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청풍장의 바보
청풍장은 무림의 수많은 중소 문파 중 하나였다. 어느 세력에 속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하던 청풍장은 섬서와 하남의 경계인 상남(商南)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청풍장의 근처에는 무림맹을 지탱하는 거대 문파 중 하나인 매화문이 자리해 있었다.
“아버지, 벌써 이 년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웅크리고만 계실 겁니까?”
“…….”
“아버지! 더 이상 버티다간 매화문에게 무너지게 됩니다!”
청풍장의 장주 장시우는 아들의 말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훈아, 넌 어찌하면 좋겠느냐?”
“뭘 어찌한단 말입니까? 정파 측에 서서 저 사도 무리를 모두 쓸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훈이 당연하다는 듯이 주먹을 쥐며 말하자 장시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훗날 청풍장을 이끌어 갈 장자이건만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청풍장이 정파 측에서 사마련과 남림을 공격한다면 정파 지역에 자리 잡은 청풍장은 그 입지가 더욱 굳건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청풍장이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별다른 힘이 없는 청풍장은 정파에게 방패막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매화문은 이 무림의 수많은 문파 중 하나에 불과하단다. 그런데 고작 그런 매화문이 두려워 고개를 숙인다면서 어떻게 사도를 처단한다는 것이냐?”
“아, 아버지!”
장훈은 누가 들을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장시우를 불렀다. 그 모습에 장시우는 혀를 찼다.
“쯔쯧! 다신 매화문 이야기는 꺼내지 말거라! 그저 조용히 있는 것이 우리 청풍장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이냐! 아무 말도 듣기 싫다. 물러가거라!”
“아버지!”
“어허! 물러가래도!”
장시우가 목소리를 높이자 장훈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장시우는 그런 장훈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방에서 나온 장훈은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향했다. 그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난세에 무림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청풍장은 이대로 역사의 속으로 사라질 것이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야. 그게 아니고 이렇게 하는 거란 말이야.”
그때 미성의 목소리가 장훈의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여인과 사내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순간 장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단정하게 땋은 그녀는 바로 자신의 동생인 장은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약 이 년 전에 청풍장에 실려 온 야인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이 년 전에 무림에 나갔던 장시우가 정신을 잃은 그를 데려왔었다. 그 후로 며칠 뒤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이름도 몰랐고, 심지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은영아! 더럽게 바닥에서 뭘 하는 것이냐!”
“오, 오라버니?”
장은영은 진흙덩이를 만지다 장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장훈은 장은영을 내려다보다 못마땅한 듯 입을 열었다.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청풍장의 딸이라면 그에 맞는 기품을 갖춰야 한다고!”
“…….”
장훈의 호통에 장은영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못했다.
장훈은 시선을 돌려 야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장훈의 등장에 바보처럼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진흙을 들어 올렸다. 분명 같이 놀자는 뜻이리라. 하지만 그의 행동에 장훈의 표정은 펴질 줄 모르고 더욱 굳어졌다.
‘진흙놀이라니! 지금 내가 진흙이나 가지고 놀 때인 줄 아나, 이 바보는!’
장시우에게 꾸지람을 들어 한껏 짜증이 나 있던 장훈은 손을 뻗어 야인의 손을 쳐 버렸다. 그러자 진흙이 허공을 비산하며 땅바닥에 퍼졌다.
“오라버니!”
장훈이 손을 떨치자 장은영이 외쳤다. 사내에게 해를 가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정신 차리거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곧 시집갈 나이가 아니더냐!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굴 테냐?”
장훈의 외침에 장은영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잘게 떨었다.
‘빌어먹을!’
장훈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괜히 동생에게 화풀이한 자신이 최악으로 느껴졌다. 동생의 마음은 자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착하고 여린 동생이었다. 동생 딴에는 저 바보를 측은하게 여겨 가만히 둘 수 없었으리라.
입술을 깨문 장훈은 불편한 얼굴로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가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만하고 들어가거라! 혹여나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본다면 어찌 생각하시겠느냐.”
“…예, 오라버니…….”
장은영이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걸어가던 장훈이 멈칫했다. 목소리에 어린 물기를 느낀 탓이다. 하지만 곧 다시 걸음을 옮겨 장원을 빠져나갔다.
“우?”
거친 수염과 기름진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가려진 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장은영에게 다가갔다.
장은영은 야인이 다가오자 옷깃으로 눈가를 닦으며 웃었다.
“난 괜찮아.”
“우우?”
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장은영은 다시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아. 혹시 걱정하는 거니?”
“아우?”
“헤헷, 고마워! 하지만 오라버니도 나쁜 마음이 있으셔서 저러는 게 아닐 거야. 무슨 일인가 있으신 거겠지.”
장은영은 야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기름진 머리카락이라 더러울 법도 했지만 그녀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야인은 그녀의 손길이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그것을 즐겼다.
“후우…….”
몰래 밖을 내다보던 장시우는 자신의 딸과 야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야인을 청풍장으로 데려온 지 벌써 이 년이 다 되어 간다. 하지만 저자는 기억을 찾기는커녕 정상적인 생활도 불가능해 보였다. 수많은 의원들에게 보여 줘도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그래도 처음에 데려왔을 때보단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그땐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심지어 사지의 근육조차도 끊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 근육들이 서서히 붙더니 이젠 멀쩡히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그런 회복력으로 언젠가 그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여 지금까지도 그를 돌봐 주고 있었다.
무림은 지금 혼돈 그 자체였다. 중원 각지에서는 비명이 터지고 피가 강을 이뤘다. 정사지간의 전쟁을 넘어서 새외 세력마저 중원에 몰려든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풍장같이 작은 문파의 생존법은 그냥 가만히 쥐 죽은 듯 있는 것뿐이었다.
장시우는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책상 밑 부분을 만졌다.
딸깍.
소리가 들린 후 장시우의 손안에는 자색의 검집에 꽂힌 아름다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데려올 때 같이 주워 온 검이었다.
그의 것으로 추측되는 이 검은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보검이었다. 특히나 검에 새겨진 문자들은 고풍스러운 느낌마저 들게 했다. 즉, 어떤 무인이나 탐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검이었던 것이다.
장시우도 그 검을 처음 봤을 땐 그 야인을 죽이고 검을 차지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즉시 마음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귀한 검을 지녔다는 것은 그의 신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지금 청풍장에 작은 원한 관계라도 생긴다면 즉시 멸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부디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길…….’
장시우는 무림을 강타한 폭풍 속에서 청풍장이 무사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
“장시촌에도 없었습니다. 헛소문이었나 봅니다.”
“빌어먹을!”
수하의 말에 매화문주 문영추는 탁상을 쿵! 내려쳤다. 벌써 신룡을 찾아다닌 지 이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어느 순간 행방불명된 그를 여태 못 찾고 있었다.
화산파의 진전을 이은 매화문이었기에 그를 찾고, 그가 정말 화산파의 후예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만약 맞는다면 어떻게든 그를 매화문에 소속시켜 데리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매화문에 정당성이 생겨 정파에서의 입지가 더욱 커질 것이다. 문영추로서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꼭 찾아야 한다. 만약 그가 장문인의 신물인 자하신검을 지니고 있다면 더더욱! 그래야만 우리가 섬서로 입성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이 생긴다. 중원의 중심인 섬서에!”
나지막하게 입을 여는 문영추의 눈이 번뜩였다.
사람들은 매화문이 화산파의 생존자들로 이뤄진 문파로 알고 있다지만 실상은 달랐다. 단순히 화산파에서 도망 온 자신의 선조가 만든 문파였기 때문이다. 무인으로서는 치욕적인 불명예였다. 그렇기에 선조와 매화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섬서에 입성해 화산파를 재건하여 불명예를 씻어야 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지금 섬서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지역입니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남림과 위에서 내려오는 사파 놈들이 섬서를 향해 진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 섬서는 우리의 땅이다!”
“…….”
“어떻게 해서든 꼭 그를 찾아내어라. 그리고 내 앞으로 데리고 와! 설령 시체라도 말이다.”
“존명!”
***
다시 날이 밝자 청풍장의 하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각자의 거처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매일 하는 자신의 일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으로 흩어졌고, 아낙들은 식사와 빨래를 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 사이에는 거친 머리로 얼굴을 가린 야인도 함께 있었다.
“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 야인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년 전, 야인이 처음 청풍장에 왔을 때는 하인들과 이런저런 충돌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가 어디를 가든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막지 말라는 장주의 명도 있었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고 처음에는 안 좋게만 보이던 그가 어느새 측은하게 비쳐졌기 때문이다.
홀로 장원을 돌아다니던 야인은 장은영의 처소로 향했다. 그녀의 처소로 가면 항상 그녀가 방문을 열고 맛있는 당과를 주며 맞이했다. 그리고 함께 놀아 주기도 했다. 야인은 그런 그녀의 친절이 좋았고, 무엇보다 맛있는 당과가 좋았다.
“우?”
장은영의 처소에 멈춰 선 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미리 방문을 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든지 마루에 나와 자신을 반겨야 했을 그녀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마루에 놓여 있던 당과 역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야인은 계속 옹알거리며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결국엔 찾을 수 없었는지 마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앗! 이놈이! 거기서 뭣하는 게냐! 경을 치르기 전에 어서 썩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그때 주변을 지나가던 한 하인이 세월에 주름진 주름을 더욱 구기며 야인에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마루에 올라서려던 야인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먼! 야, 이놈아! 장 어르신께서 무슨 생각으로 널 편애하시는진 잘 모르겠다만, 네가 그곳에 가는 순간 아무리 장 어르신이라도 참지 않으실 것이야!”
하인의 말에 야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소에 자신에게 주먹밥까지 싸 줄 정도로 잘해 주던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니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쯔쯧! 아무리 바보라지만 아씨의 처소에 들려고 하다니. 다행히 내가 먼저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장의 무사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간 오늘 시체 하나 치울 뻔했네.”
혀를 찬 하인은 다시 한 번 야인에게 절대 장은영의 처소에 발을 디디지 말라고 야단치고는 자신의 갈 길을 향해 재빨리 발을 놀렸다. 그라고 하더라도 장은영의 처소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것을 본다면 괜한 의심만 살 터. 그만큼 청풍장주의 딸 사랑은 딸을 지닌 그 어떤 아버지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우우…….”
입을 삐죽 내밀고 소리를 낸 야인은 버릇처럼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머리를 긁고, 축 처진 어깨를 이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장은영의 처소를 벗어난 야인은 터벅거리며 장원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작지만 적잖은 나무가 곳곳에 심어져 있고, 중앙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청풍장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많은 멸시를 받았다. 그때 유일하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 정원이었다. 평소엔 관리인 외에 아무도 오지 않기에 야인은 혼자 있을 수 있었다.
“우…….”
야인은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운지 거칠게 머리를 긁고는 연못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연못에 얼굴이 비쳤다. 야인은 자신도 모르게 연못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표면에 야인의 손이 닿자 파문이 일어났다. 야인은 깜짝 놀라며 재빨리 손을 거뒀다. 그런 야인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늦었네?”
문득 야인의 뒤에서 가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인은 또다시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장은영이 단아한 표정으로 야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보.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매일매일 오던 곳이잖아?”
장은영은 표정과 다르게 토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는 야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장은영은 연못을 내려다보며 물결치는 표면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에…….”
일각여의 시간이 지나 다시 입을 연 장은영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묻어 나왔다.
“아버지께서 그러시더라? 이제 슬슬 시집갈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
장은영은 손을 뻗어 연못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모습이 지워지며 연못이 작게 물결쳤다.
“아버지나 오라버니는 이 청풍장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실 분들이셔. 그분들의 마음을 나는 존경해. 그래서 난 언제나 그분들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
연못에서 손을 뗀 장은영은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도구가 되고 싶지는 않아. 모두에게 사랑 받는 착한 장은영이 아니라 미움 받는 장은영이 되더라도 미래만큼은 내가 정하고 싶어. 그런 나의 마음을 넌 알겠니?”
“우우?”
야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장은영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야인은 그녀의 미소가 참으로 슬프다고 생각했다.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미소이건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네가 우리 집에 처음 올 때를 기억해?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넌 침상에 누워 몇 날 며칠을 누워 있었어.”
야인의 얼굴을 쓰다듬는 장은영은 추억을 떠올리는 노파처럼 말을 내뱉었다. 야인은 기분이 좋은 듯 눈을 감고 고양이처럼 그녀의 손길을 느꼈다.
“마치 꿈에도 기다리던 공자님처럼 넌 신비로움 그 자체였어. 그런데 누가 알았겠어? 깨어나 보니 이렇게 바보일 줄…….”
야인은 장은영의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소까지 지었다.
“있잖아… 혹시 네가 다 나아서 괜찮아지면 날 여기서 데리고 나가 줄 수 있니?”
“우?”
야인이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장은영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나도 참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헤헷.”
그녀는 자신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는 혀를 삐쭉 내밀었다. 그러고는 등 뒤로 손을 돌렸다.
“짠! 이거 먹고 싶었지?”
다시 돌아온 장은영의 손에는 작은 접시에 두 개의 당과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야인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자, 어서 먹어.”
장은영이 한 개를 집어 야인의 손에 쥐여 주자 야인은 주저 없이 입속으로 당과를 집어넣었다.
똑똑!
“아버지, 장훈입니다.”
자신을 찾는다는 연락에 장시우를 찾은 장훈은 집무실 앞에서 문을 두들기고는 답변을 기다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버지?”
장훈은 다시 문을 두들기며 장시우를 불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장훈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집무실 문을 슬쩍 열었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집무실의 풍경이 장훈의 시야에 들어왔다.
장훈은 천천히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집무실 안은 언제나 보아 온 모습 그대로였다.
“응?”
장훈은 벽에 자리 잡은 책꽂이로 향하다 탁자에 놓여 있는 어떠한 물건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탁자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자색의 검이 놓여 있었다.
“이건…….”
장훈은 검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그 검을 잡아 갔다. 그런데…
“흡!”
텅!
검을 쥐는 순간 장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검에서 손을 떼었다. 갑자기 오한이 돋아 온몸의 털이 곤두선 탓이었다.
벌컥!
“와 있었… 아니 뭣하는 게냐!”
“아, 아버지!”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장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장훈은 당혹스러워했다. 장시우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보고는 장훈에게 소리쳤다.
“네놈이 언제 다른 이들의 물건에 손을 대는 법을 배웠단 말이냐!”
“아버지, 그게 아니라.”
“이놈이! 잘못했으면 용서를 빌어야지 핑계를 대는 것이냐!”
“…….”
장시우의 호통에 장훈은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쥐었다. 억울했던 탓이다. 단지 자신은 호기심에 그 검을 만졌을 뿐이건만.
“호기심이라 하더라도 결코 타인의 물건에 손을 대는 법이 아니다!”
장시우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말하자 장훈은 몸을 움찍거렸다. 그 모습에 장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변명을 할 셈이냐?”
“아닙니다.”
장훈은 고개를 젓고는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장훈의 사과에 장시우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고는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책상에 다가가 앉은 후 비밀 서랍을 열어 그곳에 검을 집어넣었다.
“한데 아버지, 그 검은…….”
“묻지도, 알려고 하지도 말거라. 그리고 잊거라.”
“…예.”
장시우의 날카로운 시선에 장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장시우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탁자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그곳에 앉거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예.”
장훈이 의자에 앉자 장시우가 손으로 턱을 괴며 입을 열었다.
“어제 매화문에서 손님이 다녀간 것을 알고 있느냐?”
“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장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손님이 왔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고, 거기에 매화문에서 청풍장에 사람을 보내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풍장에 비하면 하나도 부족할 것이 없는 매화문이었다.
“매화문의 둘째 공자가 은영이를 마음에 두고 있다더구나.”
“아!”
“이 청풍장은 장차 네가 이끌어 나가야 할 터이니, 너의 의견도 한번 들어 보고 싶구나. 또한 넌 그와 평소에 잘 어울려 다니지 않더냐?”
장시우의 말에 장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문의 둘째 공자인 문수강은 이 지역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잘생긴 외모에 무림맹에 가입한 가문의 위명을 등에 업은 그는 말 그대로 일등 신랑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은영이 그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가문의 힘이 달리기는 하지만 동생의 외모와 심성은 그 누구와도 견줄 만했다.
“네 생각은 어떻더냐?”
장시우가 되묻자 장훈은 문수강과 자신의 동생을 저울질했다. 그리고 생각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그라면 괜찮습니다. 그는 누구나 원하는 사윗감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과거 화산파의 무위를 이은 매화문이 사돈이라면 저희 집안에 득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진 않을 것입니다.”
“그래? 그럼 그의 소문에 대한 것은 무엇이더냐?”
“그건…….”
장훈의 말문이 막혔다. 문수강에 대한 소문은 자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그의 명성에 흠이 갈 정도로 악랄했다.
“사람이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를 사위로 삼으로써의 얻는 이득은 그런 흠을 무시하고도 남음이 아닙니까?”
“하긴, 그를 사위로 삼으면 매화문의 위명을 등에 업고 우리 청풍장이 더욱 성장할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장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괸 손을 내려놓았다.
“매화문에 가서 전하거라. 아직 은영이를 시집보낼 생각이 없다고.”
“예? 아버지!”
“왜 그러느냐?”
장훈이 깜짝 놀라 외쳤지만 장시우는 오히려 무슨 일이냐는 듯 반문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에 오히려 장훈이 당황해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에 장시우가 실소를 흘렸다.
“왜? 은영이를 시집보낼 줄 알았더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당연하다라……. 어째서 당연한 것이냐?”
“그 누구나 꿈꾸는 신랑감입니다. 은영이도 분명 그에게 시집간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집안도 더욱 강해질 것이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은영이가 그랬더냐? 그가 좋다고?”
“그건…….”
장시우의 말에 장훈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분명 은영이 역시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구나. 가서 전하거라.”
“아버지!”
“시끄럽다! 더 이상은 할 얘기가 없다 하지 않느냐!”
“…….”
장시우가 소리치자 장훈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장시우는 그런 그의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뱉고는 의자에 몸을 맡긴 채 고개를 뒤로 넘겼다.
***
매화문의 둘째 공자인 문수강은 매화문 뒤뜰에 있는 정자에 서서 주변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풍경이라 무덤덤할 법도 하지만 그는 신기하다는 듯 미소까지 지으며 서 있었다.
“공자님.”
“음? 아, 백화대주가 아니십니까?”
문수강이 뒤를 돌아보자 백색 무복에 매화가 그려진 한 청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화문의 다섯 대주 중 하나인 백화대주 영랑형이었다.
“공자님, 공자님께서 청풍장의 장 소저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하! 거참, 소식이 빠르군요. 일단 어느 정도 성사가 되면 밝히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갑자기 왜 혼인을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왜 하필 청풍장입니까? 공자님이시라면 훨씬 대단한 가문의 여자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영랑형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수강이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고, 그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풍장의 장은영이 비록 미인에 고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지닌 힘은 무림에서 살아가기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녀와의 혼인은 문수강의 발목만 잡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아시잖습니까? 이 지역에 퍼진 장 소저의 소문을…….”
“예, 저 역시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하, 그럼 됐잖습니까? 보시죠.”
문수강은 웃음을 흘리며 영랑형에게 자신을 바라보라는 듯 팔을 벌렸다.
“대매화문의 공자가 여자 한둘을 가진다 해서 세상에 욕할 사람은 없지요. 영웅은 삼처사첩이 기본이라 하지 않습니까? 단지 얼마나 아름답기에 그런 소문이 도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궁금증 때문에 청혼을 했다는 겁니까?”
“예. 뭐가 잘못됐습니까?”
문수강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영랑형은 왠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무리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자식이라지만 문주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뭐, 그녀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쉬울 것은 없습니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으니까요. 하하하!”
이제는 장은영을 물건 취급하자 영랑형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자!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자하신검을 찾는 일은.”
“각 대주들이 중원 각지를 찾아다니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정보는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간혹 들어오는 정보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 거짓 정보입니다.”
“하긴, 자하신검이라면 우리 매화문의 근본인 화산파의 신물이 아닙니까? 그런 검에 대해서라면 확실한 정보라도 거짓 정보를 흘리겠지요.”
문수강은 품 안에서 곱게 접혀 있는 종이를 하나 꺼내 들었다. 바로 자하신검이 그려져 있는 종이였다.
“이 그림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참 볼 때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제가 비록 보는 눈은 없지만 저 역시 아름다운 검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자님!”
그때 정자에 두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화문의 무사와 장훈이었다. 장훈을 안내한 무사는 문수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를 취한 후 곧바로 되돌아갔다. 문수강은 팔을 벌리며 장훈을 반겼다.
“오! 이거 청풍장의 소장주께서 오셨구려. 오랜만이오.”
“예,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 장 형의 걱정 덕에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소.”
문수강이 장훈의 인사를 농담으로 받아쳤고, 장훈 역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웬일이오?”
“그게……. 그런데 그건 무엇입니까?”
머뭇거리던 장훈은 문수강의 손에 들린 양피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이것 말이오?”
문수강은 양피지를 장훈에게 건네주었다. 장훈은 양피지를 받아 들고는 조심스레 폈다. 잠시 후, 그곳에 그려진 자하신검을 본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이것은!”
“하하! 역시 장 형도 놀라는구려. 어떻소? 참으로 아름다운 검이지 않소?”
“에? 아, 예……. 그런데 이 검은 대체…….”
“우리 매화문에서 찾고 있는 검이라오.”
“공자님!”
문수강이 스스럼없이 말하자 영랑형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문수강은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자하신검을 찾고 있다는 건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인데.”
“…….”
문수강은 장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헌에 나와 있는 대로 그려 넣은 것이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맞을 것이오. 참! 장 형도 혹시나 이런 검을 보게 된다면 꼭 우리 매화문에 알려 주시길 바라오. 벌써 몇 년이 다 되도록 찾고 있지만 아직 흔적도 찾지 못했소. 그리고 만약에 장 형이 직접 본 문에 이 검을 전해 준다면 장 형은 금 일만 냥을 얻게 될 것이오.”
“마, 만 냥! 아, 알겠소. 꼭 그리하리다.”
장훈이 거대한 액수에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문수강은 만족스러운 듯 장훈에게서 다시 양피지를 받아 들고는 손을 소리 나게 턴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웬일로 오신 거요? 아! 혹시 장 형도 소식을 들은 것이오?”
“에?”
“하하! 왜 발뺌을 하실까. 내가 장 소저께 청혼한 소식 말이오.”
“아, 그렇소. 문 형께서 갑자기 제 동생에게 청혼하시다니… 깜짝 놀랐소. 무슨 계기라도 있었소?”
“남녀 사이에 무슨 계기가 필요하오? 정이 통하고 마음이 맞으면 되는 것 아니겠소? 아! 물론 정말로 정을 통했다는 것은 아니오. 실제로는 한 번도 장 소저를 뵌 적이 없으니. 하하하!”
굳어지는 장훈의 표정을 본 문수강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어깨를 잡아 갔다.
“자! 그럼 다른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시죠. 손님이 오셨는데 이렇게 밖에서만 떠드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겠소?”
문수강이 이끌자 장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정자에서 벗어났다. 그런 장훈의 머릿속에는 장시우의 집무실에서 본 자색의 검과 여러 가지의 생각들이 함께 떠오르고 있었다.
***
밤이 되자 세상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청풍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초를 서는 무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에 빠져들어 청풍장 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후…….”
그렇게 건물에 모두 불이 꺼진 야심한 밤, 장주의 집무실에서는 아직도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장시우는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년 전 혈천대전이 발발한 이후 무림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 전쟁 속에 중원은 반으로 갈라진 상태였고, 섬서와 사천을 경계로 무림맹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사마련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 틈에서 죽어 나는 건 청풍장 같은 중소 문파나 중립 문파뿐이었다.
청풍장 역시 각자의 세력에 들어오라는 압박 아닌 압박을 받아 오고 있었다. 사마련 측에서는 정파 지역에 있는 청풍장이 들어오게 되면 전진기지의 거점을 얻을 테고, 정파에서는 방어선이 더욱 단단하게 될 것이었다.
“후…….”
장시우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책상에 놓여 있는 호롱불의 불을 끄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스윽!
어두컴컴한 복도 한구석에서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림자는 주변을 살피더니 집무실 앞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는지를 확인한 후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인영은 천천히 주변을 훑으며 장시우가 앉아 있던 책상을 향해 다가갔다.
“분명…….”
인영이 의자에 앉아 손을 내려 책상 밑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집히지 않자 마음이 급해지는지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딸깍!
그때 그의 손가락에 무언가가 걸리며 거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낸 인영은 책상 밑에 나타난 공간에 주저 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흡!”
텅!
인영이 숨을 들이켜며 재빨리 손을 빼내자 무언가가 그의 손과 함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꿀꺽!”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여 그것을 본 인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손이 닿는 순간 온몸에 엄습하는 오한 때문이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던가?’
마치 자신을 언제든지 난도질할 것 같은 예기가 검집 속에 들어가 있음에도 느껴지는 듯했다.
인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 갔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밝히려는 듯 자하신검에서는 옅은 자색이 흘러나왔다.
덥석!
“윽!”
검을 집는 순간 인영은 다시 오한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검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손으로 책상 밑을 원래대로 돌려놓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것만 있으면…….”
창가로 스며들어 오는 달빛에 비춰진 인영, 장훈의 눈가에 순간 탐욕이 어렸다. 그는 아까 낮에 문수강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에 장 형이 직접 본 문에 이 검을 전해 준다면 장 형은 금 일만 냥을 얻게 될 것이오.’
“금 일만 냥!”
금 일만 냥이면 청풍장 같은 중소 문파는 꿈에도 그리는 액수가 틀림없었다. 더군다나 그 정도의 돈이라면 아무리 대문파라고 하더라도 휘청거릴 만한 타격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준다고 하였다. 대체 매화문의 재력이 얼마나 되기에 그런 거금을 내놓는지 모르겠으나 장훈은 매화문을 믿었다.
“이 검만 가져다준다면 우리 청풍장은 더욱 크게 성장할 것이다.”
장훈은 저절로 피어나는 미소를 느끼며 집무실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발을 멈추고는 책상을 돌아보았다. 지금쯤 단잠에 빠져 있을 장시우가 그 책상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장시우가 이 사실을 안다면 크게 노할 것이다. 그리고 장훈은 그 노여움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금 일만 냥이라면 그런 노여움을 달래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
장훈은 아무도 없는 책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끼야아악!
“컥!”
단잠에 빠져 있던 야인은 귓가를 흔드는 찢어지는 비명 소리에 숨을 들이켜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억! 허억!”
야인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 순간 야인의 고개가 천천히 올라갔다.
“히익!”
야인은 자신의 눈앞에 웅크리고 있는 자색의 그림자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바로 뒤에 서 있던 벽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런 야인의 움직임을 느낀 것일까? 자색의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으… 으아아…….”
야인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색의 그림자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것인가.
그림자의 입술이 달싹이자 야인의 귓가에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그 목소리는 마치 쇠를 긁는 소리 같았다.
-고작 날 한 번 꺼냈다고 그러는 것인가? 그러고서도 나의 주인에 걸맞다고 여기는 건가? 어렸을 때 나를 깨운 너를 내가 잘못 본 것인가!
그림자의 연속된 질문에도 야인은 그의 목소리가 듣기 싫은지 양손으로 귀를 막고 무릎에 얼굴을 박았다. 그림자가 우스운 듯 신형이 들썩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바보처럼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의 주인이여! 그러다간 나에게 잡아먹힌다는 걸 모르는 것인가!
그림자의 고함에 야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빨래처럼 펄럭였다. 그 순간 그의 양어깨에서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붉은 빛은 야인을 안 듯 감싸 안고는 자색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자색의 그림자가 주춤하며 붉은 빛을 바라보았다.
-네 녀석은… 살성. 잊고 있었군. 그렇지. 네 녀석이 주인을 보호하고 있었지.
그림자의 말에 붉은 빛이 흔들렸다.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도 귀를 막고 있는 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 나약한 주인이 어떻게 살성을 굴복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숨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주인이여, 또다시 그대에게 시련이 닥칠 것이다.
말을 건넨 그림자가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야인을 감싸고 있던 붉은 빛 역시 천천히 빛을 잃으며, 끝내는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폭풍처럼 한순간에 모든 것을 쓸어버릴 수 있는 존재들이 사라진 방 안에는 야인만이 남아 이유 모를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
날이 밝자 아침조차 거른 장훈은 천에 두른 자하신검을 가지고 재빨리 청풍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한달음에 매화문으로 달려갔다.
“누구시……. 아니, 청풍장의 소장주님이 아니십니까?”
“헉헉! 문수강 공자님 계시오?”
“당연히 계시지만,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십니까?”
한눈에 장훈을 알아본 매화문의 접객당주가 당혹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 왕래가 많은 그였지만 언제부터인가 뜸했고, 오늘은 해가 밝자마자 찾아왔기 때문이다.
“지금 좀 뵙자고 할 수 있겠소? 아니, 꼭 뵈어야 하오!”
“하지만 이런 시간에는 좀…….”
“급한 일이라오! 만약 내가 그냥 갈 시 일어날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소?”
“…….”
강하게 나오는 장훈의 말에 접객당주가 주춤거렸다. 그럼에도 이른 아침부터 문수강을 부르기가 꺼려지는 듯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에 장훈은 눈썹을 구겼다.
“어서 모셔 오지 못하겠소! 내가 그냥 간다면 무슨 사달이 벌어질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윽!”
장훈이 코앞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하자 접객당주는 뒤로 물러났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나보다도 어린놈이 소리 지르고 난리야.’
속으로 장훈을 욕한 접객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후우! 정 그렇다면 일단 접객실로 모시겠습니다. 여기 공자님을 접객실로 뫼시어라!”
“예!”
접객당주의 외침에 멀뚱히 서 있던 무사들 중 한 명이 장훈에게 다가왔다.
“이리로 오시지요.”
무사의 안내에 따라 장훈은 매화문 안으로 들어섰다. 접객당주는 그런 장훈을 바라보며 얼굴을 구기고는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퉤! 아침부터 짜증 나게 하고 있어.”
“그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공자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훈은 원탁을 둘러싸고 있는 의자를 하나 빼내 몸을 앉혔다. 주변을 둘러보자 벽 곳곳에는 단아한 그림들이 걸려 있고, 고가로 보이는 청자들이 놓여 있었다.
장훈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피어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곧 금 일만 냥이 들어오게 된다면 이런 접객실 같은 방은 몇 개도 더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되기 직전이었다.
똑똑!
장훈이 미래의 꿈을 펼치고 있던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시비와 함께 문수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래 기다리셨소?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오?”
“문 형! 어서 이리 앉으시오. 이것을 보게 된다면 분명 깜짝 놀랄 것이외다!”
“흠… 대체 무엇이기에…….”
문수강은 장훈의 재촉에 그의 앞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따라 들어온 시비가 그들에게 다가와 찻잔을 놓고 차를 채워 넣었다.
“그래, 대체 무슨 일이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넘긴 문수강이 장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장훈은 탁자 위로 푸른 천에 말린 검을 한 자루 올려놓았다.
“이것이 무엇이오?”
“문 형께서 찾던 물건이라오. 한번 보시오.”
“흠…….”
문수강은 검을 향해 손을 뻗어 그것을 들어 올리고는 천을 천천히 풀어 나갔다. 천을 다 풀어내자 순간 햇빛에 검이 반사되며 자색의 빛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단순히 햇빛에 의한 현상이지만 그 모습이 참으로 신비로웠다.
“이, 이건!”
푸른 천이 문수강의 손아귀에서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문수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검에게 시선이 사로잡혀 있었다.
“어떻소? 문 형께서 찾던 검이 맞소?”
“…….”
문수강은 장훈의 물음에도 검을 천천히 쓰다듬기만 했다. 그러다 검집을 잡고 검을 천천히 뽑았다. 햇빛이 검날에 닿자 날카롭게 빛났다.
오싹!
순간 문수강은 소름이 끼쳤다. 날카로운 수십 수백 개의 검날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수강의 손에서 검이 툭! 떨어져 내렸다. 너무나 놀라 자신도 모르게 검을 놓친 것이다.
“어떻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훈이 검을 집어 가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검이 손에 닿자 장훈은 문수강이 느꼈던 것을 똑같이 느끼며 얼굴을 구겼다. 이미 몇 번 경험한 것이지만 아무리 느껴도 그 기분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이오?”
“이런저런 일로 약간의 인연이 있었소. 하지만 모름지기 물건에는 주인이 있는 법. 나와는 인연이 아닌 듯하오.”
“흠…….”
탁!
장훈이 문수강에게서 검집을 받아 검을 꽂아 놓고는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문수강은 다시 검을 바라보았다.
“자하신검…….”
“뭐라 했소?”
“아, 이 검의 이름이라오. 자하신검. 과거 화산파의 신물이라오.”
“화… 산파?”
“그렇소.”
문수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하신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윽!”
손이 자하신검에 닿는 순간 또다시 간담에 서늘해지자 문수강은 다급히 손을 떼었다. 그 모습에 장훈이 푸른 천을 건네주었다.
“이것으로 감싸고 들으면 그나마 낫소.”
“음…….”
문수강은 푸른 천을 잠시 바라보다 그것을 받아 들고는 자하신검에 대고 집어 들었다.
“아, 저… 그런데 말이오.”
문수강이 자하신검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장훈이 다급하게 그를 잡았다.
“음? 또 무슨 볼일이 있소?”
“그… 있잖소? 보상금 말이오.”
“아하!”
문수강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아는 체하고는 검을 장훈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그 검이 진품인지 알아보러 갈 것이오. 어떻소? 함께 가겠소?”
“…….”
장훈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검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따라오시오.”
***
“우우…….”
야인은 정원의 연못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침상이며 옷이며 모두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탓에 시녀한테 한 소리 들어 기분이 우울한 상태였다.
“흠…….”
멀리서 그를 바라보던 장은영은 신음을 흘렸다. 요새 들어 자주 우울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그의 모습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왜 저럴까?’
속으로 자문해 봤지만 딱히 나오는 답이 없었다. 그렇게 일각여를 고민하고 고민하던 장은영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구할 수 없자 얼굴을 잔뜩 구기며 야인에게 다가갔다.
“왜 그러고 있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야인이 고개를 돌리자 장은영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은영의 등장에 야인의 표정이 잠시 밝아졌지만 곧 시무룩해지며 다시 연못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