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2장 (23/29)

제22장

같은 손님이라고 목적 또한 같은 것은 아니다

“우푸푸!”

야인은 입속으로 들어오는 물을 내뿜으며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그때 장은영이 야인의 머리를 고운 손답지 않게 우악스럽게 잡았다.

“이잇! 가만히 좀 못 있어?”

“웁!”

얼굴을 살짝 찌푸린 장은영이 그의 머리를 잡고 다시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물이 한가득 담긴 대야 속에 목까지 집어넣은 야인은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어어?”

“푸홧!”

순간 야인의 고개가 위로 들리며 그를 누르고 있던 장은영의 신형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엉덩방아를 찐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래? 아프잖아!”

야인은 꽤 많은 물을 마셨는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헉헉거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은영이 손가락을 뻗으며 소리치자 야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눈치를 보았다.

“풉!”

그 모습이 귀여웠던지 장은영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그런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 오늘은 꼭 깨끗하게 씻겨 내고 말 거야!”

“우우…….”

그녀의 말에 야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녀는 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물이 반이나 사라진 대야를 들고 다시 야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알았어. 이제 거칠게 안 할게. 참! 그리고 다 씻을 동안 잘 참고 있으면 같이 저잣거리 가서 먹고 싶은 거 다 사 줄게. 응? 물론 당과도.”

그녀의 말이 효과가 있던 것일까? 아니면 당과라는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야인은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어서 씻겨 달라는 뜻이었다.

장은영은 미소를 짓고는 대야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물을 퍼 올려 야인의 얼굴을 씻겨 주었다.

“청풍장주! 안에 계시오?”

그때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웅장한 목소리가 왠지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했다.

“응? 뭐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야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손님이 오신 모양이야. 빨리 씻고 우리도 가 보자. 알았지?”

“우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야인을 향해 장은영은 다시 손을 뻗어 정성스레 얼굴을 씻겨 주었다.

장훈과 함께 밖으로 나간 장시우의 시야에 청풍장의 무사들과 매화문의 무사들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검을 뽑아 들지는 않았지만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할 만큼 주변의 공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매화문 무사들의 앞에는 한 중년인이 젊은 사내와 함께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마른 몸과는 다르게 남자답게 굵은 눈썹을 지닌 매화문의 문주 문영추였다.

장시우의 시선이 닿자 문영추 역시 그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구려, 청풍장주. 그동안 잘 지내셨소?”

“잘 지내고 있었소만, 오늘 이후로 잠자리가 편치 못할 것 같소.”

장시우가 아무런 기별 없이 무사들을 이끌고 온 문영추의 무례를 돌려 말했다. 그러자 문영추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청풍장주! 그대의 굳건함만은 변치 않았구려. 마치 두꺼운 소나무와도 같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굳건하다면 더욱 강한 힘에 부러지고 말 것이오. 사람이란 때에 따라서 유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아니겠소?”

“문 대협의 말씀은 고마우나 그것은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오. 그리고 본인은 줏대 없이 함부로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오.”

청산유수처럼 막힘없이 말을 받아치자 문영추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하지만 곧바로 얼굴을 폈다. 마주 보고 있던 장시우 외에는 누구도 그런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허허! 입담 하나는 가히 천하제일이구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소? 저번에 뵈었을 때보단 뭔가 달라진 듯도 하구려.”

장시우의 말에 문영추가 웃음을 터트렸다.

장시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분명 자신은 그의 말에 비꽈 대답했다. 나름 도발이라면 도발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잠깐의 표정 변화만 있었을 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과연 매화문의 문주라 할 수 있는 그릇이었다.

“그나저나 이런 누추한 곳에 매화문주께서 웬일이시오? 설마 대화나 나누자고 무사들을 우르르 끌고 오신 건 아닐 테고.”

장시우가 본론으로 넘어가자 문영추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수강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청풍장주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럭저럭 잘 지냈다네. 그래, 우리 은영이한테 청혼을 했다고?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

“뭐, 이유가 있겠습니까? 단지 세간의 소문이 저의 마음을 이끌더군요. 소문이 사실이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장 소저의 지아비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자네 정도라면 사윗감으로 훌륭하지. 하지만 어쩌나? 우리 은영이는 자네한테 시집갈 마음이 없는 모양이야.”

꿈틀!

순간 문수강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청풍장 같은 작은 문파의 여식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게 자존심 상했다.

“하하, 그렇습니까? 그럼 어쩔 수 없지만, 아쉽군요.”

문수강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저희 매화문이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찾고 있는 인물이 있어서입니다.”

“찾고 있는 인물?”

“예.

문수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한 무사가 푸른 천으로 감싼 물건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문수강은 그것을 받아 들고는 푸른 천을 천천히 풀었다.

“음!”

문수강의 손에서 자하신검이 모습을 드러내자 장시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검은 자하신검이라고, 저희 매화문에서 근 이 년 동안 찾아다니던 검이지요.”

“…그런가?”

“예.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설마 이 검이 청풍장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청풍장주께서는 이 검을 우리 매화문에서 찾고 있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매화문에서 검을 찾고 있다는 건 알았네만, 설마 그 검인 줄은 나도 몰랐다네.”

“음… 그렇습니까? 뭐, 그건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그렇다고 하지요. 하지만 저희가 찾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또 하나?”

문수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시우의 주위를 훑어보며 자하신검을 앞으로 뻗었다.

“이 검의 주인인 신룡을 찾고 있습니다. 화산파의 후예라고 뜬소문을 내고 다니던 자입니다.”

“화산파?”

“그렇습니다. 저희 매화문의 근본이 되는 바로 그 화산파입니다. 신룡이라는 자는 화산파의 신물인 자하신검을 지니고 무림을 행보하면서 자신을 화산파의 마지막 장문인이라 말하고 다녔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화산파는 이미 멸문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 화산 무인들이 만든 문파가 바로 저희 매화문인데 말입니다.”

“…….”

순간 장시우는 이 년 전 자신이 데려온 야인을 떠올렸다. 그러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매화문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근본을 부정하는 자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저 화산파의 신물이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화산파의 후예라 말하고 다녔다면 그건 매화문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매화문 역시 화산파의 진전을 이었다고 알려진 문파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청풍장에 해가 될 리가 없었다. 문제는 그런 신룡이란 자를 지금까지 숨겨 주고 보살펴 줬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매화문에서 왜 신룡을 지금까지 숨겨 왔냐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단순히 ‘몰랐다.’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무림은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가… 신룡이었단 말인가?’

신룡.

장시우도 들어 본 적이 있다. 이 년 전 무림 공적이었던 마혈도를 제압하면서 신성처럼 등장한 후기지수. 그 어떤 단체에도 몸을 담고 있지 않다고 알려져 그와 연을 맺으려고 많은 문파들이 그의 뒤를 쫓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그가 지금은 바보가 되어 있었다.

“청풍장주.”

문수강이 말할 동안 가만히 지켜만 보던 문영추가 입을 열었다.

“우린 청풍장에 딱히 해를 가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오.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오.”

“진실이라…….”

“그렇소. 그럼 묻겠소. 이곳에 신룡이라는 작자가 있소이까?”

문영추의 물음에 장시우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문영추를 향해 시선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그런 자는 없소.”

“정말이오?”

“그렇소.”

문영추의 되물음에도 장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허허, 이거 왜 이러시오? 청풍장주. 좋게 좋게 좀 가면 안 되겠소? 청풍장주는 그냥 단순히 사람 하나 넘겨주면 되고, 우리는 청풍장주에게 금 일만 냥을 넘겨주면 그걸로 끝이라오. 그런데 꼭 어렵게 가야겠소?”

“그럼 본 적도 없는 사람을 불러오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하오?”

“허! 그럼 이 자하신검을 어떻게 찾은 것이오? 우리 본 문이 근 이 년간 온 무림을 뒤지며 찾아도 흔적조차 찾지 못한 검이거늘!”

“그건 우연히 얻게 된 검이라도. 하지만 그 검이 화산파의 신물일 줄은 정말 몰랐소.”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믿든 말든 그건 매화문주의 뜻이오. 하지만 난 진실만을 말하고 있소.”

난 정말로 모른다는 듯,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입을 여는 장시우의 모습에 문영추는 다시 한 번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는 장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청풍장주, 우리는 이미 당신이 이 년 전 한 사내를 청풍장으로 데려온 사실을 알고 있소이다.”

“……!”

순간 장훈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문영추의 시선을 따라 장훈을 바라보던 장시우가 아들의 반응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자란 자식이 끝내 모든 것을 그에게 말했던 것이다. 보나 마나 금 일만 냥에 눈이 멀어 술술 불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보화를 얻고 싶었더냐?’

비록 힘은 없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누구보다도 남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신하는 장시우였다. 그런데 자신의 자식이 돈 때문에 사람을 팔아넘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어디에 있소?”

“…….”

“다시 한 번 묻겠소. 어디에 있소?”

계속되는 문영추의 질문에도 장시우는 굳게 입을 닫았다. 문영추는 입꼬리를 더욱 들어 올리고는 문수강을 향해 말을 건넸다.

“찾아내라.”

“예! 매화대(梅花隊) 일 조는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

“존명!”

문수강의 뒤로 서른 명의 무사가 정렬하더니 앞서 가는 문수강을 따라갔다.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가만히 있던 장시우가 문수강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나?”

“가만히 있어야 할 것이오.”

장시우가 문수강에게 말을 건넸지만 대답은 문영추에게서 들려왔다. 장시우가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문영추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매화문과의 골이 더욱 깊어지기 전에 가만히 계시구려. 어디까지 대접받기를 원하시오, 청풍장주? 그대들이 정파라면 모를까, 지금은 적이 될 수도 있는 중립이라는 걸 기억하시구려.”

“으음!”

장시우의 턱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이런 모욕까지 참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분하게 만들었다.

결국 장시우는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문수강은 실소를 머금고는 그를 지나쳐 청풍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곧 끝날 것이외다, 청풍장주.”

“…이 모욕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오.”

“훗, 그냥 하루빨리 잊으시오. 그러는 게 여러모로 정신 건강에도 좋을 테니 말이오.”

문수강이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청풍장의 식솔들은 낯선 무사들이 자신의 일터를 이 잡듯 뒤지고 다니는 행동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다 밖에는 더 많은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뭐에 홀린 듯 장시우의 뒤쪽으로 가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 순간 미성의 목소리가 장시우의 귓가에 들려왔다.

장시우는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장은영과 함께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야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이에요?”

장은영은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적잖게 당황한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물었다. 하지만 장시우는 그녀의 물음을 무시하며 그녀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자가 신룡이었단 말인가?’

많은 낯선 사람들에게 주눅이 든 듯, 겁에 질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저 바보 같은 사내가 설마 신룡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버지.”

장시우가 복잡한 눈으로 야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안으로 들어갔던 문수강이 어느새 밖으로 나와 문영추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그 순간 장은영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짓다가 그녀가 웬 사내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청풍장주의 딸이겠군. 그리고 저놈은 아마도 청풍장의 바보라 불리는 사내일 터. 그런데 고작 저런 놈 때문에 나의 청혼을 거절한 건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아니면 저 여자가 바보인 건가? 훗! 뭐, 그래 봐야 결과는 같겠지만.’

문수강은 실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는 문영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도 미리 자리를 피한 것 같습니다.”

“음… 그래?”

“예. 그런데 이것을 보셔야 할 듯싶습니다.”

“이건?”

문수강이 서찰을 하나 문영추에게 건넸다. 문영추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천천히 읽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까지 읽었을 때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이런……. 청풍장주.”

“음? 왜 부르시오?”

“이런 걸 숨겨 놓고 있을 줄이야. 역시 사람은 겉으로만 봐서는 모르는군.”

문영추가 장시우에게 서찰을 가볍게 던졌다. 서찰은 너풀거리지 않고 장시우에게 곧장 뻗어 나갔다.

“흠!”

장시우가 손을 뻗어 내력이 담긴 서찰을 잡고는 재빠르게 밑으로 내렸다. 잡는 순간 담긴 내력을 흘려버린 것이다.

장시우는 문영추를 노려보고는 시선을 내려 서찰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장시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장시우가 손을 부들거리자 그의 손에서 서찰이 물처럼 흘러 땅으로 떨어졌다. 그 옆에 있던 장훈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그 역시 눈을 부릅뜨며 문영추를 바라보았다. 그 서찰에 적힌 내용은 이랬다.

<그대의 정보는 감사히 받아들이겠소. 머지않아 곧 주군께서 그곳으로 진격하실 것이오. 그때 그대의 충정을 주군께 말씀드리겠소. 사도천하!>

“훗, 본 문의 회유에도 굳건하게 버티더니만 결국엔 사도 쪽으로 섰구려, 청풍장주.”

“이, 이건 모함이오!”

“모함이라? 하지만 그렇게 증거가 있지 않소? 그리고 그 서찰 밑에 찍힌 문양은 분명 사마련의 것! 그래도 발뺌하겠소?”

문영추가 비웃으며 말하자 장시우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말대로 서찰에 찍힌 문양은 사마련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은 결단코 그들에게 정보를 넘긴 적도, 그들에게 고개를 숙인 적도 없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모함인 것이다.

하지만 이 서찰은 대체 어디서 난 것이란 말인가.

‘설마!’

장시우가 문수강을 바라보았다. 문수강은 그의 불타오르는 시선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 웃음을 본 장시우가 끝내 참지 못하고 바닥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순간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문수강의 앞으로 쇄도했다.

팟!

“역시 네놈의 짓이란 말이냐!”

“웃!”

장시우의 갑작스런 기습에 문수강이 신음을 터트리며 황급히 몸을 빼내었다. 하지만 장시우의 움직임이 더욱 빨랐다. 순식간에 허리춤에 매인 검을 뽑아 든 장시우의 손이 빛을 뿜었다.

그때 문수강의 앞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카칵! 쩡!

“큭!”

공중에서 불꽃이 튀기며 거친 소음과 함께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장시우의 신형이 달려 나갔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튕겨져 나왔다.

“감히 내 앞에서 내 아들에게 기습을 행하다니!”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문수강의 곁에서 그를 감싸듯 손을 뻗은 문영추가 소리쳤다.

한편, 뒤로 튕겨져 나간 장시우는 바닥에 착지해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는 문영추를 노려보았다.

“자식을 보면 아비를 알 수 있다더니! 견부견자로구나! 이제 보니 네놈들, 작정하고 본 장을 찾아온 것이구나!”

“흥! 네놈이 먼저 기습을 행하고서도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하다니, 과연 사도 따위에게 고개를 숙인 종자답구나! 매화대와 낙화대(落花隊)는 명을 받들라!”

“매화대, 명을 기다립니다!”

“낙화대, 명을 기다립니다!”

문영추의 말에 매화대주와 낙화대주가 동시에 외쳤다. 문영추는 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악독한 사도 무리에 가담한 청풍장을 몰살시킨다! 단 하나의 연놈도 빠짐없이,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죽여라!”

“존명!”

문영추의 명이 떨어지자 매화대와 낙화대가 일제히 검을 빼 들고 청풍장의 무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장시우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 더 자신이 참았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 생각은 언제 생겨났었냐는 듯 곧바로 사라졌다.

“매화문이 항상 우리를 무시하고 깔보더니, 이제는 말도 안 되는 모함으로 우리를 사(死)하려고 한다! 모두 검을 빼 들고 대항하라! 여기서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에게 청풍장의 저력을 보여 줘라!”

장시우의 외침에 청풍장의 무사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검을 빼 들었다. 장시우의 말대로 매화문의 무사들에게 온갖 멸시를 당해 왔던 그들이었다.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무인에게는 지독한 치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청풍장의 소속이라는 책임감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 항상 참아 왔다.

그러나 지금 청풍장주는 자신들에게 검을 빼 들라 하고 있었다. 주군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날을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말이 옳으리라.

“위선자 정파 나부랭이들에게 청풍장의 무서움을 보여 주자!”

“죽여 버리겠어!”

청풍장의 무사들이 온갖 욕을 내뱉으며 매화문의 무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준!”

“예!”

장시우가 검을 강하게 쥐며 입을 열자 그 뒤에 서 있던 중년 무사가 대답했다. 장시우는 그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은영이를 부탁하네.”

“…예!”

준이라 불린 무사는 장시우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가 멀어지자 장시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훈아!”

“에, 예?”

“정신 차리거라! 너도 무림가의 장남이라면 이런 일은 각오했을 터. 그렇지 않더냐?”

“하, 하지만…….”

“어리광 피우지 말거라! 넌 이미 한 명의 무인이다. 고작 그런 각오로 혈천대전에 참가하길 바랐단 말이냐!”

“…….”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에 너의 책임 역시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명의 무인으로서, 한 명의 남자로서 이 일에 책임을 지거라!”

장시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앞으로 달려 나갔다. 조금 전의 기습에서 난입한 문영추의 반격에 손목이 뻐근해 왔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이런 것은 신경도 쓰지 말아야 했다.

달려 나가던 장시우가 양손으로 검을 쥐고는 바닥을 강하게 차올랐다.

“갈!”

높이 도약한 장시우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오자 그의 신형 주위로 경풍이 휘몰아쳤다. 절정고수의 위용이었다.

“크윽!”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에 장훈이 이를 악물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평소에도 엄격했지만 결코 품위를 잃지 않았던 아버지가 지금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적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로서, 무인으로서의 책임!’

장훈은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 검병을 꾹! 움켜쥐었다. 그리고 바닥을 박차 장시우의 뒤를 따랐다.

장은영은 갑작스레 벌어진 광경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녀의 눈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 아버지.”

장은영은 다급하게 장시우를 찾았다. 그러다 그를 발견하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항상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다. 인자한 미소로 자신의 투정을 받아 주고, 엄하지만 사랑이 가득한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은 한 마리의 맹수로 변해 적들을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

장시우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그의 앞에 있는 적은 피와 비명을 뿜어내었다. 과연 정말로 저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을 보살펴 주고 사랑해 준 아버지가 맞나 하는 의심마저 생길 정도로 변해 있었다.

“아가씨!”

“아!”

그때 장은영의 옆으로 준이 다가왔다. 장은영이 바라보자 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어서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에…….”

“어서 저를 따라오시죠. 제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하, 하지만 아버지께서!”

“장주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아무리 매화문주라도 장주님을 쉽게 감당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장주님이라면 충분히 매화문주에게서 몸을 빼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어서요! 이곳에 계속 계신다면 오히려 장주님께 피해를 드릴 뿐입니다.”

“…….”

준의 말에 장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준이 그녀의 허리에 손을 대었다.

“용서를! 음?”

준이 장은영을 안아 들고 바닥을 박차려는 순간, 그의 시야에 장은영의 손을 잡고 있는 야인이 들어왔다. 준은 얼굴을 구기고는 발을 들어 야인을 걷어찼다.

“으아!”

“빌어먹을! 한시가 급하거늘 이놈은 상황 판단도 못한단 말인가!”

준은 바닥에 넘어진 야인을 향해 침을 내뱉고는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바닥을 박찼다.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도 못해 멈춰 서고 말았다. 청풍장의 지붕 위로 낯선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풍화검대! 문주님의 명을 받고 지금 도착했습니다!”

일반적인 검보다 훨씬 두껍고 묵직해 보이는 검을 든 사내가 외쳤다. 하지만 그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자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풍화검대주는 주변의 반응에 무안했는지 어색하게 웃고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일단은 주변을 정리한다!”

“존명!”

팟!

매화문의 또 다른 전투부대인 풍화검대가 난입하자 그나마 버티던 청풍장의 무사들이 볏단처럼 힘없이 쓰러져 갔다.

“크악!”

“빌어먹을!”

준은 자신의 앞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동료를 바라보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 준에게 섬광이 번뜩이며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준은 재빨리 손을 떨쳐 다가오는 검을 막아 내고는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다가온 무사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크윽.”

준은 손목이 저려 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결코 장은영을 보호하면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후미에서 나타난 풍화검대와 매화대, 낙화대가 청풍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장은영을 보호하며 그들을 뚫고 지나가기엔 준의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젠장! 칼부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몸을 빼야 했어!’

준은 고개를 돌려 장은영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망울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마음이 아려 왔다. 아마도 자신의 아비와 오라비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그녀의 인내심이 대범하기도 했다.

‘결국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하는 건가.’

고개를 돌려 혹시나 모를 빈틈을 찾던 준은 아무리 찾아도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검을 강하게 쥐고 눈을 빛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목숨을 버려서라도 아가씨를 대피시킨다!’

“크억!”

“으악!”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장시우가 얼굴을 구겼다. 이렇게만 당할 수 없어 칼을 맞대고는 있지만 역시나 무림에 소문난 매화문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것은 자신의 수하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풍장 무사들이 그냥 죽는 것은 아니었다. 한 명이라도 저승길의 길동무로 삼기 위해 몸에 칼이 꽂히면서도 상대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디서 한눈을!”

“흡!”

쩌엉!

장시우의 눈동자가 주변을 훑는 순간 문영추의 검이 쏜살처럼 공간을 갈랐다. 장시우는 가까스로 검을 들어 그것을 막고는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내가 우습더냐? 감히 내 앞에서 한눈을 팔다니!”

“…….”

문영추의 말에 장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가 우습다? 되지도 않는 말이었다. 검을 맞대면 맞댈수록 점점 거세지는 그의 검격을 가까스로 막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와 같은 절정의 고수였지만 실력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그를 공격하기에 무리라고 판단하여 공격보단 방어 위주로 그와 검을 맞대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상황에 신경을 끊을 수도 없었다. 자신의 수하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마당에 어떻게 눈앞의 상대에게만 신경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 청풍장 뒤쪽에서 갑자기 무사들이 나타나 자신의 수하들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전멸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정녕 이 사태를 벗어날 방법이 없단 말인가!’

또다시 장시우가 주변을 힐끗거리자 문영추의 얼굴이 구겨지며 그의 주위로 경풍이 몰아쳤다. 그러고는 자신의 허리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음!”

그때 갑작스레 변화하는 기세를 느낀 장시우가 문영추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옅은 자색의 빛이 흘러나오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의 손에는 자하신검이 들려 있었다.

“과연 천하제일의 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구나. 자! 그럼 이것을 받고도 한눈을 팔 수 있는지 보자꾸나!”

장시우를 향해 기세를 쏘아올린 문영추가 바닥을 박차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한 마리의 뿔난 황소 같았다. 그 모습에 장시우는 잡념을 없애고는 다급히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우, 우어어…….”

청풍장의 바보라 불리는 야인은 사방에서 사람들이 칼을 들고 싸우자 겁을 먹은 듯 양손으로 귀를 막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크악!”

“우우!”

주변에서 비명이 한 번 터져 나올 때마다 야인의 입에서도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뭐에 홀린 것인지 야인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의 주위에는 핏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쓰러진 청풍장 무사와 매화문 무사들에게서 흘러나온 피였다.

“읍!”

코끝으로 짙은 혈향이 스치고 지나가자 야인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헉헉!”

한동안 오물을 쏟아 낸 야인은 숨이 막히는지 헐떡대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으… 으으…….”

야인은 하나의 작은 지옥도가 눈에 들어오자 끊임없이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때 그 주변을 지나가던 매화문의 무사가 야인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구겼다. 지저분한 사내가 오물을 토하고 기분 나쁜 소리까지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뭐 거지같은! 죽여 주마!”

무사의 검이 섬광처럼 야인의 머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 순간 야인의 몸에서 검붉은 빛이 폭사되어 터져 나왔다.

“웃!”

검을 내리치던 무사는 갑작스레 터진 검붉은 섬광에 눈을 가리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무언가가 그를 훑고 지나갔다.

“컥!”

자신의 갈라지는 허리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무사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한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붉은 안광을 뿜어 대는 그의 주위로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크아아아!”

몸을 완전히 일으킨 그의 입에서 갑작스레 고함이 터져 나오자, 묵직하게 깔린 공기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강력한 돌풍을 일으켰다.

‘여긴…….’

어둠밖에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진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건만 그는 아랑곳없이 발을 옮겼다.

‘여긴 어디지?’

아무리 걸어도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진철은 쉬지 않고 걸어 나갔다. 자신 스스로도 왜 걸어가는지 몰랐다. 단지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진철이 속으로 자문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군가 말해 줄 리도 만무했다. 이곳에는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진철은 다리가 아팠다. 그때 그의 앞에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는 그 불꽃에서 포근함을 느꼈다.

-주인.

‘넌?’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낯선 말에 진철이 대답했다. 그러자 불꽃이 살짝 흔들렸다.

-아직도 이곳에 숨어 있는 건가? 주인이여.

낯선 이의 말에 진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생각난 듯 진철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변화한 그의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불꽃이 갑작스레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곳에 숨어 있을 텐가, 나약한 주인이여!

‘자하마신.’

-그렇다, 주인이여! 내 말에 대답해라.

‘그건…….’

진철이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불꽃이 점차 커졌다. 그러다 사람의 형체로 변하며 진철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에 진철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갈 수 없어.’

-…….

자하마신의 신형이 흔들거렸다. 진철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알잖아? 내가 나가면 또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돼. 내 가족과 사부처럼. 그리고 그녀처럼…….’

진철의 눈에 슬픔이 감돌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진철은 살성의 체질을 타고 태어났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특이 체질을 무림의 촌부들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진철은 그렇게 방치된 상태로 자라났다. 그리고 다섯 살이 되던 해, 진철은 폭주하고 말았다. 첫 번째 폭주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진철이 살던 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홀로 그곳에서 살아남아 거지가 되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걸을 하며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다 한 늙은 도사를 만나게 됐는데, 그가 바로 진철의 사부인 옥린수였다.

진철은 그대로 옥린수의 제자로 들어가 화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심신을 다스리기 위해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열세 살이 되던 해 자하궁 안에 옥린수가 놓아둔 자하신검을 발견하곤 호기심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자하신검의 봉인이 풀림과 동시에 진철의 두 번째 폭주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또다시 정신을 잃은 진철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무척이나 수척해진 옥린수가 그의 앞에 있었다.

옥린수는 진철의 안에 자리 잡은 살성과 자하신검에 묶인 자하마신을, 거대하지만 결코 융합할 수 없는 두 힘을 진철의 심령에 이어 버렸다. 그러자 살성과 자하마신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진철의 몸속에 자리 잡아 버렸다. 그 과정에서 활개 치는 두 개의 기운을 제압하느라 옥린수는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게 되었고, 결국 되돌릴 수 없는 내상을 입고 말았다.

세 번째 폭주는 진철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일어났다. 몸속에 자리 잡은 살성과 자하마신으로 인해 체질이 변해 버린 진철은 솜이 물을 흡수하듯 무공을 흡수했고, 자하신공의 극성에 이르게 된다.

진철은 자하신공이 극성에 이르자 몸속에 잠들어 있던 살성과 자하마신을 깨우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그것에는 옥린수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옥린수는 결국 내공을 잃고 말았다.

그에 따른 반동인 것인가. 옥린수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 갔고, 결국 백이십육 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된 것이다.

진철은 그런 옥린수의 무덤을 만들며 결코 검을 뽑지 않겠다고 무덤 앞에서 다짐하게 된다.

‘그때의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어. 사부와의 약속이었는데. 그 약속을 깨고도 그녀를 지키지 못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갈 수 있겠어?’

진철이 자조 섞인 웃음을 내뱉자 자하마신이 가만히 바라보다 말을 건넸다.

-그것이 정녕 그대의 뜻인가?

‘…….’

-좋다. 그 결심, 얼마나 오래가나 시험해 주도록 하지.

‘뭐?’

진철이 반문하자 자하마신이 손을 들어 옆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검은 공간에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자하마신이 휘두른 공간을 중심으로 둥근 구멍이 뚫려 버렸다.

‘저, 저건……!’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곳에는 타오르듯 검붉은 기운에 휩싸인 진철이 학살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대가 방치한 현실을 지켜보고 있어라.

그 말을 끝으로 자하마신이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는 작은 불씨로 변하여 사라져 버렸다.

“윽!”

장시우를 향해 검을 찔러 가던 문영추는 갑작스레 온몸을 엄습하는 한기에 몸이 굳어 버렸다. 그 틈을 타 장시우의 검이 문영추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장시우는 가까스로 찔러 들어오는 검을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대체 뭐였지?’

얼굴을 구긴 문영추는 방금 전의 느낌을 상기시키며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이 주변에는 자신과 장시우만 있을 뿐이었다. 절정고수들의 대화의 여파로 인해 다른 이들은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장시우에게 신경을 집중한 채 생각하던 문영추는 뭔가 떠오른 듯 자하신검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 검이?’

그러고 보니 검날이 좀 붉게 변한 것 같기도 했다.

오싹!

그때 검에서 작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문영추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눈에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푸른 섬광이 보였다.

“큭!”

쩡!

가까스로 검을 들어 검기를 막아 낸 문영추는 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하지만 선기를 잡은 장시우가 또다시 검기를 날리며 따라붙었다.

퍼펑!

문영추는 연신 날아오는 검기를 상쇄시키며 계속 뒤로 물러섰다. 따라붙던 장시우가 다시 다섯 가닥의 검기를 연달아 날렸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자세를 낮추고 무릎을 굽혔다. 그 순간 장시우의 검이 강렬하게 빛을 뿜었다.

“섬전절풍(閃電切風)!”

강하게 바닥을 찬 장시우의 신형이 한 줄기의 빛처럼 문영추를 향해 쏘아졌다.

“흡!”

간단하게 검기를 상쇄시킨 문영추는 그 뒤를 따라 다가오는 거대한 기운에 눈을 부릅떴다.

콰르르릉!

장시우와 문영추가 격돌하자 불똥이 튀며 거대한 돌풍이 장내를 휘감았다.

“아버지!”

그 모습을 멀리서 발견한 문수강이 다급하게 문영추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청풍장의 무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아 발목을 잡았다.

“이 쓰레기들이!”

문수강이 급히 내공을 끌어 올려 검에 주입했다. 그러자 그의 검이 번뜩이며 옅은 자색의 기운이 검에 서렸다.

“낙화삼식(落花三式)!

문수강의 검이 세 방향을 긋자 그의 앞을 가로막던 무사들이 목과 가슴, 허리에 검상을 입으며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문수강은 발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아버… 흡!”

문수강이 문영추를 부르던 그때, 갑작스레 먼지가 둥글게 모여들더니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문수강은 황급히 발을 멈추며 고개를 틀었다.

“크윽!”

먼지바람이 몸을 때리자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문수강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먼지바람이 터져 나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상의가 찢긴 문영추가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고, 그의 앞에는 공격을 감행했던 장시우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쿨럭!”

장시우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장시우는 들끓어 오르는 기혈에 얼굴을 구기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문영추의 공격에 방어에만 급급하다 그가 다른 곳에 시선을 주는 순간 자신의 최고 절초를 펼쳤다. 그리고 그 공격은 성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검이 닿는 순간 강력한 힘이 터져 나왔고, 그 힘은 검에 실린 모든 힘을 흩어 버렸다.

“쿨럭! 이, 이게 대체…….”

장시우는 또다시 핏물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문영추를 바라보았다.

‘좋은 기분이다.’

문영추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 상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세상 자체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힘이 넘친다.’

문영추는 검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옅은 자색에 휘감긴 자하신검에서 이유 모를 힘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자신이 지녔던 힘이 하찮아질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문영추의 시선이 장시우에게로 옮겨 갔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니 문뜩 모든 게 우스워졌다. 지금 상태라면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그를 벌레 죽이듯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버러지 같은 것.’

문영추가 장시우를 향해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장시우는 화들짝 놀라며 가까스로 검을 들어 막았다.

쾅!

“컥!”

가볍게 휘둘렀지만 검에 실린 위력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장시우는 검을 통해 들어오는 충격에 온몸의 뼈가 억눌리는 기분을 받으며 뒤로 튕겨 나갔다. 몇 바퀴나 바닥을 구른 그는 그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아, 아버지.”

문수강은 문영추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불렀다. 그러자 문영추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실소를 지었다.

“대단하구나, 이 힘이란. 이것이 자하신검의 힘이라는 건가.”

“아버지.”

“물러서라. 이 넘치는 힘! 한번 시험해 보고 싶구나.”

“에, 옛!”

문수강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문영추의 말이 없었어도 물러섰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내뿜는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휘둘렀을 뿐인데 사람을 몇 장이나 날려 버렸다. 그런 위력이라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여파에 휩쓸려 목숨을 잃으리라.

“크크큭!”

문영추는 주변을 훑어보며 웃음을 흘렸다. 이미 장내의 싸움은 끝나 있었다. 자하신검의 각성으로 인해 전부 얼이 빠진 것처럼 문영추를 쳐다보고 있던 탓이다.

“덤벼라, 버러지들.”

문영추는 청풍장의 무사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팔을 들어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강렬한 검기가 자하신검에서 부채꼴로 퍼져 나갔다.

꽈르르릉!

“크악!”

“커억!”

기파의 충격에 땅거죽이 들썩이며 그 앞에 있던 수많은 청풍장 무사들이 일제히 파도에 휩쓸리듯 나가떨어졌다. 그곳에는 그들과 칼을 겨루던 매화문의 무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문영추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한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땅이 요동쳤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야말로 악마의 강림!

어느새 피로 온몸을 물들인 문영추는 악마 그 자체였다.

“크아아아!”

문영추가 가슴을 펴며 기합을 내지르자 그를 중심으로 땅거죽이 들썩이더니 기파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문수강 역시 그 기파에 휩쓸려 뒤로 나가떨어졌다.

“크윽!”

문수강은 바닥에 몸을 눕히고 자신을 때리는 기파를 견뎌 냈다. 그때 문영추를 향해 붉은 섬광이 쏘아졌다.

쾅!

붉은 섬광과 문영추가 충돌하자 거대한 폭음과 함께 또다시 강렬한 돌풍이 장내를 휘감았다. 그 돌풍은 문영추가 내뿜는 기파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중앙에는 문영추와, 장은영의 옆에서 벌벌 떨던 사내가 서로 검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크윽!”

문영추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검을 통해 흘러들어 오는 힘이 자신과 비교해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네놈은……. 음?”

“크르르…….”

문영추는 상대를 노려보다 깜짝 놀라 거칠게 검을 밀었다. 붉게 핏줄 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본 그의 입에서는 새하얀 거품마저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광인이 따로 없었다.

거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이 힘.

그러고 보니 이런 상태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군. 네놈은 살성!”

“크앙!”

문영추의 말에 대답하듯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성이 몸을 낮추며 포효를 터트렸다.

“크흡!”

살기 가득한 고함을 정면으로 받은 문영추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겁이 나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는 온몸에 흐르는 전율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저주받은 살성. 그의 존재는 그야말로 악마와도 같다고 하지. 크큭!”

문영추는 오른발을 앞으로 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덤벼라!”

팟!

문영추의 말이 끝나자마자 살성의 신형이 그에게 뻗어 나갔다.

“아버지! 아버지!”

장은영은 장시우를 품에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지는 그의 모습에 참고 참았던 눈물이 둑이 터지듯 흘러나왔다.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

“으, 은영아……. 커억!”

간신히 눈을 뜬 장시우가 또다시 피를 토해 냈다.

“아버지!”

장은영이 깜짝 놀라 다시 그를 불렀다. 장시우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훈이는… 훈이는 어디에 있느냐?”

“오라버니는…….”

장은영은 입을 열다 다시 닫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장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찾는다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난장판 속에서 그를 찾으러 돌아다닌다는 것은 목숨이 하나 더 있어도 부족했다.

“괜찮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오라버니는 결코 약하지 않아요.”

장은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시우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무언가를 느낀 듯 그가 눈을 부릅뜨며 시선을 돌렸다.

“저자는…….”

“아!”

장시우의 말에 장은영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문영추와 청풍장의 바보가 서로 칼을 겨루고 있었다.

“저 바보가 어떻게?”

지금까지 장시우에게만 신경을 써 미처 야인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장은영은 너무나 달라진 그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장시우는 단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검의 주인은 그였던가.”

“예?”

장은영이 무슨 말이냐는 듯 의문을 품자 장시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젓고는 입을 열었다.

“저자들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야말로 악마들. 이곳은 위험하니 어서 자리를 피하자꾸나.”

“예? 하지만!”

“어서! 쿨럭!”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던 장시우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터져 나왔다. 장은영이 깜짝 놀라 자신의 품에서 떨어지는 그를 부여잡았다.

“아버지!”

“헉헉! 어서 이곳을 피하자꾸나. 어서…….”

장시우가 그녀의 옷깃을 잡으며 다시 입을 열자 장은영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간신히 검을 쥐고 있던 준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아버지를 별실로 옮기죠. 그곳에는 단약들이 몇 가지 있으니 기혈단이라도 찾아 아버지께 먹여야겠어요.”

그녀가 과거 장훈이 내상을 입었을 때 먹던 단약을 떠올리며 말하자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나 장시우나 이 상태로는 멀리 가지도 못한다. 거기에 별실이라면 이곳과 꽤 떨어져 어느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었다.

“장주님을 모셔라!”

“예!”

준이 외치자, 지금껏 살아남은 청풍장의 무사들이 대답하며 장시우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고는 곧바로 자리를 벗어났다.

장은영은 그들의 뒤를 쫓다 야인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문영추를 압박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위압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젓고는 무사들을 따라 발을 놀렸다. 지금 자신은 그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어둠이 가득한 심연 속에서 무릎을 모으고 앉은 진철은 자하마신이 뚫어 놓은 구멍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나가고 싶다면 저 구멍을 통해 나가면 된다.

‘하지만 정말 나가도 되는 걸까?’

진철의 눈에 살성이 장악한 자신의 몸이 보였다. 분명 살성은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며 학살을 자행하다 그 역시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가 있을 것이고, 많은 이들이 소중한 사람을 잃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죽는다면 그건 미미한 피해일 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이성을 잃는다면 그땐 온 무림이 파멸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테니까.

살성과 자하마신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이 무림에 극소수라는 걸 진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사라져 버리자. 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러는 편이 나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진철은 귓가를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존재가 앉아 있었다.

‘넌?’

‘나는 너. 너는 나.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또 다른 진철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바깥세상을 향해 나 있는 구멍을 가리켰다.

‘정말 저 모습이 네가 원하는 거야? 저렇게 무의미한 사람들을 학살하다 사라지는 게?’

‘…….’

‘설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순간 진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철의 반응에 그가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걸로 무구한 사람들을 죽인 너의 죄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해?’

진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다시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에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네? 바보. 살성의 존재가 그렇게 가벼울 리 없잖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손을 벌렸다.

‘살성은 지금까지 반복되어 온 전쟁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이들의 원한이 뭉쳐 탄생한 존재. 그렇기 때문에 살성을 타고난 이는 각성을 하자마자 모든 존재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바로 그것이 존재의 목적이니까.’

그는 다시 진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철은 여전히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지닌 살성은 다른 살성과 달라. 왜냐면 너한테 먹히면서 속성이 변했거든.’

그는 진철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그 원한 덩어리를 먹어 버린 거야.’

움찔!

진철이 반응을 보이자 그가 멀어지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눈을 돌리지 말고 봐. 네가 회피한 책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잖아?’

‘…내가 나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게 돼.’

‘핑계일 뿐이야.’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다!’

진철이 고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의 눈에 붉은 핏줄이 돋아났다. 하지만 또 다른 진철은 붉게 물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진철의 모습에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래, 만약에 네가 죽는다 치자. 그럼 저렇게 활개 치기 시작한 자하신검은 어떻게 할 거지? 저놈의 위력 역시 살성에 못지않아. 아니, 오히려 더 흉포한 놈이지. 천 년이 다 되도록 검에 갇혀 살았으니까.’

그가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자하신검에 동화되어 가는 문영추가 살기를 내뿜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모두 네 탓이야. 네가 무림에만 나오지 않았다면 저런 일도 생겨나지 않았을 테지.’

‘…내가 원해서 가진 힘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가진 것은 분명하지.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너로 인해 일어난 일이란 것 역시 분명하고.’

청산유수처럼 막힘없이 자신의 말에 대꾸하자 진철이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나더러 뭘 어떻게 하란 거지?’

그 말을 기다린 것일까? 그가 갑작스레 진철의 코앞으로 다가와 얼굴을 내밀었다.

‘책임을 져야지.’

‘책임?’

‘그래, 책임. 사부나 다른 이들이 이렇게 숨어 있으라고 너를 위해 희생한 건 아니잖아?’

‘……!’

갑작스레 진철의 머릿속으로 옥린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다음에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 뒤에 마지막으로 북궁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북궁아.’

끝까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썼고, 결국 자신을 지켜 낸 그녀였다.

‘너는 지금 너를 위해 죽어 간 그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어.’

‘…….’

‘네 인생은 너만의 것이 아니야. 그들의 인생이 지금 너의 어깨 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

그의 말에 진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진철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들이 너에게 바랐던 것은 뭐지?’

‘나에게 바랐던 것…….’

‘그래. 하지만 그 전에 너로 인해 벌어진 일은 해결해야겠지?’

그가 손을 뻗어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진철은 그의 손끝을 따라 구멍을 바라보고는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그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젠 검을 뽑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할 거야. 네가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무림이니까.’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헉헉! 이 괴물 같은 놈!”

문영추는 단내를 풍기며 숨을 헐떡거렸다. 그의 앞에서 몸을 낮추고 있는 살성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투지는 오히려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크합!”

문영추가 기합을 터트리며 살성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함께 그의 검에 강대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살성은 그 기운의 위력을 느낀 듯 바짝 긴장하며 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죽어 버렷!”

꽈르르!

문영추가 검을 횡으로 휘두르자 자색의 기운이 거친 파도처럼 살성을 향해 덮쳐 갔다. 살성은 이미 금이 그어진 검을 마주 휘둘렀다. 그러자 붉은 섬광이 그의 앞으로 그어졌다.

쾅!

자색의 기운과 붉은 섬광이 부딪치자 거대한 폭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살성은 그 먼지구름을 뚫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주눅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살벌해져 있었다.

“어째서.”

문영추의 신형이 앞으로 나아가며 살성을 쫓았다. 그의 검이 쉴 새 없이 허공을 갈랐다.

“어째서 쓰러지지 않는 것이냐!”

쩡!

문영추의 검이 살성의 검과 부딪히자 그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앙!”

그 순간 살성의 신형이 바닥으로 꺼지듯 사라지더니 문영추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뭣?”

서걱!

문영추는 눈앞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섬광에 재빨리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런 그의 앞으로 살성의 검이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살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한 발 내밀며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이 악마 자식이!”

문영추는 자신에게 뻗어 오는 검기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는 바닥에 다리를 지탱했다. 그러고는 검을 위로 추켜올려 재빠르게 아래로 그어 내렸다.

쩌엉!

문영추의 검에 검기가 양 갈래로 갈라지며 지면을 때렸다. 그 중앙에는 문영추가 숨을 헐떡이며 살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살성의 모습에 문영추는 이를 악물었다.

‘힘이! 힘이 더 필요하다! 더 강한 힘이!’

그때 문영추의 몸에서 자색의 빛이 강하게 터져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자하신검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그의 신형을 감싼 것이다.

-그대, 힘이 필요한가?

‘누, 누구냐!’

문영추는 갑작스레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 음성은 그의 물음을 무시하고 다시 들려왔다.

-힘이 필요하면 내가 주겠다. 마음을 열고 나를 받아들여라.

‘네놈은… 서, 설마!’

문영추가 시선을 내려 자하신검을 바라보았다. 자하신검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자색의 불꽃으로 인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대를 시험하겠노라.

머릿속에 울리던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문영추의 몸에서 거대한 섬광이 폭사되었다. 살성 역시 그 빛이 눈부신 듯 이를 드러내며 눈살을 구겼다.

훙!

그때 살성의 앞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공간을 건너뛰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다.

그것은 살성의 앞에 당도하자마자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살성은 본능적으로 붉은 기운이 맺힌 검을 들어 그 검을 막아섰다.

쾅!

“컥!”

폭음과 함께 살성의 검이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살성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바람을 가르고 수 장이나 허공을 나르더니, 뒤에 서 있는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쿠르르릉!

살성이 건물 속으로 박혀 들자 지붕이 갈라지며 그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크크큭!”

그 모습에 살성을 날려 버린 문영추가 웃음을 흘렸다. 마치 쇠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웃음을 내뱉은 그는 검을 바라보며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넘친다! 힘이 넘친다! 그래.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하신검의 위력이로구나!”

온몸에 불꽃을 두르듯 활활 타오르는 그는 검의 위력에 심취해 광기를 뿌려 댔다. 그러고는 사방으로 검기를 날렸다. 그 검기는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사람들의 몸을 가르며 지나갔다. 그때 그의 뒤로 검은 인영이 달려들었다.

쾅!

문수강이 서 있던 자리에서 강한 진동이 일어났다. 문영추와 살성은 서로 한 치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네, 네놈!”

“크윽!”

문영추가 이를 갈며 입을 열자 살성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프잖아.”

“뭐?”

살성의 입에서 정상적인 언어가 흘러나오자 문영추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몸에선 붉은 기운 역시 사라지고 청량한 기운만 느껴졌다.

“아프다고!”

그 순간 야인이 양손을 강하게 밀치자 문영추는 뒤로 밀리는 느낌을 받으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문영추의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네, 네놈은 누구냐!”

손바닥이 얼얼한 듯 강하게 털어 내는 야인에게 문영추가 말을 건네자 그는 문영추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나?”

야인은 목을 소리 나게 두어 번 꺾더니, 턱을 추켜올리고는 문영추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천하제일문 화산파의 제십칠 대 장문인, 진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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