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章 감숙성 전투
"윗선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진천남은 천룡원 소속 원로들과 만남을 가졌다.
물론 살가륵을 제외한 상태였다.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라고 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니 말입니다."
설무랑이 앞에 놓인 차를 입에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정리는 오래 걸려서는 안 된다는 전제 조건이 붙습니다."
"일단 서둘러야 할 일은 맹주의 공석을 채우는 일일 텐데."
한비가 슬쩍 진천남의 눈치를 살핀다.
"예정대로 제 아들이 맹주의 자리에 앉을 것입니다. 그게 여러모로 앞으로의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편할 듯싶습니다."
진천남의 말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설무랑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율무천이 맹주의 자리에 앉는 것과는 조금 다른 취지이지 않습니까."
"혈천마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분명 율무천이 자리에 앉았겠지요. 허나 지금 그 아이는 혈천마성, 사마련과 연합을 취하고 있습니다."
"쯔쯧.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핏덩이가 어디서."
표학은 인상을 가득 써 가며 비아냥거렸다.
진천남의 말대로 혈천마성과 사마련이 잠자코 있었더라면 율무천이 맹주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두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율무천이 맹주가 되어서 뭘 하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혈천마성과 사마련은 남북천맹을 집어삼키려는 것이 아님을 이들은 알고 있었다.
바로 흑천살막을 위협하기 위해 칼을 든 것이다.
그 주모자는 바로 사우였다.
율천세가 그럴 생각을 품었기에 척살된 것이다.
아직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여기 모인 자들은 율무천 또한 곧 자기 아버지와 같은 꼴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현 시점에서는 진천남의 아들 서륜이 맹주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물론 명분이 따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무림사를 관심을 갖고 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또한 남북천맹에 속해 있는 문파와 그 안에 속해 있는 수많은 제자들이 율무천을 원한다.
맹주인 율천세가 그러했듯이 율무천 또한 군중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서륜을 맹주 자리에 앉히고 나서 마음대로 주물러야 하는데 율무천을 따르는 이들이 하나의 세력을 규합한다면 피곤해진다.
게다가 혈천마성과 사마련이 양쪽에서 언제라도 치고 들어올 기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율무천을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좌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죽이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율무천의 존재는 언제라도 필요한 상황입니다. 서륜이 맹주에 자리에 앉은 이후 올 파장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죠. 나중을 대비해서라도 율무천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죽이려고 했다면 진작에 처리했겠죠."
진천남은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괜히 검옥의 수장이 아니다.
비록 흑천살막에서는 가장 하위에 있지만 그래도 명색이 중원을 관리하는 단체였다. 그들을 휘두르는 진천남의 능력은 무공뿐만 아니라 머리 또한 가볍지 않을 수밖에.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이시라 한 것은 본격적으로 제 아들 서륜을 맹주 자리에 앉힐 준비를 시작하고자 함입니다."
"……."
"일단은 저희 쪽으로 끌어들일 사람들을 최대한 모으세요. 거기에 대한 물질적인 자원은 무한대입니다. 그리고 또한 율무천 쪽에 서 있는 자들의 명단을 입수하십시오. 시간은 단 열흘. 오늘 이후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진행합니다."
* * *
유현문(幽玄門).
하남성 천중산 옆에 위치하는 여남이라는 도시에 존재하는 문파다. 유현문은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규모로 남북천맹에서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 있다.
유현문의 문주는 고검풍(古劍風) 석정(石政)이라는 인물로 올해 불혹을 넘긴 중년인이었다. 비록 유현문이 그 세가 작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실만은 튼튼한 곳으로 유명했다.
특히나 고검풍 석정은 검룡전주인 주원호와도 막역한 사이인데다가 세상을 떠난 율천세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음?"
석정은 첫째 아들인 석자청(石紫靑)이 뜬금없이 뱉은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원에서 꽃들을 가꾸고 있던 석정은 아들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청아."
"총타 내 좋지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합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거라."
"율무천 공자가 아닌 대막검문의 장남 서륜을 맹주로 앉히려 한다는 소문들이 나돌고 있습니다."
화초를 쓰다듬던 석정의 손길이 멈췄다.
"오늘 수련 진행은 둘째가 해야겠구나."
"예? 알겠습니다."
정오가 지나고 점심을 먹은 이후 모두가 나른해하는 시각이면 늘 연무장에 모여 석정의 감독 아래 수련이 진행되었다.
헌데 오늘은 본인이 직접 하지 않겠다고 한다.
"따라오거라."
석정은 장남인 석자청과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석자청은 낯설기만 한 풍경에 주변을 연신 둘러봤다.
아버지이긴 하지만 이렇게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현듯 불안하기도 하고 긴장이 되었다.
다른 집 아버지들과는 달리 다정한 성격인 석정이건만 지금만큼은 대하는 것이 힘이 들 정도였다.
석정은 품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어 석자청에게 내밀었다.
"율무천 공자에게서 온 것이다."
"……!"
내용을 확인한 석자청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찌 이런!"
"네가 접한 소문이라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구나. 그래서 율 공자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하시는 거겠지."
"허나 본문이 도움이 될까요."
"비록 유현문이 작고 볼품이 없기는 하지만 신념을 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힘이 되고 안 되고는 중요하지가 않아.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자칫……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석자청은 결코 내뱉기 싫은 단어를 흘려 내보냈다. 이번 일은 그만큼 위험했다. 가늘고 길게 버텨 온 유현문으로서는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말이다.
"그런 것이 무서웠다면 애초에 검 따위는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본문을 지키고 제자라 칭함 받는 저들에게도 가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의 아비이기도 하며 누구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결코 쉽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석자청은 진심을 다해 아버지를 설득하고 나섰다.
누구보다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석자청이기에 필사적이었다. 그런 아들의 설득이 통했을까. 석정은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내 그는 조금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경솔한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큰일이구나."
아버지와의 대면을 마치고 나온 석자청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들어가기 전과 후의 얼굴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날 저녁 석자청은 동생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곤 낮에 있었던 아버지와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 말해 줬다.
집 안 단속을 철저히 하라는 내용을 말한 뒤 석자청은 다시 아버지와 면담을 하기 위해 그의 처소로 향했다.
헌데 사단이 일어났다.
석정이 머무는 처소에서 요란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경비를 서고 있던 제자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무슨 일이냐!"
"도련님! 큰일입니다. 문주께서, 문주께서……."
부친의 거처를 통솔하던 우두머리가 다급하게 소식을 전해 왔다.
석자청이 몸을 날려 아버지의 모습을 봤을 땐 이미 석정의 숨은 끊어진 뒤였다.
목에 긴 상처를 남기고 간 검상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미 즉사한 것이었다.
석자청이 울부짖으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석정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석자청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알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그날 율무천을 따르려던 네 곳 문파의 수장들이 숨을 거뒀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유현문 문주 석정, 풍청문(風淸門) 문주 상웅관(桑雄關), 이룡문(驪龍門) 문주 항룡왕(恒龍王), 복호문(伏虎門) 문주 강연풍(江衍風) 모두 같은 날 비슷한 시간대에 사망했습니다."
석우진의 보고에 율무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모두가…… 아버지의 사람들이신 분들이다."
"맞습니다. 그들이 모조리 암살을 당하셨습니다. 현재 군사이신 사마태릉은 그 사건을 혈천마성으로 돌리시려고 합니다."
"대체…… 누가!"
"천룡원이 움직였어."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담이 작은 사람이라면 기절하고도 남을 일이다. 허나 석우진과 율무천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우는 율무천의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너를 완벽하게 지지해 줄 위인들을 미리 처리한 것이지.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맹주를 누구로 앉힐지에 대한 논의가 벌어질 거야. 물론 그 대상은 네가 아닌 서륜이겠지."
율무천은 석우진에게 나가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가 사라지자 율무천은 낮게 몸을 낮췄다.
"허면…… 이제는 어쩔 생각인 거야."
"어쩌긴 어째. 계획대로 모조리 다 들어엎어야지."
"언제."
"맹주 즉위식이 있는 날."
사우의 전음에 율무천은 자신감을 잃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겠지."
유일한 희망이었던 자들이 모두 적의 검에 세상을 등졌다. 억울하고 분통하지만 자신에게는 힘이 없다. 생판 모르던 사우라는 사내가 없었다면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 같은 존재 정도는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과 상대를 해야만 한다. 무섭고 두렵지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천룡원이 큰 실수를 하나 했는데 말이야."
"……?"
"너를 돕기까지 망설이고 있었을 그들의 마음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되어 버렸지."
"아……!"
기뻐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암살당한 이들은 모두가 아버지와 두터운 인연과 친분을 나누던 사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우의 말뜻을 알아들은 율무천은 작은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암살당한 자들은 모두 일문의 수장들이다. 그들에게 원흉이 누구인지 알려 준다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끼며 복수를 원할 것이다.
오히려 사우와 율무천에게는 좋은 기회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천룡원은 지혜롭지 못하게 적을 없애려다 너무나 많고 확실한 적을 생성하게 된 꼴이 되어 버렸다.
문파의 수장을, 집안의 가장을 잃게 된 그들의 칼날이 제대로 된 방향만 잡게 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무기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천룡원이 직접 움직일 줄은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놈들도 급하긴 했나 보네."
"사우."
"왜."
"난 이번 일에 모든 것을 걸었고……!"
"아, 아. 알아. 다 아니까 그런 지겨운 소리는 집어치워."
불안한 마음을 달래 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사우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결코 위로나 안심시키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다.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사우라는 사내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이 남자는 남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암살당한 인물들의 혈족에게 율천세의 인장이 찍힌 서찰들을 보내. 이후 접선 장소에서 그들과 만난 이후 약속을 잡으면 돼. 호법은 사군악과 담천이 맡으면 될 거고, 거기에 천외백가의 무인들을 붙이면 안전할 거야."
"그렇게 하지. 그럼 넌?"
"사마련과 또 다른 나의 편을 확실하게 포섭해야 하겠지."
"또 다른 편?"
"지금은 알 것 없고. 너는 일단 당장 오늘 밤에 떠나."
율무천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사마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서륜은 일찍이 잠에서 깨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늘 부지런했다. 의지가 없었을 뿐이지 서륜은 항상 자기 관리만큼은 철저히 해 왔다.
아도왕 서패우의 보고에 서륜은 하품을 하며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 날씨는 꽤나 쌀쌀했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서륜의 태도는 지나치게 여유가 있었다. 서패우는 그런 서륜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뒤에서 기다릴 뿐이다.
"어제 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어. 조만간 사마련이 다시금 움직일 것이라고. 역시 노는 물이 달라서 그런지 정보가 장난 아니게 빠르지?"
"정보가 빨라서가 아닙니다. 문주께서는 적들을 완전히 파악하고 예측하시는 겁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
"또 하나. 사마련과의 전쟁에서 손을 떼라고 하시네. 그리고 하루속히 총타로 들어오라고 말이야."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내가 맹주가 된다?"
서륜은 웃기만 했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자신의 미래 모습이다. 그저 가문과는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게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많은 이들 위에 군림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자신에게 만족을 줄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상황은 너무나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맹주로 앉히겠다, 선포하셨고 마음먹은 이상 기필코 해내고야 마는 성격을 알고 있는 서륜은 마음이 심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서패우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서패우는 서륜만큼이나 맹주 자리가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그를 오랜 시간 지켜봐 왔고 아버지인 서문륭의 뒤를 이어 가문을 빛낼 재목으로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도왕."
"예."
"내가 만약 아버지를 배신하고 떠난다면 어찌 될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답해 봐."
"도련님의 부친 되시고 제 주군이 되시는 문주께서는 냉철한 분이십니다. 혈육이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칼을 겨눈다면…… 베실 것입니다."
"후후훗. 내가 생각한 대로네. 그럼 하나만 더 물을게."
"예."
"아도왕은 아버지가 날 죽이라고 명령한다면 날 죽일 수 있어?"
서패우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고 말이다.
헌데 그렇게 섬뜩한 질문을 서륜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서패우는 소름이 돋았다.
냉철함으로는 아버지를 뛰어넘는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서륜이 이런 류의 질문을 한 의도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신 겁니까.'
서패우는 서륜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암혼전주 관유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앞에는 서륜이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다.
관유는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서륜은 평소에 너무나 밝고 웃음이 많은 사내였다. 수하들에게도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 주던 이였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바로 피가 튀기는 싸움이 벌어졌을 때뿐이었다. 그 장소가 아닌 곳에서는 늘 웃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헌데 지금은 아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음 심장을 지닌 사람처럼 보인다.
"사마련은."
"현재 세 곳으로 나누어서 이동 중입니다. 현재 저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동북쪽에서는 살락원이. 북쪽으로는 멸천대와 혈천대. 서쪽에서는 사마련주 지청화가 직접 이끄는 화예대가 이동 중입니다."
사마련에 핵심 무력 조직 전체가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마련은 이번 기회에 감숙성에 지배자인 대막검문과 전면전을 할 셈이었다.
대막검문이 무너지면 바로 남북천맹 총타가 있는 섬서성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새롭게 구성된 사마련의 힘은 아직 예측하기가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대막의 주인인 서문륭이 총타 내에 벌어지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부재중인 상황에서 모든 책임은 서륜에게 짊어졌다.
경험이 꽤나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서륜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오룡문은."
"반나절이면 저희와 합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락원에게 개박살이 난 오룡문은 소수의 인원만이 살아남아 대막검문과 사마련을 상대하기로 했다.
"인원은 약 팔십 명가량으로 추정됩니다."
오룡문은 감숙성에서 꽤나 영향력이 높았던 문파였다. 그들이 살락원을 격파시킬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생각 외로 처참하게 짓밟혔다.
겨우 살아남은 인원이 팔십 명이라는 건 그만큼 사마련의 전력이 상당히 강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비록 살락원이 암혼전과의 격돌에서 후퇴를 했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그들이 감숙성을 먼저 공략하는 데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가장 뚫기 힘들고 어려운 곳인 만큼 반드시 감숙성을 차지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사마련의 정예들이 몰려오고 있었기에 대막검문으로서는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엄청날 수밖에 없으리라.
"암혼전주."
"예."
"오룡문과 합류하여 살락원을 상대한다. 아주 비열하고 치사하게. 더럽고 추악한 방법으로 이겨라."
"……!"
관유는 물론 서패우 또한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한 문파를 이끌어 가야 할 존재로부터 나올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락원을 전멸시키지 못한다면 암혼전주 관유의 목숨은 없다. 또한 오룡문을 미끼로 내던지는 것을 허락한다."
그의 말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무림이라고는 하지만 정이 있고 의가 있는 곳이 바로 강호라는 세상이었다.
남북천맹의 네 개의 기둥 중 하나인 대막검문의 장남으로서 할 소리는 절대로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서륜은 냉정하게 말했다.
서패우는 뭔가 그에게서 심경의 변화가 생겼을 것이라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 또한 예감할 수 있었다.
세상을 질식시킬 것같이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빛이었다. 총 이백이십 명이 그런 옷을 입은 채로 걷고 있었다.
모두가 검을 차고 있었는데 절반은 여자, 절반은 남자로 보인다. 그들 무리의 가운데에는 커다랗고 화려한 가마가 존재한다.
바로 이들을 이끌고 있는 신분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잠시 쉬어 가겠습니다."
"알겠어."
행렬의 이동이 멈춰졌다.
동시에 가마에서 여인이 내렸다.
"지금부터는 가마를 버린다."
"예."
가마에서 내린 여인은 다름 아닌 사마련주 지청화였다. 그리고 그녀가 대동하고 나선 무인들이 바로 화예대였다.
화예대는 사마련의 꽃으로 불린다.
새롭게 편성된 조직이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이 바로 화월문에 몸담았던 무인들이다.
특히나 화예대를 총책임하고 있는 이는 혈화를 이끌었던 혈화장 여홍이다.
지금까지는 천천히 이동했지만 이제는 안 된다. 바로 사천성과 감숙성 경계 부근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이제 감숙성으로 넘어가는 시점이기에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여홍의 팔 위로 전서구 한 마리가 와서 앉았다.
"천기전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대막검문에 대한 보고였다. 자신들을 맞이하는 상대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대막에서 움직였나요?"
평소 먼저 질문을 하는 경우가 없는 여홍이 물었다. 그녀도 이번 싸움에 사마련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믿는 것일까.
조급함이 엿보인다.
"살락원은 이번에도 암혼전이 맡기로 했나 봐."
"그렇군요."
"오룡문은 대막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이라고 하고."
"남북천맹에서는 지원군이 오질 않나 보군요."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거겠지. 그리고 혈천마성까지 신경 써야 하니 일단은 대막검문에게 우리를 맡기는 것이고."
"게다가 살락원이 한 번 후퇴를 하자 여유를 부리는 거군요."
"그렇겠지. 그게 자기들 무덤 파는 꼴이라는 걸 곧 알게 되겠지만."
지청화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비록 연합체제에서 하나의 단체가 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그 힘은 약하지 않다고 믿었다.
실제로 사마련은 사천성 최고의 문파들이 모였으니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하지."
"예."
화예대가 다시금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감숙성으로 진입했을 때 날은 저물어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낡은 객잔에서 전부 묵을 수 없기에 두 장소로 나누어야만 했다.
마치 그런 화예대의 행동들을 꿰뚫고라도 있는지 마을 주변으로 일단의 무리가 조금씩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물론 화예대를 이끌고 있는 이가 바로 지청화였기에 적들의 그런 작전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변으로 정찰과 보초를 세워 뒀다.
하지만 상대는 그들보다 훨씬 강했다.
어둠과 동화되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와 화예대 무인들의 목숨을 끊었다.
소음이라고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
화예대 소속 무인들은 결코 이류나 삼류가 아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대접 받을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헌데 너무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은 상대의 무공이 가히 절정이었기 때문이다.
"전원 처리했습니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는 엄청난 장신의 인물이 지청화가 묵고 있는 숙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전설의 야차(夜叉) 형상이었다.
"겨우 이 정도인 놈들 때문에 본옥이 나섰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 말이다."
낮은 저음에다가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혈왕께서 직접 명령을 내린 일이라 왔지만 께름칙한 건 사실이지."
"허나 그래도 대막검문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 봤자 겨우 중원의 문파다. 본옥과 검옥이 연계하여 나설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지."
야차의 가면을 쓴 이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랜 시간 그는 중원의 무인들을 깔보고 무시해 왔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전부인 줄 알고 기고만장하고 있는 꼴들이 우스웠다.
새외에는 중원 무림인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강자들이 모래알처럼 많은데 말이다.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그들이 바보 같았다.
"진천남에게 소식을 전해라. 아수귀옥(阿修鬼獄)이 나선 이상 사마련은 감숙성을 뚫고 지나지 못할 것이라고."
"복명."
"기습!"
지청화는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복면인들을 향해 검기를 뿌렸다. 워낙 순식간에 펼친 공격이라 자칫 내상을 당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하압!"
여홍이 지청화 앞을 막아서 복면인 세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했다.
'강하다.'
여홍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복면인들을 처리하긴 했지만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들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밖에 몇이나 있는지 미지수다.
"련주. 피하세요."
"일단 화예대 전부를 한 곳으로 모아야 해."
지청화는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여홍 또한 망설임 없이 그녀를 뒤따랐다.
골목 사이사이, 그리고 지붕을 가리지 않고 칼부림이 일어났다.
지청화는 화예대를 한 곳으로 모으려는 생각을 버렸다. 자신의 괜한 명령으로 화예대 무인들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냥 대충 훑어봐도 복면인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집중을 해도 그럴진대 자칫 자신의 명령 때문에 집중력을 잃을 수가 있다.
"대막의 무인들은 아닌 듯합니다."
"대체 누구라는 거야."
휘익!
순간 지청화의 볼을 화살이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한쪽 얼굴을 뚫렸을 것이다.
지청화와 여홍의 시선이 화살이 날라온 곳으로 향했다.
"제법인데, 계집."
새빨간 핏물의 색을 지닌 야차의 가면을 쓰고 있는 이는 커다란 혈궁을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혈궁의 크기는 야차 가면을 쓴 이의 체격으로는 도저히 들기 힘들 정도로 컸다.
헌데 그는 한 손으로 혈궁을 들고 있다.
상대가 다시 한 번 화살을 혈궁에 메기려 하는 순간 지청화의 신형이 위로 솟구쳤다.
"흠!"
가면을 쓴 이, 아수귀옥의 염화궁신(炎火弓神) 풍공(馮空)은 뒤로 몸을 뺐다. 지청화의 신법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신중을 기한 것이다.
"여홍. 아래를 부탁해."
"예."
여홍은 지청화가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은 화예대를 진두지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여홍의 지휘 능력을 믿는 지청화는 이제 가면 사내와의 승부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궁을 쓴다면 접근전이 필수. 빠르게 돌진하는 수밖에.'
망설임 없이 지청화는 풍공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하하! 그렇게 덤벼드는 계집은 매력이 없다고!"
풍공은 여유롭게 지청화의 공격들을 피했다.
궁이라는 병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가장 절대적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 보법이라는 것이다. 장거리에서 공격을 하는 건 몰라도 근거리에서 궁이라는 병기는 공격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화려하기보다는 실속 있는 보법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벌려야만 한다.
풍공이 익힌 현월보(弦月步)라는 보법만큼이나 궁이라는 병기를 쓰는 이에게 좋은 것은 없었다.
스팟!
지청화의 옷자락이 갈기갈기 찢겼다.
먼 거리에서는 오른손으로 혈궁을, 접근전에서는 왼손으로 짧은 단도를 이용한다는 걸 지청화는 몰랐다.
"운이 좋아, 계집."
풍공의 웃음소리가 지청화는 너무나 소름 끼치게만 들렸다.
그의 태도는 어른이 아이에게 한 수 가르쳐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지청화는 그런 상대의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적을 벨 목적으로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음?"
악착같이 따라붙던 지청화가 움직임을 멈추자 풍공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뭔가 대단한 걸 보여 주려는 것인가."
그의 시선이 지청화의 작은 몸짓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순간 지청화의 검신이 색을 띠기 시작했다.
자홍빛이었다.
"호오!"
풍공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랬던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자홍성락."
하늘을 향해 뛰어올라 회전하는 그녀의 무위를 보게 된 여홍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화월문주에게만 전해진다는 성무검법의 가장 파괴력 있는 초식이 지금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피해라!"
"크크큭."
풍공은 폐허로 변해 버린 주변을 둘러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사망자가 열 명입니다."
"나 염화궁신이 이끄는 부대에서 열 명이나 사망자가 나왔다? 그것도 중원도 아닌 변방의 무인들에게?"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이 중원을 무시했던 만큼 말이다.
"변수가 많았을 뿐입니다."
그랬다.
지청화가 펼친 자홍성락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상대를 얕잡아 본 대가로 풍공은 귀 한쪽이 떨어져 나갔으니까 말이다. 실로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비록 아수귀옥 내에서 서열이 높지는 않지만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그 자긍심은 풍공이라는 무인에게 있어서 전부였다.
헌데 사천성 연합의 무리인, 그것도 여인과의 싸움에서 신체 일부분을 잃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을 일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직접 피부로 느꼈음에도 자존심이 인정을 하지 않는다.
"후우. 어찌 옥주를 뵌단 말이냐."
자신의 자존심은 이미 밟혔다. 다시 찾으면 된다. 허나 하늘로 섬기는 아수귀옥 옥주의 명예는 땅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하찮은 자신이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행위인 것이다.
흑천살막을 떠받치는 다섯 세력에게는 서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낮건 높건 서로에게 군림하기를 원한다.
그 세가 약하다고 알려진 검옥의 옥주 진천남이라고 할지라도 절대 우위에 있는 다른 세력의 수장들에게 고개를 꺾지 않는다.
그게 다섯 세력의 수장들이었다.
헌데 자신의 주인 얼굴에 먹칠을 한 꼴이다.
할복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목숨을 끊는다고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어떻게든 화예대를 뒤쫓아 모조리 도륙해야만 한다. 그것이 짓밟힌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풍공은 서둘러 수하들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놈들…… 대체 뭐였을까요."
지청화가 자홍성락을 펼친 이후에도 흐름은 바로 자신들에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무리들 때문에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화예대보다 강했다. 몸놀림을 비롯해 사람을 죽이는 데 힘을 쓰기보다는 기술적이었다.
말처럼 쉽지가 않은 일이다.
수많은 실전을 치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움직임들이었다.
"혈천마성."
그들밖에 없다.
아마도 혈천사가의 무리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감숙성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남북천맹을 공략하기에도 버거울 것인데 감숙성까지 인원을 뺀다는 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마련과 혈천마성이 연합을 이룬 이상 사마련은 감숙성을 공략, 혈천마성은 총타 주변을 공략.
이후 힘을 합쳐 총타를 박살 낸다.
그들의 계획은 그것일 것이다. 대막검문이 강하긴 해도 사마련으로 어찌어찌해 봤을 터인데 중간에 혈천마성의 힘을 분산시킬 이유는 없다.
결론은 하나다.
"우리가 나타날 걸 알고 있었다는 건가. 그 사우라는 망나니 자식이?"
정보가 샌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식으로 혈천사가 중 하나가 등장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대막검문과 연계하여 놈들은 잡는다."
"복명."
'지옥이 어떤 건지를 보여 주마.'
그 시각 율무천은 하남성에 도착해 있었다. 안휘성과 호북성을 들렀다 마지막으로 하남성을 통과해 총타로 갈 예정이었다.
빡빡한 일정 덕분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잠자리도 없었던 터라 율무천과 그의 호법으로 따라온 사군악, 담천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사군악이 음식을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간단하게 율무천과 담천이 몸을 씻고 나왔다.
"아, 이거."
사군악은 하품을 하며 율무천에게 작은 쪽지를 전해 줬다.
"저기 저놈이 전해 주던데."
사군악이 눈짓으로 바쁘게 음식을 나르는 점소이를 가리켰지만 율무천은 쳐다보지 않았다. 지금껏 이동을 하는 동안 사우에게서 온 소식은 늘 이런 방법이었으니까 말이다.
익숙해져 있었다.
이동 중에 들은 것이지만 혈천마성의 정보는 환희루라는 곳을 중심으로 전해진다고 들었다. 환희루는 율무천도 들어 봐서 알고 있었다.
천하삼대루라고도 불리는 환희루였다.
넓디넓은 중원 천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유흥단체라면 그 정보력이 단연 뛰어날 것이다.
율무천은 쪽지 내용을 살폈다.
"흐음."
꽤나 심각한 내용인지 율무천은 안색을 굳힌 상태로 읽어 나갔다.
"뭐야. 무슨 내용인데."
음식이 나오자 사군악은 미친 듯이 접시를 비워 나가고 있었지만 담천은 율무천의 얼굴을 살폈다.
"천산검문으로 가라는 내용이야."
"……!"
순간 사군악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진정해라."
담천의 전음 따위는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크크크큭."
사군악이 광소를 흘리자 율무천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웃음에서 짙은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군악. 그만해라."
담천의 낮은 음성에도 불구하고 사군악의 살기는 잦아들지 않았다. 다행히도 멀리까지 기운을 내뿜지 않아 주변 사람들의 주목은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군악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치 이전의 행동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럴 일이 있어."
율무천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얼버무린 담천은 왜 사우가 그런 행동을 지시했는지 의아해했다.
"사우가 왜 우리더러 천산으로 가라는 거지?"
"여기 적혀 있는 내용에는 천산검문을 우리 편으로 만들라는 거야."
"미친놈."
사군악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이 함께하고 있는 와중에 천산검문으로 가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날 밤 사군악은 담천과 같은 방에서 묵게 되었다.
"나 그만두련다."
"뭐?"
"그만둔다고. 사우 그 머저리 같은 놈의 시종 노릇 하는 거 말이다."
"진심이냐."
"어."
사군악은 천장을 보고 누워 있다가 등을 돌렸다.
"이참에 화진천…… 그놈 모가지를 베어야겠다."
"그런다고 해도 넌 살아남지 못해."
"이 빌어먹을 세상…… 오래 살고 싶지도 않다."
담천은 불안해졌다.
그렇게 복수를 원하던 대찰영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혼자의 힘으로는 어떤 복수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사우를 따르는 것이었다. 헌데 사군악은 이제 그것을 거부하려 한다. 자신감이 있어서일까. 아니다. 분명 실패할 것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다.
헌데, 이제 지친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복수라는 일념 아래 달려온 지가 벌써 수년이나 지났다. 지칠 만도 했다. 그런 와중에 복수의 대상과 접촉할 기회가 있다는 건 상당히 달콤한 일이리라.
사우는 그런 걸 예상하지 못하고 명령을 내린 걸까. 아니면 사군악에 대한 신뢰가 높아 자신의 계획에 방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는 것일까.
전자든 후자든 상관은 없다. 중요한 건 사군악을 만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이 생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 *
"반갑습니다. 제 소개를 하자면 전 혈천사가의 하나인 용황신가(龍皇神家) 가주 용경(龍景)이라고 합니다."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애꾸눈의 사내 용경은 사마련주 지청화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지청화는 확실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겉표정은 도도하기 짝이 없다.
자칫 건방지게 보일 정도였다.
생명을 구함 받았음에도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용경 또한 그런 그녀의 태도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사마련과 혈천마성, 두 단체는 언제라도 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하기 때문에 손을 잡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리라.
지청화가 놀란 건 바로 용경과 그가 이끌고 온 무인들의 무위 때문이었다. 혈천사가가 강하다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특히나 자신이 전력을 다해야만 목숨을 끊을 수 있었던 혈궁의 사내를 장력으로 부상을 입히곤 퇴각을 도왔다.
사마련의 전력 중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화예대를 궁지로 몰고 간 적들을 용황신가의 무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싸웠다.
그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사우가 보냈나요?"
혈천마성의 전력 일부를 이곳으로 돌릴 정도로 여유가 있는 줄은 몰랐다.
"예. 그분께서는 대막검문이 아닌 다른 적들이 사마련을 공격할 것이라 하시면서 저희를 급히 보내셨습니다."
'사우는 분명 본련에게 감숙성을 맡겼다. 헌데 이렇게 급히 보냈다면 그들…… 분명 그들이다.'
사우가 말했던 자들…… 천하를 무시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 말이다.
헌데 사우는 그걸 어찌 알았을까.
용경이라는 사내가 알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꽤나 힘들어질 듯싶습니다."
"……?"
"뒤에서는 그들이 공격해 올 것이고 앞으로는 대막의 혈육 서륜이 나타날 테니까요. 련주께서는 실수를 하나 하셨습니다. 사마련의 전력은 절대로 분산시키지 마셨어야 합니다. 본진을 가장 두텁고 강하게 만들고 좌우는 태청문과 창천문을 이용하여 흔들었어야 합니다."
대막검문을 얕봤던 건 사실이었다.
"사우 대공자께서 이렇게 전하라고 그러시더군요."
"건방진!"
여홍이 불같이 화를 냈다.
"괜찮아. 맞는 말이니까."
"하지만, 련주."
"후우. 내 실수였어. 대막검문을 너무나 얕본 것이 화근이지. 하지만 멸천대와 혈천대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우리 또한 그렇고. 반드시 감숙성을 접수하고 섬서성으로 향하게 될 거야."