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7장 (28/29)

제27장

태동하는 화산

“마궁주!”

유랑천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혈풍의를 입고 있는 중년인이 서 있었다.

“어서 오시오, 혈교주.”

“지금 인사나 할 때가 아니오. 그 말이 사실이오? 사마련주가 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했다는 것이?”

“그렇소.”

“빌어먹을… 배신자 같으니라고!”

혈교주는 발을 굴렀다. 그러자 바닥이 움푹 파이며 먼지가 일어났다.

“조심하시오. 동굴이 무너지면 큰일이 아니겠소?”

“아, 미안하오. 하지만 그의 배신은 참을 수가 없구려. 그건 그렇고, 그 소식도 들으셨소? 천무제가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아… 물론 들었소. 화산의 후계라더구려.”

“화산이라…….”

혈교주가 요새 급격하게 퍼지고 있는 소문의 주인공을 떠올렸다.

“화산이라……. 참 연이 많은 문파요.”

“그건 무슨 말이오?”

“아니요, 아무것도.”

“음… 그런데 이 동굴은 대체 무엇이오?”

혈교주는 횃불이 꽂혀 있는 동굴을 두리번거렸다. 유랑천의 소환에 곧장 이곳으로 오기는 했으나 이 동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혈교주는 주변을 둘러보다 유랑천의 뒤에 서 있는 거대한 비석을 바라보았다.

“마궁주, 그 비석은?”

“아…….”

유랑천은 혈교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비석은 유랑천의 시선에 응답하듯 부르르 떨었다. 혈교주가 신기하다는 듯 유랑천의 옆으로 다가갔다.

“대체 이것은 무엇이오?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품은 것 같긴 한데…….”

“이것이 우리들을 전쟁의 승자로 만들어 줄 것이오.”

“무엇이기에…….”

혈궁주의 의문에 유랑천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 없이 비석을 쓰다듬었다.

***

다그닥! 다그닥!

마차를 이끄는 말이 갈기를 휘날리며 대로를 달려 나갔다. 대로라 하여도 이곳저곳에 웅덩이가 있어 덜컹거리기는 하나, 마차는 결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차를 호위하듯 네 필의 말이 마차를 뒤따랐다.

“으음…….”

“몸은 괜찮으신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멀쩡하군요. 하하.”

장춘식의 물음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춘식은 생각보다 밝은 진철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요. 명색이 검존(劍尊) 화산일검(華山一劍) 아니시오?”

“예?”

낯선 단어에 진철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장춘식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만든 별호라오. 진 장문께서 천무제를 꺾는 순간 장문인은 오천의 자리를 꿰차셨소. 그러니 계속 신룡이라 불릴 순 없는 법 아니겠소? 그래서 만든 것이라오. 마음에 들지 않소?”

“화산일검이라…….”

진철은 자신의 새로운 별호를 되뇌었다.

이미 멸문했다고 무림에 알려진 화산파의 제일검수. 과거 화산파에선 그런 자를 화산일검이라 불러 왔다. 그리고 진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좋군요, 화산일검.”

“허허! 좋다니, 이거 내가 다 고맙구려. 이미 진 장문인의 무용은 전 무림에 퍼지고 있소. 본진으로 전서구를 날렸더니 그쪽에서 진 장문인의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것 같더구려.”

“음…….”

“진 장문께서는 언짢으실지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정파의 영웅들은 더욱 큰 힘을 지니게 될 것이오.”

장춘식의 말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천무제를 꺾은 건 무림의 대사건 중 하나였다. 그런 소문을 널리 퍼트린다면 정파는 사기가 치솟을 테고, 그 적들은 사기가 하락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향하는 겁니까?”

진철은 엉덩이에 느껴지는 거친 충격에 입을 열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급하게 이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장춘식은 진철의 물음에 얼굴을 굳혔다.

“아실지 모르나, 사실 화산이 적의 손아귀에 넘어갔소.”

“……!”

진철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림에 나와 이보다 놀란 적은 없을 만큼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혹시 마궁이란 단체를 아시오?”

“마궁!”

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 반응에 장춘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가 보구려. 그 마궁이 화산을 점령했다는 소식이오.”

“…….”

진철이 고개를 숙이자 장춘식은 한숨을 쉬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걱정 마시오. 지금 본대가 화산으로 향하고 있소. 급하게 간다면 본대와 시간을 맞춰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장춘식은 진철을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이었다. 하나 고개를 숙인 진철은 침울하기보다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주인이 없는 틈을 타 빈집털이를 해? 결코 가만두지 않겠어!’

“쿨…….”

그때 진철의 옆에서 콧소리가 들려왔다. 진철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묵색의 무복을 입고 검은 도를 품에 안은 사내가 앉아 고개를 흔들며 졸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철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신은 짜증으로 가득한데 속 편하게 졸고 있는 그가 얄미웠기 때문이다.

퍽!

진철의 발이 사내의 안쪽 다리를 밀치자 사내의 다리가 벌려지며 고개가 앞으로 쏠렸다.

“큭!”

장춘식이 걸터앉은 의자에 머리를 박은 사내, 주재구는 곧바로 상체를 일으키며 주먹을 쥐고 진철을 노려보았다.

“뭐하는 짓…….”

“너야말로 뭐하는 짓이냐? 지금 잠이 와?”

“…….”

“네놈도 참 신경이 굵다. 정파의 한복판에 들어간다는데 잠이나 처자는 거 보니까.”

“그동안 바빠 잠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좀 자려는 것뿐이야.”

진철의 말에 대꾸한 주재구는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넌 왜 가는 거냐? 분명 그곳에 도착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칼을 들고 달려들 텐데.”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래? 그럼 천무제와 싸울 때는 왜 도와준 건데?”

“천무제는 마궁주의 사제다. 몰랐나?”

주재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에 진철과 장춘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게 사실이야?”

“물론. 내 가문이 멸문당한 속사정에는 마궁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나는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그들에게 이용을 당했지.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눈을 뜬 주재구의 눈이 살기로 가득 차올랐다. 진철은 그런 주재구의 모습에 얼굴을 구기고는 장춘식을 바라보았다.

“이놈, 왜 안 묶어 놓은 겁니까? 정신 좀 차리게 묶어서 마차에 매달아 놓지.”

“그게…….”

장춘식도 주재구의 정체가 마혈도라는 것을 안 순간 그를 포박하려고 했다. 아무리 자신들을 도왔다지만 주재구는 무림 공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담덕과 겨뤘던 주재구의 무위는 결코 자신에 비해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뛰어난 감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동해야 하는 지금 그런 주재구와의 싸움은 그야말로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거기에 주재구 역시 순순히 자신들을 따르고 있고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아 그냥 둔 것이었다. 만약에 억지로 주재구를 포박하려고 했다면 그를 제압한다 하더라도 자신들은 중상을 입어 아직도 장안에 남아 있어야 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모든 것이 끝나면 내 직접 나에게 원한이 있는 이들에게 가 빚을 받을 것이니.”

“지랄을 해라, 지랄을 해.”

“…….”

진철의 말에 주재구의 얼굴이 구겨졌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같았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진철이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자신을 잃어 가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마차에서 내린 장춘식은 주변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많은 이가 자신을 반겨야 했건만, 막사 곳곳에서는 신음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장 장로님!”

그때 초소를 지키던 무인이 장춘식을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흰 천에 무림맹의 표식을 새긴 무복을 입은 무인이었다. 장춘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반겼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수많던 정파의 영웅이 다 어디로 간 것이야.”

“아마도 이 기운이 그 원인인 것 같습니다.”

그때 굳은 얼굴로 진철이 장춘식의 옆으로 다가왔다. 진철은 오감을 찌르듯한 기이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은 화산의 정상인 상궁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예. 일단 막사로 가시지요. 그곳에 군사께서 계십니다.”

“군사라면 연효연 군사를 말하는 겐가?”

“예. 군사께서 장로님이 도착하시면 그곳으로 뫼시라 일렀습니다.”

“좋아. 그럼 연 군사에게 직접 듣도록 하지.”

무림맹의 무사가 몸을 날리자 장춘식은 그를 따랐다. 진철 역시 그를 따라 몸을 날리려다 머뭇거리는 주재구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왜? 겁나나?”

“겁? 그것만큼 나에게 맞지 않는 단어는 없지.”

주재구는 실소를 지으며 진철을 지나갔다.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막는 건 무엇이든 다 부숴 버린다.’

주재구가 몸을 날려 장춘식을 따라가자 진철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바닥을 박차 그를 따랐다.

채챙!

“크억!”

멀지 않은 지역에서 병장기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 곳이 아니었다. 마치 산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사방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군요, 그 여자의 말이.”

진철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장춘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아까 연효연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들이 가자마자 사건을 정리해 주었다. 당문기가 본진에 도착하고 그들은 화산으로 방향을 꺾었다고 했다. 그들도 정체불명의 단체가 화산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산으로 이동하는 도중 진철이 천무제를 꺾었다는 소식을 장춘식이 보낸 전서구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들은 산자락에 자리 잡아 진철을 기다렸다. 절대고수의 힘이 얼마나 큰지는 그들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진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파 무림의 영웅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선발대를 보냈지만 보내는 족족 연락이 끊겼다. 화산을 점령하고 있는 단체에게 모두 몰살당한 것이다. 거기에 화산에서 기이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끈적끈적했으며, 날카로운 검처럼 사늘했다.

연효연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해지는 그 기운에 무사들을 꾸려 진격시켰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나, 정찰도 안 되는 이 시점에 마냥 기다릴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지 한 시진 후, 그때 장춘식 일행이 도착한 것이다.

“장문인은 이 기운의 정체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진철은 장춘식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 역시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기운이었다. 거기에 그 기운이 마치 자신을 잡아 이끄는 것 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구려. 이 기운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뭔가 일어나고 있소. 마귀들이 산다는 마궁에서 벌이는 일이니 결코 우리들에게 좋을 일은 없겠지.”

“그럴 겁니다.”

“그럼 우리는 이곳에서 헤어지도록 하겠소. 이 노인이 얼마나 힘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저 비명 소리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예.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장춘식이 검을 빼 들며 말하자 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춘식은 진철을 바라보았다. 고작 이십 중반의 젊은 나이였다. 그런 그의 어깨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무운을 빌겠소.”

장춘식은 곧장 몸을 돌려 병장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역시 무림맹 무사들이 그를 따랐다. 모용수도 그들을 따라가려다 몸을 돌려 진철을 바라보았다.

“조심하십시오, 형님.”

“그래, 너도 조심해라.”

그제야 모용수가 달려 나가자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진철은 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고작 잠깐 멈춘 사이 주변에 깔린 알 수 없는 기운은 더더욱 짙어진 상태였다.

“가자.”

“어디로?”

주재구가 묻자 진철은 손을 뻗어 산 정상을 가리켰다.

“저곳으로.”

“저곳에 마궁주가 있다고 여기는 건가?”

“그건 모르지. 하지만 저곳에는 이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어. 이 화산은 화산파의 땅이다. 그리고 나는 화산의 주인이고. 뭔지 모르겠지만 화산을 이런 기운으로 오염시키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말을 하는 진철의 얼굴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주재구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연효연을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을 구속하려 했다. 자신이 무림 공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지만 진철이 나서서 그녀를 막아섰다. 그때 진철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정의감이 투철해서 화산을 버렸던 건가?’

말을 내뱉는 진철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사나웠고 그의 몸에서는 모든 것이든 찢어 버릴 것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기운에 장춘식은 물론 자신마저 주눅이 들지 않았던가.

“…나는 마궁에 복수하기 위해 이 자리에서 섰다. 네가 가는 길에 그들이 있다면 난 언제까지고 함께하겠다.”

주재구가 도를 꺼내며 말하자 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늘하게 빛나는 눈으로 도를 바라본 주재구는 고개를 들었다. 진철이 가리켰던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름길로 갈 것이다. 적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길은 험하니 사람이 없을 것이야. 그래도 조심해.”

“걱정하지 말도록.”

진철은 주재구가 답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그 뒤를 주재구가 따랐다.

“다 망해 버린 문파의 주인 주제에 감히 나에게 그런 살기를 내비치다니.”

연효연은 자신에게 살기를 쏘았던 진철을 떠올리며 고운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강하게 물었는지 비릿한 피비린내가 입안을 맴돌았다.

“이 전쟁이 끝난 후 후회하게 해 주겠어.”

연효연은 진철이 지니고 있던 자하신검을 떠올리며 눈을 빛냈다.

“너 같은 계집이 어떻게 해서 군사의 자리에 앉았는지 모르겠군.”

그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이 연효연의 귓가를 때렸다. 연효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한 여인이 거대한 도를 짊어지고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연효연은 눈을 부릅떴다.

“다, 당신은!”

“이곳인가?”

진철의 뒤를 따르던 주재구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거의 무너져 가는 건물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과거 그 위용이 어땠는지는 확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낡은 건물들이지만 그 웅장함에 몸이 위축되는 듯했다.

“그래. 하지만 조금 더 가야 한다. 그런데 쉽지가 않을 것 같군.”

진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진철의 눈이 반짝였다. 상궁 입구에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슴까지 흰 수염이 내려온 노인이지만, 그가 내뿜는 기운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오랜만이군.”

걸쭉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재구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진철의 앞에 나와 있었다.

“이곳은 내가 맡겠다.”

“아는 사람인가?”

“마궁의 삼대호법 중 한 명 마천도(魔天刀) 강산! 그리고… 나의 스승이다.”

주재구는 말을 하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강산은 그런 주재구를 바라보며 손을 등 뒤로 뻗었다. 그러자 거대한 도가 그의 손에 딸려 나왔다.

“자네가 요새 그 이름 높은 화산일검인가? 천무제를 꺾었다지?”

“그렇소.”

“훗! 가 보게나. 안 그래도 궁주께서 자넬 기다리고 있으니.”

“마궁주가 나를? 어째서…….”

“그건 가 보면 알 테지.”

강산이 슬쩍 옆으로 비켜 주었다. 하지만 진철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한눈에 보아도 그의 무위는 결코 천무제에 뒤지지 않았다.

“가라.”

그때 주재구가 입을 열었다.

“비록 적이지만 그는 무인이다. 위선 떨며 뒤통수를 때리는 그런 무인과는 달라.”

“음…….”

진철은 그의 말에 신음을 흘리고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럼에도 강산은 여전히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럼…….”

진철이 주재구의 어깨를 잡으며 앞으로 몸을 날리자 주재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팟!

주재구의 신형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하지만 강산은 그가 자신을 지나침에도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진철이 지나가자 강산이 다시 상궁의 입구를 가로막았다.

“안됐지만 초대된 손님은 한 명이다.”

“알고 있습니다. 마궁주는 그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럼 나의 상대는 너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허허허!”

주재구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강산의 주위로 강력한 기파가 쏟아져 나왔다. 그 기파에 주재구는 얼굴을 굳히며 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의 모든 무공은 내가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통할 것이라 여기느냐?”

“…사련의 일은 안됐습니다.”

“…….”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알 겁니다. 내가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

“그런가…….”

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대도를 들어 올렸다. 단지 도를 들어 올리기만 했을 뿐인데 주재구는 그의 몸이 태산처럼 커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넘어서야 할 산이다!’

주재구가 의지를 굳히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강산은 그 기운을 느낀 것인지 자세를 낮췄다.

“오거라. 과연 네가 나를 넘어설 수 있는지 시험하마.”

“…하앗!”

연화봉에는 대대로 화산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화산파는 장문인의 시신을 연화봉에 안치했다. 그곳에는 십육 대 장문인인 옥린수 역시 잠들어 있었다.

무덤가에 다가간 진철은 주먹을 쥐었다.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누가…….”

이를 악문 진철의 입에서 악에 받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누가 이런 것이란 말이냐.”

낮게 울린 진철의 목소리가 무덤가에 퍼졌다. 진철의 앞에는 역대 장문인들이 묻힌 무덤 뒤에 자리한 절벽에 커다란 동굴이 파여져 있었다. 그 동굴이 파이는 바람에 떨어진 바윗덩어리들이 무덤을 짓누르고 있었다.

진철은 찐득찐득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동굴을 노려보며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어서 오라는 듯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기운의 끝에 마궁주가 있을 것 같았다. 단지 직감이지만 진철은 확신했다.

“음?”

마궁주 유랑천은 자신의 기감을 간질이는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시오?”

“아니라오, 아무것도. 그런데 혈교주.”

“말씀하시구려.”

“혹시 흑천마인에 대해 아시오?”

“흑천마인?”

혈교주는 의문을 품었다. 들어 본 적이 없는 단어였다.

“그것이 무엇이오?”

“우리 마궁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중 하나라오. 과거 이 세상에 수많은 마인이 등장했었는데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바로 흑천마인이라는 자였소.”

“음… 흑천마인이라……. 그렇게 불릴 정도면 꽤나 대단한 사람인가 보구려.”

“사람? 하하!”

유랑천은 갑작스레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아니라오. 그들은…….”

“음? 그럼 마귀라도 된단 말이오?”

“마귀라…….”

유랑천은 말을 늘어트리며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었다.

“혈교에는 혈마신이라는 전설이 내려오지 않소?”

“그렇소.”

“흑천마인 역시 그와 같은 존재라오. 아니, 혈마신 역시 흑천마인이 이끌던 마인 중 하나라 하니 흑천마인이 더 대단하다랄까.”

“그게 무슨 소리요!”

혈교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말은 우리 혈교가 마궁에 뿌리를 두고 있단 말이오? 설마 혈교의 사조들을 무시할 생각이시오?”

“그럴 생각은 없소. 단지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알려 주고 싶었소.”

“뭣?”

퍽!

유랑천의 손이 혈교주의 목을 움켜쥐었다. 혈교주는 목이 잡히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안타깝게도 흑천마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 그렇기에 그를 깨우려면 꽤나 강한 힘이 필요하다오. 비록 사제와 사마련주, 그리고 남림주, 포달랍궁주가 이곳에 없는 것이 아쉽기는 하나 어쩔 수 없지.”

혈교주는 유랑천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손목을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 주게. 자네에게도 할 말이 있으니.”

유랑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진철이 굳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유… 랑천!”

혈교주는 피 한 방울마저 빨려 들어가는 걸 느끼며 유랑천을 노려보았다. 하나 그게 끝이었다. 혈교를 이끌고 북해신궁과 함께 북방의 절대자라 불리던 혈교주의 허무한 결말이었다.

툭!

혈교주의 숨이 끊어지자 유랑천은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그의 신형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당신…….”

“기다렸다네, 화산파 장문인이여.”

유랑천은 팔을 벌려 진철을 맞이했다. 진철은 가만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요새 자네의 이름이 참 드높더군. 그건 그렇고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

“음? 뭔가?”

진철이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유랑천이 되물었다. 진철은 검을 향해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 전쟁의 원인인 마궁의 궁주인가?”

“그렇다면?”

“…벌을 주도록 하지.”

팟!

진철이 입을 닫는 순간 그의 신형은 이미 유랑천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놀라울 만한 빠르기였다. 몸을 숙이며 파고 들어간 진철은 그의 가슴을 향해 발검했다.

쩌걱!

“컥!”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진철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검을 뽑으려는 순간 무언가가 진철의 턱을 강타하고 지나간 것이다.

우웅!

유랑천의 손이 진동하며 기이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유랑천은 그것을 무방비인 진철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펑!

“크억!”

진철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의 신형은 허공을 부유하더니 바닥을 몇 번 굴러서야 멈춰 섰다.

“성질이 급하군. 명색이 도사이지 않던가?”

“크윽!”

유랑천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진철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게나. 묻고 싶은 말이 있다 하지 않았나?

“나는 할 말이 없어!”

“하지만 나는 있지. 아니면 또 그렇게 무분별하게 달려들 생각인가?”

“…….”

진철은 방금 자신이 당한 것을 떠올리며 숨을 골랐다. 그 모습에 유랑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럼 일단 이야기나 들어 보게나.”

“…….”

유랑천은 몸을 돌려 비석으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비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진철은 그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돌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한 거라네. 과거 화산파는 천하제일문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갖췄었지. 그리고 무공 역시 천하제일이라 불릴 정도였다네. 그런데 그런 화산파는 정파에서 버림받았지. 그 결과 마교에게 화산파는 멸문을 당했어. 자네는 그 사실을 알고 있나?”

“…….”

유랑천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지만 진철은 가만히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유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런데 어째서 자네는 그런 위선이 가득한 정파에 속해 있는 건가? 화산을 울리는 사조들의 원망이 들리지 않는 건가?”

“…….”

“이리 오게나. 나는 이 무림을 파괴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고통 받는 이도 없을 테지. 이리 와서 함께 무림의 멸망을 지켜보도록 하자. 어떤가?”

진철은 그의 말에 답했다.

“싫어.”

“이유는?”

“당신 말처럼 정파인들을 원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 부질없더군.”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왜 있는 것이지? 그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것 아니겠나.”

“그렇겠지. 하지만 전 무림을 파괴한다는 당신의 목적은 내가 저지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 화산은 바로 나의 집. 거기에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그 이유는…….”

진철이 눈을 사납게 빛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음성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네 녀석이 죽으면 이 전쟁이 끝나기 때문이지!”

미성의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한기가 유랑천을 향해 몰아쳤다. 유랑천은 재빨리 팔을 휘둘러 한기를 튕겨 냈다.

쩌저적!

한기가 벽에 꽂히자 곧장 얼음으로 변해 그곳을 완전히 얼려 버렸다.

“이런이런…….”

유랑천은 자신의 손에 깃든 냉기를 바라보다 진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그의 옆을 향해.

“빙령마인(氷靈魔人)께서 오셨을 줄이야.”

진철의 옆에는 거대한 도를 들고 백발을 휘날리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진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다 눈을 부릅떴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너…….”

“이따가 하자. 나 역시 너에게 할 말이 많아.”

눈꽃처럼 새하얀 손으로 대도를 들어 올린 그녀, 북궁아가 유랑천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진철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재미있어지는군. 정말 재미있어. 본 궁으로 인해 멸문당한 문파의 후계가 내 앞에 서 있는 것으로도 재미있는데 말이야.”

“뭐?”

유랑천의 말에 진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르고 있었나? 너희 정파와 마교가 왜 전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렇다면…….”

“그래, 모두 우리의 작품이었지. 그런데 설마 화산파가 아직도 명줄을 이어 가고 있을 줄이야. 그것도 절대고수가 되어서 말이야.”

“…널 죽여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늘었군.”

“훗, 복수는 부질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이 바뀌었어.”

진철이 차갑게 말하자 유랑천은 비석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너의 정의를 실천해 보아라.”

유랑천은 비석을 향해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비석에 박혀 있던 목걸이와 유랑천 손가락의 반지가 공명을 일으켰다. 팔대기보라 불리는 복마령과 마령환이었다.

“깨어나라!”

쿠르릉!

비석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거렸다. 그러자 비석 곳곳에서 기이한 기운이 폭발하듯 흘러나왔다.

“끄으으!”

비석에 손을 대고 있는 유랑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비석이 암흑으로 뒤덮이며 유랑천을 집어삼켰다.

우르릉!

비석의 진동이 강해질수록 동굴의 천장에서 흙먼지가 더더욱 떨어졌다.

“일단은 나가는 게 좋겠는데.”

“그렇군.”

진철과 북궁아는 동시에 동굴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와 함께 비석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사되었다.

꽈르릉!

진철과 북궁아가 동굴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하늘에서 뇌전이 떨어져 내렸다. 그 뇌전은 정확히 굴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순간 동굴은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끝… 인가?”

진철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무너지는 절벽을 바라보았다. 동굴은 완전히 함몰되어 절대 사람이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진철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수백 개의 칼날이 온몸을 난도질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북궁아 역시 그 느낌을 받았는지 도를 들어 올렸다.

콰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절벽 한 곳이 터져 나왔다. 약 삼 장의 크기를 지닌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한 존재가 허공을 걸어 나왔다.

어둠보다 짙은 어둠을 몸에 감싸고 있는 존재.

너무나 사악해 오히려 신성시되는 존재.

과거 세상을 지배했던 열여덟 마인의 지존.

흑천마인의 재림이었다.

그 흑천마인은 유랑천의 껍데기를 입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진철과 북궁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건 흑천마인!

‘흑천마인?’

진철은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의문을 품었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목소리. 자하마인의 목소리였다.

자하마인이 진철의 말에 대답했다.

-과거 우리를 이끈 존재, 그리고 우리에게 봉인당한 존재.

‘…….’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깨어나는 것은 다른 존재들 역시 깨어남을. 옆의 빙령마인 역시 나와 같다. 그리고 저 흑천마인은 그중에서도 독보적.

진철은 북궁아를 바라보았다. 칠흑 같은 머릿결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백발로 물들어 있고 눈은 얼음보다도 차가웠다. 그리고 그녀의 속에 존재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이 빙령마인…….’

-긴장해라, 주인이여. 천외천의 힘에 짓눌리기 싫다면.

‘…괜찮아.’

진철은 대도를 쥔 북궁아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북궁아는 자신의 손을 감싸는 따뜻한 느낌에 진철을 바라보았다.

“무림에 나와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았어. 나는 그것을 멈추고 싶어.”

“…….”

“날 도와주겠어?”

진철의 말에 북궁아는 잠시간 그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나는… 네가 가는 길은 끝까지 따라갈 거다.”

북궁아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진철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했다. 너무나 미안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겐 항상 희생만 강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마지막이야.’

진철은 고개를 돌려 흑천마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진철의 온몸에서 자색의 기운이 흘러나오며 그를 감쌌다. 자하마인과의 동화였다.

북궁아 역시 빙령마인의 기운을 끌어 올리자 수많은 빙정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가자.”

진철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런 진철의 눈에서 결코 굽힐 수 없는 의지가 묻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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