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後)
달빛이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밤, 한 인영이 장원의 담을 넘어섰다. 장원을 지키는 무사들은 온몸을 흑의로 두른 그를 발견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몸을 옮기며 이동하는 그는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잠깐 그 건물을 바라보고는 그 안으로 지체 없이 몸을 집어넣었다.
드르륵!
문이 조심스레 열리자 흑의인이 그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는 수수하면서도 곳곳에서 기품이 느껴지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흑의인은 그런 물건에 시선을 주지 않고 곧장 침상으로 다가갔다.
스릉!
흑의인의 등에서 묵광을 품은 도가 뽑혀져 나왔다. 그 도는 침상에 누워 있는 중년인의 목에 가 닿았다.
“으음.”
중년인은 자신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눈꺼풀을 들었다. 그러고는 흑의인을 발견하자 상체를 들었다. 그 탓에 그의 목이 살짝 베여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웬 놈… 너, 너는?”
호가장주 금석천은 흑의인이 복면을 내리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을 감으며 다시 침상에 몸을 눕혔다.
“때가 온 것인가.”
“…….”
“취하도록 하게. 그렇다면 나 역시 친우에게 그나마 속죄할 수 있겠지.”
금석천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흑의인은 눈을 빛내고는 그의 목에서 도를 거둬들였다.
“음?”
금석천은 자신의 목에서 예기가 사라지자 다시 눈을 떴다.
“죽음처럼 쉬운 것은 없지. 정말 속죄하고 싶다면 일생을 속죄하며 살아라. 그리고 곧 있으면 친우의 경사가 있는데 피를 묻히고 갈 순 없지.”
“…살려 주는 겐가?”
“그렇다.”
“…고맙군.”
“감사는 내가 아닌 ‘그’에게 하라.”
흑의인은 도를 다시 도집에 꽂아 넣으며 몸을 돌렸다. 금석천은 상체를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그라니?”
“검존 화산일검!”
***
혈천대전이 끝난 지도 어언 오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혈천대전은 전 무림에 크나큰 고통을 안겨 준 전쟁이었다. 가장 먼저 침범당한 운남은 아직도 남림의 세력 안에 포함되어 있었고, 산서, 녕하, 감숙을 비롯해 청해는 전부 사파의 영역에 속해 버렸다. 그 덕에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그로 인한 분란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전쟁의 여파가 사라진 것처럼 전 정파 무림에 활기가 돌았다.
정파의 내로라하는 모든 문파에서 화산파로 사람과 온갖 선물들을 보냈다. 바로 화산파의 장문인이자 검존의 결혼식이 거행되기 때문이었다.
“좋겠다, 좋겠어.”
매화문의 풍화검대주였던 박우는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수많은 이가 검존의 결혼식을 축하하고자 줄을 서고 있었다.
혈천대전이 끝나고 매화문은 화산파에 흡수되었다. 매화문의 수뇌부는 그 사실에 꽤나 저항했으나 젊은이들은 그것을 반겼다. 매화문에서는 익힐 수 없었던 화산파의 무공들이 화산파에는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박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화산파에서도 풍화검대의 대주를 맡고 있었다.
“뭐가?”
옆에 서 있던 매화대주 당허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라니. 장문인이 혼인을 올리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 바로 북해빙궁의 신녀라고, 신녀. 절세미녀 중에서도 따라올 여자가 없다 하잖아. 그것도 부러운데 신부가 둘이라니…….”
“하! 그럼 너도 결혼하지 그러냐?”
“쳇, 여자가 있어야 하지.”
“난 그보다 청풍장주의 여식이 시집온다는 게 걱정이다.”
“하긴…….”
사우림은 얼굴을 구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 그지없었다.
“날씨, 참 좋다!”
“에잉! 결국은 가는구만!”
“형님도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차! 형님은 도사셨지.”
“…흥!”
기태천은 자신의 앞에 놓인 오리고기를 뜯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문기는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모용수를 바라보았다. 모용수는 지난 세월 동안 앳된 모습을 벗고 훌륭한 무인으로 자라 있었다.
“그래, 너도 곧 혼인한다며?”
“에? 아, 예…….”
“쯔쯔,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하라니까.”
“형님.”
“왜?”
“형수님이 노려보고 계십니다.”
“…흡!”
모용수의 말에 고개를 돌린 당문기는 저 멀리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 숨을 들이켜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친구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아! 제길… 이번엔 또 뭘 사 달라고 토라지려나.”
“쯧쯧.”
기태천은 혀를 차며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오늘은 정말 날씨가 좋구려.”
“그래요.”
“미안하오. 나 역시 그대에게 저런 성대한 자리에서 혼례를 올려 주고 싶었는데…….”
높디높은 제단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모두 검존의 혼례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 광경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단아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하나 남은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가가.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미안하오.”
“아니에요. 비록 진실을 몰랐다지만 당신을 원망했었던 내가 더 미안해요.”
“안 매… 이런 외팔이라도 정말 괜찮겠소? 당신에게 해를 가한 죄인인데도?”
여인은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묻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에 제가 살고 가가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팔은… 저를 위한 것이잖아요?”
여인은 펄럭이는 소매를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사내는 그런 여인을 하나 남은 팔로 꼭 안았다.
“에… 모두 정숙하시오!”
매화문의 문주였던 문영추는 화산파의 태상 장로가 되어 있었다. 자하신검의 각성으로 망가졌던 몸은 진철이 과거 화산파에 묻어 놓았던 영약들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무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살 수 있게 된 그는 그 누구보다도 화산파를 위해 발로 뛰고 있었다.
“이제부터 혼례를 거행하도록 하겠소!”
“음?”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내는 귓가를 간질이는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망가졌던 화산파 역대 장문인들의 무덤이 더욱 튼튼하게 재건되어 있었다.
“사부님, 보고 계십니까?”
사내는 무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아직도 무림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입고 있습니다.”
사내는 몸을 숙여 무덤에 피어 있는 잡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계속 보아 주십시오. 화산이 무림에 어떤 문파로 커 가는지를…….”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