당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지?’

눈을 반짝인 연효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

“흐아아…….”

입김을 내뱉은 진철의 신형에서 위험한 기세가 풍겨져 나왔다. 결코 지금까지 반시체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뽑힌 자하신검이 반짝이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진철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 모습을 본 칠무회 무사들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진철의 눈의 흰자와 눈동자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크크큭.”

갑자기 진철의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신형에서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그 모습에 한도군은 마른침을 삼켰다.

‘저게 대체!’

한도군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흔들렸다. 타오르는 자색의 불길 한가운데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존재.

바로 자하마인(紫霞魔人)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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