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3장 (24/29)

제23장

굳은 의지는 천검(天劍)에 못지않다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장내에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은 자신을 화산파의 장문인이라 말하는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문영추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산파 장문인이라니……. 멸문한 거 아니었어?”

“만에 하나 멸문하지 않았더라도 저놈,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 같은데 저런 놈이 장문인이라고?”

매화문 무사들의 속닥거림이 귓가에 들려왔으나 문영추가 멍하니 그를 바라본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자하신검에게 먹혀 가 이미 정신을 잃고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 그이건만, 자신의 검격을 막은 것도 모자라 자신을 밀쳐 냈기 때문이다.

“네놈… 네놈도 나에게서 검을 뺏어 가려는 놈이냐!”

문영추가 으르렁거리자 진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치며 입을 열었다.

“아, 그 검? 미안한데 그거 내 건데, 돌려주지 않을래?”

“헛소리!”

갑작스레 문영추의 신형이 진철을 향해 쏘아졌다. 그런 문영추의 검에 강대한 기운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진철은 그 기운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 어?”

“죽어랏!”

쾅!

자하신검이 진철을 향해 내리꽂히자 거대한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변에 있던 인물들이 대처도 하지 못한 채 나가떨어졌다.

“자하신검은 나의 것이다! 이 검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어!”

쾅! 쾅!

마치 검이 아닌 도를 사용하듯 내려치는 문영추의 눈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하신검의 기운이 뇌에도 영향을 끼치면서 광기에 휩싸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 검이 좋으냐?”

“뭐, 뭣?”

그때 문영추의 귓가에 진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영추는 깜짝 놀라 이미 한 줌의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어야 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기 전에 당한 상처 외에는 별다른 부상이 없어 보였다. 빈손으로 모든 공격을 흩어 버린 것이다.

“미친놈에게는 매가 약이지!”

퍼걱!

“큭!”

진철의 주먹이 얼굴에 꽂히자 문영추는 뇌를 흔드는 충격에 뒤로 물러섰다. 진철이 곧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퍼퍼퍽!

“커억!”

엄청나게 강한 위력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위력도 아닌 진철의 공격이 뱃가죽을 뒤흔들자 문영추는 이를 악물며 검을 내리그었다. 그 순간 진철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런!”

문영추가 깜짝 놀라 시선을 내렸다. 진철이 그의 검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흘려버리며 그의 품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어리석은 놈!”

퍼엉!

문영추의 복부에서 폭음이 터지며 그의 신형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하지만 별다른 충격은 받지 않은 듯 공중에서 몸을 돌려 충격을 흩어 버리고는 바닥에 착지했다.

“이, 이놈!”

문영추가 진철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분명 그의 공격은 뻔히 눈에 보였다. 그리 강한 위력도 아니었고 빠른 공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것이 문영추를 답답하게 했고 분노하게 했다.

“으아아아!”

분개한 문영추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앞에서 고함을 정면으로 받은 진철이 얼굴을 구겼다.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으로 보아 자하신검과의 동화(同化)가 거의 다 되었기 때문이다.

“퉤!”

웬만한 내력을 지니지 않은 인물이라면 문영추가 내뿜는 기압에 완전히 눌려 버릴 법도 했다. 하지만 진철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문영추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게 네 결정인 게냐?”

“크으아아아!”

진철의 물음에 문영추는 더욱 고함을 크게 내뱉으며 기운을 뿜어냈다. 그를 감싼 자색의 불길은 더더욱 커져 가며 어느새 하나의 불덩이로 변해 버렸다.

“어리석구나.”

“죽어라!”

순간 문영추의 신형이 진철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철은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 최대한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가 내뿜는 기운은 그만큼 위력적이고 거대했다.

쿠앙!

문영추의 검이 지면을 한번 때릴 때마다 웅덩이가 파이며 그 여파가 주변에 있던 무사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크흑! 주변을 물려라! 위험해!”

이미 장내의 싸움은 한참 전에 끝나 있었다. 매화문의 무사들과 청풍장의 무사들은 자칫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하며 다급하게 문영추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괜히 근처에 있다가는 그가 내뿜는 기운의 여파에 휩쓸려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칫! 무식하기는!”

문영추의 검을 피해 허공으로 몸을 띄운 진철은 검로를 바꿔 다시 자신에게 쏘아 오는 그를 바라보며 눈살을 구겼다.

우웅!

진철은 급히 자하신공을 운용해 양손에 기를 한가득 모았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원을 그리며 근처까지 다가온 문영추의 검을 향해 양손을 떨쳐 내었다.

번쩍!

마치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눈부신 빛이 하늘을 밝혔다. 하지만 거대한 두 기운의 충돌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탁!

그때 진철이 바닥에 착지했다. 진철은 한 발을 앞으로 내밀어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오는 문영추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네 결정, 내가 시험해 주마.”

언젠가 진철에게 건넸던 말을 그대로 자하신검에게 돌려준 진철은 내공을 끌어 올려 온몸으로 돌렸다. 이어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것을 느낀 진철은 곧바로 문영추를 향해 쏘아지듯 달려들었다.

퍼컹!

순식간에 문영추의 품속으로 들어간 진철이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그 주먹은 자하신검에 막히고 말았다.

“큭!”

진철과 문영추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진철은 마치 철벽을 두들기는 느낌에 신음을 흘렸고, 문영추는 검을 타고 들어오는 기운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둘 다 서로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기운을 끌어 올리며 손을 놀렸다.

쩌쩌쩌쩡!

진철과 문영추의 손이 빠르게 맞부딪치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너무나 빠른 그 움직임에 그 결투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수십 개의 팔이 동시에 움직이는 착각을 일으켰다.

“흡!”

순간 진철이 숨을 들이켜며 한 발 더 문영추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문영추의 검이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그의 허리를 베어 왔다.

그 순간 진철의 다른 발이 문영추의 바깥으로 돌아가며 빠르게 그의 뒤를 점했다. 순식간에 문영추의 뒤에 서 있는 형태가 된 것이었다. 그것을 문영추 역시 눈치챘는지 급히 몸을 비틀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보다 진철의 행동이 더 빨랐다.

“합!”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진철은 그대로 진각을 밟으며 문영추의 손목을 잡아 공격을 막고는 남은 왼손으로 그의 등을 강하게 때렸다.

퉁!

“커헉!”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너무나 맑은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하지만 문영추의 신형은 강대한 기운에 밀린 듯 빠르게 나가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으아아! 어째서 닿지 않는 것이냐! 어떻게 빈손인 네놈이 이 힘과 겨룰 수 있단 말이냐!”

몇 번 바닥을 구르던 문영추가 곧바로 몸을 일으켜 고함을 내질렀다. 이렇게 간단하게 나가떨어진 자신이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했다. 자하신검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다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

실제로 진철이 밀어 넣은 기운은 호신강기와도 같은 자하신검의 기운을 파고든 것도 모자라 문영추에게 타격을 주었다.

“아직 안 끝났어!”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문영추의 앞에서 진철이 주먹을 쥐고 있었다. 문영추는 깜짝 놀라며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진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무초식의 공격이었지만 그에 실린 위력은 그 어떤 것보다 강했다.

“흥!”

코웃음을 친 진철은 문영추의 공격을 맞받아치지 않고 그대로 흘려버렸다. 문영추의 검이 진철을 스쳐 지나가자 이미 너덜너덜해진 그의 옷자락이 금방이라도 찢겨질 듯 펄럭거렸고, 그 풍압에 진철의 머리카락이 허공을 비산했다. 하지만 진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문영추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런 진철의 입술이 달싹였다.

“검은 단순한 도구일 뿐이다!”

“뭣?”

“그런 검에 취해 혈육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 너의 패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거야!”

또다시 문영추의 품속으로 파고든 진철은 양 주먹을 굳게 쥐고는 팔을 굽혔다.

“받아라! 이것이 바로 화산의 무공이다!”

진철의 양 주먹이 마치 화살처럼 문영추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문영추는 이를 악물며 진철을 지나간 검을 회수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움직임이었다.

진철의 주먹은 자하신검의 기운을 한순간에 흩어 버리고는 그대로 문영추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투확!

문영추의 등이 들썩이며 그의 신형이 일 장 가까이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문영추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자신의 온몸을 가득 채우던 자하신검의 기운이 썰물이 빠지듯 모든 기혈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쿨럭! 이, 이럴 수가…….”

바닥에 누워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모든 기운이 빠져나간 문영추는 아직도 이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허망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영추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후우…….”

진철은 몸 안에서 활개 치는 내공을 잠재우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쓰러져 있는 문영추를 향해 다가갔다.

“흠…….”

문영추를 향해 힐끗 시선을 준 진철은 허리를 숙여 그의 손에 쥐여 있는 자하신검을 뺏어 들었다.

-이번에도 그대의 승리로다. 하지만 기억하라, 주인이여. 그대가 또다시 나약해진다면 난 언제든지 그대를 잡아먹기 위해 기회를 엿볼 것이다.

자하신검을 쥐는 순간 진철의 머릿속에 자하마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철은 그 말에 미소를 만들며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미안하지만,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진철은 고개를 돌려 대중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매화 무늬가 그려진 무복을 입은 무사들을 보고 강하게 검을 바닥에 꽂아 넣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화산파 제십칠 대 장문인, 진철이라고 하오!”

진철의 말에 매화문 무사들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소문주인 문수강은 말할 것도 없고 문주인 문영추마저 정신을 잃은 지금,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다. 그저 진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대들은 화산파의 유지를 이어받았다고 들었소. 그래서 본 문의 항렬로 나는 그대들의 최고 어른임을 주장하겠소. 이의 있는 자는 지금 당장 앞으로 나서시오!”

이제야 이십 대 중반을 넘은 진철이건만 그보다 훨씬 나이 많은 인물들조차 아무런 말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무림도 그렇지만 도가 계열의 문파에서 항렬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오? 그렇다면 나를 최고 항렬이라 인정하는 것으로 알고 말하도록 하겠소. 매화문은 들으라! 지금 당장 문주인 문영추를 비롯해 모든 매화문 무사들은 문으로 복귀하도록! 그리고 내가 매화문으로 돌아갈 때까지 봉문을 명한다!”

장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매화문 무사들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진철을 바라보았고, 청풍장의 무사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소!”

그때 한 사내가 매화문 무사들의 틈에서 튀어나오며 항의했다. 진철은 그에게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난 풍화검대주 박우라 하오.”

묵중해 보이는 중검(重劍)을 들고 있는 사내가 포권을 취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박우라……. 좋아. 그 이유는?”

“당연하지 않소? 아직 우리 매화문은 당신을 화산파의 장문인이라 인정하지 않았소!”

“인정? 내가 왜 당신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지?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신들이 아닌가?”

반박하던 박우는 진철의 말에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들이 화산파의 유지를 이었다고 주장하는 이상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닌 자신들이었다. 물론 그가 화산파의 장문인이 확실하다면.

“하,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정말 화산파의 장문인이고 우리 매화문에서 최고 항렬이 된다고 쳐도, 문파의 봉문은 그렇게 독단적으로 내릴 수 없소!”

“우습군. 화산파에서 장문인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화산파의 유지를 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것도 모른다는 것인가? 거기에 당신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들, 그 무공들의 원본을 바로 내가 지녔고 익히고 있다. 그래도 아직 나를 부정하려는가?”

“뭐?”

박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매화문에 있는 화산파의 비급 중 진본은 몇 개 없었다. 그것도 대부분의 비급은 구결조차 몇 군데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진철은 그런 비급들의 원본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원본들만 구한다면 매화문은 한층 더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 그렇다면 혹시… 당신이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이?”

박우는 문영추와 격돌할 때 자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진철의 몸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화산파 장문인만이 익힐 수 있는 자하신공이다.”

“그런!”

웅성웅성!

일순간 장내가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그 웅성거림은 대부분 매화문 무사들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들 역시 자하신공이 뜻하는 바는 잘 알고 있었다.

화산파 장문인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신물인 자하신검이고, 다른 하나는 장문인만이 익힐 수 있는 자하신공이었다.

“아직도 내 말이 거짓이라 여겨지는가?”

“그, 그게…….”

박우는 머뭇거리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일생을 칼만 휘둘러 온 그의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나올 리가 없었다. 박우는 일단 여기서 물러나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이런 중대한 사건은 내 권한 밖이라오. 일단 본 문으로 돌아가 장로들께 말씀을 올리도록 하겠소.”

“그러든가.”

진철은 의외로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우는 다급하게 그나마 멀쩡한 동료들을 불러 쓰러진 자들을 부축하도록 하고 문영추를 안아 들었다.

“곧 가까운 시일 내에 보게 될 것이오.”

“…….”

되돌아가던 박우는 진철에게 말을 건넸고 진철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박우는 곧바로 바닥을 박차 청풍장을 벗어났다.

썰물이 빠지듯 매화문의 무사들이 청풍장을 빠져나가자 청풍장의 무사들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 우리… 이제 산 건가?”

“그렇군. 우린 살아남은 거야.”

한 무사의 입에서 안도와 의문이 섞인 말이 흘러나오자 이곳저곳에서 서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곧 활짝 펴지며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매화문에게 이겼어!”

“이제 다시는 저놈들도 우릴 깔보지 않을 것이야!”

“청풍장 만세!”

“만세!”

청풍장 무사들로 인해 장내는 갑작스레 시끌벅적해졌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때문이리라.

진철은 뒤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런 진철을 발견한 무사들이 입을 닫기 시작했고 곧 장내는 고요함이 감돌았다.

“저… 진 대협.”

한 무사가 용기를 내어 진철에게 말을 건넸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진철이 문영추와 격돌하던 모습이 생생했다. 만약 진철의 검이 자신들을 향하게 된다면 청풍장의 멸문은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행입니다.”

“예?”

진철의 말에 무사가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진철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지, 진 대협!”

“아아, 괜찮습니다. 좀 쉬고 나면…….”

그 말을 끝으로 진철이 물 먹은 벼루처럼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살성에 당한 상처와 충격으로 인해 그의 몸은 이미 예전의 한계치를 넘었던 것이다.

“진 대협!”

그가 쓰러지자 청풍장의 무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진철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 보였다.

***

달이 구름에 가려져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밤, 한 인영이 거대한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장원에서는 커다란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으아아!”

사파 문파인 만곡문의 문주 세만수는 자신의 호위 무사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눈은 앞에 서 있는 사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검은 무복의 사내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를 향해 묵도를 겨누었다.

“네가 만곡문의 문주인가?”

“그, 그렇다! 이곳이 감히 어딘지 알면서도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이냐!”

“킥! 그렇다면 어쩔 텐가?”

사내가 실소를 머금으며 묻자 세만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 많던 무사들이 눈앞의 사내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결코 자신이 상대할 만한 자가 아닌 것이다.

“마, 만곡문은 사마련주 구천휘 님께서 뒤를 봐주시고 계신 곳이다! 네놈이 이러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결코 네놈을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야!”

“아하, 그래서 가서 이르겠다? 그럼 할 수 없군. 죽이는 수밖에.”

“어?”

“이른다며? 그럼 죽여서 입을 막아야겠지.”

묵도가 조금씩 다가오자 세만수는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엎드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대협! 제가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죽으면 풍이 들어 거동도 못하는 어머니와 여우같은 마누라, 그리고 토끼 같은 자식들은 누가 보살핀단 말입니까? 제발 노여움을 푸시고 목숨만은…….”

이때를 위해 준비해 왔다는 듯 세만수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사내는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웃음을 흘리고는 묵도를 그의 턱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조금씩 힘을 주어 올리자 세만수의 얼굴 역시 조금씩 따라 올라갔다.

“그렇다면 내가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예에! 말씀만 하시죠! 제가 아는 것이라면 모든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말을 하는 세만수에게 사내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런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려보는 맹수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칠무회주의 은신처가 어디더냐?”

“……!”

사내의 말에 세만수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반응에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모르지는 않나 보구나.”

“그, 그곳은 어째서…….”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넌 나에게 그곳이 어딘지만 말해 주면 된다.”

세만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무엇보다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세만수는 오랜 시간 사마련에 허리를 굽혀 살아와 그런 눈빛을 한 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나중에 칠무회주에게 무슨 화를 입을지 몰라도 일단 지금 살고 봐야 했다.

“그, 그곳은…….”

세만수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훑어보며 사내만이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사내는 그가 알려 준 장소를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가지. 네가 해 줘야 할 것이 있다.”

“뭐든 말씀만 하시지요!”

그가 말하는 건 뭐든지 이뤄 주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사내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며 문 쪽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에서 세만수는 피비린내를 느꼈다.

“칠무회주에게 전해라. 이 주재구가 간다고.”

그 말을 끝으로 주재구의 신형이 세만수의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큰 석굴 안은 거대한 어둠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석벽 곳곳에 횃불이 매달려 있어 주변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곳에 두 명의 장년인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주위에는 커다란 광장처럼 넓은 공간이 있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비석이 굳건하게 서 있었다.

“드디어 찾았군.”

“…….”

장포를 두른 인물이 팔을 벌리며 말했다. 횃불에 비치는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피어올라 있었다.

그는 손을 거둬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물건을 집었다.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는 것이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복마령. 사람들은 단지 이것을 무림의 기보 중 하나인 것으로만 알고 그 효능은 모르지.”

장포의 장년인은 고개를 틀어 옆에서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예, 현재 섬서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

“좋아. 어차피 할 거면 확실히 하는 것이 좋겠지. 섬서에 들어오는 즉시 이곳으로 오라고 전해라.”

“예.”

장년인은 입술을 틀어 올리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크크큭! 드디어 천 년의 비원이 풀리는구나! 크크크, 크하하하!”

쿠르릉!

그 순간 장년인의 앞에 서 있는 비석이 진동을 일으키며 검은 빛을 토해 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도다. 흑천마인(黑天魔人)이여,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

광기에 찬 장년인의 눈이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

“아! 아가씨. 이런 이른 아침에 어쩐 일이십니까?”

“안녕하세요. 혹시 안에 안 아저씨 계신가요?”

“예, 안에 계십니다. 오늘도 약을 가지러 오신 겁니까?”

“예.”

장은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경비 무사가 안쓰럽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충격이 다 가시지 않으셨을 텐데 좀 들어가 쉬시지 않고.”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다른 분들이 걱정인걸요. 아직 침상에 누워 계신 분들이 많으신데 제가 어떻게 편히 쉴 수 있겠어요?”

“아가씨.”

장은영의 말에 감동이라도 받은 듯 경비 무사는 말끝을 흐렸다. 장은영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약재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찔렀다.

“아, 오셨습니까, 아가씨. 오늘도 약을 지으러 오신 겁니까?”

“예.”

안 의원의 말에 장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아저씨라 불리는 중년인은 과거 장시우와 연을 맺어 청풍장에서 의원 노릇을 하게 된 자였다.

“장주님은 좀 어떠십니까?”

“아직 거동은 힘드신 것 같지만 비교적 많이 좋아지셨어요. 모두 안 아저씨 덕분이에요.”

“하하, 제가 해 드린 게 뭐가 있다고. 모두 아가씨의 지극정성 때문이지요. 제가 하루빨리 장주님을 찾아봬야 할 텐데 보시다시피 아직 상처가 심한 자들이 많은지라…….”

안 의원이 말끝을 흐리자 장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그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안 아저씨의 힘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데요? 참, 여기 아버지의 상태를 적어 왔어요.”

“이리 줘 보시지요.”

장은영은 안 의원이 손을 내밀자 그의 손에 곱게 접은 종이를 올려놓았다. 안 의원은 곧바로 종이를 펴 그 안에 적힌 장시우의 상태를 읽어 보았다.

“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안 의원은 곧바로 약재가 쌓여 있는 곳으로 가 여러 약재들을 종이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가만히 서 있던 장은영이 다리가 약간 불편하다고 여겨질 쯤에 안 의원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말씀드렸다시피 장주님께서는 외상보다는 내상이 짙으십니다. 무공 수련 같은 건 절대 하지 마시고 가벼운 산책 정도로만 몸을 풀어 주시라 말씀드리십쇼.”

“예. 고마워요, 안 아저씨.”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장은영은 안 의원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곧바로 의원을 나왔다. 그러고는 약을 달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 몇몇의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눴다.

“후우.”

장은영은 이곳저곳에서 아직도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매화문의 무사들이 물러간 지도 어느새 삼 일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비교적 나아졌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장 곳곳에서는 비명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었다. 그만큼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심하게 다친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새벽부터는 그나마 나은지 간간이 신음 소리만 들려올 뿐 비명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 진 대협!”

그때 장은영의 몇 장 앞에서 누군가에게 손을 흔드는 무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장은영은 그들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다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모퉁이로 숨어들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대협이란 말은 저에게 과분합니다. 그냥 진철이라고 불러 주세요.”

“아니,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 매화문으로부터 저희들을 구해 주셨는데 진 대협께서 대협이 아니면 대체 누가 대협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진 대협께서 최고의 후기지수인 신룡이셨다니!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하하!”

무사의 말에 옆의 동료가 맞장구치자 그들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진철은 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거참.”

삼 일 전 정신을 차린 진철은 매화문과의 일이 일단락된 후 머리와 턱수염을 정리했다. 그러자 한결 깨끗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뒤로 진철은 청풍장 내에서 영웅으로서 칭송받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를 화산신검(華山神劍)이라 불렀다.

“아, 그렇지. 혹시 안에 장주님께서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그 몸으로는 아직 움직이시기 무리십니다.”

“그렇다면 깨어 계십니까? 뭐 여쭤볼 것이 있어서.”

“아! 지금 장주님께서는 깨어 계십니다. 안 그래도 장주님께서도 대협에 대해서 무척 궁금하신 듯합니다. 들어가시지요.”

“그렇습니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예!”

진철이 포권을 취해 무사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장시우가 머물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구석에 숨어 있던 장은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숨을 크게 몰아쉰 그녀는 쉴 새 없이 뛰고 있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뛰고 있는 심장이 그녀의 손에 느껴졌다. 언제부터인지 그를 볼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탓에 그가 정신 차린 지 삼 일이나 되었건만 아직 제대로 만나 보지 못했다.

“대체 왜 이러지.”

자신의 심경 변화에 의문을 품던 장은영은 혹시 누군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볼까 싶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아, 진 대협!”

“안녕하세요.”

장시우의 방에 도착한 진철은 자신을 알아보는 호위 무사들의 인사에 포권을 취해 보였다.

“혹시 안에 장주님께서 계십니까?”

“예! 마침 진 대협께서 오신다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 드리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아마 장주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럼 잠시만.”

호위 무사는 몸을 돌려 문 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장주님! 진 대협께서 오셨습니다.”

“아! 어서 뫼시어라.”

안에서 약간 지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위 무사는 다시 진철을 바라보았다.

“자, 들어가시지요.”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호위 무사가 문을 열어 주자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딸깍.

“어서 오시게, 진 장문인.”

뭔가 부딪히는 거친 소리와 함께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철이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아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는 장시우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 장문인?”

“화산파의 장문인이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장문인이라 불러야겠지.”

장시우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진철은 그를 바라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역시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많이 사용했는지 방 안에는 약초 특유의 냄새가 배어 나왔다.

“자, 와서 앉으시게.”

장시우가 손을 뻗어 반대쪽의 의자를 가리키자 진철은 걸음을 옮겨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 몸은 좀 어떠신가?”

“저야 괜찮습니다. 원래 그렇게 심한 부상도 아니었으니까요.”

“심한 상처가 아니었다라…….”

“하하하.”

장시우가 말끝을 끌자 진철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실제로 진철의 내상은 보통 사람이라면 절명하고도 남을 만큼 심각했다. 장시우의 내상은 진철이 입은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온몸의 기혈이 뒤틀리고 근육조차 군데군데 끊어져 숟가락질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다음 날 진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완벽한 각성으로 남아 있던 살성의 기운이 그의 몸을 치유하며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청풍장의 무사들에겐 그가 괴물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진철이 스스로 심한 내상이 아니라고 말한다는 건 자기가 괴물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뭘.’

진철 역시 살성의 기운에 그런 효과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자, 일단 드시지요.”

장시우가 진철에게 찻잔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진철은 그 찻잔을 받아 들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도 상처가 다 낫지 않았는지 그의 몸에 감긴 붕대에서는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아직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처가 심해 보이는데.”

“훗, 괜찮소. 지금은 본인의 상처보단 앞으로 청풍장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라서 말이오.”

장시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진철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요 이 년간 바보가 되어 지내 왔다지만 그 시간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진철의 기억 속에 장시우는 소나무같이 부러지면 부러졌지 결코 굽히지 않는 진정한 사내였다. 그는 분명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침상에서 일어나 몰래라도 일을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진 장문께서는 어쩐 일로 오셨소?”

“예?”

“뭔가 볼일이 있어 오신 것 아니오?”

“아, 예. 여쭤볼 게 좀 있어서.”

“훗, 잘됐구려. 나도 마침 장문인께 여쭤볼 게 있었는데 말이오.”

장시우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진철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이제 보니 능구렁이도 이런 능구렁이가 없었다.

“그럼 먼저 물어보시구려. 무엇이 알고 싶소?”

“다름이 아니라, 요 이 년간 무림의 정세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바보가 되어 있었지요. 허허허!”

“하하하!”

진철의 말끝을 장시우가 받으며 웃음을 터트리자 진철 역시 똑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동안 웃던 장시우와 진철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멈췄다.

“흠, 무림의 정세라…….”

장시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거라도 좋습니다.”

“그렇소? 그럼 차근차근히 이야기해 드리겠소.”

장시우는 탁자 위에 양손을 올려 마주 잡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먼저 이 혈천대전에 대한 것이오. 장문인도 알고 있을 것이오. 이 년 전 갑자기 발발한 혈천대전을 말이오.”

“예?”

장시우의 말에 진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당시 진철은 혈궁과의 일 때문에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때문에 남림이 운남을 공격했다는 소식조차 들은 적이 없었다.

“모르는 것이오?”

“예, 제가 그때 좀 바삐 돌아다녀서.”

“흠, 그럼 그때부터 말씀드려야겠군. 남림이 운남을 공격했다오. 그들은 순식간에 운남의 반을 삼키더니 기어코 운남 전체를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기에 성공했소. 너무나 빠른 움직임이었기에 무림맹에서는 제대로 대처조차 못했다오.”

그의 말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하라는 뜻이리라. 장시우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하더라도 무림맹에서 무인들을 지원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와 거의 동시에 사파의 중심인 사마련이 무림맹을 향해 정사대전을 선포했기 때문이라오.”

“정사대전.”

정사대전이란 말에 진철은 얼굴을 구겼다. 그 역시 정사대전이 얼마나 큰 전쟁인지 사부인 옥린수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인이 아닌 일반 양민들조차 수도 없이 죽어 나간 전쟁이 바로 정사대전이었다.

“그런데 정사대전이 아닌 혈천대전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그동안 무림에 등장하지 않았던 마교와 포달랍궁, 그리고 북해빙궁 등 새외 세력들까지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라오.”

“네?”

얼굴을 구기고 있던 진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저런 규모의 전쟁은 옥린수에게도 들어 보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고금을 통틀어 가장 큰 전쟁이 아닌가?

“그렇게 놀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오. 각 문파만 해도 무림을 피에 잠기게 만드는 자들인데 그들이 한 번에 쏟아져 나와 전쟁에 참여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오.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무림맹과 마교가 손을 잡고 동맹을 선언한 것이오. 그리고 웃기게도 북해빙궁 역시 동맹을 맺었다오.”

“마교하고 무림맹이?”

“거기에 사마련과 남림, 포달랍궁이 동맹을 맺었소.”

“…….”

뒤이어 나온 장시우의 말에 진철은 할 말을 잃었다. 이거야말로 제대로 한번 싸우자는 것이 아닌가!

‘진짜 싸움에 미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오. 절대고수 오천 중 한 명인 칠무회주 천무제 담덕이 정파를 배신하고 사마련 쪽으로 붙었다는 것이오.”

“칠, 무회!”

진철이 눈을 부릅떴다. 칠무회의 말을 듣는 순간 북궁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시우는 그런 진철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하여 입을 열었다.

“지금도 중원 각지에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오. 마교와 포달랍궁은 전면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고, 북해빙궁 역시 중원으로 끊임없이 무인들을 투입하고 있다오. 사마련과 무림맹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남림은 운남을 차지한 후로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오. 아무튼 사마련과 무림맹은 그렇게 서로 땅을 차지하고 빼앗기고 하다가 지금은 섬서를 경계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라오. 섬서를 차지하는 세력은 이 전쟁에서 아마 승기를 얻게 될 것이오. 그만큼 이 전쟁에서 섬서의 지리적 위치는 특별하다오.”

장시우는 목이 마른지 잠시 찻잔을 들어 입을 축였다.

“음.”

진철은 저도 모르게 피가 끓어올라 신음을 흘렸다.

“어디 편찮으시오?”

진철이 이를 악물며 식은땀을 흘리자 장시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진철은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갑자기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서.”

“음, 아무튼 그런 지리적 위치 때문인지 요 며칠 전부터 사마련의 세력이 섬서로 집중되고 있다오. 그리고 무림맹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오. 만약 그 두 세력이 섬서에서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섬서에서는 말 그대로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오.”

“…….”

진철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섬서는 지옥 그 자체가 될 터. 힘없는 양민들은 끊임없이 울부짖을 테고 무인들의 피와 시체가 섬서를 덮을 것이다.

장시우는 다시 찻잔을 향해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뭐 더 궁금한 것이 있으시오?”

“예.”

“무엇이오?”

“천무제,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천무제라…….”

장시우는 말끝을 늘어트리며 진철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지한 눈빛을 한 진철의 모습에 장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칠무회 역시 섬서로 모이는 중이라고 알고 있소. 내 생각에는 아마도 사마련주와 함께 움직이지 않나 싶소. 실제로 칠무회주는 사마련주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자주 발견되었다오.”

“그럼 사마련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진철이 되묻자 장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련주, 그는 지금 섬서 장안으로 향하고 있소.”

“장, 안!”

순간 진철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장시우는 그 눈빛에 저도 모르게 일어날 뻔했다. 날카로운 수천 개의 검이 자신을 향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흠흠! 장문인.”

“예? 아, 죄송합니다.”

장시우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그를 부르자 진철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얼른 사과했다. 장시우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내비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엔 내가 묻도록 하겠소.”

“예, 말씀하시죠.”

“진 장문인이 화산파의 장문인이라는 사실은 알겠소. 자하신검을 지니고 화산파의 무공을 그렇게 깊이 익혔다면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테지. 그런 뜻에서 진 장문인은 매화문을 어찌할 생각이시오?”

“음.”

진철은 잊고 있던 매화문을 떠올렸다. 정파의 기둥이라는 구파일방 같은 거대 문파는 아니지만 그래도 작지 않은 매화문이었다. 만약 문영추가 작정하고 청풍장을 없애려고 했다면 청풍장은 이미 진작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 매화문의 문주가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그들이 잠잠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청풍장을 위협할 힘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혹시 그들이 다시 올까 봐 걱정되십니까?”

“훗, 아니라고는 못하겠구려.”

장시우는 순순히 인정했다. 지금 다시 매화문이 쳐들어온다면 그땐 정말 청풍장은 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음,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들도 귀가 있다면 제 이야기를 들었겠죠. 거기에 지금은 매화문 문주가 큰 부상으로 부재중이지 않습니까? 만약 금세 회복된다 하더라도 제가 한 말이 있기에 내부에서 많은 혼란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일단 저의 일이 일단락되면 그들에게 말했다시피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매화문, 그들이 정말로 본 파의 유지를 이었다면 본 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요. 물론 그 전에 그들에게 정파란 무엇인지 새겨 줘야겠지만요.”

“훗, 그렇소? 그렇다면 그들에게 급한 것은 우리 청풍장이 아니라 진 장문인이겠구려.”

“그럴 겁니다.”

“장문인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다행이구려.”

“하하하, 미안할 게 뭐 있습니까. 제 생명의 은인은 장주님 아니십니까?”

진철은 손을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장주님께서도 쉬시면서 하시죠.”

“후후, 그럼 가서 쉬시구려. 내 모습이 이래서야 멀리 나가지 못할 것 같구려.”

장시우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자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

“크읏!”

장훈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매화문과의 싸움에서 선전을 한 그였지만 적은 경험으로 인해 금세 적들에게 허점을 내주었고 그만 어깨에 검이 꽂히고 말았었다. 그 순간 문영추가 폭주하며 내뿜은 기파에 휩쓸려 돌부리에 머리를 박고 기절했던 그였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오라버니.”

장은영은 장훈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붕대를 조심스레 풀고는 그곳에 금창약을 발랐다. 다행히 근육이나 뼈가 상하진 않아 조금만 요양을 취하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음!”

장은영이 새로운 붕대로 어깨를 감싸자 장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장은영은 그런 장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으음. 그래, 괜찮다.”

장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은영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붕대를 감고는 약사발을 건넸다. 안 의원에게 얻어 온 약재를 달인 약이었다.

꿀꺽!

약사발을 받아 들고 약을 단숨에 털어 넣은 장훈은 그릇을 내려놓으며 숨을 내쉬었다.

“후우, 네가 고생이 많구나.”

“고생이라뇨. 아니에요.”

장훈의 말에 고개를 저은 장은영은 그의 손에서 그릇을 건네받아 정리했다.

“장의 분위기는 어떻더냐?”

“괜찮아요. 그 일이 있은 후에 뭐랄까, 더욱 서로를 아끼는 기분이 들어요.”

“그렇구나.”

장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상에 걸쳐 놓은 상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산책 좀 해야겠구나.”

“더 누워 계세요. 그러다 상처가 덧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장은영이 말리자 장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침상에만 누워 있었더니 답답하구나. 그리고 이 정도의 상처로 엄살 부릴 만큼 이 오라비는 약하지 않단다.”

“오라버니도 참.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장은영은 장훈이 들고 있는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장훈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장은영이 조심스레 그에게 상의를 걸쳐 주고 옷깃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나갈 채비를 다 갖추자 장훈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은영은 그런 장훈의 옆으로 다가가 그를 부축해 한발 한발 천천히 방을 나섰다.

“으음!”

복도를 걸어 건물을 나오자 내리쬐는 햇빛이 눈부신지 장훈이 손을 들어 해를 가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 안에는 아직도 싸움의 잔해가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두움보단 활기가 더욱 차올라 있었다.

“어? 장 소저.”

그때 그들의 옆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훈과 장은영은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장훈의 얼굴은 경직되었고, 장은영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곳에는 장시우를 만나고 나온 진철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예.”

진철이 다가오며 인사하자 장은영은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을 바라볼수록 점점 심장이 두근거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음?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안색이…….”

붉게 달아오른 장은영의 얼굴에 진철이 의문을 표하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진 소협이야말로 괜찮으세요? 상당히 심한 상처를 입으셨었잖아요.”

“하하! 저는 괜찮습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멀쩡해지더군요.”

“아.”

진철이 볼품없는 양팔을 들어 알통을 만들어 보이자 그 모습도 멋있어 보이는지 장은영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흠흠!”

장은영과 진철의 사이에 어색하게 껴 있던 장훈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제야 진철이 그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어? 너는?”

“너?”

진철의 말에 장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자신에게 삿대질을 한 것도 모자라 반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훈은 청풍장의 은인이자 영웅인 그에게 뭐라 할 수 없어 간신히 얼굴을 피며 손을 내밀었다.

“청풍장의 소장주, 장훈이라 하오.”

장훈이 억지로 미소를 만들며 말하자 진철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갑작스레 발을 뻗어 장훈의 앞으로 다가갔다.

딱!

“큭! 이, 이게 뭐하는 짓이오!”

장훈은 이마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왜? 아프냐?”

“당연하지 않소!”

“소?”

“…….”

“소?”

“…습니까.”

장훈이 존댓말을 하며 말꼬리를 내렸다. 진철은 그런 장훈을 바라보며 실소를 지었다.

“내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항렬도 위다. 너네 아버지도 함부로 나에게 말을 낮추지 않아. 알겠냐?”

“크윽!”

“그리고 그동안 날 많이 괴롭혔잖아? 이걸로 비겼다 치지, 뭐.”

장훈은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주먹을 쥐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진철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왜? 불만 있냐? 그러다 한 대 치겠다?”

“…….”

진철의 빈정거림에 장훈은 순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다. 그만큼 그가 얄미웠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으며 힘이 들어간 주먹을 풀었다.

“훗, 그럼 하던 거 하라고. 아, 장 소저,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예!”

진철이 인사하자 장은영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진철은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보이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으득!”

장훈은 뒤돌아가는 진철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그런 그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가며 주먹이 쥐어졌다. 그때 그의 손을 장은영이 손을 뻗어 부드럽게 감쌌다.

“나쁜 분은 아니세요.”

“…알고 있다.”

짧게 대답한 장훈은 혀를 차고는 그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거칠게 몸을 돌렸다. 장은영은 그런 장훈의 모습에 미소를 짓다가 진철을 돌아보고는 홀로 걸어가는 장훈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날이 저물자 청풍장 안은 눈에 띄게 조용해졌다. 아직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오긴 했으나 새벽이 되자 그마저도 줄어들었다. 청풍장 안을 돌아다니는 무사들만이 혹시 매화문이 다시 습격해 올까 신경을 곤두세우며 경계를 서고 있을 뿐이었다.

조용한 것은 아직까지도 깨어 있는 진철 역시 마찬가지였다.

“흠.”

진철은 침상에 누워 잠들지 못하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림에 나온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여러 고수와도 겨뤄 왔다. 이젠 무림초출이라는 명칭은 더 이상 그의 뒤에 따라붙지 않았다.

무공 역시 처음 무림에 입문했을 때에 비하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어서며 더욱 발전했다. 이 년 전에는 펼치기도 무리였던 만개화향마저 자하마인과 살성의 동화로 그 오의를 터득해 검법이 아닌 다른 무공에도 그 진위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무공으로 칠무회주에게 가서 진 빚을 갚아야 했다.

하지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자신은 이 혈천대전에 정면으로 뛰어드는 격이 된다. 그로 인한 파장은 작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일개 낭인이 아닌 정파의 전설이라는 화산파의 장문인이었으니까.

‘아직도 화산을 기억하는 자들이 많은가.’

진철은 황량했던 상궁을 떠올렸다. 쓰러져 가는 건물들과 아무도 발을 딛지 않던 산길. 그곳에서 옥린수와 자신은 쓸쓸하다면 쓸쓸하게 살아왔다. 그렇게 화산파를 방치한 그들이 화산파를 정파의 전설로 치켜세우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졌다.

‘말아먹지 말아라.’

진철은 사부인 옥린수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이제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과연 그 말의 뜻은 무엇일까? 찬란했던 과거의 화산파처럼 부흥을 시키라는 것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더 이상 말아먹지 말고 제자나 하나 구해서 유지나 시키라는 것일까?’

그렇게 깊이 생각에 빠지던 진철은 갑작스레 양손으로 머리를 쥐고는 뒤흔들었다. 역시 자신은 머리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성향이 아니었다. 조금만 생각을 깊이 하면 머릿속이 덜컹거리는 기분이었다.

‘네가 이제 화산이니라.’

“아!”

그때 다시 옥린수의 말이 떠오르자 진철이 탄성을 터트리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내가 화산이라 했으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거잖아?”

진철은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사부는 항상 자신에게 뭔가 요구하는 것이 없었다. 단지 무공 수련 때만 엄했을 뿐, 다른 땐 친할아버지와도 같은 그였다.

“내가 지금 당장 원하는 것.”

진철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진철은 침상에서 일어나며 탁자 위에 놓은 자하신검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받은 빚을 돌려주는 것!”

날카롭게 눈을 빛낸 진철의 신형이 침상에서 꺼지듯 사라지더니 탁자 옆에 나타났다. 진철은 주저 없이 자하신검을 집어 들고는 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딸깍!

문을 열자 조용한 복도에 소리가 울렸다.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지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철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이년간 살아온 집이었다. 그런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화산에서 하산할 때처럼.

“음!”

건물 밖으로 나온 진철은 앞에 단아하게 서 있는 여인의 모습에 신음을 흘렸다. 장은영이 양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채 서서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장 소저?”

진철이 그를 부르자 눈을 감고 있던 장은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아버지께 들었어요, 진 대협이 오늘내일 중으로 떠나실 것이라고.”

“아.”

진철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모르게 떠나려 했건만 장시우는 이미 그의 행동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장은영은 진철의 미소를 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바보.”

“에?”

그때 가늘게 들려온 목소리에 진철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장은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떨려 오는 것 같았다.

“멍청이.”

“저, 저기, 장 소저?”

“왜 가려는 거야? 그냥 여기 있으면 되잖아.”

장은영이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이자 진철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에, 또 저기.”

“내가 요 이 년 동안 얼마나 잘해 줬는데!”

장은영의 눈에서 작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진철은 그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에게 잘해 줬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바보였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당과도 많이 가져다주고 그랬잖아. 응? 그냥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돼?”

장은영이 주먹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말하자 진철은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장은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같이 놀러 가기로 했잖아. 응? 시장에 가서 맛있는 먹을거리도 사 먹고 구경도 하기로 했잖아.”

“…….”

“항상 같이 놀기로 했잖아. 날 혼자 두지 않기로 했잖아!”

장은영은 가슴속에서 답답한 것을 토해 내듯 소리쳤다. 어느새 그녀의 앞까지 다가간 진철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았다.

“흐흑!”

진철의 품 안에 안긴 장은영은 얼굴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눈물을 흘렸다.

“가지 마아.”

그녀는 진철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진철은 그저 아무런 대꾸 없이 그녀를 계속 안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흐느꼈을까. 진철은 장은영을 품에서 떨어트리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장은영도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철을 바라보았다.

“가야 합니다.”

“…어째서?”

“저를 위해 희생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가 가는 길 심심치 않도록 길동무라도 보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소저께서는 저를 은혜도 모르는 진짜 바보로 만드실 생각입니까?”

진철이 진지한 눈으로 말하자 장은영은 상기된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진철은 그런 장은영에게 잔잔한 미소를 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장주께 말씀드렸듯이 또 돌아올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그때에는 약속했다시피 함께 저잣거리도 가고 이것저것 많은 것을 구경… 컥!”

말을 하던 진철이 갑작스레 숨을 들이켰다. 장은영이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은 것이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아녀자의 손길이 얼마나 아프겠냐마는 진철은 얼굴을 구기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익! 가 버려, 이 바보야!”

장은영은 그렇게 소리치고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달려갔다.

진철은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바로 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런 진철의 얼굴은 방을 나왔을 때보다 한결 밝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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