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第一章 풍운
모란혈녀(牡丹血女) 철유라(鐵流羅).
이제 겨우 십 대 후반의 소녀는 소녀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 먼 존재였다.
재물과 권력을 모두 쥔 아비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그녀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녀는 무림인으로 성장했다.
그녀의 나이 열 살에 첫 살인을 경험했고, 일류라 칭함 받는 무인 열 명을 혼자서 죽였다.
해가 바뀔 때마다 그녀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 정도 속도는 부친을 훨씬 능가하는 경지였다.
그녀의 친부가 바로 패천문의 문주 철대악이라는 사실을 상기했을 때 그녀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이 가능하다.
공식적으로 철대악은 홀아비에 슬하에 자식 하나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혈육이 있었으니 모란혈녀가 바로 그녀였다. 살인을 한 인물의 시체에게 항상 모란을 던져 준다는 뜻에서 지어진 모란혈녀!
비록 강호에는 그리 알려진 존재는 아니지만 그녀를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철유라를 동경함과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흑풍도 신철은 그녀를 동경하기보다는 두려워했다.
비록 자신이 철대악의 그림자 역할을 할 만큼 강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녀의 차가운 눈빛 앞에만 서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자랑하는 듯 냉정히 직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마주하기가 어렵기만 했다.
철대악을 대하는 것보다 철유라와 상대를 하는 것이 열 배는 더 어렵게만 느껴졌다.
신철은 마른침을 삼켰다.
철대악이 전하라 한 말을 전한 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철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그녀의 표정이나 행동이 궁금했다. 차마 눈동자조차 돌리기가 힘이 들었다.
그의 양옆으로는 강맹한 기운을 흘리는 무인들이 시립해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하구나.'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단 여섯 명이 뿜어내는 기운으로 인해 천하의 흑풍도 신철이 이토록 긴장을 하다니 말이다.
신천은 패천문에서 문주 다음으로 강한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할 정도로 실내의 분위기는 무겁고 차가웠다.
"고개를 드세요."
뼛속마저 얼릴 정도의 차가운 음성에 신철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죽어도 마주하기 싫은 철유라와 눈빛을 마주쳤다.
"살락원(殺樂院)이 하산할 정도로 그자들이 대단한가요?"
분명 부친의 명령이라 전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다.
표정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신철은 지금 그녀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약하나마 그녀의 말투에 변화가 있었다.
"원주께서도 아시다시피 패천문 정예 무인 오십을 도륙할 정도의 자들이라면 그리 만만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신철은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핀 후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본문은 현재 무인들을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이 섬서성으로 향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정에도 없던 살락원을 하산시키겠다 하셨단 말이죠."
살락원(殺樂院).
현 패천문의 문주 철대악의 조부 때부터 조직된 비밀 단체였다. 이들은 사천성과 운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이름 없는 산속에서 벌써 수십 년을 묵묵히 무공을 갈고닦는 이들이었다.
살락원을 만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혹시라도 있을 패천문의 위급 상황에서 강력한 존재가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패천문에 해가 되는 다른 세력의 인물들을 척살하기 위한 단체가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태어난 조직이 바로 살락원이다.
처음부터 철대악이 자신의 금지옥엽 철유라를 살기를 흩뿌리는 살락원의 수장으로 앉히고자 한 것은 아니다.
사실 철유라는 철대악과 많이 달랐다. 외적인 모습은 당연하고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비록 겉으로는 매정하고 엄하게 문도들을 대하는 철대악이었지만 사실 마음이 따뜻한 철대악이었다. 허나 철유라는 달랐다.
그녀는 뼛속부터 차가운 무인이다.
검을 들었고, 그 순간부터 자신이 적이라 판단한 인물의 피를 꼭 보고야 만다. 그럼에 있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살인에 대한 죄책감마저 갖고 있지 않았다.
살락원의 수장으로서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렇게 하지요."
"……!"
신철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녀가 이번 흉수를 처리하는 일을 말이다. 원래 살락원이 하산할 때는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다.
그녀의 성격상 이미 약속된 것을 어기는 걸 너무나 싫어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마 명령을 내린 철대악 스스로도 크게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사람의 성격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게 무엇입니까."
"나의 존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천하에 공표하는 것이에요."
"……!"
신철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녀의 어머니가 누구인가. 철대악의 딸이라 그녀를 공표하는 것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일이었다.
둥근 원형 탁자를 주변으로 다시 한 번 삼남 일녀가 모였다.
사마련주이자 화월문의 문주 지청화를 비롯 철대악과 북천휘, 사가훈이 자리에 착석했다.
"살락원을 움직이셨다고요."
"죄송합니다, 련주."
한 문파의 수장인 그는 자신의 위치와는 상관없이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태도에 북천휘는 눈살을 찌푸렸고 사가훈은 속으로 코웃음을 칠 뿐 겉으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에요. 충분히 문주님의 선택을 이해합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지청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수하들과 제자를 잃은 것 또한 사마련을 위해서 유가량을 안전하게 지키려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오히려 사마련에서 패천문에게 보상을 해 줘야 하는 상황이란 말이었다.
"헌데 부친상을 당한 유가량이 왜 급작스럽게 철 문주님을 찾아온 것이죠?"
"독대를 원합니다, 련주."
철대악은 그녀에게 전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뭔가 중요한 말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전음을 사용했다. 북천휘와 사가훈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물론 그가 전음을 사용했다는 걸 모를 북천휘와 사가훈이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서 전음을 사용하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두 사람의 무공 수준이 낮지는 않았다.
철대악의 전음에 지청화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청화가 세 명의 문주들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철대악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식처럼 키우던 제자를 잃었고 문도들을 한 번에 잃었다. 그래서 며칠 전에 모였던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식사라도 하려고 모였다.
북천휘와 사가훈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철대악과 지청화만이 실내에 있었다.
그녀는 뜨거운 차를 천천히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철대악이 입을 열었다.
"얼굴이 수척해지셨습니다."
"그런가요. 요새 성무검법(聖武劍法)의 끝을 보려고 하고 있어요."
성무검법은 지청화의 독문검법이자 화월문주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라면 필히 익혀야 하는 검법이었다.
대성하게 되면 천하에 적수가 없다는 성무검법은 화월문 역사상 그녀의 모친이 가장 대성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독대를 원하신 이유가 뭔가요."
"독천자 유장룡을 죽인 흉수, 그리고 저희 패천문에 도전장을 내민 살수 놈들이 환도문의 생존자인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요."
지청화는 충격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뭔가 철대악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유가량이 그 문제로 패천문을 방문했었습니다.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본문의 무인들이 동원되었던 것이고 말입니다."
"……."
지청화는 별다른 반응 없이 묵묵히 찻물을 들이켰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데도 단 한 번에 찻잔의 내용물을 비워 냈다.
가끔 그녀가 보이는 지독한 모습의 일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죽이세요."
차가운 음성이 철대악을 긴장시켰다. 천하의 패천문주를 말이다.
살갗을 태우는 듯한 그녀의 기운에 철대악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힘을 실어 주죠."
"힘이라 하시면."
"세 명을 붙여 드리죠. 혈화(血花)를 말이에요."
철대악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화월문 문주의 직속 친위대 혈화는 그 인원이 총 열 명밖에 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 열 명의 힘은 소문파 하나를 쓸어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철대악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살락원과 혈화를 이용해 그들을 죽이세요. 그리고 유가량도 처리하세요. 절대로 살려 두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참에 독마궁도 계획에서 제외시키도록 하죠. 삐걱거리는 도구는 수리하거나 버리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련주."
명을 받아든 철대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 문주."
"예."
"살락원은 유라 그 아이가 이끌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보고 싶네요. 오랜만에. 하지만 그 아이가 싫어하겠죠?"
"상처가 많은 아이입니다. 련주께서 이해하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청화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알아요. 유라가 저를 정말로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미우나 고우나 유라와 난 한 핏줄로 이어져 있으니까요."
지청화는 분명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처연하고 애달팠다.
* * *
삼 년 전 녹림총련이라는 거대 세력이 사라졌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사라진 이유는 남북천맹에게 대항하려다 그렇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남북천맹 맹주 율천세의 혈육 율무천이라는 사내와 그의 제자 화진천이 이끌고 온 두 개의 무력단체만으로 가능했다.
실로 엄청난 전투력이었다.
두 개의 무력단체는 도합 이백도 되지 않는다, 알려져 있는데 그 힘만으로 그 녹림총련을 몰살시키다니. 역시나 천하를 지배하는 자의 자식과 제자다운 힘이었다.
특히나 중원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내, 율천세의 혈육 율무천의 무위는 그 소문만으로도 천하를 진동시켰다.
절대자의 자제답지 않게 이십 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출사하여 그는 비천옥룡(飛天玉龍)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특히나 그가 이끌고 맹을 나온 무룡단(武龍團)은 율천세가 수년간 집중적으로 키워 낸 조직이라고 알려졌다.
그들의 힘은 삼 년 전 세상에 등장하여 율무천의 명성과 비례하여 넓게 퍼졌다.
불과 오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 무룡단은 단숨에 녹림총련 열세 개의 독립 채 중 일곱 채를 나흘 만에 세상에서 지우는 저력을 보여 줬다.
그리고 율무천과 동시에 이름을 알린 인물이 있었다.
천봉장 화진천!
율천세의 제자 세 명 중 대사형이라는 위치에 있음과 동시에 남북천맹의 기둥이라 불리는 사대검문의 수장 천산검문의 장남이었다.
그런 배경을 가진 것만으로도 그는 천하의 황제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가 이끈 혈도대는 남은 녹림의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이어서 녹림지존 초웅천의 목까지 그의 손으로 끊어 버렸다.
두 사람의 경쟁에서 화진천이 승리한 것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무림인들은 율무천을 자신들의 머리에 각인시켰다. 그가 단순히 남북천맹 맹주의 자식이라서? 아니다. 그는 화진천과는 달리 녹림의 무리를 포용하고 감싸 안았다. 항복하는 자들은 풀어 주거나 목숨을 살려 줬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단죄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화진천은 정반대로 자신만의 힘을 보여 줬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자신의 힘 앞에 굴복시켰다. 그리고 모두를 죽였다.
사람들은 율무천과 화진천이 녹림의 조직들을 와해시킬 적마다 열광했다. 젊은 피를 가진 새로운 영웅을 그들은 원했던 것이다.
평온하기만 하던 무림에서 두 사람의 등장은 꽤나 달콤했으리라. 맹주의 사부 야수마황의 잃어버린 손녀딸을 납치하여 맹을 협박했던 녹림총련의 단죄는 결국 율무천과 화진천이라는 두 사내로 인해 이루어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일개 산적질이나 하는 녹림이 앞으로 장차 무림을 이끌어 갈 두 사내를 이길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게 벌써 삼 년 전 일이었다.
수십 년 만에 피바람이 분 이후 그 중심에 서 있었던 무룡단은 삼 년 전 수장의 공석을 채울 수가 있었다.
율천세가 직접 지도하고 비밀리에 육성했던 무룡단의 새로운 단주는 다름 아닌 비천옥룡 율무천이었다.
그가 단주로 임명받았을 때 무룡단 단원들은 너무나 기뻐했다. 그와 함께 녹림을 토벌했을 적의 환희는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던 무룡단은 현재 백이십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모두가 일류라 칭함 받는 최고의 실력을 지닌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새하얀 무복을 입었고 그 가운데에는 승천하는 용의 형상이 은실로 박혀 있었다.
무룡단의 복장을 한 열 명의 호위를 받으며 단주인 율무천은 부친의 거처인 천성각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천성각과 자신의 거처가 있는 담을 넘어가면 화려한 꽃들과 호숫가가 존재하는 거대한 정원이 나온다.
율무천은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무룡단원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곤 자신만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이십 대 초반의 소녀가 호숫가 위에 만들어 놓은 목조 다리 위에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소저."
"한 달 만인가요?"
"난 일 년 정도 된 것 같소만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았소?"
율무천은 너무나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만큼 눈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여인이 사랑스러운 듯 보였다.
"용호검문(龍虎劍門)의 계집들이 그렇게 예뻤나 보죠? 한 달씩이나 걸린 것을 보면 말이에요."
여인의 태도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율무천의 눈에는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양이다.
"그럴 리가 있겠소. 단지 중간중간 본 맹의 분타들을 들러 오느라 늦은 것뿐이오."
"언제부터 그대가 그런 일에 신경 쓰셨다고."
"이제부터 쓸려고 하오. 그동안은 본맹의 일에는 무관심하였으나 본격적으로 내 편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그래야 그대를 지킬 수 있는 남자로 성장하겠지."
진심이 담긴 말이어서일까. 냉랭하기만 하던 여인의 입가가 웃음으로 번져 갔다.
사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율무천.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권력이나 남북천맹의 맹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필히 맹주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오로지 무공에만 심취하여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려는 결심이 섰다. 물론 요 며칠 사이에 바뀐 심적 변화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건강은 어떠신가요."
"소저가 그걸 어떻게!"
율무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부친의 건강이 갑작스럽게 악화된 것은 이 년 전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자는 극히 소수였다.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아니 될 내용이기도 했다.
"내가 누구의 손녀인지 잊으셨나요?"
여인, 여수경(呂秀京)은 새침하게 표정을 지으며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소저가 입 밖으로 내민 내용은 맹에서도 극비로 분류 받는 내용이오."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다.
"뭐,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정색하고 말하는 율무천의 기세에 여수경은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율무천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왔는데 소저와 이런 일로 얼굴을 붉히는 것을 원하지 않소. 식사나 하러 갑시다."
율무천은 속에서 끓어오르던 화를 삭이곤 얼굴을 풀었다. 한 달 만에 얼굴을 마주한 정인 앞에서 굳은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여수경도 이내 못 이기는 척 그의 뒤를 쫓았다. 율무천은 그녀를 데리고 무룡단원들과 함께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전각 아래 도착하자 율무천은 무룡단 일대의 대주를 역임하고 있는 신욱(愼郁)와 두세 명만을 대동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요."
그런데 갑자기 여수경이 걸음을 멈췄다.
"저 사람은 누구죠."
뒤돌아 가리킨 인물은 무룡단의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무리의 맨 뒤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무룡단 일대의 막내쯤으로 보였다.
"석 달 전에 무룡단에 새롭게 입단한 녀석입니다."
"이름이 무엇이죠?"
"갑자기 왜 그러오."
"진소백(陳昭伯)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헌데, 어째서 삼 개월 동안 제가 보질 못한 거죠?"
"그건 저 아이가 시험을 치러 올라왔는데 오늘이 첫 날이라 그러오."
여수경은 새침한 표정으로 사내의 얼굴을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룡단 일대는 율무천을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만큼 그 실력이 출중해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 무리에 섞이려면 시험을 봐야 하는데 진소백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은 그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분명 낯이 익은데 말이야. 어디서 봤더라.'
사내의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여수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건물 안으로 율무천과 함께 들어섰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소백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이 나고 있었다.
율무천은 자신의 거처를 비천각이라 이름 지었고 그 옆에 삼 층 건물을 무룡단원들이 먹고 자고 하는 용도로 쓰기 위해 새로이 지었다.
다른 대원들도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했지만 진소백은 홀로 무룡각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후. 정말인가. 초미 그 계집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게."
진소백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서남쪽에 위치한 복건성(福建省) 연청문(演淸門)의 제자 진소백이라는 신분으로 위장해 있는 사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초미 계집이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가 말하는 초미는 바로 여수경이었다.
녹림지존의 딸 초미가 분명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젖살도 많이 빠지고 숙녀가 되어 버렸지만 얼굴이 완전 바뀌진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남북천맹 총타 내에서 퍼진 소문에 의하면 그녀, 천검무제의 사부인 야수마황 여곤의 손녀 여수경이 납치된 상황에서 녹림의 무리가 도륙당하는 장면을 본 이후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라 했다.
물론 처음에는 그녀가 초미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잠깐 인연이 닿을 뻔했던 녹림의 몰살이 흥미로웠을 뿐이다.
하지만 율무천과 장원에서 함께 나온 여수경을 본 순간 초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면 어찌하나, 그럴 경우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초미가 야수마황의 손녀라…… 재밌네.'
그는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몇 가지 추측을 내릴 수가 있었다.
가장 사실과 가까운 것은 갑작스럽게 수왕의 무리가 초미를 납치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야수마황의 명령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손녀를 찾던 야수마황은 녹림지존이 그녀를 데리고 있다는 걸 알고는 수왕의 무리를 시켜 그녀를 납치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그래도 되지 않자 율천세에게 명령을 내려 그가 자신의 아들과 제자를 이용해 그녀를 구출하려고 했을 것이다.
의외로 녹림의 저항이 심하자 녹림토벌로 결론을 내 버려 삼 년 전 녹림총련을 묵사발 내 버린 것이리라.
뭐 어찌 되었든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다행인 일이다. 자신이 남북천맹의 진소백이라는 녀석으로 위장하여 목적한 일을 처리하는 데 방해가 될 존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눈치채는 기미가 보였다면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여야 했을 것이다.
"어이 막내야! 어서 나와라. 조금 있으면 율 공자께서 나오실 테니."
함께 방을 쓰는 소필호(蘇必浩)의 음성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사우는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