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전장 속으로
똑똑!
여행객 차림의 한 사내가 앞의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뉘시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물이나 한잔 주시오.”
“오늘 비가 오고 있소?”
“날은 화창하나 곧 비가 올 것 같소.”
딸깍!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리가 들려오며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재빨리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어서 오시오.”
집주인으로 보이는 자가 포권을 취하며 사내를 맞이했다. 사내 역시 마주 포권을 취하며 그의 인사에 대답했다. 집주인은 사내에게 탁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간 별다른 소식 없었소?”
“그렇소. 아직은 조용하다오. 하지만 그것도 잠시겠지.”
“음.”
집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탁자로 다가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내 역시 그의 앞에 마주 앉으며 품속에서 서찰을 하나 꺼내 들었다. 서찰에는 무림맹의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사마련주와 칠무회주가 이 섬서에 왔다는 정보는 확실하나 그들의 행보는 아직 불명이라오.”
“장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은 어찌 된 것이오?”
“그것은 확실치 않소. 아직 그를 본 사람이 없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일단 정황을 지켜봐야 할 듯싶소. 그렇게 행보를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거나 함정이 있다는 것이니까.”
“하긴, 오천에 속하는 사마련주와 칠무회주가 함께 행동하니 두려울 것이 없겠지. 하지만 그 소문의 진위 정도는 파악해야 하지 않겠소?”
“물론이오. 그래서 장안에도 정찰대를 파견했다오.”
“음, 그렇구려. 부디 조심해야 할 터인데.”
집주인은 사내로부터 서찰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섬서의 장안은 이미 사도연맹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그런 곳에 정파의 정찰대를 보낸다는 것은 사지로 몰아넣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참, 다른 곳의 정황은 어떻소?”
“다른 곳도 이 섬서와 다를 바가 없소. 다만 이 섬서가 더 살벌하기는 하나 다른 곳도 마찬가지. 지금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오.”
“후우, 이 빌어먹을 전쟁이 대체 언제 끝나려는지.”
“그야 물론 사도 무리를 모두 몰아내면 끝나지 않겠소?”
“그거야 그렇지만……. 음, 그럼 이만 가 봐야겠소.”
사내가 탁자에 놓인 대접을 들고 일어섰다. 대접에는 맑은 물이 사내의 반응에 맞춰 흔들거렸다. 사내는 대접을 입으로 가져가 단숨에 비우고는 집주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럼.”
“무운을 빌겠소.”
사내는 곧장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가 나가자 집주인은 사내가 건네준 서찰을 풀어 보았다. 여행객으로 변장한 사내가 밖의 동태를 살피며 필요한 정보를 모은 서찰이었다. 집주인은 그 서찰을 읽으며 무림맹에 보고할 만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간추리기 시작했다.
***
섬서에서 비교적 큰 도시인 장안은 평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사는 도시 중 하나였다. 거기에 섬서의 성도인 서안과 근접해 성도로 향하는 여러 행상인들이 드나들곤 했다. 그런 장안에 언제부턴가 무림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갑작스레 칼부림이 일어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발에 채일 정도로 수많은 무림인들이 장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모두 사마련의 표식을 지닌 사파의 무인들이었다.
“음.”
사마련의 말단 무사인 단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행상인들을 바라보았다.
“헤헤헤.”
그런 단무의 눈초리를 느낀 것인지 행상인들이 헤픈 웃음을 지으며 손을 비볐다.
“저, 무슨 문제라도?”
행상인이 입을 열자 단무는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행상인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명패가 들려 있었다.
“거래를 하기 위함이라고?”
“예에! 물론입죠! 아시다시피 이 장안에는 많은 물건들이 거쳐 가는 도시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요? 그렇기에 한밑천 잡으려고 온 것입니다요.”
“흐음, 그래?”
행상인의 말에도 단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본래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장안이기에 의심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단무는 이렇게 해야만 들어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아니나 다를까, 손을 비비며 말을 건네던 행상인이 슬쩍 단무에게 다가왔다.
“힘든 일을 하시는 것 같으신데 목이나 좀 축이시라고.”
“이건?”
“저희들의 조그마한 성의입니다요. 헤헤.”
단무는 자신의 손으로 들어오는 은자를 바라보고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지금 대사마련의 무사인 나 단무 님께 이딴 뇌물이나 먹고 떨어지라는 게냐? 네놈들! 하는 짓이 수상하구나!”
단무가 힘 있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행상인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요! 실은 저희가 거래할 물건이 곡물이라……. 아시잖습니까? 곡물은 신선도가 생명인 것을. 그렇기에 어서 가야 하는지라 선처를 바라는 마음에 그만.”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았다. 나 단무 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 줄 터이니 다신 이런 걸 건네지 말거라!”
단무는 그렇게 호통을 치고는 은자를 재빨리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물론 주변을 둘러보며 혹시나 자신을 보는 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그런 단무의 행동을 바라보던 행상인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죠. 헤헤.”
주변 광경이 잘 보이는 객잔에 방을 잡은 행상인들은 중앙에 놓여 있는 탁자로 모여들었다. 고풍스러운 탁자가 상당히 수준 높은 객잔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런 고풍스러운 탁자로 사내들의 그림자가 비쳐졌다.
“자, 다들 모였는가?”
“예, 장춘식 장로님.”
“음.”
장춘식이라 불린 그는 무당파의 장로로 정찰대의 인솔자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과는 달리 헤픈 웃음을 흘리는 행상인은 이곳에 없었다. 하나하나가 잘 벼린 검과 같은 무인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당부할 것이 있네. 알다시피 우리는 정찰대라네. 목표만 발견하면 그 즉시 몸을 빼어 맹에 사실을 알려야 한다네. 알겠나?”
“예.”
“좋아. 그럼 당 대주.”
“예.”
한 사내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바로 사천당가의 묵룡대주 당문기였다.
사도연맹이 사천을 차지하는 바람에 가문의 터를 잃은 당문기는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빛을 흘리고 있었다. 비록 멸문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식솔이 목숨을 잃고 본가의 땅을 빼앗겨 버렸다. 목숨을 장담 못하는 이 정찰대에 지원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식솔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마른 짚을 지고 불구덩이라도 뛰어 들어갈 수 있었다.
“자네는 북쪽으로 향하게. 그리고 모용수.”
“예.”
복수심에 불타는 당문기를 그냥 보고만 둘 수 없어 함께 지원했던 모용수가 대답했다.
“자넨 당 대주를 따라다니게. 둘이서 함께 무림을 활보한 적이 많다고 하니 그만큼 다른 이들보다 호흡이 잘 맞겠지.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모용수가 재빨리 대답했다. 장춘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려 그들이 갈 방향을 정해 주었다.
“모두 자기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 알겠지?”
“예, 장로님.”
사내들이 대답하자 장춘식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유시에 다시 이곳으로 모이기로 하세. 그때쯤이면 양민들도 집으로 귀환할 시간이니 우리도 그에 맞춰 행동해야겠지. 늦은 밤까지 행동하면 오히려 의심만 살 터. 조심하고 또 조심들 하게나.”
“예!”
장춘식은 사내들을 한번 바라본 후 탁자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그럼 모두 시작하시게. 다시 말하지만 조심들 하게. 이곳은 이미 사도 무리의 소굴이 되어 있으니까.”
“쌉니다, 싸요! 비단 한 필에 은 두 냥! 이보다 쌀 수는 없어요!”
“아침마다 쑥쑥 알을 낳는 암탉이 단 철전 열 개!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과연 성도의 근처에 있는 도시라 그런지 수많은 무림인들이 돌아다님에도 저잣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당문기와 모용수가 행상인으로 변장한 채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진짜 행상인처럼 들고 다니기 편한 물건을 구입하기도 했다.
“형님.”
“음?”
한구석에서 노리개를 보고 있던 당문기를 모용수가 불렀다. 당문기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모용수가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칠무회주는 그렇다 치고, 사마련주는 어떻게 구분합니까? 얼굴도 모르잖습니까?”
“맹에서 나올 때 그의 얼굴이 그려진 양피지를 받아 왔다네. 거기에 사마련주는 오천에 속하는 절대고수 중 하나. 그런 그의 기도는 변장 따위를 한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기를 갈무리해서 숨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사마련주 구천휘는 패도의 길을 걷는 자라 들었다. 그 증거로 혈무대전 이후로 수십 년 동안 나뉘어져 버린 사파를 단숨에 통일시켰지. 그런 그의 성향으로 보아서는 기를 숨기거나 하진 않을 거야. 아마도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며 등장하겠지.”
“음, 그렇군요.”
“그래. 그리고 장 장로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항상 주변을 살펴라. 그런 사파의 지존이 홀로 등장할 리가 없으니까. 아마도 호위들을 데리고 등장할 거야.”
모용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노리개에서 시선을 뗀 당문기가 다시 말했다.
“그보다 이 층 이상 되는 높이의 객잔이나 주루를 찾아봐.”
“예?”
“그럼 그냥 이렇게 돌아다닐 거야? 아니, 돌아다니는 건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어떻게 확인하고 다닐 건데?”
“그럼?”
모용수가 의문을 표하자 당문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자고. 말했다시피 그 사람들이 모습을 숨기고 올 사람들이 아니니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훨씬 잘 보일 거야. 한 몇 시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 객잔이 좋겠군. 대로가 잘 보이는 쪽으로.”
“그렇군요.”
당문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모용수는 객잔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 멈칫거렸다. 그의 시야에 작은 건물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큰 건물이 들어온 것이다.
“저곳으로 가면 되겠군.”
“예.”
당문기도 그 건물을 발견했는지 그곳을 향해 걸었다. 모용수는 그의 뒤를 따라가다 다시 주변을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뭐?”
“남림 말입니다. 남림이 휴전을 요청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음, 거짓은 아니지.”
당문기의 말에 모용수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그럼 곧 있으면 이 전쟁도 끝나겠군요.”
“왜? 전쟁이 싫어?”
“그거야 뭐. 솔직히 그렇잖습니까? 사람으로서 이런 피 흘리는 전쟁을 좋아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모용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문기는 그의 말을 들으며 방금 전에 산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미친놈이라……. 그렇군. 하지만 세상은 그런 미친놈들로 인해 돌아가지.”
“예?”
모용수가 의문을 표하자 당문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네 말대로 남림은 이 전쟁에서 빠질 것 같다. 그 때문에 무림맹에서도 꽤나 고심하고 있지. 그냥 이대로 남림의 휴전을 받아들인다면 좋겠다만, 정파의 자존심이라는 무림맹이 남림에게 당한 것이 있는데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 하지만 휴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또한 실속이 없어.”
“그렇군요. 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빌어먹을 전쟁이.”
모용수가 말을 내뱉으며 걸음을 멈추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개의 골목만 지나가면 되건만 수많은 사람들이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우아아!”
“비, 비켜!”
그때 그들의 앞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당문기와 모용수는 소란이 일어난 곳을 보다가 눈을 빛내고는 주변을 경계하며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 순간 앞의 사람이 팔을 허우적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큭!”
그 사람은 신음을 흘리고는 얼굴을 구기며 앞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미는 탓에 넘어진 것이다. 그런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봉두난발을 한 야인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사내는 사나운 야인의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양팔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탓!
사내의 앞에서 야인이 크게 발을 구르며 그의 머리 위로 뛰어넘었다.
“저, 저거!”
모용수가 갑작스레 등장한 야인의 모습에 당황한 듯 허둥거렸다. 야인이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모용수가 야인과 눈을 마주쳤다.
“흡!”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야수 같은 눈빛에 모용수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야인은 그런 모용수를 향해 더욱 속도를 높여 달려왔다.
타탓!
“으엇!”
모용수는 순식간에 자신의 앞으로 당도한 야인에게 반사적으로 주먹을 뻗었다. 십수 년간 단련되어 온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주먹은 허무하게 허공을 때렸다. 야인이 모용수의 주먹을 간단히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피해 버린 것이다. 야인은 맹수와 같은 몸놀림으로 모용수의 등 뒤로 돌아가며 그의 목을 팔로 감쌌다. 그러고는 다른 한 손으로는 모용수의 얼굴을 향해 들이밀었다.
“쿱!”
모용수는 자신의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낯선 물건의 느낌에 숨을 들이켰다.
“모두 비켜!”
야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문기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야인의 몸놀림은 자신이 보아도 범상치 않은 고수의 그것이었다. 섣불리 모용수를 구하겠다고 움직였다간 자신의 정체는 물론 모용수의 신변이 위험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응?”
그때 약한 바람이 불어와 야인의 머릿결을 들춰냈다. 그 순간 드러난 야인의 얼굴을 본 당문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당문기는 귀신에 홀린 듯 야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저, 저놈 잡아라!”
당문기가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말을 끊고 한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옷을 입고 배가 산처럼 볼록하게 나온 그는 꽤 먼 거리를 뛰어온 듯 숨을 연신 몰아쉬고 있었다.
“오, 오지 마! 더 이상 다가오면 이 녀석의 목숨은 없다!”
중년인을 본 야인이 당황스러운 듯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그러고는 모용수의 목을 더욱 강하게 졸랐다.
모용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십수 년간 무예를 연마한 명문가의 무인이건만 지금은 무능력하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 아무리 탈출하려고 용을 써 봐도 힘이 나오질 않았다.
‘어? 그런데 어디서 들어 본 목소린데.’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 야인이 그의 목을 더욱 조르자 모용수의 얼굴이 급격히 구겨졌다.
‘들어 보긴 개뿔!’
모용수의 목을 조른 야인은 중년인이 점차 다가오자 다급히 외쳤다.
“오지 말라고!”
“헉헉! 이 빌어먹을 놈!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밥을 먹었으면 돈을 내야 할 것 아니냐!”
“이익! 나도 돈이 있으면 냈을 거라고! 말했잖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하지 마라! 이놈! 네놈의 꼬라지를 본 순간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시끄럽고, 함께 관아에 가자! 무전취식하는 놈은 사지를 분질러 버려야 해!”
중년인이 주방용 칼로 보이는 쇠붙이를 들이밀자 야인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당연하지!”
“내가 갚는다고 했잖아! 누가 안 갚는데? 외상 몰라? 외상!”
야인이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성을 내자 중년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부엌칼을 강하게 쥐고는 야인에게 다가갔다.
“어디서 그런 꼼수를! 그리고 설령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외상은 안 된다!”
성난 황소같이 붉어진 얼굴로 중년인이 다가오자 야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익! 좋아, 나도 더 이상은……!”
야인은 모용수의 목에 감은 팔을 풀어 중년인을 향해 한 발 나섰다.
쩡!
그 순간 야인의 뒤통수를 무언가가 훑고 지나갔다. 그 충격에 야인은 눈을 부릅뜨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
“…….”
이런 갑작스런 상황에 중년인과 모용수는 말을 잃고 야인의 뒤통수를 갈긴 당문기를 바라보았다. 당문기는 웃음을 지으며 중년인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헤헤, 이놈은 고향 아우라오. 그런데 여기서 볼 줄이야.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제발 관아만큼은 참아 주시구려.”
“하지만.”
“어차피 관아에 이딴 놈을 끌고 가 봐야 도움 될 것도 없잖소?”
“음.”
당문기의 설득에 중년인은 얼굴을 구기며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어차피 당신의 말대로 관아로 끌고 가 봐야 남는 것도 없을 테지.”
“감사하오! 그럼 배상으로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저놈이 먹은 식사 값만 계산하시오! 은자 스무 개라오.”
“스, 스물? 그놈 많이도 처먹었군! 알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구려.”
당문기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야인을 한번 쏘아보고는 품속에서 은자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중년인에게 은자를 건네자 중년인은 콧방귀를 내뿜었다.
“흥! 돈깨나 있으신 것 같은데 아우 잘못 만나 파산하겠소. 깨어나거든 혼쭐을 내주시구려.”
“물론이라오. 안 그래도 내 이놈 때문에 요새 골머리를 썩고 있다오.”
당문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중년인은 다시 콧방귀를 뀌며 장내를 벗어났다.
“혀, 형님?”
모용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당문기를 부르자 그는 재빨리 야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야인의 팔을 잡으며 모용수에게 입을 열었다.
“어서 옮겨!”
“후르릅! 쩝쩝! 우걱우걱!”
모용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서 걸신이 들린 듯 음식을 집어먹는 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객잔으로 옮기자마자 깨어난 그는 곧바로 먹을 것부터 찾았다.
‘분명 어디선가 본 사람인데.’
모용수는 기억이 날 듯 말 듯 떠오르지 않자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기름진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먼지로 범벅이 된 그는 누가 봐도 거지 그 자체였다. 그리고 모용수가 알고 있는 거지는 개방의 인물이 전부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눈앞의 인물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낯이 익었다.
“후우, 목 메인다. 마실 것도 마시면서 먹거라.”
“아, 우우우우!”
그는 입안에 음식물을 가득 머금은 채 당문기를 향해 뭐라고 떠들더니 옆에 놓여 있는 죽엽청을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꿀꺽! 캬! 이제야 살겠다!”
탕!
죽엽청을 단숨에 비워 버린 그는 식탁에 빈 죽통을 내려놓고는 당문기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
“그래, 오랜만이구나, 진철.”
“에에?”
그들의 인사에 모용수가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진철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저, 정말 진철 형님입니까?”
모용수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져 있었다.
이 년 전에 행방불명이 된 신룡은 한 무리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 정도로 아무리 찾고 찾아도 소식은커녕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던 그였다.
“흐음.”
진철은 그런 모용수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손가락 분질러 버린다? 어디서 삿대질이야?”
“아!”
진철의 일침에 모용수는 재빨리 손을 거둬 다른 손으로 자신의 손을 감쌌다. 그러고는 다시 진철에게 입을 열었다.
“정말 진 형님이십니까?”
“그럼 네가 아는 진철이 나 말고 또 있냐?”
“그건 아니지만.”
“그럼 내가 맞겠지.”
무슨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하냐는 듯 고개를 돌린 진철은 다시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던 당문기가 한숨을 쉬고는 모용수가 앉아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는지 그 이유나 한번 들어 보자.”
“그거야 뭐, 이런저런 일이 있긴 했지만 알고 보면 별거 없습니다.”
“뭔 말이 그래? 일단 왜 그 꼴로 장안에 나타났는지 이유나 들어 보자.”
“음, 그게.”
진철은 입으로 가져가던 꼬치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모용수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 옆에는 모용수의 목숨을 위협했던 꼬치 막대가 놓여 있었다.
“사실은 돈이 꽤 많았는데 섬서에 들어오기 전에 금낭을 잃어버렸습니다.”
“들어오기 전부터? 그럼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이냐?”
“아, 예. 뭐 그렇죠. 아무튼 그렇게 금낭을 잃어버려서 돈은 없고 배는 고프고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도사가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짐승들을 죽일 수는 없잖습니까?”
진철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당문기와 모용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절대로 육식을 금할 인물이 아니었다. ‘육식 포기하고 도사 할래, 아니면 도사 포기하고 육식 할래?’라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후자를 택할 인물이 그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먹고 있던 음식들 역시 모두 육류가 아니던가.
“그래서 구걸 좀 했습니다. 하하하.”
“잘한다, 잘해. 그런 놈이 무전취식을 하냐?”
“음.”
당문기가 혀를 차며 말하자 진철은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입을 열었다.
“무위도식.”
“…….”
“…….”
당문기와 모용수는 입을 살짝 벌리고 진철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쓴웃음을 흘렸다. 그답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지내셨던 겁니까? 전 형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뭐, 죽기야 죽을 뻔했지.”
“예?”
진철이 다시 꼬치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하자 모용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당문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을 뻔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것이냐?”
당문기가 진지하게 묻자 진철은 입맛을 다시고는 꼬치를 내려놓았다.
“이야기가 좀 깁니다.”
“그래도 말해 봐.”
당문기의 말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그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 흘러나올 때마다 당문기와 모용수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칠무회에서 널 죽이려고 했단 말이냐? 그것도 네 검을 빼앗기 위해서?”
“예.”
“과연. 우발적으로 정파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배신할 생각이었던 거로군. 화산파의 장문인을 살해하려 하다니.”
당문기는 과거 멀리서 보았던 칠무회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매화문의 일은 네가 한 것이고?”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음,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집안일이니 내가 뭐라고 할 일은 아니겠지. 그리고 매화문주 역시 남의 물건을 탐낸 자. 죽는다 하더라도 할 말은 없을 것이야. 정파의 이름이 아깝군.”
당문기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진철은 미소를 짓고는 다시 꼬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당문기를 바라보았다.
“참, 기 형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도 드려야 하는데. 같이 오신 겁니까?”
순간 당문기와 모용수의 움직임이 멈췄다. 갑작스런 정적에 진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모용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진철이 그를 바라보자 모용수는 슬쩍 당문기를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기 형님께서는.”
“기 형님은 은거하셨다.”
“예?”
모용수의 말을 자르고 입을 연 당문기의 말에 진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 형님께서 은거라니. 무슨 일 있었습니까?”
“일이라면 일이겠지. 혹 삼왕이란 절대고수들을 아느냐?”
“그야 물론이죠. 기 형님을 비롯한 절대고수 세 명을 일컫는 말 아닙니까?”
“그렇지.”
당문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삼왕 중 한 명인 창왕과 기 형님께서 생사결을 벌이셨다.”
“예? 그럼 기 형님께서 어디 크게 다치신 겁니까?”
생사결이란 말에 다시 한 번 놀란 진철이 되묻자 당문기는 고개를 저었다.
“음, 심각한 부상이긴 했지만 지금은 다 나으셨지.”
“그럼 왜 갑자기 은거랍니까?”
진철의 물음에 당문기는 그의 옆에 있는 죽통을 집어 들었다. 죽엽청으로 목이라도 축일 셈이었다. 하지만 가벼운 무게에 얼굴을 구기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손에 들린 죽통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빈 통인 탓이다.
당문기는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진철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는 죽통을 내려놓았다.
“과거 사파의 사패라 불리는 문파가 있었다. 바로 지금의 사마련에게 모두 흡수를 당했지만 그 네 문파가 사파의 중심이었지. 아무튼 그중에 추월문이라는 문파가 있었다. 사마련에 흡수되었음에도 얼마 전까지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던 곳이었지. 그 문파에 창왕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무림에 퍼졌었다. 기 형님은 그 소문을 듣자마자 바로 추월문으로 향하셨다. 단신으로 말이다.”
“단신으로 말입니까? 사패라 불릴 정도라면 꽤 많은 무인이 있었을 텐데요? 그것도 창왕도 함께라면.”
“그렇지. 어느 무인이 사파 무인으로 득실거리는 그곳에 단신으로 갈 생각을 하겠느냐? 그것도 창왕이라는 절대고수가 있는 곳인데. 하지만 기 형님은 가셨다. 그리고 추월문은 멸문당하고 창왕은 목숨을 잃었지.”
“우와!”
진철은 탄성을 터트렸다. 수많은 사파의 무인들과 함께 창왕을 무찌른 기태천의 무위에 감탄한 것이다. 당문기는 그런 진철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기 형님은 왼팔을 잃으셨다.”
“……!”
진철의 눈이 부릅떠지며 고개를 돌려 모용수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보아 결코 농담이 아닐 것이다.
“그럼 괜찮은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기 형님을 뵌 후로 생각을 달리하였다. 비록 몸은 상처를 입으셨지만 마음은 평온을 찾으신 듯하다.”
“…….”
진철은 당문기가 한숨을 쉬며 말하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기 형님께서는 왜 창왕과 생사결을 벌이신 겁니까?”
진철이 기태천을 떠올리며 물었다.
“음, 내가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기 형님을 찾아가 봐야 뵙기도 쉽지 않을 테니 어느 정도는 말해 주마. 그래야 나중에 기 형님을 뵙더라도 실수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수야, 너는 창가에 가서 혹시나 칠무회주로 보이는 이가 나타나면 알리거라.”
“예.”
모용수를 창가로 보낸 당문기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듯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당문기가 다시 진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한 사건의 전말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지. 너도 알다시피 기 형님의 행실은 도사와는 꽤 멀다는 것을 알 것이다.”
“뭐, 그렇긴 하죠. 하하!”
기태천과 궁합이 잘 맞았던 진철은 당문기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사실 기 형님의 행실을 우리같이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싫어했다. 뒤에서 몰래 욕하고 다니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지. 무인으로서의 기 형님은 존경받아 마땅했으나 도사로서는 말 그대로 말코도사였으니까.”
“그렇죠. 실은 저도 기 형님께서 도사라는 것이 신기하긴 했습니다.”
진철이 잽싸게 말하자 당문기의 눈이 가늘어졌고, 모용수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에겐 기태천이 도사라는 것보단 진철이 화산파의 장문인이란 사실이 더 신기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요. 하하!”
그들의 눈초리에 진철이 머리를 긁으며 말하자 당문기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런 사실은 기 형님도 알고 계셨다. 너무도 잘 알고 계셨지. 하지만 기 형님은 그들에게 아무 말도 않고 오히려 웃음으로 답하셨다. 즉, 기 형님께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길 바라셨지. 자신을 상처 입히는 것만이 기 형님께서 속죄할 방법이라고 생각하셨으니까.”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 보군요.”
진철의 물음에 당문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 형님께서 왜 검왕이란 별호를 얻었는지 아느냐?”
“예, 기 형님께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 기 형님께서 창왕과 생사결을 벌인 이유는 검왕의 별호를 얻고 난 후였다. 그때 곤륜파의 도사로서는 지탄받을 만한 일이지만, 기 형님께서는 한 여인을 사모하고 있었다. 문제는 창왕도 그 여인을 사모하고 있었다는 것이지.”
“여자, 문제입니까?”
“왜? 이상해?”
“아뇨, 그건 아니지만.”
당문기가 묻자 진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진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모습에 당문기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그 삼왕이라 불렸던 세 사내는 절친한 친우였다. 정파의 고수와 사파의 고수, 그리고 마교의 고수를 친우라 표현하는 것이 우습긴 하겠지만 사실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깝게 여기지 않았지. 아무튼 기 형님은 낭연화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셨다. 그리고 창왕도 그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지.”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기 형님은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친우였던 창왕 역시 사랑했기에 그녀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낭연화, 그녀는 기 형님을 사랑하셨지.”
“음, 삼각관계로군요.”
“그렇지. 그러던 어느 날 그 친한 친우였던 세 명은 정자에 모여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정파의 후기지수 중 으뜸이었고 모든 정파 무인들의 존경을 받던 기 형님은 도사 그 자체로 훌륭한 품격을 지니고 계셨지. 아, 물론 그렇다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고.”
말을 끊은 당문기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진철이 미소를 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당문기는 왠지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뭔가 위험한 발언을 한 것 같은데.’
당문기는 진철을 힐끗거리고는 다시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기 형님은 술 대신 차를 마셨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술을 마셨지. 그때 낭연화, 그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까지 껴서 네 명은 술과 차를 마시며 친목을 다졌지. 그렇게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갑작스레 낭연화가 기 형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기 형님은 기겁을 하며 그녀를 밀어냈지만 그녀는 마치 철없는 여동생과도 같았지.”
“오!”
진철이 감탄을 터트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진철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창왕은 술기운 탓인지 격한 화를 내며 기 형님께 대결을 신청했다. 물론 기 형님은 거절했지. 술에 잔뜩 취한 자신의 친우에게 검을 휘두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무인이란 자존심으로 먹고 사는 존재. 창왕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단다. 결국 기 형님과 창왕은 대결을 벌였고, 크게 패한 창왕은 그 자리에서 몸을 숨겼지. 그리고 기 형님은 다신 그를 볼 수 없었다. 기 형님께서는 절친한 친구가 자신의 곁을 떠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기셨고, 낭연화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술이 문제로군요. 자고로 술이란 적당히 마셔야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렇지, 술이 문제야. 아무튼 그렇게 낭연화를 멀리하던 기 형님은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계셨지. 그때 문제가 일어났다. 기 형님의 처소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온 것이야. 그 편지에는 창왕이 낭연화를 납치해 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 그에 격분한 기 형님은 검을 들고 단신으로 창왕이 있는 곳을 찾아가셨다. 그와의 오해를 풀고 사랑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창왕이 있는 곳에 도착한 기 형님은 수많은 무사들과 몸이 묶여 있는 낭연화를 볼 수 있었다. 창왕은 기 형님께 말했지. 다시 한 번 결투를 벌이자고.”
“그래서 그 결투를 받아들였습니까?”
진철의 물음에 당문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일대일 결투를 벌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르지 않으셨으나, 기 형님은 그 결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둘은 다시 결투를 벌이게 됐지.”
“이겼습니까?”
“그래. 이번에도 기 형님께서 이기셨다. 창왕은 한쪽 눈을 잃고 기 형님께서는 적잖은 내상을 입으셨지. 하지만 쓰러질 수는 없었다. 낭연화, 그녀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기 형님은 묶여 있는 낭연화에게 다가가 그녀를 풀어 주었지. 그 순간 일이 벌어졌다. 패배와 함께 사랑하는 여자를 뺏긴다는 충격에 창왕이 들고 있던 창을 기 형님께 던진 것이다. 그리고 그 창은 기 형님을 지나쳐 낭연화의 가슴에 꽂혔지.”
“아!”
진철이 탄성을 내뱉었다. 창왕의 창이 낭연화의 가슴에 꽂히는 장면을 상상하자 가슴 언저리가 저리듯 아파 왔다.
“실수가 아니었다. 창왕은 기 형님이 아닌 낭연화에게 창을 던진 것이었으니까. 자신이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없애 버리겠다는 속셈이었겠지. 창왕은 곧바로 무사들에게 기 형님을 죽이라 명령을 내렸다. 기 형님은 몰려드는 무사들을 피하고 낭연화의 주검을 안고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탓에 내상은 더욱 심해져 몇 개월을 침상에서 지내셨다.”
“…….”
“그런데 웃긴 건 뭔지 아느냐?”
“예?”
당문기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진철이 의문을 품었다.
“혹시 마궁이라는 곳을 아느냐?”
“마궁!”
진철이 눈을 부릅떴다. 마궁이란 말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문기는 그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니 아는 모양이군. 그래, 낭연화 그녀는 바로 마궁에서 보내온 첩자였다. 그녀의 목적은 당시 절대고수의 반열에 올라온 세 사내들을 지리멸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그렇다면?”
“그래, 모두 낭연화 그녀에게 속은 것이지. 낭연화는 기 형님을 유혹한 것도 모자라 창왕에게도 손길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창왕이 자신을 죽이리라곤 생각지 못했겠지. 아무튼 훗날 그 사실을 알게 된 기 형님은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셨다. 자신을 상처 입힘으로써, 친구와 자신을 속였지만 한때 사랑했던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 여기셨지.”
“그렇다면 왜 기 형님께서 창왕을 죽인 겁니까?”
진철이 묻자 당문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으셨다. 비록 몸을 담그고 있는 세상은 달라도 정을 내어 준 친우였으니까. 하지만 창왕은 이미 기 형님께 큰 살의를 지니고 있었기에 결국 그 둘은 생사결을 벌이게 되었지.”
“그렇군요.”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진철의 얼굴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다른 한 사람은 어찌 됐습니까? 낭연화의 목적이 삼왕의 지리멸렬이라면 다른 사람도 유혹했을 텐데 말이죠.”
“아, 그는 마교의 일인으로 지금은 암파권왕이라 불리고 있지. 아마도 낭연화는 그를 유혹하는 것에 실패했을 것이다. 소문에도 그는 무공밖에 모르는 남자라더군.”
“아하.”
“아무튼 그로 인해 정파의 영웅으로 추앙되던 기 형님의 인생이 바뀌었고 지금도 속죄를 위해 살아가고 계시지. 그 뜻이 변함이 없는 한 기 형님께서 속세로 나올 일은 이제 없을 것이야.”
“…….”
이야기를 끝맺는 당문기의 말에 진한 슬픔이 묻어 나왔다. 그가 기태천을 얼마나 따르고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 진철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뭔가가 떠오른 듯 당문기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님, 이곳에는 웬일입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음, 지금 이 무림이 전쟁 중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닐 테지?”
“물론입니다.”
“비록 새외 세력까지 전쟁에 가담했다지만 우리 정파 측과 가장 큰 적은 바로 사파다. 그리고 이 장안에 사파의 우두머리인 사마련주가 올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지. 우리는 그 정보를 확인하는 정찰대에 지원했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지.”
“과연.”
“왜? 너도 칠무회주를 찾으러 왔다면서? 아마 사마련주와 칠무회주는 함께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렇게 만났으니 함께 행동하자꾸나. 네놈이 멋모르고 활개치고 다니면 골치 아픈 건 우리니까 싫어도 해야 된다. 알겠느냐?”
“뭐, 그러죠. 하하.”
진철은 가시가 맺힌 당문기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일단 여기서 씻고 쉬고 있도록 해. 난 나가서 네가 입을 옷가지를 좀 구해 와야겠다. 그 상태로 나간다면 단숨에 시선을 잡아끌 테니까.”
당문기가 눈을 구기며 말하자 진철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야에 오물로 얼룩지고 흙과 먼지로 뒤덮여 누더기가 되어 버린 옷이 들어왔다.
“그럼 부탁합니다.”
진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당문기는 바로 몸을 일으키며 모용수에게 입을 열었다.
“넌 계속 창밖을 주시하고 있어라. 금방 다녀올 테니까.”
“예. 몸조심하십쇼.”
“아아.”
당문기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저으며 방을 나갔다. 진철은 그런 당문기를 바라보다 다시 탁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도 먹다 남은 음식들이 어서 먹어 달라는 듯 윤기를 뽐내고 있었다.
잠시 후, 밖으로 나갔던 당문기가 의복을 싸들고 돌아오자 진철은 누더기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다 입은 진철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기왕이면 푸른 옷이 좋은데…….”
“그럼 네가 사 입어. 돈을 주든가.”
“…이것도 충분히 마음에 듭니다.”
당문기가 당장이라도 빼앗을 것처럼 나오자 진철은 얼굴을 굳히며 체념했다. 그 모습에 당문기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은 이곳에서 자정까지 있을 거다.”
“새벽에 장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럴 가능성은 적어. 그들은 단체의 지존들이니까. 하지만 아마 한둘씩은 장안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숨어 있을 거다. 그건 이따 장춘식 장로님이 말씀해 주실 테지.”
당문기는 그렇게 말한 후 품속에서 죽통을 꺼내 들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무것도 마시지 않아 상당히 목이 마른 상태였다.
“술이 아니네요.”
당문기가 죽통을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마시자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진철이 말했다.
“당연하지. 이 상황에서 무슨 술이냐? 이건 맹물이다. 수야, 잠시 쉬거라.”
“예.”
당문기가 창가로 다가가 모용수에게 죽통을 넘겼다. 모용수는 대답을 하며 죽통을 받아 들고 탁자로 다가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진철 너도 잠시 쉬도록 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쉴 수 있을 때 쉬어야지.”
“예. 그럼 잠시 눈 좀 붙이겠습니다.”
진철은 곧바로 침상으로 다가가 몸을 눕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문기가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진철은 침상에 눕자마자 코를 골며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 콧소리에 당문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참 코골이 소리가 찰지군.”
당문기는 모용수와 교대하며 하루 종일 창가를 서성거렸다. 하지만 일반 무인들과 양민들만 보일 뿐 사마련주로 보이는 이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고 자정이 되었다.
“야, 쟤 깨워라.”
당문기가 아직도 침상에 누워 있는 진철을 턱으로 가리키며 모용수에게 입을 열었다. 모용수는 침상으로 다가가 진철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라 하십니다.”
“응? 으응.”
진철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벌떡 일어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크게 하품을 내뿜었다.
“하암! 벌써 자정입니까?”
“그래. 일단 본거지로 돌아가자. 너도 장로님께서 기다리실 테니.”
당문기는 마지막으로 창밖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몸을 돌려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모용수와 진철 역시 간단히 짐을 꾸리며 나갈 채비를 끝냈다.
“가자.”
“예.”
당문기가 말하자 진철과 모용수가 대답하며 그를 뒤따랐다.
그렇게 객잔을 나온 그들은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장춘식이 기다리고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역시 늦은 밤이라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무인이었고 그들은 길거리를 서성거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마 이미 사파의 영역이 되어 버린 곳이기에 정파의 무인들이 들어올까 경계하고 있는 것이리라.
“눈에 띄는 행동은 최대한 하지 말도록. 그리고 너무 쳐다보지 마라. 오히려 의심을 살 테니까 자연스럽게 행동해.”
“예.”
모용수가 무인들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자 당문기가 재빨리 말했다. 그러자 모용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당문기와 그들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대로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각 정도를 걷자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객잔이 그들의 앞에 드러났다. 당문기는 주저 없이 객잔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비록 문이 닫혀 있긴 했지만 잠겨 있진 않아 별다른 소란 없이 들어설 수 있었다.
객잔으로 들어서자 구석진 곳의 탁자에는 점소이로 보이는 자가 누워 있었다. 주인이 보면 불호령을 낼 모습이었지만 주인 역시 잠에 들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문기와 진철, 모용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저곳이다.”
당문기가 손을 뻗고는 속삭였다. 왼쪽 구석에 아직 불이 환하게 켜진 방이 진철의 눈에 들어왔다. 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서 가는 당문기를 따랐다.
삐걱!
당문기가 문을 열어 들어가자 진철과 모용수가 그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아, 왔는가?”
“예, 다녀왔습니다.”
꽤 넓어 보이는 공간에는 많은 사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의 탁자에는 한 중년인이 앉아 당문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찾았는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오늘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 다른 이들 역시 같은 상황이라네. 일단 앉게나.”
“예.”
당문기는 대답하며 그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모용수는 그의 뒤에 가 섰고 진철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장춘식은 처음 보는 진철의 얼굴에 의문을 표했다.
“이자는 누군가?”
“아, 모르시겠군요. 진철아, 인사드려라. 무당파의 장춘식 장로님이시다.”
“무림말학이 장 장로님께 인사드립니다.”
진철이 포권을 취하며 장춘식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자넨 누군가?”
장춘식이 되묻자 진철은 고개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화산파의 제십칠 대 장문인 진철이라고 합니다.”
“……!”
장춘식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화산파? 설마 그 화산파를 말하는 겐가! 그렇다면 자네가 신룡?”
“뭐, 그렇게들 부른다고 하더군요.”
진철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그의 반응에 장춘식을 비롯한 다른 사내들 역시 멍하니 진철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신성처럼 등장해 명성을 떨치고 갑작스레 사라진 사내가 바로 진철이었다. 후기지수 중 최고라는 말까지 들으며 여러 문파에서 진철과 연을 잇기 위해 그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산서성으로 넘어갔다는 소문만 무성했을 뿐, 그 어떤 곳에서도 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여러 가지의 소문이 무림에 퍼졌고, 그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었다. 사람들이 볼 땐 신룡이란 명성을 얻고 갑작스레 사라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놀랍군. 그렇다면 다시 인사를 해야겠어. 본도는 무당파 장문인의 사형인 장춘식 장로라오.”
장춘식이 의자에서 일어나 도사의 예를 취하며 인사를 건네자 진철이 넙죽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편히 대해 주십쇼. 그게 저도 편하니 말입니다.”
“음, 하지만 그럴 순 없소. 비록 몸을 담고 있는 문파는 다르나 화산이나 우리 무당이나 같은 도가가 아니겠소?”
장춘식은 진철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사실상 도가의 항렬로 따지면 진철과 장춘식은 같은 항렬이었다. 거기에 한 문파의 장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도가 문파끼리의 사정일 뿐 다른 이들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단순히 그들은 무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보다 무림에서의 항렬이 월등히 높은 장춘식이 진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데 그를 편히 대할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인사드립니다. 황보세가의 황보웅이라고 합니다.”
“유성장의 유상입니다.”
“만각문의 만당입니다.”
각자 자리에 앉아 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진철에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진철이라고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화산파의 장문을 맡고 있습니다.”
“음, 그런데 이곳엔 어쩐 일이시오? 아니, 그 전에 진 장문께선 행방불명이시라 들었는데?”
진철이 포권을 풀자 장춘식이 의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진철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고요.”
“이런저런 일?”
“진 장문인은 칠무회주를 쫓고 있습니다.”
장춘식이 의문을 표하자 당문기가 진철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진철에게 말을 놓는 당문기였지만 자신보다 어른인 장춘식이 진철을 존대하기 때문에 그를 생각해 진철을 높여 부른 것이다.
“칠무회주?”
“예. 그가 진 장문인을 살해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
장춘식이 다시 눈을 부릅떴다.
“사실이오?”
“예.”
진철은 미소를 지우고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장춘식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를 도와줬으면 하오. 진 장문인의 무공과 아무 탈 없이 장안까지 온 능력을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상당한 도움이 될 테니까.”
장춘식은 죽었다는 그의 소문을 떠올리며 말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무림인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능력이라면 이 정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입니다.”
진철이 대답하자 장춘식은 만족스러운 듯 찻잔에 차를 따르고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진철이 그것을 받아 들고 곧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마신 것이라곤 술밖에 없어 실은 상당히 목이 마른 상태였다.
“그런데 사마련주를 발견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건 후발대에게 보고하면 된다오. 우리는 선발대로 정찰의 성향이 짙소. 일단 그를 찾기만 하면 장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발대가 장안을 칠 계획이오.”
“음, 그럼 이 장안은 전쟁터가 되겠군요.”
“그렇소. 본래라면 그냥 장안을 차지하면 되겠지만, 사마련주와 칠무회주가 함께 행동하는 이상 우리도 조심할 수밖에 없다오. 아시지 않소? 절대고수 한 명이 지닌 힘을.”
장춘식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닫자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고수 한 명이라면 일류 고수 몇 명이 있다 한들 다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그들을 호위하는 무인들 역시 무공이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절대고수가 모습을 감추고 다니면서 정파 무인들을 공격한다면 크나큰 피해로 이어질 것이오.”
“그렇군요. 그런데 후발대는 어떻습니까? 절대고수 두 명을 상대하려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요.”
“그 역시 생각해 두었소. 무슨 일인지 운남을 공격했던 남림에서 휴전 협상을 걸어왔고, 혈교 역시 잠잠한 상태라오. 후발대에 여러 절정고수들이 다수 모여 있다오. 그렇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이렇게 전 무림에 정찰대를 보내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 상태라오. 본 진은 일단 섬서에서 대기 중이라오. 뭐니 뭐니 해도 일단 주적은 사파이니까.”
“음.”
진철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장춘식은 그런 진철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일단 쉬시구려. 밤이 늦었소. 보웅아.”
“예!”
“너는 만당과 함께 아까 알려 준 곳으로 가거라. 혹시 모르니 항상 주변을 살피고 조심해야 하느니라.”
“예!”
진철에게 인사했던 젊은 무인이 대답을 하고는 그 옆에 서 있던 무인과 함께 방을 나갔다. 진철은 그들을 바라보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빈 찻잔에 찻물을 채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