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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章 작전
용호검문의 무인들은 피떡이 된 채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전부 말이다. 치욕이자 굴욕을 당했다. 그것도 적들과 한통속이 되어 버린 검룡전 무인들에게 말이다.
처참한 패배,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바로 눈앞에서 빼앗겨 버린 적의 부재였다. 하진은 이를 갈았다.
상처로 인해 몸을 가누기 힘이 들었지만 눈빛만큼은 살아 있었다. 그는 안간힘을 써 가며 몸을 일으켰다.
"걸을 수 있는 자는 모두 일어서라."
그의 말 한마디로 인해 송장처럼 누워 있던 무인들 중 몇몇이 거짓말처럼 일어섰다.
"본문에 이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에게는 상처를 치료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말이다.
'반드시 잡아서 죽인다.'
* * *
혈천사가의 무리 중 일부를 생포했다는 소식이 총타로 전해졌다. 생각보다 빠른 시일 내에 혈천마성의 무리를 잡았다는 건 굉장한 희소식이었다.
현재 남북천맹의 위엄은 꺼져 가는 불빛처럼 희미했다. 그런 와중에 혈천사가의 무리를 생포한 것은 지금까지 혈천마성에게 당했던 것들을 모조리 갚아 주는 격이었다.
남북천맹 무인들이 대거 나와 생포당한 철권이가의 무인들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생포당한 자들을 향해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천마성은 현재 무림공적이었다.
공적 앞에서는 정파라 자처하는 자들도 본래의 점잖은 모습을 잃기 마련이다. 그들 또한 인간이었다. 오랜 시간 혈천마성이라는 단체에 대한 인식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중원을 지배하면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단체, 자신들의 선배들로부터 또는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속에서만 저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저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준 자들 또한 직접 본 것은 전무하다.
권선징악!
남북천맹의 뿌리는 선으로써 악을 징벌했다는 명분으로 세워진 곳이다. 혈천마성을 집어삼킴으로써 악을 처단하고 자신들이 아무런 마찰 없이 중원을 차지할 수 있었던 엄청난 명분인 셈이다.
그렇기에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무인들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자긍심이 존재한다. 그런 마음을 흔들고 있는 혈천마성은 말 그대로 악의 축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생포된 혈천마성의 무인들에게 보내는 반응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저들인가."
남북천맹에 군사 사마태릉은 호기심 어린 눈길로 철권이가의 무인들을 내려다봤다.
"네."
그의 옆에는 유천룡이 서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용호검문과 부딪힘이 있었다고?"
"가벼운 칼부림이었습니다."
"흐음."
사마태릉은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의외군."
유천룡이 자신의 가문인 용호검문을 박살 내면서까지 저들을 생포해 올 줄은 몰랐다. 그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분명 피를 보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도 되었을 것인데.
사마태릉은 유천룡이라는 사내에 대해서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출세보다는 무인으로서의 명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가문과 등을 지면서까지 저들을 생포해 왔다는 건 현재 속해 있는 남북천맹에 대한 충성도가 굉장하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이 사내 의외로 야망이 있는 인물이었다.
사마태릉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
현 검룡전주 주원호보다는 유천룡을 따르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자를 자신들의 편으로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엄청난 인재를 손 안에 넣는 것이었다.
"수고했네. 그나저나 검룡전주는 아직 소식이 없나."
"전주께서는 복귀 중이시라는 연락만 받았을 뿐입니다."
"흐음. 그런가. 다행이네. 지금과 같은 시점에 바깥출입은 자제하는 편이 좋지."
은근한 경고였다.
검룡전주 주원호는 총타 내에 머무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방랑벽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일종의 경고성 발언이었다.
유천룡도 그의 그런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은 지하 뇌옥에 가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이사민을 비롯한 아홉 명의 녹의인들은 점혈을 당한 채 쇠사슬로 손과 발이 묶여 지하 뇌옥에 갇혔다.
쿵!
철문이 닫히고 그들을 안내한 무인들이 사라졌다.
"하아."
이사민의 등 뒤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공자."
"왜."
"아닙니다."
등 뒤에서 말을 꺼낸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말해 봤자 내 대답이 뻔해서 그러는가 보네."
"……."
대답이 없자 이사민은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우리는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야. 그냥 자유가 아닌 혈천사가의 이름을 되찾고 당당하게 세상에서 살아갈 자유 말이야. 목숨 같은 거 걸어 볼 만하지 않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이사민의 말에 모두가 긍정한다는 의미였다.
이사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함께 웃을 뿐이었다.
'일이 잘 진행되어야 할 터인데.'
누구보다 주문룡을 믿는 그였지만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온 이상 긴장하고 또 긴장해야만 했다.
늦은 밤, 유천룡은 남북천맹 총타를 빠져나왔다. 은밀하게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만을 찾아 신법을 발휘해 내달렸다.
한 시진가량 이동한 그는 섬서성 끝자락에 위치한 낡고 허름한 객잔에 도착했다.
끼이익.
건물 관리를 어떻게 했는지 문짝은 살짝만 건드려도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그가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어둡던 공간에 빛이 생겨났다.
"전주를 뵈옵니다."
유천룡이 자세를 고쳐 잡고 예를 취했다.
그의 앞에는 오십 대 초반의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널린 것이 의자인데도 그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다가 눈을 떴다.
그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유천룡은 검룡전주 주원호에게 밀봉된 서찰을 조심스럽게 건네었다.
"나를 보자고 한다?"
"그냥 무시해도 될 내용이라고는 생각이 들었지만 철권이가 무인들의 생포를 내걸 정도라면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원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날짜와 약속 장소만 달랑 적혀 있었다. 하지만 주원호가 눈여겨본 것은 하단에 찍혀 있는 인장이었다.
그것은 남북천맹 맹주의 자리에 있는 자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
율천세는 죽었고 이 인장을 임시로 가지고 있는 사내는 단 한 명뿐이다.
"율무천이 혈천마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유천룡은 그의 중얼거림에 호기심이 동했지만 질문하지는 않았다. 주원호가 그를 신뢰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군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심.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도 이유겠지만 그런 그의 태도를 높게 평하고 있었다.
주원호는 한참을 침묵으로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그들을 만난다. 진행하도록."
"존명."
다음 날 철권이가의 무인들이 갇혀 있는 곳에 두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나같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쯔읍. 저 녹의를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는구먼."
승려복을 입은 좌령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옛날에도 저 옷을 입고 있는 놈들은 저런 눈빛이었지. 자신들이 투지가 높다는 걸 자랑스러워했지. 결국은 개죽음을 당했지만."
사귀랑 표학은 철문 안에 갇혀 있는 철권이가의 무인들을 벌레 보듯 바라봤다.
이사민 또한 지지 않고 표학을 향해서 으르렁거렸다.
저들이 나눈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과거 철권이가와 한 번쯤 사투를 벌였던 자들일 것이다. 곧 저들이 남북천맹 원로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원수인 셈이다. 결코 그들의 기에 눌리기가 싫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네놈 또한 제명에 못 살고 저승 구경을 하겠구나."
좌령이 비아냥거렸다.
그러고는 뒤에 있던 수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이 철문을 열고 이사민을 개처럼 끌고 두 좌령과 표학을 뒤따랐다.
이사민이 두 노인에게 이끌려 온 곳은 그가 갇혔던 뇌옥보다는 조금 작은 밀실이었다. 삼면에는 갖가지 쇠기구들이 걸려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고문에 쓰이는 용도를 가진 것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흘흘. 내가 소싯적에는 독종이라 유명한 놈들은 죄다 고문해 봤지. 처음에는 너처럼 나를 노려보던 놈들이 내 발가락을 핥으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더구나."
좌령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이사민의 머리채를 쥐어 잡아 올렸다.
"응? 아가야. 네놈도 곧 그렇게 될 거란 이야기다. 내가 직접 손을 쓰는 것이 아깝지 않도록 잘 버텨 봐라."
"나에게 듣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그런 건 없어."
"……!"
이사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좌령의 그 한마디로 인해서 상대의 대한 두려움이 생겨났다.
이자들 결코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에게 듣고 싶은 무엇인가보다는 고문을 통해서 얻는 쾌락에 더 중점을 둘 자들이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얼마 못 가 이들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예감이 지나갔다.
"에잇, 퉤!"
좌령은 피범벅이 된 채로 쓰러져 있는 이사민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더럽게 독한 새끼네."
"괜히 철권이가의 후손이 아니지."
표학은 물끄러미 이사민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살이 찢기다 못해 너덜너덜해져 있는 그의 몰골은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놈을 닮았어."
"나도 느꼈어."
"아직도 그놈을 생각하면 오른쪽 어깨가 욱신거리곤 하는데 말이야."
"아직 그놈보다는 못하지만 눈빛만큼은 크게 될 놈이야."
자신들이 고문한 상대를 칭찬하는 우스운 장면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지독한 분노가 숨어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주인공은 이사민의 조부가 되는 이였다. 철권이가의 독문권법인 오행연환권(五行連環拳)의 창시자이자 가문에서 가장 강했던 자 이가도(李嘉燾)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혈천사가 네 개의 가문의 수장 중 이가도만큼 강했던 사람은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가도가 만들어 낸 오행연환권은 파격적이면서 엄청난 파괴력을 뿜어냈었다.
그를 상대할 때 좌령과 표학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면 이겨 내지 못할 사내였던 것이다.
그런 그의 핏줄이 눈앞에서 피범벅이가 된 채로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한 흥분이 일어났다.
속 좁은 행동일지는 모르나 두 사람은 당장이라도 이사민을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서문륭의 화를 살까 겁이 났다.
"그나저나 이것들이 왜 이렇게 쉽게 잡혔을꼬."
좌령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지."
"흠. 그런 건 뭐 우리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언제 심각해졌냐는 듯 좌령은 얼굴에 주름을 보이며 웃는다.
"내기할래."
"네놈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 알았다."
"사흘."
"강하게 나오는데? 좋다, 난 이틀."
"내기 조건은 차차 생각하는 것으로."
"좋다."
두 사람은 이사민이 언제까지 버틸지에 대한 내기를 하며 희희덕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율무천은 검룡전주라는 사내를 오늘로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두 번째였다. 맹주의 자식인 자신이 두 번째밖에 못 봤다는 건 그만큼 주원호에 대한 신비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무공 실력으로 따지면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문파들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강자였다.
그게 소문만이 아니라는 걸 오늘 알았다.
직접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생각지도 못했던 두려움이 안에서 피어올랐다. 하지만 결코 자신의 감정 따위는 드러내지 않았다.
무심한 눈길로 주원호를 쳐다봤다.
"참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걸 공자를 뵙게 되면서 새삼 느낍니다. 제가 공자를 처음 봤을 땐 막 걸음마를 뗄 즈음이었죠."
율무천의 입장에서는 두 번이지만 그에게는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이었다.
"공자가 걷는 모습을 볼 때 기뻐하시던 맹주를 기억하는 저로서는 그분의 죽음이 참으로 서글프답니다."
율무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상기시켜 주는 그의 언행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공자가 왜 부친의 죽음과 관련된 혈천마성의 무리들과 결탁을 했는지에 대해서 여쭙고자 왔습니다."
주원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을 서신의 내용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것 때문이라면 제가 답해 드릴 수 있는 건 많이 없습니다. 대신 전주께 소개해 드릴 인물이 있습니다."
율무천은 미소를 띠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실내에 율무천과 주원호 외에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주원호의 한쪽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충격이었다.
기껏 해야 율무천과 동년배로 보이는 사내의 기척을 자신이 잡아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주원호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내는 일이었다.
"이름은 사우라고 합니다. 전주께서 혈천마성과 결탁을 했다고 하셨는데 맞습니다. 전 이자와 결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지만 아버지는…… 혈천마성이 아닌 다른 이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무슨!"
처음으로 주원호가 표정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는 율천세를 인간적으로 존경하던 이였다. 그런 율천세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이 들었다. 그 복수의 대상은 혈천마성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아니라는 율무천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다.
혈천마성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주원호는 율무천을 의심하는 일을 그만뒀다. 아버지의 죽음을 가지고 거짓말을 할 정도의 인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무천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의 대한 그릇을 평가하는 자신의 안목을 믿는 것이다.
"저 사내와 연관이 있는 겁니까."
"이 친구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주원호와 사우가 눈이 마주쳤다.
사우는 미소를 띠었고 주원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신뢰가 가는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하다는 건 인정한다. 젊은 나이에 이루기 힘이 든 경지에 올랐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하는 이야기를 당신이 믿고 안 믿고는 상관하지 않아. 당신이 진실을 모른 채 죽는다는 건 변하지 않을 테니."
"……!"
주원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살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내 율무천이 있다는 걸 상기한 그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허나 쉬운 일이 아니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당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감히 검룡전주인 자신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낸 애송이를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금만 성정이 거칠었으면 당장 칼부림이 일었을 것이다.
사우의 주원호의 살기를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 * *
그 시각, 호북성 무한에 위치해 있는 용호검문 주변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빼곡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늦은 밤인데다가 도시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용호검문은 검은 복장으로 어둠과 동화된 이들을 포착하는 것이 힘이 들었다.
꼭 그러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다. 어둠과 한 몸이 된 무리들의 움직임은 미세한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절제되어 있으면서 빠르고 조용하다.
용호검문의 정문 근처에만 서른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서북쪽으로는 오십이 넘는다.
게다가…… 남쪽 산 근처에는 삼삼오오 조를 이루고 있는 이들의 수가 총 일백 명이나 된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용호검문이었다.
용호검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는 검은 그림자들을 통솔하는 이가 있었다.
이십 대 후반의 사내. 그는 검은 옷을 입지 않았다. 금빛 무복에 가운데에는 금색 수실로 꽃이 만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혈천마성 혈천사가 중 천화유가의 가주 유단.
그는 차가운 눈길로 산 아래 고고한 자태로 존재하는 용호검문의 장원을 쳐다보고 있었다.
천하의 용호검문이다.
남북천맹을 떠받치고 있는 주축 중의 하나다. 그런 곳을 상대로 백이십 명의 무인들을 대동한 채로 나타났다.
누가 들었다면 비웃었을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절정고수가 아닌 이상 이 정도의 인원으로는 용호검문을 무너트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용호검문에 속해 있는 무인들만 삼백이 넘었다.
게다가 사대검문 중 결속력이나 조직력으로는 최고라고 평 받는 이들이 바로 용호검문의 무인들이었다.
결코 쉽게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단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 났다.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용호검문을 상대로 너무나 여유가 있는 표정이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기습이라고는 해도 수적으로 너무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유단은 평온하기만 하다.
벌써 기다리고 있는 시각도 한 시진이 넘어간다.
그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오래지 않아 유단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용호검문의 장원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름과 동시였다.
"움직인다."
"예. 전멸입니까."
언제부턴가 존재하던 그림자가 질문을 건넨다.
"몇몇은 살려 줘라."
명령을 받은 이가 사라진 뒤 용호검문 주변에서 머물고 있던 수많은 그림자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아갔다.
유단도 천천히 산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피바람이 불었다.
호북성 지배자라 불리던 용호검문의 영역을 낯선 이들이 침범했다. 그 시작은 장원 안에서 이루어졌다.
용호검문의 가주 유천묵의 장남인 유건은 검을 들고 처소에서 뛰쳐나왔다.
"어찌 된 것이야!"
"침입자들입니다, 공자."
"대체 어느 놈들이……!"
대충 어떤 세력인지 깨달은 유건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적들은 분명 만만치 않은 자들이다.
게다가 이 시각에 기습을 받은 이상 조금만 냉정을 잃으면 자멸하기 십상이다.
유건은 즉시 가문의 주인이자 아버지인 유천묵이 머무는 곳으로 이동했다.
내부에서 첩자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상황을 수하에게서 전해 들으면서 그는 앞으로 내달렸다. 허나 얼마 못 가 눈앞을 젊은 사내 한 명이 가로막았다.
차앙!
검과 검이 불꽃을 튀겼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검에 당황했지만 민첩함으로 유건은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유건인가."
"혈천마성이냐."
"대답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뭐, 상관없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유건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저기 어디에 숨었는지도 모르는 혈천마성의 무리를 쫓는 데 힘을 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저들이 공격을 감행할 정도면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첩자를 이용하여 내부에 혼란을 가중시킨 것만 봐도 치밀하게 준비된 공격이었다.
가문의 피해가 심각하겠지만 잘만 막아 낸다면 천하에 다시 한 번 용호검문의 명성을 떨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건의 얼굴이 굳어졌다. 용호검문 무인들의 비명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자신이 처소에서 나온 지 일각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적들을 너무나 만만하게 본 탓일까.
아니다.
비록 실전이 많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용호검문의 무인들이 이 정도의 기습으로 무너질 리가 없었다. 결론은 하나다.
혈천마성의 무인들이 월등히 강하다는 이유밖에는 없었다.
적들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유건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앞길을 막고 있는 사내를 쓰러트려야만 했다. 그래야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여러 잔상을 남기며 유건의 검 끝이 유단의 얼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결코 가벼이 여길 속도가 아님을 유단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상대를 얕잡아 봤다가 큰코다칠 뻔했다. 허나 유단 또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몸이었다.
순간적인 반응으로 허리를 뒤로 꺾으며 공격을 피해 냈다. 뒤로 빠르게 이동한 유단은 제대로 자세를 취했다.
유건은 조급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금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마음이 흔들리는데 제대로 된 공격이 될 리가 없었다.
유단은 처음과는 달리 상대방의 검로가 날카롭지 못하자 자신감을 얻었다.
허리를 양단하기 위해 베어 들어오는 검을 피한 유단은 즉시 유건의 손목을 낚아챘다.
"크윽!"
혈을 제압당했기에 유건은 그만 검을 놓쳐 버렸다. 유건은 암담한 표정이었다. 이런 실수를 할 만큼 자신의 무공의 깊이가 얕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무인이 무기를 떨어트리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혈도를 짚을 뿐 목숨을 빼앗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유건의 몸이 앞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유단의 수하 하나가 재빨리 그를 들쳐 업었다.
유단은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서 불이 나고 정신없는 상황이 연출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용호검문을 집어삼킬 수가 있을 것이다.
"철수한다."
허나 유단은 수하들에게 물러간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목적은 유건을 납치하는 것이었을까.
* * *
남북천맹 총타에 용호검문이 기습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촌각을 다투는 소식이기에 기습이 있은 그날 오후에 모두가 알게 되었다. 남북천맹 수뇌부들이 당황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소식이었다.
철권이가의 무인들을 생포하고 있는 가운데 혈천마성이 공격을 감행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남북천맹 네 개의 기둥이라 불리는 용호검문이 그토록 쉽게 적들에게 유린당한 것과 장자인 유건이 납치된 것은 충격적이었다.
분명 용호검문은 강한 단체였다. 비록 적들의 공격이 기습이었다고는 하지만 결코 자신들의 영역에서 혈족을 빼앗길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남북천맹은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맹주라는 자리는 공석이었다.
아마 이번 일로 인해 맹주 자리에 누군가가 빨리 앉아야만 한다는 생각을 모두가 하고 있을 것이다.
율천세의 아들 율무천이든 천산검문의 화진천이든 서문륭의 아들 서륜이든.
그 누구라도 좋으니 혈천마성에 대항할 남북천맹의 대표를 빨리 선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검룡전주가 율무천을 찾아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공자께서 하시는 행동이 얼마나 부친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지 알고나 있으십니까."
주원호는 상당히 흥분한 상태로 그를 찾아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천룡의 조카인 유건이 혈천마성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율무천의 여유로운 태도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분명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계책이었다는 걸 증명한다.
"공자!"
살기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실내에 나타난 두 그림자 때문에 더 이상의 분노는 드러내지 못했다.
바로 담천과 사군악이었다.
두 사람이 당분간 율무천의 호법을 맡는 임무를 맡았다.
결코 약해 보이지 않는 두 사내와 기 싸움을 벌이던 주원호는 결국 율무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게 똑바로 해명을 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지요."
율무천은 담천과 사군악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만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저들도 혈천마성의 무리입니까."
"아닙니다. 저들은 사우라는 사내의 수족입니다."
"사우라는 자가 떠들었던 이야기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가 혈천마성을 이끌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혈천마성이 나쁜 존재입니까."
"공자……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사우에게 듣지 않으셨습니까. 혈천마성과 본맹에 관한 진실을 말입니다."
주원호는 혀를 차며 율무천을 한심스럽게 바라봤다.
"순진하십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믿으시는지요. 혹여 다른 이들에게 발언하실 생각은 마십시오. 그거야말로 부친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입니다."
주원호는 사우가 한 이야기를 듣고도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처럼 도저히 믿지 않으려고 했다.
사우의 예상대로였다. 유건을 납치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치졸하고 비겁해 보이기는 하지만 주원호를 같은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사우는 자신의 말을 주원호가 믿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계획을 짰던 것이고 말이다.
주원호라는 사내에 대해서 정확하게 꿰뚫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전주를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해 일을 꾸몄습니다."
율무천은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제가 공자와 그들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라 믿고 계시는군요."
"전주께서는 수하를 아끼시는 분이라 들었습니다."
"하!"
주원호가 이렇게 흥분한 상태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부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용호검문은 주원호의 오른팔 격인 유천룡의 가문이다. 게다가 주원호의 집안과 용호검문은 오래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그런 곳의 장남인 유건이 납치되었다는 건 그 책임이 모두 자신의 무게로 짓눌린 것이다.
도저히 냉정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건을 풀어 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전주께서 우리의 일에 협조를 해 주시면 그리하겠습니다."
율무천은 지지 않고 주원호에게 대항했다. 그로서는 현재 잃을 것이 없었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면 사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계획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며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
율무천은 그렇게 믿고 있었기에 사우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돕는 것이다. 그의 작전에는 검룡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꽤나 중요하기에 이런 수고를 하고 있었다.
"진정. 공자께서는 이렇게까지 비열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원하는 걸 취하여야겠습니까."
자존심을 긁는 주원호의 비아냥거림에도 율무천은 끄덕하지 않았다. 너는 지껄여라,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릴 테니. 뭐, 이런 식의 태도였다.
그런 율무천의 태도에 주원호는 그가 가벼이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공자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 사우라는 자가 그토록 원하는 일이 대체 무엇인지나 들어 보죠."
"현 남북천맹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뒤집어 놓는다?"
"네. 썩은 물을 모조리 버려 버리고 새로운 것들로 다시금 채울 생각입니다. 저도, 사우도."
"허어!"
기가 차다는 듯 주원호가 헛웃음을 흘린다.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남북천맹이라는 단체는 수십 곳의 문파들이 한데 모여서 만들어 낸 곳이었다.
율무천이 말한 것처럼 새로운 물갈이가 결코 이루어지기 힘이 든다. 자신 또한 현재 남북천맹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너무나 오랜 시간 원활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바뀌어야 하는 일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 남북천맹은 그날로 사분오열 될 것이 확실했다.
남북천맹의 문제점은 그 누가 봐도 심각했다. 율천세가 살아 있을 적에도 그러했다. 맹주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고 사대검문을 중심으로 한 각자의 이권 다툼에만 목을 매달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얇디얇은 줄만을 부여잡은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북천맹에 애정이 남다른 주원호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든 뒤에서 바꿔 보려 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워낙 많은 단체가 모여 있었고 그들의 제대로 된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낸 주원호는 결국 포기하고 밖으로만 떠돌아다녔다. 분명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남북천맹을 더 이상 지켜보기 힘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검룡전을 이용하여 선두로 총타를 점령한다고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 일이 문제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있는 겁니까."
"그것까지는 저 또한 모릅니다."
"하…… 하하하! 이거 참. 언제부터 남북천맹 맹주의 자제 분이 듣도 보도 못한 놈의 심부름꾼이나 하고 계셨습니까."
"뭐라고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전 이번 일에 제 자존심 같은 것은 일찍이 버렸으니까요."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긁었는데도 상대방은 무반응이었다. 주원호는 내심 율무천의 현재 태도를 높게 생각했다.
그만큼 그가 이번 일을 가벼이 마음먹고 행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아주 작정을 하고 남북천맹을 들어 엎으려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율무천이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용의 자식이다.
지혜가 부족하지도 않은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정도로 절실하다면 해 볼 만했다.
하지만 쉽게는 결정 내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자신만 필요하다면 율천세의 죽음 뒤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단번에 참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하들까지 끌어들여야만 하는 일이다. 일이 잘못된다면 그들의 목숨은 장담하지 못한다. 또한 구족까지는 아니더라도 가까운 친척들까지 목숨이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가 있었다.
자신의 목숨에는 미련이 없지만 그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이기에 주원호는 망설이고 또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제게 해 주신 적이 있죠."
"……!"
"남북천맹 내에서 가장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무력단체는 검룡전뿐이라고. 그리고 검룡전주는 천룡원주만큼이나 믿어도 되는 존재라고 말이죠."
그 말에 주원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듣기 싫은 말은 아니군요."
* * *
사마련이 대막검문을 시작으로 남북천맹과의 전쟁을 선포한 지 나흘이 흘렀다. 하지만 사마련은 대막검문이라는 거대한 산을 쉽게 넘지 못했다. 남북천맹으로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일이었다.
그들이 대막검문이라는 산을 넘었다면 바로 총타로 들이닥쳤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혈천마성과의 연합작전으로 인해 남북천맹에게는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도 대막검문이 제 역할을 해 주어서 숨 고르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막검문의 가주 진천남은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며칠째 남북천맹 총타에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자신의 가문을 믿는 것인지 그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한 채 사마련을 상대하게 했다.
오만이라면 오만이었다.
대막검문이 워낙에 베일에 가려져 있었고 그 강함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 사마련의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약한 힘을 갖고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진천남에게 중요한 것은 맹주가 자신의 아들인 서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각 문파의 수장들이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검룡전주와 율무천이 또 한 번 접촉했습니다."
진천남은 수하의 보고에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잦군."
"예. 아무래도 뭔가를 꾸미는 모양입니다."
"흐음."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검룡전주…… 주원호와 율무천이라. 하긴 주원호는 율천세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으니까."
"허면 어찌 진행할까요."
"천룡원 전원과 만난다. 조금 서둘러야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눈 자들에게도 소식을 전해."
"존명."
수하가 사라지자 진천남은 자리에서 일어서 창가로 갔다.
"이대로 당하고 있지 않으시겠다. 후훗. 절대 그렇게는 되지 않지. 나 진천남이 있는 한."
진천남은 다음 날 일찍 천룡원 인물들과 만나기 위해 처소를 나왔다.
"음?"
헌데 진천남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로 인해 걸음을 뚝 멈춰 세웠다.
진천남의 표정이 바뀌었다.
싸늘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여 버릴 듯한 얼굴이었다.
이곳이 남북천맹 총타가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여기서 보니 반갑네."
사우는 이죽거리며 진천남의 앞에서 말했다.
"다시 봤을 때는 꼭 죽여 버릴 거라 다짐했는데 말이야."
"그래?"
사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곤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린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태도다.
진천남이 그러지 못한다는 걸 알고 한 행동이었다.
특히나 장소가 남북천맹 안이다. 많은 이들이 그의 진정한 신분을 모르고 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진천남은 검옥의 수장이다.
검옥은 흑천살막이라는 커다란 단체가 내린 명령을 오랜 시간 수행해 왔다. 바로 중원을 관리하는 게 그것이다.
흑천살막은 세상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 그저 무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검옥을 이용하여 뒤에서 천하를 움직이고 지배한다.
그들의 입김 한 번이면 중원 존재하는 중소방파들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만큼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사우의 존재를 살려 두라고 했다. 진천남은 그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놈을 눈앞에 두고도 찢어 죽이지 못하는 상황에 속이 뒤집히는 것이다.
"사망총이 중원 나타난 건 알고 있나."
"그걸 내가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난 내 일만을 하면 되는 것이다."
"애써 태연한 척 연기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사망총이 중원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분명 흑천살막도 뭔가 변화가 일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
사우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는 태도였다.
"게다가 십절무황이 아닌 그의 딸이 총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아?"
사우는 진천남의 대답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답변 따위는 애초에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뭐, 나에게는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 일이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 뭔 줄 알아?"
성큼성큼 진천남의 가까이 다가갔다.
"네놈과 검옥…… 그리고 네 윗대가리에 있는 놈들…… 세상에서 지우는 게 중요하거든."
"크크큭. 노옴. 명줄이 붙어 있는 동안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어라. 그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말이다."
"하하!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이 지루한 싸움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결판이 나겠지. 내가 뒈질지 형을 죽인 놈이 내 손에 뒈질지 지켜보라고. 그 전에 네놈 목이 먼저 떨어질지도 모르겠다. 율무천이 지 아버지를 죽인 놈을 찾으려고 벼르고 있거든."
사우는 여유 있게 진천남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자리에서 떠나갔다.
"앞으로는 등을 쉽게 보이면 안 될 것이다!"
등 뒤에서 오는 전음은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